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45)

“오빠. 나 임신했어. 어떻게 하지?”
“그게 무슨 말야? 언제 임신했어? 그때 피임했잖아?”
“글세 나도 모르겠어. 아무튼 임신했어. 걱정이야.”
“뭘 걱정해. 병원에 가야지. 돈은 내가 낼게 걱정하지 마.”
“뭐라고! 애를 지우라고! 그걸 말이라고 해! 오빠는 내가 성당에 다니는 거 알잖아. 낙태는 죄악이야. 태아도 생명이라고!‘
“지현아! 너 미쳤니? 그럼 애를 낳겠다는 거야?”
“응. 낳고 싶어. 오빠와 결혼하지 못해도 나 혼자 낳아서 키울테니까 걱정하지 마.”
“너 정말 미쳤구나. 그러지 말고 빨리 병원에 가자. 더 늦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수술해야 해.”

이 말을 듣고 나서 명훈은 크게 놀랐다. 지현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상한 여자로 보였다. 무슨 의도인지 몰랐다. 아마 일시적으로 명훈이 잘 대해주니까 무슨 착각을 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지현을 만나 일부러 술을 많이 먹이고, 관계를 할 때 과격하게 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유산시키려고 했다. 술에 취해 있을 때 수면제도 먹이기도 하고, 지현의 배를 세게 누르기도 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현은 유산된 것 같지 않았다.

결혼을 약속한 것도 아니고, 그냥 서로 만나 즐기고 엔조이하려고 했던 것인데, 갑자기 지현이 임신했다고 갑자기 아이를 낳겠다니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꼭 자기 애라는 증거도 없었다.

지현도 처음 만나는 날 곧 바로 섹스를 했던 여자였기 때문에 무척 자유분방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지현은 처음부터 섹스를 아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본인 말로도 자신은 섹스를 좋아한다고 늘 이야기했다.

지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카페에서 알바를 하면서 지내는 입장이었다. 인물도 평범했고, 몸매도 별 거였다.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대화를 해보면 답답했다.

지현이 아버지는 지현이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혼해서 다른 남자와 사는데, 그 남자도 건달이라 별 능력도 없으면서 어머니를 때리면서 살고있는 처지라, 지현은 어머니와 잘 만나지도 않는다고 했다.

언젠가 술에 취한 지현이 명훈에게 털어놓았다. 지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자신보다 열 살 더 많은 남자를 사귀었다. 그 남자가 원룸도 얻어주고, 지현을 너무 사랑해서 지현도 푹 빠졌다. 6개월쯤 동거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경찰에서 원룸에 찾아와서 그 남자를 수갑 채워서 끌고 갔다.

그 남자는 사기도박단의 멤버였다. 그래서 그 길로 감방에 가서 징역을 살게 되었다. 처음 몇 달 동안 지현은 열심히 그 남자의 면회를 다녔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면회를 다니다 보니, 그 남자의 사기도박단 다른 조직원이 지현을 도와준다고 나타나서 몸을 빼앗고, 도망가버렸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면회 가서 이야기했더니, 동거하던 남자는 지현이 꼬리를 쳐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흥분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나가면 지현을 죽여버릴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래서 그 길로 더 이상 면회도 가지 않고, 원룸을 팽개치고 나와버렸다.

그런데 그 후 감방 갔던 남자는 출소했을 것인데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남자가 감방에 가기 전에 지현을 죽을 때까지 사랑할 것이라고 맹세를 하면서, 지현의 은밀한 곳에 그 남자의 이름과 러브마크를 문신으로 새겨놓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사람의 상징을 문신으로 가지고 있었다. 명훈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어차피 결혼할 것도 아니고, 제대로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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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이야기

작은 운명은 소설입니다. 젊은 사람들의 철없는 사랑, 진실성 없는 사랑의 유희, 거짓된 허망한 사랑 등이 많이 등장합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들은 완전한 허구, 가상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비록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개연성 있는 사건들입니다.

나이 든 변호사가 이런 사랑이야기를 쓴다고 해서, 어떤 사람들은 유치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흥미 위주로 사랑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 사회의 성적 모랄을 재조명해보고, 사랑에 대해 그 본질과 양상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소설을 통해 나이 든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패가망신하지 않도록 하는 자성의 기회를 가지고, 젊은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상처받지 않고, 사랑 때문에 좌절하지 않는 지혜를 가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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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정이 떨어진 부인 이외의 다른 여자와 지능적으로 바람을 피는 남자

 

이런 저런 이유로 정혜와 강 교수는 결혼기념일 1주년을 맞아 갑자기 나빠지고 악화되었다. 하지만 보름쯤 지나서 강 교수는 모든 것을 굽히고 다시 돌아왔다. 그것은 처갓집 도움을 받아야 공부도 하고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혜는 결혼 1년 만에 이혼하게 되면 한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당분간 참고 견뎌보기로 했다. 하지만 정혜는 이 인간과는 까만 머리카락이 파뿌리처럼 하얗게 될 때까지 같이 간다는 것은 완전히 100% 불가능하다는 사회과학적 진단을 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결혼생활을 잘 하는 모범생이 와서 핀치 히터로 대신 강 교수와 결혼생활을 하더라도, 속이 좁고, 이기적이고, 멋대가리 없고, 처갓집에 의존하는 주체의식 없는 인간과는 끝까지 결혼생활을 할 수 없다는 단정을 내렸다. 이런 판정은 대법원까지 가서 뒤집어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니고 한 번에 결론이 확정되는 단심제 재판결과였다.

 

만일 그렇게 참고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거나 나중에 보람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무의미, 무보람 상태였다. 사랑이 실종된 상태에서 형해화된 껍데기 남녀 사이란 인간과 동물의 관계보다 더 무가치한 것이라고 믿었다.

 

정혜는 남편의 존재를 포메라니안 한 쌍으로 대체했다. 강아지는 정말 예뻤다. 포메라니안은 북방 스피츠 계열인 사모예드에서 출발하여 독일의 포메라니아 지방에서 현재와 같은 작은 체구로 소형화되었다. 강아지의 털은 매우 가늘고 아주 부드러웠다. 정혜는 남편을 생각하면 징그러울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그때는 포메의 털을 어루만지며 강아지를 껴안고 남편에 대한 소름을 떨쳐버렸다.

 

강 교수는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인생의 목표가 오직 돈과 출세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거기에 여자도 추가되었다. ‘돈과 출세, 여자’ 이 세 가지를 누릴 수 있는 데까지 누려야겠다는 야망을 가졌다. 그러면 인생에서 성공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강 교수는 열악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전임강사에서 교수가 된 다음부터는 강의를 열심히 하거나 연구를 한다기 보다는 일반 기업체의 자문역할이나, 사회적 활동을 많이 했다.

 

방송에서 적극적으로 얼굴을 많이 알렸다. 그런 까닭에 오직 교수로서 외길을 걷는 다른 교수들에 비해서 유명해졌고, 능력이 있는 것처럼 과대포장되었으며, 경제적 수입도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여자들이 많이 따르게 되었고,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괜찮은 여자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어느 날, 강 교수는 혼자 생맥주집에서 치킨을 시켜놓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TV를 보고 있었다. 강 교수가 오래 전부터 좋아하는 연예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연예인은 경찰서 앞에서 기자들에 둘러쌓여 있었다. ‘아니 왜 저러고 있을까?’ 강 교수는 깜짝 놀랐다. 그 연예인은 성폭행혐의를 받고 경찰조사를 받고 나오는 것이었다. 경찰에서 12시간 동안이나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얼마 전에 법무부에서 피의자를 포토라인에 세우지 않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는데, 어떻게 그 연예인은 기자들에게 공개되어 사진을 찍히고 인터뷰를 당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명을 들어보니 취재진이 몰려들어 경찰서 앞에서 며칠 전부터 진을 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찰에 출석하거나 조사받고 나오는 모습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당하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강 교수는 그런 거라면, 앞으로는 경찰서 옥상에 헬리콥터로 출석을 하든가, 아니면 경찰서 구내 밑으로 땅굴을 파서 지하도로 연결해서 출석하도록 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검찰청에 출석할 때는 승용차로 검찰청 지하주차장으로 바로 들어갔다가 나오면 기자들을 피할 수 있다고 하는데, 경찰서에는 그런 식으로 기자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보도 내용을 보니, 경찰에서는 차량 압수수색을 통해 내비게이션 GPS 기록을 확보하고 4년이 지난 시점의 가수 행적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GPS 포렌식 분석을 통해 사건 현장에 당사자가 있었는지 여부를 확인하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피해자는 유흥업소에서 연예인으로부터 4년 전 성폭행을 당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저런 수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강 교수는 궁금했다. 자세한 내용을 보도가 되고 있지 않았지만, 4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지금 와서 고소를 하는 이유도 궁금하고, 4년 전 증거자료로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찾아낸다는 것인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동차를 타고 다녔으면 몇 년전 기록도 다 나오는 모양이고, 업소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했으면 그 기록도 모두 보존되는 모양이었다. 강 교수는 그 보도를 보면서 세상이 얼마나 무섭게 달라졌는지를 실감했다. 그러면서 남자는 정말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는 여자와 성관계를 할 때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여자에 대한 배려를 충분히 해야 한다. 여자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남자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 성관계를 시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건 여자를 완전히 무시하는 동물적인 행동이다. 당하는 여자는 절대로 가만 있지 않는다. 그리고 증거란 여자의 진술만으로 충분히 인정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범죄혐의를 받는 남자가 자신의 무혐의를 증명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뛰어서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교훈을 얻었다.

 

강 교수는 앞으로 여자와 성관계를 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자마자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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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41)

경희는 카페에 앉아 있었다. 머리는 아프고,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여자 같았다. 경희는 남편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보았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는다. 수십번이나 되풀이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연결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전화를 상대가 고의적으로 받지 않을 때 심정은 어떠할까? 조급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답답해 미치게 된다. 속이 상하고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는다.

지금까지 살면서 경희는 드물게 남편과 싸우게 되면 남편의 전화를 집에서 받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반대의 입장이 되어서 그런지 상대방의 심정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을 때 얼마나 약이 오르고, 화가 나고, 절망에 빠지는지를 미처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경희가 막상 당하고 보니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완전히 상대를 무시하고, 인격을 짓밟는 것이었다.

약간 다른 문제지만, 사기꾼들이 사기를 치고 입장이 곤란하면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일주일 후에 틀림없이 꾼 돈 3천만 원을 갚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막상 일주일이 지난 다음 전화를 하면 연락이 되지 않는다. 전원이 꺼져 있다.

이럴 때 피해자는 미친다. 수십번, 수백번 전화를 한다. 밤늦게 아침 일찍 전화를 한다. 그래도 사기꾼의 전화는 전원이 꺼져있다. 이때 피해자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그러다가 나중에 사기꾼의 전원이 켜있어 음성메시지를 수없이 남기면 그때서야 전화를 걸어와 또 거짓말을 한다. 돈을 구하러 다니느라고 전화를 못받았다고 미안하다고 한다.

그것은 또 다른 거짓말이다. 그러면서 며칠 후에 틀림없이 돈을 준다고 거짓말을 하고 똑 같은 악행을 되풀이한다. 이런 것이 사기꾼들의 전형적인 수법이고, 피해자는 그 때문에 돈을 잃고 정신까지 우울증에 걸리고 홧병에 걸리는 것이다. 하지만 가해를 하는 사기꾼은 피해자가 그토록 고통을 받는지 알 이유도 없고, 알 지도 못한다. 그게 사기꾼과 피해자의 역학관계다.

경희는 남편에게 전화하는 것을 포기했다. 어차피 받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 지금 남편은 어떤 심정일까?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린 아이는 지금 어떻게 있을까? 너무 많은 것이 궁금했다.

한편 경희의 남편, 철수는 어떤 상황에 있을까? 관계가 악화된 부부는 언제나 동일한 대칭점에 있다. 누가 잘못을 했던, 한 사람이 괴로우면 다른 한 사람도 똑 같이 괴롭게 된다. 그것이 부부다. 완전히 헤어지지 전까지는 부부는 똑 같은 상처를 받고, 똑 같은 고통을 받는다.

물론 철수는 경희와 결혼하면서, 경희가 분명히 과거 전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존심이 상해할까봐 직접적으로 물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철수는 더욱이 의사였기 때문에 경희와 데이트 하면서 경희의 언행으로부터 느낌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철수는 그런 문제에 대해 보편적인 남성 이상으로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결혼하기 이전에 있었던 사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경희가 결혼할 때의 나이가 벌써 31살이었다. 그때까지 여자가 남자와 연애도 안 하고, 성관계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도 예외인 듯 싶었다.

성에 관해서는 오늘 날 많이 개방되었을 뿐 아니라, 아주 정도가 심하지만 않으면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이 오히려 시대착오적이고, 이상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어떤 남자가 결혼한 다음 여자의 처녀성을 문제 삼으면, 그는 아무에게도 동정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도덕적으로 비난 받는다. 법원에 가도 혼전 성관계는 이혼사유도 되지 않는다. 


작은 운명 (40)

현재의 상황에서 경희는 바람 피다가 모텔에서 남편에게 들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친정에 알릴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알린다고 한들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다. 그리고 만일 이런 상황을 친정에 알리면, 아마 부모님들은 기절해서 쓰러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아이까지 있는 유부녀가 무엇 때문에 다른 남자, 그것도 가정이 있는 유부남을 만나서 연애를 하고, 대낮에 모텔에 가서 그 짓을 했다는 사실을 알면, 나이 든 부모로서는 도저히 경희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무리 딸이라고 하지만, 그만큼 공부시켜서 시집을 보냈으면, 그만이지 평생 부모가 딸을 책임져야 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리라. 그것도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고, 사기를 당한 것도 아닌 데, 무엇 때문에 버젓이 가정 있는 여자가 외간 남자와 모텔을 다니느냐고 한심하다고 생각할 것이리라.

경희는 가까운 친구들이 여러 명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런 경우 누구에게 연락을 할까? 하지만 친구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가깝게 지내는 친구라 해도, 경희의 입장에서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친구의 불행을 겉으로는 안됐다고 걱정해 주면서도 속으로는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남이 잘 되면 공연히 기분이 좋지 않다. 친구가 남편이 돈을 잘 벌고 가정에 충실하고, 자식들이 공부를 잘 한다고 자랑하면 속으로는 은근히 기분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성인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가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사업도 잘 안 되고, 자녀들도 공부도 안 하고, 못된 짓이나 하고 다닌다고 하면 속으로는 고소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런 말을 하는 친구를 속으로 무시하고 우습게 본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많다. 하지만 누가 그런지 알 수 없으니 함부로 자신의 약점이나 단점,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경희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친구들 세계에서는 집안도 괜찮고, 미모도 갖추었고, 남편도 의사를 만나 아이 낳고 아무 걱정 없는 것처럼 보였다. 돈도 쓸만큼 쓰고 골프도 치러 다녔으니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경희가 갑자기 불륜으로 남편에게 적발되고 앞으로 이혼을 당할지 어떨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하면 속으로는 ‘그렇게 잘난 체 하더니 잘 됐다’라고 생각할 사람도 많을 것처럼 생각이 들었다.

사회 전반이 극도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 물질만능주의가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물질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겉으로 보이는 피상적인 것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대접하거나 무시한다. 또한 남이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세태다. 그래서 잘 살던 사람이 망하고, 공무원이 감방에 가고, 남들이 병에 걸려 죽어도 자기 일이 아니면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잘난 척 하던 사람이 패가망신하면 신바람이 나는 세상이다. 

113. 결혼 전 옛 애인을 다시 만나 흔들리는 여자

 

며칠 후 정혜는 그 남자를 만났다. 그러니까 벌써 헤어진 지 2년 10개월이 지난 때였다.

“자기가 무척 행복해보여서 좋았어. 남편이 잘 생겼고, 자기에게 잘 해주는 것 같아. 자기와 헤어지고 많이 방황했었어. 그러다가 지금 그 여자를 만났어. 이제 모두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잊어버리고 열심히 살고 있어. 아무튼 우연이지만 지난 번 만나서 반가웠고, 앞으로 잘 살기를 바래.”

“오빠를 다시 만나니까 내 마음이 흔들려서 힘들어. 모든 건 내가 잘못한 거니까 용서해줘요. 그리고 그 여자에게 잘 해줘요.”

 

정혜는 눈물을 흘렸다. 지난 시간들이 갑자기 아픈 추억이 되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정혜는 술에 취하고 싶었다. 술을 많이 마시고, 남자의 품에 안겼다. 남자는 피임도 하지 않고 관계를 했다. 울면서 사랑한다고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다.

 

정혜는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최국성이 첫 남자는 아니었다. 정혜는 대학고 1학년 말에 첫경험을 했다. 그 후 몇 사람과 연애를 했다. 그런데 만났던 남자들이 나이도 어렸고 사랑에 대해 진지하지 못했다. 그냥 가볍게 데이트를 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가끔 성관계를 가졌지만, 정혜에 대해 목숨을 거는 남자는 없었다. 그 때문에 정혜 역시 깊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최국성은 그렇지 않았다. 매우 순수했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음악을 하는 남자였다. 그래서 사랑도 음악적으로 리드미칼하게 했다. 음악에는 장조와 단조가 있다. 음악에서는 어떤 한 음이 으뜸음으로서 우위를 차지하고, 다른 음은 으뜸음과의 종속적인 질서 관계에 놓이게 된다.

 

딸림음과 버금딸림음이 으뜸음의 안정성을 강화하는 기능을 다하여 조(調)가 확립된다. 조성음악에 있어 근간적인 음을 정리 ·배열하면 장음계와 단음계가 얻어진다. 장음계에 바탕을 둔 장조의 악곡은 밝은 느낌을 주고, 단음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단조의 음악은 어둡고 슬픈 느낌을 준다.

 

국성은 정혜와의 관계에서도 장조와 단조의 음계를 적절히 적용했다. 어느 날은 무척이나 밝고 음성도 높았다. 어느 날은 비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분위기를 만나는 시간부터 헤어지는 시간까지 유지했다. 잠자리에서도 국성의 율동과 변화는 장조와 단조를 반복했다.

 

정혜는 이런 국성의 분위기와 감성에 이끌려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 국성에게 이지적이거나 이성적인 면은 거의 없었다. 그는 매우 감성적이었고, 형이하학적이었다. 때로는 동물적이었고, 반이성이 피에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국성은 동성애자는 아니었지만, 늘 마음 한편으로는 동성애를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때문에 정혜도 국성과 몸을 섞을 때에는 가끔 동성애를 꿈꾸기도 했다.

 

1년 정도 정혜가 국성에 빠져있을 때, 정혜집에서는 몇 군데 중매로 선을 보게 했다. 정혜집안이 돈이 많았기 때문에 남자들은 많았다. 의사도 있었고, 변호사도 있었다. 부잣집 아들이나 운동선수도 있었다. 정혜는 국성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들이 선을 보라고 해도 강하게 반대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도 했다.

 

부모는 일단 선이나 보고 천천히 결정하면 된다고 했다. 정혜는 하는 수 없이 몇 사람을 만나보았다. 하지만 정혜의 몸과 마음은 이미 국성에게 가 있었기 때문에 어떤 남자를 만나도 마음에 들지 않고, 그 남자의 단점과 약점만 눈에 들어왔다.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하면 눈빛이 매서워보였고, 꼭 뱀눈 같이 보였다. 지식이나 이성으로 정혜를 제압해서 정혜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많이 배운 사람은 꼭 인공지능에 장난감옷을 입혀놓은 괴물처럼 보였다. 그런 남자들은 섹스로 전자계산기를 켜놓고 그에 따라 효율적으로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하려고 할 것 같아서 징그러웠다.

 

돈이 많다는 집안의 남자들은 돈이나 흥청망청 쓰다가 부모 기업체는 10년이 못가서 부도나고 바람이나 펴서 혼외자를 최소한 다섯명은 둘 것 같아서 싫었다. 판사나 검사는 정혜가 나중에 남편이 싫증이 나서 바람이라도 피면 즉시 법적으로 강력한 조치를 할 사람 같아서 무서웠다.

 

의사는 매일 피를 보고 병원균이 득실득실한 곳에서 환자들과 생활해야 하니 위생적으로 불결해보였다. 스포츠맨은 무쇠처럼 강한 근육은 섹스에 도움이 될 것 같았지만, 잘못하면 정혜를 한순간에 날려버릴 것 같았다. 부부싸움 하다가 말대꾸라도 하면 당장 주먹이 머리통을 내리칠 것 같았다. 스포츠맨과 결혼하려면 아무래도 태권도나 복싱 같은 운동을 본격적으로 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어서 곤란했다.

 

장차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남자는 정치판에 들어가면 곧 위선자나 거짓말쟁이, 이기주의자가 될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갖춘 인격자이며 능력자인 남자들은 있기는 있지만, 대개 나이가 70살은 넘었다.

 

그때까지 독신으로 계신 분들은 대개 신부님이나 스님, 아니면 독신주의로 평생을 지내다가 말년에 회심해서 결혼하려고 하는 분들이었다. 그래서 정혜의 대상은 아니었다.

 



작은 운명 (102)

맹 교수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이 어려워서 대학은 가지 못했지만, 혼자 꾸준히 책을 보고 연구를 해서 문학이나 예술에 관해 대화를 나누어보면, 미국 유학을 5년간 엉터리로 다녀온 사람보다 훨씬 수준이 높았고 교양이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 영어나 수학을 못하는 사람이 미국이나 유럽에 유학을 가서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외국에 유학가서 외국 사람들은 잘 안 만나고, 주로 코리아타운에서 한국 교포들과 한국말로 식사나 하고, 쇼핑이나 해서 외국에서 살면서도 영어보다는 한국말을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잘하는 경우가 있다.

요새는 외국에서도 한국 방송을 볼 수 있어, 주로 한국에서 만든 드라마나 한국 아이돌의 노래와 춤을 주로 본다.

뉴스도 외국 현지 뉴스는 못알아들으니까 안 보고, 한국의 뉴스만 봐서 한국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자세하고 심층적으로 한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정치 경제 군사 외교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해서 맹 교수 어머니는 비록 외국에 유학은 가지 못했지만, 국내 순수한 독학파로서 교양도 높았고,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영어는 잘 못했지만, 간단한 일상의 용어는 중국어, 일본어, 베트남어 등을 익혀서 혼자 아시아에서 여행도 다닐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혼자 배낭여행을 절대로 가지 않았고, 언제나 단체관광코스를 택했다. 그것은 자신의 미모 때문에 혹시 외국 여행을 가서 성범죄자들이 한국에서 온 미스코리아로 잘못 보고 납치를 해서 결혼식을 올리거나 아니면 강제로 끌고가서 강간하고 바다에 던져질 위험성을 크게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맹교수 어머니가 커피숍을 경영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그녀를 좋아하는 대학 교수가 적지 않았다. 이들은 강의가 끝나면 커피숍에 와서 서너시간씩 혼자 않자 책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실상은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커피숍 주인인 맹 교수 어머니를 지켜보거나 감상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다른 남자와 친하게 지내는지 감시하고 있었다. 이런 교수들은 공연히 헛물을 켜고 있는 것이었다.

맹 교수 어머니 입장에서는 손님으로 와서 차를 마셨으면 빨리 나가줘야 다른 손님들이 와서 매출이 느는데, 나이 든 교수들이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오래 앉아 있으면 매출이 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커피숍 분위기가 늙고 혼탁해져서 젊은 대학생들이 들어왔다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바로 나가기 때문이었다.

어떤 대학생들은 커피숍 분위기 때문에 중증 고혈압 환자처럼 현기증을 느끼고, 계단을 시속 100미터로 거북이처럼 기어나가기도 했다.

여학생회에서는 대학교 앞에서 커피숍을 하려면 분위기를 젊고 세련되게 하고 영업을 해야지, 왜 늙고 병든 닭장처럼 분위기를 만들고 있으면 학교의 명예에 손상이 간다는 이유로 맹 교수 어머니 커피숍을 폐쇄시켜 달라는 청원서를 만들어 학생들이 500명 서명을 받아 대학교 총장에게 보내기도 했다.

학교 총장은 이런 청원서를 보고 직접 맹 교수 어머니 커피숍을 둘러보았으나, 맹 교수 어머니가 너무 지적인 외모에 차분한 말씨, 소프라노 같은 음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학생들이 너무 과격해서 잘못 청원을 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청원서를 곧 바로 찢어버렸다.

112. 남편과 같이 있는 레스토랑에서 옛 애인과 부딪힌 유부녀

 

강 교수와 정혜는 결혼 1주년 기념행사를 거창하게 하기 위하여 미리 준비한 대로 결혼식 전날인 12월 11일 전야제를 하기로 했다. 일부러 북한강변에 자리 잡은 고급 호텔을 잡았다. 부근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와인과 함께 먹었다. 그런데 마침 그 레스토랑에 정혜와 1년간 연애를 했던 남자가 여자 친구와 같이 들어왔다.

 

정혜가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그 옛 애인 일행이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았다. 정혜가 다시 테이블로 돌아오자 그 옛 애인이 갑자기 일어나 반갑게 인사를 했다. 정혜는 깜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그냥 담담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정혜는 숨이 막혔다. 서로 좋아했는데, 정혜의 부모가 반대를 해서 하는 수 없이 헤어졌던 남자다. 그 남자는 음악을 했다. 그런데 음악에서 성공을 하지 못해 건달처럼 지내고 있었다. 직장도 없고 돈을 벌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정혜의 부모가 죽기살기로 반대해서 헤어졌다.

 

그 후 중매를 해서 지금의 강 교수와 결혼을 했다. 그 남자는 헤어질 때, 자신은 정혜 아니면 죽을 때까지 절대로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 나타난 그 남자는 아주 멋있는 지적인 여자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정혜는 일부러 남편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명랑하게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 와인을 많이 마셨다. 그러다가 술에 취했다. 화장실에 가서 토를 하려고 했다. 정혜가 화장실에 가서 오랫동안 있자, 그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강 교수는 술에 취해 자리에서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그 남자는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 정혜의 등을 두드려주고 정혜를 껴안았다. 정혜는 가만히 서있었다. 눈물을 흘렸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정혜와 강 교수는 호텔로 갔다. 어두워진 강에는 검푸른 강물이 가득 차 있었다. 겨울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데도 강물은 꼼짝하지 않고 정지해 있었다. 물속에는 사랑의 아픔이 가득 차 있었다. 강물은 너무 아팠다. 무엇 때문에 아픈지는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세상의 모든 행복이 사라져버렸다.

 

정혜는 지금 이 시간이 고통이었다. 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의 남편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가슴 속에는 오직 그 남자의 체온만이 느껴졌다. 그 사람의 숨결만이 곁에 있었다. 갑자기 남편인 강 교수가 낯설었다.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지금 이 작은 공간에 옆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혜는 눈물을 흘리면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 교수는 술에 취해 곧 침대에 누워 골아떨어졌다. 검푸른 강물 위로 그 남자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멀리 바다로 가는 것 같았다. 그 남자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정혜가 있는 지금 이 방에도 여러 차례 그 남자와 같이 들어와 몸을 섞은 추억이 서려있었다. 운명! 피할 수 없는 운명! 바로 그것이었다. 정혜가 벗어나고자 했던 그 운명의 사슬은 여전히 정혜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사슬의 매듭은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문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남자이었다. 하지만 정혜는 그 문자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조용히 전원을 껐다. 그리고 샤워도 하지 않은 채 강 교수 곁으로 갔다. 한참 동안 소리를 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다가 잠이 들었다.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날이 밝았다. 드디어 두 사람에게 매우 감격스러운 결혼 1주년이 되는 기념일이다. 원래 두 사람의 계획은 결혼식을 올렸던 호텔의 식장을 둘러보고 같이 뮤지컬을 관람하고 술을 마시기로 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모텔에서 나와 같이 차를 타고 오면서 말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어제 그 남자 누구야? 어떤 관계지?”

“응. 그냥 아는 사람이예요. 아무 관계도 없어요?”

“아냐. 내가 볼 때는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아. 아무래도 수상해. 옛 애인 맞지?”

“아니라니까 그래요.”

“솔직히 말해도 좋아. 내가 당신 과거를 가지고 따지는 건 아니니까.”

“그냥 친구들과 어울려 몇 번 같이 만난 적이 있을 뿐이예요. 신경 쓰지 말아요.”

“어제 당신 눈빛과 그 남자 눈빛을 유심히 봤어. 서로 결혼하지 못해 불행해진 것처럼 보였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그 남자 만나도록 해. 나도 옛날 만나던 여자 만날 테니까.”

 

순간적으로 정혜는 머리가 돌았다. 아무 증거도 없이 생사람을 잡고, 그 핑계로 다른 여자를 만나겠다고 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정혜는 그때부터 묵비권행사로 들어갔다. 강 교수가 어떤 말을 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당신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건 분명히 그 남자가 옛애인이고, 지금도 서로 사랑하고 있고, 우리 결혼을 후회하는 것이 확실해.”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다음 스케줄은 모두 없던 것으로 자동취소되었다. 그리고 강 교수는 그 날 저녁 자신의 부모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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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남편 제삿날에 재혼하는 여자는 없다

그런데 결혼식 날짜가 새로운 이슈로 떠올랐다. 누군가 옆에서 왜 하필이면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12월 12일 결혼을 하느냐는 어려운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불상사가 발생했던 역사적인 날에는 결혼식을 올리면 그 결혼이 불행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예를 들어 현충일인 6월 6일 모두 조기를 걸고 묵념을 하는 날에 그 시간에 맞춰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였다. 또한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에는 제사를 지내야지, 하필 제삿날에 결혼식을 예약하면 남들이 욕을 할 것이다.

여자가 남편 죽은 다음, 재혼을 하더라도 적어도 남편 죽은 날을 전후해서 한 달씩은 간격을 두고 결혼식을 해야지, 남편이 불행하게 일찍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에 가 계신데, 꼭 남편 돌아가신 날을 맞추어 결혼식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었다.

결혼식장에서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미소지으며, 웨딩 마치를 하다가 갑자기 결혼식장 천정에서 커다란 조명등이 떨어져 신부의 정수리를 내리쳐서 예식장에서 곧바로 병원 응급실로 가게 되고, 신혼여행은 발리섬으로 가지 못하고, 화장터로 가서 다른 영혼들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오페라의 유령>에서도 오페라극장의 천정에서 대형 장식조명등이 떨어지는 장면처럼, 사람들은 혼비백산할 것이었다.

그런 이상한 날에 결혼하는 것은 사랑하는 남녀가 비운에 죽었을 때 두 사람의 영혼을 결합시켜주는 영혼결혼식을 하면 모를까 살아있는 사람들의 결혼식 날짜는 잘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감방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과 하는 결혼은 아무렇게나 잡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결혼식을 1월 1일 11시에 한다든가, 12월 31일 밤 12시에 보신각 타종시간에 맞춰 하는 것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6.25 전쟁이 나던 날도, 하필이면 그날 결혼식을 올리기로 준비를 했던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는 역사적 교훈도 있으니 참고로 하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강 교수 부모는 결혼식을 하지 않았으면 않지, 그렇게 재수 없는 날은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미 정혜 아버지가 예식장을 12월 12월 12시로 잡아놓았기 때문에 골치 아픈 상황이 되었다. 만일 취소하게 되면 위약금을 크게 물어야 할 입장이었다.

정혜 아버지는 위약금을 손해보는 것도 아까웠지만, 자신은 그런 미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강 교수 부모들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혜 아버지는 군대생활을 보병 1사단에서 했다. 그때 사병으로 근무하면서 사단장은 하늘 같은 사람이었다. 군대에 들어가서 생활할 때,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을 보는 기회밖에 없었다. 대령 계급장을 단 연대장도 직접 본 적은 한번밖에 없었다.

대부분 전방 초소에 들어가서 근무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사단장 표창장을 받았다. 그 사단장 표창장을 항상 사무실에 올려놓고 사람들이 사무실로 오면 그 표창장을 자랑삼아 보여주곤했다.

그런데 그때 그 사단장이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고, 12.12 사건의 주역이었다. 정혜 아버지는 그래서 무조건 12.12 사건은 정당했다고 확신을 하고 있었고, 사나이다운 일이었다고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그런 12.12 사건을 우습게 알고 결혼식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논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정혜 아버지 생각은 이랬다. 만일 북한이 6.25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공격을 해오는데, 그날이 구정이면 남한에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가 그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전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인간이 중요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 날짜가 맞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힘을 주어 말했다. 정혜 아버지는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데, 갑자기 거실에서 일어나서 정혜 어머니와 정혜를 모두 일어나라고 하고 부동의 자세를 취하도록 했다.

마침 그집에 놀러온 정혜 어머니 여동생 부부와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까지 모두 불러서 집합을 시킨 다음, 군인 장군이 손에 쥐는 지휘봉 비슷한 막대기 대신 골프채 퍼터를 손에 쥐고 마치 자신이 12.12 사건 때 작전을 지휘하는 사람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우리는 어떠한 난관이 있더라도 12월 12일 12시에 이번 결혼식을 거행해야 합니다. 그 어떤 악의 세력도 우리의 결혼식에 장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상!” 자세한 영문을 모르는 정혜 어머니 여동생 부부와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는 깜짝 놀았다. 12월 12일 12시에 무슨 핵전쟁이 나는 걸로 알았다.

가사도우미가 작은 목소리로 “그래도 12. 12는 나쁜 날 아닝가예?”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랬더니 귀가 무척이나 좋은 정혜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다.

“군인들 반란은 한국에서 있었던 작은 사건 아니냐? 그 보다 훨씬 더 큰 5월 16일이나 4월 19일, 3월 1일에는 그러면 결혼식장 모두 문을 닫아야 하느냐? 지금처럼 달나라 가는 국제화시대, 우주시대에 한국처럼 조그만 나라에서 있었던 먼지 같은 사건과 우주보다 더 소중한 우리 딸 결혼식과 연관을 짓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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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36)

부부싸움을 하다 보면 가끔 남편이나 부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열쇠는 가지고 있지만, 안에서 빗장을 걸어놓으면 밖에서는 열 수가 없다. 아무리 벨을 눌러도 안에 있으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정상적이면 밖에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반갑게 반겨주어야 할 부부사이에 이런 상황이 왔을 때 어떤 심정을 느끼게 되는지 아는가?

남의 집을 방문했다가 주인이 없어 못 들어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자신의 집이고, 자신이 둥지를 틀고 사는 보금자리다. 그곳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가장 가까운 배우자에 의해 거부당한다는 의식을 느껴 보라. 얼마나 외롭고 세상이 황량하게 느껴지는지? 그때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 반대 당사자의 마음도 똑 같다. 아니 더할 수 있다.

그래서 가급적 부부싸움은 하지 말아야 한다. 싸우더라도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몰고가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싸우는 과정에서 서로가 받는 상처가 너무 깊고 크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경희는 자신이 현재의 상태처럼 이렇게 비참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사랑이고 무엇이고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사랑보다는 삶이 중요하다. 생존이 우선이다. 사랑은 사치고 부수물이다.’ ‘내가 어리석어서 소중한 가정을 잠시 잊어버리고 낯선 사랑에 빠졌다. 그 허망한 사랑에...’
현실은 언제나 냉정하다. 겨울 바다가 언제나 추워서 물속에 들어가면 그냥 익사하는 것처럼 현실은 냉냉한 기운이 상존한다. 그런 차가움 속에서 사랑의 온기를 느끼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런 사랑은 현실이라는 냉탕 속으로 던져지는 순간 질식한다.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파괴된다. 모든 사랑의 요소는 형해화되며 분해되어 흩어진다.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쓰레기를 소각하는 매퀘한 악취만 남는다.

지금 경희는 사랑 때문에 추락했다. 무서운 늪에 빠졌다. 이런 극한상황에 처한 연약한 실존에 다가가 손을 잡아줄 사람은 지구상에 아무도 없었다. 친구도, 친척도, 가족도 있을 수 없다.

오직 혼자다. 경희만이 겪어야 하고, 넘어야 할 벽이었다. 그 벽은 생각보다 높고 단단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흰색이었다. 마치 중범죄인을 취조하는 하얀 페인트만을 칠한 조사실처럼 눈이 부셨다.

그것은 희망의 빛이 아니었다. 가능성의 색깔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파멸이고, 죽음이며, 불가능의 상징이었다.

이 외로움, 불안감, 어두움을 누구에게 의지해 풀어나갈 지 앞이 캄캄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희가 만나서 상의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희는 밤거리에서 혼자 절규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 비참하게 된 것일까? 모든 것은 환경 탓이다.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다. 모든 것은 남편 탓이었다.

남편이 무시하고 삭막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은 그곳에서 살아 남기 위해 탈출했던 죄밖에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일이 잘못되면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환경에서 찾는다.

바람을 핀 남자와 여자는 일단은 자신이 바람핀 원인과 이유를 배우자에게서 찾는다. ‘너 때문에’ 나는 완전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고, ‘이탈했다’. 그러니까 ‘나도 잘못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 너도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항변한다.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착각하고 억울해 한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배우자도 절반의 책임이 있다고 확신한다.

남편도 바람을 핀 적이 있다. 그럴 때 경희는 남편을 눈감아 주었다. 가정을 깨고 싶지 않았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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