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183)
박 상무는 승무원생활하면서 겪었던 이야기 중에 비행기 안의 화장실 이야기가 나왔다. 박 상무는 퍼스트 클래스는 승객이 몇 명 되지 않고, 화장실도 넉넉해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퍼스트 승객들은 좀처럼 화장실도 가지 않는다. 살찐 사람도 많지 않고, 기본적으로 비행기 안에서는 음식도 많이 안 먹는 것 같았다. 그리고 추가로 더 달라고 하는 승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코노미에 가면 비행기 타기 전에 잔뜩 먹고 탄 것 같은데(그건 몸에서 이미 음식 냄새가 나기 시작하기 때문에 즉시 알 수 있다), 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나오는 식사를 하나도 남김 없이 먹어치우고, 물도 여러 컵 얻어마시고, 캔맥주나 와인도 얻어 마시고, 화장실을 자주 간다.
그리고 승객은 많은데, 동시에 화장실 몇 개 없는데 한꺼번에 몰리니, 화장실 앞에서 젊잖게 양복을 차려입은 신사들이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 더러운 배설행위를 하려고 서있는 것을 보면 ‘역시 인간은 먹고 싸야 하는 동물과 다를 게 없구나!’하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박 상무는 획일적인 배식을 하면 주는 대로 먹고 말지, 인천공항 출발한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일회용 고추장을 더 달라고 하는 사람 앞에서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군대에 갓 입소한 신참이 식당에서 배식하는 고참병에게 고추장 더 달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고참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열달 넘게 죽을 고생해서 상병이 되었는데, 이런 훈련병에게서 고추장을 더 달라는 치욕적인 명예훼손을 당하다니 조상에게 면목이 없게 되었다. 배식하던 국자를 집어 던지고 할복자살하고 싶을 정도다.
고참의 조상은 신라시대 왕을 지냈다는 경주 김씨다. 그토록 천년 전에 화려했던 서라벌의 왕조 후손이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 훈련병으로부터 고추장 모욕을 당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건 1910년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넘긴 경술년 국치보다 더 심한 치욕이었다. 고참은 스스로 살기를 포기하고 훈련병에게 고추장을 큰 스푼으로 떠서 다섯 번이나 담아준다.
훈련병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추장을 모두 입에 처넣는다. 그리고 그날 훈련병은 복통 때문에 의무실에 가서 이승과 저승 사이를 다섯 번이나 왔다 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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