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23)
은영의 남자 친구는 이런 사실을 알고, 왜 따라 가느냐고 따졌다.
“네가 가서 할 일도 없잖아? 그런데 왜 여비서가 일본까지 따라가서 무엇을 하자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혹시 사장이 해외에서 유혹하려는 것은 아닐까?”
“글세, 모르겠어. 하지만, 어쩌겠어. 회사에서 내가 할 역할이 있기 때문에 출장을 같이 가자는데, 거절할 수 없잖아?”
“응. 알았어. 하지만 출장가더라도 꼭 필요한 비즈니스만 하고, 남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노래방 같은 곳에는 가지 마.”
“물론이지. 내가 여직원이지, 남자들 놀이개는 아니잖아.”
은영은 그래서 동경으로 3박 4일 일정으로 출장을 갔다. 가서 은영이 하는 일은 그냥 사장 따라 다니는 일이었다. 특별히 차심부름을 할 일도 없었다. 주로 호텔 비즈니스룸에서 회의를 하고, 거래 업체 회사를 방문하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데 동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출장 마지막 날 밤, 정 사장은 갑자기 은영을 자신의 방으로 오라고 했다. 어떤 서류를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국에 가서 약을 사다달라고 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속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 사장은 원래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었다. 담배도 계속 피웠다. 나이는 62살이었다. 돈이 많아 서울에서 최상류층에 속했다. 부인도 미인이라고 들었고, 자녀들도 모두 출세해서 떵떵거리고 사는 집안이었다.
은영은 사장이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그것도 사장이 혼자 있는 호텔 방으로 가져다 달라는 것을 못마땅했다. 같이 따라간 남자 직원도 있는데, 왜 하필 여자인 자신을 호텔방으로 오라고 하고, 약을 사가지고 오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은영은 사장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사장은 모든 사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남자 직원들은 사장 앞에 가면 벌벌 떨었다.
부회장은 성격이 급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직원들이 조금만 잘못하면 큰소리로 난리를 치고, 심지어는 재떨이를 집어던지기도 하는 사람이다.
가난한 집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의지가 강했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은영이 약을 사가지고, 요구한 서류를 가지고 호텔방으로 가자, 정 사장은 목욕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은영은 민망했다. 호텔방에서 남자와 단 둘이 있는데, 그것도 목욕가운만 입고 쇼파에 앉아 있으니 이상했다. 은영은 서류와 약만 건네주고 바로 나오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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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2)
은영이 일일주식회사에 들어온 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림은 중학교 때부터 남다른 소질을 보여 열심히 했고, 그래서 전공으로 삼았으나, 막상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는 전공을 살려 취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가 어떻게 일일주식회사에 사원으로 들어왔다가 사장 눈에 띄어 비서로 근무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사장 비서는 상당한 힘을 가진다. 임직원들이 비서에게 잘 보여야 편하기 때문에, 비서는 사장 이외의 사람들에게 굽실거릴 이유가 없다.
은영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났다. 그리고 그 여파로 아버지는 감방까지 다녀왔다. 징역을 1년 넘게 살고 나왔다. 은영은 동생 2명과 병든 어머니를 부양해야 할 입장이 되었다. 아버지 옥바라지도 모두 은영의 몫이었다. 이때 만난 사람은 유부남이었다. 은영에게 상당한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에, 은영은 자연스럽게 그 유부남의 애인이 되었다. 은영은 집안 사정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 사람과 연애를 했고,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처음 어느 작은 회사에 취직을 했을 때에도 그 남자는 은영에게 명품 가방이나 옷을 사주고, 돈을 넉넉하게 주어서 회사에서는 은영이 부잣잡 딸이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다.
은영은 유부남과 하면서도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 유부남의 와이프에게 미안한 마음도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그 유부남과 결혼한다는 생각도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냥 답답한 현실에서 남자 친구 정도로 생각하고 나중에 시간이 가면 자연스럽게 헤어질 것으로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은영은 대학교 1학년 때 정말 좋아했던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때 그 남자가 1년 만에 은영의 가까운 여자 친구와 애인이 되면서 은영을 멀리했다. 그때 은영이 받은 충격은 정말 대단했다. 정말 자신이 좋아했고, 순수한 첫사랑이었고, 첫경험이었다.
물론 그 남자친구와 은영의 여자 친구는 그후 헤어졌지만, 은영은 이 일로 인해서 남자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남자로부터 받은 트라우마가 무의식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를 별로 믿지 않게 되었고, 섹스에 대한 관념도 무뎌졌다.
어느 날 일일주식회사의 정 사장과 임원 3명이 일본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은영도 출장자 명단에 끼어 있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여비서가 외국에 업무차 출장을 가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회사에는 영어와 일본어를 잘 하는 직원들이 있었다. 은영은 영어도 못하고, 일본말도 전혀 못했다.
그런데도 일본에 사장 일행과 같이 출장을 간다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은영 입장에서 안 가겠다고 말할 용기도 없었다. 회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비서직에서 일반 직원으로 부서를 옮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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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1)
일일주식회사의 정순탁 사장은 끝까지 버텼다. 자신은 모두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자금관리는 전무이사가 했고, 자금담당임원들이 한 일이다. 자신은 비자금조성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정현은 시간을 가지고 회사자금의 흐름을 파악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충분히 밝혀낼 자신이 있었다. 김현식 부장이 제공한 자료를 기초로 해서 관계공무원들의 인적 사항을 파악하고, 증거확보에 나섰다.
정순탁 사장은 하루 아침에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밤낮 없이 열심히 회사를 위해 일만 해왔는데 왜 갑자기 검찰에서 자신의 회사를 타겟으로 해서 특별수사를 벌이는지 영문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검찰에서 어떻게 자신의 회사의 내부사정을 그렇게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사가 진행되자 대충 감이 잡혔다. 회사를 그만둔 어떤 사람이 회사 내부사정에 관한 자료를 빼내어 검찰에 제보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회사 자금흐름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김현식 경리부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 사장의 심복 중의 심복이다.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다. 월급도 많이 주고, 수시로 데리고 다니면서 격려해주었다. 다른 사람이 다 배신해도 김현식 부장만큼은 절대로 자신을 배반할 사람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투서를 한 것일까?’ 정 사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김 부장!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수사가 시작되었을까? 감이 잡히는 것이 없나?”
“글쎄요. 전혀 모르겠어요. 몇 달 전에 퇴사한 박 이사 소행이 아닐까요? 박 이사가 나갈 때 불만이 많았고, 우리 회사는 언젠가 망할 거라고 악담까지 했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아무튼 김 부장이 잘 알아보고, 이 사건 수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직원들과 상의해서 잘 대처해나가게. 내가 후사할 테니.”
“예. 사장님. 최선을 다해 수사를 막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 사장은 그때부터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정사장은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였다. 당뇨에 고혈압이 있었고, 의사의 말로는 콜레스트롤도 놀고 지방간도 있다고 햇다. 술담배를 더 이상 해서는 안된다는 권고를 받았다. 얼굴도 예전과 달리 검은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오후에는 몸이 나른해서 30분씩 안락의자에 누워 쉬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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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0)
정현은 수사관들과 협의해서, 토요일 오후 시간, 회사 직원들이 대부분 퇴근한 시간을 잡아 현장에 가기로했다. 그래서 디데이를 잡고, 검찰청 봉고차 등을 이용해서 출동했다. 금고문을 열 전문가도 대동하도록 했다. 김현식의 진술을 근거로 해서 내사사건으로 만들어,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았다. 압수수색영장이 없이 압수수색할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검사의 책임 하에 이루어지는 압수수색은 수사의 성패와 직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큰 기업체의 경우에는 압수수색이 실시되면 그 즉시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 기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기업체와 거래하는 금융기관이나 다른 업체에서는 수사를 받는 기업체와 거래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위기에 몰리게 되고 장기화되면 부도까지 이르게 된다.
수사팀은 5시간에 걸친 압수수색과정에서 일일주식회사의 회계장부와 비자금장부 등을 10박스 분량 압수수색했다. 정현은 수사팀들과 밤을 새면서 압수물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정도 수사를 해서 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일주식회사 사장은 회사에서 100억 원이나 되는 비자금을 조성해서 임의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돈의 일부를 가지고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었다.
대부분의 사건에서 그렇듯이 일일주식회사 임직원들은 수사 초기에는 매우 완강한 자세로 범행을 극구 부인했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검사 앞에서 범죄사실을 시인하면, 곧바로 구속되고 회사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된다. 관계공무원들에 대한 뇌물공여사실을 시인하면 그 공무원들도 구속되고 파면된다.
그래서 사업하는 사람들은 검찰에서 수사가 시작되면, 대부분 모든 사실을 부인한다. 비자금조성까지는 쉽게 밝혀진다. 왜냐하면 회사에서 작성하는 공식적인 장부 이외에 비밀리에 별도로 작성하여 관리하는 장부가 압수되면 회사자금의 업무상횡령사실은 곧 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자금의 사용처에 대해서는 그것이 수표로 사용되지 않는 한,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 뇌물 같은 부정한 돈은 대개 현금으로 거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한 거래에 대해서는 영수증 같은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뇌물을 주고 받는 사람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부정한 거래에 대해 특별한 물적 증거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처벌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돈을 준 사람의 자백을 받고, 그에 대한 정황증거를 찾아내면 처벌이 가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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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49)

민첩 아버지는 아무튼 전에 애인 있는 여자를 건드렸다가 죽을 뻔한 다음부터는 유부녀에 대한 노이로제에 걸렸다.

그러면서도 아예 여자를 만날 생각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새로 여자와 연애를 하려고 할 때에는 우선 상대 여자가 정말 혼자 있는 여자인지에 대해 철저한 검증을 했다.

아무리 여자가 겉으로 보아 가정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믿지 않았다. 나이가 젊어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를 만날 때 우선 집부터 알아놓았다.

하지만 어떤 여자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디 살고 있는지부터 꼬치꼬치 캐물으면 남자를 의심하게 된다. 때문에 민첩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여자와 헤어진 다음, 그 여자를 몰래 미행하였다.

그러다 여자에게 들키면 밤에 여자 혼자 집에 돌아가다가 나쁜 치한을 만날까봐 몰래 뒤따라가려고 했던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다.

순진한 여자들은 그 말을 곧이 믿었다. 어느 정도 친해지면 반드시 여자 집안까지 들어가보았다. 혹시 여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지, 결혼은 하지 않았어도 다른 남자가 가끔 왔다갔다 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다.

이렇게 완벽한 검증절차를 거친 다음, 여자가 결혼하지 않았거나, 결혼했어도 이혼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놓고 데이트를 하고 잠자리를 했다.

이런 과정에서 민첩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뒷조사를 하고, 미행하고 개인정보를 알아내는 기술을 습득했다. 민첩 아버지의 경험과 노하우가 같은 집에 사는 아들 민첩에게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전수되어서 그랬는지 나중에 민첩은 흥신소를 차려 사장으로서 성공하게 된다.

민첩 아버지는 결혼하고 민첩을 낳기 전까지는 몸이 비교적 허약한 편에 속했다. 여자를 좋아하는 기질은 선친으로부터 타고나서 그런지 사람들이 말하는 색골이었지만, 몸은 허약해서 성적으로도 혼자 즐기는 편이었지, 상대 여자를 충분히 만족시켜주지는 못했다.

민첩 아버지는 몸으로 때우는 스타일이 아니라, 돈으로 때우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정력이 약했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돈을 많이 씀으로써 여자와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여자들은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남자가 젊고 정력이 강해야 경쟁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민첩 아버지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애써 꼬셨는데, 자신보다 돈을 없지만 젊고 정력이 세고, 헬스장에서 몸을 만든 남자에게 빼앗긴 경험을 몇 차례 한 다음부터는, ‘돈이 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돈 가지고 안 되는 게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만만하게 살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는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여자에 대한 경쟁력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은 할 수가 없었다. 민첩 아버지는 아직까지 조상 대대로 집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족보의 범위내에서는 한 사람도 자살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며 최고의 자부심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 명문의 집안에서 태어난 남자가 여자를 꼬시는 경쟁력이 신체의 허약함 때문에 쉽게 자살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수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옆집에 새로 이사온 사람과 술을 마시는데, 그 사람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술을 무척 많이 마셨기 때문에 정력이 무척 약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뱀을 잡으러 다니는 사람을 알게 되어 그 사람 때문에 몇 달 동안 뱀탕을 먹게 되었다.

그랬더니 그후부터 정력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 남자는 어느 날 갑자기 뱀탕의 영험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실력 발휘를 할 데가 없어 일차적으로 부인에게 했더니 처음에는 부인이 좋아하다가 일년쯤 지나서는 도저히 그 남자를 상대할 수 없다고 가출해버렸다고 한다.

그 남자는 결국 아내와 이혼하고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는데, 그 탁월한 정력 탓으로 여자들이 항상 줄로 서있다고 했다. 오히려 여자들이 돈을 벌어다가 남자를 도와주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핸드폰에서 애인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데, 최소한 다섯명의 여자들이 속옷차림으로 그 남자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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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48)

그리고 동네 사람들 중에 유부녀와 바람을 피고 있는 남자들이 있으면, 그 남자들을 찾아가 며칠씩 술을 사주면서 ‘유부녀의 위험성’과 불륜이 문제되었을 때 남자의 생명은 전쟁이나 쓰나미 때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몇 달 동안 이런 우매한 남자들을 위해서 민첩 아빠가 쓴 술값만 합계 5백만원이 넘는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도 민첩 아빠는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설사 자신이 파산을 하거나 나중에 법원에 개인회생신청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일은 사회 정의와 공공의 안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며, 아픈 경험을 한 자신만이 이 일을 할 적임자라고 믿었다. 민첩 어머니도 신랑이 하는 일이 옳다고 동조했기 때문에 돈 나가는 것을 감수했다.

그런데 아무리 민첩 아빠가 그 남자들을 일깨워주어도, 그 남자들은 소귀에 경읽기였다. 오히려 민첩 아빠에게, ‘당신은 진정한 사랑을 몰라서 그래. 남녀간의 사랑은 이론으로 설명이 안 되는 거야. 우연히 만나서 속정이 들고 어쩌지 못하게 되면, 유부녀든 유부남이든 환경을 극복하고 초월해야 하는 거야. 당신처럼 일신상의 부귀와 영화, 생명 신체상의 안전만 따질 것 같으면 왜 살아?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부터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어머니 뱃속에서 편하게 거주하고 있으면 좋았을 거야. 그리고 당신 같은 겁쟁이는 위대한 사랑을 쟁취할 수 없어. 그냥 혼자 잘 먹고 잘 살아. 죽을 때 후회할 거야.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랑을 한 사람들은 대개 복합적 애정관계, 삼각관계, 결혼과 이혼을 거친 끊임없는 심각한 투쟁을 하고 거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뿐이야. 당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당신한테 술을 얻어먹으면 3년 동안 내가 재수 없을 것 같아. 그러니까 오늘 술값은 내가 낼 거야.“

민첩 아빠는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머리 나쁜 사람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민첩 아빠가 지난 번 건달에게 당한 역사적 사실을 동영상과 녹화를 해놓았더라면 이 우둔한 백성을 깨우쳐줄 수 있었을텐데, 그때는 공황상태라 미처 이런 준비를 못한게 한스러웠다.

이런 진지한 토론을 수십 차례 했지만 남자들은 모두 민첩 아빠와 견해가 달랐고, 철학적 기반도 달랐으며, 성애(性愛)지상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토론의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이런 지저분한 문제로 자꾸 토론을 하다보니 민첩 아빠는 토론에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TV에서 정치평론가나 대학교수, 변호사, 소설가 등이 정치, 경제, 군사, 외교, 검찰수사, 문화, 예술, 스포츠 등의 수만가지 분야에 나와 만물박사인 것처럼 떠들고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을 주고 받는 것을 보면서, ‘아!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박식하고, 논리적이고, 토론을 잘 하는가! 인물도 모두 좋고, 인품도 너무 좋다.’ 이렇게 생각해왔다.

그런데 민첩 아빠가 본격적으로 토론의 무대에 나서서 여러 차례 토론을 해보니까, ‘토론을 잘 하는 사람들은 모두 주둥아리만 가지고 나불대는 놈들이구나! 별로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짧은 시간에 떠들 몇 가지 사항만 준비하고 나와서 떠드는 깊이없고 한심한 인간들이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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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47)

민첩의 이름은 원래 민첩의 아버지가 바람을 피고 첩을 두었기 때문에 민첩 어머니가 신랑이 데리고 있는 첩을 떼어버리기 위해 부적 대신 아들 이름에 ‘첩’자를 넣고, 첩을 없앤다는 의미에서 ‘민’자를 넣은 것이었다.

‘민자 무늬’ 또는 ‘첩을 민다’는 이중적 의미에서 역학자가 지어준 것이 일단 역학자 말대로 첫 번째 첩은 당초 예정한 3년 이내에 떨어져나갔지만, 민첩의 어머니 입장에서는 그 후에도 신랑이 바람을 필까봐 늘 걱정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민첩의 아버지가 사업수완이 좋아서 돈을 잘 벌고 있고, 또한 타고난 성격상 씀씀이가 좋고 남을 배려하는 이타적인 성격이서 특히 불쌍한 여자들에게 잘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민첩 아버지는 젊고 예쁜 여자도 좋아했지만, 나이 들어 사별하고 혼자 사는 여자나 남편에게 두들겨맞고 이혼당한 여자에게도 측은지심이 발동해서 술 사주고 밥 사주는 일을 자주 해서 동네에서 인기가 좋았다.

다만, 민첩 아버지는. ‘절대 유부녀나 애인 있는 여자는 만나지 않는다. 불륜의 여자는 악마고 꽃뱀이고 가시 있는 장미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지난 번 데리고 있던 여자가 혼자 있고, 한번도 결혼하지 않은 숫처녀라고 해서 많은 돈을 들여서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옛애인이라고 자처하는 깡패 건달이 감방에서 튀어나와 주인 행세를 하면서 여자이 얼굴에 염산을 뿌리고, 더 나아가 민첩 아버지를 죽이려고 난리를 친 역사적인 사건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 깨달은 만고의 진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민첩 아버지는, ‘유부녀와 연애를 하느니, 차라리 거세를 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민첩 아버지가 거세까지 할 결연한 남자다운 태도를 보인데 대해서, ‘아무리 그래도 거세하면 남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니까 거세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요새 유행하는 삭발이나 단식을 하는게 어떠냐?’고 적극적으로 만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첩 아버지는 한번 먹은 마음을 돌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남자가 한번 거세한다고 했으면 거세하는 것이지, 치사하게 삭발이나 단식을 하느냐고 더 강력하게 말했다.

민첩 아버지는 삭발은 머리숱이 더 많이 나는 효과가 있고, 단식은 죽지 않으면 다이어트나 대장청소에 아주 효과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일종의 쇼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거세(去勢)는 자신처럼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의 입장에서는 사형 이상의 형벌이고 고통이라고 알기 쉽게 설명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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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⑲
정현은 최 계장을 불러 기초적인 사실을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최 계장은 아주 성실하고 유능한 직원이었다. 수사하는 것을 재미있어 했다. 밤을 새우는 일에도 익숙했다. 두 사람은 함께 일을 많이 해서 호흡이 맞았다. 검사와 수사관은 바늘과 실 같은 관계에 있다. 서로 호흡을 맞추어서 일을 해야만 수사성과가 나온다. 법과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사명감이 투철해야 수사를 할 수 있다. 범죄에 대한 증오감이 넘치지 않으면 절대로 범죄인을 수사할 수 없고 처벌할 수 없다.
정현의 상급자인 부장검사는 일주일이 지난 다음 정현을 불렀다.
“이 사건은 규모가 크고 수사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일단 우리 부 전체가 팀을 짜서 수사를 하기로 했소. 내가 수사팀을 짜줄 테니, 부부장검사를 팀장으로 하고 박검사를 포함해서 모두 3명이 일단 수사를 시작하도록 해요.”
정현은 처음에는 혼자 단독으로 수사를 하다가 다른 검사의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가서 지원을 받으려고 생각했었지만, 부장이 그렇게 결정했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수사팀이 꾸려지고, 모여서 수사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수사팀장 주재로 팀원의 담당 업무를 정하고 곧 바로 본격적인 내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정현은 김현식을 다시 불러 더욱 상세하게 사건의 내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약 보름 정도 지나서 마침내 정현은 일일주식회사에 대한 압수수색을 하기로 결정했다.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았다. 대상은 일일주식회사 사무실과 회장의 자택, 차량 등이었다. 정현이 직접 현장에 나가기로 하고, 수사관 10명을 지원받았다.
현장을 급습해서 압수수색을 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상대가 있는 일이기 때문에 첫째는 보안이 철저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수사기밀이 새면 수사는 수포로 돌아간다. 수사기밀을 유지하는 것은 특별수사에 있어서 핵심이고 요체다. 알파요 오메가다.
또한 압수수색을 하러 갔는데 현장에서 직원들의 저항을 받게 되면 그 시간에 다른 직원들은 증거자료를 빼돌리는 시간을 벌게 된다. 그래서 신속하게 저항을 제압하고 압수수색하는 것이 필요했다. 철저한 준비만이 대책이다. 그리고 훈련된 직원이 필요했다. 압수수색을 많이 해 본 수사관들은 현장에 도착하면 신속하게 필요한 증거자료를 확보한다. 그렇지 않고 서툰 직원은 압수수색을 한다고 요란만 떨지 실제로 결정적인 증거자료는 찾지도 못하고 별로 소득 없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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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⑱
공직사회 내부도 마찬가지다. 라이벌관계에 있는 다른 공무원이 특정 공무원을 물먹게 하기 위해 업자와의 유착관계를 익명으로 투서한다. 그러면 특정 공무원은 검찰의 내사를 받게 되고, 그러다 보면 구속도 되고 파면도 된다. 꼭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내사나 수사 받는 것 자체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 공직사회다.
지방자치단체장을 선거로 뽑다 보니 이런 현상도 두드러졌다. 예전과 달리 자치단체장 역시 낙선된 상대방이 있고, 상대 조직원들이 거미줄처럼 퍼져있다. 그러다 보니 부정과 부패사실이 있으면 가차 없이 상대방측에 들어가게 되고, 이런 약점을 이용해서 당선된 자치단체장에 대해 고발하거나 익명으로 제보를 한다.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을 보면, 시장이나 군수와 같은 지방자치단체장이 부정부패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기사가 많이 나온다. 예전과 달리 시장 군수를 정부에서 임명하는 방식이 아니고, 직선제로 선출하다 보니 이런 역학관계에서 비롯된 제보 때문에 검찰에서 구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장 군수는 선출직 공무원이기 때문에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그 직위를 유지할 수 있다. 일반공무원과 다르다. 그래서 시장이나 군수가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동안 시청이나 군청의 공무원들은 구치소에 가서 결재를 받고 업무협의를 해야 하는 실정이다.
검찰 입장에서는 제보자가 중요한 사람이다. 중요한 수사 단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우 소중하게 대한다. 제보자를 데리고 많은 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특정 분야의 부패실상이 어떤지 공부를 한다.
검사도 수사를 해서 사람을 잡아넣기 위해서는 그때그때 필요한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연구도 해야 한다. 전문가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한다. 그래야 기업범죄, 신종범죄를 수사해서 성과를 낼 수 있다.
정현은 이 사건을 어떻게 하면 수사에 성공할 수 있을까 연구했다. 김현식의 진술과 그가 제출한 자료만으로도 수사단서는 충분하다. 그러나 회사 장부와 비자금이 들어있는 통장을 압수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뇌물죄 부분은 사장이나 회사 관계자들로부터 자백을 받아야 할 사항이었다.
원래 기업체의 비자금 수사는 빠른 시간에 관계 자료를 압수하는 것이 요체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체에서 비밀장부나 컴퓨터 입력자료 등을 모두 빼돌리고, 증거를 은닉하거나 인멸시키기 때문이다. 일단 회사 자금을 다른 용도에 사용한 부분을 찾아 업무상 횡령죄로 입건해 놓고, 그 다음 그러한 비자금의 사용처를 밝힘으로써 공무원에게 흘러간 뇌물을 찾아내는 것이 수사의 프로세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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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⑰
일일주식회사는 연매출액이 500억 원이 넘는 적지 않은 회사였다. 김현식의 주장에 의하면, ‘사장은 납품업체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하였다. 그 비자금으로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었다. 불법으로 공장을 짓고, 중국에 투자를 하면서 환치기를 했다. 여자 비서를 성폭행한 후 오피스텔까지 얻어주고 첩으로 데리고 있다. 다른 여자 직원들을 많이 데리고 놀았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장과 그 부인, 자녀들은 모두 회사 직원이나 거래처 사람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갑질을 계속해왔다는 것이다.
김현식은 5년 동안 경리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사장의 심복이었다. 사장이 믿고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에 사장의 사생활을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회사에서 비자금을 조성한 것이라든가, 공무원들과 만나서 술을 마시거나 돈을 건네준 사실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정현은 김현식에 대해 일단 참고인진술조서를 받았다. 가급적 상세하게 그가 알고 있는 사항에 대해 조서로서 정리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물어보았다. 김현식이 회사 업무를 담당하면서 5년 동안 자신의 컴퓨터에 기록해 놓았던 자료가 있었다. 회사 비밀장부를 복사해서 사본을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는 뇌물을 받은 공무원의 인적 사항 등이었다.
“검사님! 제가 제보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절대로 비밀로 해주세요.”
“물론이지요. 제보자에 대해서는 비밀을 보장합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무려 5시간 가까이 김현식에 대해 기초적인 사항을 확인한 다음 일단 돌려보냈다. 보고서를 작성한 후 부장실로 갔다. 정현은 부장에게 제보 받은 내용을 보고하고 수사에 착수하겠다고 했다. 부장은 기다리라고 했다. 내부적으로 상급자에게 보고한 다음 방침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특별수사는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의 범죄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내부자의 협조에 의해 수사 단서가 포착된다. 내부자는 이런 저런 이유로 회사에 대해 불만을 품고 비리를 수사기관에 제보한다. 공식적으로 이름을 내놓고 고발장이나 진정서를 내기는 곤란하므로 직접 찾아와 제보하는 방식을 택한다.
실제로 다른 사람의 범죄사실이나 비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면 굳이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검사를 찾아가 제보를 하지 않는다. 귀찮은 일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앙심을 품고 있거나 원한이 서려 있는 사람들은 그 상대방에 대한 응징을 하기 위하여 법을 이용한다. 이때 어설프게 해서는 상대방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특별수사부 검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상급관청에 고소장이나 진정서를 내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청와대나 법무부, 대검찰청, 경찰청 등에는 익명의 진정서가 밀려들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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