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195)

 

그러던 강 교수가 이상한 일로 선미를 멀리하고, 그 때문에 선미도 강 교수로부터 멀어졌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그때 발렌타인데이가 찾아왔다. 그날 미경은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무슨 까닭인지 몰랐다. 이미 강 교수에게서 마음은 멀어진 상태였다. 다시 선미의 일상으로 돌아와 많이 냉정을 되찾은 때였다.

 

그런데 문득 강 교수의 품이 그리워졌다. 미칠 듯이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선미는 강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잘 지내고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강 교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미경의 전화를 차단해놓은 것 같았다.

 

한편 강 교수와 가끔 만나 데이트도 하고 육체관계도 하고 있던 선미는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28살 나이에 강 교수와 깊은 관계에 들어갔다. 모든 것은 선미가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강 교수가 선미를 유도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선미도 대학교 다닐 때 남자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풋사랑이었다. 대학시절의 낭만이었고, 남자 친구 역시 미숙하고 서툴렀다. 관계를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청춘의 몸부림에 불과했다. 피임에 급급했고, 아무런 장래가 보장되지 않는 사랑의 유희였다.

 

그러다가 강 교수의 지도를 받고 대학을 졸업하고, 강 교수의 도움으로 회사에 취직까지 했다. 선미는 그때마다 강 교수의 가르침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갔다. 그러면서 교수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존경했다. 강 교수를 만날 때마다 경건한 의식을 치루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강 교수와 차를 타고 야외로 나가 드라이브를 하던 중 강 교수가 인간적으로 매우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선미를 원하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몸을 허락했다.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라 강 교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맡겼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의리였고, 보답이었다.

 

그 순간 선미가 강 교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의 욕정을 채워주는 것뿐이었다. 자신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오직 강 교수가 자신을 통해, 실존의 허망함을 추방시키는 의식을 사제로서 주관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마지막 순간에 강 교수가 절정에 이르러 신음소리를 내뱉었을 때 제물로 바쳐진 작은 양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때부터 선미는 강 교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모셨다. 강 교수가 원하면 기꺼이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바쳤다. 하지만 강 교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선미를 자주 원하지는 않았다. 한 달에 한두 번, 아주 갑자기 연락을 했다.

 

그 행위를 할 때 강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인지, 그 순간에는 언어의 감각을 상실하는 것인지 몰랐다. 강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꼭 감은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식을 치룬 다음, 선미에게는 늘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28살과 45! 17살의 차이였다. 엄청난 차이였다. 하지만 선미는 곧 나이 차이를 극복했다. 만나서 데이트를 하고 연애를 할 때는 그 많은 나이 차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정이란 이끌려 들어가는 것! 그래서 선미는 서서히 강 교수의 품으로 끌려들어갔다.

 

앞으로 자신이 젊은 남자와 결혼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떤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직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의 실존을 맡기고 의지하고, 자신의 영혼을 확인하는 방법은 강 교수의 육체와 정신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선미는 이제 더 이상 강 교수에게 안길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 알게 되었다.

포장마차에서 발열측정을 하다 / 작은 운명 (193)

 

포장마차에 들어간 이슬람교 신자 여자들은 모두 18명이었다. 남편 5명에 부인들은 모두 18명이 따라온 것이었다.

 

남편 4명은 종교법상 허용되는 최대 부인수 4명을 모두 채웠는데, 남편 한명만이 아직까지 부인이 2명밖에 되지 않았다. 부인이 2명인 남자는 지금은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아 남들처럼 4명의 부인을 두지 못했는데, 지금 투자하는 <나훈아통닭집>이 잘 되면 돈을 모아서 나머지 2명의 부인을 채울 거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남자의 신념은, <하면 된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라> <나도 할 수 있다> <여자는 많고, 할 일은 많다> <여자 없으면 못살아> 등이었다. 그 남자는 5년 전에 한국에 와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 부인은 고국에서 결혼했고, 두 번째 부인은 한국 여성으로서 한국에 와서 같은 공장에서 만났다. 두 번째 부인은 처음에는 이런 이슬람교 문화와 종교법을 잘 모르고, 그냥 인도네시에서 결혼했으나, 한국처럼 이혼을 하고 이혼신고만 하지 않고 있거나, 졸혼(卒婚)상태로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사실혼관계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통닭집투자설명회>라는 공식행사에 참관하기 위하여 본국에서 친히 한국에 온 첫 번째 부인을 만나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앞으로 두 사람이 남편을 어떤 방식으로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 긴밀하게 업무협의를 하니 한국에서 생각하는 부부관계와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그래도 두 번째 부인인 한국 여성은 남편에 대해 매우 순종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남편과 첫 번째 부인이 하자는대로 하기로 했다.

 

다만, 위 포장마차, <튀겨도 다시 한번>포장마차에 들어간 이슬람교 신도들 18명 가운데 한국말을 아는 유일한 한국 사람이었으므로, 한국인의 위상이나 품격을 훼손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한국 여성 압둘라 이스마엘 박’(35, 개명 전 한국 이름은 박뚱순, 가명)은 일행들에게 포장마차에 관해 간단한 설명을 했다.

 

우선 포장마차 안에 크게 걸어놓은 살아있는 돼지 한 마리 사진과, 삶아놓은 돼지머리(환하게 웃고 있는 것) 사진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집 포장마차 주인, <남진돈(南眞豚)>씨는 원래 <돼지(pig)>를 태어날 때부터 너무 사랑해서, 이름에도 <돼지 돈>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진돈 사장님의 어머니도 태어날 아들을 <돼지띠>인 연도에 낳으려고 출산일을 예정 출산일보다 한 달 늦추었습니다. 예정 출산일보다 일찍 낳는 경우는 많이 있지만, 일부러 한달씩 늦춘 케이스는 아마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남진돈 사장님은 생후 3년 되던 해부터 새끼 돼지를 애완동물로 같은 방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랬더니 남진돈 사장님은 성장하면서 돼지와 같은 얼굴로 변했습니다. 코가 하늘로 향하고 얼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놓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도 돼지소리를 밑바닥에 깔고 있습니다. 생활습관이나 행동도 돼지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래서 돼지를 존경하게 되었고, 때문에 살아 있는 돼지 사진을 영업장소에 붙여놓았습니다. 저 살아있는 돼지는 남진돈 사장님께서 오래 키우던 돼지의 마지막 사진입니다.”

 

박뚱순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 애완돼지는 남 사장님께서 애지중지하던 것이었는데, 교도소에서 징역을 살고 나온 나쁜 인간이 만기출소한 지 일주일 만에, 남 사장님을 찾아와서, ‘나도 포장마차를 하나 하면서 열심히 살고 싶다. 그러니까 포장마차를 차릴 돈 1천만원을 빌려달라. 그러면 일년 안에 갚겠다.’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남 사장님은 그 전과자에게 돈을 빌려주어도 성실하게 포장마차를 할 사람이 아니고, 결국 돈도 떼어먹히고, 서로 사이가 나빠질 것을 우려해서, “미안하네. 요새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통 장사가 되지 않아. 손님들이 통 포장마차에 들어오지 않아. 좁은 공간에서 서로 밀착해서 음식과 술을 먹어야 하니까, 감염우려가 높아서 그런 것 같아.”라고 변명을 했다.

 

, 내가 매일 가서 들어오는 손님들 체온이 37.5도가 넘는가 체크하고, 노트에 인적 사항 기재할 게. 그리고 특정 종교단체와 연관성이 있는지 여부, 최근에 대구 경북지역을 방문했는지 여부, 중국 우한을 다녀왔는지 여부 등을 확인해 줄게. 그러면 손님들이 바글바글해질 거야.”

 

그 전과자는 그 다음 날부터 체온측정기 10개를 사가지고 포장마차로 왔다. 그리고 대학병원에서 만들어사용하는 코로나 관련 확인서 인쇄된 용지를 100장 몰래 훔쳐가지고 왔다. 그리고 포장마차 밖에서 지나가는 손님들 중 포장마차를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체온계를 귀에 들이대고 체온을 측정하려고 했다.

 

사람들은 기겁을 했다. 인상이 험한 사람이 아무 표시도 없이 갑자기 체온 측정을 하려고 하니 무서워서 도망갔다. 그대로 다행이 몇 사람이 체온측정에 기꺼이 응했다.

 

그런데 그 전과자, <현재범(玄再犯>이 손님 체온을 보니, 39.5도였다. 현재범은 코로나 관련 발열이 37.5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평균 체온이 36.5도인데 그까짓 체온이 1도 높다고 무슨 코로나 위험요소로 보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돼지 콜레라병 때문에 체크하는 기준일 수는 있어도, 사람의 경우에는 면역력도 좋고, 고온에 견디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에 사우나 열탕 온도가 보통 42도인 것을 감안해서 <현재범> 재생추진위원장께서는 위험 체온을 41.9도까지로 정했다. 그래서 체온이 39.5도인 젊은 남녀 커플은 그대로 입장시켰다.

 

다만, 체온은 저체온이라 28도밖에 되지 않지만, 겉모습이 돈이 전혀 없어 보이는 노숙자풍의 손님들은 검사결과 100점 만점을 받았어도, <현재범>의 재량으로 입장을 시키지 않았다.

 

이때 모든 것이 다 합격인데, 왜 입장을 시키지 않느냐고 항의를 하는 사람들이 몇 사람 있었다. 심지어 어떤 손님은 <현재범>의 너무 부당한 처사를 참지 못하고, 사회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뚜렷한 이념을 가지고 <과일 깍는 칼><다이소>에 가서 두 개를 사가지고 와서, 양손에 쌍칼을 들고, <현재범>에게 항의를 했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근거를 나를 포장마차에 입장을 시키지 않는 겁니까? 입장을 시키든지, 내 칼을 받든지 선택하시오.”

 

그랬더니 <현재범>은 연한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자신의 팬티속에서 꾸깃꾸깃 꾸겨진 누런 종이 한 장을 꺼내서 그 쌍칼 든 흥분해서 곧 무슨 일을 저지르고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할 것같은 신사에게 읽어보라고 건네주었다.

 

그 신사는 쌍칼을 한손에 모으고, 칼을 든 오른 손은 계속해서 <현재범>의 목을 향하고, 왼손으로 그 종이를 받아 읽어보았다. 그러더니 그 신사분은 곧 바로 <현재범>을 향해서 무릎을 꿇었다. “존경하는 선생님! 미처 못알아봐서 죽을 죄를 졌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시면 평생 은혜를 갚겠습니다.”

 

작은 운명 (192) <나훈아통닭집> 투자자 선발대회

 

<고음악> 원로선생님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어렵게 위원 50명을 모두 채운 최유전 사장은 본격적으로 투자자 심사에 들어갔다. <나훈아통닭발전추진위원회>는 여러 차례의 위원회 전체회의를 거쳐서 <투자자심사기준>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나훈아통닭>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나훈아 씨를 <가수의 황제>로 평생 모실 각오가 되어있는지 여부, 나훈아 황제의 노래를 100곡 이상 가사 2절까지 모두 외우고 있는지 여부, 향후 남진 노래는 절대로 듣지 않을 각오가 되어있는지 여부, 향후 <나훈아통닭> 치킨만 먹고, 다른 브랜드 치킨은 절대 먹지 않을 각오가 되어있는지 여부, <나훈아통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는지 여부 등에 관한 심사기준을 모두 통과하여야 했다.

 

일단 신청서를 접수마감한 결과, 지역에서 총 6,666명이 신청을 했다. 그리고 타지역에서 총 666명이 신청했다. 그리고 해외에서 66명이 신청서를 DHL로 보내왔다. 일부에서는 이메일로 신청하면 안 되느냐고 문의도 왔지만, 그런 정신 나간 인간들은 모두 제외했다.

 

투자희망자들은, 신청서를 제출할 때, 첨부서류로 주민등록초본, 혼인증명서, 세금납부증명서, 범죄경력증명서, 건강증명서, 졸업증명서 등을 제출해야했다. <위원회>에서는 1차 심사를 해서 모두 200명만 투자자로 뽑기로 했다. 1인당 천만원씩 총 투자금을 합계 20억원으로 정했다.

 

문제는 총 지원자 7,398명의 면접 및 심사를 보는 장소가 문제였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 제일 크고 신용도가 높은 <남쪽방노래방>과 협의하여, 그 노래방에서 면접을 보기로 했다. <위원회>에서는 그 노래방 이름에, <>자가 들어가 있다는 점에 난색을 표했다.

 

그 노래방 주인은 이러한 면접심사를 자신의 노래방에서 볼 수 있는 영광을 놓치지 싫어서 이번 기회에 노래방 이름에서 재수 없는, <>자를 빼버리고, 그냥 <쪽방>노래방으로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투자자심사는 영업이 끝난 밤 12시부터 시작하였다. 일단 투자희망자 7,398명은 <쪽방>노래방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예비군훈련장>에서 집합하기로 했다. <위원회>는 소집시간에 1분이라도 늦으면 자격을 박탈하기로 했다.

 

투자희망자들은 이러한 <위원회>의 엄격한 심사기준을 통보받았기 때문에, 늦지 않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와서 기다렸다. 어떤 사람은 3일전부터 <예비군훈련장>에 붙어있는, <모텔>에서 숙박을 했다.

 

소집이 완료되어 인원점검을 해보니, 7,398명 가운데, 8명이 불참하고, 7,390명이 참석했다. 8명의 불참사유는 다양했다. 한 명은 415일 국회의원선거에 나갔다가 100표 차이로 떨어졌다.

 

그래서 혹시 자신을 찍은 표가 어디 운반과정에서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 싶어서 각 투표장으로부터 <개표장소>까지 자신의 표를 찾으러 부부가 함께 후렛시(핸드폰에 장착된 손전등을 이용했다)를 들고 샅샅이 뒤지고 다니느라고 참석을 하지 못했다.

 

다른 한 명은 미국에서 급히 입국했는데, 공항에서 열이 38도가 나와서 자가격리되는 바람에 참석을 못했다. 한 명은 그 전날 과음을 해서 소집시간을 밤 12가 아닌 새벽 2시로 잘못 알고 2시에 왔다가 퇴짜를 맞았다.

 

다른 한 명은 꼭 참석하려고 했는데, 부인이 원래 <남진 열성 팬>이라 부인이 못가게 해서 부부싸움을 하다가 부인이 후라이팬으로 남편의 안면을 내리쳤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18바늘을 꼬맸다.

 

그래도 그 남자는 얼굴을 완전히 붕대로 감고, 두 눈만 남기고 출석을 감행하였는데, 그 부인이 <예비군훈련장>입구에 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끝내 저지를 당했다. 남편은 부인을 강하게 밀쳐서 넘어뜨리고 뛰어서 들어가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125초가 지난 때였다.

 

심사위원들은 현장에서 <지각>인지, <정상출석>인지를 놓고, 너무 애매해서 하는 수 없이 <비데오판독>절차에 들어갔다. 비데오를 자세히 보니, 그 남자의 왼쪽발은 121초전에 들어갔는데, 오른쪽 발이 125초가 지난 다음 들어간 것이 확인되었다.

 

심사위원들은 무척 안타까워했지만, 심사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각> 판정을 했다. 그러나 심사위원회에서는 그 남자에 대한 인도적 배려 차원에서, 교통비 1,250원을 지급해주었다.

 

투자자심사대회는 밤 12시 정각에 개최되었다. 먼저 단상에 마련된 태극기를 향해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이 있었다. 그리고 애국가는 4절까지 했다. 그 다음, <나훈아 황제>에 대한 절을 세 번 했다.

 

절을 하기 전에 <나훈아> 사진이 대형스크린에 상영되었다. <황제>는 수염을 많이 기르고, 한복을 입고 있었다. 한 손에는 마이크를 들고, 다른 손에는 <국화곷 100송이>를 들고 있었다.

 

참석자들은 세 번 절을 하면서, 큰소리로 <나훈화 황제님!>을 세 번 외쳤다. 맨 뒷좌석에서 어떤 노인이 일어나서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었다.

 

나는 통닭집 투자하러 왔는데, 왜 나훈아를 황제라고 하고, 절을 하라고 하고, 이렇게 우상숭배를 하는 경우가 어디 있소? 이게 무슨 사이비종교단체란 말이요?”

 

사회자는 순간 크게 당황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른 건 다 좋은데, <나훈아황제>에 대한 절을 세 번 시킨 것은 문제가 될 것 같았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부모님 제사도 지내지 않고, 제삿날 절을 하지 않는데, 살아있는 나이도 많지 않은 가수 <나훈아>에 대해 절을 시켰으니 큰 종교적 문제가 될 듯 싶었다.

 

특히 위 참석자 중에는 이란에서 온 사람도 2, 인도네시아에서 온 사람도 3명 있었다. 이슬람교를 믿는 이 사람들은 부인이 2명 내지 4명 있는 사람도 있었다. 대동해 온 부인들은,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합동으로 <예비군훈련장> 밖에 있는 포장마차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회 준비위원회에서는 포장마차 주인에게 이날만큼은 절대로 돼지고시를 팔아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 포장마차 주인, <남진돈>씨는 거꾸로 돼지고기만 팔고, 소고기나 닭고기, 짱어, 홍어, 닭발, 참새구이, 번데기, 삶은 계란, 오뎅은 팔아서는 안 되는 것으로 잘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포장마차에 돼지고기만을 준비해놓았다. 돼지 왕족발, 돼지머리, 돼지족발튀김, 돼지 곱창, 삼겹살, 목살, 오겹살, 흙돼지, 제주도 똥돼지 등을 푸짐하게 준비해놓았다. 그리고 일부러 살아있는 돼지 사진 한 장, 동네잔치 때 쓰는 삶은 돼지머리(환하게 웃고 있는 것) 사진을 걸어놓았다.

 

이슬람교 신자인 부인들은 위원회의 안내에 따라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요원은, “이 식당에서는 이슬람신도분들을 위한 특별 메뉴를 준비해놓았습니다. 마음껏 드세요.”

직은 운명 (191) <나훈아통닭발전추진위원회> 결성

 

최유전은 <나훈아통닭>의 투자자를 선발하는 것을 신중하고 공정하게 하기 위하여, 먼저 <나훈아통닭발전추진위원회(가칭)>를 구성하였다. 그 지역에서 사업가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남자 10명, 여자 10명, 그리고 향토예비군 5명, 민방위대원 5명, 노인요양원 입소자 10명, 노래방 경영자 5명을 먼저 선발했다.

 

그리고 나머지 5명은 사회저명인사로 채울 생각이었다. 이런 소문을 듣고 그 지역에서 국회의원 나갔다가 표를 별로 얻지 못한 건달이 제일 먼저 찾아왔다. 자신이 위원장을 맡아주겠다고 했다.

 

최유전 사장이 관상을 보니, 다음 번 선거뿐 아니라, 평생 국회의원 선거에 죽을 때까지 출마해도 표를 500표 이상을 받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유전은 상대방에 대한 예우를 갖추려고 노력했다. “국회의원 낙선자께서는 우리 추진위원회에서 위원장을 맡게 되시면, 어떤 역할을 하실 생각이신가요?”

 

그랬더니, 상대방은 대번 화를 냈다. “아니 내가 그래도 큰 사업하는 회장인데, 선거에서 한번 떨어진 걸 가지고, 호칭을 <낙선자>라고 한다는 말요? 그건 선생이 실수했다고 치고, 내가 위원장이 되면, <나훈아>를 만나서 매달 한번씩 <나훈아통닭집>에 내려와서 무상으로 공연을 하도록 갈 거요. <나훈아통닭>은 전세계에서 최초로 <나훈아>이름을 통닭집 상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고, 장차 <나훈아통닭>이 한국뿐 아니라, 북한이나 일본,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파키스탄 등 아시아 국가 전역에 걸쳐 프랜차이즈가 확대되고, 더 나아가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태리 등 유럽 전역과 미국, 멕시코, 브라질 등까지 퍼져나가면 토탈 프랜차이즈 숫자가 아무리 못잡아도 100만개는 될 텐데, 그깟 <나훈아>가 별 대수요? 내가 오라고 하면 술마시고 잠을 자다가도 맨발도 이곳까지 뛰어올텐데,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데 회장님께서는 나훈아 황제님을 직접 만나본 적이 있으신가요? 적어도 공연장에서라도 악수를 해보셨나요?”

 

“나는 원래 사업에 바쁘고, 특히 정치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어서 나훈아 같은 조무래기 가수는 만날 시간이 없을 뿐 아니라, 이름 자체를 기억하는 게 힘들어요. 나는 원래 아주 유명한 가수, <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 <신세영>의 <전선야곡>, <백년설>의 <마음의 고향>, <김정애>의 <닐리리 맘보>,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 같은 명곡을 좋아는 편이예요. 이런 노래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명곡이지, <나훈아>처럼 머리 길게 기르고, 꼭 술에 취한 듯한 애매한 표정을 하면서 일부러 가성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는 가수는 사실 별로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 최 사장이 어렵게 우리 지역에다, <나훈아통닭>을 냈으니까 나는 지역발전을 위해 내가 피라미, <나훈아>를 한번 불러보겠다는 것이지 별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야. 그리고 사실 나는 다음 번 선거 준비도 곧 시작해야 하니까, 위원장을 맡아도 끝까지 할 입장은 아닌 거야.”

 

“아니, 회장님, 국회의원선거는 지난 4월 15일 끝났고, 다음 선거는 앞으로 4년이나 더 남았는데, 벌써부터 다음 번 선거운동을 하시려고 그래요?”

 

국회의원 낙선자는 점점 거만해져서 최 사장에게 반말 비슷하게 낮추었다. “원래 선거는 평생 해야 하는 거야. 그런데 요새 뉴스를 보니까 나쁜 사람들이 서울 살다가 선거 직전에 지방에 있는 지역구로 주민등록이전하고, 집은 월세로 몇 달 얻고, 선거할 때는 지역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떠들다가, 당선돼도 서울로 가고, 떨어지면 앞으로 두 번 다시 그 지역 사람 보지 않을 것처럼 짐 다 싸가지고 서울로 돌아가고 주민등록도 전출신고 곧 바로 해버려. 이런 사람들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어. 오직 자신의 부귀영화, 명예를 위해서 지역구민들을 선거 때만 이용해먹는 나쁜 사람들이야. 나는 그런 사람들을 경멸해. 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이 지역을 떠나지 않아. 이사도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 거고. 다만, 내가 사는 아파트가 곧 재건축된다고 해서 그때는 할 수 없지."

 

최유전은 그 낙선자의 말을 듣고 있자니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이런 인간들이 국회의원을 하고 있으니, 나라가 잘 될 턱이 있나! 그리고 떨어진 주제에 어떻게 위원장을 맡겠다는 거야? 그리고 왜 반말이야!’

 

“알겠습니다. 회장님! 제가 가서 더 생각을 해보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응! 그래 나도 바쁘니까 내일 오전 10시까지 확답을 줘.”

 

최유전 사장은 결국 <나훈아통닭발전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그 지역에서 음악선생님으로 정년퇴임하신 <고음악> 원로선생님을 모셨다.

 

<고음악> 선생님은 태생적으로 음악에 뜻을 두신 분으로서 그 부친께서도 일찍이 뜻한 바 있어, 큰 아들 이름을 <음악>이라고 지었다.

 

그 부친은 예능쪽에 관심이 많아, 둘째 아들은, <고미술>로 이름을 짓고, 셋째 딸은, <고배구>로 지었다. 넷째 딸은, <고발레>로 하였고, 여섯째 막내 아들은, <고게임>으로 지었다.

 

그 부친은 자녀들의 이름을 짓기 전에 사주관상을 보는 사람들과 상의도 하고, 예능 분야의 장래에 대해서도 인터넷상에 올라와있는 여러 가지 분석자료를 모두 찾아서 결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큰 아들은 서울까지 올라서 명문 음악대학을 비록 성적은 겨우 과락을 면했지만, 졸업하고 나중에 고등학교 음악선생을 했다. 둘째 아들, <고미술>은 그림을 그리도록 시켰는데, 끝내 화가는 되지 못하고, 대신 옛날 미술작품 수집판매상이 되었다. 이름은 高美術이었는데, 실제 하는 일은 <古美術>이 된 것이었다.

 

부친은 돌아가실 때까지 이 점을 무척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런데 <고미술>은 다른 것은 다 잘 그리는데, 사람은 절대로 잘 못그렸다. 아무리 열심히 그려도 인물화에서 남자와 여자가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고미술>이 그린 남자 인물화를 보면, 여자처럼 보는 사람들이 99.9%였다.

 

아주 드물게 그린 남자를, <성전환수술을 잘못한 여자>로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봐주는 사람도 혈중알콜농도 0.19%로 거의 치사량에 가까운 술을 짬뽕으로 마시고 그림 판정을 한 것이었다. <고미술>이 그린 여자 나체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언뜻 봐서 그림에는 <남자 성기>가 보이지 않아, <여지>인 것처럼 보이지만, 100명 중 101명은 남자의 신체를 그렸는데, 그 남자의 성기가 너무 작아서 100배율의 망원경을 놓고 보아야 겨우 남자성기를 찾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머리를 길게 그려놓아도 그건 정치인이 항의성으로 갑자기 삭발을 해서 머리 모양이 더럽게 되었으니까, 오래 쓸 것도 아니고 해서, 동대문 풍물시장에 가서 누가 쓰다가 교통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길에 떨어져 있는 것을 먼지만 털고 파는 고품판매상으로부터 거의 공짜로 사온 가발을 쓴 남자처럼 보였다.

 

그래서 <고미술>은 아버지가 피카소나 클림트 같은 세계적인 화가를 만들어서 돈방석에 앉히려고 했던 원대한 꿈을 접고 말았다.

 

셋째 딸, <고배구>는 키가 커서 배구선수를 시켰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잘 했는데, 나중에 대학교에 가서도 특기자로 키우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오른쪽 팔과 왼쪽 팔의 길이가 너무 차이가 나서 배구감독이 결사반대를 해서 중도에 그쳤다.

 

너무 실망한 딸도 한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생을 마감하려고 했다. 아버지는 잘못했다가는 소중한 딸의 인생을 망칠 것 같아서, 다시 사주관상 보는 사람에게 돈을 많이 주고 좋은 방법을 찾아달라고 했다. 그래서 가정법원 판사의 허가를 어렵게 받았다.

 

이때 변호사 비용도 많이 들어갔다. 아버지는 딸의 이름을, 성을 그대로 놔두고, 이름만, <배구>에서 <탁구>로 바꾸었다. 탁구는 오른쪽 손으로만 치니까 팔의 길이 차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국제배구연맹에서 유권해석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겨우 탁구선가 되었지만, 너무 늦게 시작해서 그런지 빛을 보지 못하고 선수생활을 은퇴했다. 그 대신 딸은 키가 크고, 양쪽 팔 길이가 1센티미터도 차이가 나지 않는 <양팔동> 선수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넷째 딸, <고발레>는 발레를 하라고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데, 발레를 하다가 재미 없다고 포기하고 나이 들어서는 지루박과 불루스에 미쳐서 나이트클럽과 캬바레만 돌아다니다가 제비족에게 걸려, 인생이 아주 벌체처럼 되어 버렸다.

 

마지막 막내 아들은, 아버지 생각에 <고게임>으로 해서 컴퓨터전문가로 만들려고 했는데,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들이 <게임왕>으로 모셨기 때문에 학교 공부는 꼴찌를 맡아서 했고, 게임만 했는데, 이상하게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게임에서도 성공하지 못하고 실업자가 되었다.

 

작은 운명 (189) 최유전이 7살 연상의 여인을 만나다

 

최유전은 2시간 동안 조금도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서 경찰관이 알려준 대학병원으로 갔다. 입구에서, “나훈아 황제님 입원해 있는 병실이 어딥니까?”라고 물었다. 어떤 사람이, “저쪽 뒤로 돌아서 맨 끝에 있는 붉은 색 건물 지하 1층 18호실입니다.” “예. 고맙습니다.” 유전은 곧 바로 18호실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은 환자 입원실이 아니라, 장례시강이었다. ‘아니? 우리 황제님께서 돌아가셨단 말이야?’ 유전이 가서 보니, 18호실 장례식장에는 고인의 이름이, <나우나>이었다. 그리고 문상객들이 나이 든 아주머니들이 많았다.

 

그래서 유전은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나훈아> 황제님의 본명은 <나우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일단 들어가서 문상을 했다. 국화꽃 한송이를 분향대 위에 얹어놓고, 절을 두 번 하고 물러나왔다. 고인의 영정사진은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돌아가셨는데, 감히 평민인 유전 자신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영정을 째려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 맑았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소나기가 무섭게 쏟아졌다. 폭우가 쏟아졌다. 그리고 벼락도 치고, 천둥도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 역시 황제께서 돌아가시니까 하늘도 슬퍼서 이렇게 천둥벼락을 치는구나!’

 

유전은 비를 피할 겸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갔다. 새벽에 일어나서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와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게다가 마라톤까지 했으니 무척 피곤했다. 커피를 마시고 곧 바로 잠이 들었다. 잠을 깨니 바로 옆 테이블에 어떤 아주머니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유전은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나훈아 씨가 돌아가신 사실 알고 계세요?”

“아니요, 못 들었는데요. 나훈아 씨가 돌아가셨어요? 언제요?”

“예. 저는 지방에서 급하게 올라왔는데, 돌아가셨어요. 정말 너무 슬퍼요.”

 

그 중 한 여자는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있었다. 유전은 커피잔을 들고 옆 테이블로 옮겨가서 그 여자를 위로해주었다. 그 여자의 친구가 유전에게 그 여자가 왜 나훈아 사망소식에 슬피 우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이 친구는 5년 전에 만리포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남편 되는 사람을 만났어요. 남편은 바닷가에서 이 친구에게 첫눈에 반했고, 그날 관계를 맺고 3개월 후에 결혼까지 했어요. 그래서 두 사람은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이라는 노래 때문에 두 사람이 결혼까지 했다고 해서 나훈아의 열성 팬이 되었고, 남편도 <해변의 여인>만 반복해서 들었어요. 그런데 작년에 이 친구 부부가 다시 옛추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만리포 해수욕장을 갔는데, 서울로 돌아오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남편께서 돌아가시고, 이 친구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이 친구는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이라는 노래만 들으면 너무 가슴 아파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선생님께서 나훈아 씨 이야기를 꺼내고, 게다가 그 분이 돌아가셨다고 하니, 슬퍼하는 거예요.”

 

조금 있으니 커피숍에서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이라는 노래가 나왔다. 정말 이상했다. 어떻게 지금 이 시간에 <해변의 여인> 노래를 틀어줄까? 아마 나훈아 황제의 추모곡인 것처럼 생각이 들었다.

 

<물 위에 떠있는 황혼의 종이배/ 말없이 거니는 해변의 여인아/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황혼빛에 물들은 여인의 눈동자>

 

유전이 노래를 들으면서 울고 있는 여인을 자세히 쳐다보니, 정말 <해변의 여인>이었다. 눈물에 젖은 그녀의 눈동자가 황혼빛에 물들어 있었다. 슬픈 황혼의 어두운 빛이었다. 유전은 두 사람에게 자신이 술을 한잔 사겠다고 했다. 그래서 세 사람은 부근에 있는 술집으로 갔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유전이 늦게라도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더니 그 여자들은 혼자 살고 있는 주미지(여, 37세, 가명)집에 가서 세 사람이 같이 자고 아침에 해장국이라도 먹고 지방으로 가라고 권했다.

 

비도 오고 해서 유전도 그렇게 하겠다고 따라갔다. 세 사람은 주미지의 집에 가서 새로 안주를 만들어서 술을 더 마셨다. 그리고 한 방에서 정신 없이 잠을 잤다. 그리고 아쉬운 미련을 남기고 유전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유전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에 나훈아 씨는 완치가 되어 퇴원했고, 다시 정상적인 가수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유전이 대학병원 장례식장에 가서 문상을 하고 온, <나우나>씨는 가수 황제 <나훈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고, 노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데, 불법으로 카셋트 같은 음반을 제작해서 판매하다가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지자 모텔 4층에서 뛰어서 도망가려다가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있다가 사망한 사람으로 밝혀졌다.

 

유전은 처음에는 주유소 종업원으로 일을 하다가 치킨집을 운영하였다. 치킨집이 성업을 이루었다. 유전은 주미지에게 이야기를 해서 서울에서 혼자 지내기 심심하면, 유전에 치킨집에 와서 동업 형태로 일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주미지는 유전의 동네를 알아볼 겸 서울에서 내려왔다. 여기에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은밀한 관계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면 나훈아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아야했다. 주미지가 곧 바로 죽은 남편을 연상하고 울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남진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이상하게 유전에게는 남진은 나훈아와 라이벌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남진 이야기만 나오면 유전은 얼굴이 시뻘개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손발이 떨리는 이상 증세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미지는 유전 앞에서는 <남>자도 꺼내지 않았다. <남>자를 꺼낼 수 없었기 때문에 불편한 때도 많았다. ‘음식을 남기지 말아요’라고 말할 때도, <남>자를 빼고, ‘음식을 기지 말아요’라고 했다. ‘그는 남자지요’라고 말할 경우에도, ‘그는 자지요’라고 말해야 했다. 모든 것은 <남진> 때문이었다.

 

그 후 신문을 보니 나훈아 씨는 7살 연상의 어떤 유명인과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전이 따져보니, 자신의 애인 주미지는 7살 연상이었다. 정말 기가 막힌 인연이었다. ‘아! 이것이 바로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고, 숙명이고, 운명이구나! 어떻게 나훈아 황제가 걸어가는 그 길을 나도 똑 같이 걸어가고 있는가! 똑 같이 7살 연상의 아름다운 여인과 연애를 하다니!’

 

작은 운명 (188) 종로거리를 뛰는 도승지

 

아무 소득 없이 파출소를 나온 최유전은 배낭을 매고, 광화문거리를 걸었다. 이순신 동상이 보였다. 칼을 차고 서 있었다. 1592년 일본군에 의해 서울이 점령되어 아우성치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당시 한양에서 살던 사람들은 조선에서는 최상위층이었을 것이다. 선조왕을 받들면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고 있었을 거이다. 조선이 건국된 이래 200여년이 지날 때까지 어떤 의미에서는 태평성대를 보내고 있었다.

 

한양에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조선 8도를 호령하는 절대군주 왕이 있고, 왕을 지키는 수비대가 막강한 이곳에서 외국 군대가 침략하여 왕이 한양에서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절대로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중국 같은 대국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있었도, 일본 같은 별 것 아닌 조선보다 못한 나라로부터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특별한 예고 없이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그런데 15924, 길고 추웠던 겨울을 보내고 대지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만물이 기지개를 펴고, 농민들은 농사일을 시작하는 그 좋은 봄날, 일본군이 먼 바다를 건너와서 조선의 영토를 짓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조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일본군 육군의 정규 병력은 158700명이었고, 수군(水軍)9,000명이나 되었다. 일본군 고니시가 인솔한 제1번대는 병선 700여척을 타고 1592414일 오후 5시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이후 7년 동안이나 전쟁은 이어졌고, 1598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병사하자 일본군의 철수도 전쟁은 막을 내렸다.

 

최유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생각하니 공연히 기분이 우울해졌다. 종로경찰서까지 걸어가서 유전은 나훈아사건에 관해 물었다. 경찰서에서는 유전이 그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고, 신문사 기자고 아니고, 변호사도 아니기 때문에 사건에 관해서 어떤 내용도 알려줄 수 없다고 말하며 밖으로 내쫓았다.

 

유전은, “저는 나훈아 황제님을 지켜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최유전입니다. 그리고 제2의 나훈아를 꿈꾸고 있는 가수지망생입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나이 든 경찰관은 최유전이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고 있다가 갑자기 서울 구경을 온 김에 그냥 돌아가기는 심심하니까, 같은 도인들에게 서울 가서 이런 쇼킹한 사건에 대해 말할 거리를 만들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훈아씨는 지금 OO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그곳에 가서 물어보세요.”

 

유전은 나훈아가 입원해 있는 병원까지 시속 15킬로미터로 뛰어갔다. 인도로 뛰다가는 너무 늦을 것 같아서 차도 끝부분으로 뛰었다. 유전의 바로 옆으로 택배하는 오토바이가 수십대 지나갔다.

 

유전은 생명의 위험을 느끼면서도 워낙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죽을 힘을 다해서 뛰었다. 도중에 지쳐서 목이 무척 마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까운 시간에 마트에 가서 생수를 살 여유는 없었다.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도로 반대편에서 어떤 유명한 정치인이 마라톤을 하고 있었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맨 선두에 서서 꽤 빠른 걸음으로 뛰고 있었다. 무척 유명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서울에서 뛰니까, 옛날 조선시대 선조 때 같으면, 아마 높은 정승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유전이 생각하기에는 조선 시대에는 한양성 안에서 마라톤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왕도 뛰지 않는데, 왕이 아닌 벼슬아치가 건강에 좋다고 4대문 안에서 쿵쿵거리며 긴 한복을 입고 뛰고 있으면(한복에 걸려 자주 넘어지기는 했다), 가까운 궁궐에서 젊은 후궁을 껴안고 재미를 보고 있는 왕이 혹시 복상사를 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즉시 포도대장이 그 뛰는 놈을 붙잡아서 국문을 했을 것이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뛰고 있느냐? 임금님께서 놀라서 돌아가시게 하려는 네놈은 역적죄에 해당한다. 역적을 하는 동기는 무엇이냐? 그리고 함께 반역하는 공범들을 모두 불어라!”

 

혼자 잘난 척하고 뛰던 사람은 왕명을 출납하던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관직인 도승지였다. “나는 도승지요. 사람을 잘못 보고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체포하고, 역적으로 몰고 있는 당신은 이제 앞날이 보이지 않을 거요. 빨리 잘못을 뉘우치고 나에게 무릎을 끓고 사과하시오.”

 

그러나 포도대장은 이 못생긴 놈이 도승지를 사칭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계속해서 국문을 했다. 너무 심하게 국문하다가 도승지는 의식을 잃었고,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나중에 이 사건이 문제가 되자, 포도대장은 도승지가 역적을 도모했다고 자백을 했다고 허위보고하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이 180도 달라졌다.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은 정작 종로거리를 뛰지 못하는데, 그보다 못한 정치인은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가로막고 마라톤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말로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몇 사람이 교통을 방해하면서 번화한 도로를 뛴다고 갑자기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이 과연 우리나라가 위기인가 궁금했다.

 

정말 위기에 닥치면 같이 전투에서 싸움을 해야지, 6.25 전쟁 때 북한군이 서울을 침공해 오는데, 총을 들고 같이 싸우지 않고, 혼자서 종로거리를 뛰면서 나라를 위해서 뛰는 거라고 외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사람은 전쟁방해죄로 처벌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지금 유전이 종로거리를 뛰고 있는 것은 그런 정치인이나 유명인사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유전은 대한민국의 트롯트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뛰고 있는 것이다.

 

조선 시대 왕이야 수십명이고, 그 이전의 고려시대, 삼국시대 까지 따지면 너무 많아 이름을 다 외울 수도 없고, 외울 필요도 없는 왕이나 대군(폐위된 사람도 있다)과는 비교가 안 되는 5천년 역사 가운데 유일한 트롯트<황제>였다.

 

황제라는 칭호는 함부로 붙이는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에서도 황제는 유일하게 고종황제뿐이었다. 로마황제 정도 되어야 황제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쓸 수 있는데, 유전이 신봉하는 나훈아는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황제>였다.

 

비록 아직까지 기네스북에는 <트롯트황제>라고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대한민국과 아시아국가에서 나훈아가 <트롯트황제>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부인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작은 운명 (187) 최유전과 나훈아 피습사건

 

<기름 펄펄> 주유소를 운영하는 최유전 사장은 그 할머니 때문에 더 이상의 동네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하던 야간매복작전은 더 이상 수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훈아 모창가수사건 때문에 서울까지 올라가서 방송국 앞에서 항의 1인시위를 하려는 경운기사건도 포기하고 말았다.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세상이 너무 거꾸로 잘못되어 돌아가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대신 청와대에 국민청원게시판에 이 문제에 대해 장문의 글을 올렸으나, 한달이 지나도록 청원에 참여하는 사람은 전국에서 모두 7명밖에 안 되었다.

 

7명도 모두 최 사장이 단골로 다니는, <울지마>노래방 고정 멤버였다. 최 사장은 이런 나라에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외국으로 이민을 떠날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선뜻 외국에 나가서는 나훈아 가수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민 가는 것은 결국 죽임이라고 단정내리고 포기했다.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새로운 종교단체에 같이 가서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자고 인도했다. 곧 지구의 종말이 오는데, 이 단체에 들어가서 열성신도가 되면, 종말 때 죽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최 사장은 그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종말 때 죽고 사는 것은 문제가 아니고, 나훈아 음악을 계속 들을 수 있고, 내가 나훈아 노래를 음정 박자 틀리지 않고 잘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그리고 만일 나는 구원을 받아 살아도, 나훈아가 구원을 받지 못하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이 문제를 보증해 주세요.“라고 애원했다.

 

그랬더니 그 전도사는, ”나훈아가 누구예요? 천국에서는 그런 트롯트 가수는 명함도 내밀 수 없어요. 찬송가를 불러야 해요. 천국에서는 찬송가 이외에는 19금이라고 들었어요. 군가도 허용되지 않아요. 오직 찬송가와 동요만 가능해요. 그리고 지구에 종말이 오는데, 그깐 나훈아나 너훈아가 뭐 중요해요. <나살아><나좋아>가 가장 중요한 거예요.“

 

결국 최 사장은 당시 나이가 서른 살이었는데, 나훈아 때문에 천국 가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더욱 나훈아 노래에 24시간 매진했다.

 

특히 나훈아의 슬픈 이별의 노래는 감정이입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동네 뒷산 산소 있는 곳의 소나무 밑에서 밤 12시에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노래가 끝날 무렵 저쪽에서 나훈아가 하얀 옷을 걸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최 사장을 물끄러미,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 사장은 신문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나훈아가 서울시민회관에서 리사이틀 공연을 하고 있는 중에 어떤 괴한이 무대에 뛰어올라 깨진 사이다 병 파편으로 나훈아를 공격하였다.

 

이런 기습적인 습격으로 나훈아는 왼쪽 얼굴에 5cm 가량의 큰 부상을 입었고 72바늘을 꿰매는 대수술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최 사장은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 나훈아 피습사건을 보고 2시간 동안 큰소리를 내면서 통곡을 했다.

 

반경 500미터까지 최 사장의 통곡소리가 나서 주민들은 대통령이 총탄에 맞은 줄 알았다. 아니면 최 사장이 갑자기 돌아서, <전국울음경연대회>에 나가서 최우수상을 받은 것으로 알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나훈아가 부상을 당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진 최 사장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급히 배낭에 필요한 물건을 담고, 새벽 6시에 출발하는 첫 번째 고속버스를 탔다.

 

우선 나훈아를 테러한 범인을 체포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나훈아를 살리는 것과 나훈아의 음성을 동일하게 보전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다. 서울에 도착한 최 사장은 물어물어 서울시민회관을 찾아갔다.

 

문도 다 닫혀있고, 나훈아도 없고, 테러범도 없었다. 이 문, 저 문을 세게 두들려도, 아무도 없었다. 오른쪽 손등에서는 너무 세게 두드려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부근 파출소 가서 물어보니, 나훈아는 병원에 입원했고, 범인은 구속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파출소 순경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그런 걸 묻느냐고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최 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인상을 쓰면서 밖으로 나왔다.

작은 운명 (184) 줄래의 다방 생활과 <티켓제도>

 

줄래는 서른 살의 나이에 다방 생활을 열심히 했다. 주변 사람들은 다방 레지 생활을 하면, 당연히 손님들과 성매매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옛날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였다.

 

그런 풍조는 정말 남녀차별이 아주 극심했고, 공창이 역이나 터미널 주변에서 성행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요새는 모두 카페로 바뀌었고, 커피숍은 그야말로 아주 건전한 장소가 되었다.

 

만일 어떤 술에 취한 남자가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서, 아침이니까 날계란도 하나 넣어달라고 했다가는 곧 바로 카페 종업원은 주방에 가서 날계란 한판을 들고와서 그 손님 면상에 6초 간격으로 하나씩 열 개를 순차로 던져서 안경도 깨뜨리고, 코뼈도 경미한 골절상을 입게 하고, 신사복에 썩은 계란 냄새(정말 상상도 못할 정도로 지독하다)가 배게 하고, 그런 경험으로 평생 날계란은 절대로 먹지 못하게 <날계란고자>를 만들어 놓을 것이다.

 

만일 주방에 날계란을 준비해놓은 것이 없으면, 치아바타 굽다가 만 빵과 소세지 긴 것을 손님 얼굴에 던져 아주 박살을 내놓았을 것이다.

 

하물며 카페에 가서 응큼하게, “아가씨 데리고 나가서 커피 같이 마시고, 모텔에 가서 사랑을 하고 싶은데, 가능하냐?”고 물었다면 어떻게 될까?

 

종업원은 영화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tion)>의 주인공 팀 로빈스가 어떻게 지금까지 죽지 않고, 한국까지 오게 되었을까라고 궁금해서 미치게 될 것이다.

 

팀 로빈스는 영화가 개봉된 1994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 바다 가운에 있는 교도소에서 탈출한 것인데, 요새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코로나 19 팬데믹상황에서 팀 로빈스가 미국 공항을 출발해서 인천공항을 거쳐 아무 일 없이 한국에 있는 작은 카페에까지 왔다는 것은 사형집행이 끝나고 화장 처리한 연쇄살인범이 다시 검찰청에 조사받으러 출석하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기적인 것이다.

 

아직 일부 지방 작은 도시에서 비밀리에 다방 여종업원이 밖에서 손님이 커피를 주문하면 커피폿트를 가지고 오토바이맨의 뒤에 위험한 상태로 타고 가서, 손님이 있는 모텔 방에서 커피도 주고, 몸도 주기도 한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리고 심지어 줄래가 일하고 있는 <먹을래 다방>에서도 일부 못된 여종업원들은 돈에 눈이 어두워 종래의 관행에 따라 가끔, 아주 드물게 그런, <티켓제도>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그러나 줄래는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아주 철저했다. 아주 강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몸을 판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 말종이 하는 짓이다. 그것은 여자의 인격을 스스로 말살시키는 저급한 행위다. 그리고 아무런 사랑의 감정 없이 돈을 받고, 남자에게 몸을 맡기면, 정신적으로 황폐화되고, 무의식으로 일종의 트라우마가 쌓여 나중에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을 때 정상적인 성관계를 같이 향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 치명적인 성병에 걸리거나, 임신을 하게 되면, 여자의 인생은 끝나는 것이다.’라는 아주 건전하고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먹을래 다방> 여주인도 처음에는 줄래도 다른 사람들처럼, 너무 따지지 말고, 너무 고집 부리지 말고, 좋은 게 좋다고, 이헌령 비헌령(耳懸鈴 鼻懸鈴) 둥굴둥굴 살아가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도 좋고, 더 나아가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짝짝짝!>도 좋을 텐데, 왜 저렇게 혼자만 옳고, 바르다고 잘못 생각하면서 똥고집을 부리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무척 속상해 했다.

 

그래서 줄래가 그 <먹을래 다방>에서 일을 시작할 때 같은 종업원 <나발래>양을 시켜서 조심스럽게 줄래의 의중을 물어보았다. <나발래>양으로부터 <줄래>는 절대로 ‘돈을 받고 줄 사람은 아니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반대의사표시를 전해 듣고, 그날 여주인은 다방운영경력 30년만에 이런 훌륭한 <여성운동가>는 처음 보았다면서 큰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잠시 의식을 잃었다.

 

<나발래>양은 혹시 불쌍한 여주인이 이런 사소한 문제 때문에 돌아가시면 큰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만일 여주인께서 뇌출혈로 의식을 잃어다가 병원에서 수술을 했지만 다른 중대한 지병이 발견되어 돌아가시게 되면 장례식장에서 문상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와서 상주에게, “먹을래 다방 여사장님께서 그렇게 건강하시고, 그동안 30년, 강산이 세 번 변한 오랜 세월, 정말 짧지 않은 역사적 period에 우리 지역의 커피문화를 최고도로 발전시키고, 지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하루 아침에 유명을 달리하셨습니까?”라고 물으면 상주가 정말 답변하기 어려운 곤경에 처할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만일 상주가 문상객에게, “고인은 정말 건강하시고 커피문화발전과 지역경제를 위해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고인의 몸을 아끼지 않고 불철주야 뛰셨는데, 이번에 새로 들어온 <정줄래>양이 <티켓제도>를 결사반대한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의인의 마지막입니다.”라고 설명하면, 문상객은 사망의 원인을 이해하는데 최소한 6개월은 걸릴 것이고, 전세계적으로 이런 죽음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을 것이다.

 

그래서 그 문상객은 이런 사망원인이 역사적으로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비록 힘들지만, 우리나라 보건복지부 및 질병본부, 각 의학전문대학원 도서관, 국회도서관을 돌아다니면서 자료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도 직접 만나봐야 하는데, 요새는 코로나 때문에 면담은 어려울 것이다.

 

작은 운명 (183)

 

반한문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논과 밭 5천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동네사람들 시켜서 농사짓고 그럭저럭 먹고살았다. 그런데 45살 때 조강지처가 갑자기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아주 부지런하고 남편에게 순종적이었다. 그리고 남편을 한학자로서 매우 존경했다. 그러면서 외아들인 반합격도 아주 소중하게 키웠다. 특히 합격은 5대 독자이었으므로,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기스가 나면 난리가 났다.

 

어머니는 하루 일과 중 95%가 외아들 합격의 신변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합격은 조금이라도 위험한 곳에는 갈 수가 없었다. 어린이 놀이터에 가더라도 아주 안전한 곳에서만 놀아야했다. 그네 같은 절대로 탈 수가 없었다.

 

그네에서 떨어지거나, 그네에 머리를 부딪히면 그 때에는 거의 초상이 난 것과 동일하게 간주될 것이었다. 반한문은 자신의 아들이 부인과 외출할 때에는 사전에 아들의 몸 전체를 검사하고 이상 유무를 살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곳이 있으면, 한지에 붓으로 표시를 해놓았다. 그랬다가 합격이 어머니와 같이 외갓집을 다녀온 다음에는 다시 정밀신체검사를 했다. 혹시 멍이 들었는지, 머리카락은 빠지지 않았는지, 머리에 열은 없는지, 옷에 넘어진 흔적으로 흙이 묻었는지를 최소한 30분 동안 검사를 했다.

 

머리카락 부분은 돋보기를 가지고 확대해서 보았다. 만일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그날은 합격의 어머니는 밤새 잠을 못자고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그리고 향후 재발방지책을 남편에게 충분히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삼진아웃(三振 OUT)제를 시행해서, 만일 어머니가 세 번 똑 같은 잘못을 하면, 시집에서 못살고 친정으로 돌아가거나, 이웃 동네로 혼자 가서 남의 집을 살도록 각서를 받았다.

 

어머니는 한글을 잘 모르는 무학이었으므로, 반한문이 한지에 붓글씨로 그러한 각서 내용을 쓴 다음, 어머니는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빨간 고추장을 각서 맨 말미에 찍도록 했다.

 

어머니가 손도장을 잘못 찍어 너무 한지에 번지면, 아버지는 다시 써서 손도장을 새로 받았다. 그런데 고추장으로 손도장을 찍어놓으니까 방안에서 냄새도 나고, 색깔도 마치 무슨 핏빛 같다는 일부 여론이 일자, 아버지는 제도를 개선하여 봉숭화물을 짜서 예쁜 색깔로 찍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러한 삼진아웃제의 시행으로 커다란 효과를 보아서,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를 단 두 번으로 그치고, 세 번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두 번째 각서에 봉숭화물로 손도장을 찍은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때가 아버지 나이는 50살이었다. 어머니는 너무나 엄격한 남편과 살면서 한번도 기를 펴지 못하다가 돌아가셨다. 너무나 억울한 여인의 한많은 삶이었다. 합격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쯤 되던 해에 아버지는 성냥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55살 먹은 여사장과 연애를 했다.

 

그 여사장 정줄래(55세, 가명)는 자신의 남편이 그 지역에서 제일 큰 성냥공장을 했다. 정줄래는 원래 인물이 좋았다. 나이 스물다섯에 전국노래자랑에 나가서 지역에서 예선 통과하고 본선에서 탈락했다.

 

그때 충격을 너무 받아 자살하려고 했지만, 어떤 신학생이 집중적으로 인도를 해서 새로운 삶의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유명 가수가 꿈이었던 줄래는 서울로 올라와서 다방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노래 연습을 했다.

 

큰소리로 노래를 연습할 공간이 적어서 줄래는 지하방에서 커다란 장독항아리를 사다놓고 그 속에 머리를 쳐박고 목이 터지라 고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줄래의 음량이 너무 크고 좋아서 줄래가 연습하던 장독항아리 5개가 고음으로 파열되어 산산조각이 났다. 그때 장독 깨지는 소리가 마치 북한에서 핵미사일 발사할 때 나는 굉음 같아서 마을 주민 전체가 대피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줄래가 주로 연습한 곡들은, ‘배신의 무덤’ ‘눈물의 강’ ‘죽을 때 같이 죽으리’ ‘이별의 복수’ 등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결핵판정을 받았다. 나이 많은 의사선생님의 극진한 치료로 줄래는 결핵완치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결핵이 완치가 되자, 그 치료를 담당했던 의사선생님은 줄래에게 어드바이스를 했다. “앞으로는 노래를 해도 좋은 내용의 노래를 해요. 매일 이별이나 죽음이나, 불행이나 눈물 등을 노래하고 있으면, 노래 가사대로 부르는 사람이 이별을 하고 죽고, 불행해진다고 하는 속설이 있어요. 지금까지 우울한 가사만 부르고 50살 넘긴 가수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줄래는 크게 깨달았다. 의사선생님 말씀이 맞았다. 어둡고 우울한 노래를 부른 유명 가수는 모두 50살이 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 어두운 노래를 부르고도 51살을 넘긴 가수는 유명하지도 않았고, 유명하게 떴다고 해봤자 방송국에서 PD들과 짜고 엉터리도 띄워준 가수라는 소문이 났었고, 나중에는 그게 사실로 밝혀진 것이었다. 그래서 줄래는 자신이 가수가 되어도 절대로 어둡고 이별이나 죽음을 뜻하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노트에 열 번 써놓았다. 제목은 서약서로 했다.

 

줄래는 자신이 결핵에 걸린 것도 어두운 노래를 18번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5개월 동안은 동요만 불렀다. 그것도 아주 밝고 경쾌한 동요만 골라서 불렀다. 가사 내용을 확인하고 밝은 노래만 불렀다.

 

그때 주로 부른 노래는, <딩동댕 유치원> <산토끼> <설날> 등이었다. 조금이라도 어둡거나 슬퍼서 눈물이 나올 동요는 가사집을 그 즉시 찢어버렸다. 그때 찢어버린 동요는, <섬집 아기> <엄마야 누나야> <오빠생각> 등이었다.

 

이런 식으로 의사 선생님 말을 잘 들었더니, 폐도 튼튼해지고, 모든 일이 잘 풀렸다. 폐가 너무 튼튼해져서 108계단도 단숨에 뛰어올라갈 수 있었다. 남자와 연애를 해도 세시간씩 아무 끄떡없이 버틸 수 있는 폐활량이 되었다.

 

줄래가 다시 다방으로 복귀했을 때에도 줄래가 출근하면 아침부터 손님들이 많았다. 그리고 모두 줄래를 찾았다. 만일 줄래가 밖으로 배달 나가면 줄래를 보러왔던 손님들은 기분 나쁘다면서 다방 앞에 침을 뱉고 가버렸다.

 

어떤 손님들은 줄래가 다방에 돌아올 때까지 엽차만 시켜놓고 3시간씩 커피는 시키지 않고 계속 앉아서 신문만 읽고 있었다. 신문을 너무 바스락거리니까 다른 테이블에서 중요한 국회의원 선거전략을 짤 수가 없어서 파출소에 신고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작은 운명 (25)

 

반합격의 아버지인 반한문은 반씨 집안의 5대 독자인 합격의 교육에 대해서만 혼신의 힘을 쏟았다. 비록 과거를 보거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하고 있던 한문은 경제적인 문제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름대로 전통파 유학자로서 그에 따른 모범적인 생활을 철저하게 했다. 한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이었다. 한문은 본인이 삼강오륜을 공부한 다음에는 평생 살면서 한번도 이를 위반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만날 때마다 삼강오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잔소리를 했다.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 삼강오륜을 잘 지켜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동네 사람들은 삼강오륜을 잘 모르고, 오륜은 올림픽경기를 뜻한다는 뉴스를 들었기 때문에, 올림픽경기에서 세 가지 강한 종목, 특히 한국으로서는 피겨스케이팅, 스피드 스케이팅, 스켈레톤 세 가지 종목으로 생각했다.

 

특히 2018년도 평창올림픽을 대회 기간 동안 다른 일을 전혀 하지 않고, TV를 시청했기 때문에 올림픽 전 종목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고 있는 체육고등학교를 중퇴한 동네 반장이 삼강오륜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었다.

 

그랬더니 한문은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땄던 피겨스케이팅은 알고, 스피드 스케이팅은 스피드가 들어가니까 KTX나 대한항공 비행기처럼 빠른 속도로 무슨 경기를 하는 정도는 알았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이야기하는 스켈레톤(skeleton) 경기에 대해서는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명색이 대단한 유학자이며, 한학자인 자신이 그깟 용어에 대해 모른다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특히 반장은 한문처럼 정통으로 학문을 한 것이 아니고, 고등학교 다니다가 친구들과 싸움을 해서 학교폭력으로 퇴학을 맞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무식한 반장에게 지식을 물어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스켈레톤의 뜻을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반장에게 물었다. “그래, 자네는 스케일링을 어느 치과에서 했나? 스케일링도 요새는 보험이 된다면서?” 아버지는 스켈레톤을 치과에서 하는 <스케일링>으로 알아들었다.

 

그 이유는 반장이 원래 담배를 많이 펴서 이빨을 드러내놓고 크게 웃으면 이빨은 보이지 않고, 시커먼 콜타르를 입에 물고 곧 죽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반장은, “아니! 어르신, 스케일링이 무슨 보험이 됩니까? 그건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만일 스케일링이 의료보험이 되면 당연히 정부에서 반장인 저에게 공문을 보내왔을 것이고, 그러면 반장인 제가 당연히 동네 어르신들게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알려드렸을 겁니다. 아직 스케일링은 보험이 안 됩니다. 그리고 저는 1년에 한번씩 꼭 치과에 가서 스케일링을 하고 있어서, 의사 말이 저에게는 치석이 하나도 없고, 이가 건강하고 반들반들 윤이 난다고 칭찬을 합니다.”

 

그러면서 반장은 아버지를 비롯해서 같이 있는 동네 사람들을 향해서 자신의 입을 크게 벌리고, 치아를 자신 있게 보여주었다. 아버지가 보니까 정말 그것은 이빨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너무 새까많고, 입에서 내뿜는 악취가 폐수배출업소 종말처리장 안에 빠진 것 같았다.

 

아버지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반장은 신이 나서, 설명했다.“어르신, 쓰깰라이똥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선수가 머리를 아래로 두고 엎드린 자세로 하는 경기인데요. 미국에서 인디언들이 사냥을 해서 잡은 동물을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 쓰던 썰매를 변형해서 경기를 하는 겁니다. 쓰깰라이똥은 1988년에 개최된 생우동올림픽에서 올림픽종목으로 채택되었다고 합니다. 아시겠지요? 어르신도 기회가 되면 한 번 타보세요. 정말 스릴 있고, 한번 해보면 게이트볼은 저리 가라예요.”

 

반장도 어디서 주워들었지만,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었고, 워낙 말이 어려워서 제대로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실제로 스켈레톤은 1928년에 열린 생모리츠동계올림픽에서 루지보다 먼저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 것이었다.

 

반장이 이렇게 어렵게 설명하자. 마침 동네에서 어렸을 때부터, 썰매를 직접 만들어서 탔고, 그 또래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썰매의 황제>인 <왕눈이>가 나섰다.

 

“어이 반장! 쓰깰라똥을 1988년도에 <생우동>올림픽 때 처음 종목으로 채택되었다고 그랬는데, 1988년에는 내가 서울에 있었고, 그때는 노태우 대통령 때 서울올림픽을 서울 송파에 있는 올림픽공원에서 한 것이지, 어떻게 1988년도에 <생우동>올림픽이 열렸다고 그래!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에는 <생우동>올림픽이 아니라, 일본 어디선가 <생라면>올림픽이었을 거야. 이래 봐도 내가 썰매을 직접 만들어서 오래 탔던 사람이고, 썰매 하면 대한민국에서 내가 원조인데, 그걸 모를까봐 그래! 그리고 이런 문제는 동네 어르신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니까, 나중에 시간을 가지고 정확하게 확인해서 다시 알려드리는 게 어때!”

 

반장은 <생우동>이 맞다고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았고, <썰매의 황제>는 <생라면>이 틀림 없다고 우겼다. <썰매의 황제>는 만일 <생라면>이 아니고, <생우동>이 맞다면, 자신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절단해서 마을에 기부할 것이라고 엄숙하게 발표했다.

 

사람들은 너무 무서웠다. 만일 <썰매의 황제>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절단해서 마을에 기부하면, 그것을 동네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마을 입구에 있는 커다란 소나무에 걸어놓아야 하고, 거기에 기증자 성명과 기증사유, 기증물의 구체적 설명문을 붙여놓아야 하는데, 그에 소요되는 비용도 문제지만, 만일 새끼손가락을 걸어놓았는데, 동네 딱따구리나 날짐승이 갉아먹으면 이를 보충하기 위해, 계속해서 <썰매의 황제>를 찾아가서 다른 손가락을 잘라서 기부하라고 요구를 해야 하는데, 이런 <고양이에게 방울을 다는 일>을 누가 무보수로 할 것이냐가 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문제는 너무 심각해서 마치 선거 때 참패를 한 대표에게 가서, “대표님께서는 이번 선거에서 참패를 했기 때문에, 정계은퇴하시고 외국에 가서 5년간 계시다 오셔야합니다. 그리고 해외에 계시더라도 삭발하고, 단식을 한달 정도는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표님께서 한국에 계시면 유권자들이 꼴보기 싫어할 것이고, 그것 자체가 공해이기 때문에 나라 경제에도 좋지 않습니다. 만일 그러다가 돌아기면 저희가 책임지고 국립현충원에 모실 것입니다.”라고 건의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건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네에서 <썰매의 황제> 손가락 하나를 더 요구한다는 것은 자칫 잘못했다가는 이성을 잃은 <썰매의 황제>가 도끼를 들고 나와서 자신의 손가락을 절단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건의자의 손가락을 잘라서 그것을 가져다가 매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문제로 동네에서는 마을 전체에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그 공포심의 강도는 북한에서 핵미사일을 세 차례 연거푸 발사했을 때보다 열배가 강했다.

 

합격의 아버지 한문은 자신이 원래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유교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이었는데, 반장이 워낙 한문도 모르고 무식해서 <삼강오륜(三强五輪)>으로 연결시켜서 진도가 나가지 못하고 중단된 데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좌중을 진정시키고, 아버지는 삼강오륜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삼강이라 함은,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이요. 오륜이라 함은, 군신유의, 부자유친,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을 말하는 거요.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그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어요. 짐승이지!”

 

사람들은 한문이 말하는 내용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 말은 옛날 조선 시대 할 일 없는 선비들이 상투를 틀고 앉아서 남들은 논과 밭에 나가 힘들게 일하고 소 풀 뜯고 있는데, 아무 소용도 없이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것으로 무시했다.

 

그리고 특히 <삼강>은 옛날부터 롯데삼강아이스크림이 롯데껌과 마찬가지로 맛이 좋아서 모두들 알고 있는데, 왜 갑자기 한문이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꺼내는가 의아해했다.

 

옛날 동네에서는 상표 없는 그냥 무명의 아이스께끼통을 들고 다니면서 한 개에 1원씩 팔러다녔다. 그때는 아이스께끼통도 작게 만들어서 개수도 많이 들어가지 않았고, 또 얼마 안 있으면 그 안에 있는 아이스께끼가 절반쯤 녹아서 더 이상 팔 수도 없었다.

 

아주 단단하게 얼려야 했는데, 팥이 아주 조금밖에 들어가 있지 않아서 엉터리가 많았다. 사람들은 한문이 바쁜 사람 붙잡아놓고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장황하게 했으면, 마트에 가서 아이스케키 하나씩이라도 사서 돌려야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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