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은 운명 (35)

“미안해요. 남편이 이렇게 뒷조사를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어요.”
“아냐. 괜찮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잖아요. 그나저나 남편이 저렇게 흥분해 있으니, 집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지 않아요?”
“글쎄요. 위험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알까봐 걱정이예요. 그렇다고 집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고, 큰 일이예요.”
“그래도 집에 들어가서 용서를 빌고, 조용히 있어요. 그게 나을 것 같은데...”
“그럴 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나는 좀 더 있다가 들어갈 게요.”
“위자료 5천 만원은 내가 혼자 알아서 물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미안해요. 당분간 연락하지 않을 게요.”
“그래요. 당분간 서로 연락하지 말고 지내요. 그게 안전해요”

경희는 현재 상황이 그래서 연락하지 말자고 말을 꺼냈지만, 막상 영식으로부터 서로 연락하지 말자는 말을 듣자, 갑자기 울컥했다. ‘이런 사람을 믿고, 내 몸과 마음을 주었다니, 정말 실망이다. 남자가 저렇게 밖에 말을 할 수 없는 것일까?“

경희는 여자이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 그렇게 말을 한 것이었지만, 만일 경희가 남자의 입장이었다면, 경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당분간은 조용히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내가 책임질 것이니, 기다려요. 이혼을 하든 안 하든, 우리는 장난한 것이 아니니까. 서로 변하지 말고 기다려요.‘ 이렇게 말을 했을 것이다. 그게 남자로서 한때 사랑했던 여자에 대한 도리가 아닐까? 그런데 영식은 남자답지도 않고, 정말 경희를 사랑해던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더욱 경희를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경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싫어졌다. 경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영식의 휴대전화에는 부인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있었다. 심지어 음성메시지까지 남겨져 있었다. 부인은 영식이 아무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가지 않으니 몹시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영식의 부인은 얼마나 딱한 처지인가? 남편을 가장이라고 믿고 자식들과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는 여자였다. 남편이 자주 늦게 들어오고 조금 수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별로 신경 안 쓰고 있었다. 설마 다른 여자와 모텔까지 들락거릴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남편은 지금까지 아무리 늦어도 전화는 꼭 해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게까지 전화연락도 없이, 전화를 받지도 않고 소식이 없으니 무슨 사고를 당했는지 걱정이 되었다.

부부란 일심동체이며, 평생 동고동락을 하는 공동생활체다. 내것 네것 없이 뒤섞여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생활하는 무촌(無寸) 관계다. 그래서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항상 부부사이에서 먼저 말하고 함께 좋아하고, 함께 걱정하게 된다.

그런데 영식의 일은 전혀 달랐다.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인데도 정작 가장 가까운 부인에게는 말을 꺼낼 수 없는 성질이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가? 자신도 막상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리 속은 완전히 하얗게 비어있는 것 같았고, 세상은 온통 까맣게 먹구름이 끼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슬픔이 강물처럼 밀려들어왔다. 그 슬픔의 강물에 영식은 파묻혀 멀리 멀리 떠내려가고 있었다.

외로운 영혼이 자신의 육신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영식은 일단 집에 들어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경희는 남편을 만날 면목도 없고, 남편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다고 집에 들어가지 않고 외박을 했다가는 일은 더 커질 판이었다. 그래서 일단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경희는 집 앞에 이르러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남편은 받지 않았다.

집에 가서 벨을 눌렀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집에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 같은 데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친정집에 알릴 수도 없었다. 영식은 이미 집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경희는 혼자서 어디 갈 곳을 잃은 철새가 되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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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1)

정현은 윤석을 먼저 보낸 다음 호텔 로비라운지로 가서 커피를 시켰다. 역시 창가로 자리를 잡고 어두워진 밤하늘과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술기운이 강하게 솟구쳤다.

그래도 정신은 아주 또렷했다. 정현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 유미와 지냈던 시간을 떠올렸다. 로비라운지 중앙에 그랜드 피아노에서는 어떤 사람이 월광소나타를 들려주고 있었다. 피아노를 치는 여자의 모습이 유미와 오버랩되고 있었다.

정현은 시험공부를 하면서도 유미와 가끔 만났다. 만나면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다. 둘이서 남산으로 가서 걸었다. 걸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공감했다. 같이 있다가 헤어지면 또 보고 싶었다. 정현은 자신이 마치 피아노를 전공하는 사람처럼 피아노에 몰입했고, 유미 또한 자신이 고시공부를 하는 것처럼 고시생을 이해했다.

정현은 자신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시험에 붙어야 한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고, 유미는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시험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운이 좋아야 붙는 것이며, 시험에 너무 목숨을 거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현은 나름대로는 열심히 공부했지만, 더 열심히 한 사람들에게 밀려 졸업할 때까지 1차 시험에도 합격하지 못하고 실업자가 되었다. 병역을 연기하기 위해 부득이 어려운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래서 2년 동안의 배수진을 치고 다시 공부를 하기로 했다. 2년 안에 시험에 붙지 못하면 그때는 하는 수 없이 군대를 가야하고, 제대를 한 다음에는 시험을 포기하고 회사에 취직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다음 부활절 바로 전날 정현은 유미를 만났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한 정현은 유미에게 자신의 초라함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몇 명의 친구들은 이미 시험에 붙었는데, 자신은 1차 시험도 떨어진 상황이며, 갈수록 시험에 대한 자신도 없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유미에게도 자신이 없고, 일단 헤어지자고 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렸다. 유미도 따라서 울고 있었다. 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정현이 술에서 깨어보니, 어느 작은 모텔방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불을 켰더니 유미는 쇼파에 앉아 자고 있었다. 술 때문에 속도 아프고 머리도 아팠다. 정현은 깜짝 놀랐다. 미안했다. 서둘러 유미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새벽이었다. 두 사람은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한참 동안 걸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현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서 유미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유미는 차에서 내릴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굳은 표정으로 내려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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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0)

하얏트 호텔은 남산 중턱에 있다. 꽤 오래된 호텔이다. 그런 호텔이 남산에 어떻게 들어섰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서울의 개발초기에 정부에서 환경이나 도심 미관 같은 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고 허가를 내준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지금도 하얏트호텔처럼 전망이 뛰어난 호텔은 드물다. 특히 서울 시내에서는 그렇다.

정현은 택시에서 내려 호텔로 들어가서 1층에 있는 양식당으로 갔다. 윤석은 이미 와서 창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는 서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파리나 보스톤 같은 도시보다 훨씬 더 운치가 있고 멋이 있었다.

“요새 세상이 너무 시끄럽지 않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모르겠어. 북핵문제도 그렇고, 경제가 너무 불황이라 걱정이 돼. 그나저나 잘 지내고 있었어?”
“응. 나는 사무실에서 일만 하고 있으니, 사실 정치나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몰라. 워낙 일이 바쁘니까. 내가 하는 일은 수사나 하고 사건처리를 하는 게 전부야.”

두 사람은 최근의 정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떤 도지사가 여비서를 간음하여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가 기각되었고, 불구속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1심에서 무죄판결이 선고되었다는 것이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윤석은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궁금한 게 많았다. 정현이 이것 저것을 설명해주었다.

“요새 유미씨를 다시 만나고 있다면서? 유미씨는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아니. 만나는 게 아니고, 지금 유미 상황이 안 좋아. 그래서 걱정이야.”
“유미씨가 어떻게 되었는데?”
“유미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잘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어. 그래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유미가 유방암에 걸렸대. 그래서 아주 고생을 하고, 절망에 빠져 있어.”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네가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잖아?”
“유미가 나에게 책임을 지라고 그러는 건 아냐. 단지 유미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으니까 걱정을 하는 거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모르니까 답답한 거야.”
“처음부터 힘이 들더라도 너는 유미씨와 결혼했어야 해.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게 꼬이고 어렵게 된 것이지. 아무튼 잘 해줘. 불쌍하잖아? 그리고 유미씨처럼 착한 사람도 없지.”

유미 이야기가 나오자 정현은 갑자기 마음이 울적해졌다. 마침 비도 오고 있는데 윤석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서 술을 많이 마셨다. 취기가 올라오자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커다란 유리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마치 공룡의 눈물 같았다. 갑자기 유미가 보고 싶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유미를 만나 무언가 하소연하고 싶었다.

“너는 혜경씨를 어떻게 하려고 해?”
“무얼 어떻게 해. 그냥 만나는 거지. 이혼하고 혼자 있으니까, 무척 외롭고 힘이 든 모양이야. 그래서 내가 가끔 만나 위로해주고,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도와주려고 하는 것뿐야. 어차피 처음부터 우리는 서로 연애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아르바이트 제자였을 뿐이었어. 그리고 혜경씨가 나를 사랑한 적도 없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래, 혜경씨가 원래 너무 예뻤어. 그리고 혜경씨는 서울 아가씨라 너를 우습게 봤던 거지. 그때 네가 너무 혜경씨에게 일방적으로 빠져서 고생을 많이 했지. 하지만 혜경씨는 너 혼자 좋아한 거지, 내 눈에는 별로였어. 바람기도 많아 보였고, 머리 속에도 든 것도 없어 보였어.”
“그건 네가 잘 몰라서 그래, 혜경씨는 그렇지 않아.”

정현과 윤석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대학 시절의 일도 너무 소상하게 잘 알고 있었다. 유미와 혜경 이야기는 지금까지 무수하게 많이 들었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 정현과 윤석은 유미도 같이 만났고, 혜경도 같이 만났던 적이 있다. 사실 남자 친구 사이도, 자신의 애인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현과 윤석은 달랐다. 서로의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하면서 상의하고, 때로는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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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01)

맹 교수는 강의시간에도 여학생들과 시선을 맞추는 일은 없었다. 여학생에게 일부러 거리를 두고, 냉냉하게 대했다. 여학생이 교수실로 상담을 하러 와도, 반드시 문을 열어놓고 가급적 짧은 시간 상담하고 돌려보냈다.

맹 교수는 부모에 대한 효성도 매우 지극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85세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고 했다. 어머니는 45살에 어렵게 맹 교수를 늦둥이로 나아서 애지중지 키웠다. 맹 교수 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5년 만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술을 너무 좋아하고, 여자를 너무 좋아해서였다. 아버지는 적지 않은 유산을 남겨놓고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숨겨놓은 자식들이 나타나서 상속권을 주장할까 봐 몇 년 동안은 아주 노심초사했다.

다행이 아버지는 바람은 많이 피웠어도, 다른 여자를 임신시키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점에서는 아버지를 높이 평가했고 존경했다. 여자들을 건드려 사생아를 만들어서 호적을 더럽히고, 자식들 간에 불화를 일으키고, 부인 가슴에 대못을 박아놓고 지옥으로 급행열차를 타고 가는 남자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맹교수 어머니는 나이 50에 과부가 되었다. 사실 과부라는 용어는 적절치 않다. 나이 들면 대부분 남편이 먼저 죽는데, 좀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었다고 50살 된 여자보고 ‘과부’라고 부르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이혼해서 그렇건, 사별해서 그렇건,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여자는 그냥 여자일 뿐이다.

맹교수 어머니는 남편이 죽고 나서, 커피숍을 했다. 뒤늦게 커피 배리스터 자격을 따고, 커피 연구를 했다. 남편이 남겨 놓은 돈으로 가게를 하나 오픈했다.

그 가게는 지금 맹교수가 재직중인 대학교 정문 앞에 있었다. 비록 나이는 50살이었지만, 비교적 동안이었고, 아담한 몸매에 지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이 든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대학 앞인데도 시간이 가면서 나이 먹은 대학 교수나 장사하는 사람들이 주된 단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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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00)

맹공희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주변 모든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했다.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맹교수가 젊은 나이에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는 모르지만, 호화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경제의 민주화, 서민경제를 부르짖고 있었지만, 자동차는 벤츠를 타고 다녔다. 그것도 빨간 색 벤츠였다. 학생들은 그를 BR이라고 불렀다. Bentz Red라는 뜻이었다. 신입생 중 일부는 선배들이 맹교수를 비알(BR)이라고 부르니까,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빌어먹을’이라는 비속어로 이해하고 있었다.

신입생들은 처음에는 맹교수가 강의도 잘 못하고, 인간성이 나쁜 교수인 줄 알고 있다가 시간이 가면서 그의 진면목을 알게 되면, ‘빨간 벤츠’는 신세대의 성공 신화가 되었고, 젊은이의 우상이 되었다.

맹 교수는 독신이었다. “남자가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결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결혼하면 그 자체가 구속이고, 가정에 매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비록 신부는 되지 못했지만, 독신으로 지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꿈이다.”

맹 교수는 신부처럼 순결한 이상주의자로 비쳤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맹 교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성관계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위행위 조차도 해보지 않은 고결한 성인이라고 소문이 났다.

지역에서 맹 교수가 이처럼 완벽한 총각이라는 소문이 나자 성당에서도 유명해져서 로마 교황청으로 보내자는 여론도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요새 세상에 숫총각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하면서, 그런 남자는 재수 없는 존재라고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자가 능력이 없어서 40살이 되도록 여자관계를 못했으면 창피하게 생각하고 조용히 살아야지, 왜 총각이라고 떠들고 다니냐는 것이었다. 지역의 한 신문사에서 이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려고 했지만 최종적으로 편집장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한 여성 기자가 심층적으로 취재해서, ‘남자의 순결, 그 현대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원고지 200매에 달하는 장문의 기사를 준비했지만, 편집장은 신문사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그 원고를 폐기하도록 했다. 그후 그 여성 기자는 끝내 고집을 부려서, ‘여성의 순결의 현대적 의미’를 기사화했다가 그 신문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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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9)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현은 택시를 탔다. 요새는 카카오택시제도가 생겨서 아주 편하다. 예전에는 콜택시제도만 있어 택시잡기가 다소 불편했다. 특히 퇴근시간에는 아무리 콜을 해도 택시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택시를 호출하면 택시가 알아서 호출지점까지 온다. 오는 택시번호도 뜬다. 정말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지 모른다. 과학기술은 그렇게 날이 갈수록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만 그에 못따라가고 있다. 특히 개인의 윤리의식이나 도덕심은 오히려 더 후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극심한 생존경쟁의 현실에서 삭막해진다. 극도로 이기적으로 변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사회에 대해 냉소적이다. 그래서 인간관계도 아주 제한적으로 좁혀진다.

친구도 별로 없고, 대화나 소통도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비정한 현실에서도 정현에게 윤석이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삭막한 거대도시인 서울에서 같은 지방출신인 가까운 친구가 있고, 서로 대화가 되며, 수준이 비슷한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른다.

택시를 타고 남산에 있는 하얏트호텔까지 가면서 정현은 비가 내리는 서울 거리를 보고 있었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는 정말 거대한 도시에서 아주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혼자 아무리 열심히 기어다녀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전혀 띌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거인의 발에 밟힐까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낯선 곳에서 개미는 혼자 발버둥치고 있었다. 하루 하루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것 같고, 무엇인가 개미가 해야 할 일을 붙잡고 시간을 보내고, 에너지를 쏟고 있는 형국이었다.

개미는 원래 집단생활을 해야 하는데, 정현은 혼자 떨어진 외톨이 개미였다. 모두가 낯선 사람들로서 도시의 이방인이었다. 만일 개미가 꺼진 땅속으로 추락하거나, 물을 뒤집어쓰고 헤어나지 못해도 개미를 도와줄 존재는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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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8)

‘Come September!' 정현은 가을이 오면 늘 가슴이 설레였다. 왜 그러는 것인지는 몰랐다. 다만, 다른 계절과 달리 가을이 되면 마음이 들떠 가만히 있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우선 가을이 되면, 바람이 선선해진다. 한 여름의 폭염도 지나가고, 해수욕장의 따가운 햇볕도 수그러든다.

사과가 익어가고, 대추가 붉어진다. 딱딱하던 감이 부드러워지고, 수줍음을 타듯이 홍조를 띤다. 금요일 저녁시간이었다. 퇴근을 앞두고 정현은 갑자기 센치해졌다. 윤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하고 있어?”
“응. 지금 막 수술을 끝내고 나왔어. 퇴근하려고 그러는구나.”
“저녁 때 같이 술이나 할까?”
“좋아. 하얏트에서 만나. 일곱시까지 갈게.”

윤석은 정현과 같은 고등학교 친구였다. 학교 다닐 때 같은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고 가까운 사이였다. 윤석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대를 갔고, 의사가 되었다.

문과와 이과로 서로 분야는 달랐지만, 대학에 들어가서도 두 사람은 자주 만나고 가깝게 지냈다. 더군다나 처음에 입학시험에 떨어져 두 사람 모두 같은 대입학원에 1년간 다녔다. 그래서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윤석의 아버지는 지방에서 제재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목수일을 하고, 광산에서도 일도 하고, 공사현장에서 노동일을 하기도 했다.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돈을 모아 친척들과 동업으로 제재소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잘 나갔지만, 시간이 가면서 사업이 어려워지고 동업자간에 분쟁이 생겼다.

그리고 제재소에서 사무를 보던 젊은 여자직원과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다. 어머니가 펄펄 뛰자 아버지는 여직원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그 여직원에게 다방을 하나 차려주었다. 이런 저런 일로 끝내 제재소는 문을 닫게 되었고, 아버지는 50살이 되는 때에 실업자가 되었다.

윤석은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지고 아버지가 돈을 못벌게 되고, 빚을 지게 되자 고생을 하기 시작했다. 윤석의 다른 형제들은 학교도 중단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윤석은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국 의대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윤석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을 좋아했다. 다른 과목보다 수학을 제일 좋아하고, 제일 잘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공대에 가서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갑자기 아버지가 윤석에게 의사가 되라고 강력하게 권유하셨다.

윤석의 작은 아버지가 술을 좋아해서 간이 나빠졌는데 그 때문에 병원에 다니면서 보니까 집안에 의사는 한 사람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윤석의 삼촌은 간경화로 인해 45세에 돌아가셨지만, 삼촌 때문에 영향을 받은 아버지가 윤석의 진로를 바꿔놓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윤석이 공대를 가려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의 건강을 책임질 수 있다고 했다. 윤석은 끝내 아버지를 꺾지 못했다.

처음에 윤석은 대학입시에서 안타깝게 떨어졌다. 고등학교 성적으로는 당연히 의대에 합격할 수 있었는데, 입시 보기 보름 전에 윤석은 감기가 들었다. 열심히 마지막 총정리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겨울에 공부를 하다가 창문을 열어놓고 몇 시간 낮잠을 잔 것이 화근이 되어 감기가 들었다.

즉시 병원에 가고 약을 먹고 제대로 치료를 했으면 괜찮을 것인데, 병원에도 가지 않고 약도 제대로 먹지 않고 버티다가 감기가 도졌다. 가뜩이나 대학입시를 앞두고 긴장을 하고 있던 터라 감기는 쉽게 낫지 않고 더욱 심해졌다. 막상 서울에 올라와서 시험을 볼 때는 귀도 멍하고 머리도 아플 정도였다. 간신히 시험을 끝까지 보았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시험에 떨어진 기분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더군다나 집안이 어려워서 재수를 한다는 것이 힘이 든 상황이었다. 윤석은 부모님께 미안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걱정말라고 하면서 1년간 서울에 가서 학원을 다니라고 했다.

그래서 윤석은 서울로 혼자 올라왔다. 대입학원에 등록을 하고 1년을 다녔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하숙을 하면서 학원을 다녔다. 학원에 가보니 대부분이 서울 아이들이었다. 학원의 분위기는 지방의 고등학교와는 전혀 달랐다.

모두들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고, 학원의 선생님들도 실력이 매우 좋은 것처럼 보였다. 교재도 매우 수준이 놓았다. 윤석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학원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그 다음 해에 목표로 한 서울에 있는 의과대학에 합격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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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99)

맹 교수는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학교에 사표를 제출했지만, 학생들이 학교측에 강력하게 청원을 해서 사표는 반려되었다.

맹 교수의 자전거 때문에 다리가 부러진 여학생은 그 해 있었던 미스코리아선발대회에 출전하려고 비싼 돈을 들여서 코칭을 받고 있었는데, 재수 없게 맹 교수 옆을 지나가다가 다리가 부러져서 대회에 출전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여학생과 맹 교수는 같은 정형외과를 다니면서 서로 가깝게 되었고, 서로 얼짱이라는 인식이 공유되면서 사고는 천재지변으로서 맹 교수의 잘못은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 사람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사고를 계기로 만나서 서로 연인이 되었다는 가짜뉴스가 한 동안 떠돌기도 했다.

원래 제대로 하면 사고를 야기한 맹 교수가 그 여학생의 치료비를 물어주어야 했지만, 그 여학생 아버지가 부동산투기로 돈을 많이 벌고 있어, 여학생 집에서 오히려 맹 교수를 동정하고, 사고처리과정에서 자신을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여학생의 부상에 대해 깊이 마음 아파하고, 자주 만나서 위로해주었던 정상을 참작해서, 여학생 아버지는 맹 교수에게 타고 다니라고 최고 비싼 자전거를 하나 사서 보냈다.

그 자전거는 외국에서 수입해 온 것인데 무려 천만원이나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자전거를 여학생이 직접 타고 가지고 와서 맹 교수에게 전해 주려고 하다가, 오는 도중 어떤 중학생이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여학생 자전거와 부딪쳐서 또 사고가 났다.

여학생으로부터 핸드폰으로 사고 소식을 들은 맹 교수는 강의를 하다 말고 그냥 뛰어나가 자신의 자전거로 급히 사고현장으로 달려갔다.

수업을 재미 없게 듣고 있던 학생들은 맹 교수 집에 불이 나서 가족들이 모두 타죽은 것으로 알았다. 아니면 맹 교수가 무슨 큰 죄를 저질러서 집에 검사와 검찰수사관들이 갑자기 압수수색을 나온 것으로 알았다.

그러다가 앞에서 오던 전동 킥보드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맹 교수는 옆으로 나가자빠졌지만 아픈 통증은 잊어버리고 오히려 킥보드로 사고를 낸 깡패 같은 건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곧 출발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 깡패는 자신이 잘못해서 맹 교수의 자전거를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맹 교수에게 무슨 약점이 있는가 싶어서 맹 교수를 붙잡고 음주운전 아니냐고 따졌다.

그리고 사고를 냈으면 킥보드 수리비를 물어내라고 했다. 맹 교수는 기가 막혔다. 화가 나서 당잘 폭행을 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잘못 먼저 때렸다가는 그 깡패의 체형으로 봐서 맹 교수는 갈비뼈 열대 이상은 나갈 것 같았다.

그런데 빨리 여학생에게 가야 할 절박한 상황이었으므로 맹 교수는 그 깡패에게 현금 10만원을 꺼내주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깡패는 웃으면서 앞으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 전동 킥보드가 최우선이니까 진로를 양보하고 사고를 방지할 주의의무를 다 하면서 조심해서 다니라고 훈시를 했다.

맹 교수는 알았다고 하면서 다시 자전거를 타고 시속 60킬로미터로 달렸다. 그 깡패를 향해서 뒤로 돌아서 침을 세 번 크게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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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98)

선거를 한 달 앞두고 판세는 더욱 불분명해졌다. 처음에는 백상무와 정국영 두 사람이 각축전을 벌였는데, 시간이 가면서 맹공희 교수가 치고 올라왔다. 맹 교수는 젊고, 키가 크고, 인물이 좋아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나이 먹은 여자들도 맹 교수에게 호감을 가졌다.

맹 교수는 40세에 출사표를 던졌다. 백 후보와 정 후보 진영에서는 너무 나이가 어려서 무슨 시장을 하겠느냐고 코웃음을 쳤다. 적어도 50대 후반이나 60살은 넘어야 세상을 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면적은 64만㎢로 한반도의 2.9배, 인구 6,500여만명, GDP 2조7,900여달러로 세계 6위인 나라의 대통령으로 마크롱이 취임할 때 그의 나이가 40세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맹 교수는 결코 시장이 되기에 어린 나이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맹 교수 지지자들은 나이 든 사람들은 양로원이나 가 있어야지, 정치나 단체장을 한다고 머리 하얗고, 허리 구부정한 상태에서 옛날이야기나 하고 있으면 속이 터진다고 했다.

아무리 고령사회라 해도 노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옛날 이야기나 취미 삼아 하고, 향수에 젖어야지, 현대와 같이 급변하는 4차원 인공지능시대에 컴퓨터도 하지 않고, 옛날 붓글씨로 한문이나 쓰고,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당파싸움이나 이조실록을 보고 말하고 있으면 치열한 국제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보수나 진보와 같은 이념적 대결이나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젊은 맹 교수를 좋아했다. 음성도 부드럽고 좋아서 아나운서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매사에 완벽한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헤어스타일도 특이했고, 모든 것을 직접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바이올린 연주실력도 상당하고, 틈틈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피카소풍이어서 돈을 주고 사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맹 교수는 절대로 자신의 그림을 팔지는 않고,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에 기부는 했다.

맹 교수는 매년 헌혈을 하고, 불쌍한 이웃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연탄나르기, 집짓는 봉사활동, 모심는 농촌봉사활동 등을 열심히 했다. 대학교에 출퇴근할 때에는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언젠가는 자전거를 타고 빙판길에 넘어져서 왼쪽 다리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는데, 그때 넘어지면서 걸어가던 여학생 다리까지 부러뜨려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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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5)

김 이사는 호텔 프론트 데스크로 가서 직원에게 사고내용을 알렸다. 그랬더니 직원은 호텔에 설치되어 있는 CCTV를 확인시켜 주었다. 정 사장이 머물고 있는 호실 복도와 엘리베이트 주변이 녹화되어 있었다.

“아니, 저건 박 과장 아냐? 이상하다. 왜 밤에 은영이 사장님 방으로 들어가고, 오래 있다가 혼자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기 방으로 가는 걸까?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구나?”

CCTV를 반복해서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은영은 들어갈 때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는데, 나올 때는 정 사장 방에 있던 그 스카프를 메지 않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무슨 도둑처럼 문을 아주 조용히 찬찬히 닫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살펴보면서 엘리베이트로 가는 것이었다. 김 이사는 기가 막혔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다는 말인가? 은영이 얌전한 척 하면서 저렇게 호박씨를 까는 여자란 말인가?

CCTV상에는 은영이 정 사장의 시계나 다른 물건을 들고 나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는 것인지 여부도 확인할 수 없었다. 긴팔의 불라우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 이사는 정 사장에게 이런 사실을 CCTV에서 확인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호텔 직원은 CCTV를 다 확인한 다음, 호텔 직원은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준 다음, 상급자에게 말해 상급자와 그 직원 두 사람이 정 사장 방으로 가서 샅샅이 방을 살펴보았다.
“아! 시계가 여기 있네요. 이 시계 맞지요?”
“예. 맞아요. 내 시계예요. 고맙습니다.”

시계는 정 사장이 잠을 잔 침대 위에서 창가 벽 밑으로 떨어져 있었다. 정 사장이 시계를 차고, 침대 위로 올라가서 잠을 자면서 옷도 다 벗고, 시계도 무의식중에 풀어서 침대 위에 놓았는데, 그게 잠을 자는 과정에서 벽 쪽으로 아래로 떨어진 것이었다.

정 사장은 그렇게 아끼고 아끼던 시계를 다시 찾자, 갑자기 어린 아이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환한 웃음을 띠면서 김 이사에게 호텔 식당으로 가서 아침 식사를 하자고 했다.

“어제 밤에 술을 많이 드신 것 같네요. 이렇게 많은 술을 혼자 드셨습니까?”
“응, 어제는 이상하게 술생각이 많이 나서 혼자 늦게까지 마셨어. 지금 속도 좋지 않아. 그래도 식사를 하러 가지.”

김 이사는 쇼파에 놓여 있는 여자 스카프가 은영의 것임을 알았지만, 그것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정 사장과 박 과장이 정사를 벌였다는 증거를 확인하기 위해 휴지통도 보았지만, 성관계 뒤처리를 하는데 사용한 크리넥스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정 사장 일행은 모두 모여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은영도 참석했다. 정 사장이나 은영, 모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다만, 김 이사만 혼란스러웠다.

김 이사나 정 사장 모두 시계사건에 관해서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은영의 스카프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스카프는 정 사장이 조용히 자신의 짐 안에 넣어두었다. 일행의 스케줄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특이 사항 없이 무사히 일본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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