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57)

 

명훈 엄마가 지현에게 만나자고 약속한 장소는 신라호텔 로비라운지였다. 지현은 전철역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올라가야했다. 밖에서 볼 때는 별거 아니었는데, 호텔 구내로 들어가니 하나 하나가 세련되어 있었다. 고급 호텔에 들어가면 일반인은 놀라게 된다.

 

명훈 엄마는 늘상 다니는 곳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장소를 정했지만, 지현 입장에서는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려고 굳이 이런 고급스러운 호텔로 잡았는가 하고 생각했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지현은 30분 전에 먼저 가서 앉아 있었다.

 

명훈 엄마가 올 때까지 커피는 주문하지 않았다. 메뉴판도 고급스러웠다. 커피값도 엄청나게 비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급 옷을 입고, 매우 세련되어 보였다. 약속 시간이 되자, 명훈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오면서 지현을 미리 알아보는 것처럼 가볍게 인사를 했다.

 

지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뱃속의 아이도 따라서 놀라는 것 같았다. 지현은 속으로 말했다. ‘아가야. 너의 할머니가 오셨어. 인사드려야지.’

 

명훈 엄마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시키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지현을 살펴보고 있었다.

 

명훈이 아이를 가졌다면서요? 그런데 명훈이 아이인 건 확실해요?”

. 확실해요. 저는 명훈씨 이외에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어요. 아이를 낳으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지면 어떻게 해요? 명훈이는 아직 어리고, 대학교 졸업도 해야하고, 취직도 해야 하는데, 아이를 어떻게 키우려고 그래요?”

아이는 제가 혼자 키우면 돼요. 걱정 마세요. 그리고 명훈씨가 졸업하고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릴 게요.”

그건 어리석은 일이예요. 명훈이는 아가씨와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젊었을 때, 한 때 불장난으로 생각하고 잊어버려요. 그렇지 않으면, 아가씨도 불행해지고, 아이는 아빠 없는 사생아가 되는 거예요.”

어머님. 그렇지 않아요. 저는 명훈씨를 사랑해요. 그리고 지금 제 뱃속에 몀훈씨 아이가 자라고 있어요. 명훈씨는 저를 사랑했어요. 지금도 사랑하고 있고요. 우리는 결혼해야 해요. 결혼하기로 했기 때문에 임신을 했던 거고요. 제발 결혼시켜 주세요. 제가 잘 할게요. 열심히 살고, 명훈씨 뒷바라지 잘 할게요.”

 

지현이 당돌하게 어머니라고 하자, 명훈 엄마는 순간 흠칫했다. ‘무척 당돌한 아이야. 무섭기도 하고, 큰일 났네.’

 

아니 나이도 5살이나 위라면서요. 우리 명훈이는 아직 학생이고 철부지예요. 요새 남자들 결혼은 서른 살은 넘어야 할 수 있잖아요. 직장도 잡고 철이 들어야 결혼하지 지금 어떻게 결혼을 해요.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어머님 저는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혼자 아이를 낳아서 키울 자신도 있어요. 경제적인 도움도 필요 없어요. 오직 명훈씨만 있으면 돼요.”

원래 여자는 자신의 몸을 자신이 잘 관리해야 해요. 아가씨는 어떻게 결혼이야기도 전혀 없이 남의 아이를 가지고 남자가 싫다는데 결혼하자고 하고, 아이를 낳겠다고 해요. 너무 심한 거 아니예요. 어떻게 아가씨가 명훈이와 결혼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느냐고요? 빨리 마음 돌려먹고 문제를 해결해요. 더 늦기 전에, 지금 5개월이면 빨리 수술해야 해요. 더 늦으면 위험해요. 보상은 내가 서운하지 않게 해줄게요. 내가 약사로서 잘 아는 병원이 있으니까 날짜를 잡아줘요.”

어머님. 그런 게 아니예요. 명훈씨는 저와 결혼한다고 맹세했어요. 그 증거도 다 가지고 있어요. 수술은 절대 하지 않아요. 제발 결혼시켜 주세요.”

 

지현은 울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명훈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10여분쯤 지나도 지현이 계속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고 있자, 명훈 엄마는 조용히 말했다.

 

일단 나는 갈테니, 잘 생각해보고 연락줘요. 그리고 여기 병원비를 놓고 갈테니, 돈이 더 필요하면 얘기해요.”

안 돼요. 어머님. 그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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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작은 운명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써서 페이스북에 연재했습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이 내용이 너무 비정상적인 사랑 이야기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을 가해왔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왜 꼭 사랑의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느냐고 따졌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의 부도덕한 행위를 쓰면, 그러한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 모두가 부도덕하게 보인다는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페이스북에 소설을 연재하는 것은 당분간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소설은 계속 쓰고 있기 때문에 페이스북에 올리는 대신 내 개인 블로그에 올려놓을 생각입니다.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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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6)

 

명훈 엄마는 명훈이 현재 처해있는 사정을 이야기 듣고 심한 충격에 빠졌다. 누나는 그렇지 않은데, 명훈이는 어려서부터 부모 말을 듣지 않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늘 부모 속을 썩이며 살았다. 아빠도 열심히 살고, 엄마도 열심히 살았는데, 도대체 명훈이는 누구 피를 닮아서인지 성격도 이상하고, 게으르고, 책임감도 없었다.

 

하지만, 명훈 엄마는 약사로서 개업해서 돈도 잘 벌고 있었고, 사회생활을 많이 해본 경험이 있어 아들 문제를 해결할 자신감을 가졌다.

 

명훈 엄마 역시 대학교 졸업할 무렵 어떤 남자 친구에게 깊이 빠진 적이 있었다. 그 남자는 공대를 다니고 있었다. 성격이 차분하고, 매사에 진지했다. 처음 3개월 동안 데이트를 하면서도 손 한번 잡지 않았다.

 

명훈 엄마에게 잘 대해주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은 한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야말로 이심전심이었다. 부처님의 염화시중과 같은 미소로 가슴에서 가슴을 전하는 남자였다.

 

명훈 엄마는 이 남자를 너무 사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시고, 한적한 공원으로 가서 벤치에 앉았다. 늦은 가을이었다. 은행나무잎이 떨어져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누런 색은 황금을 연상시켰다.

 

그 남자의 흰 티셔츠가 수은등에 반사되어 파랗게 형광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손에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었다. 휴대용 커피잔은 분홍빛이었다.

 

명훈 엄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남자의 어깨에 기댔다.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 약간 선선했지만, 가슴은 따뜻했다. 그러면서 그 남자의 아이를 잉태하고 싶다는 모성을 느꼈다.

 

아주 이상했다. 그 남자와 관계를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아이 생각을 하다니,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본성인 것 같았다. 그 후 명훈 엄마는 꿈속에서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자신을 두 세 번 보았다. 배가 불렀다.

 

그리고 그 뱃속에 들어있는 존재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강아지 같기도 했다. 태아는 외눈박이 같이 보였다. 꿈에서 깬 명훈 엄마는 무척 놀랐다. 상상임신도 있다는데, 내가 혹시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임신한 것이 아닐까?

 

그 후 그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명훈 엄마는 더 이상 그 남자를 사랑하지도 않고,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자가 임신하는 것은 사랑 때문이고, 사랑이 깨지면 임신도 망각되고 무의미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지금 명훈이 애를 가졌다는 여자의 철없는 행동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의미가 없는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쉽게 생각했다.

 

명훈 엄마는 아빠에게 명훈 문제는 자신이 알아서 해결할 테니, 모든 걸 자신에게 맡기라고 이야기했다. 명훈 아빠는 명훈 엄마의 실력을 믿었다. 돈은 얼마든지 써도 좋으니, 빨리 해결하라고 했다.

 

명훈 엄마도 이런 경우에는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답했다. 역시 돈이 있는 사람들이라, 돈이면 만사가 형통이고, 세상사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고,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것은 돈을 많이 가져보지 못한 낙오자들, 돈의 효험과 위력을 경험해 보지 못한 무능력자들이 내뱉는 푸념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다.

 

명훈 엄마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지현을 자신이 직접 만나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이 지난 다음, 명훈 엄마는 지현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서 지현을 만났다.

 

지현은 명훈 엄마가 자신을 만나자고 하는 말에 들떴다. 직접 만나 자신의 배를 보고, 대화를 해보면, 명훈 엄마도 지현을 며느리 삼고 싶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명자에게 이런 사실을 말했다. 그랬더니 명자는 지현이 혼자 나가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자신이 따라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현은 명자는 나와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공연히 일을 그르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명자는 물러섰다. 다만, 언제 어디에서 만나려고 한 것인지에 관한 정보만 알려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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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5)

아빠는 사업가로서 성공했기 때문에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면 머리를 싸매고 눕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더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끝까지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법을 찾아내는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아빠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십여년 전에 한참 부동산 투기를 하고 다닐 때, 카페를 운영하는 어떤 여자를 알게 되었다. 명훈 아빠와 그 여자는 같이 차를 타고 다니면서, 돈을 벌 땅을 보러 다녔다.

그러다가 그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 서울 근교 경치 좋은 강변에 있는 모텔에서 사랑을 나누곤 했다. 몇 달이 지난 다음, 그 여자는 명훈 아빠에게 아이를 가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명훈 아빠 닮은 아이를 꼭 낳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런데 한심한 것은 그 여자는 유부녀였다. 남편은 부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도박이나 하고 돌아다니는 건달이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남편과 이혼하고 명훈 아빠 아이를 낳아서 키우면서 혼자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를 지우지 않는 것이었다. 명훈 아빠는 그 여자의 남편을 본 적고 없고, 그 여자로부터 말만 들었기 때문에 진가민가했다.

그래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명훈 아빠 아닌 다른 젊은 남자 애인과 모텔에서 정을 통하다가 남편에게 들켜서 현장에서 심하게 폭행을 당했다.

남자 애인도 심하게 맞아 전치 8주의 상해를 입었고, 여자 역시 남편으로부터 심하게 맞아 팔이 부러지고, 그 때문에 얼마 안 있어 아이도 유산했다.

명훈 아빠는 그 덕분에 골치 아픈 그 여자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없어졌지만, 당시 그 아이가 명훈 아빠 아이였는지, 젊은 애인 남자의 아이였는지, 아니면 그 여자의 본남편 아이였는지 무척 혼란스러웠다.

나중에 명훈 아빠는 그 여자 때문에 부동산으로 1억원을 벌었기 때문에, 수고비를 두둑히 주고, 기분이 좋아 같이 술을 많이 마신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여자는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있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래서 다시 명훈 아빠와 모텔에 가서 정을 나누면서 옛날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몰라요. 그 당시 이상하게 당신하고 자주 잠자리를 했어요. 그건 당신하고 하는 게 좋아서 그랬던 거예요. 그런데, 그 남자 친구가 1년 만에 다시 나타나서 돈을 천만원 요구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공갈을 친 거지요. 그래서 돈이 아까워서 돈 대신 몇 번 만나 몸으로 때어주려고 했는데, 재수 없게 남편에게 걸렸던 거예요. 그리고 그때 남편이 이상하게 나를 의심하면서 자꾸 잠자리를 요구했어요. 그래서 나도 남편에게 의심을 받지 위하여 평소에는 하지 않던 관계를 자주 응했던 거예요.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애가 생긴 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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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4)

 

명훈이 간 다음, 명자는 명훈의 인간 됨됨이를 보고 너무 실망했다. 그리고 지현이 너무 어리석어 보였다. 저런 못된 철부지, 연약한 인간, 사랑도 모르고, 책임도 모르는 남자를 좋다고 매달리는 지현이 너무 한심해 보였다. 그래서 명자는 지현을 설득시켜 명훈과 관계를 정리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지현은 전혀 달랐다.

 

아냐. 지금은 저 사람이 어려서 그래.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절대로 돌아와. 아까 그 여자도 봐. 비싼 돈 들여서 얼굴을 고친 것 같지만 인간미라고는 전혀 없잖아? 그 사람은 나 같은 스타일을 좋아해. 그리고 여자는 외모나 환경보다는 내면으로 얼마나 성실하고 남자에게 헌신하는 지가 중요해. 걱정하지 마. 명훈씨와 상의해서 애 낳고 잘 살게.”

 

지현의 말은 명자에게는 매우 비현실적이고 공허하게 들렸다. 저렇게 세상을 모르고, 남자를 모르고, 사랑을 모르다니! 정말 한심하고 불쌍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정말 나쁜 사람이었다. 정의의 여신이 명자의 주먹에서 왔다 갔다 떨고 있었다. 명자는 모처럼 주먹과 발을 썼더니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명훈이 집에 들어가자 난리가 났다. 아빠와 엄마는 거실에서 명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너 꼴이 뭐냐? 누구한테 이렇게 맞은 거야? 그 여자들이 깡패를 데리고 와서 때린 거야?”

빨리 병원으로 가자. 응급실로 가자.”

아니예요. 괜찮아요. 내일 병원에 갈게요.”

 

명훈은 왼쪽 팔목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맞기도 많이 맞았다. 무척 아팠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그 정도 아픈 것은 명함도 내밀 수 없었다.

 

, 그 여자하고 어떻게 된 건지 말해봐.”

. 우연히 만나서 몇 번 잤는데 제 아이를 가졌다고 해요. 수술을 하라고 해도 끝까지 낳겠다고 하네요.”

아니 네 애기가 맞아?”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정숙한 여자는 아니니까. 저 한테 돈을 뜯어내려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저는 그 여자가 싫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으려고 해요. 나이도 5살 많고, 학교도 고졸에 불과해요. 돈도 없는 집 애고, 얼굴도 못생겼어요. 제가 만나지 않으면 저절로 떨어질 거예요.”

 

명훈 엄마와 아빠는 명훈을 방으로 들여보낸 다음 걱정을 했다. 대학생이라 알아서 하는 줄 알고 내버려두었더니 큰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여자가 알아서 피임을 하고 설사 임신을 해도 곧 바로 수술을 할텐 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무슨 나쁜 의도가 있는 여자 아이 같았다. 하지만 명훈은 아직 어리고 세상 물정을 모르니까 부모들이 나서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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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3)

 

명훈은 이런 상황이 자신에게 매우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현을 생각해주는 척 하면서 지현의 어깨에 손을 댔다. 순간 지현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지현은 이 상황에서도 명훈이 자신의 어께에 손을 대주니 고맙고 행복했다. ‘역시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고 있어. 안 그러겠어? 애 아빤데.’

 

그런데 명훈은 전혀 달랐다. 지현에 대한 애정은 이미 끝났고, 오직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인지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빨리 산부인과에 가서 애를 떼자. 내일 같이 가. 돈은 내가 낼게. 그리고 몸보신하게 200만 원 줄게. 요샌 나도 돈이 별로 없어.”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명자가 갑자기 명훈의 뺨을 연거푸 세게 쳤다. 주먹으로 명훈의 복부를 강타했다. 태권도로 다져진 주먹이라 벽돌 같았다.

 

명훈은 고꾸라졌다. 명자는 발로 명훈의 배와 허벅지를 몇 번 더 세게 짓밟았다. 명자의 하이힐로 짓밟히니 정말 아팠다. 명훈은 명자의 위력을 느끼고 전혀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잘못 대항했다가는 2대 독자 집안의 대가 끊어질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명훈은 이런 상황에서도 여자로부터 받는 수모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애를 지우지 않고 있는 지현이 미친 여자로 보였다. ‘정말 잘못 걸렸어. 어떻게 하려고 이럴까? 만일 애를 지우지 않고 끝내 낳는다면 어떻게 될까?’

 

주변 사람들도 구경만 할 뿐 전혀 말리거나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를 때렸다면 말리거나 신고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등치 큰 남자가 체구 작은 여자에게 맞고 있고, 그 옆에는 다른 여자가 울고 있으니, 분명 남자가 여자에게 나쁜 짓을 해서 여자들이 따지고 있는 것이고, 조금만 맞아도 남자는 의도적으로 아픈 척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경만 하고 있으면서도 ‘남자는 나쁜 가해자, 여자는 불쌍한 피해자’로 규정지었다.

 

“지현씨 잘못했어요. 내가 책임질 게요. 용서해줘요. 미안해요.”

“당신이 뭐를 잘못했는지 말해 봐. 오늘 죽을 줄 알아. 네 애기도 아니라면서, 왜 지금까지 피해 다녔어? 그리고 그 여자는 왜 끼고 돌아다녀? 돈도 없다는 X이 클럽에서 여자하고 놀고 있냐? 이 나쁜 X아! 너 같은 XX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해. 죽어야 해.”

 

일단 세 사람은 그 다음 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태원의 밤은 어수선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대낮 같이 밝은 빛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도시의 고독을 달래기 위해 혼자서, 또는 일행과 함께 낯선 공간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예전과 달랐다. 남녀가 있어도 꼭 섹스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밤의 분위기를 공유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맥주나 커피를 함께 마시는 것만으로도 욕망은 충족되는 것처럼 보였다. 실존의 허망함, 외로움을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 그 무게를 함께 줄이자는 것뿐이었다.

 

명훈을 보내고 나서 지현과 명자는 부근에 있는 맥주집으로 갔다. 명자는 술을 시켜 혼자 많이 마셨다. 다만 지현에게는 마시지 말라고 했다. 애 때문에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지현은 걱정 말라고 했다. 절대로 술과 담배는 애 낳기 전까지는 안 한다고 했다.

 

“너 어떻게 할래? 저 남자 보니까 절대로 너 하고 결혼할 사람이 아냐? 네가 애를 낳으면 애비 없는 자식이 되고, 너 혼자 키워야 하는데, 그럼 너는 결혼도 못하고 어떻게 할 거야? 이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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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2)

 

그러다가 어느 날 마침내 이태원 클럽에서 명훈을 발견했다. 명훈은 제니와 단 둘이서 테이블에 앉자있었다. 두 사람은 너무 다정해보였다. 한눈에 봐도 연인이었다. 그 클럽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한쌍의 환상이었다. 호수에 떠있는 백조와 물가에 있는 공작이었다.

 

오랫만이야. 오빠!”

아니. 여기는 어쩐 일이야?”

앉아도 될까요?”

 

명훈은 지현과 그 일행인 명자를 보자, 얼굴이 굳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가자. 여기서.”

잠깐 나 좀 봐요. 그럼 밖에 나가서 이야기해요.”

명훈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계산은 제니가 하는 것 같았다.

이 봐요. 명훈씨는 내 아이 아빠예요. 알았어요.”

 

클럽에서 나가는 명훈을 명자가 뒤쫓아가서 붙잡았다. 벨트를 붙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웨이터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여자가 남자를 붙잡으니 별 일이 없을 것으로 알고 내버려두었다.

 

지현은 제니에게 자신이 명훈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간단히 말하고 명훈이 있는 곳으로 갔다. 제니는 이런 상황을 보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곧 바로 클럽을 나가버렸다. 지현와 명자, 그리고 명훈은 부근에 있는 카페로 갔다.

 

오빠. 왜 전화도 차단하고 연락을 안 했어? 그동안 잘 지냈어?”

우리 사이는 다 끝났잖아? 무슨 할 말이 있어? 나 지금 바빠. 여자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 가 봐야 해. 다음에 봐.”

 

명훈이 일어나려고 했다. 명자가 격해졌다. 갑자기 탁자를 세게 쳤다. 그리고 두 주먹을 쥐었다. 마치 격투기를 하려는 자세처럼.

 

아니. 이 봐요. 내 친구가 당신 아이를 낳으려고 하고 있어. 그런데 지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어떻게 책임질 거야? 당신 부모에게 연락해. 지금 같이 가서 만나.”

 

이 여자 아이가 내 애라는 걸 어떻게 알아? 증거를 대봐. 이 여자는 수없이 많은 남자와 잠을 잔 거 내가 알아. 워낙 남자를 밝혔어. 나하고 할 때도 혼자 좋아서 몇 번씩이나 해달라고 했어. 아주 지저분한 창녀야.”

이 미친 XX.”

 

갑자기 명자가 명훈의 뺨을 세게 쳤다. 맨날 술이나 먹고 여자를 밝혀서 몸이 약해져서 그런지 명훈의 코에서 피가 났다 시커먼 죽은 피였다. 영혼이 썩었으니 코피도 선혈이 아니고 더러운 검은 피였다.

 

야 이 나쁜 XX 봤나? 너 빨리 부모에게 전화해. 지금 만나러 가게.”

명자는 명훈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명훈이 달려들었다. 명자는 순식간에 명훈을 때려 굴복시켰다. 명훈이 무척 아픈 표정으로 다시 앉았다. 오랜 실강이 끝에 명훈은 자신의 어머니를 바꾸어주었다.

 

엄마, 잠깐만요. 전화 바꿔줄게.”

여보세요. 저는 명훈이 아이를 가진 사람입니다. 벌써 5개월째에요. 아이를 낳는 문제를 상의드리려고요. 만나주세요.”

아니 무슨 말이예요. 도대체. 명훈이가 몇 살인데 아이를 가져요?”

정말이예요. 제 연락처를 남길테니 나중에 전화해주세요. 부탁입니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지현은 울음이 북받쳐 더 이상 전화를 하지 못하고 끊었다. 명훈 엄마는 계속해서 명훈에게 전화를 했으나, 명훈은 명자가 무서워서 엄마의 전화를 더 이상 받지 못했다.

 

오빠. 나는 오빠만 사랑해. 아이를 낳아서 열심히 키울게. 오빠는 대학교 졸업하고 내 곁으로 와. 그동안은 내가 혼자서 낳아서 잘 키울테니까. 오빠 알지? 내가 얼마나 오빠를 사랑하는지?”

정말 왜 이래? 내 애기도 아닌 걸 가지고 이렇게 나를 괴롭히고, 공갈치고, 내가 가만 있지 않을 거야. 당신들 공갈범이야 경찰에 신고할 거야.”

오빠 그러지마 오빠가 다 알고 있잖아. 나하고 잘 때 나만 사랑한다고 말했잖아?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했을 때 너무 좋아했잖아? 그리고 낳아서 잘 키우자고 수없이 맹세했잖아?”

 

지현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현은 혼자 이렇게 생각하고 수없이 되풀이해서 자신을 세뇌시겼기 때문에 적어도 지현에게는 이 말들이 진실이었다. 명훈이 그런 말을 했던 안 했든간에.

 

명훈은 지현이 울면서 매달리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정말 내가 재수 없이 악질을 만났구나! 큰일 났네! 제니도 잃어버리게 생겼어. 아빠도 난리를 칠 거고. 이걸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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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1)

 

지현의 친구인 명자의 태권도 실력은 대단하다. 겉보기에는 연약한 여자같지만, 오랫동안 태권도를 갈고 닦아서 막상 힘이 필요할 때 기술을 사용하면 상대는 꼼짝 못한다.

 

명자는 지하철에서 자신의 엉덩이를 비비고 있던 중년의 남자를 팔목을 비틀어 인대를 늘어나게 하고, 곧 바로 다음 정거장에서 그 남자를 끌고나와 급소를 무릎으로 차서 초죽음상태로 만든 일도 있었다.

 

그런 다음 잘못했다고 비는 그 남자를 앞으로는 사람을 똑바로 보고 비비라고 훈계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 남자는 너무 센 여자를 잘못 건드리다가 태권도 맛을 보고 혼이 나서 치료비를 받아낼 생각은 엄두도 못내고 그 길로 재빨리 도망쳤다.

 

친한 친구인 지현으로부터 억울하고 딱한 사정을 듣자, 명자는 마치 자기 일처럼 흥분했다.

그런 나쁜 XX를 봤나? 내가 만나서 손을 봐줘야겠다.”

아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내 아이 아빠야. 절대로 다치게 하면 안 돼.”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냐? 바보 같은 지지배야.”

일단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해. 그리고 만나서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줘야 해. 또 아이를 낳는 문제를 상의해야 해. 그 사람 부모도 만나서 인사도 드려야 하고.”

근데 몇 달 동안 연락도 하지 않고, 전화도 차단해 놓은 사람이 만난다고 책임질까?”

아냐. 나는 그 사람을 믿어. 그 사람은 나를 속으로 많이 사랑하고 있어. 더군다나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내게로 돌아올 거야. 너도 만나보면 알아. 얼마나 진실한 사람인 줄... 남자는 젊었을 때는 누구나 일시적으로 방황하는 거야. 나는 이해해. 하지만 아이 아빠가 되면 누구나 달라져. 달라질 수밖에 없어. 사랑하는 아이 아빠가 되니까.”

 

이 말을 하면서 지현은 많이 울었다. 소리 내면서 울었다. 많은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명자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은 지금까지 이렇게 한 남자를 사랑해 본 적도 없었다.

 

명자는 생각했다.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지현이 이렇게 사랑하고 아이까지 가졌으니 만나서 서로 좋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명자는 지현과 명훈이 다니는 대학교에 찾아갔다. 그러나 학교에 가서는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더 이상의 정보를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현으로부터 명훈이가 이태원에 있는 클럽을 자주 다닌다는 말을 듣고 이태원에 있는 클럽을 샅샅이 뒤지기로 했다.

 

클럽은 보통 주말에만 영업을 한다. 금요일 밤과 토요일 밤에만 문을 연다. 그래서 이곳 저곳을 주말에 돌아다녔다.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들어가서 몇 바퀴 돌고 나오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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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0)

 

세상은 이렇게 돌아간다. 운이 좋아 돈을 쉽게 벌면, 개인은 제가 잘나서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고 교만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다. 없는 사람들 생각은 하지 않고, 탈세나 하고, 회사 비자금이나 만들어 잘먹고 잘살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 신문에 나는 재벌회사, 대기업 회장들의 행태를 보면 정말 이해가 가지 않고 한심하다. 그들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그것도 시대를 잘 타고 나서, 경기의 흐름을 잘 맞추어 재벌이 되고 대기업이 된 것은 나름대로 그들의 노력과 성공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재벌이 되고 대기업이 되었으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교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냥 기업이나 열심히 경영하고, 근로자의 기여도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검소하게 사는 것이 좋다. 호화 사치나 하고, 다른 사람에게 지나친 위화감을 주는 것도 좋지 않다. 결혼도 꼭 초호화판으로 하고, 탤런트를 다 데려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직원에게 폭행을 하고, 갑질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들은 공무원을 매수해서 이권이나 챙기고, 정권이 바뀌면 순식간에 힘센 사람들에게 달라붙는다. 유부남 유부녀가 새로운 애인을 만들고, 돈을 주고 성을 산다.

 

돈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자본주의윤리에 어긋나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고 개탄스럽다. 그렇다고 정부에서 어떻게 규제하기도 어렵다. 자유민주사회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드러나지 않는 범죄나 불법이 아니면 처벌도 어렵다.

 

분식회계나 하고, 편법증여나 하고, 회삿돈으로 개인 주택을 인테리어하는 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봤자 자녀들, 손자손녀는 돈 귀한 줄 모르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흥청망청 돈이나 쓰다가 마약이나 하고, 감방이나 가고, 이혼이나 하는 줄 모르는게 안타깝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늙으면 죽고, 나이 들면 병들어 거동도 못하는데 왜 죽을 때까지 돈에 집착하고 나쁜 인간으로 욕을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백화점이나 들락날락하고, 면세점에서 명품이나 산다. 고급 술집, 고급 레스토랑에서 최고로 좋은 음식, 비싼 메뉴만 찾는다. 외제차를 타고, 해외 여행을 전세계적으로 다닌다.

 

마치 전문여행가, 탐험가 같다. 우리나라 지방 도시는 가보지도 않고 잘 몰라도, 뉴욕, 파리, 홍콩, 시드시, 시애틀, 런던, 로마 등에 대해서는 강 이름, 공원 이름, 쇼핑센터에 관해 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명훈과 제니는 서로의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두 사람이 가까워진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기로 노력했다.

 

지난 과거는 다 이해하고 잊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섹스에 있어서만큼은 두 사람 모두 아주 만족할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과 성관계를 경험했기에 특별히 좋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영이 임신 5개월이 되었을 때, 지현은 마침내 명훈을 찾아나섰다. 핸드폰 번호는 차단해놓았기에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현은 가까운 친구인 명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했다.

 

명자는 고등하교 친구였다. 학교 다닐 때부터 여자로서 태권도를 배웠다. 유단자로서 무술을 잘했다. 체격은 작았지만 열심히 태권도를 해서 전국체전에도 출전해서 우승을 한 경력이 있다.

 

남자 같은 성격에 웬만한 남자 두 명 정도는 거뜬히 해치울 기술과 실력이 있었다. 그래서 전에 술에 취해 시비를 거는 남자를 발차기로 쓰러뜨린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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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49)

 

한편 명훈은 지현으로부터 전화가 와도 바쁘다는 핑계로 받지 않고, 문자로만 답을 했다. 당분간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취업준비를 해야 하니,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그럼에도 지현이 계속해서, 하루에도 서너번씩 장문의 문자를 보내니 미칠 지경이었다.

 

지현은 명훈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 어떤 반응을 보이든, 일방적으로 ‘명훈씨! 정말 사랑해요. 죽을 때까지 나만 사랑해줘요. 아이는 건강하게 뱃속에서 잘 놀고 있어요. 꼭 명훈씨를 닮은 아이가 나올 거예요. 공부 열심히 하세요. 건강 잘 챙기고요.’라는 취지의 문자를 계속해서 보냈다.

 

그리고 가끔은 자신의 배를 사진으로 찍어 아이가 그 안에 있음을 확인시켜주려고 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배가 조금씩 나온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명훈은 괴로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명훈은 지현이 아주 나쁜 여자로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밖에 안 나온 주제에, 집안도 형편없고, 얼굴도 못생긴 여자가, 몇 번 관계를 한 것을 가지고, 몰래 아이를 가지고, 완전히 어린 나를 협박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어디서 들어본 꽃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시간이 가면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하기도 싫고, 단지 지현이 문자만 보면 징그럽고 소름이 끼쳤다.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하다가도 지현이 생각이 떠오르면 성욕도 떨어질 정도였다.

 

명훈 생각으로는 자기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었다. 그냥 우연히 만나서 젊은 사람들이 쿨하게 섹스를 하고 같이 즐겼으면, 그만이지 도대체 아무 조건도 맞지 않는 여자가 무슨 사랑을 운운하며 끝까지 달라붙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명훈 주변에도 이런 스토리를 듣도 보고 못했던 이야기다.

 

옛날 영화나 조선시대 사극에서나 나오는 가상의 픽션 아니고는 이런 여자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견디다 못한 명훈은 지현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카톡이나 문자도 못하게 막았다. 그렇게 연락을 끊고 상대를 하지 않으면, 지현이 스스로 알아서 명훈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아이도 지울 것으로 생각했다.

 

명훈은 이런 상황에서 지현의 전화를 차단하고, 새로 만난 제니와 깊은 관계에 빠졌다. 자주 만나 데이트를 하고, 열심히 섹스를 했다. 두 사람은 가끔 이태원에 있는 단골 클럽에 가서 놀았다. 클럽의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명훈과 제니는 서로 약속했다. 모든 과거는 잊어버리고, 서로 두 사람만 만나자고 했다.

 

명훈은 제니를 자신의 부모에게 데리고 가서 같이 식사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집안의 환경이나 조건도 서로 맞는 것 같았다. 명훈은 제니에게 고급 명품도 선물을 했다.

 

구체적으로 속사정을 알게 되면 실망할 부분도 많이 있었고, 더군다나 명훈과 지현과의 관계 등 개인적인 사생활을 정확하게 알면 절대로 결혼이나 계속된 교제를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대부분은 비밀이었고, 굳이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할 고지의무도 없었기 때문에 알려주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상을 보면 별것도 없는 것이었다. 명훈은 성적으로 무질서하고, 바람둥이고, 대학생으로서 공부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집에 돈이 많다는 이유로 사치나 하고, 낭비나 하고, 여자들과 섹스나 하고 돌아다니는 비인격자였다.

 

제니 역시 수많은 남자와 섹스를 하고 돌아다니는 불성실한 여자였다. 그리고 양쪽 부모 역시 파탄이 난 상태로 가정은 화목하지 않고 불화만 가득 찬 상태였다. 오직 돈만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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