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30)
그러는 가운데 혜경은 마침내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교에 입학했다. 교복에서 자유복으로 갈아입은 혜경을 밖에서 처음 만난 윤석은 흠칫 놀랬다. 마치 천사를 만난 것 같았다. 우연히 대학로에서 만나 함께 찻집으로 들어갔다.
“대학생활이 어때요?”
“지긋지긋한 공부에서 해방이 되어 편해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하려고 해요. 부모님들도 이제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걸 하라고 하셨어요.”
“그동안 시험 준비하느라고 고생이 많았어요.”
“고등학생때에는 잘 몰랐는데, 대학 들어와 보니 선생님이 다니는 의대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공부를 하는지 알게 되었어요. 힘드시죠?”
혜경의 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윤석은 자신이 꿈속에서도 보고 싶어 하던 혜경의 그 미소에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의대공부가 어렵다는 것을 혜경이 알아주는 것 같아 기분도 좋아졌다. 윤석은 혜경과 또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헤어졌다.
그로부터 며칠간 윤석은 번민에 빠졌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표현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워졌다. 그렇다고 어떻게 할 뾰족한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혜경이 시험에 떨어져 재수를 했더라면 자신이 1년간 더 과외지도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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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9)
항상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이런 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두 사람이 똑 같은 생각과 느낌을 공유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개 한 쪽에서 먼저 오바를 하게 된다. 상대방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혼자서 선을 넘어 좋은 감정을 갖게 되고, 혼자 고민하게 된다.
상대방과 자신의 환경이나 여건이 맞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데도 혼자서 상대방과 자신이 잘 맞을 수 있고, 자신이 노력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잡을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열심히 노력하면 처음에는 움직이지 않던 상대방의 마음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무척 어려운 일이고, 설사 그렇게 해서 어렵게 마음을 일시적으로 잡았다고 해서 영원히 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또 문제다. 윤석은 혜경을 혼자 좋아하기 시작했다. 전혀 내색할 수 없었지만, 혜경을 만나는 시간이 기다려졌고, 혜경과 공부를 하는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대개 혜경이 먼저 “벌써 9시가 넘었네요.”라는 말을 꺼냈다. 윤석은 예전과 달리 시계를 보지 않고 열심히 가르치다가 혜경의 말을 듣고 과외지도를 마무리지었다. 혼자 서울에 올라와서 힘든 대학 공부를 하고, 과외지도를 하는 입장에서 느껴지는 외로움과 고통이 혜경의 존재로 잊혀졌다.
거의 매일 쓰던 일기장에 혜경의 이름이 자주 올라가게 되었다. 혜경을 짝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혼자서 꿍꿍 앓고 있던 윤석을 누가 옆에서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 병은 혼자서 깊어가고 있었다.
강물이 혼자 흘러가면서 점차 깊어져 나중에는 아주 깊은 바다의 심연으로 가듯이 윤석의 짝사랑도 시간이 가면서 북한강에서 한강을 거쳐 서해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윤석은 이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어려운 집안을 생각하면서, 빨리 의사가 되어 부모님들의 고생을 덜어드려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쓸데없는 여자 문제에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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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8)
밤을 새워 공부를 해도, 외워도 외워도 끝이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윤석은 혼자 쓰는 하숙방에도 늘 학교에서 실습용으로 나누어진 사람의 뼈와 두개골 등을 가지고 와서 밤늦게까지 들여다 보고 공부를 했다. 때로는 무섭기도 했다. 죽어서 마른 뼈가 되어 땅속에 묻히지도 못하고 학생들의 손에 손을 거쳐 학습용이 된 고인들이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다.
학교에는 또 해부용 사체를 처리하는 남자 직원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 사람을 보면 무서운 생각이 들어 멀리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의사가 되려면 이런 과정을 다 거치고 담대해져야 메스를 잡고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사람의 살을 베고 수술을 할 수 있다. 중간과정을 극복해야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들이 흔히 하는 미팅에도 거의 나가지 못했다. 그냥 책에만 파묻혀서 지냈다. 게다가 과외지도까지 해야 했으니 주말이면 몸은 파김치가 되었다.
윤석이 대학교 2학년때 고3 여학생을 과외지도하게 되었다. 여학생인 혜경의 집에 일주일에 세 번씩 찾아가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혜경은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나, 공부에는 별로 취미가 없었다. 부모님들은 대기업의 중역이었다. 혜경의 부모님들은 매우 가정적이었다. 가족들이 외식도 자주 하고, 공연을 함께 가고, 주말에는 지방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혜경은 윤석에게 늘상 가족들이 무엇을 함께 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과외공부를 시작했다. 윤석은 자신이 할 수 없는 분야의 경험을 들음으로써 간접적인 지식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다. 혜경은 아주 예뻤다. 특히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치아는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도 멋을 많이 부리는 편이었다. 윤석이 갈 때마다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윤석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러나 혜경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생활을 해서 그런지, 아니면 많은 남학생들로부터 과외지도를 받아 보아서 그런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과외지도만 받겠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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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7)
윤석이 대학교에 떨어져 재수를 하고 있을 때, 윤석 아버지는 빚을 내서 작은 건물 하나를 지었다. 땅은 70평 정도였는데, 그곳에 2층 건물을 짓고, 3층에는 방 두개를 만들었다. 그래서 윤석은 서울로 올라와 학원에 다니기 전까지는 아버지를 도와 건물을 짓는 일을 도와주었다.
건물이 완성되자 아버지는 1층과 2층은 모두 세를 주었다. 그리고 3층으로 가족 모두가 이사했다. 어렵게 지내다가 아버지 명의로 작은 건물을 짓고, 월세도 받게 되자 가족들은 한숨 돌리게 되었다.
의대에 들어가자 윤석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의술로써 인류의 건강을 지키고, 평생을 봉사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대학교에 다니자 세상이 넓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해부학과 같은 원서로 된 두꺼운 의학서적을 들고 다니면서, 갑자기 아주 중요한 학문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문제집이나 풀고 외우며 시험준비를 하던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수업을 받다가 대학 교수님들로부터 강의를 듣는 것은 상당히 다른 기분이었다. 자유스럽고 낭만적인 대학교의 분위기에 젖어가면서 열심히 의과대학 예과 강의를 듣고 있었다.
지방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을 하면 항상 마음이 뭉쿨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호강시켜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려워진 가정 형편 때문에 윤석은 서울에 올라와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곧바로 과외지도를 했다.
의대 공부를 하랴, 과외지도를 하랴, 눈코 뜰 새 없었지만,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부유한 환경의 다른 학생들이 여유롭게 생활하는 것을 별로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의과대학 공부는 정말 힘들었다. 갑자기 영어로 된 의학적 용어를 수없이 외워야했다. 더군다나 밖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의 신체 내부에 어떤 조직이 있고, 혈관이 어떻게 흐르고, 각 기관이 어떻게 작동을 하는지 알아야 했다.
수많은 신체가 잘못되었을 때 어떤 증세가 나타나고 그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밖에서 보이는 눈과 코, 귀, 손과 발 가슴 등만 피상적으로 보았던 윤석에게 안으로 들어가 신체를 정밀하게 해부하는 공부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미지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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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6)
은영은 저항을 포기하고 그냥 침대에 걸터앉았다. 정 사장은 은영의 손을 꼭 잡고 누워있었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더 이상 진행은 하지 않았다. 순간 은영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꼭 이 방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정 사장이 성관계만 하지 않는다면 그냥 이대로 같이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정 사장이 은영을 꼭 성적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외국에 나와 혼자 자려니 허전해서 그럴 수 있겠다. 아니면 정말 은영을 젊은 여성으로서 호감을 가지고 좋은 감정 때문에 그럴 수 있겠다.
그래서 은영은 그냥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정 사장은 얼마 지나지 않자, 코를 골면서 잠이 들었다.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 은영은 조용히 TV를 켰다. 기모노를 예쁘게 차려입은 일본 여자가 사무라이를 사랑하는 듯한 내용의 드라마를 보면서, 은영은 자신의 사랑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았다.
뚜렷한 정체성이 떠오르지 않았다. 깨진 첫사랑만 아련하게 떠오르고, 그 나머지 육체관계를 가졌던 남자들은 모두 지나가는 작은 배 같았다. 은영은 속이 쓰렸지만, 다시 술을 마시고 싶었다. 더 취하고 싶었다.
정 사장은 와인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많이 사다놓았다. 일본 사케도 있고, 삿포로 캔맥주도 있었다. 안주는 육포와 과일이 있었다. 은영은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쇼파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옷도 외출복 그대로였다. 그
렇게 몇 시간이 지났는지 은영은 화장실에 가려고 눈을 떴다. 정 사장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은영은 제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자신의 호텔방으로 갔다. 왠지 허전했다.
그렇다고 커다란 모욕감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남자란 다 그런 존재다’라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한 것에 불과한 것 같기도 했다. 다만, 아침에 정 사장을 만나는 것이 두려울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무척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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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5)
그때 은영은 유부남인 남자 친구에게 따졌다.
“아니, 나를 만나면서 또 다른 여자와 관계를 하고, 성병까지 옮겨요? 정말 나쁜 사람이네. 이제 더 이상 만나지 말아요.”
“무슨 소리야? 나는 다른 여자와 전혀 하지 않았어. 당신이 다른 곳에서 옮겨온 거지?”
그 남자는 오히려 은영에게 뒤집어씌우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은영에게 바람이나 피는 여자라고 난리를 쳤다. 은영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누가 먼저 성병을 옮아가지고 상대에게 옮겼는지 의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은영에게는 조사권이나 수사권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일 이후 은영은 남자 친구와 관계를 할 때 콘돔을 사용했고, 가급적 성관계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갑자기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냉각되었고, 애정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잘못했다가는 에이즈에 걸려서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 사장이 갑자기 유부남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은영은 갑자기 술에 취하고 싶었다. 은영은 정 사장에게 술을 계속 권하고, 자신도 정 사장이 따라주는대로 마셨다. 술에 취하면 사람들은 공연히 들뜬다. 그리고 이성을 잃는다. 은영의 눈에 정 사장이 나이 먹고 늙은 사람이 아니라, 별로 나이 차가 없는 건강한 남자, 멋이 있고, 능력이 있는 남자로 보였다. 그러면서 첫사랑의 남자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고, 요새 만나고 있는 유부남의 얼굴과 겹쳐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불쌍한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내가 이렇게 흐뜨러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똑바로 행동하고, 나의 몸과 정신을 지키고,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기를 바랄 것이다. 순간적으로 술이 깼다.
“사장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술이 취해서요. 이만 제방으로 갈게요. 사장님도 이제 술 그만 드시고, 편히 쉬세요.”
은영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그러자 사장은 가지 말라고 하면서, 술에 취해 쇼파에 쓰러졌다. 은영은 그런 상황에서 그냥 나올 수가 없었다. 잠시 쇼파에 앉아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사장이 불쌍해 보였다. 나이 든 사람이 회사를 경영하느라고 얼마나 힘이 들까? 스트레스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저렇게 술에 취해 쓰러져 자면 속도 아플 테고, 불편할 것이다.
그래서 은영은 그대로 앉아있다가 사장을 깨워서 침대로 옮겨주려고 했다. 은영은 사장을 흔들어 깨웠다. 자신의 힘으로는 사장을 들어서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사장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은영이 깨우니 겨우 눈을 뜨고 침대로 이동했다. 그런데 침대에 가서는 은영을 꼭 붙잡아 당기는 것이었다. 은영은 아차 싶었다. 뿌리치려고 했지만 사장의 힘이 너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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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4)
정 사장은 은영에게 쇼파 맞은 편에 앉으라고 했다. 서류를 보면서 몇 가지 지시를 했다. 그러나 막상 지시하는 내용은 은영이 할 일도 아니었고, 모든 것은 다른 남자 직원들이 받아야 할 지시였다. 정 사장은 또 약을 먹기 위해서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냥 자신이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면 되는 것인데, 그것조차도 은영에게 시켰다. 해외에 나와서까지 은영을 여비서로 생각하고, 이런 저런 잔심부름을 시키는 것이었다.
은영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비서의 지위에서 하라는 대로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사장은 밖에서 사가지고 온 와인을 꺼내 은영과 함께 마시자고 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지? 호텔방에서 둘이서 와인을 마시고 있으면 이상하지 않을까?’ ‘큰일이네. 같이 간 다른 남자 직원들이 알면 오해를 할 텐데.’
은영은 그러나 싫다는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 편하게 앉아서 술이나 마시자.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리고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애로사항이 있으면 말해 봐. 내가 다 해결해 줄테니. 그리고 결혼은 언제 할 거지?”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회사 일이나 열심히 하려고요. 회사에서는 근무하는데 아무런 애로사항도 없고요. 사장님께서 잘 해주시니까 고맙습니다.”
“그래요. 요새 세상에는 결혼 빨리 하는 게 능사가 아냐. 여자도 사회생활을 해서 성공하는 게 중요하지. 괜히 능력 없는 남자 만나 고생만 하고, 애나 키우면 여자는 인생이 없는 거야.”
“예. 맞아요. 사장님. 저도 빨리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박 과장. 얼마 전에 누구한테서 들었는데, 박실장 애인이 유부남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어. 유부남은 만나지 않는 게 좋아. 잘못하면 망신을 당하고, 골치 아픈 게 유부남이야. 원하면 내가 좋은 데 중매를 할게.”
은영은 갑자기 망치로 뒤퉁수를 세게 맞은 것 같았다. ‘아니 어떻게 사장이 그런 사실을 알았을까? 그리고 회사에서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린 걸까?’
은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한 달 전부터는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 친구와 헤어지려고 마음 먹고 있는 상태였다. 그 이유는 그 남자 친구가 어디에서 성병을 옮아가지고 와서 은영에게도 옮겼다. 그래서 은영은 병원에 가서 창
피를 무릅쓰고 치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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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은 운명 (52)
민첩 아버지는 더 이상 싸워봤자 얻을 게 없을 것 같았다. 뱀사장은 눈이 꼭 뱀같았다. 아주 날카롭게 쏘아보는 것이 옆눈으로 쏘아보고, 째져있는 눈이 꼭 뱀이었다. 얼굴 색깔로 누런게 뱀피부였다.

만일 치고 받고 싸우다가 그 집에 있는 구렁이나 독사를 풀어서 민첩 아버지에게 기어오게 했다가는 그깟 돈 때문에 잘못하다가는 뱀독에 물려 비명횡사할 것 같았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민첩 아버지는 절망감에 빠져서 처음 자신에게 뱀탕을 효능을 알려준 옆집 남자를 만났다.

“사장님 말을 듣고 나도 뱀탕을 먹었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 어떻게 된 걸까요?”

“뱀탕 먹었다고 곧 효능이 나타나는 건 아니예요. 몇 달 있어야 그때 비로소 나타나는 거예요. 그리고 당분간 술을 줄이고 있어요. 여자와 관계를 할 때는 처음에는 젊은 여자를 피하고 아이를 두 명 이상 낳은 여자와 천천히 시작해봐요. 젊은 여자와 관계를 하면 효능이 감퇴돼요. 절대 이 원칙을 지켜야 해요. 여자가 40살 넘은 여자하고만 해야해요.”

민첩 아버지는 이 남자가 ‘성의 고수’라는 사실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권위에 눌려 꼼짝못하고 그 원칙을 지키려고 마음먹었다. 그날 민첩 아버지는 이 고귀한 진리를 깨우쳐준 그 남자를 대접하기 위해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그 남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여자관계를 잘 하는 법에 대해 체계적인 강의를 한 시간 해주었다. 민첩 아버지는 ‘성전문 대학원’을 체계적으로 수료한 것 같았다. 너무 기분이 좋고 흥분이 되었기 때문에 그 남자와 술을 많이 마셨다.

그 남자는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는 것 같지 않았다. 소주병을 무려 5병이나 혼자 비웠다. 그 남자는 술을 민첩 아버지에게 권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혼자 따라 마시고, 빈병도 자신이 먹은 것을 확인하려는 듯 따로 놓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술집을 나올 때 그 남자 혼자 마신 소주병은 무려 12병이나 되었다.

민첩 아버지도 술이 센편이라 그날 많이 마셨는데, 3병밖에 되지 않았다. 그 남자의 주량에 비해볼 때 25%밖에 되지 않는 저조한 실적이었다. 순간 창피했다.

같은 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나서 군대까지 갔다왔는데, 이렇게 밖에 술을 못마시고 그것도 취해서 구두를 신을 때 오른쪽 구두와 왼쪽 구두를 구별할 수 없어 헤매는 자신을 보니 무엇 때문에 살고 있나 싶었다.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처럼 그냥 삶에의 맹목적 의지 때문에 죽지 않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는 뱀탕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소주를 12병을 두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들이마시고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얼굴이 붉어진 것도 아니었다. 음성이 거칠어진 것도 아니고 차분했다. 마치 커피만 마신 여자같았다.

민첩 아버지는 자신이 뱀탕을 오래 먹고도 아무런 성능력에 변화가 없는 대신, 저 남자는 술을 저렇게 많이 먹고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니 똑 같은 무변화는 맞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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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1)

민첩 아버지는 뱀탕을 먹을 때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철저하게 지켰다. 뱀탕을 먹을 때에는 여자관계도 삼갔다. 전문가 말로는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는데도 민첩 아버지는 정력이 누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특별한 노력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여자관계를 하지 않고 참으려고 했더니 더욱 생각이 간절한 것이었다. 그것은 더욱이 뱀탕을 먹는 이유가 여자관계를 잘 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뱀탕을 먹을 때마다 오히려 여자 생각이 더욱 치솟아서 인내하기가 어려웠다.

뱀탕집 주인은 민첩 아버지에게 진짜 뱀을 끓여주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게 해서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살아있는 뱀을 망태기에서 꺼내서 물로 씻은 다음 솥에 넣는 장면부터 보여주었다.

뱀의 눈은 무서웠다. 모두 민첩 아버지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뱀들을 솥에 넣고 나중에 다 꾾인 다음 두껑을 열고 보여주는데, 뱀들이 모두 머리를 꼿꼿하게 쳐들고 죽어있었다. 저런 뱀을 뱃속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지만 민첩 아버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뱀탕을 끝까지 먹고 정력을 키워야할 시대적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에 이내 담담해졌다. 아무튼 민첩 아버지는 이렇게 갖은 고생을 하면서 뱀탕을 먹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뱀탕을 먹기 전이나 먹은 다음이나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민첩 아버지는 뱀탕 주인에게 사기 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가서 따졌다.

“아니, 사장님. 어째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까?”
“글쎄요, 정말 아주 좋은 물건만 사용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달라질 텐데요. 내가 30년 뱀을 취급하지만 선생 같은 분은 처음인데요. 병원에 가서 혹시 성기능에 이상이 있는지 정밀검사를 받아보면 어떨까요?”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까지 애도 낳고 여자들하고 잘 하고 있었는데 성불구라니요?”
“내가 언제 성불구라고 했어? 도대체 이 사람이 왜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고 있어? 당신 생긴 게 잘 못하게 생겼구먼.”

뱀사장은 갑자기 흥분해서 반말이었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민첩 아버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내가 생긴 게 어째서 그래? 당신 가짜뱀 쓴 거 아냐?”

“가짜뱀이라니? 이 세상에 어떻게 뱀 모조품을 만들어? 당신 눈깔로 똑똑히 봤잖아? 살아있는 그 싱싱한 뱀들을 솥에 넣는 것과 나중에 끓인 다음 서있는 것도 봐놓고 그런 헛소리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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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0)

민첩 아버지는 갑자기 눈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뱀탕에 대해 여러 전문가들에게 물어보았다.

“뱀탕은 고상한 말로 생사탕이라고 하는 거요. 생사탕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아주 강력한 초정력제인 거요. 조선시대에는 폐결핵이나 중병으로 다 죽어갈 때 먹이면 다시 팔팔하게 체력이 회복되었던 거예요. 생사탕에는 고단위 단백질과 22종의 아미노산이 들어있는 것으로 성분분석이 되었다고 해요. 특히 현대 사회에서 정력제로 선전되고 있는 토코페롤이 많이 들어있어요.”

“제가 제일 궁금한 것은 정말 뱀탕을 먹으면 저처럼 정력이 약하고 조루인 사람도 강해지나요?”
“뱀탕은 비싸서 못먹지, 먹어본 사람들 이야기 들으면 백이면 백 모두, 변강쇠가 되었다고 하니까 그런 질문은 아주 어리석은 우문인 거요.”

“어느 정도 강해지나요?”
“지금까지 그런 구체적인 강도의 수치까지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 봐요. 나 바쁜 사람이니까 이제 그만 하고 돌아가세요. 공연히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아요.”

민첩 아버지는 머쓱해졌다. 머리를 끄적거리며, “주로 어떤 뱀을 먹는지 궁금해요?”
“주로 구렁이, 칠점사, 까치독사, 화사라고 하는 꽃뱀을 가지고 탕을 만드는 거예요.”

민첩 아버지는 더 이상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돈을 온라인으로 이체하고 일주일 후부터 뱀탕을 먹기로 했다. 물론 와이프에게는 비밀로 했다. 뿐만 아니라, 현재 거느리고 있는 애인 여자들에게도 절대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뱀탕을 먹고 과연 성능력향상의 효능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공연히 비싼 돈을 주고 뱀탕을 먹었는데도 자신에게만은 효능이 나타나지 않게 되면 망신만 당하는 것일 것이고, 만일 효능이 크게 나타난다고 해도, 먼저 말을 하면 뱀탕 때문에 인위적으로 정력이 향상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뱀탕은 완전히 모든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고 센 정력을 과시하면 위대한 남자로 대우를 받고 역사적인 위인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만일 정력이 변강쇠처럼 세지면, 현재의 애인들은 모두 교체할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야 새로 만나는 여자들이 민첩 아버지가 태어날 때부터 변강쇠였던 것으로 믿을 것이고 생각했다.

바다에서 나는 광어도 자연산과 양식 광어가 있듯이, 변강쇠도 태생적 변강쇠와 뱀탕 먹은 변강쇠는 아무래도 상대에 대한 인식과 선입관에 차이가 있고, 그 때문에 상대의 성적 흥분에도 차이가 날 것이고 혼자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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