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3)

젊었을 때 걸어다니는 영어사전이라고 불렸던 노인은 늙어서도 자신의 영어실력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영어단어를 많이 외우고 있다는 것이 큰 자랑거리는 아닌데도 노인은 병적으로 영어단어에 집착했다.

어느 날 가까운 한 친구가 그 노인에게, “만일 소말리아 남자가 한국어사전을 씹어먹고, 매일 한국어 단어만 외우고 있다고 하면, 누가 크게 존경하겠느냐?”고 빈정댔다. 그러자 노인은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소주병으로 친구의 이마를 내리쳤다. 병으로 맞은 친구의 머리는 돌처럼 단단해서 머리에 상처는 전혀 나지 않고, 오히려 술이 반쯤 남아있는 소주병만 깨졌다.

걸어다니는 영어사전은, “화를 내서 미안하다. 하지만 네 머리는 어째서 그렇게 단단하냐? 소주병만 깨지고 네 머리는 아무 표도 나지 않고 말짱하다!”고 물었다. 친구는, “영어단어를 열심히 외우지 않아서 그런 거야. 영어든 일본어든 외국어 단어를 열심히 외우지 않으면, 머리는 단단해진다고 들었어.”라고 대답하면서 어금니를 오랫동안 깨물고 있었다. 겉으로 부어오르지는 않았지만, 아프기는 무척 아팠던 모양이었다.

그 노인은 동백꽃 피는 마을에 와서 술을 마실 때도 한국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간단한 영어 단어만을 열거하면서 의사표시를 했다. 다만, 자신의 과거를 자랑할 때는 영문법을 잘 모르니까 접속어만 영어로 하고 나머지는 한국말로 했다. 그런데 혼자 독학을 해서 그런지 액센트나 억약은 완전히 조선시대 말기 영어였다.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조선시대 양반들은 선교사들로부터 영어를 배울 때도 완전히 높낮이 없이 젊잖게 충청도식으로 발음을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렇게 한국식으로 천천히 액센트 없이 영어 단어를 발음하니까 한국 사람들은 알아듣기 쉬웠다. 그리고 만일 청중이 알아듣지 못해서, ‘Beg your pardon?’이라고 물으면, 세 번까지는 반복해서 영어로 단어를 발음한 다음, 그래서 머리 나쁜 일부 여성팬이 다시 똑 같은 질문을 하면, 그때는 노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가지고 다니는 영어사전을 꺼내서 신속하게 찾아서 보여준다. 포켓용 영어사전도 1960430일 출판된 것으로서,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는 즈음해서 나온 것을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었다. 글씨가 너무 작고 종이 색깔도 바래서 조명이 어두운 술집에서는 시력이 2.0인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운동선수조차 영어단어나 그 뜻을 읽을 수는 없었다. 한번은 어떤 아가씨가 노인이 보여주는 영어사전을 불빛이 환한 화장실에 가지고 가서 확실하게 보고 오겠다고 하다가 화장실 바닥에 어떤 손님이 토해놓은 배설물에 미끄러져 영어사전을 배설물 위에 떨어뜨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 아가씨는 노인에게 맞아죽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영어사전을 화장실에 놓고 뺑소리를 쳤다. 아가씨가 화장실에 가서 돌아오지 않자. 술집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혹시 그 아가씨가 그 영어사전이 골동품으로서 TV에서 하는 진품명품코너에 가지고 가서 팔아먹으려고 나쁜 마음을 먹고 튀었는 줄 알고 술집 전체에 비상을 걸어 화장실을 비롯해서 아가씨의 소재를 확인했는데, 아가씨는 보이지 않고, 술집 남자종업원이 영문도 모르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아가씨를 찾는다고 하면서 바닥을 보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영어사전을 발로 짓밟아버렸다. 그래서 아예 몇장이 찢어져나갔다. 나중에 그 노인은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영어사전, 자신이 죽으면 큰아들에게 물려줄 영어사전이 군화발로 짓밟히고, 바닥에 어떤 놈이 토해놓은 배설물에 짓이겨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고 말았다. 다행이 병원응급실에 실려가서 의식은 회복했지만, 깨어난 다음에도 오직, “내 사전! 내 사전!”하면서 병원이 떠내려갈 정도로 울부짖었다. 병원 사람들은 노인의 발음이 약간은 영어발음처럼 들렸기 때문에, ‘내 사전, 내 사전이라는 노인의 음성은, ‘내 사정, 내 사정이라고 하는 것으로 알아듣고, 그 노인이 자위행위를 너무 심하게 하다가 실성했든가, 아니면 젊은 여자 애인이 사정을 받아주지 않고 도망갔기 때문이라고 선의로 해석했다. 같은 병원에 입원했던 어떤 여자 수녀 한 분은 노인을 공연음란죄로 형사고소해야 한다고 격분해서 말했으나, 종교인이 남을 처벌해달라고 고소를 하는 것은 캐돌릭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참는다고 말을 했다.

한번은 술집에서 미국 군인 커플이 와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중에 그 미국 손님들과 술값문제로 분쟁이 생겼다. 조니 워커를 한 병 다 마시고 나서 술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불평을 하는 것이었다. 정말 술병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술집에서는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술집 주인과 종업원들은 매우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아무리 손짓 발짓을 대 해도 상호 간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미국 남자는 자꾸 조니 워커 술병을 자신의 코에 대고 쿵쿵거렸다. 그리고 여자 친구 코에도 댔다. 술집 주인의 코에도 들이대려고 했다. 술집 여자 주인은 그 미국 사람이 술병으로 자신의 코를 쑤셔서 코뼈를 부러뜨리려는 것으로 알고 기겁을 했다. 남자 종업원이 코로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건 분명이 미국인이 술을 다 마시고, 그 안에 소변을 넣어서 씻어낸 것 같은 냄새였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미국인과 여자 손님은 테이블에서 일어난 사실이 없었다. 그건 술집 종업원들이 잘 알고 있었다. 두 시간 넘게 테이블에서 일어나지 않고 계속 술을 마시고 둘이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종업원들은 미국 사람들은 오줌보가 큰가 보다고 하면서 자기들끼리 대화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종업원 중에 한 사람이 예전에 감방에 갔다온 사실이 있어, 형사사건에 관해 전문지식이 많았다. 그 종업원은 주인에게, “저 친구들이 술집에 들어올 때 몰래 소변을 받아 숨겨가지고 와서, 술을 다 마시고 그 준비한 소변을 병에 넣었다가 꺼내버린 것 같아요.”라고 탐정처럼 추리소설을 썼다. 그러자, 술집 여주인은, “그러면 김부장이 빨리 테이블 밑바닥에 소변이 쏟아져있는지 수사해바요.”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김부장이 테이블 밑 바닥에 엎드려 아무리 코를 대고 소변냄새를 찾으려고 해도 바닥에서는 소변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소변은 물론 바닥에는 전혀 물기가 없었다. “아마도 저 사람들 가방 같은 소지품에 소변이 담겨있는 비밀용기가 있을지 몰라요!”라고 탁월한 추리결론을 낸 것은 여자 종업원이었다. 그 여종업원은 술집에 나오기 전에 한 동안 경찰관과 연애를 했던 경력이 있어 경찰에서 범인을 잡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여주인 입장에서 미국인들의 가방속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고 있는데, 마침 그 시간에 영어사전이 여자 친구와 같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술집에서는 그 영어사전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미국 손님들은 그 노인이 미국에서 태어난 ‘Korean American'인줄 알고 몹시 반가워했다. 노인은 일단 평소 속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영어사전 복사한 것을 탁자에 꺼내놓고 미국인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주장을 빠른 속도로 원어민영어로 했다. 영어사전은 입장이 난처했다. 웬만한 영어는 단어를 보면 그 뜻을 알겠는데, 회화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렇다고 못알아 듣는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었다가는, ’영어사전이 아니라, ’영어송장으로 불리워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 우선 가만히 듣고 있었다. 미국 사람은 아무리 떠들어도 노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면서, 얼굴이 빨갛게 핏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겁을 먹었다.

노인은 점점 빨간 빛을 띠더니, 시간이 가면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얼굴 근육도 굳어져갔다. 미국인은 전에 이태원에서 깡패에게 집단 구타를 당한 역사적 경험이 있어, 아차 싶었다. 게다가 그 노인의 인상이 이태원 깡패 두목과 아주 비슷했다.

눈이 갈치눈처럼 작고 째진 것이 표독스러웠다. 입을 오므리고 있는 것이 한 시간 동안은 절대로 입술을 열 것 같지 않았다. 공연히 양주 한 병 공짜로 얻어먹으려고 했다가 한국에서 뼈도 못추리고, 미국으로 화물편에 실려갈 것을 예감했다.

미국인 두 사람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이야기하더니, ’We are very sorry.'라고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신용카드를 종업원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값을 계산하고 1.4후퇴 때 불리해서 도망가듯이 빠른 걸음으로 술집을 나갔다.

술집에서는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4강진출을 확정짓는 결승골을 넣은 것처럼 환성이 터졌다. 화장실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있던 여자손님 일행들도 손뼉을 치며 환호를 했다. 사건해결의 스토리를 전해들은 동네 파출소에서도 경찰관이 영어사전 노인의 사인을 받기 위해 긴급출동하기도 했다.

술집 손님들이 모여들어 그 노인에게 물었다. “아까 그 미국 군인의 덩치로 보아 헤비급 권투선수같던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까?”

노인은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을 따라 온 여자 친구에게 손짓으로 술을 따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서 두 잔을 연거푸 마셨다. 그리고 조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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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3)

 

그 노인은 이런 일이 있은 다음, 일주일에 한번은 반드시 그 술집을 들렀다. 여종업원 백나미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노인은 돈을 꽤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신용카드는 절대로 쓰지 않았지만, 지갑에 늘 현금을 가득 채워가지고 다녔다.

 

5만원짜리만 100장 정도 있었는데, 돈계산을 할 때에는 일부러 지갑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지갑안에 5만원권 신권이 꽉 차 있는 것을 보는 사람들은, “회장님은 왜 그렇게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니세요?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분실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라는 질문을 했다.

 

“내가 젊었을 때 돈이 없어 고생을 많이 했거든. 그래서 돈에 한이 맺히고, 돈이 원수가 되었어. 그 때문에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나는 지갑 안에 현금을 가득 채워서 가지고 다니는 것이 평생 버릇이 되었어. 그전까지는 만원짜리를 가지고 다녔는데, 5만원짜리가 나와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돈을 많이 가지고 다니면, 기분이 좋아져. 다른 사람들은 지갑에 현찰이 몇만원밖에 없잖아? 어떤 사람은 몇천원밖에 없는 경우도 있고.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나는 우쭐해져. 아! 내가 정말 부자구나! 저 사람들은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다.”

 

노인은 그러다가 한번은 술을 마시고 술집에서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지갑을 잃어버렸다. 끝내 못찾고 말았는데, 그 지갑 안에는 주민등록증, 현금 635만원, 애인 사진이 있었다.

 

너무 억울해서 일주일간 단식을 하면서 지갑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노인이 지갑 때문에 단식을 하고 있는 동안, 야당 국회의원들은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 한다고 한겨울에 단식을 하고 있었다.

 

노인은 수시로 TV 뉴스를 보면서, 유명 정치인이 삭발을 하고 단식을 하는 것이 너무 멋이 있어보여서, 자신은 비록 나라를 위해 단식하는 것이 아니고, 잃어버린 지갑과 그 안에 든 현금과 애인 사진 때문이라는 사적인 동기에서 하는 것이었지만, 오기가 발동해서 그 유명 정치인보다는 더 길게 단식을 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물 이외에는 정말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과거에 보면, 정치인들의 단식은 언론에 보여주기 위한 쇼인 경우가 많았다고 해서, 기자들이 보지 않을 때에는 보좌관이 마치 물을 마시는 것처럼 해서 꿀물이나 비타민, 우유 같은 것을 먹게 했다고 하는데, 노인은 그런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행동은 차라리 단식을 하지 않는게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철저한 단식을 감행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그 라이벌 정치인이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러자 노인은 갑자기 흥분해서 물컵을 벽에 집어던졌다. “저럴 것 같으면 뭐 때문에 단식을 시작했나? 시원찮은 사람같으니라고. 이왕 단식을 하려면 20일은 최소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괜히 저런 사람과 같이 단식을 한 내가 바보다.”

 

경쟁 상대가 쓰러져서 그런지 노인은 정치인이 쓰러진 후 한 시간쯤 지나서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 마침 집에 있던 부인이 노인을 응급조치하여 겨우 살아났는데, 의식이 회복된 다음 노인은 그 정치인보다 자신이 단식을 한 시간이라도 오래 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또 단식할 일이 생기면 그때에는 정말 단식을 제대로 오래 할 헤비급 참피온이나 마라톤 경기 우승자 또는 뱀탕장사 같은 사람이 할 때 시기를 맞추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노인은 단식을 하면서 아들에게 자신이 단식하는 모습을 매일 세 차례씩 사진을 찍어놓으라고 했다. 기념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자서전을 쓸 때 현상해서 증거자료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인데, 아들이 열심히 사진을 찍어놓고, 핸드폰을 분실하는 바람에 증거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노인은 그런 사실을 알고 크게 분개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진을 찍을 때에는 핸드폰 두 개를 가지고 찍어놓아야 하나를 분실해도 다른 핸드폰에 남아 있는 거야. 빨리 핸드폰을 하나 더 가지고 다녀. 알았지!”라는 특별훈시를 했다.

 

그 때문에 노인의 아들은 핸드폰을 두 개씩 가지고 다녔다. 혹시 아버지로부터 중요한 사진을 찍으라는 분부가 있을 것을 대비해서였다. 노인은 그때 잃어버린 애인의 사진이 걱정이 되어서 애인에게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사실과 애인의 사진까지 같이 분실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다른 사진을 하나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애인은 크게 화를 내면서, “그게 말이 돼요? 내 사진을 그렇게 우습게 생각하고 잃어버리니! 분명히 내 사진을 지갑속에 넣어서 가지고 다니지 않았을 거예요. 다른 곳에서 잃어버렸겠지요. 나 말고 다른 여자와 모텔에 갔기 때문에 그 여자가 당신 잠을 잘 때 지갑을 열어보고, 그 안에 내 사진을 보고 꺼내서 찢어버린 것이 확실해요. 어떤 X인지 자백해요. 그리고 그 X을 만나게 해줘요.”라고 다구쳤다.

 

노인은 애인이 너무 말도 되지 않는 죄를 뒤집에 씌우고 울고 불면서 난리를 쳤기 때문에 화가 나서 그 애인을 때렸다. 너무 흥분한 상태에서 폭행을 가했기 때문에 그 여자는 고막이 터졌다. 이 사태를 수습하고 애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노인은 그 여자에게 밍크코트를 사주고, 현금 5백만원을 주었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화를 풀고 노인에게 각서를 쓸 것을 요구했다. “앞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분실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사진을 잃어버리는 경우에는 1회에 금 천만원을 지급할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각서를 쓰고 지장을 찍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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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은 운명 (2)

 

복식은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지금 기분으로는 도저히 그대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방황하다가 이면 도로에 있는 작은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집은 아담했다. 간판도 조그맣게 되어 있었다.

 

‘동백꽃 피는 마을’이었다. 특이한 것은 간판 아래 부분에 아주 작은 글씨로, 冬柏이라고 써놓았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또 camellia 라고 영어로 써놓았다. 왼쪽 위에는 동백꽃 한 송이를 그려놓았다.

 

박식은 한자도 ‘동’자는 알겠는데 백자는 그렇게 쓰는가 의아해했다. 영어로 쓰여있는 camellia도 무슨 뜻인지 몰랐다. 처음에는 어뜻 보아서 카메라로 알았다. 그런데 술집에 왜 카메라로 써놓았을까 생각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camera가 아니었다.

 

그래서 박식은 아이들이 즐겨먹는 캐러멜을 영어로 caramel이라고 쓰려고 하다가 잘못 쓴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쓸데없이 간판 때문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박식은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몇 개 되지 않는 테이블에 손님들이 많았다.

 

작은 룸이 하나 있지만, 그곳에는 이미 손님들이 있었다. 박식은 구석 코너에 혼자 앉았다. 양주를 한 병 시키니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여종업원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박식의 테이블에 앉았다.

 

술에 취한 눈으로 보니 박식에게는 매우 예쁘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특히 첫사랑의 여자와 많은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었다. 박식은 원래 술집에 가서 여자 종업원을 옆에 앉히고 노닥거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날은 이상하게 그 여자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박식에게서는 이미 소주 냄새가 진하게 풍겼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같은 테이블에 앉으면 코를 찡끄려야 하는데, 그 여자는 직업상 돈을 벌기 위해 서비스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남자의 더러운 냄새를 맡기 좋은 프랑스 향수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첫잔을 따르면서 여자는, “사장님은 정말 멋이 있어요. 007 영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로저 무어(Roger Moore) 같아요. 사장님 같은 미남을 만나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예요.” 박식은 물론 007 영화를 좋아했다.

 

그런데 처음 만난 젊고 매력이 있는 여자가 박식을 그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저 무어와 같다고 추겨세우니, 물론 빈말이겠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만일 그 여자가 박식을 ‘장동건’과 비슷하다고 했으면 기분이 나빠졌을 것이다. 박식은 이상하게 한국 남자 배우들이나 연예인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 여자는 몹시 센스가 있는 여자였다.

 

한참 술을 마시다가 박식은 간판에 쓰여있는 영어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여자는 그것이 동백꽃을 영어로 써놓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손님들 중에서 그 영어 단어의 뜻을 동백꽃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딱 한 명 보았는데, 어떤 85세된 노인이었다고 한다. 그 노인은 독학으로 영어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20살이 될 때까지 영어사전을 다 외웠다고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곧 바로 영어사전을 보고 영어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밥 먹을 때 빼고, 화장실에서도 영어 단어를 외웠다고 한다. 심지어 시간을 아끼기 위해 목욕탕에 들어갈 때도 미리 써서 준비한 영어단어를 외웠다.

 

그러다가 노트를 보면서 밑을 보지 않고 열탕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마침 목욕탕 종업원이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밖에 나가 잠그지 않고 있어 거의 100도 가까운 탕속에 미끄러져 들어갔다가 오른쪽 다리에 큰 화상을 입었다.

 

그 사람이 열탕에서 화상을 입을 때 마침 외우고있던 단어가 'burn'으로서, 한국말로 화상, 한자어로 火傷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 사람은 burn이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고, ‘번, 번, 번’이라고 주문을 외우듯이 스무번을 반복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영어 단어에 집중하다 보니 열탕의 물이 아주 뜨거워서 화상을 입을 수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목욕탕 주인에게서 충분한 손해배상은 받았지만, 다리에 화상을 입은 흉터는 평생 가지고 살았다. 그 노인은 화상을 치료한 다음 어떤 조건이 좋은 여자와 약혼을 했는데, 잠자리를 하고 나서 남자의 다리 흉터를 보고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해서 응급실에 실려갔다가 끝내 파혼을 당했다고 하는 가슴 아픈 사연도 가지고 있었다.

 

그 남자는 그 여자에게, ‘내 다리의 흉터는 내가 고의로 만든 것이 아니고, 영어 단어를 열심히 외우다가 실수로 목욕탕에서 열탕에 빠진 것인데, 그걸 가지고 우리 사랑을 깨뜨리면 되느냐?’고 울면서 하소연했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을 만나기 전에 뱀에게 다리를 물리는 꿈을 세 번 꾸었어요. 그런데 당신 다리 흉터가 꿈에서 생생하게 본 뱀의 징그러운 비늘과 똑 같아요. 꿈 속에서 뱀은 나를 저주하며, 나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래서 유명한 역학자에게 가서 물어보았더니 뱀처럼 생긴 사람, 또는 몸에 화상 입어 뱀같은 흉터가 있는 남자를 만나면 서른 살 전에 비명횡사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만나면 안 돼요. 미안해요.’라고 하면서 두 사람이 인연이 없음을 확실하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남자는 그 후 좋은 직장을 얻어 좋은 조건의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는 뱀띠였고, 얼굴도 뱀처럼 생겼다고 한다. 그런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있는 85세 된 노인이 그 술집에 왔다가 간판을 보고, camellia라는 영어 단어가 동백꽃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맞혔다.

 

다만, 그 노인도 젊었을 때는 영어 사전을 모두 씹어먹었다고 하는 전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나이 들어 노쇠해서 그런지 영어로 쓸 때는 ‘l'자 하나늘 빠뜨리고, camelia라고 써놓았다.

 

그래서 술집 주인이 옆에서 보고 있다가 간판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어서 보여주고 대조하면서 ’l'자가 한 자 빠진 것 같다고 했더니, 그 노인은 갑자기 화를 내면, 그건 간판업자가 무식해서 ‘l'자 한 자를 더 넣은 것이지, 자신의 영어실력을 믿지 못하느냐고 난리를 쳤다. 그래서 술집 주인과 종업원이 잘못했다고 하면서 죽을 죄를 지었다고 빌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은 그 자리에서 화를 풀기 위해 소주와 맥주를 가져오라고 한 다음, 벌주(罰酒)로 폭탄주를 열잔씩 마셔야 한다고 명령했다. 너무 겁을 먹은 ’동백꽃 피는 마을‘ 여자 주인과 여종업원은 하는 수 없이 그 노인과 똑 같이 폭탄주 열잔씩을 마셨다.

 

너무 빠른 속도로 폭탄주를 돌리는 바람에 앞에 놓여있는 안주를 먹을 틈도 없었다. 폭탄주가 다 돌아가자, 여종업원은 술이 약해 뻗었고, 여자 주인은 매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죽을 힘을 다해서 마무리지으려고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술값도 계산하지 않고 빤히 여주인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다가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여주인은 놀라서 다른 종업원과 119를 불러 병원 응급실로 갔다. 그 노인이 죽었는줄 알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 다음 날 저녁에 그 노인은 다시 생생한 얼굴로 ’동백꽃 피는 마을‘에 나타났다.

 

그러면서 간밤에 고생한 여주인과 여종업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성의를 표시한다고 하면서 두 사람에게 각각 현금 50만원씩 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동백꽃이 ’camellia‘인 것을 아는 사람은 그 노인뿐이었다는 것이 그 술집의 전설이었다. 그 노인은 한 동안 술집에 단골로 다녔는데, 언젠가부터 오지 않고 아무런 연락이 없다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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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1)

 

그동안 경찰서에서 근무할 때에는 상급자로부터 박식 때문에 사건이 잘 해결되었다는 칭찬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운명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만나지 말아야 할 한 여자를 만나서 한 순간에 이렇게 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박식은 술을 마셨다. 순식간에 소주 2병을 들이키고 새우깡을 입에 넣었다. 새우깡 씹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물론 안주는 씹는 것이 맛이다. 씹어야 술맛을 돋구는 것이다. 원래 박식은 술을 마실 때 오징어와 땅콩을 좋아했다. 이런 안주는 소주나 맥주에 잘 어울렸다. 그러나 양주나 막걸리를 마실 때는 이상하게 오징어와 땅콩은 낯서 이방인 같았다.

 

빈 속에 소주를 쏟들이부으니 속이 짠했다. 그런 느낌은 겪어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 인간이 오감으로 느끼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그 느낌, 그 감각을 다른 사람에게 말이나 글로 전달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박식은 전에도 가끔 고된 일을 마치고 밤늦게 사무실에서 나오면 길거리 포장집에서 빈속에 소주를 마셨다. 소주 한 병이 딱 좋았다. 맥주잔에 소주를 따라서 그냥 마시고, 안주는 오뎅을 몇 개 먹는다.

 

그리고 밤거리를 걸으면 불빛이 크거나 작게 보인다. 불빛이 빠른 속도록 다가오기도 하고, 반딧불처럼 깜빡거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박식의 몸에서 삶의 찌꺼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머릿속이 갑자기 맑아졌다. 때로는 비릿한 냄새가 느껴졌다. 늙은 여자를 껴안을 때 느껴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널려 있는 헹주 냄새 같은 것이었다.

 

박식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산에서 내려왔다. 무엇 때문에 걷고 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본능이었다. 발걸음이 떨어지고,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간다. 인공지능이 명령을 하고 로봇이 움직이는 것처럼 박식의 의지와 관계 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젊은 여자와 늙은 남자, 젊은 남자와 늙은 여자가 보였다. 애완견을 데리고 걷는 아이도 있었다. 강아지를 안고 가는 여자도 있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도 보이고,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도 있었다. 견장에 계급장을 단 경찰관도 있었다.

 

머릿속에 더러운 욕망으로 가득 찬 정치인도 걷고 있었다. 그 정치인 옆에는 따라다니는 내시 같은 남자들도 몇 명 있었다. 내시들이 매우 깎듯한 것을 보니 아마 매우 높은 사람 같았다. 그런데도 그 곁은 지나치니 아주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박식은 순간 동물의 시체가 쌓인 계곡을 지나는 것으로 착각했다.

 

한참을 걸으니 박식과 정을 통했던 여자가 떠올랐다. 한 동안 미워하고 증오했었는데, 갑자기 그 여자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는 끝까지 목숨을 걸고 박식을 지켜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여자의 남편이 너무 나쁜 인간이어서 여자를 괴롭히고, 겁박을 해서 간통사실을 밝혀내고 끝내 박식의 신세까지 망쳐놓았던 것이다. ‘지금 그 여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 생각을 할까? 아니면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박식은 혼란스러웠다. 그럼에도 몸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고, 속이 울렁거려 가끔 토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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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틈틈이 써오던 소설, ‘작은 운명’의 중간 제본작업을 했다. 총 602쪽이다. 아직 전체적인 체계는 잡지 못한 상태다. 그냥 스토리를 죽 써놓은 단계에 불과하다. 더 추가할 내용도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나중에 실제 책으로 출간할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책은 팔리지 않을 것 같으면 굳이 인쇄해서 출판하는 것이 무의미할 것같다. 제본을 해놓고 보니까 그래도 많이 썼다. 놀지 않고 쓴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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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34)

 

하루 아침에 경찰관 신분에서 실업자가 된 박식은 정말 한심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한 것이었다. 자신이 아는 경찰관들 중에는 아예 첩을 두고 있는 사람도 있고, 부인 이외에 애인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돈이 많은 유부녀를 애인으로 두고 있어 용돈을 받아 쓰는 동료도 있었다. 그런 남자들을 보면, 대체로 박식보다 인물도 덜 했다. 매너도 별로였는데, 이상하게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여자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러면서 가정을 아무 문제 없이 잘 지키고, 자녀들 교육도 잘 시키고 있었다. 경찰 내부에서도 평도 좋고, 업무능력도 탁월하고, 상급자 비위도 잘 맞춰서 승진도 빨리 했다. 박식은 나름대로 법과 원칙을 지키면서 철저하게 업무를 수행했다.

 

사건관계인들로부터 부정한 금품인 뇌물을 받지도 않고, 사건과 관계된 사람과는 사무실 밖에서 만나지도 않았다. 가까운 친구들이 경찰에서 수사중인 사건을 알아봐달라고 해도 거절했다. 그러다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어 친구도 멀어졌다.

 

하지만 박식은 일단 경찰관이 되었으니까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부인도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부인과 사이도 좋았고, 자녀도 사랑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터진 것이었다.

 

자신이 담당한 사건에서 열심히 수사를 해주어서 진실을 밝혔을 뿐이었다. 그리고 전임자가 너무 편파적으로 수사를 해서 억울한 여자를 잡아넣으려고 했던 것에 대해 정의감에서 분노를 느끼고 무고죄에 가까운 고소인을 철저히 조사를 하여 피고소인의 무죄를 밝혀주었을 뿐이었다.

 

그런 다음 피고소인이 고맙다고 하면서, 특히 박식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정의로운 경찰관이라고 치켜세우는 바람에 마음이 약해져서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고, 그 여자가 계속해서 만나달라고 간청하고, 또 그 여자 입장에서는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현직 경찰관과 친분을 쌓아두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눈치에서 박식에게 접근하니까 별 뜻 없이 받아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가 사업을 하면서 돈도 있어 보이고, 차도 외제차며, 옷도 고급 옷을 입고 매너도 좋고 해서 같이 드라이브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단 둘이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서 여자가 꼬리를 치니 젊은 남자로서 안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는 그 여자가 다 알아서 말썽이 없게 챙길 줄 믿었다. 그리고 차 안에서 한번 짧은 시간에 가볍게 한 것을 세상에 그 어떤 사람이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여자의 남편이 신이 들린 사람인지, 카섹스를 하고 들어온 여자에게 불륜사실에 대한 의심을 하고, 확신에 찬 나머지 강제수사를 해서 팬티를 압수했다고 하는 사실은 정말 기네스북에 오를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박식은 꽥 소리 못하고 옷을 벗었다.

 

하지만 집에서 부인에게는 그런 사정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부인에게는 박식이 담당했던 사건에서 무죄가 많이 나서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고 했다. 부인은 평소 박식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 무죄를 많이 받아 사표를 냈다고 하니, 더욱 존경스러웠다.

 

한 동안 박식은 술에 취해 살았다. 평소 출근하던 버릇 때문에 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출근 시간이 되면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어떤 때는 자신이 근무하는 경찰서로 무심코 가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경찰서 앞에서 정문으로 들어가는 동료직원들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나도 저 안에 있는 조사실로 가서 악질적인 범죄인을 수사해서 잡아넣어야 할 텐데...’

박식은 경찰서 앞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서 가까운 야산으로 갔다. 슈퍼에서 소주를 두병 샀다. 안주는 새우깡이다. 구두를 신고 있었기 때문에 산에 올라가는 것은 불편했다. 그래도 올라갔다. 힘들게 땀을 흘려야 속이 풀릴 것같았다.

 

계단을 뛰어올라가다 넘어지기도 했다. 무릎에서 피가 조금 나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30분 정도 올라가서 바위에 앉아 시내를 바라보았다. 산 주변에는 아파트가 많았다. 백색 또는 회색의 아파트는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쌓이고 있었다. 늙고 병들고, 실업자가 되고, 이혼하고, 시험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내는 신음소리는 도심의 차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웃음소리도 TV 소음 때문에 바깥에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모두들 폐쇄된 공간에서 극도로 이기적으로, 은폐된 생활을 마지못해 영위하고 있었다.

 

박식은 너무 비참해졌다.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눈물이 뜨거웠다. ‘뜨거운 눈물’의 의미가 다가왔다. 이 세상에는 거대한 운명이 예정되어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학교 다닐 때 열심히 공부했던 것,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경찰관이 되고자 혼신의 힘을 다해 공부를 했고, 어려운 경쟁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비록 십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경찰관으로서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근무를 했다.

 

그동안 박식 때문에 사건이 잘 해결되었다는 칭찬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운명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만나지 말아야 할 한 여자를 만나서 한 순간에 이렇게 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박식은 소주를 들이마셨다.

 

순식간에 소주 2병을 마시고 안주는 새우깡으로 했다. 안주는 그냥 씹는 맛이다. 무언가 씹어야했기 때문에 새우깡을 먹은 것이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 천천히 내려왔다. 도중에 소나기가 내렸다. 옷은 다 젖었지만, 마음은 아주 메마른 상태로 그냥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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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33)

 

강 교수는 같은 대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법대 교수인 박 홍상 교수를 만나서 도움을 청했다. 박 교수는 흔쾌히 돕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박 교수 친구인 전직 경찰관을 데리고 왔다.

 

문박식은 전에 경찰관 생활을 몇 년 하다가 유부녀와 정을 통했다는 이유로 사표를 내고 나온 사람이었다. 당시 자신이 담당하던 사기사건의 피의자로 조사를 받던 여자가 사건이 무혐으로 종결되자 고맙다고 하면서 문박식 경찰관을 찾아와서 식사대접을 하겠다고 했다.

 

박식은 극구 사양했지만, 몇 번에 걸쳐 그 여자가 끈질기게 요청을 해서 하는 수 없이 만났다. 여자는 박식을 만나 식사를 하면서 자신이 억울하게 고소를 당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당했던 고통을 하소연했다.

 

그 여자가 처음 고소를 당했을 때 담당 경찰관은 박식이 아니었다. 다른 경찰관이 그 여자의 사기사건을 맡아서 5개월 동안이나 조사를 했다. 여자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하면서, 많은 증거를 제출해도 그 경찰관은 그 여자가 사기를 쳤다는 확고한 심증을 가지고 계속해서 소환하고 추궁하고 조사를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인사이동 때 그 조사관은 다른 경찰서로 전근을 갔고, 그 후임자로 박식이 이 사건을 담당하게 되었다. 박식이 사건기록을 보니, 너무 편파적으로 조사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박식은 이 사건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했다.

 

고소인과 피고소인을 동시에 불러서 무려 6시간이나 대질조사를 했다. 피고소인이 조사해 달라는 참고인조사도 세명이나 했다.

 

그런 결과 박식은 이 사기사건은 명백히 무혐의라는 심증을 형성했고, 그래서 검찰청에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의견이라는 수사결론을 내리고 송치했다. 그랬더니 검찰청에서는 별도이 조사 없이 곧 바로 무혐의결정을 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 사건의 고소인은 검사의 불기소처분에 대해 항고도 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사건이 종결된 다음 박식을 만나서 그 동안 전에 맡았던 경찰관이 얼마나 편파적으로 수사를 했는지, 그 때문에 얼마나 공포에 떨고 불안해했는지 자신이 당했던 이야기를 울면서 했다.

 

그리고 박식이 얼마나 정의롭고 훌륭한 경찰관인지 말하면서 존경한다고 했다. 그렇게 인연이 닿아서 박식은 그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여자는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 사업을 하고 있는 여자였다. 그래서 박식은 그 여자를 믿고 드라이브를 하고 다니다가 연애를 몇 번 하게 되었다 .

 

그런데 그 여자의 남편이 어떻게 알았는지, 두 사람의 연애사실을 알고 박식을 찾아와서 난리를 쳤다. 처음에는 박식은 몇 번 만나서 식사는 했지만 다른 일은 없었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수많은 사건을 수사해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그 남편은 박식의 정액이 묻은 부인의 팬티를 증거물로 가지고 있었다. 남편은 자신의 부인이 박식과 자동차 안에서 급하게 카섹스를 하고 그냥 집에 들어갔는데, 촉이 특별히 발달한 남편이 강압적인 사실조사를 하여 여자의 팬티에 묻는 박식의 그것을 확보했던 것이었다. 정말 천재적인 유능한 베테랑 수사관의 자질을 구비한 남편이었다.

 

박식은 그 여자가 자신의 앞가림을 잘 할 것으로 믿었는데, 갑자기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 박식이 그 남편에게 잘못했다고 아무리 빌고 용서를 구해도 남편은 어림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 남편은 자기 부인과 이혼할 생각은 없었다.

 

이혼하게 되면 재산분할을 해야 하니까 돈 때문에 이혼은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여자가 남편에게 용서를 구해도 남편은 이상하게 여자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오직 박식이 망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남편은 박식에게 제안했다. “당신이 내 와이프를 더럽혔으니, 나는 너무 억울하다. 이혼할 수도 없고, 평생 더럽혀진 여자를 데리고 살아야 할 것 아니냐? 위자료는 필요 없다. 그러니까 너도 이혼하라. 아니면 너도 네 부인이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하도록 하고 더렵혀진 상태에서 이혼하지 말고 나처럼 계속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사표를 내고 실업자가 되어라.”

 

박식은 정말 더러운 꼴을 당했다. 그 여자를 사랑했던 것도 아니고,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같이 데이트를 해서 크게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박식보다 나이가 열 살이나 많았기 때문에 성적으로 크게 만족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다니 세상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박식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자, 그 남편은 마침내 박식이 근무하는 경찰서를 찾아와서 경찰서장 면담신청을 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박식은 그 날 사표를 내고 옷을 벗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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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32)

 

중국에서 발원된 신종 바이러스 코로나 19 때문에 전국은 어수선했다.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갑자기 확진자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정부에서는 심각단계로 격상시켰다. 강 교수의 대학교에서도 개강을 연기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었다.

 

경아의 이모 진순복이 경아에게 SOS를 쳤다. 순복은 지방에서 작은 술집을 경영하고 있었다. 남편과 이혼하고 재산분할로 받은 돈으로 술집을 인수받아 혼자서 열심히 살고 있었다. 엊그제 53번째 생일을 지냈다고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는데, 갑자기 경아를 만나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우리 술집에 단골로 다니던 전맹삼이라는 남자가 사기를 친 거야. 3천만원을 사기 당했어. 이걸 어쩌지?” 경아는 혼자서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렵지만 강 교수에게 도움을 청했고, 강 교수와 셋이서 만났다.

 

“어떻게 사기를 당한 거지요?”

“전맹삼이라는 사람은 50대 중반인데, 대기업의 인사담당책임자라고 하면서 가끔 우리 술집에 혼자 와서 술을 마시던 사람이예요. 그런데 나에게 그 대기업체에서 자기 통장으로 보내준다고 하는 월급 내역을 핸드폰으로 보내주고, 대기업체에서 근무하는 사진을 수십장 찍어서 보여주었어요. 그래서 나를 비롯해서 우리 술집에서 일하는 종업원들 모두 그 사람을 대기업체 인사담당으로 알고 있었지요. 우리 술집에 와서도 스피커폰으로 해놓고 가끔 이 사람, 저 사람과 통화하는 내역을 들려주는데, 대부분 대기업체에 취직을 부탁하는 전화였어요. 그래서 나도 그 사람에게 내 아들 취직을 시켜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그랬더니 처음에는 어렵다고 하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도 내가 그 사람이 오면 술값고 깎아주고, 여종업원들에게도 특별히 잘 해주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잘 구슬러놓았더니 내 아들 이력서를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이 나서 아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주었지요. 그랬더니 노력해보겠다고 해서 나는 그 사람이 극구 거절하는 것을 무릅쓰고 돈을 5백만원 현금으로 주었어요. 그 사람은 내게서 돈을 받으면서 이 돈은 자신이 가지는 것이 아니고, 회사에서 관계 있는 사람들이 나누어 가지게 될 것이라고 했어요. 자신은 일원 한푼도 이익을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더욱 그 사람을 믿고, 그때부터 그 사람이 오면 술값을 모두 외상으로 한다면서 받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그 후 일주일에 세 번 내지 네 번씩 우리 술집에 와서 살다시피 했어요.”

 

“그런데 왜 사기라는 거지요?”

“그 사람은 그 후 우리 술집 여종업원들을 한명씩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잠을 잤는데, 처음에는 돈을 다른 사람보다 두배로 주었대요. 그런데 몇 번 그렇게 하다가, 그 여종업원들을 주변 형제나 지인들을 그 대기업체에 취직시켜주겠다고 하면서 돈도 주지 않고 공짜로 잠을 잤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장님 아들은 그 회사에 취직이 되었나요?”

“돈을 가져간지 벌써 6개월이 지났는데, 아직까지도 취직도 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그 회사에서 검찰 수사를 받고 있어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지금 와서는 신종 바이러스 코로나 19 때문에 회사에서 면접심사가 늦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코로나 때문에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회사가 검찰 특별수사를 받고 있다면 신규채용이 중단될 수도 있잖아요?”

“그게 아니라, 며칠 전에 그 사람에게 자꾸 늦어지면 돈 5백만원을 돌려주고, 그 동안 외상으로 먹은 술값을 계산해 달라고 했더니, 갑자기 화를 내면서 내가 술집에서 성매매를 시켰다고 하면서 경찰에 고발을 하겠다는 거예요?”

 

“정말 나쁜 인간이네요. 그런데 성매매한 증거는 있대요?”

“처음에는 그 사람이 오면 내가 먼저 술값을 하라고 현금으로 50만원을 주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그 돈으로 아가씨를 꼬셔서 나 몰래 이차를 나갔던 거예요. 그리고 술값은 외상장부에 달아놓기로 했어요. 그렇게 세명의 아가씨들이 처음에는 몇 차례씩 돈을 받고 이차를 나갔던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 돈도 모두 내가 그 사람에게 그때그때 빌려주는 형식으로 주었던 돈이었어요. 말하자면 내 아들 취직 부탁을 하면서 준 돈이었지요. 그리고 그 후에는 아가씨들을 번갈아가면서 데리고 나가 잠자리를 했는데, 그때는 아가씨들도 돈을 받지 않고, 아는 사람 취직부탁을 하는 대가로 공짜로 잠을 자준 것이라고 해요.”

“아가씨들이 처음에 돈을 받고 이차를 나갔다는 증거는 무엇이 있을까요?”

 

“글쎄요. 아가씨들이 모두 말을 맞추어 돈을 받지 않고 그냥 이차를 나갔다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그 남자가 무슨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강 교수는 정말 기가 막혔다. 세상에 이렇게 나쁜 사람도 있을까? 불쌍한 여자들을 사기쳐서 돈도 빼앗고, 몸도 빼앗는 나쁜 남자다. 강 교수는 정의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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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31)

 

그러다보니 경아는 남자 친구들과 한 번도 육체관계를 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에게 딱 맞는 남자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강 교수는 영특하게도 이러한 경아의 생각과 의식을 알아채고 경아를 만나면서 그녀에게 맞게 말하고 행동했다.

 

강 교수는 남녀의 육체관계에 관한 자신의 소견도 발표했다. “기본적으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은 정신적인 것이어야 해요. 육체는 정신에 따라 가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 생식의 본능의 범위에서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고 섹스가 우선하거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 정신적 사랑이 퇴색하고 소멸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렇게 행동했다. 경아는 이런 강 교수의 사랑과 섹스에 관한 소신과 철학에 감동했다. ‘역시 교수님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구나. 사랑의 본질에 대해 아주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구나!’

 

강 교수는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본질적으로 남녀의 섹스는 육체적으로 더러운 것이예요. 성기가 신체에서 배설기관과 같이 기능을 하는 것만 봐도 그런 거예요. 나체 사진이 성적 수치심을 유발시킨다는 것도 마찬가지 이론인 거예요. 누드화는 예술적으로 변형되어 승화되지 않으면 추한 것이지요. 때문에 동물적이고 추한 섹스를 사랑이라는 묘약으로 승화시키고 정화시킬 수 있을 때, 섹스가 아름답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예요.”

 

강 교수는 어디에서 이런 이론을 정립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런 신념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고, 그를 평생 지키려는 사도처럼 보였다. 경아에게 그런 강 교수는 매우 성스러운 수도자처럼 보였고, 그 때문에 강 교수를 존경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강 교수 역시 경아의 이런 순수한 모습을 좋아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는 잘 맞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이 만난 지 6개월이 지난 2월이었다. 강 교수는 부산에서 열리는 학술세미나에 발표자로 참석하게 되었다. 주말에 2박 3일 동안 부산에 머무르게 되었다. 입춘이 지나고 온천지에 봄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겨울 동안 움츠러들었던 만물이 소생하는 시간이었다. 지난 겨울은 그렇게 춥지 않았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눈도 별로 오지 않고, 그렇게 지나갔다. 강 교수는 일부러 자신의 차를 운전하고 부산까지 갔다.

 

최근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비행기를 타기가 꺼려졌기 때문이었다. 고속버스나 고속열차를 타는 것고 찜찜했다. 그래서 힘이 들었지만, 스스로 자가운전을 하고 먼 길을 갔다.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하면 참 기분이 좋다. 혼자서 음악을 들으며, 아무 생각 없이 장시간 어디론가 향해서 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다. 고속도로를 달려보면 한국이 참 넓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참을 달려도 산이 계속되고, 중간 중간에 크고 작은 도시를 지나게 된다. 가끔 넓은 들판도 눈에 띈다.

 

일본에 있는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그 사람의 친척 부부가 크루즈선을 타고 여행을 갔다가 요코하마에서 내리지 못하고 묶여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친척 부부는 70살 가까이 되었는데, 평생 처음으로 부부가 크루즈여행을 갔다가 신종 코로라 바이러스 문제로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벌써 일주일째 격리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배에 승선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감염자는 매일 늘어나서 지금까지 모두 174명이나 된다고 한다.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그 공포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 지인은 강 교수에게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도대체 이렇게 비인도적인 정부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무조건 배에서 내리게 한 다음 특별조치를 취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런 전화를 끊고 강 교수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인생이란 참 별 거 아니구나! 저런 일을 어느 날 갑자기 당할 수 있는 게 바로 인생이다.’라디오에서는 ‘Dust in the wind'라는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부산에 도착해서 호텔을 잡았다. 강 교수는 다른 세미나 참석자들이 주로 머무는 호텔을 피해 일부러 해운대에 있는 호텔을 예약해 놓았었다. 전염병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위축되어서 그런지 호텔도 무척 조용했다.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낮에 행사를 마치고 저녁 6시경 강 교수는 호텔로 돌아왔다. 운전도 장시간 했기 때문에 약간 피로를 느꼈다.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바에 들어가서 혼자 술을 마셨다. 8시쯤 전화벨이 울렸다. 경아였다.

 

“뭐하고 있어요?” “저녁 먹고 혼자 술 마시고 있어요?” “아, 그러세요. 저는 친구 전시회 때문에 부산에 와 있어요.” “부산에 왔어요? 나도 부산에 출장 왔는데, 지금 어디예요? 내가 그곳으로 갈게요.” “저는 지금 부산역에서 SRT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어요.” “그 기차표 취소하고 기다려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

 

강 교수는 택시를 타고 부산역으로 가서 경아를 데리고 호텔로 왔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두 사람은 술을 마시고 지금까지 서로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오래 이야기를 했다.

 

강 교수는 술에 취했지만 일부러 방을 따로 잡아서 경아에게 혼자 자라고 했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이틀 밤을 같이 지내고 같이 강 교수 차를 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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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30)

 

강 교수가 첫 번째로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달라붙는 여자 성경아(28세, 가명)를 성공적으로 떼어낸 과정은 이랬다. 당시 강 교수는 35살이었다. 강 교수는 아직 조교수 신분이었다. 그리고 한참 열심히 교수 일을 하고 있었다.

 

경아는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술학원에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경아의 꿈은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서 화가로서 성공하는 것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려 주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오직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다른 것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경아는 그림 그리는 것과 자신의 몸매를 가꾸는 것에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쏟았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틈틈이 프랑스어 공부를 했다. 파리에 가서 생활하기 위해서였다.

 

경아는 대학원에 등록을 하고 학교에 다니다가 우연한 기회에 강 교수를 만났다. 너무 매력적인 여성이 학교 앞 커피숍에서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강 교수가 먼저 말을 걸어 만남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강 교수가 매우 적극적으로 경아에게 접근을 해서 자주 만나 식사도 하고 영화도 관람했다. 두 사람은 같이 미술전시회를 다니면서 서로 미술에 대한 의견 교환을 나누었다.

 

그 때문에 강 교수도 현대 미술에 관한 공부를 많이 했다. 열심히 미술 공부를 하다 보니 강 교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 보람 있는 일,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 교수가 그동안 해왔던 경영학 공부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공부이고 연구였다.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열심히 노력만 하면 되는 학문이고, 테크닉이었다. 하지만 미술을 달랐다.

 

그것은 원초적으로 미적 감각이 있어야 하고, 특별한 달란트가 필요했다. 창의성과 예술성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다른 사람의 그림을 베끼는 작업은 열심히 노력하면 똑 같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추상화나 디자인은 달랐다.

 

강 교수는 경아의 재능과 열정을 인정하면서 더욱 그녀의 매력에 빨려들어갔다. 처음으로 여성의 정신만을 사랑하는 경지에 도달했다.

 

한편 경아는 그 동안 몇 사람과 연애를 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곧 바로 소개팅으로 만난 대학 4학년 미대생이었다. 하지만 만나면 만날수록 기본적으로 삶에 있어서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었고, 모든 말과 행동이 너무 천박했다.

 

그렇다고 남자다움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머릿속은 텅 비어있었다. 그림 그리는 것 이외에는 책은 한 권도 읽지 않은 것같았다. 인터넷으로 게임이나 하고, SNS를 통해 채팅이나 하는 것이 문자나 글을 대하는 유일한 시간 같았다.

 

반면에 세상일에는 도통해있었고, 정치적인 신념이나 이념에 대해서도 어느 한 쪽에 서서 맹목적인 신앙심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성관계를 무리하게 감행하려고 했다.

 

경아를 만나는 목적이 오로지 성욕을 충족시키려는 발정기의 숫컷 같았다. 동물은 오직 생식의 목적으로만 성교를 한다. 성교라기 보다는 교미다.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교미를 하는 동물은 아직 없다. 경아의 지식이다.

 

그런데 남자는 그렇지 않았다. 경아는 그런 남자 친구의 태도가 아주 징그러워보였다. 때로 동물처럼 보였다. 동물과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경아의 인식이었다. 어느 날 남자 친구는 경아를 태우고 야외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강변에 차를 세워놓고, 처음에는 무드 있는 음악을 틀어놓고 같이 경치를 구경하면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한 30분쯤 지난 다음 남자는 차안에 보관해놓은 양주를 꺼내 안주도 없이 혼자 들이켰다.

 

그리고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조수석에 앉아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있는 경아를 껴안았다. 그리고 키스를 하려고 했다. 경아는 놀랐다. 죽을 힘을 다해 뿌리쳤다. 그리고 침을 뱉었다. 차에서 내려 뛰어 도망쳤다. 그 남자는 그냥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남자와의 연락은 끊어졌다. 나중에 소문을 들으니 그 남자는 그 날 술을 마시고 차를 운전하고 돌아오다가 사고를 내고 형사처벌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경아는 그 후 다른 남자를 만날 때, 첫 번째 경험이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그래서 매우 조심스러웠다. 가급적 거리를 두고 만나면서 그 사람의 외모나 말, 행동 보다 내면의 수준을 먼저 생각했다. 깊이 있는 남자인가, 생각이 있는 남자인가, 머릿속에 무언가 들어있는가를 따졌다.

 

단지 운동이나 하고 술이나 마시면서 성욕이나 채우려는 동물인지 구분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개의 남자들이 그런 부류였다. 그래서 경아는 계속 만남과 이별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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