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59)

길자는 행복했다. 50살이 될 때까지 이런 꽉 찬 느낌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몸에 빈 공간은 전혀 없었다. 코치의 뜨거움이 길자의 차가움을 제압하고 뜨거운 용광로 안에 집어던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새롭게 태어난 길자는 완전히 새로운 여자가 되었다.

그 일은 꼭 새벽 6시에 일어났다. 코치가 술에서 깨어나 보니 길자가 자신을 껴안고 자고 있었다. 코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순간적인 욕정을 참지 못하고 길자를 껴안고 진한 사랑을 나누었다.

길자도 잠이 깼다. 두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진한 애무와 키스를 반복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길자는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일을 마친 다음 길자는 깊은 잠에 빠졌다.

한 시간 정도 더 자고 길자가 일어났을 때 코치는 이미 원룸을 나간 상태였다. 길자는 피곤해서 그냥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숨이 막힐듯한 작은 공간에서 길자는 자신의 초라함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발가벗은 자신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동물적 욕망에 사로잡혀 발버둥쳤던 자신이 너무 미웠다.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어가서 시야도 흐려졌다.

방에서는 아주 퀘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남자 혼자 살고 있는 공간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짙은 공기가 깔려있었다. 검은 악령이 급히 언덕에 뛰어오른 다음 폐속 깊은 심연으로부터 분무기가 뿜어내는 시커먼 색깔이 온 벽에 채색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전까지만 해도 뜨거운 정사를 벌이고 사랑을 나누었던 남자의 부존재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 같으면 절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남자라서 가능한 것 같았다. 여자라면 자신의 홈그라운드에 들어와서 자신을 만족시켜준 낯선 사랑의 주인공을 홀로 남겨두고 냉정하게 외출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길자는 나이 들어 또 다시 남자의 속성을 오해하고 이렇게 자신의 몸뚱이를 함부로 팽개친 것을 후회했다. 자신이 나이 많다고 코치가 완전히 무시하고 짓밟은 것 같아 기분도 나빠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간단히 샤워를 했다. 빨리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코치에 대해 알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길자는 코치의 방에서 이것 저것 하나씩 범인이 자택을 압수수색하는 수사관처럼 코치의 물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코치가 입는 옷, 내복도 살펴보았다.

사진첩이 있었다. 어떤 여자와 찍은 사진이 50여장 있었다. 오직 한 여자였다. 그 여자가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코치와 어떤 관계일까? 방에 여자의 옷이나 물건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옷장 맨 안쪽 구석에 성인용품이 있었다. 코치가 사용하는 자위기구였다. 언뜻 보기에 흉측했다. 비릿한 냄새가 배어있었다. 순간 불쾌했다. 길자는 그것을 보자, 어제 밤 자신이 코치의 성적 도구인 인형(sex doll) 역할을 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코치는 분명 그짓을 할 때 길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자위기구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 생각을 하니 다소 위안이 되었다.

길자는 몹시 궁금했다. 코치 같은 남자는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섹스를 할 여자가 있을 텐데, 왜 이런 자위기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작은 운명 (58)

길자는 지금까지 많은 남자를 만나보았지만, 자신의 마음에 드는 남자는 없었다. 결혼해서 살았던 남편도 남자답지 못해 끝내 이혼했다. 결혼과 무관하게 연애를 했던 남자들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길자는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자신은 왜 남들처럼 남자복이 없는가 하고 억울하게 생각했다. 주변에 보면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여자들이 남자들을 잘 만나 호강을 하고 행복하게 산다.

그런데 그런 여자들에 비하면 길자는 여자로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만나는 남자들마다 한 두 가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대개의 남자들이 소심하고 비겁하고, 야비하고, 째째했다. 그리고 여자를 성적으로만 생각하고 애정도 없었다. 감성이나 낭만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좁쌀만큼도 없었다. 성관계도 남자들이 체력관리를 잘 안해서 그런지 길자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는 남자를 포기하고 치킨집이나 열심히 하고 등산이나 배드민턴 등 취미생활이나 하고 여생을 보내려고 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치킨집에 나타는 헬스클럽 코치의 큐피트 화살에 심장을 맞았다.

그 코치의 화살은 강하고 독했다. 화살촉에 무슨 독을 발랐는지, 길자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코치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진지한 표정, 저음의 음성, 연한 미소, 남자다운 거친 성격이 모두 길자의 가슴에 꽃혔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코치에게 다가갔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일인지, 늦은 시간에 코치 혼자 치킨집에 왔다. 코치는 아무 말 없이 혼자서 술을 시켰다. 평소 마시던 생맥주 대신 참이슬을 시켰다. 그리고 치킨 한 마리에 소주를 맥주잔에 따라 무려 다섯잔을 마셨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정도 술을 단시간에 마시면 응급실에 실려갔다가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OO 공원’으로 옮겨가서 영원한 휴식을 취할 것이었다. 그런데 코치는 전혀 술에 취한 기색이 없이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내에서 나오는 시끄러운 음악은 듣지 않고 있었다. 길자는 코치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세요?”
“아니예요. 그냥 울적해서 그래요. 걱정 말아요.”
“아니예요. 무슨 큰 고민이 있어 보여요.”

한참 있다가 코치는 말했다. 자신이 근무하는 헬스 주인 여자가 코치에게 관심을 보이다가 코치가 전혀 거들떠보지 않자, 코치를 못살게 굴고 있다. 그 원인을 생각해보니, 코치에게 지도를 받는 어떤 의사 부인에게 친절하게 해준 것을 코치가 그 여자와 사귀는 것으로 오해하고 난리를 치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코치는 그 헬스장을 그만 둘까 하는데, 몇 년 동안 자리 잡은 곳이고 보수가 괜찮은데, 속도 상하고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의사 부인의 지도를 다른 코치에게 넘겼더니 그 여자는 또 코치에게 그럴 수 있느냐고 난리를 치고 있다는 것이다.

길자는 코치가 불쌍했다. 그래서 치킨집 문을 일찍 닫고 코치를 데리고 다른 식당으로 갔다. 그곳에서 늦게까지 술을 같이 마시다가 코치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자 코치가 혼자 생활하고 있는 원룸까지 주었다.

코치는 원룸에 들어가자 곧 침대에 쓰러져 골아쓰러졌다. 길자는 그 곁에 누웠다. 그렇게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98. 불법촬영범인을 해병대 출신 노인 두 사람이 추격해서 검거하다

 

“경찰관님! 저 여자분의 피해가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공공연한 장소에서 뒤에 오는 범인이 자신의 치마 속으로 핸드폰을 들이대고 사진을 찍고, 이어서 여자분의 얼굴과 전신 사진을 같이 찍어서 가지고 있다가 인터넷에 올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이상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결혼은 어떻게 합니까? 자신의 팬티가 공공연하게 인터넷에 올라있고, 그것이 영구히 삭제되지 않는다면 살 수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러자 배불만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니, 당신이 변호사야! 검사야! 내가 저 여자 치맛속을 찍지도 않았지만, 설사 어떤 사람이 치맛속을 찍었다고 해도, 피해는 아무 것도 아닌 것 아냐? 여자가 무슨 피해를 본다고 생각해? 인터넷에 올린다고 해도, 어떻게 그 팬티가 저 여자인 것으로 알 수 있는 거야?”

 

여자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고 남의 치맛속은 왜 찍어요? 변태 아니예요? 누구나 자기 치마 속을 찍으면 기분 나쁠 것 아니예요?”

 

경찰관은 매우 골치가 아팠다. 경찰관은 공칠과 불만, 그리고 피해자 여자의 인적 사항만 적은 다름 모두 돌아가도록 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사건은 즉시 기자들이 언론인의 성범죄로 보도를 했을 것이다. 국민의 알권리를 우선시해서 방송인 같은 인사가 지하철에서 여자의 치마 속을 몰래 촬영하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면 그런 피의사실을 보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어떤 장관에 대한 피의사실을 검찰에서 공표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법무부에서는 피의사실을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는 일체 언론에 공개하지 못하게 방침을 정해놓았다. 그래서 경찰관도 불만에 대한 성범죄피의사실을 기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공칠이 아는 기자들에게 이런 사실을 이야기해도 기자들은 기소되기 전까지는 보도하지 않을 것이었다.

 

경찰관이 세사람을 모두 돌아가라고 하고 현장을 떠났다. 순간 공칠은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50미터쯤 걸어가는 불만을 가서 붙잡아 세웠다. 이때 공칠은 피해자인 빨간 팬티의 주인공인 여자도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공칠은 불만에게 불만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불만은 마지못해 번호를 알려주었다. 공칠이 그 번호로 전화를 했다. 어떤 남자가 받았다. 그 남자는 불만의 핸드폰이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주워서 파출소에 가져다주려고 하고 있었다. 공칠은 자신이 그 핸드폰 주인인데 가져다 주면 10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불만은 갑자기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칠은 불만을 따라갔다. 가면서 “강간범 잡아요. 저놈 강간범입니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너무 급히 뛰어가다가 공칠은 발을 잘못 디뎌셔 앞으로 고꾸라졌다. 양쪽 무릎, 양쪽 손바닥, 팔꿈치에서 피가 났다.

 

마침 길을 걷던 해병대 출신 노인 두 사람이 술에 취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도망가는 배불만이 강간범이라는 고함을 듣고 죽기살기로 불만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100미터 이상의 거리가 벌어졌지만, 해병대 옛 전우 두 사람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꾸준히 달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고혈압에 당뇨도 심했지만, 전혀 처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달리면서 ‘하나! 둘! 하나 둘 셋 넷!“ 구령까지 붙여가면서 나중에는 군가까지 불러가면서 목숨을 걸고 추격했다. 2킬로미터 가까이 가서 결국 불만은 해병대원들에게 체포되었다.

 

불만을 체포한 다음 노인 중 한 사람은 다른 노인에게 정중한 자세로 차렷한 다음 거수 경계를 붙이는 것이었다. 아마 군에 있을 때 한 사람은 장교이고, 한 사람은 사병이었던 것 같았다.

 

불만은 다시 지구대로 끌려갔다. 공칠이 찾은 불만의 핸드폰을 보니 빨간 여자 팬티사진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장소에서 몰래 촬영한 여자 팬티 사진이 수십장 들어 있었다. 모두 젊은 여자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있을 때 치마 밑으로 핸드폰을 이용해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공칠이 보니 모두 지저분한 사진들이었다. 그런 사진을 보고 섹시하다거나 성적 매력을 느낄 사람은 감방에서 갓 나온 출소자 이외에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도대체 불만은 왜 이런 사진을 찍고 다녔을까?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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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여자 치맛속을 불법촬영한 범인의 핸드폰을 찾아내다

 

배불만(가명, 48세)은 강조했다. 자신은 법과대학을 졸업했고, 현재 방송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지하철에서 여자의 치마속을 찍을 생각을 했겠느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불만은 여자 약사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살다가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지만, 현재 만나고 있는 여자 친구도 있다고 했다.

 

그 여자 친구도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연예인이라고 암시했다. 이 대목에서 불만은 갑자기 으시대는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경찰관은 입장이 곤란해졌다. 잘못했다가는 억울한 시민을 술에 취한 공칠 때문에 불법도촬혐의로 현행범체포했고, 게다가 체포 과정에서 공칠이라는 민간인이 피의자를 폭행하고 불법적으로 신체수색을 했다.

 

뿐만 아니라 성범죄 피의자는 방송사에 근무하는 언론인이었다. 경찰관은 꼬리를 내렸다. “일단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조사를 마치겠습니다. 피의자가 잃어버렸다는 핸드폰을 확보하면 다시 조사를 하겠습니다.”

 

“아니, 경찰관!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렇게 범죄인 취급을 하고, 폭행을 가하고 그냥 돌아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이 깡패 새끼를 구속시켜주세요. 그리고 내가 억울하게 당했다는 사실을 경찰관이 서면으로 써서 확인해 주세요.”

 

경찰관은 공칠에게 사과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빠른 시일에 불만의 핸드폰을 찾아오라고 했다. 공칠은 기가 막혔다.

 

“경찰관님!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분명히 이 사람은 저 여자의 치마 밑에 핸드폰을 대고 사진을 찍었단 말입니다. 저도 에스컬레이터에서 저 여자 치마 속을 보았어요. 빨간 팬티였어요. 여자 분! 맞지요? 팬티 색깔이 빨갛지요? 그런데 이 나쁜 범인을 그냥 돌려보낸다는 겁니까?”

 

여자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면서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고 있었다. 공칠이 자세히 보니 여자의 치마가 너무 짧았다. 거의 팬티 수준이었다. 공칠은 여자의 나이와 직업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걸 물어볼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공칠은 고등학교 다닐 때 동네에서 어떤 서른 살 먹은 남자가 여자 팬티만 훔치고 다니다가 붙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실이 있었다. 당시 그 남자는 혼자 살면서 이상하게 여자 팬티와 브러자만 훔치고, 수집하러 다녔는데, 나중에 경찰에 붙잡혔을 때 방에 여자 팬티가 빨강, 노랑, 파랑, 초록, 하양, 검정, 보라 등 999개가 있어 모두 압수되었다.

 

팬티 숫자가 천개를 넘지 않고 999개에서 멈춘 이유가 궁금했는데, 그 남자 말이 아홉 구자가 행운의 숫자이고, 999개의 팬티를 모아서 고이 간직하고 있으면 9개월 이내에 멋있는 여자가 나타나 자신의 애인이 된다는 어떤 점보는 노파의 말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 남자는 수집한 팬티가 아무리 더럽고 냄새가 나도 절대로 세탁을 하지 않고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그 남자의 방에서는 24시간 악취로 뒤덥혀있었다.

 

남자는 그 일로 징역을 살고 6개월 후에 출소했는데, 정말 점보는 사람 말대로 9개월이 되는 마지막 날에 이혼하고 혼자 사는 마흔 살 먹은 여자를 만났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성격도 맞고 속궁합도 잘 맞아서 곧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동거한 지 한 달 만에 그 여자가 산 로또가 당첨이 되어 1억원을 받았다. 두 사람은 무척 행복해졌다. 한때 새로 만난 여자가 남자에게 제발 수집한 팬티를 버릴 수 없느냐고 사정을 했지만, 남자는 그것을 버리면 자신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을 해서 여자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

 

다만, 지금처럼 방에 널어놓고 있는 대신, 라면 박스에 차곡차곡 쌓아서 특별히 보관하는 방법에 합의해서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 남자를 변태로 생각하기 보다는 여자 팬티 999개가 결국 그 남자에게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수호신이라고 믿게 되었다. 공칠은 과거 동네에서 있었던 팬티사건을 떠올리며 경찰관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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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7)

고병미는 혼자 살고 있었다. 미용실에서 일을 배우다가 힘이 들어서 그만 두고 대형 슈퍼에서 캐셔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치킨집을 친구와 동업으로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돈철을 만나 연애에 빠졌다.

강우연은 처음에는 병미가 보통이었다. 그런데 워낙 병미가 우연에게 잘 해주고, 가끔 용돈도 주고, 잠자리를 잘 해주었기 때문에 자주 만났다. 병미는 우연과 관계를 하면서도 피임은 아주 철저하게 했다.

“그런데 우연씨는 내가 알던 어떤 사람과 참 비슷하게 생겼어요. 처음 볼 때는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비슷한 사람이 있는가 하고요.”
“글쎄요. 누군데요?”

“병미씨는 나이가 어떻게 돼요?”
“그건 왜 물어요. 나이가 무슨 상관이예요? 서로 사랑하면 되지? 우리가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궁금하잖아요? 나는 서른 살인데.”
“나도 서른 살이예요. 하하하.”

우연은 자신의 나이를 네 살이나 올려 말했다. 여자는 자신의 나이를 15살이나 줄여서 말했다. 그래도 우연과 병미는 엇비슷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병미는 같이 치킨집을 동업하는 여자와 크게 싸움을 했다고 하면서 우연을 만나서 속상하다고 술을 마셨다. 병미와 동업하는 길자는 나이가 50살이었는데, 옛날에 가수가 되려고도 했던 여자였다.

그런데 치킨집에 단골로 오는 헬스클럽 코치를 짝사랑했다. 두 달 넘게 집요하게 길자는 그 코치에게 프로포즈를 해서 마침내 어느 날 합궁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길자는 어려운 경제적 여건에서도 자신의 사비를 들여 코치의 일행이 치킨집에 오면 매상의 절반은 길자가 부담했다.

술에 취한 코치는 정상적인 술값을 따져보지도 않고 길자가 할인해준 술값만 결제하면서, ‘오늘 별로 안 나왔네? 이집은 술값이 싸서 마음에 들어.’하면서 추가로 생맥주를 10잔씩 더 시켰다.

그렇게 어렵게 자신을 희생하면서 어렵게 코치와 하루밤을 잤는데, 자고 난 이후에는 코치가 더 이상 길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 다음부터는 병미에게 말을 걸고, 병미를 테이블에 앉히고 술값을 할인해주지 않아도 더욱 자주 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길자는 자신이 코치와 잠을 잤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코치의 술값을 대신 내주었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만일 장부를 다 까보면 그동안 코치가 먹은 술값을 할인해주고 실제로 길자가 개인돈으로 내준 돈은 절반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결국 길자가 동업자인 병미에게 손해를 입힌 것이었다.


작은 운명 (56)

돈철은 커피 바리스타가 되어 유명한 카페에 취직을 했다. 26살이 되었다. 생활이 안정되었다. 돈철은 열심히 일을 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쉬는 날에는 산악회에 가입하여 등산을 열심히 다녔다.

고등학교 친구 한 명과 같은 산악회 회원이 되었다. 한달에 두 번 정도는 산악회에서 버스를 빌려 전국에 있는 산을 돌면서 등산을 했다.

몇 달 지나자 그 산악회에서 병미라는 여자를 알게 되었다. 산악회 일행은 등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면 7~8명 정도가 남아서 저녁 식사를 하거나 노래방을 갔다. 돈철도 그런 이차모임에 자주 참석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병미를 알게 된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 후 자연스럽게 모텔을 다녔다. 서로 나이도 묻지 않았다. 돈철은 그런 모임에서는 본명인 돈철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름에 들어가 있는 돈(敦)자를 사람들이 돼지 돈(豚)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이름에 있는 철(澈)자로 한글 세대에서는 쇠 철(鐵)로 생각하면 놀림감이 되는 것 같아서였다. 돈철은, pig steel, 즉, 쇠로 된 돼지의 뜻이었다.

원래 돼지는 살이 푹신푹신하고 부드러움이 특징인데, 돼지가 쇠로 되었다니 도대체 그런 돼지는 먹을 수도 없고, 교미도 할 수 없는 이상한 존재로 여겨졌다.

돈철은 원래 집에서는 단순히 ‘철’ ‘처라’ ‘철아’로 불려졌다. 친구들은 일부러 부드럽게 한다고 ‘동철’로 불러주거나, ‘똥철’로 불러주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철자를 빼고 그냥 ‘돈(money)’라고 불렀다.

친구들이 돈이라고만 부를 때는 같이 빵집에 가서 빵을 먹고 돈철에게 돈을 모두 내라고 할 때만이었다. 돈철은 억울했다. 아버지가 왜 자신의 이름을 평범하게 남들이 쓰는 것으로 지어주지, 아무도 쓰지 않는 이상한 한자, 즉 ‘돼지와 강철’ 글자를 섞어써서 복잡하게 만들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꼭 본명을 밝혀야 할 장소가 아니면, 돈철은 자신의 이름을 ‘소(牛)와 유연(柔軟)’을 뜻하는 ‘우연’이라고 했다. 그래서 ‘강우연’으로 행세했다. 특히 대부분의 연예인들이 촌스러운 본명 대신 예쁜 예명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고 꼭 그래야겠다고 맹세를 했다. ‘

최돈철’ 대신 ‘강우연’이라고 이름을 새로 만드니 정말 자신이 예전보다 100배는 부드러워진 것 같았고, 장차 연예인 같은 사회적으로 유명인사가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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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5)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는 고생을 견디다 못해 어떤 남자와 동거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그 남자는 별로 경제적 능력도 없는 유부남이었다. 거꾸로 어머니가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그 남자를 먹여살리는 상황이 되었다.

돈철이 제대할 무렵이 되자, 그 남자는 돈철이 무서워서 그랬는지 어머니집에서 나가서 연락을 끊어버렸다. 어머니는 그 남자 때문에 성병에 걸려 병원을 다니고 있었다. 돈철은 어머니도 미웠고 원망스러웠지만, 그 남자를 도저히 가만 둘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우리 어머니 아픈 사람인데, 어머니를 1년 동안이나 이용해먹고, 게다가 성병까지 옮겼다면서요?”

“무슨 소리야? 자네 어머니 때문에 내가 성병을 옮은 거야. 어머니 때문에 내 마누라까지 성병에 옮았어. 그 문제 때문에 어머니와 헤어진 거야. 어머니는 원래 행실이 나쁜 여자였어. 자네 아버지도 그래서 이혼한 거야. 그리고 내가 돈을 벌어서 어머니에게 다 가져다주었어. 어머니는 원래 낭비벽이 심해. 친구들과 고스톱판에나 다니고, 노래방 도우미 생활을 했어.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피해자인 셈이야.”

“우리 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서 이혼한 거예요. 그리고 어머니는 남자를 모르고, 도박도 하지 않았어요.”
“그건 자네가 모르는 일이야. 어머니에게 가서 물어봐. 내 말이 모두 사실이니까.”

돈철은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 남자의 태도가 너무 당당하고, 혹시 어머니가 그렇게 타락한 것인지 모른다 싶어서 일단 그 남자와는 더 이상 다투지 않고 돌아왔다. 돈철은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 남자는 정말 나쁜 사람이야. 나는 노래방에도 나가지 않았고, 도박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성병은 그 남자가 옮긴 거야. 생활비도 처음 두 달만 주고 나머지는 전혀 주지 않았어.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때리고 협박을 했어. 그리고 너에게 알리겠다고 공갈을 쳤어.”

돈철은 그 남자를 만났다. 보자 마자 그 남자를 폭행했다. 그 남자도 만만치 않았다. 십여분을 돈철과 그 남자는 치고박고 싸웠다. 그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말리고, 경찰에 신고했다.

순찰차가 출동하고 돈철과 그 남자는 지구대로 끌려가고 폭력사건으로 형사입건되었다. 돈철은 그 남자와 끝까지 법으로 가면 그 남자의 처가 돈철의 어머니를 상대로 위자료청구를 할 것이고, 돈철도 벌금을 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너무 절망했다. 아버지에게서 버림 받고, 혼자 남은 어머니조차 너무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돈철은 시간이 가면서 어머니가 너무 불쌍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

그래서 어머니 이모집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혼자 독립해서 살다가 아버지를 만나 결혼해서 살았다. 아버지는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 운전일을 하면서 돈철을 낳고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에게는 끊임없이 여자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해서 그런지 아버지는 바람 피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바람 피는 것 때문에 늘 싸움을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가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아버지는 싸울 때마다, ‘왜 내가 당신만 보고 살아야 하느냐? 당신도 다른 남자 만나라.’라는 억지를 썼다. 그렇게 속을 썩고 살다보니 어머니는 유방암에 걸려 유방절제수술을 했다.

돈철은 하는 수 없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어머니를 모시고 열심히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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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4)

서울의 11월은 쌀쌀했다. 낙엽도 많이 떨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원에는 노란 은행잎이 천지를 뒤덮었다. 그런 은행잎이 거의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돈철은 몇 시간을 술에 취해 깊은 잠이 들었다. 잠을 깨보니 새벽 4시가 되었다. 정신을 차렸다. 안주 없이 빈속에 소주를 한병이나 순식간에 들이켜서 그런지 속도 아팠다. 벤치에 앉아보니 여자 마후라가 있었다.

누군가 지나가다가 돈철이 술에 취해 벤치에서 자고 있으니 불쌍해서 벗어나 얼굴을 가려준 것 같았다. 여자 마후라에서는 진한 향수가 배어 있었다. 그리고 벤치에는 5만원짜리 지폐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구나! 아버지는 나를 버렸는데,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이런 나에게 이런 인정도 베풀어주는구나!’

그동안 돈철은 울어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갑자기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하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가슴속으로 무언가 뜨거운 불덩어리가 치솟아 올라오고 있었다.

돈철은 집으로 향하던 중 24시간 영업을 하는 해장국집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그 시간에도 몇 명의 손님이 있었다. 아버지 비슷한 남자와 젊은 여자가 같이 해장국을 먹고 있었다. 부부 같지는 않았다.

돈철은 순간적으로 아버지의 불륜이 떠올랐다. ‘저 사람들도 분명 아빠와 같이 바람을 피는 사이일 거야.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 시간에 왜 해장국을 먹고 있겠어?’

그 생각을 하니 돈철은 순간적으로 토하고 싶었다. 구역질이 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꿔먹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불륜관계라면 지금 시간에 모텔에 있겠지, 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겠어?’

돈철은 결국 대학은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는 혼자 힘으로 열심히 살려고 마음먹었다. 게임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절실한 현실이 게임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서로 의지하고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가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에 가서도 군생활에 충실했다.

몸이 아픈 어머니는 아버지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죽도록 고생을 했다. 돈철은 고생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군대에서 탈영을 해서 아버지와 젊은 여자를 살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군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원수는 하나님이 대신 갚아준다는 말씀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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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3)

고등학교 졸업반 한참 꿈많고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에서 돈철은 절망했다. 돈철의 운명은 갑자기 무서운 태풍을 만난 것처럼 초강속의 강풍에 뿌리가 뽑히고, 큰가지가 모두 꺾였다. 마지막 남은 작은 가지에 매달려 밤새 흔들리고 있었다. 그 가지에서 떨어져 나가는 날이면 돈철은 곧 강물에 빠져 바다로 휩쓸려갈 운명이다.

사람의 운명은 정말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이나 현상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재벌 회장이 수사를 받다가 자살을 한다. 그 많은 회사 직원들과 엄청난 재산을 두고 무엇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일까? 그 회장이나 직원들, 가족들 모두 수사가 시작되기 전날까지 이런 엄청난 비극의 씨앗을 냄새라고 맡아보았을까?

돈철이 뉴스를 보니 고등학교 통학버스가 전복되는 교통사고가 발생해서 10여명의 고등학생이 부상을 입었고, 한 명은 숨졌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수능시험을 3주 남겨놓고 목숨을 잃었다.

사고 원인은 버스 운전자가 신호를 위반하고 달리다가 우측에서 직진하는 승용차와 충돌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으로서 열심히 막바지 공부를 하고 있는 이 학생에게 이런 일이 순식간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 부모는 앞으로 또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뿐만 아니라 순간적으로 교통신호를 지키지 못하고 교차로를 통과하려고 했다가 대형사고를 일으킨 그 운전자 역시 한 순간의 실수도 인생을 망치고, 남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자신 역시 형사처벌을 받게 되고, 자신의 가족 역시 엄청난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은 사고에서 모든 원인은 오직 한 사람의 순간적인 실수에서 일어난다. 그 운전자가 그 당시 정지신호에서 정지만 했더라며, 그 버스를 들이박아 전복시킨 승용차의 운전자가 신호를 위반하고 진행하는 버스를 들이받지 않고 급정차했거나 조금만 늦게 교차로에 진입해 들어왔덜면 모든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운명에는 인간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사고는 그야말로 몇 초 상관에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돈철의 경우는 달랐다.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 아주 고의적인 사건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젊은 여자의 육체를 탐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조강지처인 어머니를 팽개치고, 자신이 낳은 아들, 돈철까지 황무지에 던져버린 것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혼과 돈철에 대한 보호의무의 포기, 유기(遺棄)은 아버지의 일차적인 목표나 의도는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젊은 여자에 대한 동물적 욕정의 충족이라는 일차적인 행동의 동기와 그 결과에 따른 이차적인 부수적 산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행위의 사회적 평가는 가족의 유기가 더 중요하고 유의미했다.

돈철은 억울했다. 현재의 환경의 변화와 상황의 악화사태는 돈철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돈철은 아버지가 바람을 피고, 어머니와 이혼하는데 대해 아무런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런데 부모의 이혼은 곧 가정의 파괴와 경제적 재난으로 연결되었다. 아버지가 더 이상 보호자 역할을 해주지 않는다는 데에 대한 심한 결핍증세도 몰아쳤다. 혼자 남은 어머니의 연약함과 병약함에 대한 동정심은 강하게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어머니가 존경스럽거나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친구들은 모두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고, 수능시험 치러 가고, 시험장에서 부모 형제들이 합격을 기원하면서 수험생을 응원하고 따뜻한 커피와 엿, 빵을 가지고 가서 가족애가 넘치는 장면을 TV에서 보면서 돈철은 인생 최대의 절망감과 좌절감, 패배의식을 느꼈다.

수능시험을 포기하고 혼자 집에서 방황하던 돈철은 수능시험이 끝나던 시간, 자신도 마치 혼신의 힘을 다해서 수능시험을 보고 나온 수험생처럼 안도의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갔다. 수능시험을 마친 학생들이 여기 저기서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서있었다.

돈철은 자신은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다가 낯선 서울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혼자 살아남은 외국인, 이방인이었다.

마트에서 소주를 한 병 샀다. 마트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은 미성년자인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 안주는 새우깡 한 봉지였다. 동네 공원에 가서 소주를 마셨다. 갑자기 핑 돌았다.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아버지와 그 젊은 여자가 떠올랐다. 두 사람은 발가벗은 채로 침대 위에서 껴안고 희희락락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살의가 느껴졌다. 도저히 가만 둘 수 없었다. 돈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술에 취해 공원 벤치에 누웠다. 딱딱한 감각도 아무렇지 않았다. 어두운 밤하늘을 보았다.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시퍼렇게 무섭게 느껴질 뿐, 창공은 아주 냉정하고 비정한 세계였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인 무(無)였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돈철은 머리를 들어 벤치에 세게 내리쳤다. 그래도 머리에는 통증이 전달되지 않았다. 눈이 감겨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이번에는 아버지의 애인이라는 여자의 나체가 떠올랐다. 아버지와 싸우고 도망쳐 나와 어떤 바닷가를 걷고 있는 못습이 떠올랐다. 돈철은 그 여자를 본 적도 없고, 사진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분명 그 여자였다. 아버지와 무수한 성교를 한 그 여자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번에는 그 여자에 대해 살의(殺意)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여자를 껴안고 성교를 하고 싶은 동물적 성욕이 강하게 일었다. 돈철은 성적 욕구를 참지 못하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위를 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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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2)

아버지는 마지막 생활비를 보내면서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남편 노릇을 제대로 못해 미안해요. 돈철이와 잘 살아요. 나는 더 이상 능력이 없어 당신과 돈철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요.’

어머니는 이혼할 때 위자료도 못받고, 재산분할도 못받았다. 아버지가 방탕한 생활을 해서 아무런 재산도 모으지 못했고, 겨우 살고 있는 월세집 보증금만 어머니 명의로 해놓고 있는 상태에서 아버지가 나갔기 때문이었다.

돈철에 대한 학비나 양육비도 받지 못했다. 어머니는 20년의 긴 세월 동안 한 남자에게 철저히 이용 당하고, 버림 받았으며, 완전히 거지 상태로 내팽겨쳐졌다.

남녀가 평등하고, 여성 파워가 세지고 있는 21세기에도 이런 불평등과 차별, 억울한 현실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사회적인 시스템이나 법과 제도는 여성가족부와 사회 전체의 노력으로 크게 개선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막상 개별적인 가족 내부 문제로 들어가면 돈철 어머니처럼 힘 없는 여성의 권리와 인권은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 사회는 돈철 어머니의 권리를 지켜주거나 보살펴주는데 아주 무기력했다.

아버지의 이런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돈철은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돈철은 그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순종적이었다. 부모 말씀 잘 듣고, 혼자 교회도 열심히 다녔다. 학교에서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무난했다. 운동도 좋아했다.

다만, 아버지가 늘 여자 문제로 어머니와 싸우고 집안 분위기가 무겁고 어두워서 성격은 내성적이고 우울한 편이었다. 그래서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고, 주로 게임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게임은 밤낮없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장차 게임프로그래머를 하면 잘 할 것 같았는데, 그것도 목표는 아니었다. 단순히 시간을 떼우기 위한 심심풀이용이었다. 돈철은 아버지 때문에 그랬는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여자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이상하게 여자를 싫어하고 거부하는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돈철의 친구들은 여학생들과 데이트도 하고 성관계도 하였지만, 돈철은 그런 남녀간의 연애나 성관계를 아주 더럽고 동물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자위행위 자체도 더럽다고 생각해서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성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그 친구들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혼을 강요하고 끝내 이혼까지 하게 되자, 그때부터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극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고, 아버지를 원망하게 되었다. 그런 아버지를 만나게 된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도 비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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