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38)

 

경희는 자신의 별을 찾아보았다. 서울의 밤하늘은 매연 때문에 별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 경희의 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경희의 별은 이미 폭발하여 지상으로 추락하는 아주 작은 별똥에 불과했다.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순식간에 벌어지고, 그 대가는 가혹하다. 갑자기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떨어진 것처럼 주변 사람이 모두 사라져버린다.

 

아무와도 전화하기도 싫고, 상의할 사람도 없어진다. 그렇다고 혼자 술을 마시거나 차를 마실 마음도 사라진다. 오직 고통스러워 죽고 싶은 마음뿐이다. 순간적으로 깊은 계곡, 그것도 만년설이 쌓인 눈속으로 추락한 작은 존재는, 자신의 운명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것인가를 깨닫는다.

 

그 작은 운명을 손에 쥐고, 조용히 작은 존재로 살았어야 하는데, 그 영역을 벗어났다. 경희 자신에게 신이 부여한 작은 영역을 벗어난 대가는 아주 참혹했다. 에덴의 동산에서 모든 실과는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좋았다.

 

하지만 신이 금지한 선악의 나무의 열매는 가까이 가지 말았어야 했다. 금단의 경계를 무시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 선악과를 땄다. 그리고 냄새를 맡아보고, 입에 넣었다. 혀로 맛을 느끼고 삼켰다. 순간 황홀했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형벌이 내려졌다.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됨과 동시에 인간으로서 모든 짐과 멍에를 걸머지게 되었다.

 

경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부여된 육체를 허용된 영역 밖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이 금지한 쾌락의 시간을 가졌고, 아주 짧은 쾌감의 맛을 보았다.

 

그런 정상적인 영역에서 일탈한 쾌락과(快樂果)가 내포하고 있는 형벌의 의미를 전혀 모른 채, 경희는 지금 실과 하나는 따먹은 죄로 지옥의 문턱에 던져진 것이었다.

 

경희는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만 해도 그랬다. 특별한 걱정이 없었다. 어제 밤에 잠도 잘 잤다. 몸 컨디션도 좋았다. 남편은 보통 기분으로 출근했다.

 

아이도 어린이집에 보냈다. 경희는 혼자 있다가 화장을 하고 외출해서 영식을 만나 점심 식사를 하고 모텔에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영식과 모텔에서 뜨거운 정사를 벌였다. 오래 반복된 행위였지만, 아직 나이가 젊어서 그런지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남편인 철수가 흥신소를 통해 미행을 했고, 모텔 방에 들이닥쳐 불륜의 현장을 들킨 것이다.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려고 시도했지만, 남편은 비밀키 이외에 안에서 단단히 걸어잠그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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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37)

 

철수도 평소 여자를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밖에 나가면 외간 여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노래를 좋아해서 노래방에도 많이 다녔다. 그래서 노래뱡에서 만난 도우미 언니들과 여러 차례 연애를 했다.

 

철수는 그때마다 도우미에게 돈을 주고 성관계를 했다. 그런 일이 여러 차례 경희에게 알려졌다. 하지만 경희는 그런 문제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따지지 않았다. 남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경희 아버지도 늘 바람을 피우면서 살았다. 경희 어머니와 그런 문제 때문에 늘 싸웠지만, 그래로 경희 어머니가 모든 걸 이해하고 참고 넘어갔다.

 

경희 아버지도 바람을 피웠지만, 밖에서 아이는 낳지 않았고, 내놓고 두집 살림도 하지 않았다. 가정은 가정대로 열심히 유지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경희 어머니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것이고, 경희 역시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도 큰 피해는 없다고 여겼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경희 역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던지, 남편인 철수가 외도를 해도 치명적인 상황만 안 만들면, 그냥 넘어가곤 했다

 

경희는 자신이 물론 유부녀로서 바람을 피다가 현장에서 남편에게 적발되었다고는 하지만, 남편인 철수도 혼외정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경희에 대해서만 아주 엄격하게 따지고 문도 열어주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서운한 마음이 솟구쳤다.

 

경희에게는 남편이 너무 무서워졌고, 지금까지 헌신적으로 살아왔던 자신의 인생이 비참해졌다. 남편에 대한 만정이 떨어져 버렸다.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상대의 태도, 특히 남편의 태도에 대해서는 또 다른 시각에서 비판하고 불만을 가진다.

 

사실 부부는 남남이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관계다. 피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좋을 때 좋은 것이지, 관계가 나빠지고 악화되면 남 보다 더 무섭고, 더 냉정해지고, 더 가혹하게 공격을 할 소지가 있다.

 

그래서 치정범죄의 경우에는 일반 폭력범죄보다 더 가혹하게 아내를 살해하거나 폭행을 가한다. 일반 강도살인범죄는 한 두 번 칼로 찔러 죽으면 끝을 낸다. 그리고 물건을 가지고 도망간다.

 

하지만 아내를 살해하는 남편은 아예 사체를 난도질한다. 그것이 치정범죄의 잔혹성이다. 특히 변심한 애인을 상대로 하는 폭력은 잔인하다. 얼굴에 염산을 뿌리거나, 코를 면도칼로 베어버리는 경우, 심지어 남자의 성기를 절단하는 등의 잔인한 범죄는 바로 남녀 사이의 원한과 증오심에서 유래하는 잔혹함이다.

 

경희는 지금 지구상에서 아무 곳에도 갈 수 없는 외로운 별의 신세가 되었다. 그처럼 좁게 느껴졌던 서울이 막상 이렇게 되니 그렇게 넓고 황량한 사막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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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36)

 

부부싸움을 하다 보면 가끔 남편이나 부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열쇠는 가지고 있지만, 안에서 빗장을 걸어놓으면 밖에서는 열 수가 없다. 아무리 벨을 눌러도 안에 있으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정상적이면 밖에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반갑게 반겨주어야 할 부부사이에 이런 상황이 왔을 때 어떤 심정을 느끼게 되는지 아는가?

 

남의 집을 방문했다가 주인이 없어 못 들어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자신의 집이고, 자신이 둥지를 틀고 사는 보금자리다. 그곳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가장 가까운 배우자에 의해 거부당한다는 의식을 느껴 보라. 얼마나 외롭고 세상이 황량하게 느껴지는지? 그때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 반대 당사자의 마음도 똑 같다. 아니 더할 수 있다.

 

그래서 가급적 부부싸움은 하지 말아야 한다. 싸우더라도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몰고가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싸우는 과정에서 서로가 받는 상처가 너무 깊고 크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경희는 자신이 현재의 상태처럼 이렇게 비참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사랑이고 무엇이고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사랑보다는 삶이 중요하다. 생존이 우선이다. 사랑은 사치고 부수물이다.’ ‘내가 어리석어서 소중한 가정을 잠시 잊어버리고 낯선 사랑에 빠졌다. 그 허망한 사랑에...’

현실은 언제나 냉정하다. 겨울 바다가 언제나 추워서 물속에 들어가면 그냥 익사하는 것처럼 현실은 냉냉한 기운이 상존한다. 그런 차가움 속에서 사랑의 온기를 느끼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런 사랑은 현실이라는 냉탕 속으로 던져지는 순간 질식한다.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파괴된다. 모든 사랑의 요소는 형해화되며 분해되어 흩어진다.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쓰레기를 소각하는 매퀘한 악취만 남는다.

 

지금 경희는 사랑 때문에 추락했다. 무서운 늪에 빠졌다. 이런 극한상황에 처한 연약한 실존에 다가가 손을 잡아줄 사람은 지구상에 아무도 없었다. 친구도, 친척도, 가족도 있을 수 없다.

 

오직 혼자다. 경희만이 겪어야 하고, 넘어야 할 벽이었다. 그 벽은 생각보다 높고 단단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흰색이었다. 마치 중범죄인을 취조하는 하얀 페인트만을 칠한 조사실처럼 눈이 부셨다.

 

그것은 희망의 빛이 아니었다. 가능성의 색깔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파멸이고, 죽음이며, 불가능의 상징이었다.

 

이 외로움, 불안감, 어두움을 누구에게 의지해 풀어나갈 지 앞이 캄캄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희가 만나서 상의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희는 밤거리에서 혼자 절규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 비참하게 된 것일까? 모든 것은 환경 탓이다.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다. 모든 것은 남편 탓이었다.

 

남편이 무시하고 삭막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은 그곳에서 살아 남기 위해 탈출했던 죄밖에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일이 잘못되면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환경에서 찾는다.

 

바람을 핀 남자와 여자는 일단은 자신이 바람핀 원인과 이유를 배우자에게서 찾는다. ‘너 때문에나는 완전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고, ‘이탈했다’. 그러니까 나도 잘못했다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 너도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항변한다.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착각하고 억울해 한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배우자도 절반의 책임이 있다고 확신한다.

 

남편도 바람을 핀 적이 있다. 그럴 때 경희는 남편을 눈감아 주었다. 가정을 깨고 싶지 않았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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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은 운명 (35)

 

미안해요. 남편이 이렇게 뒷조사를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어요.”

아냐. 괜찮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잖아요. 그나저나 남편이 저렇게 흥분해 있으니, 집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지 않아요?”

글쎄요. 위험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알까봐 걱정이예요. 그렇다고 집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고, 큰 일이예요.”

그래도 집에 들어가서 용서를 빌고, 조용히 있어요. 그게 나을 것 같은데...”

그럴 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나는 좀 더 있다가 들어갈 게요.”

위자료 5천 만원은 내가 혼자 알아서 물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미안해요. 당분간 연락하지 않을 게요.”

그래요. 당분간 서로 연락하지 말고 지내요. 그게 안전해요

 

경희는 현재 상황이 그래서 연락하지 말자고 말을 꺼냈지만, 막상 영식으로부터 서로 연락하지 말자는 말을 듣자, 갑자기 울컥했다. ‘이런 사람을 믿고, 내 몸과 마음을 주었다니, 정말 실망이다. 남자가 저렇게 밖에 말을 할 수 없는 것일까?“

 

경희는 여자이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 그렇게 말을 한 것이었지만, 만일 경희가 남자의 입장이었다면, 경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당분간은 조용히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내가 책임질 것이니, 기다려요. 이혼을 하든 안 하든, 우리는 장난한 것이 아니니까. 서로 변하지 말고 기다려요.‘ 이렇게 말을 했을 것이다. 그게 남자로서 한때 사랑했던 여자에 대한 도리가 아닐까? 그런데 영식은 남자답지도 않고, 정말 경희를 사랑해던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더욱 경희를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경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싫어졌다. 경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영식의 휴대전화에는 부인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있었다. 심지어 음성메시지까지 남겨져 있었다. 부인은 영식이 아무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가지 않으니 몹시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영식의 부인은 얼마나 딱한 처지인가? 남편을 가장이라고 믿고 자식들과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는 여자였다. 남편이 자주 늦게 들어오고 조금 수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별로 신경 안 쓰고 있었다. 설마 다른 여자와 모텔까지 들락거릴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남편은 지금까지 아무리 늦어도 전화는 꼭 해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게까지 전화연락도 없이, 전화를 받지도 않고 소식이 없으니 무슨 사고를 당했는지 걱정이 되었다.

 

부부란 일심동체이며, 평생 동고동락을 하는 공동생활체다. 내것 네것 없이 뒤섞여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생활하는 무촌(無寸) 관계다. 그래서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항상 부부사이에서 먼저 말하고 함께 좋아하고, 함께 걱정하게 된다.

 

그런데 영식의 일은 전혀 달랐다.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인데도 정작 가장 가까운 부인에게는 말을 꺼낼 수 없는 성질이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가? 자신도 막상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리 속은 완전히 하얗게 비어있는 것 같았고, 세상은 온통 까맣게 먹구름이 끼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슬픔이 강물처럼 밀려들어왔다. 그 슬픔의 강물에 영식은 파묻혀 멀리 멀리 떠내려가고 있었다.

 

외로운 영혼이 자신의 육신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영식은 일단 집에 들어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경희는 남편을 만날 면목도 없고, 남편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다고 집에 들어가지 않고 외박을 했다가는 일은 더 커질 판이었다. 그래서 일단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경희는 집 앞에 이르러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남편은 받지 않았다.

 

집에 가서 벨을 눌렀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집에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 같은 데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친정집에 알릴 수도 없었다. 영식은 이미 집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경희는 혼자서 어디 갈 곳을 잃은 철새가 되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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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1)


정현은 윤석을 먼저 보낸 다음 호텔 로비라운지로 가서 커피를 시켰다. 역시 창가로 자리를 잡고 어두워진 밤하늘과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술기운이 강하게 솟구쳤다.

 

그래도 정신은 아주 또렷했다. 정현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 유미와 지냈던 시간을 떠올렸다. 로비라운지 중앙에 그랜드 피아노에서는 어떤 사람이 월광소나타를 들려주고 있었다. 피아노를 치는 여자의 모습이 유미와 오버랩되고 있었다.

 

정현은 시험공부를 하면서도 유미와 가끔 만났다. 만나면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다. 둘이서 남산으로 가서 걸었다. 걸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공감했다. 같이 있다가 헤어지면 또 보고 싶었다. 정현은 자신이 마치 피아노를 전공하는 사람처럼 피아노에 몰입했고, 유미 또한 자신이 고시공부를 하는 것처럼 고시생을 이해했다.

 

정현은 자신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시험에 붙어야 한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고, 유미는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시험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운이 좋아야 붙는 것이며, 시험에 너무 목숨을 거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현은 나름대로는 열심히 공부했지만, 더 열심히 한 사람들에게 밀려 졸업할 때까지 1차 시험에도 합격하지 못하고 실업자가 되었다. 병역을 연기하기 위해 부득이 어려운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래서 2년 동안의 배수진을 치고 다시 공부를 하기로 했다. 2년 안에 시험에 붙지 못하면 그때는 하는 수 없이 군대를 가야하고, 제대를 한 다음에는 시험을 포기하고 회사에 취직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다음 부활절 바로 전날 정현은 유미를 만났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한 정현은 유미에게 자신의 초라함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몇 명의 친구들은 이미 시험에 붙었는데, 자신은 1차 시험도 떨어진 상황이며, 갈수록 시험에 대한 자신도 없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유미에게도 자신이 없고, 일단 헤어지자고 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렸다. 유미도 따라서 울고 있었다. 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정현이 술에서 깨어보니, 어느 작은 모텔방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불을 켰더니 유미는 쇼파에 앉아 자고 있었다. 술 때문에 속도 아프고 머리도 아팠다. 정현은 깜짝 놀랐다. 미안했다. 서둘러 유미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새벽이었다. 두 사람은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한참 동안 걸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현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서 유미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유미는 차에서 내릴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굳은 표정으로 내려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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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0)

 

하얏트 호텔은 남산 중턱에 있다. 꽤 오래된 호텔이다. 그런 호텔이 남산에 어떻게 들어섰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서울의 개발초기에 정부에서 환경이나 도심 미관 같은 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고 허가를 내준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지금도 하얏트호텔처럼 전망이 뛰어난 호텔은 드물다. 특히 서울 시내에서는 그렇다.

 

정현은 택시에서 내려 호텔로 들어가서 1층에 있는 양식당으로 갔다. 윤석은 이미 와서 창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는 서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파리나 보스톤 같은 도시보다 훨씬 더 운치가 있고 멋이 있었다.

 

요새 세상이 너무 시끄럽지 않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모르겠어. 북핵문제도 그렇고, 경제가 너무 불황이라 걱정이 돼. 그나저나 잘 지내고 있었어?”

. 나는 사무실에서 일만 하고 있으니, 사실 정치나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몰라. 워낙 일이 바쁘니까. 내가 하는 일은 수사나 하고 사건처리를 하는 게 전부야.”

 

두 사람은 최근의 정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떤 도지사가 여비서를 간음하여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가 기각되었고, 불구속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1심에서 무죄판결이 선고되었다는 것이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윤석은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궁금한 게 많았다. 정현이 이것 저것을 설명해주었다.

 

요새 유미씨를 다시 만나고 있다면서? 유미씨는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아니. 만나는 게 아니고, 지금 유미 상황이 안 좋아. 그래서 걱정이야.”

유미씨가 어떻게 되었는데?”

유미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잘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어. 그래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유미가 유방암에 걸렸대. 그래서 아주 고생을 하고, 절망에 빠져 있어.”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네가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잖아?”

유미가 나에게 책임을 지라고 그러는 건 아냐. 단지 유미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으니까 걱정을 하는 거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모르니까 답답한 거야.”

처음부터 힘이 들더라도 너는 유미씨와 결혼했어야 해.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게 꼬이고 어렵게 된 것이지. 아무튼 잘 해줘. 불쌍하잖아? 그리고 유미씨처럼 착한 사람도 없지.”

 

유미 이야기가 나오자 정현은 갑자기 마음이 울적해졌다. 마침 비도 오고 있는데 윤석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서 술을 많이 마셨다. 취기가 올라오자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커다란 유리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마치 공룡의 눈물 같았다. 갑자기 유미가 보고 싶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유미를 만나 무언가 하소연하고 싶었다.

 

너는 혜경씨를 어떻게 하려고 해?”

무얼 어떻게 해. 그냥 만나는 거지. 이혼하고 혼자 있으니까, 무척 외롭고 힘이 든 모양이야. 그래서 내가 가끔 만나 위로해주고,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도와주려고 하는 것뿐야. 어차피 처음부터 우리는 서로 연애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아르바이트 제자였을 뿐이었어. 그리고 혜경씨가 나를 사랑한 적도 없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래, 혜경씨가 원래 너무 예뻤어. 그리고 혜경씨는 서울 아가씨라 너를 우습게 봤던 거지. 그때 네가 너무 혜경씨에게 일방적으로 빠져서 고생을 많이 했지. 하지만 혜경씨는 너 혼자 좋아한 거지, 내 눈에는 별로였어. 바람기도 많아 보였고, 머리 속에도 든 것도 없어 보였어.”

그건 네가 잘 몰라서 그래, 혜경씨는 그렇지 않아.”

 

정현과 윤석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대학 시절의 일도 너무 소상하게 잘 알고 있었다. 유미와 혜경 이야기는 지금까지 무수하게 많이 들었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 정현과 윤석은 유미도 같이 만났고, 혜경도 같이 만났던 적이 있다. 사실 남자 친구 사이도, 자신의 애인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현과 윤석은 달랐다. 서로의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하면서 상의하고, 때로는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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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9)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현은 택시를 탔다. 요새는 카카오택시제도가 생겨서 아주 편하다. 예전에는 콜택시제도만 있어 택시잡기가 다소 불편했다. 특히 퇴근시간에는 아무리 콜을 해도 택시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택시를 호출하면 택시가 알아서 호출지점까지 온다. 오는 택시번호도 뜬다. 정말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지 모른다. 과학기술은 그렇게 날이 갈수록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만 그에 못따라가고 있다. 특히 개인의 윤리의식이나 도덕심은 오히려 더 후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극심한 생존경쟁의 현실에서 삭막해진다. 극도로 이기적으로 변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사회에 대해 냉소적이다. 그래서 인간관계도 아주 제한적으로 좁혀진다.

 

친구도 별로 없고, 대화나 소통도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비정한 현실에서도 정현에게 윤석이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삭막한 거대도시인 서울에서 같은 지방출신인 가까운 친구가 있고, 서로 대화가 되며, 수준이 비슷한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른다.

 

택시를 타고 남산에 있는 하얏트호텔까지 가면서 정현은 비가 내리는 서울 거리를 보고 있었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는 정말 거대한 도시에서 아주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혼자 아무리 열심히 기어다녀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전혀 띌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거인의 발에 밟힐까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낯선 곳에서 개미는 혼자 발버둥치고 있었다. 하루 하루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것 같고, 무엇인가 개미가 해야 할 일을 붙잡고 시간을 보내고, 에너지를 쏟고 있는 형국이었다.

 

개미는 원래 집단생활을 해야 하는데, 정현은 혼자 떨어진 외톨이 개미였다. 모두가 낯선 사람들로서 도시의 이방인이었다. 만일 개미가 꺼진 땅속으로 추락하거나, 물을 뒤집어쓰고 헤어나지 못해도 개미를 도와줄 존재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극한상황에서 개미는 오직 한 곳으로 더듬이를 세우고, 묵묵히 헤쳐다니고 있었다. 그런 개미도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많이 달라졌다. 현실에 많이 적응을 했고,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예전과 같은 그런 개미는 아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성숙한 개미였다.

 

택시를 타고 가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어떤 연예인이 자살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왜 자살을 할까? 그냥 힘들어도 참고 견디면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자살은 개인이 현실에서 부딪히는 고통이 너무 감당할 수 없어,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남의 일이라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실존이,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겪게 되는 고립감, 고독감, 그리고 무력감을 강하게 느낄 때,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에게 아무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없다는 느낌이다.

 

그런 무원의 고립상태에서 혼자 깊어만 가는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그는 생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윤석은 젊은 연예인이 그렇게 잘 나가고 있다가 한 순간에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에 잠시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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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8)

 

‘Come September!' 정현은 가을이 오면 늘 가슴이 설레였다. 왜 그러는 것인지는 몰랐다. 다만, 다른 계절과 달리 가을이 되면 마음이 들떠 가만히 있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우선 가을이 되면, 바람이 선선해진다. 한 여름의 폭염도 지나가고, 해수욕장의 따가운 햇볕도 수그러든다.

 

사과가 익어가고, 대추가 붉어진다. 딱딱하던 감이 부드러워지고, 수줍음을 타듯이 홍조를 띤다. 금요일 저녁시간이었다. 퇴근을 앞두고 정현은 갑자기 센치해졌다. 윤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하고 있어?”

“응. 지금 막 수술을 끝내고 나왔어. 퇴근하려고 그러는구나.”

“저녁 때 같이 술이나 할까?”

“좋아. 하얏트에서 만나. 일곱시까지 갈게.”

 

윤석은 정현과 같은 고등학교 친구였다. 학교 다닐 때 같은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고 가까운 사이였다. 윤석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대를 갔고, 의사가 되었다.

 

문과와 이과로 서로 분야는 달랐지만, 대학에 들어가서도 두 사람은 자주 만나고 가깝게 지냈다. 더군다나 처음에 입학시험에 떨어져 두 사람 모두 같은 대입학원에 1년간 다녔다. 그래서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윤석의 아버지는 지방에서 제재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목수일을 하고, 광산에서도 일도 하고, 공사현장에서 노동일을 하기도 했다.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돈을 모아 친척들과 동업으로 제재소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잘 나갔지만, 시간이 가면서 사업이 어려워지고 동업자간에 분쟁이 생겼다.

 

그리고 제재소에서 사무를 보던 젊은 여자직원과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다. 어머니가 펄펄 뛰자 아버지는 여직원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그 여직원에게 다방을 하나 차려주었다. 이런 저런 일로 끝내 제재소는 문을 닫게 되었고, 아버지는 50살이 되는 때에 실업자가 되었다.

 

윤석은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지고 아버지가 돈을 못벌게 되고, 빚을 지게 되자 고생을 하기 시작했다. 윤석의 다른 형제들은 학교도 중단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윤석은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국 의대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윤석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을 좋아했다. 다른 과목보다 수학을 제일 좋아하고, 제일 잘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공대에 가서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갑자기 아버지가 윤석에게 의사가 되라고 강력하게 권유하셨다.

 

윤석의 작은 아버지가 술을 좋아해서 간이 나빠졌는데 그 때문에 병원에 다니면서 보니까 집안에 의사는 한 사람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윤석의 삼촌은 간경화로 인해 45세에 돌아가셨지만, 삼촌 때문에 영향을 받은 아버지가 윤석의 진로를 바꿔놓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윤석이 공대를 가려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의 건강을 책임질 수 있다고 했다. 윤석은 끝내 아버지를 꺾지 못했다.

 

처음에 윤석은 대학입시에서 안타깝게 떨어졌다. 고등학교 성적으로는 당연히 의대에 합격할 수 있었는데, 입시 보기 보름 전에 윤석은 감기가 들었다. 열심히 마지막 총정리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겨울에 공부를 하다가 창문을 열어놓고 몇 시간 낮잠을 잔 것이 화근이 되어 감기가 들었다.

 

즉시 병원에 가고 약을 먹고 제대로 치료를 했으면 괜찮을 것인데, 병원에도 가지 않고 약도 제대로 먹지 않고 버티다가 감기가 도졌다. 가뜩이나 대학입시를 앞두고 긴장을 하고 있던 터라 감기는 쉽게 낫지 않고 더욱 심해졌다. 막상 서울에 올라와서 시험을 볼 때는 귀도 멍하고 머리도 아플 정도였다. 간신히 시험을 끝까지 보았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시험에 떨어진 기분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더군다나 집안이 어려워서 재수를 한다는 것이 힘이 든 상황이었다. 윤석은 부모님께 미안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걱정말라고 하면서 1년간 서울에 가서 학원을 다니라고 했다.

 

그래서 윤석은 서울로 혼자 올라왔다. 대입학원에 등록을 하고 1년을 다녔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하숙을 하면서 학원을 다녔다. 학원에 가보니 대부분이 서울 아이들이었다. 학원의 분위기는 지방의 고등학교와는 전혀 달랐다.

 

모두들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고, 학원의 선생님들도 실력이 매우 좋은 것처럼 보였다. 교재도 매우 수준이 놓았다. 윤석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학원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그 다음 해에 목표로 한 서울에 있는 의과대학에 합격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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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은 운명 (15)

 

김 이사는 호텔 프론트 데스크로 가서 직원에게 사고내용을 알렸다. 그랬더니 직원은 호텔에 설치되어 있는 CCTV를 확인시켜 주었다. 정 사장이 머물고 있는 호실 복도와 엘리베이트 주변이 녹화되어 있었다.

 

아니, 저건 박 과장 아냐? 이상하다. 왜 밤에 은영이 사장님 방으로 들어가고, 오래 있다가 혼자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기 방으로 가는 걸까?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구나?”

 

CCTV를 반복해서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은영은 들어갈 때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는데, 나올 때는 정 사장 방에 있던 그 스카프를 메지 않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무슨 도둑처럼 문을 아주 조용히 찬찬히 닫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살펴보면서 엘리베이트로 가는 것이었다. 김 이사는 기가 막혔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다는 말인가? 은영이 얌전한 척 하면서 저렇게 호박씨를 까는 여자란 말인가?

 

CCTV상에는 은영이 정 사장의 시계나 다른 물건을 들고 나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는 것인지 여부도 확인할 수 없었다. 긴팔의 불라우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 이사는 정 사장에게 이런 사실을 CCTV에서 확인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호텔 직원은 CCTV를 다 확인한 다음, 호텔 직원은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준 다음, 상급자에게 말해 상급자와 그 직원 두 사람이 정 사장 방으로 가서 샅샅이 방을 살펴보았다.

! 시계가 여기 있네요. 이 시계 맞지요?”

. 맞아요. 내 시계예요. 고맙습니다.”

 

시계는 정 사장이 잠을 잔 침대 위에서 창가 벽 밑으로 떨어져 있었다. 정 사장이 시계를 차고, 침대 위로 올라가서 잠을 자면서 옷도 다 벗고, 시계도 무의식중에 풀어서 침대 위에 놓았는데, 그게 잠을 자는 과정에서 벽 쪽으로 아래로 떨어진 것이었다.

 

정 사장은 그렇게 아끼고 아끼던 시계를 다시 찾자, 갑자기 어린 아이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환한 웃음을 띠면서 김 이사에게 호텔 식당으로 가서 아침 식사를 하자고 했다.

 

어제 밤에 술을 많이 드신 것 같네요. 이렇게 많은 술을 혼자 드셨습니까?”

, 어제는 이상하게 술생각이 많이 나서 혼자 늦게까지 마셨어. 지금 속도 좋지 않아. 그래도 식사를 하러 가지.”

 

김 이사는 쇼파에 놓여 있는 여자 스카프가 은영의 것임을 알았지만, 그것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정 사장과 박 과장이 정사를 벌였다는 증거를 확인하기 위해 휴지통도 보았지만, 성관계 뒤처리를 하는데 사용한 크리넥스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정 사장 일행은 모두 모여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은영도 참석했다. 정 사장이나 은영, 모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다만, 김 이사만 혼란스러웠다.

 

김 이사나 정 사장 모두 시계사건에 관해서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은영의 스카프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스카프는 정 사장이 조용히 자신의 짐 안에 넣어두었다. 일행의 스케줄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특이 사항 없이 무사히 일본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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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4)

 

정 사장은 간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정신 없이 잠을 잤다. 오늘은 출장 마지막 날이라 특별한 스케줄이 없었다. 그래서 시내 백화점에 가서 쇼핑이나 하고 서울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아침 8시경 정 사장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술기운이 남아 있어서 속이 아팠다. 그래도 일어나서 샤워를 했다. 호텔 방은 가관이었다. 탁자에는 와인병이 널리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먹다 만 안주가 쾌쾌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정 사장은 분명 은영이 방에 들어와 같이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러나 더 이상 자세한 일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 사장은 걱정이 됐다. 혹시 자신이 은영에게 실수라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으나, 별로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일어날 때 보니, 옷도 다 벗고 완전 나체로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은영이 방에 있을 때 내가 발가벗고 추태를 부린 것은 아니었을까 걱정도 되었다.

 

샤워를 마친 다음 정 사장은 호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려고 옷을 입었다. 그리고 시계를 차려고 보니 시계가 없었다. 아차 싶었다. 그 비싸고 귀중한 시계를 어디에서 잃어버린 것일까?

 

분명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 방으로 돌아올 때에도 자신은 롤렉스 시계를 차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떻게 시계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정 사장의 방에는 은영이 혼자 들어와서 같이 술을 마신 일밖에 없다.

 

하기야 나이를 먹었고, 특히 어제 저녁 식사 때부터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치매 비슷한 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밖에서 시게를 풀어놓고 호텔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 아무리 방안, 여기 저기를 찾아보았다. 테이블 위, 화장대 위, TV , 방바닥 등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시계는 보이지 않았다. 정 사장은 경황이 없는 상태에서 같이 출장 온 김 이사를 불렀다.

 

김 이사. 이상하다. 내 시계가 없어졌어.”

어디에서 없어졌을까요? 어제 식당에서 식사를 하시고, 2차로 술집에는 가지 않고, 바로 룸으로 들어오셨잖아요? 그 다음 외출하셨었나요?”

 

아냐. 저녁 먹고 곧 바로 들어와서 샤워를 하고 술을 마시고 잠을 잔 거야. 이상하다. 분명 내가 시계를 차고 들어온 것 같은데... 밖에서 시계를 풀어놓을 일이 없었잖아?”

 

사장님 방에 호텔 직원이 들어왔었나요? 혹시?”

아니 아무도 안 들어왔었어. 다시 한번 잘 찾아봐.”

. 그런데 이 좁은 방에 어디 있을 곳이 없습니다. 제가 프로트에 가서 알아볼 게요.”

 

김 이사는 방을 뒤지면서 쇼파 자리에 여자 스카프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분명 일본에 출장와서 은영이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였다. 그것을 경황이 없던 정 사장도 미처 치우지 못한 채, 김 이사를 시계 때문에 방으로 불러서 시계를 찾아보도록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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