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쌍방향성>

사랑은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함께 만드는 새로운 경험이다. 반드시 두 사람이 합작으로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그래서 사랑은 공동체의 산물이며, 동일한 경험의 공유라고 정의된다.

혼자 피아노를 치거나, 나체화를 그리는 작업과는 전혀 다르다. 반드시 살아 있는 대상과 함께 몸과 마음이 움직여야 사랑이라는 작품이 만들어진다.

그 사랑이 완전하든, 불완전하든,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힘들어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 하면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같이 만들어가면서도 열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그 사랑에 대한 의미와 동기 또한 차이가 있다. 사랑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감정 역시 다르다.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 구별되기도 한다. 그래서 불가사의하다.

사랑에 이르는 과정도 그렇지만, 일단 어느 정점에 이른 사랑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슬픈 카페의 노래’는 카슨 매컬러스가 쓴 소설이다. 우리나라에는 장영희 교수가 번역해서 소개한 바 있다. 이 소설은 사랑의 본질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도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든지 그 가치나 질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인간이 왜 나쁜 사랑에 그렇게 매혹되는 줄 알아? 절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지.” 카슨 매컬러스의 말이다.

사랑은 언제나 감성이 절정에 이른 상태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사랑은 아름답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평범한 마음의 상태에서는 사랑은 절대 싹트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이 아닌 성적 유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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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사랑의 관계>

저녁 노을이 발갛게 구름을 물들이고 있었다. 한참 동안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의 색깔이었다. 붉게 타오르는 열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상태의 정(情)같은 색깔이었다.

사랑은 너무 뜨거워도 안 된다. 너무 냉정해도 안 되지만, 너무 뜨거운 사랑은 감당하기 어렵다. 사랑은 언제나 은은하고, 온유해야 한다.

Milan Kundera가 자신의 소설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싶었던 사랑의 정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은 존재의 가벼움과 사랑의 깊이에 대해 모순과 대립을 논하고 있다.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에 눌려 우리는 사랑을 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현실에 있어서 추상적인 존재로 남는다. 사랑에 빠져 현실을 도피하면, 우리의 존재는 무게감을 잃고 상실감을 인식하게 된다.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자살행위로 간주된다. 사랑은 언제나 너와 나의 관계성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강조하거나 상대방의 존재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늬만 사랑인 실존의 단순한 관계성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면서 절대적으로 사랑에 의존하지 마라. 사랑의 영속성조차 우리를 기만하는 허망한 추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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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사랑한다면
상대의 외로움과 불안을 껴안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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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lost in the winter

사랑이 진흙탕에 뒤섞여 뒹굴고 있다.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고 있다. 사랑은 우리와 동떨어져 따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사랑 자체를 사랑하고 있다. 비록 우리 두 사람이 사라진다 해도 사랑은 그대로 굴러갈 것이다.

겨울비가 내렸다. 차가운 겨울비를 맞으며 우리는 서로를 잊으려 했다. 모든 기억을 상실하고 싶었다. 그 차가운 겨울의 기억이 싫었다. 낙엽에 떨어질 때의 처량함처럼 우리의 옛사랑은 퇴색하고 있었다.

빗물에 젖은 은행잎처럼 사랑은 향기를 잃고, 멀리 날아갔다. 다시는 그런 사랑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두 번 다시는 우리의 사랑이 의식을 회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촛불이 또 밝혀지면 우리는 눈시울을 붉히며 서로를 껴안을 것이다. 비를 맞으며 촛불이 켜졌다. 사랑의 촛불이 환하게 어둠을 밝히다가 다시 꺼졌다.

사랑은 우리의 삶과 대비된다. 사랑을 잃으면 목숨도 산 목숨이 아니다.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우리의 사랑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존재다. 산비탈에서 급한 경사로 내리치는 사랑의 운명을 우리는 죽음처럼 맞았다.

애절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다시 조용한 밤을 맞는다. 옷깃을 여미고 고요한 밤의 여신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사랑이 몸서리치면서 다시 찾아온다. 내 가슴 속에 환한 불빛을 밝히면서 겨울밤에 거울을 본다.

사랑이 또 내 옆에 앉았다. 사랑은 영원이라는 두 글자를 거울에 써놓고 있다. 사랑은 과연 영원한 것일까? 이 밤에 그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랑을 포기한 채 고독한 밤을 벗 삼아 술을 마시고 있을까? 붉은 치마를 벗은 채 달을 보고 있을까? 그 달에는 아름다운 기억들이 수를 놓고, 슬픈 추억들이 기타 소리처럼 선율을 그리고 있을까?

아직 우리는 가슴이 뜨겁다. 서로를 잊을 수 있을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 서로를 모른 채 살아가기에는 심장이 너무 숨가쁘게 뛰고 있다. 겨울이 깊어가는 이 밤에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찾아 다시 먼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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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믿음>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모든 관계의 기초다. 믿음이 없으면 인간관계는 끝난다. 존속해도 흔들거리며 무의미해진다.

보이지 않는 사랑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믿음이 없으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출발 단계에서는 믿음이 적어도 첫눈에 반한 감정 때문에 좋아할 수 있다. 뜨거워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믿음이 깨지면 사랑은 그 즉시 깨지고 만다.

사랑이 견고해 지는 것은, 그 후 시간이 가면서 서로를 더 알게 되고, 점점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쌓이면서 서로의 관계가 편안해질 때다. 오직 믿음으로 굳어진 사랑만이 완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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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소유인가, 존재인가?>

이미 떠날 마음을 먹고 있다면 잡을 방법이 없다. 네가 떠난다면 나는 그냥 울고만 있을 것이다. 울음만이 떠난 사랑에 대한 보답이다.

네가 떠났다고 해도 사랑까지 떠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여전히 여기에 남아 있다. 떠난 것은 너라는 존재뿐이다.

너와 내가 만들었던 사랑은 너의 것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다. 우리 두 사람의 공동소유다.

그래서 그 사랑은 두 사람의 마음을 함께 담은 채 여기 그대로 놓여 있다. 나는 그 사랑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고 한다면 사랑은 곧 깨어진다. 사랑은 관계이다.

상대방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자체를 사랑해야 사랑은 성립된다. 소유에서 존재로, 다시 말하면 독점적 소유관계가 아닌 대등한 공존관계로 전환되어야 사랑은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고 공존관계가 소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비소유(非所有)를 전제로 하는 사랑 역시 불완전한 관계에 이르게 된다.

사랑을 소유하려고 하되, 완전한 소유로 장악하지 말고, 주먹을 꼭 쥐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을 붙잡는 형태가 되는 것, 그것이 사랑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소유의 의지는 멈춰져야만 한다. 하지만 비소유의 의지가 보여져서도 안 된다. 말하자면 봉헌의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나는 정념의 그 뜨거운 격앙을 메마른 삶이나 죽음에의 의지, 그 커다란 무력감으로 바꾸고 싶지는 않다.

한편으로 나는 감각 세계에 자신을 대립시키지 않으면서 내 마음속에 욕망이 순환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을 내 진실에 기대게 한다. 그런데 내 진실은 절대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사랑이 결핍될 때, 나는 포위하기를 단념하는 군대처럼 물러가거나 자신을 분산시킨다.>
- 롤랑 바르트 지음, 사랑의 단상, 332쪽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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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함께 만드는 새로운 경험이다. 반드시 두 사람이 합작으로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그래서 사랑은 공동체의 산물이며, 동일한 경험의 공유라고 정의된다.

혼자 피아노를 치거나, 나체화를 그리는 작업과는 전혀 다르다. 반드시 살아 있는 대상과 함께 몸과 마음이 움직여야 사랑이라는 작품이 만들어진다.

그 사랑이 완전하든, 불완전하든,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힘들어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 하면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같이 만들어가면서도 열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그 사랑에 대한 의미와 동기 또한 차이가 있다. 사랑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감정 역시 다르다.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 구별되기도 한다. 그래서 불가사의하다.

사랑에 이르는 과정도 그렇지만, 일단 어느 정점에 이른 사랑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슬픈 카페의 노래’는 카슨 매컬러스가 쓴 소설이다. 우리나라에는 장영희 교수가 번역해서 소개한 바 있다. 이 소설은 사랑의 본질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도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든지 그 가치나 질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인간이 왜 나쁜 사랑에 그렇게 매혹되는 줄 알아? 절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지.” 카슨 매컬러스의 말이다.

사랑은 언제나 감성이 절정에 이른 상태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사랑은 아름답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평범한 마음의 상태에서는 사랑은 절대 싹트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이 아닌 성적 유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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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길>

사랑의 길은 무엇일까?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난다. 먼저 한 사람이 길을 만들려는 의지를 가진다. 그 의지에 의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다가가는 길은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지고, 형태를 갖추게 된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고 아무런 흔적도 없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 길은 한 사람의 의지와 노력으로 점차 뚜렷해진다. 한 사람이 만들어가는 그 길에 다른 사람도 조금씩 다니게 된다. 두 사람이 점차 많은 횟수로 왕복을 하다 보면, 사랑의 길은 제대로 형태를 갖추고 영원한 존재가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랑의 길에는 숲속의 길과 아주 다른 특징이 있다. 그 길에는 두 사람만이 다닌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다닐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 눈에만 보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길을 보아도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애써 외면한다.

사랑의 길은 비록 험하고 멀어도 결코 외면당하지 않는다. 그 길만이 유일한 길이고,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편하고 쉽게 갈 수 있는 길이어도 사랑의 길이 아니면, 그 길에는 삶의 의미가 담겨있지 않다.

사랑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 길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밤새워 그 길을 걷기도 한다. 그 길에는 은은한 별빛이 비추며,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린다. 우거진 숲길이 나타나기도 하고, 때론 삭막한 사막의 길이 오랜 시간 계속되기도 한다.

한 사람이 개척하고, 다른 사람이 피와 땀을 흘려 만든 그 사랑의 길은 영원을 약속해야 한다. 두 사람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 길은 변경되어서는 안 된다.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편하고 좋은 길을 고속화하거나 복선화 하더라도 사랑의 길만큼은 처음 만들 때의 마음으로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

사랑이 싹텄던 시골의 보리밭 옆의 작은 길처럼 개울물도 남겨두고, 맹꽁이가 우는 작은 연못도 그대로 남겨두어야 한다.

오늘 자신의 영혼이 만든 사랑의 길이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라. 눈을 꼭 감고 그 길 위에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그 사랑의 감촉을 느껴보라. 행복하지 않은가? 행복은 오직 자신이 만든 사랑의 길을 나설 때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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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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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보이지 않고 아무런 흔적도 없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 길은 한 사람의 의지와 노력으로 점차 뚜렷해진다. 한 사람이 만들어가는 그 길에 다른 사람도 조금씩 다니게 된다. 두 사람이 점차 많은 횟수로 왕복을 하다 보면, 사랑의 길은 제대로 형태를 갖추고 영원한 존재가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랑의 길에는 숲속의 길과 아주 다른 특징이 있다. 그 길에는 두 사람만이 다닌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다닐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 눈에만 보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길을 보아도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애써 외면한다.

사랑의 길은 비록 험하고 멀어도 결코 외면당하지 않는다. 그 길만이 유일한 길이고,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편하고 쉽게 갈 수 있는 길이어도 사랑의 길이 아니면, 그 길에는 삶의 의미가 담겨있지 않다.

사랑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 길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밤새워 그 길을 걷기도 한다. 그 길에는 은은한 별빛이 비추며,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린다. 우거진 숲길이 나타나기도 하고, 때론 삭막한 사막의 길이 오랜 시간 계속되기도 한다.

한 사람이 개척하고, 다른 사람이 피와 땀을 흘려 만든 그 사랑의 길은 영원을 약속해야 한다. 두 사람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 길은 변경되어서는 안 된다.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편하고 좋은 길을 고속화하거나 복선화 하더라도 사랑의 길만큼은 처음 만들 때의 마음으로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

사랑이 싹텄던 시골의 보리밭 옆의 작은 길처럼 개울물도 남겨두고, 맹꽁이가 우는 작은 연못도 그대로 남겨두어야 한다.

오늘 자신의 영혼이 만든 사랑의 길이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라. 눈을 꼭 감고 그 길 위에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그 사랑의 감촉을 느껴보라. 행복하지 않은가? 행복은 오직 자신이 만든 사랑의 길을 나설 때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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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소멸>

시간이 갈수록 사랑은 점점 희미해지고, 강도는 떨어진다. 두 사람을 꼭 붙잡고 접착시키는 힘이 약해진다. 그것은 곧 사랑의 변질을 의미한다. 서글픈 사랑의 종말을 뜻한다.

이것 때문에 사랑의 불행은 시작된다. 희미해지는 과정, 사랑이 초점을 잃고 방황하게 되는 순간, 사람들은 직감으로 느낀다. 자신의 사랑이 예전과 달리 변해가고 있음을 예감한다.

사랑처럼 허망한 존재도 없다. 있다가 사라지는 빛처럼, 실종되면 그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자신의 가슴 속에, 핏 속에 떠돌아다는 파편만 남아서 가슴을 찌르고, 피를 나게 만드는 유령이 된다.

보이지 않는 사랑을 쫓아다니고, 추상적인 사랑에 매달리면서 구체적인 현실을 무시하려고 들었던 사람들은 곧 사랑의 진실을 깨닫고 가슴을 친다.

아무 가치 없는 사랑에 걸었던 자신의 가치가 허무하게 무너져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실망을 하고, 때로는 분노를 느끼기까지 한다. 그래서 심한 자괴감에 빠져버린다.

프랑스의 롤랑 바르트도 사랑의 소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페이딩(Fading) - 사랑하는 이의 수수께끼 같은 무관심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것도, 또는 세상 사람이나 그의 적수, 다른 누구를 위해 말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이가 온갖 접촉에서 물러난 것처럼 보이는 고통스런 시련.
그 사람이 페이딩에 사로잡힐 때, 그것은 아무런 이유도, 끝도 없는 것처럼 보여 내 마음을 불안케 한다. 서글픈 신기루마냥 그 사람은 멀어지고, 무한으로 옮겨져, 나는 그를 쫓으려다 기진맥진해진다.>
-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162~168쪽에서 -

그러므로 사랑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사랑이 소멸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영원불멸할 수 없음은, 인간 자체가 그렇듯이, 인간이 만드는 사랑도 당연히 소멸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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