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197)

 

영미는 일단 다른 직장을 알아보기로 했다. 부모님 때문에 지금은 절대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여기 저기 원서를 냈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정성껏 만들었다.

 

김 과장에게 부탁을 해서 눈에 확 띄게끔 자기소개서를 화려하게 만들었다. 그랬더니 여기 저기서 면접을 보러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맹 사장에게 계속 사정을 했다. 예전처럼 다시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맹 사장은 선뜻 노여움을 풀지 않았다. 그러면서 무슨 연유에서인지 요즈음 맹 사장은 다른 여자들도 만나지 않는 것같았다. 영미에게 남다른 정을 느꼈던 것인지, 이상하게 여자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어든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맹 사장은 갑자기 해외 출장을 가게 되었다. 유럽 거래처와 중요한 협상을 하기 위해 프랑스로 7일간의 장기출장을 떠나게 되었다.

 

맹 사장은 출장자 명단에 영미를 집어넣었다. 영미는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장은 요지부동이었다. 맹 사장도 요새 몸이 극도로 나빠졌지만, 회사를 위해 이를 악물고 참고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퇴근하면 집으로 간호사를 불러서 링케루 주사를 맞고 있었다. 그러면서 영미에게도 원하면 링케루를 맞도록 간호사를 원룸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맹 사장 입장에서도 영미는 다른 여자와 달라서 속궁합이 제대로 맞았기 때문이었다. 영미는 김 과장을 만나 상의를 했다.

 

절대로 따라가지 마요. 그냥 사표를 던지고 회사에 출근하지 말아요. 이번에 따라가면 절대로 그 사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요.”

하지만 이런 직장을 어디서 구해요. 이 정도 월급을 주는 데가 없을 거예요. 그리고 꼭 육체관계를 계속해서 원하는 것 같지도 않아요. 출장 가더라도 제가 응하지 않으면 돼요. 그리고 같이 가는 일행이 있는데, 사장님이 저를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김 과장은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 영미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기도 어려웠고, 영미를 경제적으로 계속해서 책임지는 것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미는 하는 수 없이 사장을 따라 프랑스로 출장을 갔다. 사장과 영미, 최 상무, 정 과장 이렇게 모두 네 사람이 비행기를 탔다. 사장은 비즈니스석을 두 개 끊어서 자신과 영미를 데리고 탔다. 최 상무와 정 과장은 이코노미를 타도록 했다.

 

그러면서 영미는 여자고 몸이 약하기 때문에 비즈니스를 타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명했다. 최 상무와 정 과장은 입이 튀어나왔다.

 

아직 영미가 맹 사장의 애인인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사장이 갑자기 페미니스트가 된 것은 나이가 들었고, 우리나라에 여자 대통령, 여자 국무총리까지 나왔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진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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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96)

 

영미는 사장의 의사를 김 과장에게 알렸다. 김 과장은 흥분했다.

영미 씨, 사장은 원래 그런 사람이예요. 아주 나쁜 인간이예요. 그런 악인은 가만 두면 안 돼요. 변호사와 상의해서 혼을 내주도록 해요. 늙은 사장이 나이 어린 여직원을 꼬셔서 성관계를 했다면 분명 무슨 죄가 될 것 같아요. 감방에 보내도록 해요. 내가 모든 걸 책임질 테니.”

 

그건 안 돼요. 모든 건 내가 동의하고 응해서 이루어진 일이예요. 그리고 사장님은 그동안 나에게 잘 해주셨서요. 내가 사장님 전화를 안 받고, 그 즉시 문자라도 보냈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속이 상하고, 충격을 받아 아무 전화도 받지 않으려고 전화를 꺼놓았던 게 잘못이예요. 조용히 회사를 떠날 게요. 그리고 다른 직장을 구하면 돼요.”

 

마침 영미는 사장과 밀애를 즐기는 동안 사장이 준 돈으로 강남에서 제일 좋고 잘 한다고 소문이 난 성형외과에 가서 거액을 주고 성형수술을 받아 그 전과는 외모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래서 달라진 미모를 가지고 취업전선에 나서면 순식간에 외모지상주의에 빠진 얼빠진 늙은 사장들이 비서로 쓰겠다고 혈안이 될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여론 조사결과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사장이 나가라고 해도 별로 겁을 내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장도 사실 영미에게 회사를 그만 두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라고 공갈은 쳤지만, 만일 영미가 발끈해서 사표를 내면 즉시 수리하지 않고 또 고민을 해야 할 입장이었다.

 

사업을 오래 해서 영미와의 사랑 싸움에도 조조나 유비, 제갈공명 같은 고도의 전략과 전술을 머릿속에 넣고 있었다.

 

그래서 맹 사장은 늘 복잡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사업도 늘 이런 식으로 술수를 쓸 생각을 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그리고 본부인(本婦人)뿐 아니라 여러 명의 여자를 동시에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려면 그것은 사업하는 것보다 100배 더 힘이 들었다.

 

성관계를 응대해주는 여자의 입장에서는 그 여자가 그때그때 돈을 얼마 받고 하는 성을 사고 파는 홍도가 아니라면 나름대로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질투심이 있고, 이기심이 가득 차 있어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맹 사장 주변에 많은 여자들이 동시에 가득 차 있지만, 한 여자와 잠자리를 할 때에는 잠자리 전 후 각 24시간동안에는 오직 그 여자 한 사람, ’하나의 사랑뿐이라는 인식을 확고하게 그 여자에게 심어주어야 했다.

 

그래야 그 여자가 까탈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성관계에 응해줄 뿐 아니라, 맹 사장이 그 여자에게서 기대하는 최고 수준의 당도 높은 섹스의 진수, 묘미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맹 사장은 여자를 다루고, 연애를 하는 분야에서는 한국 최고의 챔피언, 금메달리스트, 황태자임에 틀립 없었고, 곧 기네스북에 오를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여자다루기, 불륜의 연애, 섹스의 화신은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문제고, 일반인에게 공개할 수 없는 것이다.

 

청소년축구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면 국민적 영웅이 된다. 헤비급 참피온이 되면 권투계의 영웅이 된다. 식당에서 매출을 많이 올리면 TV에 나가서 음식의 달인이라고 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자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맹 사장의 기술이나 경험, 노하우는 TV에서 출연기회도 주지 않겠지만, 혼자 돈을 들여서 ’1인 방송유투브에서 30분 강연을 했다가는 당장 미친 놈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하기야 비슷한 성향으로 약간 이상한 시청자 100명 정도는 댓글을 달면서 온갖 찬사를 보낼 수도 있는 것이 오늘 날의 서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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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95)

 

김 과장은 사장의 지시대로 오피스텔 주변에 있는 부동산사무소 몇 군데에 매물로 내놓았다. 처음 구입한 가격으로 팔아달라고 했다.

 

그런데 경기가 극심한 불황이고, 오피스텔이 너무 과잉공급되었을 뿐 아니라, 부근에도 새로 짓는 오피스텔이 많아 오래 된 오피스텔은 쉽게 매수자를 찾기 어려웠다.

 

김 과장은 영미를 만나, 사장이 오피스텔을 처분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사장과의 관계는 이미 끝난 것 같으니 대책을 세우라고 했다. 영미는 깜짝 놀랐다.

 

도대체 사장님이 왜 그러는 것일까? 최근에 김 과장님과 만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잘못하면 회사도 다니지 못하게 될 상황이었다.

 

영미는 사장실로 들어가 울면서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사장님! 저희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전세금을 차압당했어요. 그래서 그날 저녁에 너무 속이 상해서 술을 마시다가 전화를 받지 못했던 거예요. 잘못했어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아냐!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야.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과 만나야 해. 나 같은 늙은 사람은 만나면 안 돼. 늙은이 냄새도 나고, 서로 맞을 수가 없어.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잘해주었는데, 내가 사준 오피스텔로 다른 남자를 끌어들이면 그건 잘못이야. 나를 농락한 것이지. 그러니까 모든 걸 끝내기로 했어.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다른 직장도 알아봐. 새 직장 구할 때까지는 그냥 있도록 할 게. 그리고 우리 관계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사장의 태도가 너무 완강해서, 영미는 더 이상 말을 계속할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 억울했다. 한번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을 가지고 이렇게 매몰차게 버린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영미는 그때까지만 해도 비가 오는 날, 사장의 전화를 받지 않은 날, 아버지의 보증채무 소식을 안 날, 오피스텔 앞에서 김 과장을 만난 날, 바로 그 시간에 사장이 길 건너편에서 매복한 상태에서 일거수 일투족을 비록 망원경은 없었지만 두 눈으로 똑똑히 관찰하고 머릿속에 입력해 놓았다는 사실을 알 수도 없었고, 상상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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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94)

 

김 과장은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사장의 태도가 냉정하게 변했고, 틀림 없이 사장이 자신과 영미와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어차피 조만간 회사에서 쫓겨날 거라고 생각하고, 본격적인 자료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미의 경제적 상황이 어려운 때가 좋은 찬스라고 생각하고, 회사 돈을 3억원 몰래 빼돌렸다. 경리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늘천주식회사가 거래업체로부터 받을 돈을 수표로 받아서 회사 통장에 입금시키지 않고 은행에서 현금으로 바꾸었다.

 

회사 장부에는 거래처로부터 아직 대금을 받지 않은 것으로 처리해두었다. 소위 경리담당자로서 회사의 자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착복함으로써 업무상 횡령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그리고 김 과장은 영미를 만나, 우선 급하면 쓰라고 했다. 이자를 받지 않고 무이자로 빌려줄 테니, 1억원을 쓰고, 나중에 천천히 갚으라고 했다. 영미는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절했으나, 김 과장이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선의로 도와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받았다.

 

특히 김 과장이 회사자금을 횡령해서 마련한 돈이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만일 그런 사정을 조금이라도 알았거나 눈치 챘으면 영미는 당연히 거절했고, 더 이상 김 과장을 상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 과장은 영미에게 5만원권으로 바꾸어서 1억원의 현찰을 빌려주면서도 영수증도 받지 않고, 차용증이나 각서 같은 것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영미는 김 과장의 마음씨가 고마웠다. 그래서 돈을 받은 지 일주일쯤 지나서 저녁을 샀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순진한 김 과장의 태도에 마음이 움직였다. 술을 많이 마신 영미는 술에 취해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김 과장은 영미를 데리고 영미의 오피스텔로 갔다.

 

그곳에서 영미와 같이 잠을 잤다. 새벽에 술에 깬 영미는 먼저 자진해서 김 과장을 끌어안았고, 두 사람은 아주 뜨겁게, 아주 진한 사랑을 나누었다. 영미는 지금껏 겪어본 남자 중에서 가장 멋있고, 황홀한 정사를 경험했다. 그 때문에 영미는 김 과장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이 생겼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맹을성 사장은 김현식 과장을 불렀다.

 

김 과장. 몇 달 전에 내가 오피스텔을 하나 회사 자금으로 구입해 놓은 게 있어. 역삼동에 있는 건데, 명의는 편의상 비서실의 고영미 앞으로 해놨어. 그런데 아무래도 계속 직원 앞으로 명의를 해놓는 것은 이상하니까 고영미와 상의해서 매각하도록 해. 매매대금은 나에게 직접 가져다 주고. 그때 25천만원에 샀는데,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빨리 처분해 주게. 알았지?”

. 사장님. 곧 부동산에 내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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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

 

그해 겨울은 최악이었다. 몇십년 만에 찾아온 최고 추운 날씨였다. 눈도 1월에 폭설이 쌓여 도심의 교통도 마비될 정도였다. 출퇴근길에 차량이 빙판에 돌다가 충돌사고를 일으키는가 하면, 눈길에 미끄려저 정형외과를 찾는 골절환자는 전년도에 비해 80%나 증가했다.

 

사람들은 겨울에 고생한 것이 지긋지긋해서 2월이 오기를 학수고대했다. 겨울의 낭만이라든가 아름다운 겨울이야기는 생활의 편리함이 짓밟히고, 사건사고가 잇따르자, 겨울은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되어야 할 계절이 되고 말았다.

 

2월이 되자 정말 언제 그랬느냐는 것처럼 날씨가 좋아졌다. 꽁꽁 얼었던 한강물도 순식간에 다 녹았다. 하얀 순백색으로 뒤덮였던 초원 위로 시퍼런 강물이 솟구쳐 흐르기 시작했다.

 

발렌타인 데이가 다가오자 젊은이들은 예년과는 달리 곧 다가올 봄을 맞이하는 축제의 예행연습을 하려는 것처럼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설레이기 시작했다. 정현도 유미와 함께 214일에 만나 저녁 식사를 하기로 이미 약속을 잡아놓았다.

 

사랑하는 연인들을 맺어주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발렌티누스 주교를 위해 건배해요.”

우리 사랑을 위해 건배해요.”

건배!”

 

두 사람은 와인을 마셨다. ‘사랑하는 연인’, ‘우리 사랑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두 사람은 과연 사랑하는 연인인가,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은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언어는 이런 점에서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는 매우 부정확하다.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미움인지 모른다.

 

설사 사랑의 개념을 다른 사람을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또는 다른 사람을 아끼고 위하며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한다고 해도, 지금 두 사람의 마음이 여기에 정확하게 해당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객관적인 평가기준이 없을 뿐더러, 그것을 교량할 과학적 장비가 아직까지는 고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연인이라는 말에 이르서는 더욱 애매모호해진다.

 

연인(戀人)이란,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을 말하는 것인데, 사랑 자체가 순수한 한글로서 개념 자체가 불분명하다.

 

그런데 연인은 한자말이지만, ’사랑하는관계에 있는 두 사람을 말한다고 하니, 이 또한 귀로는 들리지만, 머리 속이나 가슴 속으로는 전혀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이나 연인이라는 말의 뜻이나 개념이 어찌되었든, 지금 이 시간 정현과 유미는 행복했다. 서로가 사랑하고 있고, 사랑한다고 믿었으며, 연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벌써 30년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뿌리를 내린 소중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연이고 운명이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두 사람만이 끈질기게 손에 잡으려고 애썼고, 그럼으로써 성취한 작은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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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93)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맹 사장은 영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분간 영미를 회사 밖에서 만나지 않았다. 영미가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회사에서 업무상 관계로서만 상대했다.

 

또한 김현식 과장의 업무에 대해서도 최 상무를 시켜 은밀하게 제대로 하고 있는지, 경리상의 부정은 없는지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영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비가 오던 날 사장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은 너무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어리석게 남의 보증을 서준 것이 잘못되어 전세보증금에 압류가 들어와서 모두 날아가게 생겼다.

 

아버지는 교회에서 만난 사람이 사업하고 있는데,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을 하니까. 설마 같은 교회 다니는 교인이 사기를 치랴 싶어 보증을 서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 교인은 처음부터 사기를 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회사 경영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회사를 살려보려고 하다가 아버지에게 피해를 준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남의 보증을 서주었다가 그 사람이 부도가 나자 아버지 전세금만 손해를 보게 된 것이었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영미는 사장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전화를 받으면 사장은 당연히 영미의 오피스텔로 와서 영미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든 그짓을 강요할 것이 뻔했다.

 

그런 상태에서 속이 상해 혼자 술을 마시고 12시 조금 넘어서 오피스텔로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곳에서 김현식 과장이 영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 이 늦은 시간에 왠일이세요?”
영미 씨! 할 말이 있어요. 제발 사장과 만나지 말고, 내게로 돌아와요.”

과장님! 저희 아버님이 보증을 잘못 서서 전세금이 모두 날라가게 되었대요. 지금 저는 남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생활이 절실한 거예요. 부모님을 제가 책임져야하는 상황이예요. 그냥 돌아가세요.”

 

전세금이 얼만데요? 내가 빌려줄게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돈도 필요 없고, 그냥 돌아가세요. 우린 이미 끝난 거잖아요?”

영미 씨! 사장과 헤어지지 않으면 내가 사장에게 이야기해서 손을 떼게 만들 거예요. 아니면 사장 부인에게 말을 할 거예요.”

도대체 왜 그래요?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아요.”

정말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영미는 김 과장이 불쌍해 보였다. 아무 능력도 없는 초라한 남자가 골리앗 같은 사장을 상대로 승산이 전혀 없는 싸움을 벌이려고 하다니! 그리고 지금 영미 아버지 문제로 골치 아픈데, 무슨 사랑 이야기를 할까?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쨌든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돌아가는 김 과장의 어깨에 손을 얹고 도닥거려주었다. 술도 많이 취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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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92)

 

김 현식 과장은 영미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고, 영미는 고개를 숙인 채 듣고 있었다. 맹 사장이 길 건너편에서 볼 때, 아마 김 과장이 영미에게 무언가 따지는 것 같았고, 영미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맹 사장은 속이 뒤집어졌다. ‘아니 저것들이! 내가 나이 들었다고, 내가 오피스텔도 얻어주고 생활비 대주는데, 지들끼지 재미를 보면서 나를 감쪽같이 속여!’

 

하지만 이 상황에서 맹 사장은 회사 사장이고, 여비서와 회사 직원 사이의 문제에 공개적을 내놓고 사랑 싸움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가끔 이를 갈았다. 이 가는 소리가 너무 커서 하마터면 길 건너 두 사람에게도 들릴 뻔 했는데, 마침 그때마다 대형 트럭이 굉음을 내고 지나가서 다행이 이 가는 소리는 길을 건너지 못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맹 사장 이는 어금니까지 통증이 느껴졌다.

 

나중에는 왠 일인지 영미가 김 과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김 과장은 영미를 오피스텔로 들여보내고, 택시를 잡아 타고 떠났다.

 

그러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비는 맹 사장만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시간을 맞추어서 내리는 것 같았다. 원래 맹 사장은 사주에 물과는 상극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데리고 가서 봐준 점쟁이도 그랬고, 맹 사장이 나이 들어 돈을 많이 주고 가서 본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역학가도 똑 같은 이야기를 했다.

 

당신은 사주팔자가 물과는 아주 상극이야. 대신 금과는 아주 잘 맞아. 그러니까 물을 조심해야 해. 강이나 바다에는 절대 가지 말아. 대신 나무가 많은 산으로 가.’

 

맹 사장은 지금까지 사주관상을 봐주는 사람이나 역학전문가의 말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어렸을 때, 점쟁이가 물을 조심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무시했다가 죽을 뻔 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 선생님이 맹 사장에게, ‘너는 신체나 운동신경을 볼 때, 수영선수가 되면 좋겠다. 특히 팔과 다리가 길어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멀리 빨리 물속에서 헤엄쳐 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 선생님은 같은 반 아이들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다른 학생들 듣지 못하게 조용히 모든 장점을 이야기해서 기를 살려주려고 했던 것인데, 그걸 오해해서 맹 사장은 어린 나이에 흥분했다.

 

그래서 누나 수영복을 훔쳐가지고 개천으로 가서 수영을 열심히 하다가 물뱀에 물렸다. 다리를 물려서 피가 나고, 병원까지 가서 치료를 받고 겨우 살아났다.

 

그런데도 포기를 하지 않고, 풀장에 가서 다이빙을 하다가 밑에서 배영을 하고 있는 여대생의 가슴 위로 머리를 박았다. 다행이 별로 높지 않은 곳에서 뛰어내렸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 여대생 가슴에 보형수술한 것이 터져 고장날 뻔 했고, 맹 사장의 뇌세포가 10억개는 소멸할 뻔한 대형충돌사고였다.

 

두 번의 사건 사고를 손수 경험한 맹 사장은 그 후에는 절대로 물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사업을 해도 물에 관련된 사업은 가급적 멀리했다.

 

거래처 사장이 운영하던 생수공장을 빚대신 헐값으로 인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뿌리쳤다. 사업보다는 목숨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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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91)

 

그후 맹 사장은 이런 무용담을 학교에 가서 사업설명회를 열고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학생들은 매우 흥미롭게 뱅 사장의 경험담을 경청했다.

 

그러면서 그와 같이 위험한 일을 목숨을 걸고 맹 사장이 한 것은 어린 나이에 투철한 정의감과 시대적 사명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교장선생님에게 건의해서 비록 공부는 못하지만, ‘봉사상’이나 개천변을 정화시킨 ‘환경봉사상’ 정도는 받도록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하지만 맹 사장은 그냥 사회를 위해 작은 일을 한 것뿐이라면서 모든 수상을 거부하기로 했다. 어떤 정신 나간 친구는 맹 사장의 이런 정의로운 사회봉사실천이 계속되면 나중에 분명히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될 것이라고 외쳤다.

 

그 친구는 아마도 커서 정신병원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맹 사장을 비롯한 같은 반 친구들은 수근거렸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 맹 사장은 공부는 하지 않고 일주일에 한번씩 야간순찰을 나갔다.

 

개천변에서 더러운 짓을 하는 개 같은 존재들을 응징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단속 후에 재빨리 도망갈 수 있는 체육복을 준비했다.

 

그리고 빨리 달려야 했기 때문에 올림픽 육상경기에서 100미터 단거리 금메달 수상 선구가 신었다고 하는 나이키에서 나온 비싼 운동화도 한 컬레 구입했다. 너무 비싸서 돈이 아까웠지만, 사회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야구 뱃트는 위험하기도 해서 경찰관 진압봉 비슷한 것을 하나 구입했다. 그리고 호루라기도 하나 샀다. 그것은 일단 섹스를 하는 남자를 한 대 때리고 도망갈 때 피해자가 따라오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빨리 도망가기 위해 매일 달리기 연습을 했다. 덕분에 맹 사장은 학교 운동회 때 100미터 선수가 되었다. 이런 피나는 노력으로 맹 사장은 일주일에 한 건씩 한 50여회의 노상섹스범죄자들의 엉덩이에 정의의 응징을 했다고 한다.

 

일년 쯤 지나자 그 동네에 소문이 쫙 퍼져서 맹 사장 사는 동네의 개천변에서 섹스를 하는 사람은 완전히 사라졌고, 그곳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개천변으로 ‘공용섹스장’이 새로 개발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맹 사장은 그때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상태였고, 다른 일이 바빴기 때문에 남의 관할구역까지 가서 봉사활동을 할 시간도 마음도 없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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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90)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별을 관찰하려던 여자는 안경을 벗고 눈을 감고 누워있고, 그 위에 남자가 올라가서 이상한 연속동작을 하는 것이었다. 맹 사장은 순간 놀랐다.

 

저 남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여자와 레슬링을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여자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위에 올라가서 체중으로 눌러서 고통을 줌으로써 반성하도록 하려는 것일까?

 

두 사람은 숨소리도 죽여가면서 계속해서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 5분쯤 지나더니 남자가 고꾸라지듯이 여자의 배위에서 땅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남자도 여자와 마찬가지로 하늘의 별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맹 사장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아! 나이 먹은 사람들도 저렇게 늦은 시간까지 열심히 별을 관찰하고, 남는 시간에 운동까지 하는데, 나는 한참 공부해야 할 놈이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나도 정신차려야겠다.’고 다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맹 사장은 학교에 가서 건들거리는 친구에게 개천변에서 본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랬더니 세상 경험이 많은 친구는 맹 사장을 등신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풀밭에서 섹스를 하는 거야!’라고 진실을 말해주었다.

 

그 바람에 맹 사장은 학교에서 ‘등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맹 사장은 그 남자와 여자 때문에 자신이 본의 아니게 ‘등신’이 된 것에 대해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일주일 후에 다시 그 ‘별을 찾는 사람들’을 찾아나섰다.

 

아주 어렵게 그 사람들을 다시 찾아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맹 사장이 약간 떨어진 곳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살금살금 다가가서 미리 준비해가지고 간 야구 방망이로 위에서 땅을 보고 엎드려 있는 남자의 엉덩이를 세게 내리쳤다.

 

남자는 한참 열심히 볼 일을 보고 있다가 예상치 못한 핵미사일 공격을 받자 그대로 나가자빠졌다. 복상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그 남자가 조상묘를 명당 자리에 잘 썼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맹 사장은 정의로운 가격을 한 다음, 재빨리 도망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바지와 팬티를 벗고 작업중이었고, 심한 통증 때문에 곧 바로 본격적인 추격전을 벌일 수 없었다.

 

아마 하는 꼬라지로 보아서 군대도 갔다오지 않고, 학교 공부도 안하고, 맨날 여자나 꼬셔서 풀밭에서 ‘2세를 낳는 훈련’을 하고 있는 놈팽이 같았다.

 

그래서 인지 나쁜 짓을 하고 비겁하게 도망하는 맹 사장을 붙잡을 생각을 포기한 것 같았다. 주섬 주섬 바지를 입고, 여자를 데리고 개변천에서 철수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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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89)

 

맹 사장은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도 많았고, 궁금한 것은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과학적 탐구정신이 투철했다. 그래서 지방 소도시에서 살 때,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집에서 가까운 커다란 개천변을 돌아다니며 식물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맹 사장이 살고 있는 개천 주변 4킬로키터 반경에 있는 나무와 식물, 꽃, 특이한 지형지물 등은 눈을 감고 있어도 빠삭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맹 사장이 개천변을 돌아다닐 때 캄캄한 밤에 늦은 시간에 남자와 여자가 붙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 맹 사장은 어린 나이에 매우 궁금했다.

 

도대체 이 시간에 왜 이렇게 어두운 개천변에 나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렇게 오래 붙어있을까? 조용히 숨어서 야생 토끼나 고양이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야생 토끼도 없을뿐더러, 고양이도 잡으려면 낮에 뛰어다니면서 잡아야지, 밤에 가만히 매복하고 있어서 어떻게 고양이 새끼라도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고등학생 주제에 나이 먹은 어른들에게 가서, ‘왜 이 늦은 시간에 풀밭에 두분이 앉아 무엇을 하십니까?’라고 물을 용기는 없었다.

 

그랬다가 잘못했다가는, 태권도나 검도, 유도 고단자를 만나서 맹 사장의 낭심 급소를 채였다가는 무정자증으로 나중에 아무리 공부를 잘 해서 판사나 검사가 되어도 훌륭한 2세를 낳지 못하고 대가 끊어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맹 사장은 궁금증을 풀기 위해 약간 떨어진 풀밭에서 바짝 엎드려 그들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래야 무엇을 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고, 오래 묵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20분쯤 매복을 하고 관찰하고 있었더니, 갑자기 여자가 풀밭에 누워서 하늘에 별을 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여자는 천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로 보였다.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근시라 가까운 물체를 보려면 안경을 쓰고 보고, 먼 곳에 있는 물체를 보려면 안경을 벗어야 하는 것같았다.

 

하기야 하늘에 있는 별은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망원경으로 보거나, 적어도 근시용 안경을 벗고 봐야 하는 것이 맞을 것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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