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53)
명훈은 이런 상황이 자신에게 매우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현을 생각해주는 척 하면서 지현의 어깨에 손을 댔다. 순간 지현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지현은 이 상황에서도 명훈이 자신의 어께에 손을 대주니 고맙고 행복했다. ‘역시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고 있어. 안 그러겠어? 애 아빤데.’
그런데 명훈은 전혀 달랐다. 지현에 대한 애정은 이미 끝났고, 오직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인지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빨리 산부인과에 가서 애를 떼자. 내일 같이 가. 돈은 내가 낼게. 그리고 몸보신하게 200만 원 줄게. 요샌 나도 돈이 별로 없어.”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명자가 갑자기 명훈의 뺨을 연거푸 세게 쳤다. 주먹으로 명훈의 복부를 강타했다. 태권도로 다져진 주먹이라 벽돌 같았다.
명훈은 고꾸라졌다. 명자는 발로 명훈의 배와 허벅지를 몇 번 더 세게 짓밟았다. 명자의 하이힐로 짓밟히니 정말 아팠다. 명훈은 명자의 위력을 느끼고 전혀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잘못 대항했다가는 2대 독자 집안의 대가 끊어질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명훈은 이런 상황에서도 여자로부터 받는 수모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애를 지우지 않고 있는 지현이 미친 여자로 보였다. ‘정말 잘못 걸렸어. 어떻게 하려고 이럴까? 만일 애를 지우지 않고 끝내 낳는다면 어떻게 될까?’
주변 사람들도 구경만 할 뿐 전혀 말리거나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를 때렸다면 말리거나 신고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등치 큰 남자가 체구 작은 여자에게 맞고 있고, 그 옆에는 다른 여자가 울고 있으니, 분명 남자가 여자에게 나쁜 짓을 해서 여자들이 따지고 있는 것이고, 조금만 맞아도 남자는 의도적으로 아픈 척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경만 하고 있으면서도 ‘남자는 나쁜 가해자, 여자는 불쌍한 피해자’로 규정지었다.
“지현씨 잘못했어요. 내가 책임질 게요. 용서해줘요. 미안해요.”
“당신이 뭐를 잘못했는지 말해 봐. 오늘 죽을 줄 알아. 네 애기도 아니라면서, 왜 지금까지 피해 다녔어? 그리고 그 여자는 왜 끼고 돌아다녀? 돈도 없다는 X이 클럽에서 여자하고 놀고 있냐? 이 나쁜 X아! 너 같은 XX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해. 죽어야 해.”
일단 세 사람은 그 다음 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태원의 밤은 어수선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대낮 같이 밝은 빛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도시의 고독을 달래기 위해 혼자서, 또는 일행과 함께 낯선 공간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예전과 달랐다. 남녀가 있어도 꼭 섹스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밤의 분위기를 공유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맥주나 커피를 함께 마시는 것만으로도 욕망은 충족되는 것처럼 보였다. 실존의 허망함, 외로움을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 그 무게를 함께 줄이자는 것뿐이었다.
명훈을 보내고 나서 지현과 명자는 부근에 있는 맥주집으로 갔다. 명자는 술을 시켜 혼자 많이 마셨다. 다만 지현에게는 마시지 말라고 했다. 애 때문에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지현은 걱정 말라고 했다. 절대로 술과 담배는 애 낳기 전까지는 안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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