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14)

정 사장은 간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정신 없이 잠을 잤다. 오늘은 출장 마지막 날이라 특별한 스케줄이 없었다. 그래서 시내 백화점에 가서 쇼핑이나 하고 서울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아침 8시경 정 사장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술기운이 남아 있어서 속이 아팠다. 그래도 일어나서 샤워를 했다. 호텔 방은 가관이었다. 탁자에는 와인병이 널리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먹다 만 안주가 쾌쾌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정 사장은 분명 은영이 방에 들어와 같이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러나 더 이상 자세한 일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 사장은 걱정이 됐다. 혹시 자신이 은영에게 실수라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으나, 별로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일어날 때 보니, 옷도 다 벗고 완전 나체로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은영이 방에 있을 때 내가 발가벗고 추태를 부린 것은 아니었을까 걱정도 되었다.

샤워를 마친 다음 정 사장은 호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려고 옷을 입었다. 그리고 시계를 차려고 보니 시계가 없었다. 아차 싶었다. 그 비싸고 귀중한 시계를 어디에서 잃어버린 것일까?

분명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 방으로 돌아올 때에도 자신은 롤렉스 시계를 차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떻게 시계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정 사장의 방에는 은영이 혼자 들어와서 같이 술을 마신 일밖에 없다.

하기야 나이를 먹었고, 특히 어제 저녁 식사 때부터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치매 비슷한 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밖에서 시게를 풀어놓고 호텔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 아무리 방안, 여기 저기를 찾아보았다. 테이블 위, 화장대 위, TV 옆, 방바닥 등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시계는 보이지 않았다. 정 사장은 경황이 없는 상태에서 같이 출장 온 김 이사를 불렀다.

“김 이사. 이상하다. 내 시계가 없어졌어.”
“어디에서 없어졌을까요? 어제 식당에서 식사를 하시고, 2차로 술집에는 가지 않고, 바로 룸으로 들어오셨잖아요? 그 다음 외출하셨었나요?”

“아냐. 저녁 먹고 곧 바로 들어와서 샤워를 하고 술을 마시고 잠을 잔 거야. 이상하다. 분명 내가 시계를 차고 들어온 것 같은데... 밖에서 시계를 풀어놓을 일이 없었잖아?”

“사장님 방에 호텔 직원이 들어왔었나요? 혹시?”
“아니 아무도 안 들어왔었어. 다시 한번 잘 찾아봐.”
“에. 그런데 이 좁은 방에 어디 있을 곳이 없습니다. 제가 프로트에 가서 알아볼 게요.”

김 이사는 방을 뒤지면서 쇼파 자리에 여자 스카프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분명 일본에 출장와서 은영이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였다. 그것을 경황이 없던 정 사장도 미처 치우지 못한 채, 김 이사를 시계 때문에 방으로 불러서 시계를 찾아보도록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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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3)

은영은 정 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갑자기 남녀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 사장이 은영의 남자 친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정 사장 눈에 나서, 비서로서 근무하는 것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여자 편력이 많고, 은영 자신도 무슨 사무능력이나 비서경험이 있어서 비서로 근무를 시킨 것도 아니고, 자신이 다른 여자들보다 인물이 좀 낫고, 몸매가 낫기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만일 은영이 혼자 조용히 있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 친구가 있고, 그것도 싱글이 아닌 유부남과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완전히 확인되면, 정 사장 성격에 그대로 둘 것 같지 않다는 위기의식도 느껴졌다.

그래서 은영은 더욱 더 그 자리를 박차고 있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순현과의 관계도 별로 좋지 않게 된 점도 작용해서 은영은 술에 취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 사장이 권하면 사양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마셨다.

정 사장도 많이 취하고, 은영도 많이 취한 상태가 되었다. 점점 시간이 흐르자, 은영의 눈에 정 사장이 나이 먹고 늙은 사람이 아니라, 별로 나이 차가 없는 건강한 남자, 멋이 있고, 능력이 있는 남자로 보였다. 성격도 남자 답고 좋아보였다.

정 사장은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팔다리의 근육도 단단해보였다. 그리고 돈이 많아 모든 것이 명품이었고, 옷도 아주 비싼 것만 사입고 다녔다. 심지어 넥타이 하나도 몇십만원씩 하는 외제 명품을 차고 다녔다. 시계는 말할 것도 없이 로렉스 제품 몇천만원짜리였다.

특히 정 사장은 언제나 로렉스 시계를 차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시계 자랑을 하곤했다. 은영이 사장실에 차를 가지고 들어가도 정 사장은 손님들에게 로렉스 시계가 3천만원 주고 면세점에서 사온 것이고, 그것도 재일교포를 통해 사왔다고 자랑하곤 했다. 왜냐하면 내국인은 그렇게 비싼 시계를 면세점에서 사가지고 들어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밀수에 해당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은영의 눈에 정 사장은 은영의 첫사랑의 남자처럼 오버랩되기도 했다. 또는 지금 만나고 있는 순현의 이미지도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불쌍한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내가 이렇게 흐뜨러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똑바로 행동하고, 나의 몸과 정신을 지키고,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기를 바랄 것이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은영은 순간적으로 술이 깨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어나려고 했다.

“사장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술이 취해서요. 이만 제방으로 갈게요. 사장님도 이제 술 그만 드시고, 편히 쉬세요.”

은영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그러자 사장은 가지 말라고 중얼거리면서, 술에 취해 쇼파에 쓰러졌다. 은영은 그런 상황에서 그냥 나올 수가 없었다. 잠시 쇼파에 앉아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사장이 불쌍해 보였다. 나이 든 사람이 회사를 경영하느라고 얼마나 힘이 들까? 스트레스도 많을 것이다. 저렇게 술에 취해 쓰러져 자면 속도 아플 테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은영은 그대로 앉아있다가 사장을 깨워서 침대로 옮겨주려고 했다. 그러다가 은영도 잠시 쇼파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한 20분쯤 지나 은영은 화장실에 가려고 잠이 깼다. 화장실을 다녀온 은영은 사장을 흔들어 깨웠다. 자신의 힘으로는 사장을 들어서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은영이 술에 취한 사장을 은영이 깨우니, 사장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은영의 부축을 받고 침대로 이동했다. 그런데 침대에 가서는 은영을 꼭 붙잡아 당기는 것이었다. 은영은 아차 싶었다. 뿌리치려고 했지만 사장의 힘이 너무 강했다.

정 사장은 그러나 침대에 누워 은영의 손만 붙잡고 있었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은영은 정 사장이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 아래 층에 있는 은영의 방으로 들어갔다. 창밖으로 동경의 밤이 눈에 들어왔다. 호텔 주변에는 화려한 네온사인이 많이 켜져있었다.

은영은 사장 앞에서 너무 많이 술을 마신 것도 후회가 되었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볼까?’ 은영은 술에 취해 샤워도 하지 못하고, 그냥 옷만 벗고 침대에 들어가 골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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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97)

상홍은 공칠이 백상무의 뒷조사를 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공칠이 백상무의 뒷조사를 다 해놓고 상홍이나 김민첩 사장에게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고, 백상무와 은밀한 거래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상홍은 아는 여자를 통해 백보미(50세, 가명)를 소개받았다. 상홍은 보미가 마음에 들었다. 보미는 남편과 별거하면서 현재 이혼소송을 하고 있다고 했다. 상홍은 보미의 이혼소송을 도와주려고 했다.
“저는 지금 남편과 결혼한 지 10년 되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40살이었고, 남편은 45살 때 만나서 결혼을 했어요. 저는 당시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40살이 되니까 더 이상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때 누가 소개를 해주어 남편을 만나 결혼했지요.”

“그런데 왜 지금 이혼재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초혼이었어요. 서로 좋아해서 무척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7년쯤 지나서 남편이 돈을 잘 벌자, 고객이라고 하면서 혼자 사는 여자들과 자주 만나고 술도 마시러 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조용히 지켜보았더니 점점 집에 와서는 관계를 전혀 하지 않는 거예요.”

“그 전에는 관계를 자주 했나요?”
“물론이지요. 그걸 너무 좋아해서 일주일에 5번은 꼭 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전혀 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피곤하다고 하면서 나이 먹어 성욕이 완전히 떨어졌다는 거예요.”

이런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어 보미와 남편의 사이는 나빠졌고, 서로 싸우면 폭언도 나오고 손찌검도 나오기 시작했다. 보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변호사를 선임했다. 변호사는 착수금으로 5백만원을 받았다.

그리고 재산분할을 해서 보미가 받게 될 재산가액의 5%를 성공보수로 받기로 했다고 한다. 변호사는 보미의 남편에게 소장을 보냈고, 보미 남편의 예금통장을 가압류했다.

그리고 보미 남편의 소유 부동산에 대해 처분금지가처분을 했다. 남편에게 이런 사실을 전혀 말하지 않고, 보미 혼자 변호사를 선임해서 했기 때문에, 남편은 법원으로부터 이혼소송서류를 등기로 받고 순간적으로 흥분했다.

갑자기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보미에게 달려들었다. 보미는 남편으로부터 폭행을 당하자 곧 바로 112신고를 했다. 남편은 가정폭력으로 불구속입건되었다.

남편은 집에서 나가 따로 생활하고 재판이 진행되었다. 남편도 이혼소송에 같이 싸워야했기 때문에 변호사를 따로 선임했다.

상홍은 보미를 인간적으로 동정하고 도와주려고 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몸을 섞게 되었다. 상홍은 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미가 유부녀의 신분임을 감안해서 나중에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 보미로부터 소송관련서류를 복사해서 받아놓았다.

그런데 보미는 자신의 오빠인 백상무와 사이가 나빴다. 백상무가 출세를 했는데도 부인과 자식만 알았지, 부모에게 불효를 했고, 형제들을 전혀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홍이 보미를 살살 꼬시자, 보미는 자신의 오빠인 백상무의 비위사실을 아는대로 소상하게 상홍에게 알려주었다. 상홍은 보미의 협조를 얻어 백상무의 비위사실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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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96)

상홍의 지시를 받은 공칠은 백상무의 뒤를 파기 시작했다. 지역에서 재개발사업을 추진했던 사람들을 만나서 백상무의 비리를 수집했다.

백상무가 단골로 다니는 식당 주인도 만나고, 술집 마담도 만났다. 백상무가 공짜로 얻었다는 오피스텔도 알아냈다. 백상무의 젊은 애인도 누구인지 알아냈다.

공칠은 경찰도 아니고, 감사원 공무원도 아닌데, 마치 자신이 무슨 대단한 권한이 있는 것처럼 사실관계를 조사했다. 지역 신문 기자들과도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했다. 기자들도 아주 좋아했다.

뜨거운 선거판에 유력한 후보의 뒷조사를 한다고 하니, 특종 욕심에 들떠있었다. 피나는 노력을 한 끝에 공칠은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했다.

그러나 공칠은 이러한 증거를 곧바로 김민첩 사장에게 가져다주지 않고, 직속 상급자인 상홍에게도 알맹이 있는 정보는 주지 않았다. 공칠은 먼저 백상무 후보를 만났다.

“제가 이번에 이렇게 많은 증거를 수집했습니다. 북극오피스텔사업과 관련해서 국장님으로 재직할 당시 2억원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오피스텔 한 채를 후보님 친척 명의로 공짜로 받은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이 자료를 정국영 후보에게 주어야 할 상황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백 상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도 무척 괴롭습니다. 차라리 선거를 포기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최 선생! 우리 이렇게 합시다. 지금 선생이 가지고 있는 증거는 모두 말밖에 없는 겁니다. 물적 증거는 아무 것도 없어요. 하지만 지금 시점에 이런 문제가 터지면 큰일입니다. 내가 당선되면 은혜를 잊지 않고, 4년 동안 챙겨줄 테니 모든 걸 덮어주세요. 그리고 이 자료는 저를 주시면 어떨까요?”

“예. 알았습니다. 후보님. 저도 후보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시를 위해서도 후보님이 당선되었으면 합니다. 상대 정국영 후보는 워낙 지저분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공칠은 이렇게 타협을 보고, 김민첩 사장에게는 껍데기 자료만 가져다 주고, 이 정도 자료만 가지고 문제를 삼았다가는 거꾸로 백 후보 측으로부터 역공을 당할 위험이 있다고 강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김민첩 사장은 크게 실망했지만, 하는 수 없다고 단념했다.

지역에서는 정 후보와 백 후보 두 사람 모두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루머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지만, 이상하게 이번 선거에서만은 me too 운동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지 않아서인지 두 사람의 여자 문제는 크게 이슈가 되지 않았다.

보통은 후보로 나온 사람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가진 여자들이 들고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두 사람 모두 여자를 잘 다루었거나 관리를 잘 했거나, 적어도 이용해 먹고 나 몰라라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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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95)

상홍 아버지는 필사적인 노력을 한 결과 집사에서 장로까지 올라갔다. 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상홍 아버지는 매일 성경을 읽었다. 심지어는 방언을 하는 수준에까지 올라갔다. 상홍 아버지는 독실한 크리스찬이 되면서 아주 모범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다.

교회에도 가족 모두를 데리고 갔다. 상홍도 하는 수 없이 아버지를 따라 교회를 나갔다. 아버지는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대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콤플렉스도 심했는데, 교회를 다니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달라졌다.

상홍 아버지는 매주 월요일 저녁시간에는 가족회의를 했다. 아버지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앞으로 가족이 일주일동안 해야 할 일을 각자 발표하도록 했다. 그리고 매달 초에는 월례회의를 했다.

한달 동안 가족 구성원이 각자 할 일, 목표 등을 발표하도록 했다. 상홍과 상홍의 누나는 처음에는 이러한 가족회의에 대해 거부반응이 컸지만, 아버지가 계속해서 강행을 하니 하는 수 없이 따라가게 되었고, 나중에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순응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매년 1월 1일이 되면 아침 10시에 가족들 전체를 모아놓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신년사를 발표했다.

신년사를 하기 전에 거실에서 모여 모두 일어서서 애국가 1절을 같이 부르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까지 했다.

언젠가부터는 아버지는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세워놓는 태극기도 신년행사를 할 때 준비했다.

신년사는 아버지가 며칠 동안 공을 들여 만들었다. 아버지는 대통령이 광복절 기념식 때 기념사를 읽듯이 서면으로 작성한 신년사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작년 한 해 동안 고생 많이 했습니다. 2020년 경자년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가족은 웅대한 꿈을 가지고 보다 나은 가정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로 시작해서 약 5분간 이어졌다.

아버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상홍의 누나에게는 결혼전 순결을 지킬 것을 강조했고, 상홍에게는 술과 담배, 마약을 해서는 안 된다고 수없이 강조했다. 그리고 상홍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잠자리도 중단했다.

이런 모범적인 생활을 하던 중에 어느 날 상홍이 술과 담배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뇌출혈을 일으켜 쓰러졌다.

다행이 응급실로 빨리 가서 일주일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은 했지만, 반신불수가 되었다. 상홍은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쓰러진 것에 대해 한없는 죄책감을 가졌다.

그리고 아버지가 일을 못하게 되어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되었다. 상홍의 누나도 당시 남자친구의 꼬임에 빠져 순결을 잃었지만, 아버지가 무서워서 그런 사실을 절대 비밀로 유지했던 것을 상홍은 뒤늦게 알고, 누나의 지혜로움에 감탄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쓰러졌다가 다시 회복한 다음부터는 아버지 스스로 예전과 같은 엄격한 율법주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가족들은 폭압정치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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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2)

정 사장은 와인을 마시면서 은영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정 사장은 술에 취하자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정 사장이 대학교 3학년 때였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같은 학교 캠퍼스였어. 학교 수업을 마치고 걸어가는데 그녀가 내 눈에 띄었어. 순간 나는 어떻게 저런 여자가 있을 수 있을까하고 내 눈을 의심했어. 너무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었던 거야. 몇 년 동안 꿈에 그리던 스타일이었던 거지. 그래서 나는 무작정 그녀를 따라갔어. 그녀가 어떤 강의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어.”

은영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야기를 이 늙은 영감에게서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약간 짜증이 났다. 그래서 와인을 더 마셨다. 일본 와인은 약간 달콤했다. 드라이한 맛은 적었다. 하지만 지금 은영에게는 그런 와인이 더 좋았다. 머릿속에서는 순현에 대한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내가 일본에 출장 와있는 동안 분명 이 인간은 다른 여자와 놀고 있을 거야. 여자 없으면 못하니까. 이런 남자와 계속 관계를 유지해야 내게 도움이 되는 것도 없을 거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답답하다.’

정 사장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젊었을 때의 청춘이 어떻게 마음에 드는 여자를 꼬셨는지, 정복했는지 무용담에 혼자 심취해 있었다.

“그녀가 강의실에서 나오자 나는 또 그녀를 몰래 뒤따라 갔어. 기술적으로 미행한 거지. 그래서 그녀가 생활하는 원룸까지 알아냈어. 그리고 한 달 정도 그녀를 스토킹한 거지.”
“그래서요?”

“마침내 어느 날 그녀에게 말을 걸어 둘이서 커피를 마실 기회를 가졌어. 그리고 나는 그녀를 꼬시기 위해 많은 거짓말을 했어. 내가 대구에서 올라왔는데, 아버지가 대구에서 아주 돈이 많은 재력가라고 했어. 그리고 내가 외동아들이라 아버지 회사를 이어받아야 하고,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프랑스로 유학을 가야 할 처지라고 했어. 다만, 아버지가 나를 강하게 키우느라고 돈을 쓰지 못하게 훈련시키고 있어서 답답하다고 했어.”

“그래서 그 아가씨가 넘어갔어요?”
“당장은 아니었지만, 내 거짓말이 효과가 있어서 그런지 그 후 가끔 만나서 같이 식사를 했어. 그래서 식사할 때는 내가 어려운 형편에 큰 출혈을 해서 고급 레스토랑으로 갔지. 그러다가 어느 날 같이 술을 마시고 그녀와 같이 야외 공원으로 가서 벤치에 앉아 있다가 숲 속으로 끌고가서 강간을 했어. 그녀는 강하게 저항했지만, 내가 워낙 세게 나오니까 더 이상 반항을 하지 않고 있었어.”

“그럼 사장님은 고소를 당했어요?”
“그러고 나서 나는 무릎을 꿇고 빌었어.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 알아서 하라고 했어. 그러면서 눈물을 흘렸어.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그 아가씨가 용서를 해준 거예요?”

“그녀는 나에게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했어. 그러면서 혼자 생각을 정리한 다음 일주일 후에 만나서 결론을 내주겠다고 했어. 그래서 일주일 후에 우리는 만났어. 그랬더니 그녀는 내가 사람도 아니라면서 더 이상 자기 눈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어. 그러면서 만일 한 번 더 눈에 띄면 경찰서에 고소한다고 했어.”
“그래서 그 후 어떻게 되었어요? 그걸로 끝이예요?”

처음에는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 사장의 이야기는 매우 색달랐다. 그래서 은영도 솔깃했다.
“아니지. 물론 처음에는 나도 순간적으로 큰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해서 겁을 많이 먹었어. 그래서 그녀를 다시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매일 술에 취해 잠이 들곤했어. 하지만 그녀는 내게 첫사랑이었고, 내 동정을 준 여자였어. 그리고 처음부터 그녀는 내 마음에 꼭 드는 여자였어. 그래서 나는 젊은 나이에 다시 용기를 냈어. 그녀를 찾아가 편지를 건네주었어. 내 편지에는 그녀 없으면 나는 못산다고 하면서, 고소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어. 내 인생은 끝이라고 썼어.”

“그래서요? 그녀가 받아준 거예요?”
“그녀는 나를 데리고 술집으로 갔어. 그러면서 술을 마시고 울면서 이야기했어. 내가 싫지는 않지만, 강간한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했어. 그리고 자신은 당시 처녀성을 상실했다고 하는 거야. 자기 아버지가 어머니가 시집올 때 처녀 아닌 것 때문에 평생 사이가 좋지 않게 지냈고. 그걸 핑계로 아버지는 평생 바람을 피면서 자신을 정당화했다고 하면서, 그녀가 처녀를 상실했다고 하면 어머니가 실망해서 견디지 못할 거라고 했어.”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정 사장은 갑자기 술에 취해 졸면서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아마 못 이룬 옛사랑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혼자 자기도취에 빠져 술이 급하게 올라온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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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1)

은영이 약을 사가지고, 요구한 서류를 가지고 호텔방으로 가자, 정 사장은 목욕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은영은 민망했다. 호텔방에서 남자와 단 둘이 있는데, 그것도 목욕가운만 입고 쇼파에 앉아 있으니 이상했다. 은영은 서류와 약만 건네주고 바로 나오려고 했다.

정 사장은 은영에게 쇼파 맞은 편에 앉으라고 했다. 서류를 보면서 몇 가지 지시를 했다. 그러나 막상 지시하는 내용은 은영이 할 일도 아니었고, 모든 것은 다른 남자 직원들이 받아야 할 지시였다.

정 사장은 또 약을 먹기 위해서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냥 자신이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면 되는 것인데, 그것조차도 은영에게 시켰다. 해외에 나와서까지 은영을 여비서로 생각하고, 이런 저런 잔심부름을 시키는 것이었다.

은영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비서의 지위에서 하라는 대로 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크게 거부반응이 없었다.

나이 많은, 그리고 자신이 모시는 사장이 일본에 와서 술을 많이 마시고, 속이 좋지 않아 약을 사달라고 하고, 무슨 필요가 있어 서류를 가져다 달라고 하고, 약을 먹기 위해 물을 가져다 달라고 하니, 그 정도야 있을 수 있겠다 싶어서 그냥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비서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장은 밖에서 사가지고 온 와인 은영과 함께 마시자고 앴다. 순간, 은영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물론 은영 자신도 그날 저녁 식사 때 사케를 많이 마셨다. 많이는 아니지만, 술에 취한 상태였다

그래서 은영은 자신의 방에 들어가 샤워를 하려고 하는데, 정 사장의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지? 호텔방에서 단 둘이서 와인을 마시고 있으면 이상하지 않을까?’ ‘큰일이네. 같이 간 다른 남자 직원들이 알면 오해를 할 텐데.’

은영은 그러나 싫다는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정 사장이 하자는 대로 함께 와인을 마셨다. 마침 그곳에는 와인 안주도 있었다.

“자. 편하게 앉아서 술이나 마시자. 아무 걱정하지 말고.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애로사항이 있으면 말해 봐.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 그리고 결혼은 언제 할 거지?”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회사 일이나 열심히 하려고요. 근무하는데 아무런 애로사항도 없고요. 사장님께서 잘 해주시니까 고맙습니다.”

“그래. 요새 세상에는 결혼 빨리 하는 게 능사가 아냐. 여자도 사회생활을 해서 성공하는 게 중요하지. 괜히 능력 없는 남자 만나 고생만 하고, 애나 키우면 여자로서는 자신의 인생이 없는 거야.”
“예. 맞아요. 저도 빨리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누구한테서 들었는데, 박 과장 사귀는 애인이 유부남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어. 유부남은 만나지 않는 게 좋아. 잘못하면 망신을 당하고, 골치 아픈 게 유부남이야. 원하면 내가 좋은 데 중매를 해줄 게.”

은영은 갑자기 망치로 뒤퉁수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아니 어떻게 사장이 그런 사실을 알았을까? 회사에서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린 걸까?’

은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한 달 전부터는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 친구와 헤어지려고 마음 먹고 있는 상태였다. 그 이유는 그 남자 친구가 어디에서 성병을 옮아가지고 와서 은영에게도 옮겼기 때문이었다. 은영은 병원에 가서 창피를 무릅쓰고 치료를 받았다. 그때 은영은 유부남인 남자 친구 순현에게 따졌다.

“아니, 나를 만나면서 또 다른 여자와 관계를 하고, 성병까지 옮겨요? 정말 나쁜 사람이네. 이제 더 이상 만나지 말아요.”
“무슨 소리야? 나는 다른 여자와 전혀 하지 않았어. 당신이 다른 곳에서 옮겨온 거지?”

그 남자는 오히려 은영에게 뒤집어씌우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은영에게 바람 피는 여자라고 난리를 쳤다. 은영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누가 먼저 성병을 옮아가지고 상대에게 옮겼는지 의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은영에게는 조사권이나 수사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일 이후 은영은 순현과 관계를 할 때 콘돔을 사용했고, 가급적 성관계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갑자기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냉각되었고, 애정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잘못했다가는 에이즈에 걸려서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순현이 성병에 걸려 은영에게도 옮겼으면, 당연히 순현의 부인에게도 옮겼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부인이 난리를 쳤을텐 데, 전혀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순현의 말대로 순현은 집에서는 절대로 관계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일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순현으로부터 성병을 옮고 난 다음부터는 순현에 대한 정은 완전히 떨어져버렸다. 그렇지만, 갑자기 딱 끊을 수 없는 것은 여전의 순현의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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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43)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텔방은 평온했다. 영식과 경희 두 사람만의 공간이었다. 알몸으로 사랑을 나누고, 서로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속정도 들었고, 서로에게서 따뜻한 배려도 받았고, 마음의 위안도 받았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 이상하다. 혼자 있으면, 몸과 마음은 고독을 느끼고 깊은 심연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한다. 자신과 다른 또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한다.

상대를 통해 자신을 투영시키고, 몸과 몸을 마찰시킴으로써 체온을 유지하고,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 마치 발전기가 양과 음의 극을 연결시켜 에너지를 창출하듯이, 인간도 똑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몸뿐 아니라, 마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마음은 죽음을 향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마음과 연결되면 삶을 향한다. 그래서 죽음을 망각한다.

영식과 경희는 비롯 허용되지 못한 사랑이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사랑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생활과도 연결되어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가끔 만나 섹스를 하면서, 살아가면서 받는 많은 스트레스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성적 결합을 통해 서로가 상대를 자신의 것이라고 의식적으로 확인하려고 했다. 완전한 소유는 아니어도, 관계한다는 것은 그 순간 일시적인 소유라고 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을 완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정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작용을 한다. 영식과 경희는 아직 젊은 나이였기 에 섹스에 대한 욕구도 해소해야 했다.

육체적인 쾌락도 매우 중요한 삶의 요소이며, 원동력이라고 믿고 있었다. 특히 두 사람 모두 집에서는 배우자와는 거의 관계를 하지 않고 지내는 생활인이었다. 그래서 더욱 두 사람 사이에서는 이런 섹스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호르몬 분비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건강에도 좋지 않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두 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늘 하던 대로 섹스로 몸을 풀고 개운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가 커피를 마실 생각이었다.

커피는 인류가 개발해 낸 기호식품 중에서 아마 지금까지는 최고가 아닐까 싶다. 남자와 여자가 뜨거운 사랑을 한 다음, 겨울의 쌀쌀한 날씨에 눈이 덮힌 창밖을 보며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것은 아주 작은 인생의 행복이 아닐까?

하지만 사람의 일은 늘 뜻한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게 경험에서 얻게 되는 인생의 진리다. 삶의 모순이다. 모텔방문이 열리고, 커튼이 올려진 상태에서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 점령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 평온했던 공간은 그야말로 악의 소굴로 변했다. 그곳은 악마와 비악마가 서로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무서운 전장터가 된 것이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다음, 영식과 경희는 옷을 챙겨 입고 경희 남편 일행과 함께 모텔 밖으로 나가 부근에 있는 커피숍으로 갔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어차피 가려고 했던 커피숍인데, 둘만이 아니라, 다른 두 사람이 더 같이 가게 된 것이다.

그것도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미움을 나누기 위해서 가는 것이 되었다. 그때의 커피 맛은 커피가 아니라, 지옥의 문 앞에서 피우는 향의 냄새가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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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냄새 난다는 이유로 젊은 애인으로부터 버림을 받다

 

그렇게 여섯 달을 열심히 새벽기도를 나가 가족이 무병장수하고 사업 잘 되기를 기도했다. 그랬더니 남편이 처녀들 건드려서 6년 동안 데리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남편을 배신하고 떠났다. 그 여자가 다섯 살 어린 남자를 만나서 동거를 시작했다면서 정혜 아버지를 만나주지 않았던 것이다.

 

정혜 아버지는 그 여자를 만나서 가만 두지 않겠다고 따졌다. 그랬더니 그 여자의 새로운 애인이 정혜 아버지를 만나서 폭행을 가했다. 새 애인은 젊고, 해병대에서 제대한 패기가 있고, 태권도 유단자였다.

 

새 애인 입장에서는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에 대해 정당한 사유 없이, 부당한 방법으로 욕정을 채우려는 동물로 보였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손을 봐준 것인데, 그래도 괜히 어디를 부러뜨렸다가는 자신도 감방에 가거나 벌금을 크게 물 소지가 있어서 아주 가볍게 정혜 아버지를 정신 차리도록 살짝 때린 것이었다.

 

그런데 정혜 아버지가 워낙 술 담배에 찌들고 건강관리를 하지 못해, 다른 사람 같으면 오히려 건강 마사지를 받은 효과가 나타나거나 최악의 경우에도 전치 30분이나 3시간이면 충분할 텐데, 정혜 아버지만 전치 3주간, 즉 21일간의 장기치료를 요하는 타박상 및 염좌상을 입었다.

 

하지만 정혜 아버지는 사회적 체면이 있고 남자로서의 자존감이 강했기 때문에 자신을 비참하게 버리고 젊은 남자의 품에 안긴 오래 된 애인이나 그 여자의 새 남자를 상대로 더 이상 어떻게 하기가 곤란했다. 정혜 아버지는 창피해서 고소도 못하고 결국 이별의 쓰라림을 맛보았다.

 

특히 정혜 아버지가 상처를 입었던 것은, 그 젊은 남녀가 정혜 아버지와 싸우면서 한 말이었다.

“너 같이 늙은 놈이 어린 여자를 탐내다니 정말 나쁜 놈이다. 늙으면 조용히 있을 일이지, 왜 몸에서 냄새 나는 늙은 놈이 젊은 여자의 향기를 탐내고 있느냐?”는 말에 큰 상처를 입었다.

 

정혜 아버지는 사실 그동안 겨드랑이 냄새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고, 그래서 젊은 여자를 만날 때 향수를 진하게 뿌리고, 각종 화장품을 사용하고, 껌을 열통씩이나 씹고 있었다. 그래서 들어간 껌값도 만만치 않았다.

 

어떤 의사는 껌에는 몸에 나쁜 성분이 있다면서 껌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논문도 썼지만, 정혜 아버지는 그 논문을 쓴 의사는 젊은 여자 애인을 만나본 적이 없거나, 아마도 성불구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6년 동안 만날 때에는 한 번도 냄새 난다고 말하지 않았던 여자가 어떻게 헤어질 때는 그런 약점을 폭로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젊은 여자는 정혜 아버지가 돈을 잘 썼기 때문에 몸에서 나는 악취는, 돈에서 나는 향기 때문에 묻혀서 여자에게는 전달이 되지 않았던 것같았다.

 

정혜 아버지는 자신을 일방적으로 아무런 사유도 없이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간 그 젊은 여자를 상대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청구를 할 수 있는지 유료상담전화로 변호사에게 물어보았다.

 

변호사는 술에 취한 것인지, 자다가 전화를 받은 것인지 아무리 설명해도 사안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지금 남자가 여자를 상대로 청구한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제가 당했다고요! 6년 동안 성관계를 맺었는데, 아무런 잘못도 없는 저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갔다고요!”

“그런데 선생님은 무엇을 당했다는 거요? 그 여자에게 돈을 뜯겼나요?”

“저는 그 여자에게 6년 동안 순정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를 배신하면 저는 정신적 고통을 받기 때문에 당연히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이 먹은 변호사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차분하게 많은 것을 정혜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두 사람의 나이이며, 결혼 여부, 성관계 횟수, 금전거래관계 등을 물었다. 그랬더니 그 변호사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데리고 놀다가 버리면 위자료를 물어줄 가능성이 있지만, 젊은 여자가 늙은 남자를 데리고 놀다가 버리는 경우에는 위자료를 물어줄 필요는 없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유권해석을 내렸다.

 

정혜 아버지가 그 변호사에게 남녀평등이고, 정신적 고통은 똑 같이 받았는데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졌더니 그 변호사는 기분 나빴는지 아무 답변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정혜 어머니는 이때 큰 충격을 받았다. 역시 기도의 응답이 이렇게 무섭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정혜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지 않고 있었는데, 사태가 이렇게 되니 이 모든 것이 정혜 어머니가 교회에 나갔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교회가 자기 인생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정혜 어머니와 이혼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얼마 가지 않아 이혼하려는 생각은 싹 없어졌다. 이런 저런 일로 정혜의 결혼식 때 스님을 주례로 모시는 문제는 결국 없던 일로 결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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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0)

어느 날 일일주식회사의 정 사장과 임원 3명이 일본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은영도 출장자 명단에 끼어 있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여비서가 외국에 업무차 출장을 가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회사에는 영어와 일본어를 잘 하는 직원들이 있었다. 은영은 영어도 못하고, 일본말도 전혀 못했다.

그런데도 일본에 사장 일행과 같이 출장을 간다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은영 입장에서 안 가겠다고 말할 용기도 없었다. 회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비서직에서 일반 직원으로 부서를 옮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은영의 남자 친구 순현은 이런 사실을 알고, 왜 따라 가느냐고 펄펄 뛰었다.

“네가 가서 할 일도 없잖아? 여비서가 일본까지 따라가서 무엇을 하자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혹시 사장이 해외에서 데리고 놀려는 건 아닐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 마! 하지만, 어쩌겠어. 회사에서 내가 할 역할이 있기 때문에 출장을 같이 가자는데, 거절할 수 없잖아?”
“응. 알았어. 따라 가더라도 꼭 필요한 비즈니스만 하고, 남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노래방 같은 곳에는 가지 마.”
“물론이지. 내가 여직원이지, 남자들 놀이개는 아니잖아.”

은영은 3박 4일 일정으로 동경으로 출장을 갔다. 처음 가보는 동경은 역시 동경이었다. 특히 신주꾸와 아카사까 동네는 볼 것도 많고, 일본 식당에서 마시는 사케는 너무 부드럽고 맛이 좋았다.

그래서 은영은 기회 있을 때마다, 특히 하루 스케줄이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장소에서는 사케를 많이 마셨다. 심지어는 호텔 방으로 사케를 사가지고 와서 혼자서도 마셨다.

대체로 일본에서 은영이 하는 일은 그냥 사장 따라 다니는 일이었다. 특별히 차심부름을 할 일도 없었다. 주로 호텔 비즈니스룸에서 회의를 하고, 거래 업체 회사를 방문하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데 동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회사에서 특별히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옷도 매일 갈아입을 것을 가지고 갔다.

그래서 화장도 제대로 하고, 옷도 좋은 것을 가지고 젊은 여성으로서 좋은 이미지를 주려고 노력했다. 그게 다 회사를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은영은 이 대목에서도 고개가 갸우뚱했다. ‘글쎄 한 번 보고 말 일본 거래처 사람들에게 비서인 내가 잘 보여야 할 이유는 없을텐 데...’

출장 마지막 날 저녁 9시 경, 정 사장은 갑자기 은영을 자신의 방으로 오라고 했다. 어떤 서류를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국에 가서 약을 사다달라고 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속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 사장은 원래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었다. 담배도 계속 피웠다. 나이는 58살이었다. 돈이 많아 서울에서 최상류층에 속했다. 부인도 미인이라고 들었고, 자녀들도 모두 출세해서 떵떵거리고 사는 집안이었다.

은영은 사장이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그것도 사장이 혼자 있는 호텔 방으로 가져다 달라는 것을 못마땅했다. 같이 따라간 남자 직원도 있는데, 왜 하필 여자인 자신을 호텔방으로 오라고 하고, 약을 사가지고 오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하지만 은영은 사장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정 사장은 가난한 집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의지가 강했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정 사장은 성격이 급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했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들을 무시한다.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거나,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보다는 열등한 인간이라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낮추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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