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은 운명 (35)
“미안해요. 남편이 이렇게 뒷조사를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어요.”
“아냐. 괜찮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잖아요. 그나저나 남편이 저렇게 흥분해 있으니, 집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지 않아요?”
“글쎄요. 위험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알까봐 걱정이예요. 그렇다고 집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고, 큰 일이예요.”
“그래도 집에 들어가서 용서를 빌고, 조용히 있어요. 그게 나을 것 같은데...”
“그럴 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나는 좀 더 있다가 들어갈 게요.”
“위자료 5천 만원은 내가 혼자 알아서 물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미안해요. 당분간 연락하지 않을 게요.”
“그래요. 당분간 서로 연락하지 말고 지내요. 그게 안전해요”
경희는 현재 상황이 그래서 연락하지 말자고 말을 꺼냈지만, 막상 영식으로부터 서로 연락하지 말자는 말을 듣자, 갑자기 울컥했다. ‘이런 사람을 믿고, 내 몸과 마음을 주었다니, 정말 실망이다. 남자가 저렇게 밖에 말을 할 수 없는 것일까?“
경희는 여자이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 그렇게 말을 한 것이었지만, 만일 경희가 남자의 입장이었다면, 경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당분간은 조용히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내가 책임질 것이니, 기다려요. 이혼을 하든 안 하든, 우리는 장난한 것이 아니니까. 서로 변하지 말고 기다려요.‘ 이렇게 말을 했을 것이다. 그게 남자로서 한때 사랑했던 여자에 대한 도리가 아닐까? 그런데 영식은 남자답지도 않고, 정말 경희를 사랑해던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더욱 경희를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경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싫어졌다. 경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영식의 휴대전화에는 부인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있었다. 심지어 음성메시지까지 남겨져 있었다. 부인은 영식이 아무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가지 않으니 몹시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영식의 부인은 얼마나 딱한 처지인가? 남편을 가장이라고 믿고 자식들과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는 여자였다. 남편이 자주 늦게 들어오고 조금 수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별로 신경 안 쓰고 있었다. 설마 다른 여자와 모텔까지 들락거릴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남편은 지금까지 아무리 늦어도 전화는 꼭 해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게까지 전화연락도 없이, 전화를 받지도 않고 소식이 없으니 무슨 사고를 당했는지 걱정이 되었다.
부부란 일심동체이며, 평생 동고동락을 하는 공동생활체다. 내것 네것 없이 뒤섞여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생활하는 무촌(無寸) 관계다. 그래서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항상 부부사이에서 먼저 말하고 함께 좋아하고, 함께 걱정하게 된다.
그런데 영식의 일은 전혀 달랐다.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인데도 정작 가장 가까운 부인에게는 말을 꺼낼 수 없는 성질이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가? 자신도 막상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리 속은 완전히 하얗게 비어있는 것 같았고, 세상은 온통 까맣게 먹구름이 끼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슬픔이 강물처럼 밀려들어왔다. 그 슬픔의 강물에 영식은 파묻혀 멀리 멀리 떠내려가고 있었다.
외로운 영혼이 자신의 육신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영식은 일단 집에 들어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경희는 남편을 만날 면목도 없고, 남편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다고 집에 들어가지 않고 외박을 했다가는 일은 더 커질 판이었다. 그래서 일단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경희는 집 앞에 이르러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남편은 받지 않았다.
집에 가서 벨을 눌렀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집에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 같은 데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친정집에 알릴 수도 없었다. 영식은 이미 집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경희는 혼자서 어디 갈 곳을 잃은 철새가 되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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