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5)

 

통영이 구속된 사연은 이랬다. 통영은 자가용도 없는 처지에 늘 신라호텔과 하얏트호텔에 가서 살았다. 하루는 신라, 하루는 하얏트에 가서 놀았다. 물론 하루에 드는 비용은 로비라운지에서 마시는 커피값이다.

 

식사는 호텔 밖에 나가서 싸구려 점심을 먹었다. 편의점에서 간단히 김밥을 먹거나, 라면을 먹었다. 하지만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세련된 매너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에 비해 매우 젊어보였다.

 

남자가 젊어보이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꿈을 꾼다. 하지만 젊어보여서 열심히 사회생활을 하면서 도움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남자가 제 할 일은 하지 않고 여자를 꼬시거나 사기를 치려고 젊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곧 독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는 법이다.

 

통영은 기본적인 생활영어를 원어민 발음으로 하고, 일부러 한국말은 서툰 것처럼 더듬더듬했다.

 

통영이 중학교 다닐 때 가장 자신 있었던 과목은 국어였고, 수학이나 영어는 거의 빵점 수준이었지만, 사회에 나와서 사기를 치려고 마음 먹으니 고의로 한국어는 서툴게 해서 재미교포인 것처럼 하고, 영어는 읽을 줄은 모르지만, 아주 간단한 인사말이나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네이티브 스피커처럼 발음할 수 있도록 피나는 노력을 반복했다.

 

예를 들면, Good Morning을 발음할 때 보통 사람은, ‘굿 모닝이라고 한다. 그런데 통영은 일부러 모닝의 ‘r’발음을 길게 함으로써 표를 내는 것이다. , ‘굿 모오오닝이렇게 명확하게 ‘r’이 들어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야 ‘morning’‘moning’과 발음상 구별되는 것이다.

 

통영은 호텔 로비에서 밖을 내다보면서 유심히 살펴본다. 외제차를 손수 운전하고 내리면서 발렛 파킹을 맡기는 여자만 특별히 관찰한다. 그런 다음 그 여자가 호텔에서 볼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는 시점에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재미교폰데, 잠깐 여쭤봐도 될까요?”

.”

제가 양수리를 가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면 좋을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미안합니다.”

 

물론 이것은 처음 수작에 불과하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호텔에서 경기도 양수리 가는 길을 지도를 펼쳐놓지 않고 안내를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군대에서 독도법을 열심히 배워서 향도 역할을 3년간 했던 사병 출신 남자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이런 길을 묻는 사람이 있는 것이 세상이다. 맹사장도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남자가 종로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떤 미모의 젊은 여성이 길을 물어왔다.

 

여기서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질문을 들은 남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글쎄요. 아마 택시를 타고 가는 데 좋지 않을까요?“

여성은 고맙다는 듯이, ”, 잘 알았습니다.“

 

통영은 양수리 가는 길을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이미 그곳에 수십차례 가보았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어렵고 말도 되지 않는 질문을 던져놓은 것은 낚시꾼이 미끼를 던져 놓는 것과 같다.

 

벤츠와 비엠더블유, 아우디 같은 외제차를 발렛으로 맡기고 한국의 상류층을 자처하는 괜찮은 여성들이 나타날 때마다 통영은 비슷한 질문을 한 다음, 계속 로비 주변을 서성인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사기꾼은 우선 머리가 좋아야 하고, 기억력이 탁월해야 한다. 머리가 나쁘거나, 둔하거나, 눈치가 없는 사람, 기억력 뇌세포인 해머 부분이 하얗게 변해서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는 사람은 절대로 남을 속여서 돈을 벌 수 없다.

 

자기 자신의 몸똥아리도 제대로 콘트롤 못하는 주제에 똑똑한 타인을 움직여 그의 지갑에서 돈을 빼낼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그것은 병약한 말을 타고 눈이 쌓인 알프스 산맥을 넘으려는 바보처럼 실패하고 감방에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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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4)

 

맹사장은 통영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우선 죄명이 사기죄이기 때문에 일단은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맹사장은 구치소에 들어온 이후 수많은 사기꾼을 보았다.

 

물론 개중에는 억울하게 고소인의 무고 내지 허위과장 주장에 의해 자신의 혐의 없음을 충분히 입증하지 못하고 구속되어 들어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런 억울한 사람이 무죄를 받고 나가는 것은 거의 보지 못했다.

 

물론 사기죄로 구속된 피고인이 제대로 해명을 못하고, 충분한 반대증거를 대지 못하고, 돈이 없어 변호사를 제대로 사지 못해서 그런 수도 있겠지만, 맹사장이 보기에는 경찰이나 검찰, 법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인권의식이 부족한 것임은 틀림없었다.

 

어떤 경우에는 맹사장이 보기에 수사기괸에서 고소인을 위해 청부수사를 하는 것같기도 했다. 고소인의 주장만 듣고, 피고소인의 주장은 묵살해 버린다. 고소인의 꾸며낸 증거자료만 가지고, 피고소인이 억울하다고 울부짖는 부분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경찰에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편파수사를 해서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청에 송치하면, 검사는 대체로 그래도 법원에 사건을 넘긴다.

 

그러면 법원에 가서는 고소인을 증인으로 불러 신문한 다음, 증거가 충분하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한다. 실형을 선고하는 경우에는 도주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법정 구속을 한다.

 

곧 바로 교도관에게 인계되어 구치소로 옮겨져 감방에 들어간다. 그때부터는 구속상태로 항소심이나 상고심의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맹사장이 볼 때 일반적으로 사기죄로 구속되어 들어오는 사람들은 실제 사기꾼인 경우가 많았다. 사기꾼은 구치소에 들어와서도 거짓말을 많이 하고, 밖에 나가 또 사기를 칠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중에 재소자가 출소한 다음, 같은 감방에 있던 사기꾼에게 걸려들어 사기를 당하는 사례도 있는 것이다. 통영의 입장에서도 경계심을 갖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같은 감방에 있는 다른 재소자들의 죄명은, 횡령이나 배임죄, 교통사고처리특례법위반, 폭력범죄, 성범죄 등이어서 별로 경계를 하지 않았지만, 별로 의심하거나 경계를 하지 않았지만, 맹사장의 죄명이 사기죄인 것을 알고, 즉각적으로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통영은 원래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중퇴를 했다. 통영의 사연인즉 이랬다. 통영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사기죄로 구속되면서 집안이 엉망이 되었다.

 

그 바람에 학교 다닐 때 통영은 오토바이를 타고 중국집 짜장면을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체격이 컸기 때문에 남들이 보면 대학생 정도로 보였다.

 

그런데 체격이 크다는 이유로 학교에서는 불량서클의 타겟이 되었다. 통영은 나름대로 성깔이 있었기 때문에, 싸움은 못했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량서클 멤버들에 의해서 집단폭행을 당했다.

 

그때 통영의 아버지는 구치소에 있었기 때문에, 보호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고, 통영 입장에서는 어머니가 충격을 받을까봐 학교에서 당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살아남기 위해서 통영은 불량서클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서클활동을 하고, 싸움판에도 여러 차례 끌려다녔다. 그런데 아버지 옥바라지를 하는 어머니가 너무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통영은 학교 서클의 선후배들로부터 돈을 빌려다가 어머니에게 주었고, 나중에 그 돈을 못갚게 되자, 사기꾼으로 몰렸다.

 

그 때문에 통영은 공부를 잘 하지는 못했지만, 그토록 다니고 싶었던 학교를 더 이상 못다니고 말았다. 그 후 이곳 저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직장 생활을 하였고, 그러면서 타고난 머리와 기질을 최대한 활용해서 아주 전문적인 프로 사기꾼이 되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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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3)

 

맹사장은 군대를 면제받았기 때문에 젊었을 때 단체생활을 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군대가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른다.

 

군대 가서 단체생활을 하게 되면, 남의 눈치도 보게 되고, 공동으로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늘 콤플렉스를 느꼈다.

 

맹사장은 구치소에 있으면서 형법책을 많이 보고 있었다. 대법원 판결도 읽고, 형사사건에 관한 법률지식에 관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재소자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그는 감방 안에서 자연스럽게 소문이 났다. 소문이 퍼지다 보니 일부는 와전되기도 했다. 다른 방에서는 맹사장이 변호사 자격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고, 미국에 유학 가서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천재라고도 했다.

 

심지어는 맹사장의 이혼한 전 부인이 현직 검사라는 엉뚱한 말도 퍼졌다. 하지만 정작 맹사장 자신의 재판에서는 완전히 져서, 검사가 구형을 36개월 했는데, 판사는 고작 6개월만 깎아주고, 실형 3년이라는 무거운 형을 선고했던 것이다.

 

맹사장은 판결 선고를 받으러 가는 날, 아침에 담당 변호사에게 전화로 물어보았다. ‘판결 선고가 어떻게 날 것 같아요? 변호사님!’ ‘글쎄요. 제 경험으로 봐서는 징역 1년이 20%, 집행유예가 80%라고 봐요. 너무 걱정마세요. 판결 선고 잘 받고 오세요.’

 

그때만 해도 맹사장은 옛날에 고시공부는 했지만 실무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래서 변호사만 무조건 믿고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유명한 역학자가 맹사장은 사주팔자 관상에 관재수가 1%도 없다는 말을 한 것을 철저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검사가 징역 36개월을 구형했을 때도 장난인 것으로 알았다.

 

검사는 고소인이나 피해자 편을 하기로 작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형식적으로 그러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막상 판사가, ‘피고인을 징역 3년에 처한다라고 선고하고, 곧 이어서 교도관에게 구속영장을 주면서, 데리고 가라고 했을 때 맹사장은 기절할 뻔했다. 그리고 법원에서 구치소 호송버스를 타고 구치소로 향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초원에서는 무리에서 이탈한 얼룩말을 사자들이 습격을 한다. 얼룩말은 죽기 살기로 필사적으로 도망가지만, 얼마 가지 못해, 불과 몇 분 안에 사자의 무섭고 날카로운 이빨은 얼룩말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져 질식시킨다. 얼룩말의 고통은 잠시뿐,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인간은 더 잔인하다. 갑자기 법정에서 판사의 말 한 마디에 무서운 사자들이 수갑을 채우고, 포승줄로 묶고, 자유를 완전히 박탈한다. 그리고 동물우리와 같은 감방에 처넣는다.

 

외부와는 차단되고, 옷도 군대식으로 통일된 색깔로 바꾸고, 이름 대신 번호가 주어진다. 구치소에서 재소자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번호만 알면 되고, 번호로 움직이는 것이 효율적이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중그등학교에서도 같은 반에서 번호만 가지고 출석을 부르거나 성적표를 나누어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맹사장이 몇 달 지나서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같은 방으로 신입자가 들어왔다. 45살이라는 통영씨는 처음 들어와 가볍게 인사만 하고 며칠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죄명은 사기라는데, 얼굴이나 말하는 태도로 보아서는 도저히 사기꾼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너무 순진해 보이고, 진지해 보였다. 재소자들은 그의 정체에 대해 매우 궁금해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자, 돈을 잘 썼다.

 

영치금을 가지고 재소자들에게 먹을 것도 사주었다. 책은 주로 미국말로 된 경제와 정치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일본어로 된 철학책과 소설도 읽고 있었다. 분명 우리나라 사람이 맞는데, 한국말로 된 책은 전혀 보지 않고 있었다.

 

외국책을 읽으면서 혼자 조용히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 분명 학식이 깊고, 책이 재미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영어와 일본어로 된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그냥 표지가 고급스럽게 생겼다는 것만 확인할 뿐이었다.

 

무슨 책이냐고 묻고, 내용이 어떠냐고 물어도 통영씨는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시간이 가자, 그는 서서히 자신의 정체에 대해 1급 군사기밀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저는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가서 살다가 나이 들어 한국에 돌아왔어요. 아버님은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주유소를 5개 경영하고 있어요. 제가 고국에 돌아가서 사업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우선 100억을 가지고 한국에 가서 작은 사업부터 연습삼아 해보라고 해서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한국에서 호텔 사업을 하려고 준비하던 중, 같이 투자하겠다고 달라붙은 여자 세명으로부터 억울한 고소를 당해서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예요. 저는 곧 나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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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

언젠가 명훈 아빠는 고등하교 친구인 맹사장을 만나 같이 술을 마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구치소와 교도소 이야기였다. 맹사장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법대에 다니면서 고시공부를 했는데, 이상하게 꼭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는 것이었다. 같이 공부하는 법대 선배나 후배들이 보면 맹사장 실력은 법대 교수보다 낫고, 판검사보다도 좋은데, 시험만 보면 근소한 차이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운칠기삼이라고 모든 시험은 운이 중요한데, 그놈의 운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재수가 없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맹사장 부모들이 용한 점쟁이에게 가서 점을 쳐보니, ‘맹사장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를 옮겨야 한다’고 했다. 조부모가 제대로 밥도 못 얻어먹고 구천을 떠돌고 있으니 손주가 잘 될 까닭이 있겠느냐고 맹사장 부모를 욕을 하면서 꾸짖었다.

사실 욕을 먹어도 쌀 노릇이었다. 그때서야 고시생인 맹사장도 그동안 왜 떨어졌는지 이해가 갔다. '아! 역시 세상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고, 조상님이 중요한 거야! 이제 됐다.'

그래서 비싼 돈을 들여서 천도제도 지내고, 산소를 명당 자리로 옮겼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산소를 옮긴 다음 맹사장은 오히려 더 큰 점수 차이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맹사장이 제일 싫어해서 잘 보지 않은 곳에서만 문제가 출제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10년을 고시낭인으로 지내던 맹사장은 끝내 고시를 포기하고, 맨발로 뛰어서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다가 지리산에서 오래 공부를 했다는 어떤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해서 연쇄부도가 났다. 한순간에 모든 재산을 날리고, 억울하게 사기꾼으로 몰린 맹사장은 징역을 3년 살고 나왔다.

그때 맹사장을 맡았던 젊은 변호사는 인상이 꼭 사기꾼 같았는데, 나중에 이야기 들어보니 그 변호사도 무엇을 잘못해서 그랬는지 구속되어 포토라인에 선 것을 맹사장이 출소 후에 우연히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 사기꾼에게 내가 돈을 많이 주고 사건을 맡겼으니 내가 징역을 산 게 당연하지!' 맹사장은 TV를 보면서 다시 한번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이치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맹사장이 징역을 살고 나오니, 부인은 어떤 놈팽이와 도망을 갔다. 어떤 사람 말로는, 부인은 나이 어린 정력이 좋은 건달과 같이 중국인가 베트남인가로 갔다고 했다. 아들 한명은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가출해서 연락도 없었다. 맹사장은 명훈 아빠에게 교소도에 갔다온 인생 선배로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이는 동갑인데 남이 못하는 직접 체험을 해서 선배가 된 것이었다.

“교도소라고 해서 나도 처음에는 들어가면 꼭 죽는 줄로만 생각했어.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니 사람이란 참 이상한 존재야. 곧 바로 교도소에 적응이 되는 거야. 적응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런 거겠지만, 생각보다 빨리 익숙해져. 나도 놀랐어.”

“아무리 익숙해져도 자유가 박탈당하니까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럽겠어? 먹는 것고 그렇고, 자는 것도 그럴텐데.”

“물론 그거야 그렇지. 처음에는 억울하게 구속되고 갇혀있으니까 죽고 싶은 마음에 환경은 이차적인 것이 되어 버려. 고소인들과 싸우고, 경찰과 싸우고, 검사와 싸우다보면 몇 달은 그냥 지나가. 재판에 넘어가면 판사는 재판을 아주 천천히 하니까 갇혀 있는 사람은 흥분상태에서 벗어나 지쳐버려. 나중에는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 심정이 되는 거야. 그리고 교도관이 무섭고 나라는 존재는 망각되어져. 스스로 노예가 되는 거야. 아무 의욕도 없고, 세상이 무섭고, 모든 사람들이 무섭게 느껴져. 심지어 가족 조차도 처음에는 면회를 오다가 지쳐서 그런지 더 이상 면회도 오지 않아. 편지를 써서 보내도 연락이 없어. 그때는 나가서 죽이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그것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까 스스로 지쳐서 포기하게 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명훈 아빠는 맹사장이 하는 말이 그다지 실감은 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그랬다. 자신과 맹사장은 전혀 다른 환경에 있으니까. 그리고 자신은 절대로 감방에 갈 이유가 없으니까. 점쟁이도 그런 적이 있었다. 맹사장은 사주와 관상, 모든것을 분석해 보면 절대로 관재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구치소와 교도소에 있으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돼. 게다가 나는 고시공부를 오래 해서 법을 아니까. 재소자들은 나를 존경하게 돼. 그리고 나에게 많은 것을 물어와. 나는 아는대로 무료로 상담을 해줘. 그렇게 하다보니 법에 대한 실력이 많이 늘어. 왠만한 변호사보다 훨씬 아는 게 많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24시간 감방에서 내 문제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의 형사사건만을 생각하고 보고 듣고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지. 사람은 누구나 절실한 환경에서 전문가가 되는 거야. 유대인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최고의 철학자, 과학자가 되듯이 말야.”

명훈 아빠는 맹사장의 이야기가 신기하게 들렸다. 그렇게 열심히 한 고시공부를 감방에 직접 들어가 써먹다니, 인생의 아이로니였다.

“감방에 있으면,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서 무슨 죄로 들어왔는지를 듣게 돼.”

신입회원은 선배님들에게 공손한 태도로 자신의 범죄사실을 신고한다. 맹사장은 재판장과 같은 입장에서 곁에 많은 배심원들을 데리고 신입회원의 스토리를 청취한다. 국회 청문회장처럼 가끔 사람들은 날카로운 질문도 던진다.

’저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서 배우지도 못하고 부모님도 일찍 여위고 살다보니 절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이 다섯 번째입니다.‘ 사람들은 절도범에 대해 동정을 한다. 절도범은 자신의 환경이 아니라 범행의 실패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그때 그 집에 들어갈 때 더 많은 준비를 했어야 했어요. 그리고 CCTV에 얼굴이 찍히지 않도록 했어야 했는데, 실수를 한 거예요.‘

요새는 옛날과 달라서 도둑질도 주먹구구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아주 과학적인 기법으로 아주 짧은 시간내에 돈이 많은 부잣집에 들어가 사람을 해치지 않고 패물이나 현금이 있는 곳을 찾아내서 빨리 가지고 현장을 이탈해야 한다.

그리고 도로 곳곳에 CCTV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 검거되기가 쉽다. 그래서 모자를 눌러 쓰고, 미세먼지를 핑계로 마스크를 쓰고 도주해야 한다. 그리고 침입할 집을 사전에 수십차례 답사해야 한다.

특히 어려운 것은 사람들이 패물이나 현금은 집안에 깊숙이 감추어놓기 때문에 소풍가서 보물 찾기보다 더 어렵다. 이것이 기술인데, 역시 많은 실전 경험에서 노하우가 터득된다.

어렵게 훔친 물건도 장물처분하기가 예전 같지 않은 게 고민이다. 사람들은 감방에서 시간이 가면 도둑으로부터 그 탁월한 절도 솜씨와 풍부한 경험, 좋은 머리에 감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는 동정하지만, 같은 감방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그 도둑놈이 또 무슨 도둑질을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도 하게 된다.

하기야 감방안에서 훔쳐가야 무엇을 훔쳐갈 것이 있겠냐만은,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것처럼, 밖에서는 소를 도둑질 했어도, 감방 안에서는 바늘이라도 훔쳐갈 것이 걱정되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그런데 우리 속담은 모순이다. 비현실적이다. 경험칙상 바늘 도둑은 평생 늙어도 바늘 도둑으로 남는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질을 할 의지나 능력은 절대 없는 것이다. 뇌물을 먹는 공무원도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크게 먹지, 말단 공무원은 언제나 뇌물액수가 근소하다. 떡고물값인데도 이상하게 말단은 징역가고, 파면된다. 높은 국회의원은 뇌물죄로 구속되었다가, 몇 년 후에는 또 국회에서 부정부패를 추방해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품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같은 감방에 있는 맹사장을 비롯한 젊잖은 재소자들은 신입회원의 죄명이 절도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절도범의 얼굴이 왠지 응큰해 보이고, 어두워 보이고, 도둑놈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참 이상한 선입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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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


지금 명훈 아빠가 공황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그 어떤 방법도 없었다. 가만 있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

 

누군가 회사 내부 자료를 빼내서 검찰에 제보를 한 것이다. 그리고 검찰에서는 우리 회사에 대한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그런데 더 검찰에서 회사의 비리와 문제점을 파고 들면, 회사는 부도날 것이고, 나는 징역을 많이 살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명훈 아빠의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아주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회사는 부도나고 자신은 감방에 가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가벼운 행정법규위반사건으로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은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검찰의 특별수사를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수사를 받는 사람은 공포에 질린다. 저 혼자 깊어가는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밖으로 탈출해서 나와 살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덫에 걸려서 절망하고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사람은 이럴 때 참 외롭다. 아무와 상의를 할 사람도 없다. 설사 상의를 한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같다. 부인과 대화를 해도 뽀쪽한 방법은 없었다.

 

명훈 아빠는 그냥 술이나 마셨다. 담배를 줄로 피었다. 자신의 신체를 학대시키고 마비시킴으로써 잠시나마 무감각해지고 싶었다. 이런 경우에 어떤 사람은 마약을 찾기도 한다. 수면제를 먹고 잠에 들고 싶어하기도 한다.

 

명훈 아빠로서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자신이 너무 억울했다. ‘왜 하필이면 내가 타겟이 된 것인가?’ ‘하나님은 너무 불공평하시다. 무슨 이유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신단 말인가?’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60살도 되지 않는 나이에 한참 팔팔하게 사회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몸이 이상해서 병원을 찾는다. 갑자기 폐암 판정을 받는다. 그것도 폐암 3기라고 한다. 그는 한 순간에 공황상태에 빠지고, 몇 달 또는 몇 년간 병마와 싸우다가 끝내 세상을 떠난다.

 

전혀 그런 불행이 자신에게 닥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국 사람 중 20%가 암에 걸리고, 그중에서 폐암에 걸리면 다른 암보다 특별히 호흡곤란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예후가 나쁘다는 사실을 들어보지도 못했던 사람이, 갑자기 폐암 진단을 받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암에 많이 걸려도, 자신만은 암에 걸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건 나중에 70살이 넘고, 80살이 넘었을 때의 이야기로만 생각하고 아득히 먼 훗날의 허상이라고만 생각했다.

 

검찰수사도 이와 비슷한 성격이 있다. 전혀 예측도 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검찰의 특별수사가 들이닥치고, 법이라는 무서운 창과 칼이 자신의 목을 향해 겨누고, 곧 수갑을 채워 감방에 던져지고, 동물과 같이 끌려다니며 짐승처럼 먹고 자야 할지 모른다는 현실은 완전히 대상자를 돌게 만드는 것이다.

명훈 아빠는 그동안 외국에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다녀올 때 반드시 양주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특히 병이 예쁘고, 이름이 멋있는 것, 유명하다는 술은 돈을 아끼고 않고 면세로 사가지고 집안의 장식장에 전시해놓았다. 싸구려 술 이외에는 아까워서 모두 모아놓았다.

 

특별히 잘 보여야 할 공무원들에게 선물을 할 경우에는 명훈 아빠는 아까워서 병을 따지 못했던 고가의 양주를 기꺼이 뇌물로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마다 느꼈던 것은 공무원들은 아무리 뇌물을 주어도 받을 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뿐이지, 전혀 고맙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명훈 아빠는 뇌물과 선물을 끊임없이 주면서 사업을 하고 지내왔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켜져 있는 TV에서 가요무대를 하고 있었다. <이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히 생각하니 세상 만사가/ 춘몽중에 또 다시 꿈같도다>

 

아주 옛날 노랜데, 어떤 젊은 여자 가수가 대신 부르고 있었다. 원래 그 노래를 불렀던 가수 이름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 아마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것같았다. 그렇다고 지금 스마트폰으로 저 노래 오리지날로 부른 가수 이름을 찾는다는 것은 미친 짓같았다.

 

나도 죽을 판인데, 돌아가신 분 이름을 확인하는 건 무슨 의미가 있어!‘ 몇 달 전만 해도 집안에 아무런 우환이 없을 때 같았으면, 곁에 있는 명훈에게 시켜서 가수 이름을 찾아보려고 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모든 것이 아니다. 세상에 불행은 이렇게 갑자기 온다.

 

가요무대가 끝나고 TV 채널을 돌리자 뉴스가 나오는데, 어떤 현직 검사가 투신자살했다는 보도를 하고 있었다. 보도하는 아나운서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고속도로에서 연쇄충돌사고로 3사람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뉴스를 보도할 때와 똑 같은 표정, 억양, 감정이었다.

 

검찰의 수사를 받고, 구속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현직 검사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는 중압감과 수치심, 억울함 때문에 투신해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는 뉴스였다. 검사가 수사받는 내용은 명훈 아빠가 볼 때 크게 무거운 죄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왜 자살을 했을까? 그냥 조사 받고 재판을 받지? 잘못되면 1~2년 징역을 살고 나오면 안 될까? 나이도 많지 않은 검사가 죽다니? 가족들은 어떻게 하라고?’

 

명훈 아빠는 갑자기 술기운이 더 확 올라왔다. 그걸 보니 더 검찰수사가 무섭게 느껴졌다. 지옥에서 올라온 죽음의 사자 같이 느껴졌다. ‘검사는 사람도 아닐 거야. 레미제라블에서 나오는 자베르 형사처럼 법을 앞세워 남을 죽이는 악마와 같은 존재야. 피도 눈물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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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00)

 

한편 강교수 부인인 민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민희 역시 공부는 아주 싫어했다. 그러다가 머리 좋은 강교수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했다. 결혼 당시 강교수는 집안이 어려웠고, 민희는 부잣집 외동딸이었다.

 

민희는 물론 결혼 전에 여러 차례 연애를 했고, 남자들과 성관계도 가졌지만, 강교수를 만나 결혼한 이후에는 완전히 마음을 고쳐먹고, 오직 강교수에게만 순정을 바쳤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강교수는 결혼한 직후부터 서시히 민희가 머리가 나쁘고 공부를 못했다는 이유로 은근히 무시하고 핀잔을 주었다. 민희 부모가 대준 돈으로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도 강교수는 늘 민희가 지적이지 못한 점을 언급했다.

 

강교수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국 TV는 거의 보지 않았다. 강교수는 영어 좀 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도 미국 방송 CNN이나 BBC 방송을 틀어놓고 있었다. 그러면 민희는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히 한국 방송 드라마 채널로 돌렸다. 그러면 강교수는 민희가 유치하다고 짜증을 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시간이 가면서 민희는 자신은 강교수와는 도저히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것도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맞지 않는 남자의 아이를 낳게 되면, 그건 더 큰 불행이 될 거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민희는 강교수와 각방을 썼다. 처음에는 아주 이상했다. 부부가 각방을 쓴다는 것에 대해 말을 들어봤지만, 한국적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고, 익숙해진다. 한 두달 지나니까 그 다음부터는 남편과 한 침대에서 같이 잠을 잔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남편의 냄새도 싫었고, 코고는 소리도 싫었다. 특히 술을 마시고 들어와 자는 때에는 마치 돼지가 자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이 돼지를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싫은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면서 민희는 강교수가 자신과는 관계를 하지 않고 각방을 쓰면서 다른 여자들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처음에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상대 여자를 만나서 박살을 내려고도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강교수가 그짓을 하지 않을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이혼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서 포기했다.

 

민희는 그래서 다시 옛날 처녀시절 연애하던 남자들의 낭만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우연히 시작한 산악회 동호회에 나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너무 지성적이지 않은 남자, 너무 잘난 척 하지 않는 남자, 너무 똑똑하지 않은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이 들어 만나게 되니, 육체관계는 특별한 의미 없이 이어지는 게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민희는 자신이 바람을 피는 것에 대해 만약에 강교수가 문제 삼으면 혼자서만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강교수의 뒷조사를 해서 이미 강교수의 불륜에 대한 증거를 확보해 놓았다. 그래서 맞불 작전을 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두 사람은 아주 냉냉해졌다.

 

민희는 강교수를 볼 때마다, 다른 여자와 껴안고 뒹굴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완전히 동물적인 모습이었다. 인간이 아니었다. 사람은 배꼽 이하는 동물과 똑 같다. 만일 증명사진을 얼굴만 나오는 상반신이 아닌, 하체만 나오는 하반신으로 찍어서 제출하면 실제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사진과 대조해서 증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민희 역시 외간 남자와 관계를 하면서도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실존의 방황일 뿐, 그렇게 더럽다거나 추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교수의 외도는 그야말로 무책임하고, 비인간적이며, 완전히 동물적인 추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희는 당분간 소강상태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혼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 이혼해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상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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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99)

 

한편 강교수와 가끔 만나 데이트도 하고 관계도 가지고 있었던 선미는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28살의 나이에 강교수와 깊은 관계에 들어갔다. 물론 모든 것은 선미가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강교수가 나이 든 사람으로서 선미를 유도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물론 선미도 대학교 다닐 때 남자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풋사랑이었다. 대학시절의 낭만이었고, 남자 친구 역시 미숙하고 서툴렀다. 관계를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청춘의 몸부림에 불과했다. 피임에 급급했고, 아무런 장래가 보장되지 않는 사랑의 유희였다.

 

그러다가 강교수의 지도를 받고 대학을 졸업하고, 강교수의 도움으로 회사에 취직까지 했다. 선미는 그때마다 강교수의 가르침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갔다. 그러면서 교수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존경했다. 강교수를 만날 때마다 경건한 의식을 치루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강교수와 차를 타고 야외로 나가 드라이브를 하던 중 강교수가 인간적으로 매우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선미를 여자로서 원한다는 것을 보고, 그냥 어쩔 수 없이 몸을 허락했다.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라 강교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맡겼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의리였고, 보답이었다. 그 순간 선미가 강교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의 욕정을 채워주는 것뿐이었다. 자신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오직 강교수가 자신을 통해, 실존의 허망함을 추방시키는 의식을 사제로서 주관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강교수가 정점에 이르러 신음소리를 내뱉었을 때 제물로 바쳐진 작은 양은 연기처럼 사라졌음을 느꼈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선미는 강교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모셨다. 그러면서 강교수가 원하면 기꺼이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제물로 바쳤다. 하지만 강교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선미를 자주 원하지는 않았다. 한달에 한 두 번, 아주 갑자기 연락을 해서 원했다.

 

그 행위를 할 때 강교수는 암 말도 하지 않았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순간에는 언어의 감각을 상실하는 것인지 몰랐다. 강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리고 눈을 꼭 감은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식을 치룬 다음, 선미에게는 늘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28살과 45! 17살의 차이였다. 엄청난 차이였다. 하지만 선미는 곧 나이 차이를 극복했다. 만나서 데이트를 하고 연애를 할 때는 그 많은 나이 차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정이란 이끌려 들어가는 것! 그래서 선미는 서서히 강교수의 품으로 끌려들어갔다.

 

앞으로 자신이 젊은 남자와 결혼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떤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직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의 실존을 맡기고 의지하고, 자신의 영혼을 확인하는 방법은 강교수의 육체와 정신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선미는 이제 더 이상 강교수에게 안길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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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98)

 

한편 미경은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졌다. 자신은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살았다. 비록 첫단추는 잘못 끼어졌기 때문에 결혼도 실패했다. 그후 몇 사람의 남자를 만나서 사랑을 나누었지만, 자신이 남자복이 없어서 그런지 모두 다 건달이었고, 무책임한 방랑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경 자신은 정말 괜찮은 남자가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제대로 된 남자! 제대로 배우고, 남자답고, 여자를 배려하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가 언젠가는 미경의 앞에 나타나 진정으로 미경의 진수를 알아보고, 영원한 사랑을 해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나타난 사람이 바로 강교수였다. 미경이 강교수에게 바랬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강교수의 돈을 바랬던 것도 아니었다. 강교수의 인물 때문에 사랑했던 것도 아니었다. 강교수의 성적 능력에 이끌렸던 것도 아니었다. 미경에게 강교수는 그야말로 교수였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이었다.

 

강교수의 순수함, 대학 교수가 가지는 카리스마, 지적 능력과 분위기, 그리고 그의 여자에 대한 배려 때문에 미경은 자신의 모든 것을 강교수에게 바치려고 했다. 물론 시간이 가면서 강교수와의 육체적 관계는 시들해졌다.

 

서로 나이가 있었기도 했지만, 강교수가 그렇게 탁월한 기술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남자와의 관계가 언제나 육체보다는 정신이 더 중요했다. 미경은 강교수와 관게를 할 때에는 언제나, 그의 현실적인 육체의 움직임을 본 것이 아니었다.

 

눈을 감고 강교수의 강의하는 모습, 안경을 쓰고 책을 읽고 있는 모습, 그가 캠퍼스를 거닐면서 사색에 잠겨있는 모습을 연상하고 있었다. 그런 이미지에 빠져 있으면, 그가 미경의 위에서 움직이는 동작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그림자였다.

 

그래서 미경은 황홀경에 빠졌고, 사랑의 미로에서 몸부림쳤다. 미경의 모든 것을 바치고, 던지고 싶었다. 그래서 강교수의 조각을 영원히 세우고 싶었다. 설사 자신이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도 좋았다. 강교수가 오직 자신을 농락했다고 해도 좋았다.

 

그건 사랑의 일방적인 희생이었고, 기약 없는 메아리였다. 그러던 강교수가 이상한 일로 자신을 멀리하고, 그 때문에 자신도 강교수로부터 멀어졌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그때 발렌타인 데이가 왔다. 그날 미경은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무슨 까닭인지 몰랐다. 이미 강교수에게서 마음은 멀어진 상태였다. 다시 미경의 일상으로 돌아와 많이 냉정을 되찾은 때였다.

 

그런데 문득 강교수의 품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미칠 듯이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미경은 그래서 강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잘 지내고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강교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마 미경의 전화를 차단해놓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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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97)

 

사람의 일상은 어느 날 한 순간에 방향이 크게 바뀐다. 강교수는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잘 되어서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연구도 열심히 하고, 강의도 잘해서 학생들에게 인기도 좋았다. 경영학 교수로서 기업체 자문활동도 해서 봉급 이외의 수입도 괜찮았다. 부잣집 딸과 결혼해서 경제적으로도 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 남들은 어려운 처갓집 생활비도 보태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강교수는 그런 면에서 해방된 상태였다.

 

애정은 없고 섹스리스 상태로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정상적인 결혼상태고, 외모도 별로 손색이 없는 부인이 집에 존재하고 있다.

 

게다가 자립해서 미용실을 경영하고 있는, 비록 연상이지만 번듯한 미경이 애인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끔 양념으로 젊은 제자와 만나 연애를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을 뿐 아니라, 청춘의 피를 수혈받아 노화를 방지할 수 있다.

 

강교수는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 교수로부터 전수받은 교훈, ‘젊었을 때 하고 싶은대로 연애를 충분히 많이 하라. 성관계도 용불용설이니 젊었을 때 많이 하라. 그래야 늙어서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다!’을 헌법처럼 삶의 기본 원칙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잘 나가던 강교수가 부인의 사소한 접촉사고 인해서 한 순간에 모든 행복이 날라가 버렸다. 마치 어느 사회 저명인사가 자신이 데리고 놀면서 농락하던 젊은 여자의 폭로로 모든 것을 상실하는 것처럼, 강교수는 아주 사소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거대한 쓰나미에 휩쓸려 날라가다가, 자신의 영역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진흙밭으로 내동이쳐진 것이었다.

 

사랑하던 미경도 만나지 못하고, 어린 제자와도 데이트할 수 없게 되었고, 더러운 불륜현장의 더러운 신음소리까지 확인한 부인과 불편한 관계까지 덮쳤다. 그리고 당분간은 어디 가서 성관계를 할 수 없는 형벌을 선고받았다.

 

강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거나 반성하지는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누가 강교수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교회는 빼놓지 않고 다니고 있었지만, 목사님 설교에 강교수를 특정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잘못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개별적인 방향이나 방안을 제시해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강교수가 개인적으로 성경책을 펴놓고 아무리 열심히 찾아보아도, 지금 살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밝혀주는 부분은 없었다.

 

단지 구약에, ‘간음하지 마라. 이웃집 아내를 탐내지 마라.’로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현대 사회에서 성이 개방되고, 간통죄도 없어진 마당에 모두들 프리섹스를 하고 있는데, 강교수만 신부님처럼 산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해 보였다.

 

신약에서는, ‘마음으로도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정언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간음한 불쌍한 여자를 앞에 놓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강교수는 자신은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므로 천사와 악마의 중간적 존재라고 믿었다. 그래서 살아있는 한, 몸에서 피가 흐르고, 가슴에서 심장이 뛰고 있는 한, 성욕을 무조건 억제하는 건 자연의 섭리에 반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에 대한 자신의 정당성을 스스로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가끔 TV에서 유명 인사들이 여자문제로 망신을 당하고 추락하고, 감방에 가는 것을 보게 되면, ‘그들은 나쁜 게 아니라, 어리석다. 여자를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성적으로 이용만 하려는 이기적이고 동물적인 사람이므로 징역가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강교수는 여자 없는 무인도로 이주하기로 결심해야 했다. 그런 자신이 너무 억울하고 한심했다. 그런데도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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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96)

 

강교수는 학교에서 좋은 보직도 맡고, 부교수가 되어 승승장구했다. 경영학 분야에서는 지역에서도 아주 유명 인사가 되었다. 학생들에게서 평이 좋았다. 미경의 미용실도 두 군데 더 차리게 해서, 경영기법도 알려주었다. 미경도 매우 행복했다.

 

존경하는 대학교수를 애인으로 두고, 자신의 비즈니스에도 도움을 받으니 일거양득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밀회는 미경이 혼자 사는 아파트로 정했다. 그곳에는 강교수의 옷이나 노트북 같은 것도 가져다 놓았다. 누가 보면 부부처럼 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미경이 강교수의 애정행각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었다. 미경은 처음에는 단순한 연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정이 깊어가고, 강교수와 결혼은 하지 못하더라도 자신만의 남자로 붙잡아두고 싶었다.

 

강교수의 부인과는 원래 사이가 나쁘다고 하니까,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보다 5살이 어린 강교수가 미경과 애인으로 지내면서 다른 여자를 만나 연애를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강교수가 평소와 달리 피곤하다면서 관계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미경은 강교수의 핸드폰을 몰래 열어보았다. 그곳에서 강교수가 어떤 젊은 여자와 자주 연락을 하는 것을 알아냈다. ’첩이 첩 꼴을 못본다는 속담처럼 미경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이렇게 되면 나이 먹은 나를 이용해먹고 배신하는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차분하게 연구를 한 끝에 그 젊은 여자를 만났다.

강교수님은 나와 연인 사이예요. 내 인생을 모두 건 분이예요. 그런데 아가씨는 나이도 어린데 왜 유부남을 만나요? 헤어지세요.”

저는 강교수님과 아무 사이도 아니예요. 강교수님은 저의 지도교수님이었고, 교수님의 추천으로 저는 좋은 회사에 취직을 했어요. 그래서 고마워서 가끔 만나는 것뿐이예요.”

아무튼 아가씨와 강교수가 어떤 관계든 상관없어요. 지금부터는 절대 연락하지 말고 만나지 말아요. 강교수는 내 사람이니까.”

 

그 젊은 아가씨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경을 이상한 여자로 쳐다보고 있는 것같았다. 대학을 갓 졸업한 것처럼 보이는 아가씨는 젊고 싱싱했다. 낚시로 건져낸 퍼득이는 고등어같았다. 그 젊음 앞에서 미경은 몹시 절망했고, 기분이 나빴다.

 

내가 오늘 당신이 자주 만나는 그 아가씨를 만났어요. 무슨 관계냐고 물었더니 아무 관계도 아니래요. 그래서 앞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했어요. 미안해요. 공연히 당신을 의심해서...”

아냐 괜찮아. 내가 딴 짓을 하지 않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강교수는 이미 미경을 만나기 전에 그 아가씨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두 사람은 앞으로 더욱 은밀하게 다른 사람 모르게 만날 상의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강교수의 부인이 바람을 핀 것이었다. 강교수의 부인이 운전하던 차가 접촉사고를 냈다. 그래서 강교수가 사고 소식을 듣고 곧 바로 달려가서 블랙박스를 열어보았다.

 

그랬더니 차 안에서 강교수 부인이 다른 남자와 정사를 하는 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강교수는 부인과 싸움을 했다. 그랬더니 부인은 오히려 당당했다.

 

당신이 만나고 다니는 여자들 모두 증거를 이미 확보해놓았어. 내가 바람 핀 것은 거기에 비하면 새발의 피야. 어려운 한자말로 조족지혈이라고 하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넘어가. 원하면 이혼도 해주고, 당신 인생 끝장을 내줄테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바람 필 충분한 자격이 있어. 하지만 당신은 대학교수잖아! 대학교수가 그따위로 위선 떨고 이 여자 저 여자 연애나 하고, 그것도 그 여자들 이용이나 하고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살 자격이 없다고 봐. 나는...”

 

그래서 강교수는 당분간 미경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부인과 사랑과 전쟁이 시작될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서 미경을 계속 만났다가는 미경과 함께 심해 속으로 침몰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젊은 아가씨에 대해서도 부인이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그 아가씨도 당분간 만나지 말자고 알려주었다. 이런 상황이 오래 계속되자, 미경은 나름대로 강교수가 부인 핑계대고 자신을 멀리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강교수로부터 모든 정을 거두어들였다.

 

가을에 추수를 해서 창고에 쌓아놓듯이, 강교수와의 사랑의 추억을 보이지 않는 곳에 폐기처분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미경은 놀랐다.

 

한 때 깊은 정이 들어 없으면 못살 것 같은 강교수의 존재가 전에 사랑을 나누다 감방에 간 건달들과 아주 똑 같은 무게와 질량으로 느껴지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남자라는 동물은 성교의 의미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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