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44)

 

영식과 경희 부부, 그리고 다른 남자 한 명, 모두 네 사람은 모텔에서 나와 부근에 있는 카페로 갔다. 영식과 경희는 죄인이었다. 사실 실정법상으로는 사랑은 더 이상 죄가 아니다. 범죄가 아니고, 처벌조항도 없다. 단지 배우자인 남편에 대한 부정행위로서 위자료만 물어주면 된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 사회는 간통죄가 없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간통한 것을 중대한 범죄, 잘못이라고 인식하고 상대 배우자에게 꼼짝하지 못한다.

 

상대 배우자는 마치 자신이 중대한 범죄의 피해자인 것처럼 의기양양하다. 뿐만 아니라 현장을 잡았다는 생각에 자신감도 넘쳐나고, 마치 자신이 경찰이나 검사나 된 것처럼 위세를 떤다.

 

이런 풍경은 오래 전부터 간통죄를 폐지하고 배우자의 간통행위를 단지 민사문제나 가사문제로 보고 있는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아직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라는 속담에서 보듯이, 간통한 남자와 여자는 상대 배우자로부터 맞아죽거나 폭행 또는 상해를 당할 현실적인 위험도 있고, 법을 떠나 사회적으로 망신을 당할 소지도 있기 때문에, 현장에서 들키면 꼼짝을 못하게 되는 모양이다.

 

카페에 앉자 조용하게 틀어놓은 팝송이 나왔다. ‘Power of Love'를 독일 가수 Helene Fischer가 부르고 있었다. 영식이 자주 듣던 노래다. 차를 타고 드라이브하면서 경희와도 같이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참 좋게 들렸는데, 지금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원수인 경희 남편과 만나 들으니 정말 이상하게 들렸다. ‘사랑의 힘’은 이런 경우 긍정의 힘이 아니라, 부정의 힘이었다. 생명의 힘이 아니라, 사망의 힘이었다.

 

테이블에 앉자 경희 남편은 일단 두 사람에게 간통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각서를 쓰라고 했다. 어떻게 준비했는지, 경희 남편은 A4 용지를 몇 장 가지고 왔다. 그리고 작은 휴대용 인주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먼저 영식에게 불러주는 대로 쓰라고 했다.‘각 서 / 성명 주소 주민번호 연락처 / 본인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유부녀인 OOO을 만나 간통행위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OOO가 남편이 있는 유부녀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OO모텔 OOO호실에서 OOO과 간통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날짜 및 서명 (무인)’

 

그리고 마찬가지로 경희에게도 같은 취지의 내용대로 각서를 쓰라고 했다. 영식과 경희는 지금까지 살면서 경찰서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게 무슨 꼴인가? 죄인이 되어 잘못을 인정하고 자백하는 취지의 각서를 써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두 사람은 한 동안 망설였다.

 

그러자 경희 남편은 씩씩대면서 가만 두지 않겠다고 난리를 쳤다. 카페에서 큰소리로 욕을 하니 무척 창피했다. 사랑이 아니라, 성기를 잘못 사용한 것 때문에 문제가 되었으니, 일단은 형이하학적인 문제로 창피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성관계는 언제나 은밀성을 생명으로 한다. 그게 인간과 동물의 차이다. 동물은 교미를 공개적으로 한다. 특히 어떤 동물은 다른 수컷들을 제치고 공격적으로 특정한 암컷을 상대로 성관계를 한다. 힘이 약한 다른 수컷은 밀려나고, 힘이 센 수컷이 자신이 좋아하는 암컷을 데리고 교미를 하는 것을 보고 있어야 한다.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가끔 인간도 그렇게 동물적인 부류의 인간이 있다. 가정집에 침입하여 칼로 가족을 위협하고 남편을 묶어놓은 다음,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부인을 강간한다.

 

정말 사악한 인간이고, 동물만도 못하다. 동물은 암컷의 짝인 수컷을 묶어놓거나 물어서 죽인 다음 교미를 하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든 일반적으로 남녀간의 성행위를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 남들이 보거나 듣지 못하도록 한 상태에서 진행된다. 그렇지 않고 공개적으로 성관계를 하거나 애정행위를 하면, 형법상 공연음란죄로 처벌된다.

 

그런데 지금 공개된 카페에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경희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간통을 했다고 각서를 쓰라고 하면서, 만일 쓰지 않으면 마치 죽일 것처럼 고함을 지르고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영식은 하는 수 없이 각서를 부르는대로 썼다. 그리고 지장을 찍었다. 경희도 어쩔 수 없이 각서를 썼다. 그런 다음, 경희 남편은 영식에게 5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했다. 영식은 일단 알았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지급각서를 또 써주었다.

 

경희 남편은 경희에게는 별도로 이혼에 응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재산분할도 한 푼 받지 못하고, 몸만 나가는 조건으로 서약서를 쓸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남편이 키우겠다고 했다.

 

경희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로 쓸 수 없다고 하면서, 그냥 울고만 있었다. 한 시간 쯤 지난 다음, 경희 남편은 일행과 함께 카페를 나갔다. 카페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작은 운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운명 (15)  (0) 2019.01.02
작은 운명 (14)  (0) 2019.01.02
작은 운명 (13)  (0) 2019.01.02
작은 운명 (12)  (0) 2019.01.01
작은 운명  (0) 2019.01.01

작은 운명 (13)

은영은 정 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갑자기 남녀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 사장이 은영의 남자 친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정 사장 눈에 나서, 비서로서 근무하는 것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여자 편력이 많고, 은영 자신도 무슨 사무능력이나 비서경험이 있어서 비서로 근무를 시킨 것도 아니고, 자신이 다른 여자들보다 인물이 좀 낫고, 몸매가 낫기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만일 은영이 혼자 조용히 있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 친구가 있고, 그것도 싱글이 아닌 유부남과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완전히 확인되면, 정 사장 성격에 그대로 둘 것 같지 않다는 위기의식도 느껴졌다.

 

그래서 은영은 더욱 더 그 자리를 박차고 있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순현과의 관계도 별로 좋지 않게 된 점도 작용해서 은영은 술에 취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 사장이 권하면 사양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마셨다.

 

정 사장도 많이 취하고, 은영도 많이 취한 상태가 되었다. 점점 시간이 흐르자, 은영의 눈에 정 사장이 나이 먹고 늙은 사람이 아니라, 별로 나이 차가 없는 건강한 남자, 멋이 있고, 능력이 있는 남자로 보였다. 성격도 남자 답고 좋아보였다.

 

정 사장은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팔다리의 근육도 단단해보였다. 그리고 돈이 많아 모든 것이 명품이었고, 옷도 아주 비싼 것만 사입고 다녔다. 심지어 넥타이 하나도 몇십만원씩 하는 외제 명품을 차고 다녔다. 시계는 말할 것도 없이 로렉스 제품 몇천만원짜리였다.

 

특히 정 사장은 언제나 로렉스 시계를 차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시계 자랑을 하곤했다. 은영이 사장실에 차를 가지고 들어가도 정 사장은 손님들에게 로렉스 시계가 3천만원 주고 면세점에서 사온 것이고, 그것도 재일교포를 통해 사왔다고 자랑하곤 했다. 왜냐하면 내국인은 그렇게 비싼 시계를 면세점에서 사가지고 들어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밀수에 해당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은영의 눈에 정 사장은 은영의 첫사랑의 남자처럼 오버랩되기도 했다. 또는 지금 만나고 있는 순현의 이미지도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불쌍한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내가 이렇게 흐뜨러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똑바로 행동하고, 나의 몸과 정신을 지키고,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기를 바랄 것이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은영은 순간적으로 술이 깨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어나려고 했다.

 

“사장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술이 취해서요. 이만 제방으로 갈게요. 사장님도 이제 술 그만 드시고, 편히 쉬세요.”

 

은영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그러자 사장은 가지 말라고 중얼거리면서, 술에 취해 쇼파에 쓰러졌다. 은영은 그런 상황에서 그냥 나올 수가 없었다. 잠시 쇼파에 앉아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사장이 불쌍해 보였다. 나이 든 사람이 회사를 경영하느라고 얼마나 힘이 들까? 스트레스도 많을 것이다. 저렇게 술에 취해 쓰러져 자면 속도 아플 테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은영은 그대로 앉아있다가 사장을 깨워서 침대로 옮겨주려고 했다. 그러다가 은영도 잠시 쇼파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한 20분쯤 지나 은영은 화장실에 가려고 잠이 깼다. 화장실을 다녀온 은영은 사장을 흔들어 깨웠다. 자신의 힘으로는 사장을 들어서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은영이 술에 취한 사장을 은영이 깨우니, 사장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은영의 부축을 받고 침대로 이동했다. 그런데 침대에 가서는 은영을 꼭 붙잡아 당기는 것이었다. 은영은 아차 싶었다. 뿌리치려고 했지만 사장의 힘이 너무 강했다.

 

정 사장은 그러나 침대에 누워 은영의 손만 붙잡고 있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은영은 정 사장이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 아래 층에 있는 은영의 방으로 들어갔다. 창밖으로 동경의 밤이 눈에 들어왔다. 호텔 주변에는 화려한 네온사인이 많이 켜져있었다. 은영은 사장 앞에서 너무 많이 술을 마신 것도 후회가 되었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볼까?’ 은영은 술에 취해 샤워도 하지 못하고, 그냥 옷만 벗고 침대에 들어가 골아떨어졌다.

 


'작은 운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운명 (14)  (0) 2019.01.02
작은 운명 (44)  (0) 2019.01.02
작은 운명 (12)  (0) 2019.01.01
작은 운명  (0) 2019.01.01
작은 운명 (43)  (0) 2019.01.01

작은 운명 (12)

 

정 사장은 와인을 마시면서 은영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정 사장은 술에 취하자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정 사장이 대학교 3학년 때였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같은 학교 캠퍼스였어. 학교 수업을 마치고 걸어가는데 그녀가 내 눈에 띄었어. 순간 나는 어떻게 저런 여자가 있을 수 있을까하고 내 눈을 의심했어. 너무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었던 거야. 몇 년 동안 꿈에 그리던 스타일이었던 거지. 그래서 나는 무작정 그녀를 따라갔어. 그녀가 어떤 강의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어.”

 

은영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야기를 이 늙은 영감에게서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약간 짜증이 났다. 그래서 와인을 더 마셨다. 일본 와인은 약간 달콤했다. 드라이한 맛은 적었다. 하지만 지금 은영에게는 그런 와인이 더 좋았다. 머릿속에서는 순현에 대한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내가 일본에 출장 와있는 동안 분명 이 인간은 다른 여자와 놀고 있을 거야. 여자 없으면 못하니까. 이런 남자와 계속 관계를 유지해야 내게 도움이 되는 것도 없을 거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답답하다.’

 

정 사장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젊었을 때의 청춘이 어떻게 마음에 드는 여자를 꼬셨는지, 정복했는지 무용담에 혼자 심취해 있었다.

 

그녀가 강의실에서 나오자 나는 또 그녀를 몰래 뒤따라 갔어. 기술적으로 미행한 거지. 그래서 그녀가 생활하는 원룸까지 알아냈어. 그리고 한 달 정도 그녀를 스토킹한 거지.”

그래서요?”

 

마침내 어느 날 그녀에게 말을 걸어 둘이서 커피를 마실 기회를 가졌어. 그리고 나는 그녀를 꼬시기 위해 많은 거짓말을 했어. 내가 대구에서 올라왔는데, 아버지가 대구에서 아주 돈이 많은 재력가라고 했어. 그리고 내가 외동아들이라 아버지 회사를 이어받아야 하고,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프랑스로 유학을 가야 할 처지라고 했어. 다만, 아버지가 나를 강하게 키우느라고 돈을 쓰지 못하게 훈련시키고 있어서 답답하다고 했어.”

 

그래서 그 아가씨가 넘어갔어요?”

당장은 아니었지만, 내 거짓말이 효과가 있어서 그런지 그 후 가끔 만나서 같이 식사를 했어. 그래서 식사할 때는 내가 어려운 형편에 큰 출혈을 해서 고급 레스토랑으로 갔지. 그러다가 어느 날 같이 술을 마시고 그녀와 같이 야외 공원으로 가서 벤치에 앉아 있다가 숲 속으로 끌고가서 강간을 했어. 그녀는 강하게 저항했지만, 내가 워낙 세게 나오니까 더 이상 반항을 하지 않고 있었어.”

 

그럼 사장님은 고소를 당했어요?”

그러고 나서 나는 무릎을 꿇고 빌었어.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 알아서 하라고 했어. 그러면서 눈물을 흘렸어.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그 아가씨가 용서를 해준 거예요?”

 

그녀는 나에게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했어. 그러면서 혼자 생각을 정리한 다음 일주일 후에 만나서 결론을 내주겠다고 했어. 그래서 일주일 후에 우리는 만났어. 그랬더니 그녀는 내가 사람도 아니라면서 더 이상 자기 눈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 그러면서 만일 한 번 더 눈에 띄면 경찰서에 고소한다고 했어.”

그래서 그 후 어떻게 되었어요? 그걸로 끝이예요?”

 

처음에는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 사장의 이야기는 매우 색달랐다. 그래서 은영도 솔깃했다.

아니지. 물론 처음에는 나도 순간적으로 큰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해서 겁을 많이 먹었어. 그래서 그녀를 다시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매일 술에 취해 잠이 들곤했어. 하지만 그녀는 내게 첫사랑이었고, 내 동정을 준 여자였어. 그리고 처음부터 그녀는 내 마음에 꼭 드는 여자였어. 그래서 나는 젊은 나이에 다시 용기를 냈어. 그녀를 찾아가 편지를 건네주었어. 내 편지에는 그녀 없으면 나는 못산다고 하면서, 고소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어. 내 인생은 끝이라고 썼어.”

 

그래서요? 그녀가 받아준 거예요?”

그녀는 나를 데리고 술집으로 갔어. 그러면서 술을 마시고 울면서 이야기했어. 내가 싫지는 않지만, 강간한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했어. 그리고 자신은 당시 처녀성을 상실했다고 하는 거야. 자기 아버지가 어머니가 시집올 때 처녀 아닌 것 때문에 평생 사이가 좋지 않게 지냈고. 그걸 핑계로 아버지는 평생 바람을 피면서 자신을 정당화했다고 하면서, 그녀가 처녀를 상실했다고 하면 어머니가 실망해서 견디지 못할 거라고 했어.”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정 사장은 갑자기 술에 취해 졸면서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아마 못 이룬 옛사랑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혼자 자기도취에 빠져 술이 급하게 올라온 모양이었다.

 

'작은 운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운명 (44)  (0) 2019.01.02
작은 운명 (13)  (0) 2019.01.02
작은 운명  (0) 2019.01.01
작은 운명 (43)  (0) 2019.01.01
작은 운명 (11)  (0) 2019.01.01

현재 제가 쓰고 있는 작은 운명이라는 소설에는 수많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과 미움, 모순과 갈등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직 특별한 주제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때 주인공들의 인생관, 삶의 방식에 대해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선과 악, 윤리와 비윤리는 사실 경계가 애매하고,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그래서 인생관도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비록 짧지만, 그래도 몇십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듯이, 우리 인생도 10년 정도의 주기로 바뀌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은 운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운명 (13)  (0) 2019.01.02
작은 운명 (12)  (0) 2019.01.01
작은 운명 (43)  (0) 2019.01.01
작은 운명 (11)  (0) 2019.01.01
작은 운명 (42)  (0) 2018.12.31

작은 운명 (43)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텔방은 평온했다. 영식과 경희 두 사람만의 공간이었다. 알몸으로 사랑을 나누고, 서로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속정도 들었고, 서로에게서 따뜻한 배려도 받았고, 마음의 위안도 받았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 이상하다. 혼자 있으면, 몸과 마음은 고독을 느끼고 깊은 심연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한다. 자신과 다른 또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한다.

 

상대를 통해 자신을 투영시키고, 몸과 몸을 마찰시킴으로써 체온을 유지하고,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 마치 발전기가 양과 음의 극을 연결시켜 에너지를 창출하듯이, 인간도 똑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몸뿐 아니라, 마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마음은 죽음을 향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마음과 연결되면 삶을 향한다. 그래서 죽음을 망각한다.

 

영식과 경희는 비롯 허용되지 못한 사랑이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사랑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생활과도 연결되어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가끔 만나 섹스를 하면서, 살아가면서 받는 많은 스트레스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성적 결합을 통해 서로가 상대를 자신의 것이라고 의식적으로 확인하려고 했다. 완전한 소유는 아니어도, 관계한다는 것은 그 순간 일시적인 소유라고 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을 완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정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작용을 한다. 영식과 경희는 아직 젊은 나이였기 에 섹스에 대한 욕구도 해소해야 했다.

 

육체적인 쾌락도 매우 중요한 삶의 요소이며, 원동력이라고 믿고 있었다. 특히 두 사람 모두 집에서는 배우자와는 거의 관계를 하지 않고 지내는 생활인이었다. 그래서 더욱 두 사람 사이에서는 이런 섹스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호르몬 분비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건강에도 좋지 않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두 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늘 하던 대로 섹스로 몸을 풀고 개운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가 커피를 마실 생각이었다.

 

커피는 인류가 개발해 낸 기호식품 중에서 아마 지금까지는 최고가 아닐까 싶다. 남자와 여자가 뜨거운 사랑을 한 다음, 겨울의 쌀쌀한 날씨에 눈이 덮힌 창밖을 보며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것은 아주 작은 인생의 행복이 아닐까?

 

하지만 사람의 일은 늘 뜻한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게 경험에서 얻게 되는 인생의 진리다. 삶의 모순이다. 모텔방문이 열리고, 커튼이 올려진 상태에서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 점령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 평온했던 공간은 그야말로 악의 소굴로 변했다. 그곳은 악마와 비악마가 서로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무서운 전장터가 된 것이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다음, 영식과 경희는 옷을 챙겨 입고 경희 남편 일행과 함께 모텔 밖으로 나가 부근에 있는 커피숍으로 갔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어차피 가려고 했던 커피숍인데, 둘만이 아니라, 다른 두 사람이 더 같이 가게 된 것이다.

 

그것도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미움을 나누기 위해서 가는 것이 되었다. 그때의 커피 맛은 커피가 아니라, 지옥의 문 앞에서 피우는 향의 냄새가 날 것이다.

'작은 운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운명 (12)  (0) 2019.01.01
작은 운명  (0) 2019.01.01
작은 운명 (11)  (0) 2019.01.01
작은 운명 (42)  (0) 2018.12.31
작은 운명 (10)  (0) 2018.12.31

작은 운명 (11)

 

은영이 약을 사가지고, 요구한 서류를 가지고 호텔방으로 가자, 정 사장은 목욕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은영은 민망했다. 호텔방에서 남자와 단 둘이 있는데, 그것도 목욕가운만 입고 쇼파에 앉아 있으니 이상했다. 은영은 서류와 약만 건네주고 바로 나오려고 했다.

 

정 사장은 은영에게 쇼파 맞은 편에 앉으라고 했다. 서류를 보면서 몇 가지 지시를 했다. 그러나 막상 지시하는 내용은 은영이 할 일도 아니었고, 모든 것은 다른 남자 직원들이 받아야 할 지시였다.

 

정 사장은 또 약을 먹기 위해서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냥 자신이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면 되는 것인데, 그것조차도 은영에게 시켰다. 해외에 나와서까지 은영을 여비서로 생각하고, 이런 저런 잔심부름을 시키는 것이었다.

 

은영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비서의 지위에서 하라는 대로 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크게 거부반응이 없었다.

 

나이 많은, 그리고 자신이 모시는 사장이 일본에 와서 술을 많이 마시고, 속이 좋지 않아 약을 사달라고 하고, 무슨 필요가 있어 서류를 가져다 달라고 하고, 약을 먹기 위해 물을 가져다 달라고 하니, 그 정도야 있을 수 있겠다 싶어서 그냥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비서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장은 밖에서 사가지고 온 와인 은영과 함께 마시자고 앴다. 순간, 은영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물론 은영 자신도 그날 저녁 식사 때 사케를 많이 마셨다. 많이는 아니지만, 술에 취한 상태였다

 

그래서 은영은 자신의 방에 들어가 샤워를 하려고 하는데, 정 사장의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지? 호텔방에서 단 둘이서 와인을 마시고 있으면 이상하지 않을까?’ ‘큰일이네. 같이 간 다른 남자 직원들이 알면 오해를 할 텐데.’

 

은영은 그러나 싫다는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정 사장이 하자는 대로 함께 와인을 마셨다. 마침 그곳에는 와인 안주도 있었다.

 

. 편하게 앉아서 술이나 마시자. 아무 걱정하지 말고.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애로사항이 있으면 말해 봐.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 그리고 결혼은 언제 할 거지?”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회사 일이나 열심히 하려고요. 근무하는데 아무런 애로사항도 없고요. 사장님께서 잘 해주시니까 고맙습니다.”

 

그래. 요새 세상에는 결혼 빨리 하는 게 능사가 아냐. 여자도 사회생활을 해서 성공하는 게 중요하지. 괜히 능력 없는 남자 만나 고생만 하고, 애나 키우면 여자로서는 자신의 인생이 없는 거야.”

. 맞아요. 저도 빨리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누구한테서 들었는데, 박 과장 사귀는 애인이 유부남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어. 유부남은 만나지 않는 게 좋아. 잘못하면 망신을 당하고, 골치 아픈 게 유부남이야. 원하면 내가 좋은 데 중매를 해줄 게.”

 

은영은 갑자기 망치로 뒤퉁수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아니 어떻게 사장이 그런 사실을 알았을까? 회사에서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린 걸까?’

 

은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한 달 전부터는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 친구와 헤어지려고 마음 먹고 있는 상태였다. 그 이유는 그 남자 친구가 어디에서 성병을 옮아가지고 와서 은영에게도 옮겼기 때문이었다. 은영은 병원에 가서 창피를 무릅쓰고 치료를 받았다. 그때 은영은 유부남인 남자 친구 순현에게 따졌다.

 

아니, 나를 만나면서 또 다른 여자와 관계를 하고, 성병까지 옮겨요? 정말 나쁜 사람이네. 이제 더 이상 만나지 말아요.”

무슨 소리야? 나는 다른 여자와 전혀 하지 않았어. 당신이 다른 곳에서 옮겨온 거지?”

 

그 남자는 오히려 은영에게 뒤집어씌우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은영에게 바람 피는 여자라고 난리를 쳤다. 은영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누가 먼저 성병을 옮아가지고 상대에게 옮겼는지 의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은영에게는 조사권이나 수사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일 이후 은영은 순현과 관계를 할 때 콘돔을 사용했고, 가급적 성관계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갑자기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냉각되었고, 애정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잘못했다가는 에이즈에 걸려서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순현이 성병에 걸려 은영에게도 옮겼으면, 당연히 순현의 부인에게도 옮겼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부인이 난리를 쳤을텐 데, 전혀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순현의 말대로 순현은 집에서는 절대로 관계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순현을부터 성병을 옮고 난 다음부터는 순현에 대한 정은 완전히 떨어져버렸다. 그렇지만, 갑자기 딱 끊을 수 없는 것은 여전의 순현의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운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운명  (0) 2019.01.01
작은 운명 (43)  (0) 2019.01.01
작은 운명 (42)  (0) 2018.12.31
작은 운명 (10)  (0) 2018.12.31
작은 운명 (9)  (0) 2018.12.30

작은 운명 (42)

 

불과 몇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영화 속의 장면이 현실화되었고, 영식은 그 주인공이 되었다. 사람은 순간적으로 추락한다. 본래 추락은 예고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도 그렇고, 등산을 갔다가 발을 잘못 디뎌 추락하는 것도 그렇다. 고위 공무원이 뇌물사건으로 구속되면서 검찰청 앞에서 사진을 찍히는 것도 순간적인 추락이다.

 

이미 예고되어 있다면 그건 추락이 아니다. 추락의 순간성 때문에 인간은 순식간에 파멸되고 만다. 추락은 적당한 아픔을 주는 게 아니라 콘크리트 바닥에 개구리를 메다 내치는 것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즉시 사망이라는 치명적인 결과가 추락의 본질이다.

 

설사 목숨은 건진다고 해도 그 치명적인 상처가 주는 공포심은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게 만든다. 수시로 가위에 눌리고, 자신의 실존에 커다란 문신을 해놓고, 무거운 바위를 메달아놓은 것처럼 추락의 상흔은 영원히 존재한다.

 

우리나라 모텔은 많은 경우 여행자들을 위한 공간이라기 보다는 잠시 쉬었다 가는 남자와 여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주로 정식의 부부생활을 하지 못하는 남자와 여자들이 들어와 사랑을 나누고 떠난다.

 

방에 들어왔다가 불과 2-3시간의 짧은 여정을 마치고 나가는 나그네들은 삶의 긴 여정에 있어서 방황하는 철새들이다. 대실이라는 개념은 정해진 제한된 시간 동안만 방에 머물다가 시간이 되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짧은 시간, 성급하게 정사를 치루고 나간 방에는 사랑이 아닌, 욕망의 전차가 급하게 굉음을 내고 떠난 흔적이 남는다. 모텔 측에서는 그 더러운 욕정의 찌꺼기를 빨리 치우고, 시트를 갈고, 화장실 청소를 한 다음, 또 다른 손님을 받아야 한다.

 

다음 손님은 아직 전에 들어왔던 남자와 여자의 배설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오직 시트 천 하나만 깨끗하다는 이유로 다시 발가벗고, 그 위에서 허망한 욕정을 채우려고 발버둥친다. 분위기나 무드는 찾아볼 수 없는 시간이고 공간이다.

 

그들은 마땅히 머무를 둥지를 상실한 채, 삭막한 초원에서 순간적으로 도피하고, 커튼을 내려 어두운 공간을 만든 다음 그곳에서 실존의 고독함을 진한 몸짓으로 표현한다.

 

그들이 내는 신음소리는 환희라기 보다는 힘든 삶의 무게를 상징한다. 말초적인 쾌락을 얻는 것 같지만, 떠날 때 그들은 허무와 절망을 또 다시 가슴에 품고 나선다.

 

영식과 경희는 유부남, 유부녀로서 사랑을 나눌 때 주로 모텔을 이용했다. 우리나라 모텔은 미국의 모텔과는 전혀 다르다. 미국의 경우 모텔은 주로 도심지에서 벗어난 교외에 위치한다.

 

그야말로 자동차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다. 가족 단위나 연인끼리 여행하는 사람,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다. 가격도 상대적으로 싼 편이다.

 

우리나라 모텔은 정 반대다. 주로 도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아니면 드라이브 코스 지점에 위치한다. 대개는 교통이 편리한 지하철역 부근에 밀집되어 있다.

 

이용하는 사람들 중 여행자는 별로 없고, 주로 섹스를 하기 위해 남녀가 들어가는 곳이다. 들어갈 때부터 두 사람은 섹스를 할 의사의 합치가 되어 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다.

 

모텔에 들어가면 일단 두 사람은 샤워를 하고 잠시 있다가 곧 섹스에 들어간다. 그리고 섹스가 끝나면 다시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나온다. 그 다음 곧 바로 헤어지거나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신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모텔 이용 현황이다. 이곳에는 낭만도 없고 진정한 사랑도 부재한다. 오직 육체적인 쾌락을 위한 섹스의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작은 운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운명 (43)  (0) 2019.01.01
작은 운명 (11)  (0) 2019.01.01
작은 운명 (10)  (0) 2018.12.31
작은 운명 (9)  (0) 2018.12.30
작은 운명 (41)  (0) 2018.12.30

작은 운명 (10)

 

어느 날 일일주식회사의 정 사장과 임원 3명이 일본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은영도 출장자 명단에 끼어 있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여비서가 외국에 업무차 출장을 가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회사에는 영어와 일본어를 잘 하는 직원들이 있었다. 은영은 영어도 못하고, 일본말도 전혀 못했다.

 

그런데도 일본에 사장 일행과 같이 출장을 간다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은영 입장에서 안 가겠다고 말할 용기도 없었다. 회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비서직에서 일반 직원으로 부서를 옮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은영의 남자 친구 순현은 이런 사실을 알고, 왜 따라 가느냐고 펄펄 뛰었다.

 

“네가 가서 할 일도 없잖아? 여비서가 일본까지 따라가서 무엇을 하자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혹시 사장이 해외에서 데리고 놀려는 건 아닐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 마! 하지만, 어쩌겠어. 회사에서 내가 할 역할이 있기 때문에 출장을 같이 가자는데, 거절할 수 없잖아?”

“응. 알았어. 따라 가더라도 꼭 필요한 비즈니스만 하고, 남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노래방 같은 곳에는 가지 마.”

“물론이지. 내가 여직원이지, 남자들 놀이개는 아니잖아.”

 

은영은 3박 4일 일정으로 동경으로 출장을 갔다. 처음 가보는 동경은 역시 동경이었다. 특히 신주꾸와 아카사까 동네는 볼 것도 많고, 일본 식당에서 마시는 사케는 너무 부드럽고 맛이 좋았다.

 

그래서 은영은 기회 있을 때마다, 특히 하루 스케줄이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장소에서는 사케를 많이 마셨다. 심지어는 호텔 방으로 사케를 사가지고 와서 혼자서도 마셨다.

 

대체로 일본에서 은영이 하는 일은 그냥 사장 따라 다니는 일이었다. 특별히 차심부름을 할 일도 없었다. 주로 호텔 비즈니스룸에서 회의를 하고, 거래 업체 회사를 방문하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데 동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회사에서 특별히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옷도 매일 갈아입을 것을 가지고 갔다.

 

그래서 화장도 제대로 하고, 옷도 좋은 것을 가지고 젊은 여성으로서 좋은 이미지를 주려고 노력했다. 그게 다 회사를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은영은 이 대목에서도 고개가 갸우뚱했다. ‘글쎄 한 번 보고 말 일본 거래처 사람들에게 비서인 내가 잘 보여야 할 이유는 없을텐 데...’

 

출장 마지막 날 저녁 9시 경, 정 사장은 갑자기 은영을 자신의 방으로 오라고 했다. 어떤 서류를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국에 가서 약을 사다달라고 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속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 사장은 원래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었다. 담배도 계속 피웠다. 나이는 58살이었다. 돈이 많아 서울에서 최상류층에 속했다. 부인도 미인이라고 들었고, 자녀들도 모두 출세해서 떵떵거리고 사는 집안이었다.

 

은영은 사장이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그것도 사장이 혼자 있는 호텔 방으로 가져다 달라는 것을 못마땅했다. 같이 따라간 남자 직원도 있는데, 왜 하필 여자인 자신을 호텔방으로 오라고 하고, 약을 사가지고 오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하지만 은영은 사장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정 사장은 가난한 집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의지가 강했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정 사장은 성격이 급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했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들을 무시한다.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거나,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보다는 열등한 인간이라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낮추어본다.


'작은 운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운명 (11)  (0) 2019.01.01
작은 운명 (42)  (0) 2018.12.31
작은 운명 (9)  (0) 2018.12.30
작은 운명 (41)  (0) 2018.12.30
작은 운명 (40)  (0) 2018.12.28

작은 운명 (9)

은영이 일일주식회사에 들어온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림은 중학교 때부터 남다른 소질을 보여 열심히 했고, 그래서 전공으로 삼았으나, 막상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는 전공을 살려 취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가 어떻게 일일주식회사에 사원으로 들어왔는데, 입사한 지 얼마 있지 않아 사장 눈에 띄어 비서로 발탁되었다. 사장은 은영을 보고, 자신의 취향에 딱맞는 얼굴과 몸매,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회사 다른 임원들이 반대하는 데도 불구하고 무조건 비서실에서 근무하도록 지시했다.

은영은 비서로서 특별히 하는 일도 없었다. 그냥 사장 비서로서 차심부름이나 하고, 개인적인 심부름만 하는 정도였다. 그 이상으로는 은영의 입장에서 회사 업무를 처리할 능력도 없었다.

회사에서 사장 비서는 상당한 힘을 가진다. 임직원들이 비서에게 잘 보여야 편하기 때문에, 비서는 사장 이외의 사람들에게 굽실거릴 이유가 없다. 만일 회사 임직원들이 비서에게 잘못 보이면, 비서는 사장에게 그들에 대해 나쁘게 이야기하고, 모함을 한다. 그러면 사장은 비서의 말만 듣고 임직원을 해고하기도 한다. 아니면 한직으로 내쫓아버린다.

지금까지 대기업의 비서로 들어가 출세한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특히 여자로서 그룹의 회장에 잘 보이면, 해외여행을 수행하고 다니다가 정을 통하고 아예 애인으로 신분상승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아이라도 하나 낳으면 완전히 팔자를 고친다.

은영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났다. 그리고 그 여파로 아버지는 감방까지 갔다왔다. 징역을 1년 살고 나왔다. 은영은 동생 2명과 병든 어머니를 부양해야 할 입장이 되었다. 아버지 옥바라지도 모두 은영의 몫이었다.

이때 만난 사람은 유부남이었다. 은영에게 상당한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에, 은영은 자연스럽게 그 유부남의 애인이 되었다. 은영은 집안 사정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 사람과 연애를 했고,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처음 어느 작은 회사에 취직을 했을 때에도 그 남자는 은영에게 명품 가방이나 옷을 사주고, 돈을 넉넉하게 주어서 회사에서는 은영이 부잣잡 딸이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다.

은영이 예뻐서 그랬는지 몰라도, 이상하게 처음 취업했던 회사에서도 남자 상무가 치근덕거렸다. 회식 자리에서도 그 상무는 은영을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노래방에도 데리고 가고, 꼭 은영을 택시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은영은 그런 것이 느끼하고 싫었다. 나이 든 상사가 자신에게 성희롱을 하는 것같고, 여자로서 생각하고 꼬셔서 성관계를 하려는 의도를 간파하고는 정말 싫었다. 그래서 그 회사에서도 몇 달만에 그만두었다.

다만, 직장이 아닌 밖에서 만난 유부남인 애인과 연애를 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 유부남의 와이프에게 미안한 마음도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그 유부남과 결혼한다는 생각도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냥 답답한 현실에서 남자 친구 정도로 생각하고 나중에 시간이 가면 자연스럽게 헤어질 것으로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은영은 대학교 1학년 때 정말 좋아했던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1년 만에 은영의 가까운 여자 친구와 애인이 되면서 은영을 멀리했다. 그때 은영이 받은 충격은 정말 대단했다. 정말 자신이 좋아했고, 순수한 첫사랑이었고, 첫경험이었다.

물론 그 남자친구와 은영의 여자 친구는 그 후 헤어졌지만, 은영은 이 일로 인해서 남자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남자로부터 받은 트라우마가 무의식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를 별로 믿지 않게 되었고, 섹스에 대한 관념도 무뎌졌다.

'작은 운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운명 (42)  (0) 2018.12.31
작은 운명 (10)  (0) 2018.12.31
작은 운명 (41)  (0) 2018.12.30
작은 운명 (40)  (0) 2018.12.28
작은 운명 (15)  (0) 2018.12.28

작은 운명 (41)

유부남과 유부녀가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무방비상태다. 자신의 배우자들이 무엇을 의심하고, 은밀한 관계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아니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주의를 하지 않고 있다.

만약 들켰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당장 자신들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대로, 사랑의 감정을 나누고, 육체적인 쾌락과 순간적인 쾌감을 느낄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방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쓰나미가 들이닥쳤다. 화산이 폭발하고 성난 이리떼가 달려들어 물어뜯고 있는 것이다. 그게 법과 현실의 괴리다. 윤리규범과 상식적인 법감정의 차이다.

어찌 되었든, 경희는 나름대로 많은 것을 갖춘 젊은 여자다. 교양도 있고, 센스도 있고, 성관계에 있어서도 영식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그런 여자를 남자라면 당연히 보호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위해로부터 막아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갑자기 닥친 상황에서 남자는 올바른 판단을 하기 어렵다. 그래서 영식은 이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남편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경희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경희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게 사람의 이중성격이다.

일이 잘못되면 두 가지 측면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취한다. 감사와 원망, 이 두 가지는 항상 따라다닌다.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가 우세하면 다른 한 쪽은 묻혀 버린다. 그냥 사라져 버린다.

남편이 그렇게 의심하고 뒤를 쫓는다는 것을 예상했으면 당연히 자신에게 이야기해 주고, 만나지 말든가 더 조심했지 않았겠느냐는 식으로 영식은 경희를 탓했다. 물론 속으로만 탓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영식은 경희로부터 그녀의 남편이 경희를 의심하고 뒤를 쫒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

물론 경희 자신도 남편이 자신을 의심하고 사람을 시켜서 현장까지 잡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식에게 일체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던 것이다.

영식은 유부남이었지만 경희를 만날 때 자신의 부인이 경희 남편처럼 크게 문제 삼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식은 경희의 경우는 다를 것이라고 믿었다. 경희 남편의 성격이나 예상되는 행동은 오직 경희만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희로서는 영식을 만날 때, 적어도 경희 남편이 경희가 바람을 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했어야 하고, 그래서 더욱 조심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영식은 이런 상황에서 경희를 탓하는 것은 결코 인간적인 사고나 행동은 아닐 것이다. 태초부터 사람들은 남의 탓을 하기 시작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의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으로부터 질책을 받게 되자 아담과 이브는 뱀의 탓과 먹으라고 권한 이브의 탓을 했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가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변명했다. 이브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뱀의 탓으로 돌렸다(창세기 3장 12절-13절).

그러나 아담과 이브는 그와 같은 변명과 남의 탓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그 이후에도 사람들은 일이 잘못되면 끊임없이 남의 탓을 한다. 잘 되면 내 탓, 잘못되면 네 탓이다.

사람은 어떠한 경우이든 남의 탓을 해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이 먹어 벌거벗은 몸으로 침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이불을 들추고 사진을 찍고, 때리고 욕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법을 떠나서 얼마나 수치스럽고 혼란스럽겠는가?

'작은 운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운명 (10)  (0) 2018.12.31
작은 운명 (9)  (0) 2018.12.30
작은 운명 (40)  (0) 2018.12.28
작은 운명 (15)  (0) 2018.12.28
작은 운명 (14)  (0) 2018.12.2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