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15)

 

한편 숙정의 남편은 시간이 가면서 숙정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등산을 갔다 하면 자꾸 귀가시간이 늦었다. 늘 술에 취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편과의 잠자리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동안은 등산을 가지 못하게 하기도 했으나, 숙정이 고집을 부려 등산금지령은 풀어놓았다.

 

하지만 늘 숙정의 동향을 미심쩍은 눈으로 예의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골 키퍼(Goal Keeper)가 눈을 부릅뜨고 골문을 지키고 있어도 어느 틈인가 눈깜박할 사이에 골이 들어가는 것처럼, 숙정은 이미 두 차례 고종과 관계를 가졌다.

 

맨 첫 번재 경험은 등산회 갔다가 회식이 끝나고 헤어진 다음, 두 사람만 따로 노래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술을 마시고 껴안고 부르스를 추다가 자연스럽게 쇼파에서 관계를 했다.

 

두 번 째는 등산 가서 일행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숲속으로 들어가 야생동물처럼 잠깐 동안 관계를 마치고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태연하게 일행과 합류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회식을 마치고 두 사람은 모텔로 들어갔다.

 

등산을 했기 때문에 몸에 땀이 배여서 두 사람은 샤워를 하고 모처럼 여유를 가지고 편안한 관계를 했다. 그런데 한참 관계를 진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숙정의 남편에게서 전화가 계속해서 왔다.

 

처음에는 진동으로 돌려놓고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평소와 달리 너무 반복해서 계속 전화가 왔다. 그래서 숙정은 샤워실로 들어가서 전화를 했다.

 

누가 당신 차를 박아놓고 도망가버렸어. 빨리 와봐.” 숙정은 뽑은지 한달도 채 안되는 새차를 누가 받았다고 하니 갑자기 앞이 깜깜해졌다. 고종과 언제 관계를 했느냐는 식으로 그냥 옷을 주워입고 집으로 달려갔다. 차가 부서진 상태를 보고, 일단 경찰에 신고를 한 다음 아파트로 올라갔다.

 

그런데 남편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그리고 숙정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니 등산 갔다더니 어디서 목욕도 하고 왔나? 아직 머리에서 물기도 마르지 않았네!”

 

그러면서 남편은 숙정의 옷을 벗겼다. 숙정은 저항했으나 남편은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이라 힘이 보통 사람 두배는 강했다. 남편은 공부를 하는 대신, 태권도와 검도를 열심히 했다. 태권도 2단증과 검도 1단증을 벽에다 걸어놓고, 먼지라도 묻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깨끗하게 손질을 하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는 그 흔한 개근상조차 받은 바 없다는 남편이 유단자 증서는 하늘처럼, 신주 단지처럼 모시고 있었다. 그런 남편이 흥분해서 숙정을 의심하고 옷을 완전히 벗기고 신체검사를 하니 단번에 부정행위에 대한 증거가 발견되었다.

 

숙정이 고종과의 관계를 한 다음, 남편의 전화를 받고 놀래서 뛰어오다 보니, 뒤처리를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숙정의 속옷에서 고종의 그것이 묻혀져 있었다. 남편은 사정 없이 때렸다. 그리고 숙정으로부터 자백을 받았다.

 

그런데 숙정은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날 통화내역은 모두 삭제했고, 원래 고종의 전화번호는 여자 친구 이름으로 저장해 놓았기 때문에, 남편에게는 고종의 전화번호는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술을 마신 상태에서 강간을 당했다고 둘러댔다. 사건은 이렇게 이상하게 출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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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4)

 

그런데 오전 10시에 실질심사를 받았는데, 오후 세시경 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검찰청에서 곧 바로 구치소로 직행을 한 것이었다.

 

그 후 구치소로 접견을 온 변호사는 고종뿐 아니라, 다른 피의자들 여러 사람의 사건을 맡아서 고종을 접견하는 시간은 10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고종에게 영장 담당 판사가 이상한 사람이라 잘못 발부가 된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구속적부심사나 보석을 통해 곧 석방시키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면서 큰소리로 웃는 것이었다. 접견실에 있던 다른 죄수나 변호사들이 볼 때에는 고종이 곧 나가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맹사장은 그 이야기를 듣고 남의 일이지만 흥분했다.

 

도대체 요새가 어떤 세상인데, 그런 나쁜 변호사가 있다는 말이요. 가만 두어서는 안 되겠네.” “아무래도 변호사를 바꾸어야 할 것 같아요. 근데, 변호사를 바꾸면 저에게 불리하게 해꼬지를 하지 않을까요? 걱정 돼요.”

 

그 변호사 이름이 뭐지?” 고종이 변호사 이름을 듣자 가만 있어보자,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맹사장은 감방 벽을 더듬거리다가 벽에 그 변호사 이름이 써있는 것을 발견하고 고종에게 보여주었다.

 

이 변호사 이름이 확실한 거요?” “, 맞아요. 여기 그 변호사 이름이 써있네요.” 고종은 자세히 벽에 써있는 글씨를 읽었다. 어떤 죄수가 써놓은 것이었다. 내용인즉, ‘OOO 변호사! 아주 악질임. 절대 선임해서는 안됨!!!’이었다.

 

맹사장은 구치소와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벽에 이와 같이 변호사를 비난하고 욕하는 글씨를 여러 번 보았다. 자신이 선임한 변호사가 제대로 하지 않아 결국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취지로 낙서를 해놓은 것이었다.

 

고종은 37살의 총각이었다. 중소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말이면 열심히 등산을 다녔다. 그러다가 어떤 산악회에 들어가 동호회원이 되었다. 숙정이라는 여자는 그곳에서 만났다. 45살의 가정 주부였다.

 

등산이 끝난 다음 회원들은 가끔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노래방도 다녔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났다. 이상하게 숙정은 고종을 좋아했는지, 고종이 참석하는 회식이나 술마시는 곳에는 절대로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러면서 꼭 고종 옆에 앉았다. 겉으로는 숙정은 어리게 보여서 열 살은 젊어보였다. 나이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30대 중반인 것처럼 말했고, 결혼해서 가정이 있다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고종을 비롯한 등산회원들은 숙정을 미혼이거나 돌싱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싱글인 고종과 숙정이 가깝게 지내는 것으로 오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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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3)

 

어느 날 최고종은 재판을 받으러 나갔다가 돌아와 혼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맹사장이 위로해줘도 소용 없었다. 고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그 다음 날 맹사장은 고종에게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저는 절대로 그 여자를 강간하지 않았어요. 서로 좋아서 한 것인데, 그 여자가 남편한테 들켜서 남편이 죽일 듯이 때리면서 난리를 치니까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나를 강간범으로 몰았던 거예요. 정말 너무 억울해요. 이대로 징역을 살 수는 없어요. 차라리 자살을 해서 결백을 증명하고 싶어요.”

 

죽으면 안 돼요. 죽는다고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는 건 아니잖아요, 살아서 무죄를 받아야 해요. 내가 도와줄 게요.”

 

맹사장은 미력한 힘이나마 고종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종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파악해야 했다.

 

물론 고종은 변호사를 선임했는데, 고종 말로는 그 변호사가 돈만 받아먹고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구속되기 전에 불구속으로 조사를 받을 때도 변호사는 별로 걱정하지 말아요. 사필귀정이라고, 진실은 언젠가 태양 아래 드러나는 거예요. 검사가 무혐의 결정을 틀림없이 할 거니까 나만 믿고 있어요.”

 

그러면서 변호사는 고종과 사건에 관한 상의도 별로 하지 않았다. 경찰이나 검찰에서 피의자로서 조사를 받을 때에도 변호사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 달 동안 조사를 받다가 검찰에 의해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영장실질심사 때 변호사는 판사 앞에서 이 사건은 신빙성 없는 여자의 진술밖에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피의자는 도주 우려 없고, 증거인멸 우려도 없습니다. 불구속수사를 받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는 식으로 아주 간단한 변론만 했다.

 

고종은 변호사 실력만 믿고, 구속영장은 당연히 기각될 줄 알았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 약속도 잡아놓았다. 변호사 말로 영장은 저녁 6시 전에는 반드시 기각될 것이니, 8시 이후로 약속을 잡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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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2)

 

새로운 교도소로 옮겨진 다음, 일주일이 지나자 맹사장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노역을 신청했다. 어떤 종류의 일이라도 하겠다고 했다. 일을 해야만 무기력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같았고, 가석방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 비교적 편한 일을 배정받았다. 마당 청소와 정원 관리업무를 맡았다. 처음에는 그 일을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일을 해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고 밖에 나가 하루 종일 있어야 했다.

 

추운 겨울날은 몇 시간씩 밖에 있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고역이었다. 더운 여름날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에 있을 때는 맹사장은 심한 육체노동을 하지 않고 살았다. 그래도 죽을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견뎌야했다.

 

교도소에 들어간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공포에 질려 나올 때까지 벌벌 떨면서 지옥에 들어간 것처럼 지내다가 건강도 잃고 나온다. 다른 부류는 어차피 들어온 것, 자신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순응하면서 열심히 일도 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견뎌낸다. 건강도 지키고, 우울증에도 빠지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교도소 바깥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면서 죽을 생각이나 하면서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환경과 운명을 탓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간다. 맹사장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감방에 있는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생활하게 되었다.

 

맹사장은 옛날에 고시공부를 한 적이 있어, 다른 사람의 사건에 관해 매우 깊숙이 이야기를 들었고, 깊은 관심을 가졌다. 맹사장 보다 한 달 있다가 이감을 온 최씨의 스토리를 또 진한 흥미를 끌었다. 최씨의 죄명은 성범죄였다.

 

교도소에서 성범죄자로 징역을 받고 들어오면, 다른 재소자들의 눈에는 매우 한심한 사람으로 비춰진다. 바쁜 세상에 먹고 살기 바쁜데, 오죽하면 다른 여자 아랫도리를 건드려서 징역을 사느냐는 식이다.

 

특히 욕정을 참지 못하고, 여자를 강간한 남자. 술에 취한 여자를 강제추행하고, 강간을 시도하다 실패한 남자, 자신의 의붓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남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길을 가는 여자 50명의 가슴이나 엉덩이를 기습적으로 만지고 달아났던 오토바이맨, 부하 직원을 위력으로 간음한 직장의 상사. 육교나 엘리베이턴 안에서 자신이 OO를 여자에게 보여준 남자 등등...

 

이런 남자들이 징역을 받고 교도소로 들어오면, 교도관부터 시작해서 그런 사실을 알게 되는 재소자들은 모두 동정보다는 경멸의 시선을 보내게 된다.

 

물론 같은 성범죄로 낙인찍혀 들어온 같은 재소자들은 그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다른 범죄자들은 한심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맹사장은 약간 달랐다. 최씨가 성범죄자라고 해도 그의 입장에서 그의 사건을 자세하게 알고 싶어했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대부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성범죄자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여자와 둘이 있는 상황에서 남자는 순간적인 욕정에 사로잡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왜 그런 상황에까지 갔던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맹사장은 성범죄자라도 폭력사범이나 뇌물사범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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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1)

 

맹사장은 구치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을 때에는 미결수였다. 그러나 재판이 대법원까지 가서 끝이 나고 확정되자. 기결수가 되었다. 그래서 구치소에서 다른 교도소로 이감이 되었다.

 

10개월 가까운 기간, 머물면서 익숙해진 곳을 어느 날 갑자기 떠난다는 것은 무척 서운한 일이었다. 사회에서 이사를 하는 것과 달랐다. 이사를 하게 되면, 사전에 어느 곳으로 갈 곳인지 결정하고 미리 이사갈 곳을 둘러본 다음 거처를 구하고 이사를 한다.

 

그런데 감방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갈 때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재소자는 자유의사가 완전히 통제된다. 교도관이 명령하는 대로 동물처럼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인 채 차에 실린다.

 

다만, 화물칸에 실리는 것이 아니라, 좌석이 있는 버스에 실리는 것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유리창도 없는 버스안에서 차창밖을 볼 여유도 없이 어디론가 옮겨간다.

 

아주 낯선 교도소에 들어가 점검을 받은 다음 똑 같은 입감절차를 거쳐서 머물 방실이 결정된다. 새로운 수감번호가 가슴에 적힌다. 지금까지 수십년동안 이어온 번호의 주인공이 된다.

 

맹사장이 지금 부여받은 이 번호, ‘303’을 이 교도소에서 가슴에 차고 있었던 사람들은 출소한 다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모두 남자였을 것이다.

 

그 중에는 힘든 세월을 교도소에서 신음하다가 교도소 문밖으로 나갔다가, 일부는 다시 들어왔을 것이다. 대부분은 아픈 기억을 가슴에 품은 채 또 다시 힘든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개중에는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나 저세상으로 이사를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기야 이미 죽었다면, 그는 더 이상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이사를 한 영혼이라고 해야 맞다.

 

사람과 영혼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 ‘호흡의 정지’ ‘심장 박동의 정지라는 경계가 있다. 이러한 표지로 두 존재는 구별된다. 맹사장은 생각했다.

 

지금은 자신이 살아있지만, 자신이 죽으면, 죽은 다음 자신의 영혼은 이 번호를 기억할 수 있을까? 자신의 육체에 붙여지고, 자신의 이름 대신 불리웠던 이 번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자, 맹사장은 갑자기 슬퍼졌다. 갑자기 무기력해지며, 허무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시 적응해야 한다는 것도 또 새로운 스트레스였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웠다. 교도관도 바뀌었고, 재소자들도 바뀌었다. 감방의 벽도 촉감이 달랐다.

 

오직 달라지지 않는 것은 인간의 눈빛, 무감각하고 무표정한 눈빛, 사랑이라고는 눈꼽만치도 남아있지 않는 눈빛만이 똑같이 사방에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낮이고, 밤이건, 맹사장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며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맹사장은 주눅이 들고, 슬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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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0)

 

여자는 한동안 망설인다. 그런데 지금까지 겪었던 통영의 사회적 지위나 아버지의 재력, 한국에서의 사업계획 등을 모두 알고 있기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돈을 만들어준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이나 잘 봐요.”

여자는 통영이 그동안 자신에게 한국 호텔사업이 제대로 되면 여자에게도 객실 하나는 전용으로 공짜로 쓰도록 하겠다는 구두 약속에 대한 기대를 크게 하고 있어 미국에서 돈을 받는데 필요한 경비 정도는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빌려주는 것이면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여자는 스스로 핑크빛 환상에 젖는다.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은 미국 준재벌의 아들을 만나, 북한강변에 크게 세워질 스코틀랜드 풍의 고급 관광호텔에서 가장 높은 층의 스위트룸 객실을 평생 무상으로, 그것도 전용으로 쓰게 될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돈을 빌려 간 다음에는 통영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쁜지 연락이 뜸해졌다. 통영은 또 다른 호텔로 옮겨가서 다른 여자에게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어떤 때는 홍콩이나 일본에 비즈니스 때문에 출장을 간다고 했다.

 

그래서 보름씩 연락이 끊어지기도 했다. 이런 수법으로 통영은 수십명의 여자를 농락했다. 사기금액은 대체로 한 사람으로부터 몇백만원 내지 몇천만원까지였다. 시간이 가면서 점점 사기를 치는 기술이 늘고, 경험이 풍부해지자, 때로는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서 렌트카를 운전시키기도 하고, 사기의 공범으로 끌고들어가기도 했다.

 

그래도 사기피해자들은 대부분 통영을 고소하지 못했다. 유부녀로서 통영과 정을 통했으므로 만일 남편이 알게 되면 돈을 찾으려다 집에서 쫓겨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어떤 여자가 독하게 마음을 먹고 통영을 사기죄로 고소했다. 그 여자는 이미 이혼한 여자였기 때문에 고소하는데 아무런 장애요인이 없었다. 그 여자는 불과 500만원만 사기 당한 상태에서 처음에는 고소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 여자는 혼자 살면서 통영과 연애를 하면서 통영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통영과의 잠자리에서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여자는 자신의 여자 친구들과 양수리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자신이 통영과 다니던 모텔에서 통영이 다른 여자의 외제차를 타고 나오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서 통영을 만나 따졌고, 그 길로 경찰서에 가서 고소를 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는 통영도 너무 재수가 없었던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왜 하필이면 그날 그 시간에 그 모텔에 갔던 것일까? 그렇잖아도 그 모텔은 너무 많이 다녀서 싫증이 났던 것인데, 새로운 파트너가 그 모텔이 전망이 좋다고 우기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끌려들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통영은 경찰조사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경찰에서는 고소를 한 사람만 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피해자들은 유부녀가 대부분이어서 고소를 하지 못했다.

 

유부녀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그 여자들의 신분이 대학 교수 또는 공무원, 대기업 직원인 경우도 있어 그들은 사회적 체면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돈을 손해보고 말았다. 재수가 없어 사기꾼을 만나, 몇 번 연애를 하고 그 대가로 비싼 수업료를 냈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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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9)

 

통영은 바로 연락을 하지 않는다. 사기꾼들은 매우 신중하다. 신라호텔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면서 자신에 대해 신뢰를 가지게끔 만든 여자에게 한 보름쯤 있다가 전화를 한다.

 

그것도 여자의 심리를 잘 연구해서, 가정주부인 여자가 남편이 출근한 다음, 특히 월요일 오후 3시경 전화를 한다. 심심하던 차에 여자는 전화를 받고 반갑게 응대한다.

 

호텔을 이제 본격적으로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달러값이 떨어지기 전에 돈을 들여와야 해요. 언제 시간이 되시면 신라호텔에서 커피나 한 잔 하면 어떨까요?” 여자는 이미 믿음을 주었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고 오케이한다.

 

두 사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자는 자신의 외제차로 운전을 해서 통영을 모시고 양수리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스코틀랜드 스타일의 고급 호텔을 지을 자리를 찾는다.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는 일체 비밀이다. 1급 군사비밀이고, 특명작전이다.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런 사업계획을 말하면 큰일 나요. 비밀이 새면 조폭들이 저를 납치해서 살해할지 몰라요. 미국에서 아버지가 수시로 저에게 주의를 하라고 연락이 와요. 한국에는 조직폭력배가 많아서, 만일 재미교포가 한국에 큰 돈을 투자하러 다닌다는 소문이 나면 가만 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저를 납치해서 인질로 삼고, 미국 아버지 회사에 연락해서 10억원 정도는 뜯어낸다는 거예요. 그리고 사기꾼들이 많아서 저를 이용해서 바가지 씌우려는 복덕방도 조심하라는 거예요. 오직 사모님만 알고 계세요. 그래서 저는 이름도 가명을 쓰고 있어요. 지금은 제임스 박이지만, 수시로 이름을 바꿀 것이니 놀라지 마세요. 제 핸드폰도 한달에 한번씩은 번호를 바꾸고 있어요. 물론 지금 쓰는 것은 렌트한 거예요. 미국에서는 큰 사업을 하려면 비밀유지가 가장 중요하고, 신변보호가 최우선이예요.”

 

여자는 들을수록 통영이 큰사람으로 보였다. ‘아 사업은 저렇게 하는구나! 역시 미국에서 사업하는 사람은 매우 치밀하고 빈틈없이 하는구나!’

 

비밀을 지켜야 하고, 주변에서 달라드는 사기꾼이나 조폭들도 따돌려야 한다는 통영의 말에 공감했다.

 

이렇게 여러 차례 같이 차를 타고 다니면서 양수리 같은 경치 좋은 곳을 남녀가 다니다 보면, 여자는 통영의 숨은 계획에 말려들어간다. 자연스럽게 양수리나 서종면에 있는 북한강이 보이는 모텔에 들어가 정사를 벌이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통영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여자에게 애로사항을 털어놓는다.

 

아버지가 일단 10억원을 보낸다는데, 그것을 한국에서 찾으려면 외국환거래법 문제가 있어 경비가 필요하대요. 그런데 지금 나는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아 큰일이예요. 잠시 빌려주면 미국에서 돈이 들어오는 대로 갚을게요. 300만원만 빌려주세요. 일주일이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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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8)

통영은 여자에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자신은 나이가 드니까 고국이 생각나서 아버지 승낙을 받아서 일단 미국 돈으로 천만 달러, 그러니까 한국돈으로 100억원 정도를 가지고 한국에서 관광호텔사업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스코틀란드에서는 바닷가나 호숫가, 그리고 깊은 산속에 환상적인 호텔이 많아요. 큰 돈은 벌지 못해도, 저도 한국에서 그렇게 경치 좋은 곳에 아주 크지 않은 호텔을 정말 멋있게, 예쁘게, 고급스럽게 짓고 싶어요. 사람들은 양수리가 좋다는데, 한번 가볼까 하고요. 그런데 미국에서 나올 때 주변 사람들이 한국에는 사기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절대로 사업 이야기는 모르는 남자들과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저희 아버지도 미국으로 이민가기 전에 한국 사기꾼에게 전 재산을 날리고 빈손으로 갔다고 했어요. 그래서 이런 호텔 사업이야기는 저 혼자 은밀히 진행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모님은 인상이 참 좋으셔서 믿어도 될 것 같아요.”

여자는 이런 말을 들으면서 많은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우연한 기회에 이렇게 괜찮은 남자를 알게 되다니! 오늘은 행운이 닥친 날이다. 이런 날에는 로또를 하나 사도 될 것 같았다. 여자는 점점 통영의 말에 빨려들어간다. 통영은 여자에게 물어본다.

“혹시 폭풍의 언덕 읽어보셨어요?” 여자는 소설 제목은 언젠가 들어봤지만, 그런 소설을 읽을 시간은 없었다. 누가 읽어보라고 권하는 사람도 없었다. 드라마는 수없이 봤지만, 특별히 소설을 사서 본 기억은 별로 없었다.

“아직 안 읽었어요.” 
“예. 폭풍의 언덕은 제가 대학교에서 영국 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영어로 된 원서로 1년 동안 수십번 읽었던 영국 소설이예요. 지극히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아름다운 소설이예요. 저는 대학생 때 그 소설에 빠져 지금까지 결혼도 하지 못하고 혼자 살고 있어요. 언제 한번 시간 나시면 읽어보세요. 한국에도 번역되어 나왔다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그러면서 통영은 폭풍의 언덕 스토리를 청산유수로 설명해준다.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사랑에 관한 명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해준다. 감동적이다.

통영은 사기를 치기 위해 한국말로 번역된 ‘폭풍의 언덕’을 수십번 읽었다. 영어로 된 소설은 구경도 못했다. 하도 많이 읽어서 몇 페이지에 어떤 대사가 나오는지 다 외우고 있었다.

특히 여자들에게 써먹는 부분은 사실 몇 군데 되지 않았다. 많아야 20군데 정도였다. 그러면서 슬픈 장면 부분에서는 가볍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제스처도 보였다. 여자는 감동을 받으면서 통영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약간 분위기기 지루해질 때가 되면, 통영은 먼저 서둘러 일어나자고 한다.

“오늘 미국 대사관 사람들과 약속이 잡혀 있어요. 미안합니다. 먼저 일어날 게요.” 여자는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그렇잖아도 오늘 선약은 취소되었고, 할 일도 없는 터이었기 때문이다. 
“아 그러세요.” 
“예. 제가 다음에 상의하고 싶은데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예. 괜찮아요.” 이런 방식으로 상호 전화번호를 주고 받고 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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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7)

 

통영은 우선 자신은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고 아는 사람이 전혀 없어 불안하고 두렵다고 했다.

 

저는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지금까지 살았어요. 샌프란시스코에서 두 시간 떨어진 교외에서 살고 있는데, 대학은 버클리에서 영국문학을 전공했지요. 아버지는 미국에서 고생을 많이 하시다가 석유관련사업을 해서 준재벌이 되었어요. 나중에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 가서 관광호텔사업도 했어요. 스코틀랜드에 엄청난 투자를 했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스코틀랜드 공작(公爵)’ 작위를 수여받았어요. 저도 아버지를 따라 스코틀랜드에 가서 사업을 같이 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정부에서는 저에게도 스코틀랜드 백작(伯爵)이라는 작위를 수여했어요.”

 

여기까지 매우 서툰 한국말로 설명하면서 통영은 매우 긴장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중간 중간 어려운 영어로 공작이나 백작 같은 것은 단어를 발음하는데, 특히 ’RL‘ ’PF‘를 특별히 구별하여 발음하는 것이었다.

 

여자는 통영의 설명을 듣고 있으니, 마치 자신도 지금 한국이 아닌 유럽의 어떤 나라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관광호텔 로비라운지에 와 있는 것같은 묘한 착각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여자는 자신의 남편의 단점이 아주 뚜렷이 뇌리속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남편은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결혼하고 나서 집에서 책을 한 권 보는 것을 보지 못했다.

 

TV 채널은 수백가지가 되고, 외국 방송도 많은데 남편은 오직 순한국방송만을 고집했다. 그것도 뉴스 같은 것은 재미 없다고 보지 않고, 주로 스포츠 중계, 연예가 중계, 개그프로에 집중했다.

 

월드컵이나 평창동계올림픽 기간에는 거의 24시간 TV를 끼고 살았다. 메달을 따는 한국 선수, 외국 선수의 프로필까지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복잡하고 처음 듣는 경기 용어, 경기 규칙 같은 것에 대해서도 거의 스포츠전문해설자 이상의 높은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잘 모르는 것은 반드시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찾아보고 확인하는 열성을 보였다. 심지어 노트를 한 권 사서 필요한 것은 메모까지 하고 가끔 들춰보기까지 했다.

 

남편은 술을 좋아해서 중요 경기가 있으면, 반드시 치맥을 시켰다. 프라이드 치킨 한 마리에 생맥주를 2천씨씨를 주문했다. 그리고 먹다가 생맥주가 부족해지면 집에 있는 캔맥주를 연속해서 땄다.

 

한국팀이 우승하면 남편은 마치 그날 먹은 치맥값을 공짜로 먹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경기 내내 부인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경기 흐름을 놓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부인을 쳐다보는 유일한 시간은 치킨배달원이 왔을 때, 부인보고 가져다 상을 차려달라고 할 때와 중간에 화장실에 갈 때뿐이었다.

 

부인은 그럴 때 하는 수 없이 보고 싶은 드라마도 보지 못하고, 그렇다고 같이 술을 마시고 일찍 잠이 들 수도 없고, 정말 답답하고 한심했다. 부인은 이것을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 전에 가수 박재란이 부른 이라는 트로트 노래에 나오는 가사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늦은 시간에 배달온 젊은이도 중요한 경기를 봐야 할 텐데, 돈이 없어 경기도 보지 못하고, 편하게 집에서 경기를 보고 있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구나 하는 인간적인 동정심을 느껴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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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6)

 

통영은 눈썰미가 좋아서 호텔에 들어올 때 말을 건 여자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가 그 여자들이 호텔에서 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갈 때, 다시 그 여자들에게 다가가 아주 정중한 자세로 말을 건다.

 

! 사모님, 아까 뵙던 분이네요. 제가 재미교포로서 한국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데, 혹시 차 한잔 대접하면서 좀 여쭤보면 안 될까요?“

 

그러면 열명 가운데 아홉사람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미안합니다. 바빠서 죄송해요.“라고 그냥 간다.

.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이런 일을 수없이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의외로 예상치 못한 행운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게 세상 이치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피나는 노력을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약간 다른 의미지만,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도 있다.

 

통영이 외제차를 타고 온 여자들을 상대로 계속해서 차를 한 잔 하자고 제안을 하면, 개중에는 아주 드물게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여자도 있다. 그런 여자들은 어떤 여자인 것인가?

 

예를 들면, 이렇다. 모처럼 친구를 만나서 호텔에서 점심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면서 수다를 떨려고 마음 먹고 광내고 때빼고 왔는데, 갑자기 그 친구가 호텔로 오던 도중 갑자기 아주 긴급한 일로 약속을 취소하는 경우가 있다.

 

호텔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는 맥이 빠진다. 물론 친구는 아무런 잘못이 없지만, 공연히 기분이 나빠지고 짜증이 난다. 갑자기 스케줄이 망가졌고,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날씨는 화창한 봄날씨라 다시 집에 들어가 틀어박혀 있기도 싫다. 마침 남편은 지방 출장을 가서 오늘은 밤늦게까지 놀아도 되는 찬스인데 너무 아깝다. 가뜩이나 요새 남편과도 냉전 중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카톡을 주고 받고 있는 것을 몰래 학인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능력 있는 남편은 돈을 팍팍 그 여자에게 쓸 것이 뻔하다.

 

이런 심리상태에서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키가 크고, 잘 생긴 젊은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서툰 말씨를 보니 본인 말대로 재미교포로서 미국에서 오래 살다 한국에 온 한국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 같다.

 

그리고 이곳은 경비가 철저하게 보장되어 있는 한국 고급 호텔의 대낮이다. 미쪄야 본전이므로 같이 커피 마시는 것에 동의한다. 게다가 낯선 남자가 호텔에서 비싼 커피를 사겠다는데 모든 것이 오케이다.

 

여자는 차라리 약속을 깬 여자 친구가 고맙게 느껴졌다. 그렇게 해서 여자는 통영과 로비라운지에서 비싼 커피를 마신다. 남자는 웨이츠레스에게 커피를 주문할 때로 발음이 딱딱하게 꺼삐라고 하지 않고, 아주 부드럽게, ‘~~’라고 원어민처럼 발음했다.

 

완전히 미국 사람이었다. 영어를 읽는 것은 되지만, 회화는 전혀 자신이 없는 여자는 남자 앞에서 영어발음에 관해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면서 자신은 한국식으로 아메리까노라고 조용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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