작은 운명 (31)

 

윤석의 친한 친구 차영식으로부터 오랫만에 전화가 왔다. 너무 괴롭다고 하면서 만나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영식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털어놓았다. 영식은 1년 전에 송경희라는 여자를 우연히 만났다. 사람의 운명이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어떤 사람을 만나 생각지도 않았던 관계를 맺게 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사람의 운명이란 정말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길을 나섰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비명에 가기도 하고, 암에 걸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기도 한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긴급체포되어 징역을 살고 나와 보니 사업체는 부도나서 산산조각이 나는 사람도 있다.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도 어느 날 구속되어 감방에 가 있다. 도지사도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여자가 TV에 나와서 폭로를 하면, 얼마 있지 않아 도지사 자리에서 물러나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청을 들락거리다가 2차례에 걸쳐 구속영장이 청구되기도 한다. 그리고 불구속상태로 정식재판에 회부되어 피고인의 신분이 된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하였을까?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아이들이 학업도 중단해야 하고 지하실방에서 고생하는 왕년의 사장도 있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길지도 않은 인생이지만, 막상 살아보면 결코 짧지도 않고, 영고성쇠가 끝이지 않는 험하고 험한 고행길이 틀림없다.

 

지난 해 가을 영식은 회사 일을 예정보다 빨리 마치게 되었다. 회사에는 다시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고, 그렇다고 집에 일찍 들어가 할 일도 없었다. 그런 금요일 오후에 사람들은 마음이 공허해진다.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는 일도 별로 재미가 없다. 되풀이 되는 일상의 일들이란 다람쥐가 쳇바퀴 도는 것이다. 얼마나 재미가 없이 살아가는 것일까?

 

물론 이런 공허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어쩌면 바쁘게 지내고 보람을 느끼면서 하루 하루를 지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어쩌면 더 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영식과 같이 보내고 있다. 직장일이나 하고 집에 오면 TV나 보고 만다. 그냥 식사하고 일상의 대화나 하고 신문이나 보고 잔다.

 

가끔 운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하지도 않는다.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매일 야식을 거르지 않는다. 대학교를 나온 사람이 집이나 직장에서 책 한권 읽지 않는다.

 

주로 스포츠 경기 관람에 취미가 있고, 북한 비핵화문제나 부동산투기억제대책, 최저임금, 택시카풀분쟁 같은 시사적인 문제, 정파싸움의 내용 같은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나머지는 돈 버는 방법, 재테크하는 방법에 골돌히 머리를 쓰고, 평생 시집 한권 사지 않는다. 소설은 그냥 인터넷을 통해 누구 소설이 유명한지, 그 스토리가 어떤지 정도만 상식선에서 파악하고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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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진 운명 5-8

“제가 잘못했어요. 형님! 살려주세요. 안 그럴게요. 은영씨 사건에서 손을 뗄게요.”

“너 같은 X은 죽어야 해. 인간쓰레기야. 왜 사냐? 그만 살 수 없어. 이 나쁜 XX야! 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몰라서 그래. 옛날 같으면 너는 사시미칼로 손을 봤을 거야. 지금은 내가 마음 잡고 조용히 살아서 그래. 근데 아무리 나쁜 인간이라도 왜 하필 돈 없고, 불쌍한 여자 아이들만 상대로 돈을 뜯어내려고 그러냐? 돈 있는 인간들한테 뜯어내지 않고, 은영은 정말 불쌍한 아이야. 이 나쁜 XX야!”

성균은 무릅을 끓고 아파서 신음하는 박기사를 훈계하다가 갑자기 또 정의감이 솟구쳐오르자 구두발로 무릅을 짓밟았다. 그리고 주먹으로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박기사의 눈에서 불이 났다.

또 손날을 세워 목을 내리쳤다. 목이 휘청거렸다. 박기사는 땅에 머리를 바고 엎드렸다. 오늘이 제삿날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임자를 만났다.

“너 마음대로 해. 지금 가서 경찰에 신고를 하든가, 아니면 은영을 만나 사과를 하든가. 알았지? 그리고 이건 은영이 나에게 시킨 건 아냐. 나는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은 마음만 먹으면 손바닥처럼 다 알 수 있어. 너에 대해서는 사실 한달 전부터 내가 뒷조사를 하고 있었어. 알았지? 이 쓰레기야.”

성균은 분이 풀리지 않아서 침을 박기사 얼굴에 몇 번 뱉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박기사는 무척 아팠다. 하지만 경찰에 신고할 입장은 아니었다.

박기사는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며칠 동안 출근을 하지 못했다. 사장에게는 핑계를 댔다. 갑자기 지독한 감기 몸살이 들어서 꼼짝 못하고 누워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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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진 운명 5-7

“박기사는 내 애인이었는데, 내 친구인 은영을 강간하고, 그래서 나와 헤어졌어. 그런데 그 후 은영이 아이를 가졌는데, 그 아이 아빠인 명훈네 집에서 박기사가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어. 그러면서 가운데서 은영의 약점을 잡고, 주인집에서 돈을 뜯어내려고 하고, 은영에게는 1억 원 중 절반만 준다는 거야. 그리고 은영을 만나 나에 대해서도 해코지를 하려고 한 대. 정말 나쁜 인간이야. 그렇다고 내가 만나면 나도 피해를 보게 돼.”

“응. 알았어. 정자야. 걱정하지 마. 내가 처리해 줄게.”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서 성균은 박기사를 만났다. 그러면서 자신은 은영이 친척이라고 소개했다.

“내가 은영을 보호해야 하니까. 당신은 빠져. 알았지!”

“뭐라고! 내가 누군지 알고 당신이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그러면 당신이 은영이를 강간한 것을 내가 고소하도록 할 거야. 그리고 당신 사장을 만나서 내가 당신 비행을 알릴 거고.”

“마음대로 해. 나는 이미 감방도 갔다왔고, 아무 것도 잃을 게 없는 사람이야. 당신도 나를 협박한 부분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거고.”

“나도 감방 갔다왔어. 감방 갔다온 게 무슨 훈장받은 거냐? 좋은 말로 할 때 들어. 신상에 좋을 거야.”

성균은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같아 커피숍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박기사가 성균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먼저 공격을 당하자 성균의 본성이 드러났다. 곧 평소 익힌 무술로 박기사를 때렸다.

박기사는 싸움에는 약했다. 성균을 당할 수 없었다. 엄청나게 두들겨 맞고, 박기사는 무릅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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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진 운명 5-6

‘2017년 12월 3일 염수정 추기경은 서울명동성당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반대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에 참석했다. 추기경은 낙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에 대한 끔찍한 폭력이자 일종의 살인행위라고 말했다.’

TV기자가 보도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은영은 정말 낙태를 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가졌다.

‘낙태는 살인이다. 내가 돈을 받고 낙태를 하면 살인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 은영은 친구들에게 말했다. “절대로 낙태는 없어. 아이를 낳아서 잘 기를 거야. 명훈씨가 결혼을 하지 않아도 좋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은영과 헤어지고 나서 정자는 곧 오래 전에 알고 지냈던 성균을 만났다. 성균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싸움을 잘해 깡패생활을 했다. 그렇다고 아주 큰 폭력조직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

운동을 잘 하고 체격이 크고 인상이 험상궂게 생겼다. 그래서 감방에도 한 번 갔다 왔다. 다행이 돈 많은 이혼녀를 만나서 애인으로 만들었고, 그 여자의 돈으로 노래방을 차려서 지금은 제법 살만해졌다. 정자와 한때 연애를 했었는데, 정자가 마음 잡고 결혼하자, 진정으로 정자가 잘 살기를 바랬다.

정말 의리 있고, 멋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정자가 결혼생활에서도 속상한 일이 있으면 만나서 술을 사주면서 위로해주고, 참고 살라고 도닥거려주었다. 정자는 성균에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박기사의 건에 대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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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진 운명 5-5

은영은 고민이 많아졌다. 일단 현재의 모든 상황을 명자와 정자를 만나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상의했다. 정자에게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 박기사와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하는 수 없어. 박기사를 상대하지 말고, 직접 명훈 아빠 회사를 찾아가서 난리를 피도록 해. 아니면 명훈 엄마 약국에 가서 난리를 펴. 결혼시켜 달라고 하든지, 아니면 낙태할 테니까 3억 원을 달라고 해. 빨리 결판을 져야 해. 이제 6개월이 다 되니까.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어.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결혼은 절대로 할 사람들이 아니니까 그냥 돈을 받고 수술하는 게 좋겠어.”

“아니 그 박기사가 그렇게 나쁜 인간이 되었어! 그냥 둘 수가 없네. 나한테까지 해코지를 하려고 한다는 거지. 좋았어. 내가 손을 볼테니까 연락처를 줘. 은영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이를 낳아.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 돼. 명훈네 돈이 많다면서.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그리고 남자란 일단 아이를 낳으면 완전히 달라져.”

은영은 두 친구와 이야기를 해도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머리 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식당에서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식사를 하는 젊은 부부가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는 인형처럼 귀여웠다.

은영은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우리 아이도 저 애처럼 이쁘고 사랑스럽고 귀여울 거야.’ 그러면서 아이를 낳아야지, 도저히 낙태를 해서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에서 켜놓은 TV에서는 마침 낙태죄폐지를 두고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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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6-1)

정 사장이 아침에 눈을 떠보니 가관이었다. 방안 작은 탁자에는 와인병이 많이 놓여 있었다. 먹다 만 안주도 기분 나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어제 밤 박 과장을 불러서 같이 술을 마신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후 어떻게 된 것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쇼파에는 박 과장이 매고 있었던 보라색 스카프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박 과장에게 어떤 실수를 한 것이 걱정도 되었다. 아무런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잘 모르는 일이라 걱정이었다.

일단 샤워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하려고 나서려는데 손목시계가 없었다. 지갑이나 다른 물건을 다 있는데,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박 과장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없고, 그렇다고 어제 저녁에 방에 들어올 때 분명히 시계를 차고 있었던 기억도 났다. 그런데 시계가 보이지 않으니 귀신이 곡할 일이었다. 그렇다고 박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볼 수도 없었다. 혼자서 10분 이상 다시 찾고 찾았지만 끝내 시계는 보이지 않았다. 정 사장은 하는 수 없이 같이 간 김 이사에게 연락해서 방으로 오라고 했다. 사정을 이야기 들은 김 이사는 곧 바로 프로트 데스크로 가서 정 사장이 숙박하고 있는 방 복도에 설치되어 있는 CCTV를 확인해 보자고 했다. 그런데 밤 1시가 넘어서 박 과장이 정 사장의 방에서 나오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손에는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은데, 복도 주변을 조심스럽게 두리번 거리면서 문을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열고 나와서 급하게 엘리베이터쪽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김 이사는 놀랐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여비서가 왜 그 늦은 시간에 정 사장 방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래서 언제 들어간 것인지 CCTV를 돌려보았다. 박 과장이 정 사장 방으로 혼자 들어간 것은 그러니까 저녁 10시 조금 넘어서였다. 박 과장은 무려 세시간 동안이나 정 사장 방에 들어가 있다가 새벽 1시경에 나와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정 사장 시계가 분실되었다는 것이다.

CCTV상에는 박 과장이 정 사장의 시계나 다른 물건을 들고 나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목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는 것인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긴팔의 불라우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 이사는 정 사장에게 이런 사실을 CCTV에서 확인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김 이사는 다시 정 사장 방으로 올라가서 방 안을 샅샅히 뒤져보았다. 시계는 침대 옆으로 떨어져 벽 쪽 밑에 있었다. 정 사장이 술에 취해 침대 위에 있던 시계를 밀어서 떨어뜨린 것 같았다.

“사장님. 여기 있습니다. 왜 이곳에 떨어져 있을까요?”

“글세, 이상하다. 내가 샤워를 하고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분명히 시계를 풀러놓고 침대로 갔을 텐데...”

“어제 밤에 술을 많이 드신 것 같네요. 이렇게 많은 술을 혼자 드셨습니까?”

“응, 어제는 이상하게 술생각이 많이 나서 혼자 늦게까지 마셨어. 지금 속도 좋지 않아. 그래도 식사를 하러 가지.”

김 이사는 쇼파에 놓여 있는 여자 스카프가 박 과장 것임을 알았지만, 그것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정 사장과 박 과장이 정사를 벌였다는 증거를 확인하기 위해 휴지통도 보았지만, 성관계 뒤처리를 하는데 사용한 크리넥스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김 이사는 겸연쩍기도 해서 시계를 찾아준 다음 곧 바로 호텔 식당으로 먼저 내려갔다. 그곳에는 박 과장을 비롯한 다른 잭원들이 모두 먼저 와서 사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 과장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김 이사나 정 사장 모두 시계사건에 관해서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모든 것은 자연스러웠고, 일행의 스케줄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특이 사항 없이 무사히 일본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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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30)

그러는 가운데 혜경은 마침내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교에 입학했다. 교복에서 자유복으로 갈아입은 혜경을 밖에서 처음 만난 윤석은 흠칫 놀랬다. 마치 천사를 만난 것 같았다. 우연히 대학로에서 만나 함께 찻집으로 들어갔다.

“대학생활이 어때요?”

“지긋지긋한 공부에서 해방이 되어 편해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하려고 해요. 부모님들도 이제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걸 하라고 하셨어요.”

“그동안 시험 준비하느라고 고생이 많았어요.”

“고등학생때에는 잘 몰랐는데, 대학 들어와 보니 선생님이 다니는 의대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공부를 하는지 알게 되었어요. 힘드시죠?”

혜경의 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윤석은 자신이 꿈속에서도 보고 싶어 하던 혜경의 그 미소에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의대공부가 어렵다는 것을 혜경이 알아주는 것 같아 기분도 좋아졌다. 윤석은 혜경과 또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헤어졌다.

그로부터 며칠간 윤석은 번민에 빠졌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표현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워졌다. 그렇다고 어떻게 할 뾰족한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혜경이 시험에 떨어져 재수를 했더라면 자신이 1년간 더 과외지도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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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은 운명 (29)

항상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이런 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두 사람이 똑 같은 생각과 느낌을 공유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개 한 쪽에서 먼저 오바를 하게 된다. 상대방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혼자서 선을 넘어 좋은 감정을 갖게 되고, 혼자 고민하게 된다.

상대방과 자신의 환경이나 여건이 맞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데도 혼자서 상대방과 자신이 잘 맞을 수 있고, 자신이 노력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잡을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열심히 노력하면 처음에는 움직이지 않던 상대방의 마음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무척 어려운 일이고, 설사 그렇게 해서 어렵게 마음을 일시적으로 잡았다고 해서 영원히 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또 문제다. 윤석은 혜경을 혼자 좋아하기 시작했다. 전혀 내색할 수 없었지만, 혜경을 만나는 시간이 기다려졌고, 혜경과 공부를 하는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대개 혜경이 먼저 “벌써 9시가 넘었네요.”라는 말을 꺼냈다. 윤석은 예전과 달리 시계를 보지 않고 열심히 가르치다가 혜경의 말을 듣고 과외지도를 마무리지었다. 혼자 서울에 올라와서 힘든 대학 공부를 하고, 과외지도를 하는 입장에서 느껴지는 외로움과 고통이 혜경의 존재로 잊혀졌다.

거의 매일 쓰던 일기장에 혜경의 이름이 자주 올라가게 되었다. 혜경을 짝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혼자서 꿍꿍 앓고 있던 윤석을 누가 옆에서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 병은 혼자서 깊어가고 있었다.

강물이 혼자 흘러가면서 점차 깊어져 나중에는 아주 깊은 바다의 심연으로 가듯이 윤석의 짝사랑도 시간이 가면서 북한강에서 한강을 거쳐 서해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윤석은 이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어려운 집안을 생각하면서, 빨리 의사가 되어 부모님들의 고생을 덜어드려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쓸데없는 여자 문제에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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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새워 공부를 해도, 외워도 외워도 끝이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윤석은 혼자 쓰는 하숙방에도 늘 학교에서 실습용으로 나누어진 사람의 뼈와 두개골 등을 가지고 와서 밤늦게까지 들여다 보고 공부를 했다. 때로는 무섭기도 했다. 죽어서 마른 뼈가 되어 땅속에 묻히지도 못하고 학생들의 손에 손을 거쳐 학습용이 된 고인들이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다.

학교에는 또 해부용 사체를 처리하는 남자 직원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 사람을 보면 무서운 생각이 들어 멀리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의사가 되려면 이런 과정을 다 거치고 담대해져야 메스를 잡고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사람의 살을 베고 수술을 할 수 있다. 중간과정을 극복해야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들이 흔히 하는 미팅에도 거의 나가지 못했다. 그냥 책에만 파묻혀서 지냈다. 게다가 과외지도까지 해야 했으니 주말이면 몸은 파김치가 되었다.

윤석이 대학교 2학년때 고3 여학생을 과외지도하게 되었다. 여학생인 혜경의 집에 일주일에 세 번씩 찾아가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혜경은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나, 공부에는 별로 취미가 없었다. 부모님들은 대기업의 중역이었다. 혜경의 부모님들은 매우 가정적이었다. 가족들이 외식도 자주 하고, 공연을 함께 가고, 주말에는 지방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혜경은 윤석에게 늘상 가족들이 무엇을 함께 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과외공부를 시작했다. 윤석은 자신이 할 수 없는 분야의 경험을 들음으로써 간접적인 지식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다. 혜경은 아주 예뻤다. 특히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치아는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도 멋을 많이 부리는 편이었다. 윤석이 갈 때마다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윤석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러나 혜경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생활을 해서 그런지, 아니면 많은 남학생들로부터 과외지도를 받아 보아서 그런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과외지도만 받겠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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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7)

윤석이 대학교에 떨어져 재수를 하고 있을 때, 윤석 아버지는 빚을 내서 작은 건물 하나를 지었다. 땅은 70평 정도였는데, 그곳에 2층 건물을 짓고, 3층에는 방 두개를 만들었다. 그래서 윤석은 서울로 올라와 학원에 다니기 전까지는 아버지를 도와 건물을 짓는 일을 도와주었다.

건물이 완성되자 아버지는 1층과 2층은 모두 세를 주었다. 그리고 3층으로 가족 모두가 이사했다. 어렵게 지내다가 아버지 명의로 작은 건물을 짓고, 월세도 받게 되자 가족들은 한숨 돌리게 되었다.

의대에 들어가자 윤석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의술로써 인류의 건강을 지키고, 평생을 봉사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대학교에 다니자 세상이 넓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해부학과 같은 원서로 된 두꺼운 의학서적을 들고 다니면서, 갑자기 아주 중요한 학문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문제집이나 풀고 외우며 시험준비를 하던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수업을 받다가 대학 교수님들로부터 강의를 듣는 것은 상당히 다른 기분이었다. 자유스럽고 낭만적인 대학교의 분위기에 젖어가면서 열심히 의과대학 예과 강의를 듣고 있었다.

지방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을 하면 항상 마음이 뭉쿨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호강시켜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려워진 가정 형편 때문에 윤석은 서울에 올라와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곧바로 과외지도를 했다.

의대 공부를 하랴, 과외지도를 하랴, 눈코 뜰 새 없었지만,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부유한 환경의 다른 학생들이 여유롭게 생활하는 것을 별로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의과대학 공부는 정말 힘들었다. 갑자기 영어로 된 의학적 용어를 수없이 외워야했다. 더군다나 밖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의 신체 내부에 어떤 조직이 있고, 혈관이 어떻게 흐르고, 각 기관이 어떻게 작동을 하는지 알아야 했다.

수많은 신체가 잘못되었을 때 어떤 증세가 나타나고 그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밖에서 보이는 눈과 코, 귀, 손과 발 가슴 등만 피상적으로 보았던 윤석에게 안으로 들어가 신체를 정밀하게 해부하는 공부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미지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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