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일상의 생활에서 쉽게 놓치는 장면들도 막상 영화관에 가서 집중하고 있으면 많이 들어오는 경우를 느낀다. 그것은 우리가 어느 한 곳에 정신을 쏟고,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기 때문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하게 되면, 상대에게 집중한다. 그의 말 한 마디, 섬세한 동작 하나, 희로애락의 감정 표현에 신경을 쓴다. 상대의 단점은 묻히고, 장점만 부각된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상대의 내면에 깊숙이 들어박혀있는 잠재력까지 엿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남과 다른 특수한 점이 있다. 그러한 특성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지각할 수 있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보여진다. 매슬로도 이런 점에 착안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하지 않을 때보다는 사랑할 때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 특성들을 더 깊이 있게 지각할 수 있다. 사랑은 그 대상에 몰입하게 만들고 따라서 그 대상을 관심을 가지고 열중해서 반복적으로 지각하게 한다.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지만, 연인들은 서로의 잠재력을 볼 수 있다. 흔히 우리는 사랑이 눈을 멀게 한다고 말하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사랑할 때 더 깊이 지각할 수도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력을 지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존재의 심리학, 아브라함 매슬로, 194쪽에서 -

 

매슬로의 지적은 매우 정확하다. 사랑할 때 두 사람은 서로의 내면을 통찰하게 된다. 그래서 상대방의 잠재력과 우수성, 독특한 개성을 예리하게 찾아낸다. 그런 이유로 상대방에게 필이 꽂히고, 그 때문에 진한 사랑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다. 쾌락의 종류는 다양하고, 그 내용이 다르다. 단순히 존재의 어떤 무엇을 해소시키는 정도에 불과한 쾌락이 있고, 존재 그 자체의 발전과 존재의의를 충족시키는 상위 단계의 쾌락이 있다.

 

<에리히 프롬은 결핍 쾌락과 충만 쾌락, 즉 욕구의 충족이라는 하위 쾌락과 통찰력의 생산, 창조, 성장이라는 상위 쾌락을 구분한다. 쾌락을 충족시켰을 때 뒤따라오는 포만감, 이완, 긴장의 상실은 기껏해야 해소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이것은 개인이 원활하고 완전하게 기능하고 있을 때, 그리고 자기 능력의 최고조에서, 말하자면 최상의 활동 상태에서 경험하는 열정, 황홀경, 평온함과는 대조된다. 해소는 사라지는 어떤 것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해소 그 상태 자체도 실은 사라지기가 쉽다.

 

성장을 수반하는 쾌락은 꾸준히 지속될 수 있지만, 해소는 덜 안정적이고, 덜 지속적이며, 덜 일관적임에 틀림없다.>

- 존재의 심리학, 아브라함 매슬로, 125쪽에서

 

사랑의 위기와 사랑의 부정

 

브람스는 스무 살부터 클라라라는 한 여인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브람스가 64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에게는 오직 클라라만 존재했다.

 

그런 사랑의 힘으로 브람스는 위대한 음악을 작곡했다. '남아있는 자를 위한 레퀴엠'도 클라라를 위로하기 위해 쓰여졌다.

 

 

아라카와 히로미는 불륜의 사랑은 사랑인가?’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불륜에 빠지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 어떤 것도 불륜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사랑은 새로운 것을 꿈꾼다. 사랑은 이상형을 찾아 날아가는 새와 같다. 자신에게 맞는 이상의 형상을 만나면 곧 날개를 접고 더 이상 날지 않는다.

 

사랑의 열정은 오래 가지 못한다. 사랑은 식고, 위기를 맞는다. 위기에 처한 사랑은 절망한다. 새는 다시 날개를 편다. 극한상황에서의 날갯짓은 사랑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새는 사랑을 긍정한다. 새로서는 그 사랑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새는 어디론가 떠나간다.

나쁜 사랑도 절정에서 시작된다

 

사랑은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함께 만드는 새로운 경험이다. 반드시 두 사람이 합작으로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그래서 사랑은 공동체의 산물이며, 동일한 경험의 공유라고 정의된다. 혼자 피아노를 치거나, 나체화를 그리는 작업과는 전혀 다르다. 반드시 살아 있는 대상과 함께 몸과 마음이 움직여야 사랑이라는 작품이 만들어진다.

 

그 사랑이 완전하든, 불완전하든,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힘들어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면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같이 만들어가면서도 열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그 사랑에 대한 의미와 동기 또한 차이가 있다. 사랑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감정 역시 다르다.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이 구별되기도 한다. 그래서 불가사의하다. 사랑에 이르는 과정도 그렇지만, 일단 어느 정점에 이른 사랑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슬픈 카페의 노래는 카슨 매컬러스가 쓴 소설이다. 우리나라에는 장영희 교수가 번역해서 소개한 바 있다. 이 소설은 사랑의 본질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도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든지 그 가치나 질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인간이 왜 나쁜 사랑에 그렇게 매혹되는 줄 알아? 절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지.” 카슨 매컬러스의 말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톨스토이가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한 말이다.

 

사랑은 언제나 감성이 절정에 이른 상태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사랑은 아름답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평범한 마음의 상태에서는 사랑은 절대 싹트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이 아닌 성적 유희에 불과하다.

 

커피잔에 떨어지는 사랑의 눈물

 

눈이 내리고 있다. 눈이 내려 거리를 하얗게 덮었다. 차들도 겨울을 의식하면서 속도를 줄이고 있다. 찻집에서 커피를 마신다. 커피는 진한 향을 전하면서, 우리와 함께 고독을 나누고 있다. 문득 진한 그리움이 커피 잔을 흔들며 울리고 있다. 눈물을 흘리면서 겨울이 걸어가는 길을 바라본다.

 

오랫동안 너는 내 안에 있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나를 깨우친 무서운 진실! 그 진실은 바로 네가 던져준 삶의 화두였다.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그에 대한 아주 명료한 답이었다. ‘너라는 존재

 

하나의 존재는 다른 하나의 존재에 의해 존재한다. 홀로 있는 존재는 존재가 아니다. 존재로서의 의미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존재 이유이며, 나라는 존재 그 자체이기도 하다.

 

눈이 많이 쌓여 온통 흰색으로 천지가 뒤덮여 있다.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에 날리는 눈꽃이 떨어지면서 작은 미소를 짓는다. 4월의 목련처럼 강렬하게 나를 흔드는 눈송이들이 멀리 멀리 날아가고 있다. 그 뒤를 따라 내 마음도 날아간다. 그러다가 은은한 선율을 따라 한곳에 정착한다.

 

 

그곳에는 네가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눈을 녹인 채 작은 둥지를 만들어놓았다. 두 마음이 둥지 안으로 들어가 별이 뜰 때까지 소나무를 바라본다. 솔향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감성적으로 예민해진 까닭일 것이다.

 

겨울새가 날갯짓을 한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시간, 새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울음소리를 낸다. 그 소리를 따라 우리는 눈 속으로 들어간다. 눈에 덮여 아무 것도 볼 수 없지만, 그곳에는 모든 비밀을 간직할 수 있는 커다란 동굴이 있다.

 

너를 만났던 그때부터시작된 비밀들... 비밀들이 뭉쳐 눈사람처럼 커진 상태로 말없이 앉아있다. 갑자기 몸에서 열이 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로 인해 얼굴이 붉어지고, ‘너를 등에 업고작은 개천을 건넌다.

 

지금 이 시간, ‘아무 말도 하지 말자오직 서로를 바라보자. 그리고 서로를 느끼자. 눈이 내리고, 눈이 쌓이고... 우리 사랑도 눈처럼 소복이 쌓이고, 사랑의 비밀도 눈처럼 동굴 속에 쌓이는 밤이다. 겨울밤은 언제나 사랑 앞에서 사랑을 흔들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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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주는 것일까?>

 

 

사랑은 주는 걸까? 받는 걸까? 지극히 단순한 질문 같지만, 막상 그 대답은 쉽지 않다. 사랑은 누가 주는 것도, 누가 받는 것도 아니다. 사랑을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없듯이 받는 것을 알 수도 없다.

 

사랑이란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의 가슴에 담아두는 일이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흔들리는 마음을 어딘가에 붙잡아 매어두는 것이다.

 

사랑에는 상대를 향하는 방향성(方向性)이 있다. 어느 한 곳을 향해 흐르는 감정이다.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움직이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그야말로 방황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은 상대방의 가슴 속에 자신의 마음을 묻어두는 것이다. 사랑은 매우 추상적이다. 형이상학적인 일이다.

 

사랑은 한 곳에 머문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싹을 키우고 뿌리를 내린다. 격한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고 세찬 폭풍에도 견디어 낸다. 깊은 바닷속에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불안한 이유를 아는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사랑은 단지 마음으로만 확인된다. 그래서 겨울 내내 뜬 눈으로 지새우면서, 사랑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영원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 속에서 두 마음이 뒤엉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서로가 구별할 수 없고, 떼어낼 수도 없는, 한덩이 눈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금 그대가 찾고 있는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상대방의 가슴 속에 있지 않다. 그대의 가슴 속을 들여다 보라. 바로 그곳에 뜨겁게 숨쉬고 있는 사랑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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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사랑의 방황>

 

사랑은 주는 걸까? 받는 걸까?

지극히 단순한 질문 같지만, 막상 그 대답은 쉽지 않다.

 

사랑은 누가 주는 것도, 누가 받는 것도 아니다.

사랑을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없듯이 받는 것을 알 수도 없다.

 

사랑이란 자신의 마음을 어느 그릇에 담아두는 일이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흔들리는 마음을 어딘가에 붙잡아 매어두는 것이다.

 

사랑에는 상대방을 향하는 방향성(方向性)이 있다.

어느 한 곳을 향해 흐르는 감정이다.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움직이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그야말로 방황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은 상대방의 가슴 속에 자신의 마음을 묻어두는 것이다.

때문에 사랑은 매우 추상적이다.

형이상학적인 일이다.

 

사랑은 한 곳에 머문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싹을 키우고 뿌리를 내린다.

격한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고 세찬 폭풍에도 견디어 낸다.

깊은 바닷속에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불안한 이유를 아는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단지 마음으로만 확인된다.

그래서 겨울 내내 뜬 눈으로 지새우면서

사랑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영원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 속에서 두 마음이 뒤엉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서로가 구별할 수 없고

떼어낼 수도 없는

한덩이 눈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금 그대가 찾고 있는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상대방의 가슴 속에 있지 않다.

 

그대의 가슴 속을 들여다 보라.

바로 그곳에 뜨겁게 숨쉬고 있는 사랑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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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사랑이다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서는 봄부터 소쩍새는 피를 토하도록 울어야 한다.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피와 눈물, 세월을 필요로 한다.

 

사랑의 탑을 쌓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랑을 어루만져서 깨지지 않도록 정성을 들여 높은 탑을 세우는 것은 상상만 해도 힘이 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사랑은 오직 두 사람만의 의지와 노력으로 쌓아야 하는 것이니까 더욱 힘이 든다.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두 사람이, 그것도 오직 같은 두 사람만이 똑 같은 강도로 해야 사랑은 이루어진다.

 

하지만 사랑은 아프다. 언제나 내면에 아픔을 품고 있다. 그래야 사랑이다. 아프지 않고 쉽게 얻어지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단순한 유희에 불과하며 육체적 정신적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아픈 이유는 정말 자신에게 맞는 짝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애써서 찾고, 상대의 마음을 자신의 가슴속에 품기 위해서 잉태와 해산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애써 쌓은 탑이 무너지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와르르 하는 소리 한번으로 끝이 난다. 그것이 무너짐의 법칙이다. 모든 존재는 무너질 때 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나라가 망하는 것도, 재벌기업이 부도나는 것도, 공직자가 뇌물로 끝장이 나는 것도 한 순간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몇십년 살던 부부도 도장 한번 찍으면 이혼이다. 남이 된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최영미, 선운사에서, 시의 일부 발췌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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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그때처럼

 

겨울이 완전히 떠나기 전에 우리는 편지를 써야 한다. 예쁜 글씨로 정성껏 쓴 편지를 나뭇가지에 걸어 놓아야 한다. 새벽 까치가 물고 저 고개를 넘어 내 사랑하는 님의 창가에 곱게 놓기를 소망한다.

 

<그땐 너무 몰랐어요/ 당신의 가냘픈 손동작/ 이해할 수 없는 미소의 의미를/ 그냥 스치고 말았어요/ 너무 아쉬워요/ 철없던 시절의 방황/ 삶의 어설픈 철학 앞에서/ 사랑을 놓쳤던 젊은 날들이/ 아픈 추억으로 되살아 나네요

왜 몰랐을까요/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당신 사랑이 순수했다는 걸/ 왜 나만 몰랐을까요

이제는 눈처럼 녹아내렸어요/ 사랑의 끈을 놓쳐버렸던/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강물에 흘러갔어요

돌아가고 싶은/ 그 계절의 원점에서/ 다시 만나요/ 세속의 때를 다 벗고/ 벌거벗은 몸으로/ 우리 다시 만나요> (김주덕, 그때로 다시 돌아가요, 전문)

 

 

아직도 강위에 얼음이 녹지 않은 곳이 있다. 파란 물을 하얀 색깔로 덮고 있는 것은 사랑처럼 보였다. 눈꽃으로 사랑을 덮어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의 추억이 안개비속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갈곳을 잃은 추억들이 내 가슴의 빈 공간속으로 우수수 쏟아져 들어왔다. 나도 아프고 추억들도 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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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사랑의 의미

 

떠난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떠났다는 의미는 사랑의 상실이 아니라, 사랑의 변질이다. 사랑은 빛의 속성을 갖는다. 빛을 상실하면 어두움일 뿐이다. 사랑은 변질된 상태에서 암흑의 길을 걷는다. 암흑 속에 파묻힌다.

 

사랑의 상실은 망각의 강을 건넌다. 너와 맺었던 인연은 모든 아름다움과 함께 강물에 던져진다. 세찬 강물을 겨우 빠져나온 사랑은 알몸으로 다리를 건넌다.

 

더 이상 사랑은 없다. 너 때문에 사랑은 부존재한다. 사랑의 망각과 상실은 빛과 어두움 속에서 서서히 교차한다. 그리고 그림자만 남긴다.

 

이미 상실된 사랑, 변질된 사랑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상대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만들었던 사랑의 사랑,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는 사랑의 허상, 사랑의 이미지, 사랑의 환상 때문이다.

 

그러므로 떠난 사랑 때문에 고통스럽다면, 그 사랑은 애당초 사랑이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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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정욕을 유한 사랑으로 승화시켜라!!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 육체적인 욕정을 정신적인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물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사랑을 맛보지 못한 채 삭막한 존재로 전락한다.

 

()은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사랑이 없는 성관계는 그야말로 단세포적인, 매우 동물적인 생리작용에 불과하다. 남는 것은 순간적인 쾌락뿐, 허망함과 불쾌함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자존심이 짓밟히고, 성에 대한 거부감과 트라우마를 겪는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든, 어떤 상황이든, 절대로 사랑의 과정을 생략한 채, 성관계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기초공사를 하지 않고, 집을 지으면 언젠가 무너져, 그 무게에 짓눌려 인생이 망가질 위험이 있다.

 

사랑은 언제나 진지해야 한다. 사랑은 곧 생명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랑이 임신의 조건과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생명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랑은 장난이 아니다. 사랑을 장난으로 여기는 사람은 그 사랑으로 인해 보복을 당한다. 사랑이 결코 장난이 아닌 상대는 자신이 농락을 당한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존재가 부정되었기 때문에, 상대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사랑은 상대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해야 얻을 수 있는 쌍무성(雙務性)을 갖는다. 두 사람이 서로 대등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면서, 공동의 선, 공동의 이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나누는 육체적, 정신적 행위이다.

 

사랑을 규제하는 법과 제도도 중요하지만, 사랑은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자연법(自然法)에 근거해서 규율된다.

 

사랑을 하지 않고, 성관계를 하지 않아도 죽지는 않는다.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는 성욕을 억제할 수 있는 도덕률, 규범력이 주어져 있다. 게다가 동물이 모르는 자위법을 터득하고 있다.

 

오늘부터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동물적인 욕정을 스스로 통제하라. 그리고 아름다운 정신적인 사랑을 추구하라.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그냥 혼자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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