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53)

명훈은 이런 상황이 자신에게 매우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현을 생각해주는 척 하면서 지현의 어깨에 손을 댔다. 순간 지현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지현은 이 상황에서도 명훈이 자신의 어께에 손을 대주니 고맙고 행복했다. ‘역시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고 있어. 안 그러겠어? 애 아빤데.’

그런데 명훈은 전혀 달랐다. 지현에 대한 애정은 이미 끝났고, 오직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인지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빨리 산부인과에 가서 애를 떼자. 내일 같이 가. 돈은 내가 낼게. 그리고 몸보신하게 200만 원 줄게. 요샌 나도 돈이 별로 없어.”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명자가 갑자기 명훈의 뺨을 연거푸 세게 쳤다. 주먹으로 명훈의 복부를 강타했다. 태권도로 다져진 주먹이라 벽돌 같았다.

명훈은 고꾸라졌다. 명자는 발로 명훈의 배와 허벅지를 몇 번 더 세게 짓밟았다. 명자의 하이힐로 짓밟히니 정말 아팠다. 명훈은 명자의 위력을 느끼고 전혀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잘못 대항했다가는 2대 독자 집안의 대가 끊어질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명훈은 이런 상황에서도 여자로부터 받는 수모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애를 지우지 않고 있는 지현이 미친 여자로 보였다. ‘정말 잘못 걸렸어. 어떻게 하려고 이럴까? 만일 애를 지우지 않고 끝내 낳는다면 어떻게 될까?’

주변 사람들도 구경만 할 뿐 전혀 말리거나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를 때렸다면 말리거나 신고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등치 큰 남자가 체구 작은 여자에게 맞고 있고, 그 옆에는 다른 여자가 울고 있으니, 분명 남자가 여자에게 나쁜 짓을 해서 여자들이 따지고 있는 것이고, 조금만 맞아도 남자는 의도적으로 아픈 척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경만 하고 있으면서도 ‘남자는 나쁜 가해자, 여자는 불쌍한 피해자’로 규정지었다.

“지현씨 잘못했어요. 내가 책임질 게요. 용서해줘요. 미안해요.”
“당신이 뭐를 잘못했는지 말해 봐. 오늘 죽을 줄 알아. 네 애기도 아니라면서, 왜 지금까지 피해 다녔어? 그리고 그 여자는 왜 끼고 돌아다녀? 돈도 없다는 X이 클럽에서 여자하고 놀고 있냐? 이 나쁜 X아! 너 같은 XX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해. 죽어야 해.”

일단 세 사람은 그 다음 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태원의 밤은 어수선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대낮 같이 밝은 빛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도시의 고독을 달래기 위해 혼자서, 또는 일행과 함께 낯선 공간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예전과 달랐다. 남녀가 있어도 꼭 섹스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밤의 분위기를 공유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맥주나 커피를 함께 마시는 것만으로도 욕망은 충족되는 것처럼 보였다. 실존의 허망함, 외로움을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 그 무게를 함께 줄이자는 것뿐이었다.

명훈을 보내고 나서 지현과 명자는 부근에 있는 맥주집으로 갔다. 명자는 술을 시켜 혼자 많이 마셨다. 다만 지현에게는 마시지 말라고 했다. 애 때문에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지현은 걱정 말라고 했다. 절대로 술과 담배는 애 낳기 전까지는 안 한다고 했다.



117. 이혼한 다음, 건달만 만나는 운명인 슬픈 여자

 

부부간에 싸움을 오래 하다 보면 상대방의 말이 점점 비위에 거슬리게 되고, 미워지기 시작한다. 똑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싸우게 되면 감정이 나빠지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상대방의 얼굴이 동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다가 큰 일이 벌어진다. 어느 한쪽이 빨리 수그러들지 않으면 끝장을 보게 된다. 물건을 집어 던지고, 폭행을 가하고, 머리카락을 뽑는다. 극도로 흥분하면 이성을 잃고 야구방망이나 부엌칼을 휘두른다. 급소에 맞으면 죽기도 한다.

 

한쪽은 죽고 한쪽은 징역을 산다.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한 집안이 순식간에 풍지박살난다. 가끔 부부싸움을 하다가 살인을 저지르는 기사가 나기도 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부부싸움을 할 때 조심해야 한다. 사람의 감정은 어느 한 순간에 폭발할 수 있다. 흥분하면 이성을 잃어버린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싸우더라도 상대방이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즉시 항복하거나 피해야 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다.

 

이혼을 하면 될 것을 폭행, 살인, 가재도구파손 등의 야만적인 행동을 하면 나중에 엄청난 후회를 한다.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한계를 가지고 싸워야 한다. 아내를 상습적으로 폭행하는 남편이 아내를 실컷 두들겨 팬 다음 술을 마시고 잠을 자다가 아내에 의해 살해당하는 불행한 사건도 종종 일어난다.

 

결국 미경은 10년 만에 이혼을 하고 말았다. 그것도 건달이 쉽게 협의이혼을 해주지 않는 바람에 변호사를 선임해서 겨우 이혼판결을 받았다. 이혼하면서 그때까지 번 돈 절반도 빼앗기고 말았다.

 

미경은 너무 억울했다. 그때 보니 법도 법이 아니었다.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남자를 잘못 만나서 10년 간 고생했는데, 무엇 때문에 재산을 반이나 빼앗기고, 이혼녀로 낙인 찍혀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혼소송을 하면서 느낀 것은 판사들은 남의 아픈 마음을 전혀 헤아릴 의사가 없는 것 같았다. 기계적으로 재판하고, 여자가 고생해서 번 돈과 남자가 번 돈을 아주 똑 같은 잣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미경은 이혼한 다음, 한 동안은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미용실에 단골로 오는 남자 손님들도 이상하게 싫어졌다. 마지못해 남자 미용을 해주어도 속으로는 남자라는 동물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이 일었다.

 

그러다가 1년이 지나자 미경은 옛날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새로운 남자를 만났다. 이상하게 거친 스타일의 남자에게 빠졌다. 미경이 넘어가는 남자들은 대개 이랬다. 돈도 없고 사회적 능력은 없는데, 의리 있는 것처럼 보이면 호감이 갔다.

 

여자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 같은 남자, 머릿속은 비어 있는데 술을 마시면 눈물을 흘리는 남자, 여자가 속상해 하면 끝까지 옆에 있어주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는 남자, 운동을 좋아해서 근육이 튼튼한 남자, 골프에 빠진 남자, 노래방에 가서 애절한 노래를 감정을 실어 혼자 심취해 부르는 남자를 좋아했다.

 

그 대신 정치 이야기만 하는 남자, 종교에 심취해 있는 남자, 돈의 노예가 되어 죽을 때 돈을 가지고 가려는 남자, 운동을 너무 하지 않아서 지하철 계단을 빨리 오르지 못하는 남자는 싫어했다.

 

그래서 이혼한 다음에도 대체로 그런 스타일의 남자를 만났다. 하지만 전생에 무슨 잘못을 많이 했는지, 만나는 남자마다 시간이 지나면 실망스럽고 미경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자해를 했다. 물건을 집어던지고 때려 부쉈다.

 

그런 남자들은 법도 소용이 없었다. 성질대로 살고, 잘못되면 감방에 가도 좋다는 배짱이었다. 미경은 쉽게 그런 남자들을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 미용실을 크게 하고 있는 공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이혼한 다음에는 더욱 그랬다. 남자 때문에 사회적으로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개 몇 달 사귀다 헤어졌다. 그리고 한 동안은 굳게 결심을 하고 죽을 때까지 남자 친구를 두지 않기로 했다. 몇 번이고 다짐했다. ‘앞으로 한 번 더 애인을 두면 내 성을 갈겠다.’

 

미경은 언젠가 사주역학을 잘 보는 사람에게 찾아갔다. 가까운 여자 친구와 둘이서 사주관상을 봐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용하다는 역학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전생에 남의 첩으로 살았어. 그때 자네 때문에 본처가 제명에 못 죽었어. 그래서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거야.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들이 다 놈팽이고, 건달이었을 거야. 그렇지? 뻔해. 내 눈은 못 속여.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놈들만 나타날 거야. 조심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제명에 못 죽어.”

 

미경은 놀랐다. 지금까지 여러 사람을 만나서 자신의 사주와 관상, 과거와 미래에 대해 물어보고 들어보았지만 지금처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정확하게 진단하고 맞추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남자를 만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냥 평생을 혼자 살아야 해요?”

 

역학자는 잠시 눈을 감고 무엇을 따져보는 듯 했다. 미경의 일행을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다. 한 30분 정도 역학자는 방안에서 혼자서 큰 소리로 기도를 하는 것 같았다. 딸랑거리는 소리도 나고, 무언가 부르짖는 소리도 들렸다. 그런 다음 미경을 들어오라고 했다.

 

“금년 가을에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자네하고 잘 맞아. 그 사람을 놓치면 안 돼. 잘 잡아. 그 사람은 책을 많이 보고 공부를 많이 한 남자야.”

 

미경은 이 말이 뇌리 속에 박혔다. ‘금년 가을. 많이 배운 남자!’ 무언가 운명의 기적소리가 들리고, 백마 탄 왕자가 몸을 단정하게 한 공주를 찾아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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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2)

그러다가 어느 날 마침내 이태원 클럽에서 명훈을 발견했다. 명훈은 제니와 단 둘이서 테이블에 앉자있었다. 두 사람은 너무 다정해보였다. 한눈에 봐도 연인이었다. 그 클럽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한쌍의 환상이었다. 호수에 떠있는 백조와 물가에 있는 공작이었다.

“오랫만이야. 오빠!”
“아니. 여기는 어쩐 일이야?”
“앉아도 될까요?”

명훈은 지현과 그 일행인 명자를 보자, 얼굴이 굳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가자. 여기서.”
“잠깐 나 좀 봐요. 그럼 밖에 나가서 이야기해요.”
명훈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계산은 제니가 하는 것 같았다.
“이 봐요. 명훈씨는 내 아이 아빠예요. 알았어요.”

클럽에서 나가는 명훈을 명자가 뒤쫓아가서 붙잡았다. 벨트를 붙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웨이터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여자가 남자를 붙잡으니 별 일이 없을 것으로 알고 내버려두었다.

지현은 제니에게 자신이 명훈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간단히 말하고 명훈이 있는 곳으로 갔다. 제니는 이런 상황을 보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곧 바로 클럽을 나가버렸다. 지현와 명자, 그리고 명훈은 부근에 있는 카페로 갔다.

“오빠. 왜 전화도 차단하고 연락을 안 했어? 그동안 잘 지냈어?”
“우리 사이는 다 끝났잖아? 무슨 할 말이 있어? 나 지금 바빠. 여자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 가 봐야 해. 다음에 봐.”

명훈이 일어나려고 했다. 명자가 격해졌다. 갑자기 탁자를 세게 쳤다. 그리고 두 주먹을 쥐었다. 마치 격투기를 하려는 자세처럼.

“아니. 이 봐요. 내 친구가 당신 아이를 낳으려고 하고 있어. 그런데 지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어떻게 책임질 거야? 당신 부모에게 연락해. 지금 같이 가서 만나.”

“이 여자 아이가 내 애라는 걸 어떻게 알아? 증거를 대봐. 이 여자는 수없이 많은 남자와 잠을 잔 거 내가 알아. 워낙 남자를 밝혔어. 나하고 할 때도 혼자 좋아서 몇 번씩이나 해달라고 했어. 아주 지저분한 창녀야.”
“이 미친 XX.”

갑자기 명자가 명훈의 뺨을 세게 쳤다. 맨날 술이나 먹고 여자를 밝혀서 몸이 약해져서 그런지 명훈의 코에서 피가 났다 시커먼 죽은 피였다. 영혼이 썩었으니 코피도 선혈이 아니고 더러운 검은 피였다.

“야 이 나쁜 XX 봤나? 너 빨리 부모에게 전화해. 지금 만나러 가게.”
명자는 명훈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명훈이 달려들었다. 명자는 순식간에 명훈을 때려 굴복시켰다. 명훈이 무척 아픈 표정으로 다시 앉았다. 오랜 실강이 끝에 명훈은 자신의 어머니를 바꾸어주었다.

“엄마, 잠깐만요. 전화 바꿔줄게.”
“여보세요. 저는 명훈이 아이를 가진 사람입니다. 벌써 5개월째에요. 아이를 낳는 문제를 상의드리려고요. 만나주세요.”
“아니 무슨 말이예요. 도대체. 명훈이가 몇 살인데 아이를 가져요?”
“정말이예요. 제 연락처를 남길테니 나중에 전화해주세요. 부탁입니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지현은 울음이 북받쳐 더 이상 전화를 하지 못하고 끊었다. 명훈 엄마는 계속해서 명훈에게 전화를 했으나, 명훈은 명자가 무서워서 엄마의 전화를 더 이상 받지 못했다.

“오빠. 나는 오빠만 사랑해. 아이를 낳아서 열심히 키울게. 오빠는 대학교 졸업하고 내 곁으로 와. 그동안은 내가 혼자서 낳아서 잘 키울테니까. 오빠 알지? 내가 얼마나 오빠를 사랑하는지?”
“정말 왜 이래? 내 애기도 아닌 걸 가지고 이렇게 나를 괴롭히고, 공갈치고, 내가 가만 있지 않을 거야. 당신들 공갈범이야 경찰에 신고할 거야.”
“오빠 그러지마 오빠가 다 알고 있잖아. 나하고 잘 때 나만 사랑한다고 말했잖아?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했을 때 너무 좋아했잖아? 그리고 낳아서 잘 키우자고 수없이 맹세했잖아?”

지현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현은 혼자 이렇게 생각하고 수없이 되풀이해서 자신을 세뇌시겼기 때문에 적어도 지현에게는 이 말들이 진실이었다. 명훈이 그런 말을 했던 안 했든간에.

명훈은 지현이 울면서 매달리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정말 내가 재수 없이 악질을 만났구나! 큰일 났네! 제니도 잃어버리게 생겼어. 아빠도 난리를 칠 거고. 이걸 어쩌지?’



작은 운명 (51)

지현의 친구인 명자의 태권도 실력은 대단하다. 겉보기에는 연약한 여자같지만, 오랫동안 태권도를 갈고 닦아서 막상 힘이 필요할 때 기술을 사용하면 상대는 꼼짝 못한다.

명자는 지하철에서 자신의 엉덩이를 비비고 있던 중년의 남자를 팔목을 비틀어 인대를 늘어나게 하고, 곧 바로 다음 정거장에서 그 남자를 끌고나와 급소를 무릎으로 차서 초죽음상태로 만든 일도 있었다.

그런 다음 잘못했다고 비는 그 남자를 앞으로는 사람을 똑바로 보고 비비라고 훈계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 남자는 너무 센 여자를 잘못 건드리다가 태권도 맛을 보고 혼이 나서 치료비를 받아낼 생각은 엄두도 못내고 그 길로 재빨리 도망쳤다.

친한 친구인 지현으로부터 억울하고 딱한 사정을 듣자, 명자는 마치 자기 일처럼 흥분했다.
“그런 나쁜 XX를 봤나? 내가 만나서 손을 봐줘야겠다.”
“아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내 아이 아빠야. 절대로 다치게 하면 안 돼.”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냐? 바보 같은 지지배야.”
“일단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해. 그리고 만나서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줘야 해. 또 아이를 낳는 문제를 상의해야 해. 그 사람 부모도 만나서 인사도 드려야 하고.”
“근데 몇 달 동안 연락도 하지 않고, 전화도 차단해 놓은 사람이 만난다고 책임질까?”
“아냐. 나는 그 사람을 믿어. 그 사람은 나를 속으로 많이 사랑하고 있어. 더군다나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내게로 돌아올 거야. 너도 만나보면 알아. 얼마나 진실한 사람인 줄... 남자는 젊었을 때는 누구나 일시적으로 방황하는 거야. 나는 이해해. 하지만 아이 아빠가 되면 누구나 달라져. 달라질 수밖에 없어. 사랑하는 아이 아빠가 되니까.”

이 말을 하면서 지현은 많이 울었다. 소리 내면서 울었다. 많은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명자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은 지금까지 이렇게 한 남자를 사랑해 본 적도 없었다.

명자는 생각했다.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지현이 이렇게 사랑하고 아이까지 가졌으니 만나서 서로 좋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명자는 지현과 명훈이 다니는 대학교에 찾아갔다. 그러나 학교에 가서는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더 이상의 정보를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현으로부터 명훈이가 이태원에 있는 클럽을 자주 다닌다는 말을 듣고 이태원에 있는 클럽을 샅샅이 뒤지기로 했다.

클럽은 보통 주말에만 영업을 한다. 금요일 밤과 토요일 밤에만 문을 연다. 그래서 이곳 저곳을 주말에 돌아다녔다.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들어가서 몇 바퀴 돌고 나오는 식이었다.

116. 여자 태권도 유단자에게 발차기로 급소를 맞고 기절한 남자

 

부부싸움은 전혀 다르다. 우선 남자와 여자의 싸움이다. 남자와 여자는 신체적으로 힘의 차이가 현저하다. 태권도나 레슬링 여자 선수의 경우에는 거꾸로 부인이 남편보다 싸움을 잘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주 예외다.

 

전에 어떤 남자가 머리가 좋아 공부만 했다. 운동을 싫어하는 이 남자는 공무원이 되었는데, 술을 마시면 주사(酒邪)가 심했다. 마흔 살이 넘어서 어떤 젊은 여자를 만나 연애를 했다. 결혼은 하지 않고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여자는 서른 살이었는데, 몸매가 날씬하고 얼굴도 예뻤다.

 

공무원은 뇌물을 좋아해서 업자들로부터 술집에 가서 향응을 받고 이차로 성접대를 받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남자는 성병에 걸리고, 동거녀에게도 성병을 옮기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여자가 이 문제를 따지자, 남자는 잔머리를 굴려서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면서 여자에게 뒤집어씌웠다.

 

“나는 술집에 아무리 돌아다녀도, 여자와 성관계는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야. 그건 우리 직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 내가 술집 여자와 그 짓이나 하고 돌아다니면, 지금 이 좋은 자리에 붙어있을 수가 없는 세상이야.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한테 그런 성병을 내 책임으로 돌리는 당신은 사람도 아니야. 당신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성경도 안 읽었어? 성경에도 나오잖아!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몰래 따먹고, 벌거벗은 것이 부끄럽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추궁을 당하자, 여자인 이브는 뱀이 자신을 꾀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서 먹게되었다고 핑계를 대잖아! 당신은 뱀보다 더 거짓말을 잘하는 여자야.”

 

이 말은 들은 여자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다. 그렇잖아도 겉으로는 최고 청렴한 것처럼 내숭을 떨면서, 맨날 업자들과 술집을 전전하고 뇌물이나 받아다가 흥청망청 쓰는 위선자 주제에, 성병을 걸려가지고 와서 그것도 모르고 같이 사는 여자에게 옮겨놓았으면 미안하다고 할 일이지, 뻔뻔하게 뻔한 사실을 무고하고 순진한 자신에게 뒤집어씌우고, 게다가 평소에는 읽지도 않는 성경 이야기를 가지고 자신을 뱀에 비유하고 있으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갑자기 일어나 남자의 급소를 오른발로 찼다. 남자는 한번 맞고 기절하면서 쓰러졌다. 여자는 평소 익힌대로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여 남자의 의식을 되찾게했다. 남자가 의식을 회복하자 냉수를 한바가지 떠다가 남자의 얼굴에 부어버렸다. 남자는 놀랐다.

 

나중에 물어보니, 여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태권도를 연마하여 태권도 3단의 유단자였다. 그런 사실을 철저하게 숨겼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술을 잘한다고 하면 공부만 하던 실력 있는 남자들이 무서워서 만나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겉으로 연약해 보이는 여자의 한 방에 정신을 잃었던 남자는 그 후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앞으로는 그 여자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하는 각서를 써주었다. 그리고 밖에서 다른 여자와 관계를 할 때에도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반드시 콘돔을 사용하거나 상대 여자에게 성병 유무를 정확하게 확인하고 안전한 상태에서 성관계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 경우이고, 보통은 힘이 센 남자와 힘이 약한 여자가 싸우는 부부싸움은 여자에게 매우 불리한 게임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여자가 많이 폭행을 당한다.

 

요새는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으로 폭력을 행사한 남자는 법에 의해 엄중하게 다루어진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주먹이 법보다 가깝다”는 원리 때문에 일단 두들겨 맞아 다치거나 죽으면 여자만 손해다.

 

게다가 한 사람은 주고, 한 사람은 감방에 가서 썩고 있으면, 아무 죄 없는 어린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가? 전쟁이 나서 고아가 되는 경우도 억울하지만, 이건 전쟁도 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고아가 되고 결손가정에 되는 것이다.

 

부부가 싸우는 경우 제일 중요한 문제는 두 사람만이 있는 장소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보통 싸움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벌어지므로 제3자가 말리는 경우가 많다. 술집에서도 그렇고 길거리에서 싸우는 경우도 그렇다.

 

집 안에서 싸우는 부부싸움은 아무도 말려줄 사람이 없다. 꽤 장시간 싸움이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 성격이 유난히 지저분하고 더러운 남자는 밤새도록 잔소리를 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48시간 동안 여자를 잠을 못 자게 만든다. 형사소송법에 긴급체포한 다음 구속영장을 쳐야 하는 시간이 48시간인 것을 어떻게 알고 그런 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상대로 철야신문을 하고 잠을 안 재우는 가혹행위를 한다. 검사가 피의자에게 이런 범죄행위를 하면 즉시 파면되거나 형사처벌된다. 그런데 집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행위인지, 불법행위인지 모르는 것이다. 알면서 짓는 죄보다 본인이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고 무섭다.

 

학교폭력사건을 보면 그렇다. 어린 아이들이 자신들이 행위가 얼마나 피해자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며,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냥 폭력을 행사하고, 괴롭히고 왕따를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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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연상의 미용실 원장과 결혼한 남자의 의처증이 심해지다

 

강 교수가 연구 주제로 삼은 것은, ① 여자를 선별하는 방법, ② 성관계를 할 때 주의사항, ③ 자신의 방어차원에서의 증거 확보 및 인멸방법, ④ 여자가 물고늘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 ⑤ 악질 여자가 고소할 때 대응방안, ⑥ 바람을 피더라도 가정을 지키는 방법, ⑦ 혼외정사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법, ⑧ 유부녀인지 확인하는 방법, ⑨ 성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 ⑩ 효율적인 피임방법 등이었다.

 

강 교수는 이러한 열 가지 방법에 대해 앞으로 6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연구를 하기로 했다. 먼저 관련 자료를 수집하였다. 인터넷을 통해 검색하고, 그 다음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 가서 논문과 책을 열람했다.

 

모든 연구과정은 철저하게 비밀로 하기로 했다. 만일 부인 정혜나, 강 교수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었다.

 

이럴 때 누군가 한 사람이 공동으로 연구작업에 참여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식수준이 괜찮은 여자가 같이 연구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이런 작업에 참여할 것인가? 돈을 많이 주면 몰라도,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문제는 작업을 해나가면서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강 교수는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교에서 개설한 최고경영자과정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과정은 6개월 코스인데, 지역 사회에서 돈 있고 괜찮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남자와 여자가 섞여있는데, 여자들 역시 비즈니스를 하거나 사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최고경영자과정은 학문적으로 연구를 하거나 공부를 한다기 보다는 사교모임 비슷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 들어온 선미경 사장이 있었다. 강 교수는 45살이었고, 선미경 사장은 50살이었다. 미경은 미용실 원장이었다. 5살 연상이었지만, 미용사로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외모나 몸매는 거의 연예인 수준이었다.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 골프도 잘 쳤다. 이혼하고 혼자 산다는 소문도 있었다. 강 교수가 먼저 선 사장에게 집적거렸다. 미경은 가방끈이 짧아서 그랬는지, 대학 교수라고 하니까 무조건 좋아했다.

 

미경은 이혼한 전 남편도 건달이었고, 그 후 만난 몇 명의 남자들도 모두 건달들이었다. 미용사로서 돈을 벌고 있으니까, 처음 남편도 부인에게 기대는 마음 때문에 그랬는지, 골프나 치러다니고, 하는 사업마다 손해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잘 나가는 부인을 두고 있는 처지에 느는 것은 폭력과 의처증이었다. 전 남편은 술이나 마시고, 와이프 뒷조사나 하러 다녔다.

 

의처증은 참 무서운 질병이다. 남편은 심한 콤플렉스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미경을 의심했다. 새 옷을 사가지고 들어오면, 어떤 남자가 사준 것이냐고 밤새도록 들볶았다. 미경이 자신의 신용카드로 긁은 것이라고 영수증을 보여줘도 소용없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그 남자가 자신의 카드로 사줬겠어? 당연히 당신 카드로 긁게 하고, 그 대신 현금으로 당신 주었겠지.’ 그러면서 핸드폰 통화기록을 확인하였다. ‘분명히 여러 차례 통화를 했겠지? 카톡도 했을 거야. 내가 볼까 봐 집에 들어오기 전에 다 지웠을 거야? 누군가 말해! 그 남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야? 아니면 잠자리를 나 보다 잘 해?’

 

이러면서 수사관처럼 밤새도록 신문을 하면, 미경은 그 다음 날 피곤해서 일을 제대로 못했다. 맞기도 많이 맞았다. 의처증이 심해지면,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프로세스다. 부부 사이의 폭력은 폐쇄된 공간에서 시간의 제한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보통 싸움은 밖에서 이루어지고,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경우가 많다. 싸움이 벌어지면, 자연히 구경꾼이 모이게 된다. 남들이 싸우는 것을 보는 것처럼 재미있는 일은 없다. 사람들은 묘한 심리를 가지고 있다.

 

싸움 구경하는 것, 불구경 하는 것, 교통사고 나서 부서진 자동차를 보는 것, 다른 사람이 사업하다 망했다는 소식을 듣는 것, 정치인이 잘난 척하다가 감방에 들어가는 장면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사회 저명인사가 위선을 떨다가 가면이 벗겨지고 추락하는 것을 보는 것, 바람둥이가 암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연예인이 재벌 2세에게 시집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쫓겨나오는 것을 보면 신이 나서 생맥주를 10잔 들이킨다. 동네 치킨집도 불이 난다. 아주 좋아하고, 쾌감을 느끼고 즐긴다. 자신의 작은 행복보다 더 큰 위안을 주고, 기쁨을 준다.

 

밖에서 싸움을 하면 대부분 말리는 사람이 있게 되고, 더 싸움이 계속되면 누군가 경찰에 112신고를 하게 된다. 그래서 싸움은 끝이 나고, 더 이상 피해는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데 부부싸움은 다르다. 말리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만일 한쪽이 수그러들지 않고 죽기 살기로 대들면 싸움은 계속되고, 자칫 잘못하면 대형사고가 날 수 있다.

 

신문을 보면, 부부싸움을 하다가 남편이 아내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홧김에 집에 불을 지르기도 한다. 전쟁에서 한쪽은 탱크를 밀고 오는데 소총을 들고 저항하는 경우가 있다. 퇴각로가 끊기면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다. 소총을 든 병사는 용기와 애국심이 있는 영웅이지만 탱크에 깔려 목숨을 잃는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약한 자가 죽는 것이 전쟁의 원리다.

 

복싱이나 K-1 격투기에서는 체중을 달아 보고 체급을 정한다. 상대방 전력을 파악하여 어느 정도 게임이 돼야 시합을 한다. 완전히 균형이 깨지는 싸움은 처음부터 붙이지도 않는다. 붙여 보아야 즉시 KO를 당하거나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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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49)

한편 명훈은 지현으로부터 전화가 와도 바쁘다는 핑계로 받지 않고, 문자로만 답을 했다. 당분간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취업준비를 해야 하니,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그럼에도 지현이 계속해서, 하루에도 서너번씩 장문의 문자를 보내니 미칠 지경이었다.

지현은 명훈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 어떤 반응을 보이든, 일방적으로 ‘명훈씨! 정말 사랑해요. 죽을 때까지 나만 사랑해줘요. 아이는 건강하게 뱃속에서 잘 놀고 있어요. 꼭 명훈씨를 닮은 아이가 나올 거예요. 공부 열심히 하세요. 건강 잘 챙기고요.’라는 취지의 문자를 계속해서 보냈다.

그리고 가끔은 자신의 배를 사진으로 찍어 아이가 그 안에 있음을 확인시켜주려고 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배가 조금씩 나온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명훈은 괴로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명훈은 지현이 아주 나쁜 여자로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밖에 안 나온 주제에, 집안도 형편없고, 얼굴도 못생긴 여자가, 몇 번 관계를 한 것을 가지고, 몰래 아이를 가지고, 완전히 어린 나를 협박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어디서 들어본 꽃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시간이 가면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하기도 싫고, 단지 지현이 문자만 보면 징그럽고 소름이 끼쳤다.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하다가도 지현이 생각이 떠오르면 성욕도 떨어질 정도였다.

명훈 생각으로는 자기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었다. 그냥 우연히 만나서 젊은 사람들이 쿨하게 섹스를 하고 같이 즐겼으면, 그만이지 도대체 아무 조건도 맞지 않는 여자가 무슨 사랑을 운운하며 끝까지 달라붙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명훈 주변에도 이런 스토리를 듣도 보고 못했던 이야기다.

옛날 영화나 조선시대 사극에서나 나오는 가상의 픽션 아니고는 이런 여자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견디다 못한 명훈은 지현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카톡이나 문자도 못하게 막았다. 그렇게 연락을 끊고 상대를 하지 않으면, 지현이 스스로 알아서 명훈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아이도 지울 것으로 생각했다.

명훈은 이런 상황에서 지현의 전화를 차단하고, 새로 만난 제니와 깊은 관계에 빠졌다. 자주 만나 데이트를 하고, 열심히 섹스를 했다. 두 사람은 가끔 이태원에 있는 단골 클럽에 가서 놀았다. 클럽의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명훈과 제니는 서로 약속했다. 모든 과거는 잊어버리고, 서로 두 사람만 만나자고 했다.

명훈은 제니를 자신의 부모에게 데리고 가서 같이 식사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집안의 환경이나 조건도 서로 맞는 것 같았다. 명훈은 제니에게 고급 명품도 선물을 했다.

구체적으로 속사정을 알게 되면 실망할 부분도 많이 있었고, 더군다나 명훈과 지현과의 관계 등 개인적인 사생활을 정확하게 알면 절대로 결혼이나 계속된 교제를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대부분은 비밀이었고, 굳이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할 고지의무도 없었기 때문에 알려주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상을 보면 별것도 없는 것이었다. 명훈은 성적으로 무질서하고, 바람둥이고, 대학생으로서 공부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집에 돈이 많다는 이유로 사치나 하고, 낭비나 하고, 여자들과 섹스나 하고 돌아다니는 비인격자였다.

제니 역시 수많은 남자와 섹스를 하고 돌아다니는 불성실한 여자였다. 그리고 양쪽 부모 역시 파탄이 난 상태로 가정은 화목하지 않고 불화만 가득 찬 상태였다. 오직 돈만 있을 뿐이었다. 


작은 운명 (48)

지현은 혼자 생각에 이렇게 헌신적으로 사랑할 각오를 가진 자신과 결혼하면 명훈도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지현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여자보다도 명훈에게 잘 하고, 명훈을 행복하게 만들고, 내조를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물론 지현이 명훈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하고, 나이도 명훈보다 5살이나 많았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런 장애가 될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도대체 요새가 어떤 세상인데, 연상 여자와 결혼하는 커플이 얼마나 많은가?

더군다가 여자는 이혼해서 아이까지 있는데, 남자는 초혼이다. 이혼한 여자가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잘 생기고 능력있는 미혼의 남자와 결혼해서 아주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다.

그런데 지현이 명훈보다 5살 많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여자가 남자보다 나이가 많으면, 집안일도 잘 하고, 세상사는 지혜가 있어 남자를 더 잘 보살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지현은 남녀 사이에서는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새는 국경을 넘는 사랑도 숱하게 있지 않은가? 한국 남자들이 베트남 여자와 결혼하고, 필리핀 여자와 결혼하고, 심지어 아프리카에서도 한국인과 결혼해서 많은 언어의 장애, 신체상의 차이를 극복하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 아닌가?

지현은 때로 고민도 했다. 명훈은 대학교를 다니고 있고, 집안도 돈이 많다. 말하자만 서울에서 상류층에 속한다. 명훈은 금수저다. 그런데 지현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매우 초라한 서민이다. 집안도 내세울 게 전혀 없다.

그렇다고 지현이 탤런트처럼 미모를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다. 대학을 졸업한 것도 아니다.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장래가 유망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운전면허증 빼고는 특별한 자격증도 없다. 그런데 과연 이런 처지에서 명훈과 결혼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도 보면 재벌 회장집 자녀들이 아주 빈곤한 가정에서 사위와 며느리를 데려다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학력이 낮은 탤런트도 고학력의 교수나 판검사와 결혼하는 세상이다. 교통사고를 낸 재벌 아들이 사고를 당한 피해자를 동정하다가 결혼까지 하는 사례도 있다.

사랑과 결혼에 있어서 학력이 무슨 문제인가? 결혼해서 애 낳고 남편 뒷바라지 하는 데는 영어나 수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배운 ‘가정’과목만으로 충분하다. 사실 너무 많이 배운 여자들은 잘난 체나 하고, 남편에게 잘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요리는 앞으로 학원에 다니면 된다. 바느질은 이제 할 세상이 아니다. 자녀를 교육시키는 것은 유치원부터 학원에 열심히 데리고 다니면 선생님들의 몫이다.

지현은 지금 아이를 뱃속에 가지고 있다. 태아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아이가 유산될까봐 매우 조심하고 있다. 그렇지만 카페 아르바이트 일은 계속하지 않으면 당장 월세를 내기 어려워서 어쩔 수 없다.

명훈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 싶지만,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다. 그러면서 지현은 매일 명훈에게 편지를 써서 핸폰으로 보냈다. 사랑한다고, 그리고 아이를 잘 케어하고 있다고, 평생 잘 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지현은 지현대로 일방적으로 명훈만 짝사랑하고, 뱃속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명훈과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아르바이트 일도 했다. 오직 명훈만을 생각하면서 다른 남자들은 일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불행했던 과거는 모두 깨끗이 잊기로 했다. 새사람이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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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47)

지현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명훈은 어느 부잣집 딸을 만나서 사귀게 되었다. 이태원에 있는 클럽에 놀러갔다가 제니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를 만났다. 제니는 뛰어난 미모에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음대생이었다.

제니 아버지는 부동산 투기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수도권에서 원주민으로 살면서 개발붐을 타고 싼 농지와 임야를 사서 그린벨트지역에서 해제되면 엄청나게 높은 가격으로 팔았다.

그래서 재산을 300억원 정도 모았다. 이른바 부동산으로 때돈을 번 졸부였다. 집에 외제차가 세대나 되었다. 돈을 많이 벌자 서울의 고급빌라로 이사를 왔다. 영숙은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그래서 비싼 렛슨비를 들여서 바이올린을 시켰다.

제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착실하게 생활하고 남자를 전혀 모르고 지냈다.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와서 친구들과 클럽을 다니면서 달라졌다. 서울에는 젊은 사람들이 가서 노는 클럽이 있다.

주로 20대와 30대 초반의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다. 클럽에서는 소개팅이 이루어지고, 자연스럽게 둘이 만나 모텔로 간다. 아무 조건 없이 섹스를 하고 헤어진다. 마음에 들면 또 만날 약속을 한다.

아주 쿨하게, 아무 조건 없이 처음 만나 섹스를 하고,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닌 관계가 된다. 돈이 있는 아이들도 많지만, 돈이 없는 아이들도 많이 온다.

술값이 비싸지만 대체로 소개팅으로 만나 합석한 남자가 전체 술값을 내기 때문에 여자들은 외모만 받쳐주면 공짜로 즐길 수 있다. 가끔은 거꾸로 남자들이 여자들 테이블에 와서 합석을 하고 돈을 낼 것처럼 하다가 그냥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때 여자들은 공짜로 술을 마시고 놀려고 하다가 날벼락을 맞는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성적으로 문란한 젊은 남녀가 성교를 하기 때문에 이상한 성병에 감염되기도 하고, 제비족이나 꽃뱀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명훈은 첫날에는 제니와 단지 술만 마시고 헤어졌다. 그러면서 명훈은 제니에게 자신이 돈이 많은 집 아들이고, 고급 외제차와 원룸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했다. 제니도 이런 명훈의 태도가 싫지 않았다. 그리고 매너를 깨끗하게 보여주자 다음에 또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두 사람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한편 지현은 시간이 가면서 명훈을 사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명훈의 아이를 갖게 되고, 명훈이 잘 생겼고, 부잣집 아들이며, 여자에게 따뜻한 매너와 좋은 성격으 가지고 있는 것을 알면서 완전히 빠져들었다.

이제 지현은 명훈 이외의 다른 남자는 절대로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적으로 일방적인 사랑이었고, 외눈박이 사랑이었다.

그리고 명훈과 결혼하게 되면 평생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살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명훈 아버지가 능력이 있고, 돈을 잘 벌고 있을 뿐 아니라, 명훈에게는 돈을 아끼지 않고 쓸 정도로 명훈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극진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현이 이처럼 명훈에 대해, 그리고 부모 및 가정환경에 대해 잘 알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명훈 자신이 은영을 만나면서 꼬시기 위해 소상하게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지현은 이제 절대로 명훈을 놓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아이까지 낳고, 명훈에게 결혼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할 생각이었다. 만일 명훈이 거부하면 자살을 해서라도 목적을 관철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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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46)

이런 상황에서 지현은 명훈을 만나 몇 차례 사랑을 나누었고, 명훈이 꼬시기 위해 현에게 돈도 잘 쓰고, 외제차에 고급 원룸까지 있으니까 명훈에게 푹 빠져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명훈은 지현을 수준 낮은 또라이로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만나주지 않으면, 지가 어떻게 하겠어? 그냥 낙태수술하겠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더니, 나 같은 프로도 실수할 때가 있는 거야. 정말 재수가 없네. 잘 나가던 이 명훈이 고생 좀 하겠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명훈은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할 때 피임에 더욱 신경을 썼다. 반드시 임신주기인지 물어보고 위험하다 싶으면 콘돔을 사용했다. 그 전에는 여자들이 알아서 하려니 했다. 그리고 몇 여자들은 임신이 되자 곧 바로 낙태를 했다. 그때마다 명훈은 고생한다면서 병원비 이외에 수고비로 200만원씩 주었다.

여자 아이들은 낙태를 하고도 명훈이 돈까지 주면서 격려해주자 고마워했다. 명훈은 산부인과까지 따라가서 아이 아빠로 사인도 했다. 명훈은 낙태수술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들과 또 섹스를 했고, 그 여자들도 응해주었다.

이 여자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낙태가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낙태수술을 하면 여자의 몸이 얼마나 망가지는 것인지, 전혀 개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여자는 친구들과 같이 낙태수술을 하러 갔다가 나와서 저녁에는 술을 마시러 가기도 했다.

여자 부모가 이런 사실을 알면, 자신의 딸을 임신시키고, 낙태를 시키고, 책임도지지 않으려는 명훈을 정말 정말 나쁜 인간이라고 욕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명훈을 만나 따지고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딸을 정말 어리석고 바보 같다고 속상해 했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요지경으로 미쳐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TV에서는 가끔 낙태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주장과 아직은 낙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서 토론을 벌이고, 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도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명훈은 이런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곧 채널을 돌렸다. 다른 프로에서는 어떤 연예인이 어떤 재벌집 손자와 결혼하려고 한다는 시선을 끄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그 연예인은 행복에 겨워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명훈은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아마 저 여자도 한 두 번은 낙태를 했겠지? 그걸 숨기고 결혼하려는 걸거야.’ 하지만 남의 사생활은 어디까지나 사생활이다. 명훈이 참견하거나 알려고 해도 알 수도 없는 개인정보다.

많은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입장과 이익만을 생각한다. 남이야 죽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다. 냉정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아들이 강간을 하면 아들만 생각한다. 피해자인 여자가 잘못했기 때문에 강간을 당한 것이고, 그게 무슨 강간이냐, 지가 좋아서 했지라는 주장을 한다. 아들 편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강간 당한 딸 부모 입장에서는 남자를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 딸의 인생이 망가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동안 세상에서 커다란 이슈가 되었던 Me Too운동도 마찬가지다. 피해를 당한 여자 입장에서는 가해자인 남자는 정말 나쁜 사람이다. 게다가 문제가 터지면, 꼭 거짓말로 넘어가려고 한다.

‘나는 절대로 성추행을 하지 않았다. 성관계를 한 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의 자유의사에 의한 동의하에 한 것이다. 여자가 저짓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억울한 사람이다.’라고 강변을 한다.

가해자인 남자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모여서 한목소리를 낸다. ‘여자가 동의를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그런 성관계가 가능하겠느냐? 그리고 지금까지 왜 가만 있다가 갑자기 당했다고 고소를 하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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