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51)

강돈철 사장은 열심히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강 사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아버지가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서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 집을 나갔다.

당시 아버지는 53살이었는데, 상대 여자는 38살이었다. 무려 15살이나 차이가 나는 여자와 연애를 하다가 죽을 때까지 그 여자를 책임져야 한다면서 어머니에게 노골적으로 갈라서자고 요구했다.

어머니는 아버지 행실 때문에 지옥처럼 고통스러웠지만, 먹고 살 방법이 까마득했기 때문에 절대로 이혼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버지는 일방적으로 집을 나가 그 여자와 동거를 시작했고,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끊었다.

그러면서 이혼해주지 않으면 굶어죽게 만들겠다고 공갈을 쳤다. 대신 이혼해주면 평생 생활비를 대주겠다고 큰소리쳤다. 세상에 이런 법이 있는가? 예전에는 이런 경우 간통죄로 고소를 하여 아버지에게 콩밥을 먹일 수 있었다.

아버지와 같이 잠을 잔 젊은 여자도 같이 고소할 수 있었다. 그런 간통죄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는 해방 이후 오랫동안 수많은 연예인들이 쇠고랑을 차고 감방에 갔다. 그러면서 인기 절정의 화려한 무대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물론 상당 수는 세월이 흘러 사람들이 기억이 흐려질 때면 다시 나타나 인기 없는 연예인으로 TV에 나오기도 했다. 물론 ‘사랑이 죄는 아니다’ 그런데도 사회의 성의식, 성문화는 매우 보수적이어서 결혼한 사람이 남편이나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나 남자와 몸을 섞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연애하는 것만으로는 수갑을 차지 않았다. 간통죄는 동물의 교미(交尾)와 마찬가지로 남녀가 성교(性交)를 해야 처벌하고 있었다. 간통죄는 예비죄나 음모죄, 미수죄는 처벌하지 않았다. 오직 범죄를 완성하는 기수(旣遂)에 이르러야 비로소 처벌했는데, 간통의 기수시기는 남자의 성기가 여성에 삽입되는 시점에 인정되었다.

정말 지금 생각하면 한국에 있어서의 간통죄는 매우 노골적인 동물적인 신체 현상을 과학적으로 포착하여 처벌하는 신기한 제도였다. 간통죄로 구속되어 감방에 들어가면 다른 재소자들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몸 하나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해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 감방에 들어와 있으니 그럴만 했다.

인간의 性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아름답거나 고상하다고 할 수 없다.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동물적 동작이나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교미행위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동물의 교미행위 자체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동물의 교미행위는 대소변과 같은 배설행위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것이라 해도 그들이 은밀하게 행하기를 바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성행위도 원칙적으로 해가 진 다음 어두워진 시간에 폐쇄된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게 은밀하게 행해진다. 인간의 섹스는 기본적으로 애정이라는 정신적 사랑이 가미되어야 아름다움에 채색된다.

어머니는 경제적 압박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합의이혼을 해주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100번 이상 했다. 그리고 이혼선물로 100만원짜리 백화점 옷을 사서 보냈다.

어머니에게 약혼선물이나 결혼선물은 제대로 해주지 않았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무엇 때문에 이혼선물은 큰 마음 먹고 해주었는지 모른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 생일 선물도 한번 해본 적이 없는 비정하고 멋대가리 없는 남자였다.

아버지는 이혼하고 석달은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보내주었지만, 그 다음에는 연락을 딱 끊었다. 직장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주민등록도 말소시키고 아예 실종상태가 되었다. 그렇다고 이미 이혼한 상태에서 어머니가 경찰서에 아버지에 대한 가출신고나 실종신고를 할 처지도 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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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지하철에서 여자의 속치마를 불법촬영한 범인을 검거하다

 

그런데 그 여자 바로 뒤에서 어떤 남자가 핸드폰으로 여자의 치마 밑을 사진 찍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공칠은 순간적으로 직업의식이 발동했다. 빠르게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내려가서 거꾸로 올라가고 있는 에스컬레이터로 옮겨탔다.

 

그 남자를 붙잡았다. 앞서 가던 여자는 주변에 있는 다른 남자에게 부탁해서 세워달라고 했다. 공칠이 빠른 속도로 그 남자에게 다가가자 그 남자는 이를 눈치채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거의 그 남자를 붙잡을 상황에서 공칠은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면서 넘어졌다. 공칠은 넘어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악을 쓰고 외쳤다. “강도야! 저놈 잡아요. 강도예요.”

 

그러자 길을 가던 고등학생 두 명이 필사적으로 그 남자를 추격했다. 마침내 그 남자는 고등학생들에게 붙잡혀서 공칠이 있는 곳으로 끌려왔다. 공칠은 넘어져서 무릎이 무척 아팠다.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이 나쁜 놈! 너 때문에 내가 크게 다쳤잖아! 이리 와 봐.”

 

공칠은 남자를 때리려고 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탈리오의 법칙에 따라 공칠은 그 남자의 무릎을 세게 발로 찼다. 그 남자는 무릎을 걷어차이자 앞으로 넘어졌다. 하지만 잘못한 것이 있어서 그런지 그 남자는 대항하지 못했다.

 

고등학생들은 경찰에 신고를 했다. “112죠. 여기 길에서 강도를 붙잡았어요. 강도가 피해자를 때려서 크게 다친 모양이예요. 빨리 와주세요.”

 

고등학생들은 공칠이 강도사건의 피해자인 줄 알았고, 그 남자가 강도범으로서 체포를 면탈할 목적으로 공칠을 폭행한 것으로 잘못 알았던 것이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자, 경찰순찰차가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관은 강도상해사건으로 신고가 접수되었기 때문에 가스총까지 꺼냈다.

 

남자는 영문도 모르는 상태에서 수갑이 채워졌다. 공칠은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그리고 곧 바로 지하철역에서 나오는 에스컬레이터 부근으로 돌아가서 그때까지 현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젊은 여성을 만났다.

 

그 여성은 주변 사람들이 어떤 치한에 의해 신체 일부가 불법촬영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공칠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귀하를 성폭력범죄처벌법위반범죄 혐의로 체포합니다. 귀하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경찰관은 배불만(가명, 48세)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면서 아주 무표정하고 무감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경찰관이 현행범을 체포할 때 범인에게 말해주어야 하는 피의자의 권리다.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고지사항이다.

 

헌법이나 형사소송법에는 매우 중요한 권리로 보장되어 있는 것이지만 범죄를 저지르고 현장에서 체포되는 범인에게 그런 말은 들리지 않는다. 경찰관은 곧 이어 말했다.

 

“주머니속에 들어있는 핸드폰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불만은 경찰관의 요구대로 핸드폰을 꺼내서 주려고 했다. 그런데 핸드폰이 주머니에 없었다.

 

불만이 도망가면서 정신이 없어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린 것 같았고, 어두운 밤이라 그 핸드폰을 길거리에서 누군가 주워서 가지고 간 것 같았다.

 

불만이 핸드폰이 없다고 하자, 경찰관은 그 말을 믿지 않고 불만에게 말했다. “그러면 소지품 검사를 하겠습니다.” 불만은 언뜻 인터넷에서 본 것이 생각났다. “안 됩니다. 압수수색영장을 가져와야 제 소지품검사를 할 수 있습니다.”

 

경찰관은 선뜻 불만의 신체에 대한 수색을 하지 못했다. 자칫 잘못하면 형사소송법에 위반되고 피의자에 대한 권리침해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옆에서 이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공칠이 갑자기 나섰다.

 

“뭐라고! 이 나쁜 놈. 무엇이 어째고 어째, 빨리 핸드폰 꺼내.” 공칠이 불만의 주머니를 뒤졌다. 불만은 공칠을 물리치려고 했지만 물리력으로 공칠을 당할 수 없었다. 경찰관은 옆에서 공칠을 제지하는 척하면서 사실상 내버려두었다.

 

공칠은 일부러 불만의 신체를 강하게 아픔을 느낄 정도로 샅샅이 뒤졌다. 불만의 낭심을 세게 압박했다. 팬티속에 핸드폰을 숨겨둔 것이 아닌가 하면서 급소를 공격해서 통증을 가했다. 불만이 통증 때문에 신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약간 섹시해서 옆에 있는 여자와 고등학생들에게 민망할 정도였다.

 

결국 핸드폰은 발견하지 못하고 순찰차에 타고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에 인계된 불만은 곧 바로 피의자로 조사를 받았다. 공칠과 피해자인 여자, 그리고 불만을 체포한 의로운 시민인 학생 모두 참고인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불법한 사진이 담겨있는 불만의 핸드폰이 사라진 이상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다. 이 사건에서 증거는 오직 불만이 여자의 치맛속을 핸드폰으로 찍는 장면을 목격한 공칠의 진술뿐이었다.

 

불만은 경찰서에 가서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자신은 여자의 치맛속을 찍은 사실이 결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칠에게서 심한 술냄새가 나는 것을 보고 공칠이 술에 취해 환상을 보았거나, 평소 공칠이 다른 여자의 치맛속을 많이 찍고 돌아다녀서 자신이 그 여자의 치맛속을 찍으려고 하다가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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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31)

압수수색을 당하고 일주일 후에 명훈 아빠는 변호사와 함께 검찰청으으로 들어갔다. 사전에 검사로부터 출석요구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변호사와 며칠 동안 수사에 대비해서 준비를 했다. 검사가 물을 것으로 예상되는 질문사항을 변호사가 미리 만들어 명훈 아빠에게 묻고 이에 대해 답변 연습을 했다.
변호사는 법률을 전문적으로 공부했고, 더군다나 검사생활까지 했기 때문에 익숙한 일이지만, 명훈 아빠는 사업만 하고 술이나 먹고 여자들과 연애만 했기 때문에 막상 수사에 대비해서 변호사와 예행연습을 하려고 하니까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일반 사람들은 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아무리 TV에서 법률가가 설명을 하고 뉴스를 들어도 구체적인 사건에 들어가서는 형법이나 형사소송법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형사사건의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절차에 의해서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래서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지만, 정작 형사사건에 있어서는 변호사가 직접 조사를 대신 받는 것고 아니고, 변호인참여도 피의자가 조사받을 때 옆에서 조사절차를 지켜보는 것에 불과하지, 구체적으로 답변을 코치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무엇을 물을지도 몰랐고, 핵심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아무리 들어도 잊어버리고 횡설수설하게 되었다. ‘누가 투서를 한 걸까?’ 압수수색을 당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든 것은 업계의 관행이었다. 주변에 비슷한 경쟁업체도 다 그런 식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모든 법을 다 지키고,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철저하게 법을 지키고 모범적으로 하게 되면, 곧 바로 다른 경쟁업체에 밀려 회사는 문을 닫아야 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편법으로, 불법으로, 범죄를 저지르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업을 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명훈 아빠는 다른 사람들 다 그러는데, 왜 하필 나만 조사를 받아야 하느냐고 원망을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 그런 방식으로 사업을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나 자료는 없었다. 꼭 명훈 아빠만 당하는 것인지도 불명확했다.
“지금부터 조사를 하겠습니다. 편의상 사장님을 피의자로 호칭하겠습니다. 피의자는 형사소송법에 따라 진술을 거부할 수 있고,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진술을 거부하겠습니까? 그리고 변호사가 조사에 참여할 것입니까?”
갑자기 피의자라는 호칭이 나오자, 어리둥절했다. TV에서 ‘피고인(被告人)’이라는 용어는 많이 들어봤다. 피고인이란 재판받는 사람을 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수사관은 갑자기 피고인이라고 하지 않고, 피의자(被疑者)라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 의미를 물어볼 상황도 아니었고, 이유도 없었다. 일상의 대화에서 이렇게 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보통은 상대방을 ‘선생님’ ‘아주머니’ 이렇게 부르지, 전혀 관계 없는 피의자라고 이름은 빼고 부른다는 것은 그렇게 부르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예. 진술을 거부하지 않고 진술하겠습니다. 그리고 같이 온 변호사님이 참여할 것입니다.”


작은 운명 (30)

“검찰청에서 나왔습니다.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젊은 검사는 명훈 아빠에게 압수수색영장을 제시하고 같이 온 직원들과 함께 사무실을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회계장부 및 문서철, 컴퓨터를 모두 차에 실었다. 명훈 아빠는 당황했다. 친구 변호사에게 급히 전화를 했다. 변호사는 재판 때문에 올 수 없다고 하면서 압수수색은 거부할 수 없으니 일단 응하라고 코치를 해주었다.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겁니까?”
“압수수색영장을 보여드리지 않았습니까? 회사에서 비자금을 조성해서 횡령했다는 것과 뇌물죄 등의 혐의로 수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더 이상 자세한 사항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명훈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였다. 이러 때 여자는 더 놀라는 법이다.
“여보. 집에도 수사관들이 와서 모두 뒤지고 있어요. 무슨 일이예요? 우린 아무 죄도 없는데 왜 이러지요? 누가 투서를 했나요?”
“글쎄. 모르겠어. 전혀 내용을 알 수 없어.”
검찰청 직원들은 명훈 아빠의 자가용과 명훈 엄마가 타고 다니는 차도 모두 압수수색했다. 정말 무서웠다. 검찰 수사가 이렇게 무서울 줄 상상도 못했다. 보통 사람들은 압수수색을 TV에서 잠깐만 보여주고, 수사관들이 ‘검찰’이라고 쓴 압수물상자를 들고 나오는 장면만 보여주기 때문에 당하는 사람의 심정을 모른다. 평소에 압수수색을 전혀 예상하지 않고 방심한 상태에서 회사의 비밀서류, 특히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서류나 자료를 압수 당하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모든 범죄사실에 대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징역을 가고, 회사는 망한다.
일반 봉급생활자나 치킨집을 하는 사람들은 압수수색할 것도 없지만, 해봤자 나오는 것도 별로 없다. 하지만 규모가 크고, 돈을 많이 벌고, 장부를 조작하고, 허위 세금계산서를 끊고, 인건비를 허위로 지급한 것으로 꾸며놓고, 리베이트를 받거나 뇌물을 주고 받는 사람들은 압수수색이 가장 무섭다. 명훈 아빠와 명훈 엄마는 초죽음상태가 되었다. 모든 은행통장도 압수되었다. 심지어 명훈 아빠 핸드폰도 압수되었다.
명훈 아빠는 변호사를 만나러갔다. 모든 문제를 변호사와 상의해야 한다. 이번 사건은 형사문제였기 때문에 검사 출신 변호사를 만났다. 대학 친구 집안에 검사 출신 변호사가 있다고 해서 소개를 받고 선임했다.
아무리 세상에서 전관예우가 나쁜 폐해라면서 하루 빨리 없애야 한다고 정치인들도 떠들고 있지만, 그래도 막상 개인적으로 검찰의 특별수사를 받게 되면 하는 수 없는 것 같았다. 검사생활을 오래 한 변호사가 아무래도 대응을 잘 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명훈 아빠도 그래서 검사 출신 변호사를 선임했다.
변호사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일단 검찰 조사에 대비해서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했다. 검찰 조사를 받을 때에는 변호사 자신이 참여하겠다고 했다. 명훈 아빠와 엄마는 초상난 집처럼 어두웠다. 모든 것이 두렵고 불안했다. 명훈 아빠는 공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위스키를 꺼냈다. 안주도 없이 독한 술을 들이켰다.





작은 운명 (29)

은영은 명자와 이런 저런 상의를 했다. 뱃속의 아이는 하루 하루 자라고 있어 빨리 결론을 내려야했다. 명훈 엄마는 절대로 결혼을 승낙하지 않을 것이다. 명훈 역시 은영을 싫어하고, 애만 뗄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좋을까? 두 사람 머리로서는 도저히 좋은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은영은 명자에게 정숙을 만나서 같이 상의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아무래도 돈 많은 정숙이 발도 넓고, 아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정자는 은영의 설명을 다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주 좋은 기회야. 무조건 아이를 낳는다고 통보하고 더 이상 연락을 하지 마. 전에 이런 비슷한 케이스를 봤어. 어떤 돈 있는 집 아들이 대학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을 했어. 그 아들이 술집 나가는 여자와 연애를 했는데 임신을 시킨 거야. 여자는 임신한 사실을 확인하고, 그 남자의 아이라는 확신이 들자, 남자에게 말했어.
‘아이를 낳아서 혼자 키우고, DNA검사를 해서 가정법원에 친생자확인소송을 걸어서 판결을 받은 다음, 당신의 가족증명부에 자식으로 올려놓고, 양육비를 19세 될 때까지 법으로 받아내고, 당신이 죽으면 자식으로서 재산상속을 받게 하겠어요. 당신이 결혼하면 아이와 함께 축하하러 가겠어요. 당신의 사랑하는 신부에게 물어볼 거예요. 왜 우리 아이 아빠와 결혼하느냐고 물어볼 거예요.’ 이렇게 말했더니, 그 남자는 자신의 부모에게 전해주었어. 그랬더니 남자 부모가 큰일 났거든. 아들이 좋은 집에 장가가기도 어렵게 되었고, 양육비를 매달 70만원만 잡아도 19년 동안 물어줘야지, 죽으면 상속권도 있다고 하지, 총각이 호적에 자식이 올라가지. 인생 조지는 거잖아? 그래서 남자 집에서 3억원을 주고 합의를 했대. 그러자 여자는 아이를 낙태하고 그 돈 가지고 치킨집을 차려서 지금 잘 살고 있대.”
“그러니까 은영이 너도 정말 좋은 기회를 잡은 거야. 네가 그동안 착하게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천사처럼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 같다. 그러니까 고민하지 말고 3억원 받고 합의해 줘. 그 사람들 돈이 많으니까 즉시 합의할 거야. 요새 3억원은 돈도 아니야. 벤츠 한 대 값밖에 안 돼. 강남에서는 시원찮은 아파트 전세도 못얻는 돈이야. 말로 하지 말고 내용증명으로 보내. 놀라서 즉시 합의할 거야. 돈 많이 받으면 우리 셋이서 술 먹자. 옷도 한 벌씩 사줘. 알았지!”
“글쎄 그게 통할까?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한다고 공갈죄로 고소하지 않을까? 집 앞에 가서 일인시위를 할까? 아빠 사무실에 찾아가서 피켓 들고 서 있을까? 엄마 약국에 가서 드러누울까?”
“아냐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 봐. 급한 것은 그 사람들이니까. 곧 무슨 연락이 올 거야. 그 남자 집안이 막 사는 사람들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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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7)  (0) 2020.10.21

95. 시장선거에서 기부행위를 한 사실로 검찰에 고발되다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노인회 총무와 회장 두 사람, 돈을 준 정국영 후보 세사람만이 알고 있는 이 비밀, 죽을 때까지 노출시키지 말고 가져가야 할 이런 중대한 비밀!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먼저 노인회 총무 입이 근지러워서 잠자리에서 부인에게 말했다. 노인회장도 술을 마신 상태에서 가장 친한 친구 한사람에게만 귀뜸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까지 하면서, 정국영 후보가 셋 중에 제일 괜찮은 것 같다고 말했다.

 

1박 2일의 단체관광을 다녀온 노인들은 가뜩이나 할 일이 없는 판에 모처럼 아주 짠돌이인 노인회장이 갑자기 큰돈을 쓴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혹시 회장이 죽을 때가 돼서 착해진 것이 아닌가 의심하던 판에 결국 남의 돈 가지고 생색내고, 게다가 거짓말까지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게 되었다.

 

여행을 다녀온 노인들 중에는 몇 사람이 정국영 후보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이번 시장 선거에서 정국영 후보는 반드시 떨어뜨려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중 몇 사람은 정국영 후보와 맞서 싸우고 있는 백상무 후보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어 만일 백후보를 찎지 않으면 그 동네에서 추방될 위험성이 있었다.

 

노인들은 정국영 후보가 몰래 찬조한 100만원 중 1%의 돈으로 산 음식과 술이 자신들의 몸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즉시 열흘 전에 먹은 음식찌꺼기까지 모두 토해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심하게 토하다가 병원 응급실까지 실려갔는데, 다행이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 사람은 그 다음 날 교회에 가서 목숨을 건진 것에 대해 특별감사헌금을 드렸다.

 

어렵게 살아남은 노인은 그 후 교회에 가서 이런 극적인 사실에 대해 많은 교인들 앞에서 특별간증까지 했다. 그러면서 선거 때문에 모두 긴장하고 있는데, 특정 후보가 몰래 돈을 쓰게 되면 자신과 같은 정의로운 유권자는 목숨을 잃을 수 있으니, 후보자들은 절대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노인의 정의로운 간증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동안 그 시에서 당선되었던 시장들이 모두 정의롭지 못했기 때문에 시가 발전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그 모양 그 꼴이라는 사실에 공감했다.

 

정국영 후보가 돈으로 유권자를 매수하려고 했다는 소문은 즉시 퍼졌고, 결국 반대편인 백상무 후보 진영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런 소문이나 정보, 첩보는 선거운동기간 중에는 북한의 핵시설에 관한 첩보보다, IT산업에 관한 기술유출보다 더 중요하고 더 민감한 것이다.

 

백상무 후보측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공칠의 도움을 받아 증거수집을 철저하게 하였다. 공칠이 평소 갈고 닦은 실력으로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을 만나 유도신문을 하는 방식으로 비밀녹음을 해서 확실하게 해놓았다. 관할 검찰청에 정식으로 고발을 했다. 공직선거법상 기부행위금지에 걸린 것이다.

 

공칠은 피곤한 상태에서 혼자 저녁을 먹었다. 최근에 시장 선거와 관련하여 민첩 사장과의 갈등 때문에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갑자기 술에 취하고 싶었다.

 

TV에서는 대학 축제가 한창이라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봄나들이 하는 젊은 연인들이 부러웠다. 혼자 소주를 마셨다. 소주를 2병 마셨더니 술기운이 제법 올라왔다.

 

공칠은 한국사람에게는 소주가 최고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양주나 포도주, 막걸리, 정종 그 어떤 술도 소주와 같은 담백한 맛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소주는 그야말로 맑은 물, 정화수와 같다.

 

옛날 나이 든 어머니들이 새벽에 일어나 우물에서 차가운 맑은 물 한 그릇을 떠놓고 두 손을 비비면서 간절하게 소원을 빌던 그런 물과 같은 투명하고 깨끗하고 영혼이 들어있는 액체다.

 

다른 술처럼 취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술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공칠이 싫어하는 것은 그래서 막걸리와 같이 혼탁한 술이었다. 막걸리에는 무언지 모르게 이질적인 것이 뒤섞여있는 것같다.

 

순결을 상실한 처녀 같았다. 포도주도 마찬가지였다. 피와 같은 색깔이 싫었다. 화이트 와인이나 맥주는 오줌을 연상시켜 못마땅했다. 그런 의미에서 양주도 마찬가지였고, 더군다나 양주는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인식된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공칠은 소주를 마시는 것은 곧 맑은 영혼을 가슴에 담는 신성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소주를 마실 때에는 조상 제사를 지내고 마시는 음복처럼 경건한 자세로 마셨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공칠은 식당을 나와 걸었다. 가슴 속으로 오월의 상긋한 바람이 파고들어왔다. 그 바람은 여인의 손길이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난간을 잡고 눈을 감았다.

 

저절로 밑으로 내려간다. 에스컬레이터가 덜커덩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가벼운 움직임을 음미하며 삶의 본질에 다가가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눈을 떴다. 순간 반대편 에스컬레이터에서 올라오는 젊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눈에 확 띄는 미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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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28)

명훈은 지금까지 살면서 수많은 여자를 만나 성관계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술도 마셔봤지만 이렇게 무서운 눈빛에 쏘여본 적은 없었다. 그 눈빛에 오래 
쏘이면 심한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명훈의 경험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가 
만났을 때 여자의 눈빛은 대체로 부드러웠다. 아무리 화가 나도 이렇게 살의
(殺意)를 느끼지는 못했다. 몇 대 맞고 나서 파출소 가자는 말에 놀란 명훈
은 그 여자가 하자는 대로 쓰기 시작했다.
‘사실확인서, 본인은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어디 소재 모텔 몇 호실에
서 피해자 〇〇〇을 강제로 억압하여 침대에 눕히고, 피해자의 팬티를 벗긴 
다음 본인의 성기를 피해자의 음부에 삽입하여 강제로 성교를 하였고, 사정
까지 하였습니다. 본인은 본인의 범죄행위로 인한 모든 민사 형사책임을 지
겠습니다.’
다썼더니, 손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인주는 부근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주 작
은 것을 사왔다. 그런 인주통은 처음 봤다. 너무 작고 예뻤다. 지장을 찍기 
전에 망설였다. 겁이 났다.
“삽입은 하지 않았고, 사정도 하지 않았는데요? 고쳐주세요.”
“이 미친 〇이 어디 대고 주둥이를 놀려? 내 친구가 당했다고 말하는 거 다 
들었잖아? 귀가 처먹었나? 거짓말을 아주 밥먹듯이 하는구나. 그럼 경찰서에 
가서 정식으로 조사를 받아볼까? 조용히 합의하는 게 좋지 않아? 안 그래, 
이 나쁜 〇〇야!”
여자 친구는 경찰 출신이거나 남편이 현직 경찰관인 것이 틀림없었다. 증거
로 필요하니 명훈의 머리카락을 조금 잘라서 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명훈의 
승낙이나 동의도 받기 전에 그냥 명훈의 머리를 잡고 한줌 뽑았다. 명훈은 
눈물이 났다. 무지하게 아팠다. 지금까지 살면서 맞아는 봤지만, 머리카락을 
강제로 뽑혀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세상에 남자 머리도 뽑는 사람이 있
구나!’
여자 친구는 그것을 비닐봉지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명훈은 TV에서 강간범의 
수사에 있어 DNA검사를 한다고 하면서 남자의 정액이나 침 같은 체액, 머리
카락, 음모 등을 채취한다는 것을 들어 보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 여자가 
무슨 권한으로 갑자기 강제수사를 하는지 전혀 영문을 몰랐다.
명훈이 그 여자의 횡포에 이의를 달면 당장 경찰서로 가자고 할 판이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당하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명훈은 아직도 술이 완전히 깬 것은 아니었다.
마치 꿈 속에서 어떤 여자들과 대화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명훈의 옆에는 순한 양도 몇 마리 뛰어놀고 있었다. 그런데 뱀 두 마
리가 기어오고 있었다. 뱀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명훈의 아래 물건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었다. 명훈은 소스라쳤다. 다시 눈을 떠보니 그 여자 두 사람
이 명훈을 불쌍하다는 듯이 비웃고 있었다.
명훈은 지루하고 지겨웠다. 다 끝난 줄 알고 일어나려고 했더니 잠깐 기다리
라고 했다. 그러면서 명훈에 대한 상세한 인적 사항, 개인정보를 묻기 시작
했다. 그리고 백지에 적고 있었다. 녹음까지 하고 있었다. 생년월일, 주소, 
부모 성명, 나이, 직업, 재산 정도, 성병 유무, 자동차 종류, 연식, 여자 친
구 관계, 학교 이름, 과 명칭 전화 번호 등등 수없이 많은 사항을 물었다. 
명훈이 대답을 하지 않거나 엉터리로 답변을 하면 여자 친구는 곧 바로 112
신고를 할 태세였다. 명훈은 완전히 겁을 먹고 수사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작은 운명 (27)

명훈은 요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까? 은영을 몇 번 데리고 놀았다는 이유로 개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스타일
을 완전히 구겨버렸다.’
새로 만나 마음에 드는 돈 많은 집 아이인 제니도 이번에 은영이 난리 치는 
바람에 전화도 받지 않고 있었다. 명훈은 가까운 친구 형석과 강남에 있는 
클럽에 갔다. 웨이터의 소개로 두 여자와 합석했다. 그 중 한 여자가 마음에 
드는 타입이었다. 술을 마시고 일행 네 사람은 밖으로 나와 2차로 술을 마셨
다. 명훈은 파트너에게 술에 취해 도저히 움직이지 못하겠으니, 모텔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수고비로 10만원을 주었다. 여자는 명훈이 
돈이 많다고 허풍을 떨었기 때문에 잘 대해주는 게 좋다는 생각에서 데려다 
주려고 했다. 모텔 방에 들어가자 명훈은 조금만 이야기하다 가라고 애원했
다.
여자는 명훈을 믿고 모텔방 의자에 앉았다. 10분쯤 지나 여자가 나가겠다고 
하자. 명훈은 갑자기 여자를 붙잡고 침대에 눕혔다. 여자는 안 된다면서 뿌
리쳤다. 명훈은 술에 많이 취한 상태에서 흥분했기 때문에 여자 바지를 벗기
고 그 위로 올라갔다. 여자는 싫다면서 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성병에 대한 노이로제가 있다고 했다.
명훈은 콘돔을 사용하면 된다고 하면서도 술에 취해 이성을 잃고 그냥 여자
에게 성관계를 시도했다. 여자가 강하게 저항하자 사태는 여기에서 끝났다. 
여자는 명훈에게 욕을 하면서 명훈의 핸드폰을 손에 들고 일어섰다. 명훈은 
아직도 술이 덜 깨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술에 취해서 그랬으니 용서해줘요.”
“안 돼, 용서 못해. 신고할 거야.”
여자는 명훈의 핸드폰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빨리 오라고 했다. 곧 바로 
여자 친구가 왔다. 그때까지 명훈은 술에 취해 누워있었다.
“아니 이 미친 〇 봤나? 유부녀를 강간하면 얼마나 징역을 살려고 그랬어? 
너 몇 살이나 됐니? 이 아줌마는 마흔다섯살이야. 이마에 피도 안 마른 〇이 
애가 둘이나 있는 엄마뻘 되는 아줌마를 강간했어. 콩밥을 많이 먹고 그 안
에서 썩어서 죽어야 해. 자 빨리 경찰서로 가자.”
명훈은 그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옷을 입고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어요. 죽을 죄를 졌어요. 하지만 안 했잖아요? 하려다가 만 거에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세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피해자 친구는 매우 노련했다. 맥주집으로 데리고 
가더니 백지를 얻어다가 사실확인서를 쓰라고 했다. 핸드폰으로 녹음하기 시
작했다. 마치 변호사나 경찰관 같았다. 법을 많이 알고 있었고 매우 논리적
이었다.
“자 이렇게 써. 내가 부르는 대로. 알았지. 이 강간범아!”
“예. 쓸게요. 근데 강간범은 아니잖아요? 정말 하지 않았다니까요? 그냥 하
려고 하다가 술에 취해 못한 거예요. 아줌마, 사실대로 말해 주세요. 들어가
지 않은 건 맞잖아요? 아줌마가 콘돔 끼고 하라고 해서 콘돔 찾다가 그만둔 
거잖아요? 그게 어떻게 강간범이예요?”
여자 친구가 갑자기 뺨을 후려쳤다. 멱살을 잡고 파출소로 가자고 했다. 피
해자인 여자는 옆에서 술만 마시고 있었다. 노려보는 눈이 꼭 피를 찾는 늑
대 같았다. 무서웠다. 사나운 독사눈이었다.


94. 시장 선거에서 상대 후보의 약점을 캐기 시작하다

 

공칠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은 세 후보 중에서 오직 백상무만 알고 있다. 다른 후보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공칠은 우연히 백상무의 과거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오직 공칠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이다.

 

그 비밀을 지금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를 위해서, 아니 김민첩 사장을 위해서, 상대 후보진영에 넘겨야 할 것이냐 하는 기로에 서있다. 고민은 깊어졌다. 공칠은 백상무를 만났다.

 

“백 후보님! 지금 판세가 어떻습니까? 당선될 가능성이 높습니까?”

“글쎄요. 맹공희 교수는 별거 아닌데, 정국영 후보가 만만치 않아요. 돈도 많고, 지역에서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예요.”

“정국영 후보의 약점이나 문제는 없나요?”

“지금 우리 진영에서도 정 후보의 뒷조사를 하고 있고, 조직을 동원해서 그에 관한 제보를 받고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워낙 약은 사람이라 어떨까 싶어요.”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정 후보의 비리나 약점을 찾아볼까요?”

“어떻게요? 그런 방법이 있나요?”

“예. 후보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알아볼게요.”

 

이렇게 해서 공칠은 김민첩 사장의 지시와는 정반대로 정국영 후보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김민첩에게는 백상무에 관한 확인되지 않고, 증거를 찾을 수 없는 막연한 소문만 주워듣고 서면으로 첩보를 수집한 것처럼 보고서를 써서 올렸다.

 

김민첩은 짜증을 냈다. “김공칠 실장이 수집한 자료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공지의 내용 아닌가? 도대체 이런 식으로 정보수집을 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빨리 목숨을 걸고 열심히 백상무의 뒤를 캐봐. 분명 여자관계가 있을 거야. 젊은 연예인을 애인으로 두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그리고 시청에서 국장을 하면서 건설회사와 유착되어 뇌물을 많이 먹었다는 것 같아. 부동산투기도 많이 했는데, 모두 다른 사람 이름으로 했대. 알았지!”

 

“예. 알았습니다. 백상무는 핸드폰도 차명으로 쓰면서 수시로 바꾸고 있는 것 같아요. 머리도 비상하고, 아주 치밀하게 증거를 인멸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하지만 열심히 해서 곧 좋은 성과를 낼게요.”

“꼭 성공해야 해. 회사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야. 알았지!”

 

공칠은 이번 선거에서 김민첩 사장이 왜 저렇게 열심히 정국영 후보를 도와주려고 난리를 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굉장히 중요한 이권이 걸려있는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는 6월에 있었다. 때문에 선거운동은 4월과 5월에 집중된다. 우리나라 봄의 절정은 언제나 4월과 5월이다. 3월은 절기상 봄에는 해당되지만, 날씨가 완전히 봄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쌀쌀할 때가 많다. 그러나 4월이 되면 전혀 다르다.

 

꽃이 제대로 피고, 나뭇잎이 연한 녹색을 띤다. 두터운 옷을 벗어던지고 확실하게 봄옷으로 갈아입는다. 1932년 이은상의 시조를 가사로 해서 작곡했다고 하는 홍난파가 그린 새 풀 옷을 입고 저기에서 오고 있는 ‘봄처녀’는 3월이 아닌 4월에 오는 것이 분명했다. 3월에는 아직 겨울옷에서 완전히 해방되기 어렵다.

 

선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봄을 잊어야했다. 원래 봄은 희망의 계절인데, 선거에 얽매인 사람들에게는 ‘고난의 계절’ ‘시련의 계절’이었다. 게다가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다행이 선거에서 이기면 모든 고생의 대가를 받지만, 떨어지면 돈 잃고 사람 잃고, 바보되고 패가망신하는 잔인한 계절이었다.

 

시장 선거에서 백상무 후보와 정국영 후보는 막상막하, 백중지세였다. 시간이 갈수록 서로 물고 뜯는 난투전은 더욱 심해졌다. 소위 네거티브 전략이었다. 상대의 약점과 잘못, 가식과 위선을 폭로하는 것이 주된 선거운동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치명적인 내용은 서로 간에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정국영 후보가 돈을 준 사건이 터졌다. 지역에서 노인회가 단체관광을 가는데,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에 정 후보가 관광을 떠나는 노인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고 인사를 했다.

 

“어르신들! 평생을 바쳐 우리 지역을 위해 애쓰셨습니다. 어르신들 덕분에 우리 시는 대학도 유치하고, 공단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에서는 그동안 노인복지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이번에 여행 잘 다녀오시고, 앞으로 우리 시가 정말 진정한 노인복지행정을 펴도록 다 함께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노인회 총무에게 커피나 드시라고 하면서 몰래 100만원을 주었다. 노인회 총무는 그런 사실을 노인회 회장에게 이야기했다. 그렇지 않고 혼자 돈을 먹었다가 나중에 알려지면 도둑이 될 것이고, 그렇다고 회원 전체에게 공개해서는 선거법위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노인회장에게만 조용히 이야기하고, 돈은 관광 도중 노인들을 위해 먹을 것을 사서 주었다.

 

그러면서 그 음료수는 노인회장이 개인 돈으로 사는 거라고 둘러댔다. 이 때문에 노인회장은 자기 돈도 아니면서 정국영 시장 후보가 준 돈을 쓰면서 회원들로부터는 노인회장이 큰돈을 쓴 것처럼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았다. 그동안 돈 한푼 안쓰던 구두쇠가 어떻게 이렇게 큰돈을 쓰는지 놀랐다는 찬사까지 받았다.

93. 여자 문제로 3선 고지를 눈앞에 둔 현 시장이 후보에서 사퇴하다

 

경목월 시장은 그 동안 시장을 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젊고 예쁜 여자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 여자들과 놀기에도 바빴는데, 어떻게 나이 먹고 매력 없는 여자 과장과 성관계를 했다는 거짓 뉴스가 돌아다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경 시장 입장에서, ‘나는 여자 과장과는 연애하지 않았고, 다른 젊은 여자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했다. 나는 오피스텔을 얻어놓그 그곳에서 젊은 여자들과 계속해서 성관계를 했다.’는 진실을 밝힐 수도 없었다.

 

여자 과장은 기자들에게 경 시장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성관계는 하지 않았지만, 밖에서 단 둘이 만나서 시간을 보낸 것은 경 시장의 고압적인 태도 때문에 부하 직원으로서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여자 과장은 만일 경 시장이 데이트를 하자고 하는데 거절하게 되면 당연히 한직으로 쫓아버릴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경 사장의 요구를 들어주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자 과장은 경 시장이 늙고 냄새가 나서 만나는 것을 아주 싫어했는데, 어쩔 수 없이 강요된 행위였다고 거짓말을 했다.

 

경 시장은 너무 억울했다. 하지만 자신이 나이 들었고,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여자관계를 너무 문란하게 해서 몸에서 노인 냄새가 나고 악취가 나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그렇다고 경 시장 입장에서 기자들에게, ‘그 여자 과장도 나이 들었고,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고, 그 여자는 향수를 너무 심하게 뿌리고 다녔다.’라고 맞대응을 할 수도 없었다.

 

시장 선거운동이 본격화되자, 각 후보 진영에서는 자신들의 공약이나 선거운동도 중요했지만, 상대방 후보의 잘못이나 비위사실, 여자관계, 기타 약점을 찾아내서 이를 가지고 상대방 후보를 떨어뜨리려고 하는 네거티브 전략에 더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경 시장에 대해서는 그동안 8년 동안 시장으로서 일을 했고, 시장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도 원래 경 시장이 가지고 있던 건설회사는 계속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 시장에 대한 투서나 제보가 많이 들어왔다.

 

관할 경찰서와 검찰청에서도 내사사건으로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경 시장과 문제가 되었던 여자 과장의 남편이 경찰관을 많이 알고 있어, 경 시장이 관청에서 발주하는 대형 건물 신축공사와 관련하여 업자와 짜고 돈을 받아먹었다는 구체적인 제보를 경찰서장에게 했다.

 

이에 경찰서장은 수사과장으로 하여금 특별수사팀을 짜서 본격적인 수사를 하도록 했다. 경찰은 경 시장의 사무실과 자택, 건설회사 사무실을 동시에 압수수색을 했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난리가 났고 이 때문에 경 시장은 판세가 불리해진 것을 알고 후보에서 사퇴했다.

 

2선을 한 현재 시장인 경목월 시장이 여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고 탈락되자, 선거판은 극도로 뜨거워졌다. 시청 국장을 역임한 백상무 후보와 오래 전부터 시장을 노리던 정국영 후보, 그리고 대학교수인 맹공희 교수가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흥신소를 운영하는 김민첩 사장은 평소 가깝게 지내는 정국영 후보를 돕고 있었다. 정 후보는 김 사장의 실력을 알고 있기에 이번에도 상대 라이벌인 백상무 후보와 맹공희 후보의 약점을 알아내고, 비밀공작을 통해 상대 후보들의 선거법위반에 대한 증거를 찾아내도록 부탁했다.

 

김민첩 사장이 이런 중요한 역할을 해서 정국영 후보가 당선되면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이런 약속은 서면으로 작성하고 공증까지 할 성질은 아니었다. 불법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범죄에도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그야말로 상호 간에 믿음이 전제가 되어야 하고,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지켜져야 한다.

 

김민첩 사장은 직원들을 불러놓고 지시를 했다. “우리 회사는 정국영 후보를 지지하기로 한다. 라이벌인 백상무 후보와 맹공희 후보의 뒷조사를 개시해서 그들의 비리와 약점, 잘못을 샅샅이 파헤치기로 한다. 아르바이트생들을 상대 후보 진영에 침투시켜, 상대 후보나 그들의 선거운동원으로부터 돈을 받거나 향응을 받은 다음 증거를 확보하여 이를 정국영 후보 진영에 넘겨주기로 한다. 알았나? 각자 최선을 다해서 반드시 이번 선거에서 정국영 후보를 당선시켜야 한다. 모든 일은 철저하게 비밀이 지켜져야 한다. 이러한 공작이 노출되면 정국영 후보도 끝이고, 우리 회사도 문을 닫아야 한다. 알았지?

 

흥신소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관여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러나 김민첩 사장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지역의 단체장선거에 매우 깊숙하게 개입하고 있었다.

 

이들은 마치 영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첩보작전, 공작활동을 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비장한 표정으로 작전회의를 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밀리에 행해져야 하고, 죽을 때까지 비밀로 간직했다가 무덤으로 가지고 가야 한다. 그것이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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