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모진 운명 ⑤

 

천강주식회사는 연매출액이 500억 원이 넘는 적지 않은 회사였다. 김현식의 주장에 의하면, ‘사장은 납품업체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 비자금을 조성하였다. 그 비자금으로 공무원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었다. 뇌물을 써서 허가가 나지 않을 장소에 호텔을 지었다. 여자 비서를 성폭행한 후 오피스텔까지 얻어주고 첩으로 데리고 있다. 중국과 거래하면서 환치기도 했다.’

 

김현식은 그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정현은 여러 가지 사항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물어보았다. 김현식은 경리부장이었던 관계로 구체적인 방법과 금액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적극적인 자세로 수사에 협조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특별수사는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의 범죄에 대하여 상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내부자의 협조에 의해 수사 단서가 포착된다. 내부자는 이런 저런 이유로 회사에 대해 불만을 품고 비리를 수사기관에 제보한다. 공식적으로 이름을 내놓고 고발장이나 진정서를 내기는 곤란하므로 직접적인 제보형태를 취한다.

 

실제로 다른 사람의 범죄사실이나 비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면 굳이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검사를 찾아가 제보를 하지 않는다. 귀찮은 일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앙심을 품고 있거나 원한이 서려 있는 사람들은 그 상대방에 대한 응징을 하기 위하여 법을 이용한다. 이때 어설프게 해서는 상대방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특별수사부 검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상급관청에 고소장이나 진정서를 내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청와대나 법무부, 대검찰청, 경찰청 등에는 익명의 진정서가 밀려들어오고 있다.

 

공직사회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라이벌관계에 있는 다른 공무원이 특정 공무원을 물먹게 하기 위해 업자와의 유착관계를 익명으로 투서한다. 그러면 특정 공무원은 검찰의 내사를 받게 되고, 그러다 보면 구속도 되고 파면도 된다. 꼭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내사나 수사 받는 것 자체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 공직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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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진 운명 ①

은영은 매우 모범적인 직장 여성이다. 이 회사에 들어온 지도 벌써 6개월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 직장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어, 비교적 빨리 적응했다. 입사한 지 3개월이 되던 때에, 은영은 사장의 눈에 들었다.

그래서 비서실에서 근무를 하도록 했다. 은영은 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러나 끝내 전공인 미술은 계속하지 못하고, 회사에 취직애서 사무일을 보게 되었다.

은영은 가정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은영이 직장생활을 해서 부모님을 부양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하나 있는 동생은 아직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회사의 부회장과 실무자 3명이 해외 출장을 갔다. 부회장은 은영도 같이 가자고 했다. 그룹의 부회장이 은영도 출장자 명단에 넣도록 한 것이었다.

은영은 특별히 영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닌데, 자신이 부회장을 수행하여 일본까지 가게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은영의 남자 친구는 이런 사실을 알고, 왜 따라 가느냐고 따졌다.

“네가 가서 할 일도 없잖아? 그런데 왜 여비서가 일본까지 따라가서 무엇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혹시 부회장이 심심하니까 데리고 가서 놀려고 하는 건 아닐까?”

“글세, 모르겠어. 이 회사의 생리를 아직 정확하게 모르니까. 하지만, 어쩌겠어. 부회장이 내가 필요하다고 출장을 같이 가자는데, 거절할 수 없잖아?”

“응. 알았어. 하지만 출장가더라도 꼭 필요한 비즈니스만 하고, 남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노래방 같은 곳에는 가지 마.”

“물론이지. 내가 여직원이지, 남자들 놀이개는 아니잖아.”

사랑의 모진 운명 ②

은영은 부회장 일행과 일본 도쿄로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출장을 갔다. 가서 은영이 하는 일은 그냥 부회장 일행을 따라 다니는 일이었다. 특별히 차심부름을 할 일도 없었다. 주로 호텔 비즈니스품에서 회의를 하고, 거래 업체 회사를 방문하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데 동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출장 일정 마지막 날 밤에, 부회장은 갑자기 은영을 자신의 방으로 오라고 했다. 어떤 서류를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국에 가서 약을 사다달라고 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속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회장은 원래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었다. 담배도 계속 피웠다. 나이는 60살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돈이 많아 서울에서 최상류층에 속했다. 부인도 미인이라고 들었고, 자녀들도 모두 출세해서 떵떵거리고 사는 집안이었다.

은영은 부회장의 심부름이 못마땅했다. 같이 따라간 남자 직원도 있는데, 왜 하필 여자인 자신을 호텔방으로 오라고 하고, 약을 사가지고 오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은영은 부회장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룹의 부회장이란 막강한 자리다. 모든 사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남자 직원들은 부회장 앞에 가면 벌벌 떨었다.

부회장은 성격이 급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직원들이 조금만 잘못하면 큰소리로 난리를 치고, 심지어는 재떨이를 집어던지기도 했다는 전설이 있다.

가난한 집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의지가 강했고, 그룹 회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다.

은영이 부회장의 지시대로 약국에 가서 약을 사가지고, 요구한 서류를 가지고 호텔방으로 갔다. 부회장은 목욕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은영은 민망했다. 호텔방에서 남자와 단 둘이 있는데, 그것도 목욕가운만 입고 쇼파에 앉아 있으니 경우가 없는 사람 같았다.

사랑의 모진 운명 ③

부회장은 쇼파 맞은 편에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서류를 보면서 몇 가지 지시를 했다. 그리고 약을 먹기 위해서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여비서로 생각하고, 출장 나와서까지 그대로 시켜먹는 것이었다.

은영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비서릐 지위에서 부회장이 하라는 대로 했다. 어쩔 수 없었다. 부회장은 미리 가지고 온 와인을 꺼내 은영과 함께 마시자고 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지? 호텔방에서 둘이서 와인을 마시고 있으면 이상하지 않을까?’

그러나 싫다고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 편하게 앉아서 술이나 마시자.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리고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애로사항이 있으면 맗래 봐. 내가 다 해결해 줄테니.”

“예. 부회장님!. 아무런 애로사항도 없어요. 다만, 이렇게 부회장님 방에 오래 있으면, 다른 직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요. 혼자 편히 쉬세요.”

“아냐. 걱정하지 마. 그리고 왠지 오늘은 같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

부회장은 은영의 의사를 무시하고, 와인을 두 병이나 마셨다. 은영에게도 곗혹 와인을 마시도록 강요랬다. 은영은 술이 약했다. 와인을 몇 잔 마셨더니 벌써 취기가 올라왔다. 얼굴도 빨개졌다. 부회장은 술에 취한 것 같았다.

은영은 더 이상 있다가는 곤란할 것 같아서 일어나서 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부회장은 은영의 팔을 잡아서 다시 의자에 앉혔다. “괜찮아. 조금만 더 있다가 가요.”

은영은 정맘 란감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술집 여자도 아니잖아? 이 영감이 정말 주책이구나!’

하지만 쉽게 뿌리치고 나올 수도 없었다. 부회장이 화를 내면 회사를 더 이상 다니기가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부회장은 분명 나를 다른 것을 핑계 삼아서 회사에서 내쫓거나 다른 보직으로 옮길 거야. 큰일인데, 이를 어쩌지?’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은영은 자신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부회장은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은영에게도 권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은영을 일으켜 세운 다음 침대로 갔다. 은영은 당황했다.

사랑의 모진 운명 ④

‘아니. 부회장님. 이러시면 안 돼요. 이러지 마세요.“ 은영은 애원했다. 하지만 부회장은 큰 덩치로 은영을 침대에 눕혔다. 심한 폭행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이겠다고 협박을 한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이런 상황이 되니 은영은 적극적으로 반항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좋아서 자발적으로 침대에 누운 것도 아니었다. 부회장은 불을 껐다. 그리고 은영을 껴안고 있었다.

은영은 기가 막혔다. 다른 사람 같으면 발버둥을 치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하고, 바로 경찰에 신고했을 것이다. 함께 출장을 간 남자 직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호텔 프론트 데스크로 전화를 해서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로밍해 간 핸드폰으로 남자 친구에게 연락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은영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냥 공황상태에 있었다.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부회장은 은영을 침대에 눕히고, 애무를 시작했다. 은영은 정말 싫었다. 소름이 끼쳤다.

서른 살밖에 되지 않은 은영을 60살이 넘은 부회장이 애무를 하니 징그러웠다. 그냥 자포자기 상태에서 당하고 있었다. 부회장은 술에 취해서인지 오래 성관계를 하지는 않았다. 일을 마치고,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해. 너무 이쁘로 매력적이어서 내가 참지 못했어. 정말 미안해, 이해해 줘.”

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일어나 옷을 입고 자신의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부회장의 것을 샤워로 깨긋이 털어냈다. 은영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동경의 밤은 조용했다.

속이 상했다. ‘내가 이렇게 당하다니. 정말 이상해. 왜 강하게 뿌리치지 못했을까? 싫다고 거부하지 못했을까?’

이튿 날 아침, 은영은 방에서 나가지 않고 있었다. 호텔 식당에서 조식을 한다며, 같은 일행 남자 직원들이 내려 오라는 것을 몸이 아파 아침 식사는 하지 않겠다고 핑계를 댔다.

하지만 식사 후의 다른 일정에는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부회장 일행과 일을 보고 서울로 돌아왔다.

은영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이렇게 억울하게 당한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남자 친구에게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 만일 이야기하면 난리를 칠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말할 수도 없었다. 가까운 친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충분히 거절하고 반항했으면 부회장이 폭행이나 협박을 해서 강간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내가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혀 원치 않는 성관계를 당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하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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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진 운명 ④

 

검사에게 직접 찾아와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소장이나 진정서를 내면 되지만, 그렇게 공개적으로 사건화 시키는 것을 꺼리고 검사에게 중요한 범죄정보를 직접 제공하는 것이다.

 

고소장이나 고발장을 내게 되면 일반적인 사건처리절차에 따라 처리되기 때문에 제보자의 신분이 즉시 노출된다.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타인의 비리를 폭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직접 수사기관을 찾아가 범죄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는 언론기관에 제보를 함으로써 기사화한 다음, 언론보도내용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수사기관에서 수사를 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어떤 여자 검사가 다른 남자 검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한 방송사에 공개적으로 인터뷰를 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그 때문에 me too 운동이 한참 진행되었다. 어떤 비리나 범죄에 대한 언론사의 보도는 매우 무서운 힘을 가진다. 즉시 여론이 불같이 일어나 범죄인, 가해자에 대한 수사가 착수되고, 처벌이 이루어진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김현식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어느 기업체에서 경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사장과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를 그만 두었다. 회사에 불만을 품고 회사 비리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찾아온 것이었다.

 

원래 회사의 비리란 내부자의 제보로 수사가 이루어진다. 회사 자료는 회사 직원이 사장 몰래 파일을 복사해 가지고 있거나, 서류를 복사해 빼냄으로써 증거자료로 제출된다. 이렇게 되면 이미 증거자료가 다 확보된 상태이므로 수사기관에서는 수사의 단서가 될 뿐 아니라, 수사해서 범죄사실을 증명하기가 아루 쉬워진다.

 

특히 김현식과 같이 회사의 경리담당자가 회사의 내부 회계 경리관련 자료를 빼내서 가지고 있으면, 회사로서는 어떻게 감당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경우 카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회사 사장과 협상을 벌이기도 한다.

 

‘내가 이런 자료를 가지고 있으니, 무마하기 위해서 1억 원을 달라.’고 요구한다. 말하자면, 일종의 공갈행위인 것이다. 회사 내부의 자료를 불법적인 방법으로 입수하여 그것을 가지고 탈세로 고발하겠다고 겁을 주는 것이다. 당연히 형법상 공갈죄에 해당하고, 죄질도 나쁘다. 사장이 고발하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 사장은 선뜻 공갈죄로 그 사람을 고발할 수 없다. 상대를 처벌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그 보다도 사장이 탈세와 비자금조성 등의 형사처벌을 받게 되고, 세금을 추징당하고, 그러다 보면 회사가 부도나는 위험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사장은 공갈치는 사람과 협상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공갈범이 터무니없이 큰 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적당한 돈을 요구하면 되는데, 상상도 못할 돈을 요구하면 고민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단 돈을 주고 해결해도, 또 나주에 다시 돈을 요구하면 그때는 처음과 똑 같은 상태가 된다. 두 번 다시 공갈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모든 자료를 폐기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그런 자료는 얼마든지 복사가 가능하고, 또 고발한다고 하면 다시 처벌받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공갈범처럼 나쁜 사람은 없다. 어떤 약점이든지 그것을 잡고 돈을 뜯어내는 공갈범은 우리 사회 도처에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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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진 운명 ③

 

“검사님! 어떤 사람이 검사님을 바꿔 달라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누구지요?”

“어떤 사건에 관한 제보를 하겠다고 하면서, 저에게 말해도 된다고 했더니 굳이 검사님을 바꿔달라고 해요. 꼭 검사님과 직접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하는데요?”

“예. 바꿔주세요.”

 

계장은 전화를 바꿔주었다.

“여보세요. 박검삽니다.”

“아. 검사님이세요. 저는 검사님께 중요한 제보를 드리려고 합니다. 꼭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어떤 내용인지 간단히 전화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전화로는 제대로 설명드리기 곤란한 사건입니다. 어떤 회사의 비리에 관한 큰 사건입니다. 꼭 만나 뵙고 싶습니다.”

“그래요? 그럼 제 사무실로 오세요."

 

정현은 중요한 범죄정보를 제보하겠다는 사람에게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원래 검찰청사는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고소인 또는 피고소인, 피의자, 변호사 등 사건관계인만이 검사실에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검사실에 들어가 검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사전에 검찰청으로부터 출석요구통지서를 받거나, 검사실와 미리 연락을 해서 들어오라는 승낙을 받아야 가능하다. 그리고 들어갈 때에도 보안검색을 받아야 한다. 혹시 칼이나 도끼 같은 것을 가지고 검사실에 들어가 사건처리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검사나 직원에게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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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진 운명 ②

 

점심 식사를 마친 정현은 잠시 여유를 가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금요일 오후였다. 아무리 바쁜 사무실이라도 금요일 오후가 되면 달랐다. 업무를 대체로 정리해 놓기 때문에 마음이 느긋해진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간 휴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긴 휴식의 앞에서 느끼는 편안함이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급한 걸음으로 비를 피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우산 하나의 차이가 그런 것이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그렇게 다르다. 조급함과 여유로움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우산 하나로 빗속을 즐기면서 걸을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황급한 걸음 속에서 비를 불편하게만 생각하고 무조건 피하려고 한다. 우산이 없어 비에 가까이 다가길 수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아무런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쫓겨야 한다.

 

우산은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초보적인 단계의 기술이다. 자연과 싸우는 무기다. 우산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일차적으로 막아준다. 물론 완벽하게 빗물을 막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아쉬운대로 머리카락을 젖지 않게 하고, 눈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막아준다. 그러면서 빗속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원시인들은 우산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초원에서 모든 동물들은 우산이라는 존재를 모른다. 비가 오면 일단 피한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거나, 나무 숲 속에서 가만히 있는다. 아니면 초원에서 그냥 비를 맞는다. 폭풍이 몰아쳐도 마찬가지다.

 

인간만이 우산을 이용하는 유일한 존재다. 비를 막으려는 것이다. 비에서 자신의 몸과 옷을 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인간은 우산을 사용함으로써 비의 촉감을 상실해버렸다. 비를 맞아 머리로부터 아래로 흘러내리는 비의 그 은은한 감각을 잊어버리고 딱딱한 갑집 속으로 자신의 피부를 감추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필요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존재 하나 때문에 매우 고통스럽게 될 수 있다. 있어야 할 자리에 그 누군가가 없는 경우 삶은 망가지고 무질서하게 된다. 행복과 불행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느긋함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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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진 운명 ①

 

별이 빛나고 있다. 어두운 밤에 별을 보고 있으면 인간은 아주 작게 느껴진다. 존재라고 하기에도 곤란할 정도로 초라하다. 거대한 우주 속에서 인간은 한 점 먼지에 불과하다. 그 초라함을 느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된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영혼의 고향은 어디인가? 알 수 없다. 누가 그에 대해 자신 있는 결론을 내리고, 근거를 제시한다고 해도 아무런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만 결국은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지고 만다.

 

영혼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적어도 영혼에 빛이 있다는 사실은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빛은 별이 뿜어내는 빛 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 영혼은 살아 있는 생명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혼은 별과 달리 사랑을 할 수 있는 유기체라는 사실이 소중하다.

 

한 사람이 태어나면 별이 하나 반짝인다. 별은 출생과 관련이 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별 하나가 빛을 잃는다. 별은 죽음과 관련이 있다. 한 영혼이 다른 영혼을 사랑하면 두 개의 별이 빛난다. 그 사랑은 어느 하나의 별에서 다른 별까지 다가간다. 두 개의 별은 하나가 된다. 사랑은 새로 탄생한 별에 영원한 흔적을 남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별을 보아야 한다. 두 사람이 함께 찾은 아름다운 별 속에 자신들의 사랑을 묻어야 한다. 그래야 변하지 않는다. 평생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그 별에 묻힌 사랑은 영원히 보존된다. 그게 사랑하는 사람들의 믿음이고 신앙이다.

 

6월도 다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 선 보일 때 화사함을 마음껏 자랑했던 장미도 점차 익숙해지면서 이제는 푸근함으로 바뀌었다. 진한 붉은 색의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던 그녀는 정현에게 하나의 구원이었다.

 

그녀는 정현에게 생명이 가치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추상적이었던 삶을 구체적으로 손에 잡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났다. 그녀는 장미를 연상시켰다. 그래서 장미를 보면 정현은 마음이 아팠다.

 

산다는 건 목숨만을 유지하는 건 아니라고 믿었다. 삶에는 따뜻한 가슴이 필요했다. 가슴이 차가우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따뜻한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함께 갖추려고 애썼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체로 가슴과 머리가 따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정현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갑자기 머리 속이 어지러워졌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의미를 순식간에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 머리 속으로 밀려 들었다.

 

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어려운 질문들이 공룡처럼 커다란 무게로 정현을 짓누르고 있었다. 정현은 견딜 수 없는 억압에 눌린 채 가만히 있었다.

 

졍현은 눈을 감았다. 지난 10년의 세월이 어떻게 지나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직 일에만 파묻혀 살았다. 나름대로 생각했던 정의를 지키려고 발버둥쳤다. 오로지 한 여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영혼까지 던졌던 사랑이었다. 그런데 지금 남은 것은 무엇인가? 슬픈 화석으로 변해 버린 사랑 때문에 정현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현은 사무실에 있는 카셋트에서 평소 잘 듣는 곡을 찾았다. Kansas가 그토록 열창하던 Dust in the wind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금 정현이 느끼고 있는 심정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I close my eyes/ only for a moment/ And the moment's gone/ All my dreams/ Pass before my eyes a curiosity/ Dust in the wind/ All they are is dust in the 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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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진 운명 7-6

은영은 명훈 엄마로부터 계속해서 전화가 오자 속이 상하고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아야 할 말도 없고, 그렇다고 아이를 낙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받은 돈 천만 원을 돌려줄 이유도 없다. 명훈네가 돈이 많은 사람들일뿐더러, 명훈의 아이를 낳아야 할 입장이기 때문에 천만 원 정도는 당연히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혼자서 어떻게 할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친한 친구인 경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속상한 일이 있어 같이 상의 좀 하자는 이야기였다. 은영은 경자가 정해준 장소로 나갔다. 초저녁인데 경자는 벌써 술에 취해 있었다.

“은영아!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니? 우리 엄마가 아빠 돌아가시고 5년 째 혼자 살고 계신데, 전부터 같은 동네에서 사는 어떤 아저씨가 집요하게 엄마에게 달라들어서 하는 수 없이 연애를 했대. 그런데 그 아저씨 부인이 이런 사실을 알고 엄마에게 위자료를 3천만 원 내놓으라고 한 대.”

“아니 그게 말이 돼? 둘이 같이 재미 보고 왜 엄마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한 대? 나쁜 사람들 아냐?”

“그 아저씨는 그 아줌마와 이혼할 생각도 없대. 그런데도 아줌마는 우리 엄마에게 갖은 욕설을 다 하고, 화냥 X이라고 하면서 난리를 치고 있어.”

사랑의 모진 운명 7-7

“그런 경우에는 그 남자가 다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거 아냐? 그리고 지금 간통죄도 없어졌는데 왜 그렇게 겁을 먹고 그러니? 너희 엄마는? 아빠 돌아가시고 혼자 산다면서?”

“문제는 우리 엄마는 자기 명의로 아파트가 있어. 그 아저씨는 돈도 없고, 몸도 아프대. 그리고 그 아저씨 부인이 펄펄 뛰고 난리를 치고 있는 거야. 아저씨는 지금 엄마 전화도 받지 못하고,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라고 딱 끊어버리고 있어.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니?”

“근데 그 쪽에서도 이혼도 하지 않고 너희 엄마만 상대로 소송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서로 정을 통하지 않았다고 잡아떼면 되지 않니? 증거가 없을 거 아냐? 그리고 엄마는 뭐라고 해? 육체관계를 했다고 해?”

“응. 그 아저씨 핸드폰을 그 여자가 봤대. 둘이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도 있고, 둘이 같이 찍은 사진도 있대. 그리고 그 여자가 난리를 쳐서 엄마도 다 인정하고, 잘못했다고 빌었대. 다만, 엄마는 위자료를 깍아달라고 하는 거야.”

“무엇을 잘못했다고 빌어? 아니! 혼자 사는 여자가 유부남이 따뜻하게 대해주면서 사랑한다고 하면 같이 사랑할 수도 있는 거지, 도대체 그 마누라는 어떤 피해를 보았다고 떠드는 거야? 지가 남편 잠자리 못해주면 미안하게 생각하고, 저 대신 다른 여자가 잠자리 서비스 해주었으면 고맙게 생각해야지 무슨 위자료를 청구하고 있는 거야?”

“그 남자는 연락도 안 받고, 모든 걸 마누라에게 맡기고 있다고 해. 그리고 곧 동네에 소문을 퍼뜨리겠다고 공갈 치고 있어. 그리고 빨리 합의하지 않으면 엄마 집에 와서 망신을 주고 창피를 주겠다는 거야.”

“엄마 집에 와서 난리를 치면 곧 바로 경찰서에 신고를 해! 그리고 위자료 3천만 원은 말도 되지 않는 거야. 절대로 합의하지 마. 그리고 그 여자도 소송하는 건 쉽지 않아 못할 거야.”

사랑의 모진 운명 7-8

“그 여자 아들이 법대생이래. 그래서 인터넷 다 찾아봤는데, 유부남인줄 알고 연애했으면 최소한 위자료 3천만 원 이상 나온대. 그리고 엄마 재산을 먼저 차압하겠대.”

이런 경우 참으로 답답하다. 다 큰 자녀가 있는데, 엄마가 사별하고 혼자 살다가 남자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남자가 너무 잘 대해주고, 사랑한다고 하니까, 혼자 살면서 외로워서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남편도 없으니까 특별히 조심을 하지 않았는데, 그 남자는 유부남으로서 마누라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있으면 조심할 노릇이지, 핸드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들통이 났다.

그리고 들통이 났으면 그래도 남자가 알아서 해결할 것이지, 저는 비겁하게 쏙 빠지고, 마누라와 애인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손을 빼고 있다. 보통은 남자의 돈으로 마누라에게 애인이 물어주어야 할 돈을 대신 갚아주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번 남자는 자신의 앞으로는 재산도 없고, 돈도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건강도 좋지 않아 집에서 마누라나 자식들에게 천덕꾸러기로 지내고 있는 입장이다. 이혼도 할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영의 친구 엄마 전화도 받지 않는지, 못받는지 연락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은영은 친구 정자를 불러냈다. 정자는 이런 문제에 대해 경험이 많기 때문이었다. 주변에 있는 변호사들과 많은 상담을 해서 웬만한 문제는 변호사 이상으로 많은 지식이 있었다. 정자는 은영 친구의 이야기를 듣자 갑자기 본인이 흥분하면서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사랑의 모진 운명 7-9

“정말 요즘 세상은 말세야. 남자들이 등신이 다 되어서 그래. 일단 합의하지 말고 기다려. 배짱으로 나가면 돼. 먼저 그 여자가 찾아오면 맞고소를 해. 행패를 부리거나 폭행 또는 협박을 하면 형사고소를 해. 그리고 아파트를 밀고 들어오면 주거침입죄가 되는 거야. 그리고 위자료 청구가 들어오면 그 남자도 같이 피고가 되든가, 아니면 증인으로 나오게 되니까 그때 강하게 따지면 돼. 그리고 남자가 강압적으로 섹스를 했다고 주장하고, 남자가 부인과 이미 파탄이 난 상태라 이혼을 하려고 준비중에 있는 상황에서 엄마를 좋아했다고 하면 돼.”

은영 친구는 은영과 정자로부터 많은 어드바이스를 들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간통죄는 없어졌지만, 법은 이렇다. 우리나라 법은 일단 혼인신고가 되어 부부로 되어 있으면 남편과 아내는 성적 성실의무가 있다. 이것을 위반하면 위반한 쪽은 상대방에게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함께 바람을 핀 다른 사람도 상대의 배우자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그런데 나이가 65세인 혼자 사는 여자가 68세된 유부남과 연애를 했다고 해서 그 마누라에게 왜 3천만 원이나 되는 큰 돈을 물어주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나이든 남자의 아내는 이 문제로 얼마만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을까? 그리고 그 고통을 금전으로 배상할 때 과연 어느 정도의 금액이 적정한 것일까? 매우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은영과 그 친구, 그리고 정자는 모두 여자의 입장에서도 그 남편 되는 남자의 행태가 정말 추하고 더러워보였다. 그래서 세 사람은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하지만 은영은 뱃속에 있는 아이 때문에 술을 입에 대지도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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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진 운명 7-4

한편 은영은 박기사로부터 1천만 원은 받았지만 낙태수술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낙태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은영은 아무래도 명훈을 잊고 살 자신이 없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명훈처럼 좋아해본 남자는 없었다. 명훈이 바람둥이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지만, 은영에게는 지금 명훈의 아이가 뱃속에 있고, 아이먄 낳으면 명훈의 마음도 돌아올 것 같은 생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명훈을 닮은 아이를 낳으면 더 이상 행복이 있을 수 없었다. 잘 생기고, 남자답고, 또 은영이 자신처럼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가 태어나서 은영과 평생 같이 간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은영은 마음을 굳혔다. 박기사에게 전화를 했다.

“아무래도 아이를 낳아야 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돈은 돌려드릴 게요. 정말 미안해요. 제 입장을 이해해 주세요.”

“아니! 정말 나쁜 X이네. 그렇게 좋게 이야기했으면 알아들어야지. 너 이젠 끝이야. 네 과거 다 알리고, 너를 사기와 공갈로 잡아넣겠어. 기다려. 이 나쁜 인간아!”

박기사는 흥분해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은영은 무서워서 전화를 끊었다. 세상이 너무 무서웠다. 연약한 여자로 살아가기에는 주변에 너무 많은 맹수와 독사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사랑의 모진 운명 7-5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아무 잘못도 없는데, 내가 사랑하는 남자 아이를 낳겠다는데 왜 나를 이렇게 나쁘게 생각하는 걸까?’

눈물이 흘렀다. 그러면서 배를 어루만졌다. 뱃속에서는 아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힘을 내야 해. 아이 때문에. 내가 져서는 안 돼.’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박기사는 흥분한 상태로 명훈 엄마를 만났다. “아니 이 나쁜 인간이 결국 사기를 쳤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 이렇게 합의서까지 써놓고 돈만 떼먹고 수술을 안 하겠대요. 어떻게 하지요?”

“일단 돈은 돌려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실은 그 여자가 모텔방에서 나체로 있는 사진을 찍은 것을 제가 입수했어요. 이걸 가지고 사모님이 한번 만나 보시면 어떨까요? 정말 난잡하고 아주 더러운 여자라는 증거를 가지고 만나서 혼을 내주면 떨어질 지 몰라요.”

“아니 이건 어디서 구했어요? 정말 지저분한 애네요. 우리 명훈이가 정말 재수 없어 이런 여자를 만난 거예요. 알았어요. 내가 그 여자를 만나볼 게요.”

명훈 엄마는 즉시 은영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은영은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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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진 운명 6-19

명훈에 대한 강간치상사건에 관하여 구속영장실질심사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검찰청에서 명훈에게 전화가 왔다. 명훈은 만 19세가 넘은 성년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보호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법적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 것이다.

“정명훈씨지요? 이번 주 금요일 오전 10시까지 검사실로 와 주세요.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가야 합니다. 반드시 출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변호사는 실질심사 때 법정에 가서 정명훈씨에 대한 변론을 할 수 있습니다. 담당 변호사님께도 알려드리세요.”

전화를 받는 순간 명훈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미 영장을 칠 거라는 말은 변호사로부터 들었지만, 정말 자신이 감방에 갈 거라는 사실에 직면하자 공황장애상태에 빠졌다.

공황장애란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불안장애를 말한다. 이런 증상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머리 속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다.

당하는 사람은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도의 심한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극심한 불안과 공포심리, 그로 인해 가슴이 뛰고, 호흡곤란의 상태가 온다.

가슴은 답답하고, 어지러우며, 곧 죽을 것처럼 생각이 든다. 심한 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생기기도 한다.

사랑의 모진 운명 6-20

어떤 사건으로 인해 조사를 받다가 어느 시점부터 그 사건으로 인해 구속될 수 있다는 위험성에 처하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무섭고 두렵다. 당장 감방에 들어가면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극에 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잠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1년을 살지 5년을 살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감방 안에서 폐인이 되고, 건강을 잃고, 그러다가 몇 년 있다가 나오면 그때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느끼고 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일단은 도망갈 방법을 한번쯤 생각해 본다. 너무 무서우니까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심리다. 때문에 명훈은 자신의 사건을 맡고 있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했다.

“변호사님! 큰 일 났어요. 이번 주 금요일 10시까지 검사실로 와서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으라고 해요.”

사실 명훈의 실력으로는 구속영장실질심사의 정확한 뜻이나 의미, 절차나 효과도 모르고 있었다.

명훈뿐 아니라 일반인들은 대개 마찬가지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10년 넘게 한 사람도 막상 형사소송절차에 대해서 물어보면 아무 것도 모른다. 마치 중학교 1학년 수준이다.

사랑의 모진 운명 7-1

그게 정상일 것이다. 우리가 어떤 암에 걸렸다고 할 때, 암에 대해 아무리 많은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한다고 해도 전문의사 입장에서 볼 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그래도 질병은 너무 많이 보고 들어서 어느 정도 상식을 가질 수 있지만, 형사사건은 보통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경험하지 않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명훈이처럼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놀러나 다니고, 여자아이나 꼬시고 다니는 대학생은 형사절차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구속되고 감방이나 가고 하는 것이다.

구속은 알 수 있었다. 영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실질심사의 뜻은 잘 모르겠다. 왜 심사라고 하는지, 그리고 왜 ‘형식’심사가 아니라 ‘실질’심사라고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우리나라 법은 너무 어려운 한자말로 거의 대부분이 되어 있다. 요새는 더군다나 한글을 전용하고 있어 한자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특히 젊은 사람들은 한자를 모른다. 나이 든 사람들도 한자를 몇십년 제대로 쓰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읽을 줄은 알아도 한자로 쓰라고 하면 잘 쓰지 못한다.

아직도 일본에 가면 한자를 많이 쓰고 있다. 중국에 가도 한자를 사용한다. 중국 한자는 또 대부분 다르게 새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배운 한문 실력으로는 거의 읽지 못하게 되어 있다.

사랑의 모진 운명 7-2

구속영장이라고 하는 것은 수사기관에서 어떤 범죄인의 신병을 확보하여 유치장에 넣어놓고 도망가지 못하고, 증거를 없애지 못하도록 할 목적으로, 말하자면 가두어놓기 위해 법원으로부터 받는 ‘피의자를 가둘 수 있도록 법원의 허가를 받는 서류’를 말한다.

구속영장이라는 서류는 법원의 판사가 서명하는 문서다. 이 문서에는 정명훈을 강간치상죄로 구속해도 좋다는 허가사항이 들어있다.

구속영장은 검사가 정명훈을 구속하기 위하여 판사에게 청구하고, 판사가 이를 허가하는 내용으로 발부해주면 검사는 이러한 구속영장을 가지고 정명훈을 구치소에 집어 넣은 것이다. 이처럼 구속영장은 매우 무서운 효력을 가지고 있는 문서다.

보통은 두장으로 되어 있다. 앞장은 표지이고, 뒷장은 범죄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복잡한 사건의 경우에는 10쪽 이상으로 길게 되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도 판사 한 사람의 명의로 발부되었다. 구속영장에는 피의자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범죄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범죄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증거자료는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사건 기록에 편철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구속영장이 발부되느냐, 기각되느냐는 피의자에 대해 결정적인 운명의 갈림길이 되는 것이다.

사랑의 모진 운명 7-3

그런데 판사가 구속영장을 발부하기 전에 피의자를 한번 불러서 억울한 사정이 있는지, 과연 구속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지, 구속의 요건과 필요성 등에 대해 들어보는 절차가 바로 구속영장 실질심사다.

“변호사님! 저는 구속되는 거예요? 금요일 감방에 들어가는 거예요?”

“글쎄요. 꼭 구속되는 건 아니지만, 일단 검사가 구속영장을 청구하게 되면 법원에서 구속영장을 발부할 가능성이 높아요. 그러면 그날 구치소로 넘어가게 돼요. 준비를 많이 해야 해요.”

“저는 정말 강간을 하지 않았는데, 왜 구속영장이 발부될 것 같아요? 변호사님이 꼭 막아주세요. 부탁이예요.”

“이 사건은 판사가 피해자의 말을 믿느냐, 명훈씨 말을 믿느냐 하는 데 달려 있어요. 특별한 물적 증거는 없는 상태니까요. 그러나 구속영장이 발부될 지 여부는 아무도 몰라요. 판사 판단에 달려있으니까요.”

“구속될지, 불구속될지, 불확실하면 저는 일단 피해 있고 싶어요. 피해 있으면서 피해자와 합의한 다음 들어가면 안 될까요?”

“그건 곤란해요. 실질심사에 불출석하면, 판사는 그냥 피의자에 대한 심문을 하지 않고 영장을 발부할 거예요. 그러면 나중에 붙잡혀서 구속되는 거예요.”

더 이상 변호사와 말을 해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상황이었다. 전화를 끊고 명훈은 엄마에게 갔다. 명훈 엄마는 그 말을 듣자 난리가 났다. 당장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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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진 운명 6-17

명훈 아빠 사건을 담당했던 김 검사가 전격적으로 사표를 내고 나가자 검찰청에서는 김 검사가 담당하고 있던 사건을 같은 부에 소속해 있는 검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른바 사건 재바당절차를 밟은 것이다.

명훈 아빠 사건은 같은 부에 소속되어 있는 민 검사에게 재배당되었다. 민 검사는 김 검사가 수사하고 있던 명훈 아빠 사건 기록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김 검사가 열의를 가지고 정 사장을 구속시키려고 한 흔적은 보였지만, 너무 무리하게 수사를 한 것처럼 보였다.

특히 뇌물사건은 아무런 물적 증거가 없는 상태였다. 이러한 경우, 보통 뇌물을 공여한 정 사장의 회사 내 개인적인 비리를 찾아내서 그것을 가지고 구속하겠다고 겁을 주어 뇌물공여사실을 자백받는 것이 가장 쉬운 수사기법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도 김 검사는 아직 상당 부분 미흡한 상태였다. 회사에서 정 사장이 비자금을 조성한 부분도 증거가 불충분했다.

그리고 회사 자금을 빼내어서 애인의 오피스탤을 얻어준 부분도 대표이사 가수금 처리를 했다가 수사가 착수되자 다시 가수금을 회사에 변제한 것처럼 장부를 맞추어 놓았다. 그래서 횡령죄의 범의를 인정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특히 뇌물사건에 대해서는 최근에 대법원에서 고위직 공무원과 거물 정치인에 대해 무죄판결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수사검사 입장으로서는 뇌물죄에 대한 증거판단을 신중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의 모진 운명 6-18

민 검사는 소속 부장검사에게 정 사장에 대한 사건에 대한 중간수사결과를 보고했다.

“뇌물을 시청 국장에게 주었다는 혐의사실은 사실 심증만 있지, 물증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비자금조성은 계속 수사하면 처벌도 가능할 것 같은데, 나머지 회사 자금을 횡령했다는 부분은 다시 회사에 변제를 했기 때문에 입증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맞아요. 민 검사! 얼마 전에 어느 정당 대표에 대한 정치자금법위반사건과 전직 총리에 대한 뇌물사건에서 무죄가 확정되었잖아요? 1심에서는 두 사건 모두 유죄판결이 났는데, 항소심부터 무죄로 뒤집어진 거예요. 아무튼 뇌물사건은 명확한 물적 증거가 없으면 신중한 판단을 해야 해요.”

부장검사가 말하는 사건은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사건'이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와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항소심 판결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2015년 4월, 자원개발 비리 혐의로 검찰수사를 받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자살했다. 성 회장의 자필 메모와 생전 육성 녹음을 바탕으로, "홍 대표는 성 전 회장의 측근 윤모 씨를 통해 1억 원을 받았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징역 1년6개월과 추징금 1억 원을 선고했다. 그러나 2심은 금품을 전달한 성 전 회장 측근의 진술이 허위일 수 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검찰 측 증거만으로는 공소사실이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결국 민 검사는 명훈 아빠 사건에 대해 리베이트를 받은 사건만 불구속으로 재판에 회부하기로 하고, 뇌물공여사건과 업무상 횡령사건은 내사종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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