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모텔에서 가정 주부를 강간한 사건

 

명훈 아빠는 다시 TV를 켰다. 술을 마셨다. 아무래도 술기운이 있어야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뉴스가 나왔다. 젊은 부부가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빚이 많아 더 이상 살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남자는 자동차 안에서 연탄불을 피워놓고 온 가족과 함께 이승을 떠났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저런 선택을 했을까? 그 남자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은 너무 불쌍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이제 막 걸어다니려고 하는데 본인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 없이 오직 부모의 의사결정에 따라 목숨을 잃어야 했다. 죽어갈 때 육체적 고통은 얼마나 심했을까?

 

부모에게 그런 권리가 있는 것일까? 본인들만 죽으면 되지, 왜 아무 것도 모르는 철없는 아이들까지 끌고 간 것일까? 어린 아이들을 남겨놓으면 말도 못할 고생을 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식을 낳아놓고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부모라면 그 아이들을 그대로 남겨놓았어야 한다. 아이들은 세상에서 또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키워줄 것이기 때문이다. 고아로 자라도 성장하면 자기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명훈 아빠는 그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더 이상 약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잘못되거나 죽으면 명훈이는 어떻게 하는가? 나만 믿고 사는 명훈 엄마는 어떻게 되는가? 회사 직원들도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한 동안 명훈 엄마는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다. 남편은 사업을 잘 하고 있었다. 명훈 역시 조용히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약국을 경영하면서 돈도 벌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대우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명훈이 임신시킨 일로 골치를 썩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는 큰 문제는 아니었다. 돈을 주고 해결하면 되는 문제였다. 아들 가진 엄마 입장에서는 상대 여자가 수술을 해서 몸이 망가지든 말든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명훈이 또 사고를 쳤다. 클럽에서 만난 유부녀를 강간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더군다나 요새 사회 분위기가 예전과 확 달라져서 잘못했다가는 징역도 갈 수 있는 위기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쳐서 길을 가던 사람이 벼락을 맞아 죽는 것처럼, 명훈 아빠 회사가 압수수색을 당하고 검찰의 특별수사를 받게 되었다. 도대체 금년에 무슨 삼재수가 붙은 것인지 몰라도, 이래저래 죽을 맛이었다.

 

이토록 극심한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데,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명훈 엄마 약국에서 약사 아닌 사람이 약을 판매했다는 내용으로 보건소에 신고를 했다. 그 사람은 약을 사러 온 것처럼 가장해서 몰래카메라를 옷에 부착하고 보조자가 단독으로 약을 파는 것을 사진 찍고, 비밀녹음을 했다.

 

보건소에서 조사를 시작하였고, 벌금까지 받게 되었다. 약사인 명훈 엄마에 대해서는 약사면허정지처분까지 떨어졌다. 경쟁관계에 있는 약국에서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여 비약사의 약판매행위를 계속해서 감시하고 증거를 잡아서 고발한다는 소문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정말 무서운 세상이었다. 요새는 병원에서 가지고 온 처방전의 경우에는 절대로 약사 아닌 사람이 조제하지 않는다. 처방전 없이 사러 온 일반 약의 경우 약사가 바쁘면 비약사인 총무 같은 사람이 간단하게 판매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약점 잡아 고발한 것이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언제 누가 어떤 방법으로 약점을 잡아서 고발을 할지 모른다. 이제는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하고, 규정대로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이런 저런 일로 속이 상하고 입맛도 없는 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명훈 엄마 되시죠? 지난 번 뵈었던 강간사건 피해자 친구입니다. 제 친구가 병원에서 진단서를 끊어서 고소를 한다고 해요. 어떻게 좋게 해결할 의사는 없으신가요? 제 친구는 그 일로 병원에 다니고 있고, 정신과 치료도 받고 있어요. 고소를 하게 되면 혹시 제 친구 남편이 알게 될까봐 망설이고 있어요.”

 

얼마를 요구하는 거지요?”

친구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데, 제가 볼 때 한 3천 정도는 줘야하지 않을까 싶어요.”

뭐라고요! 3천이라고 했어요? 3백만원이 아니라 3천만원을 달라는 거예요?”

 

강간을 당해 가정도 파탄나게 생겼고, 아파서 병원도 다니고 있잖아요? 강간범이 얼마나 무겁게 처벌되는지 모르세요? 애엄마를 강간해서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만들었는데, 3천이 많다는 거예요? 그럼 그만 두세요. 내일 고소할 테니까. 친구는 이미 변호사를 선임해서 고소 준비를 다해 놓았어요. 끊을 게요.”

 

상대 여자는 사정 없이, 아주 냉정하게 사무적으로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명훈 엄마는 정신이 번쩍 나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 여자는 다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급히 고등학교 동창으로서 법대 교수로 있는 친구를 만나자고 했다.

 

아니 세상에 이런 꽃뱀들 봤나! 정말 너무한 것 아니니? 이게 강간이 되는 거야?‘

글세 명훈이 말이 증명이 되면 강간이 아닐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나야 학교에서 강의만 하니까 실제 수사나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몰라. 하지만 고소를 당하면 골치 아플텐데 어쩌지?”

 

글쎄 기껏해 봤자 미수에 그친 것인데 그걸 가지고 얼마나 처벌받겠어? 그 여자들은 완전히 날강도야. 유부녀가 애도 있는데 40이나 돼서 어린 아이들 노는 클럽에 와서 술을 마시고 모텔까지 따라가서 강간 당했다고 돈이나 뜯어내는데 이렇게 억울한 일이 있을 수 있나? 정 안되면 그 여자 남편을 찾아가서 마누라 단속 잘 하라고 해야겠어.”

 

강간죄는 미수범도 인정되면 처벌이 무거울 것 같으니 가급적 합의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합의를 하지 않으면 전과자 되고, 또 변호사 비용도 들잖아?”

명훈 엄마는 어떤 판단도 할 수 없었다. 명훈이 한 행위에 대한 댓가로 3천만원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도대체 그 여자가 피해를 본 것은 무엇일까? 상식적으로 강간죄란 여자의 정조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처벌하는 것일텐데, 그런 여자의 정조를 보호할 가치가 있을까? 정조를 보호한다고 해도, 명훈이가 하지도 않았다는데, 무슨 정조가 침해된 것일까? 설사 정조가 침해되었다고 해도 돈으로 환산하면 몇십만 원이면 되지 무슨 천만원 단위로 부른단 말인가? 정숙한 여자 같으면 클럽에 갈 이유가 없고, 모텔에 갔다가 남자에게 당할 뻔 했으면 창피해서 말도 꺼내지 않을 텐데, 이건 완전히 사기고 공갈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일단 상대방이 고소를 하면 문제가 커질 것 같아 다시 조바심이 났다. 피해자의 친구라는 여자에게 전화를 계속했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문자를 보냈다. ‘5백만원을 드릴게요. 합의해 주세요. 명훈 엄마

 

너무나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쓰려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었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는 수면제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약사라 약에 대해서는 박사였고, 자기 관리는 철저하게 할 수 있었다.

 

검찰수사의 중압감 때문에 자살하는 피의자들!

 

명훈 아빠 심영성은 조사를 마친 다음, 검찰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초조하고 미칠 것 같았다. 그 때 어떤 사람이 검찰 수사를 받고 나서 밖에 나와 건물에서 투신자살했다는 보도를 보고 깊은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어떤 현역 국회의원이 검찰 수사를 앞두고 아파트에서 투신해서 사망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명훈 아빠는 우리 사회에서 왜 저런 비극적인 자살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경찰이나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연탄불을 피워놓고 자살하거나, 한강에서 투신하거나,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수사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대기업 회장이 자살하고, 도지사도 자살하고, 공무원도 자살하고, 경찰관도 자살했다.’는 뉴스를 들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수사를 받으니까 힘이 들테고, 징역 갈까봐 자살한 것이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냥 징역을 살면 되지, 자살하면 남은 가족은 어떻게 하고, 운영하던 회사는 어떻게 하나? 무책임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오죽 했으면 죽고 싶었을까? 검찰 수사가 얼마나 두려웠을까? 사건 관계인들에 대한 배신감, 증오심 때문에 견딜 수 없었을 거야?'

 

수사 대상이 되면 공황상태에 빠진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다.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다. 세상이 모두 까많게 보이고, 사람들이 무섭게 보인다. 한없이 작은 존재로 전락하고,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자신도 없고 용기도 없어진다.

 

주변에서 아무리 힘을 내라고 응원해도 소용없다. 그것은 바다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멀리 떨어진 뭍에 서서 ‘힘을 내요. 빨리 이곳으로 와요. 당신은 절대로 죽지 않으니까 염려 말아요.“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과 같다.

 

생각하면 할수록 부정적으로만 생각한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고 단정한다. 징역을 몇 년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나이 들어 징역을 살 건강도 없고 용기도 없다. 젊었을 때는 멋도 모르고 군대도 갔다 왔고, 고생도 했다. 하지만 나이 들어 오랫동안 편하게 살다가 뒤늦게 징역을 산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옥이다.

 

이런 깊은 절망과 두려움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 술이나 담배를 계속하면 아주 병약한 상태가 된다. 이때 악령이 영혼에 침투한다. 그러면 그 악령이 속삭인다.

 

‘앞으로 희망은 없어. 고통만 가중될 거야. 아무런 해결 방법도 없잖아. 그렇게 고통을 받을 바에야 차라리 스스로 평안함, 영원한 안식을 찾는 게 나을 거야. 내 말을 들어. 지금 스스로 모든 것을 차단해 버려.’

 

이런 악령의 명령, 유혹을 거역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간단한 유서 한 장을 남긴 채, 그토록 한 많은 이승을 떠난다. ‘그동안 제대로 못해줘서 미안해요. 아이들하고 잘 살아요.’ 그리고 한가지 사항을 덧붙인다. ‘나는 아무 죄가 없어요. 너무 억울합니다.’

 

TV 채널을 돌리니 개그 프로를 하고 있었다. 전에는 제일 많이 본 프로가 개그였다. 개그 프로를 보면 정말 재미 있고, 그들의 순간적인 재치와 은유가 너무 좋았다. 그러면서 어떻게 저렇게 재미있는 개그를 만들 수 있을까 감탄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대체 저런 것을 보고 무엇이 재미있다고 웃고 있는 것일까? 너무 유치하다.’ 개그를 하는 사람들은 너무 비현실적이었고, 상식에 맞지 않았다. 그런 개그를 보려고 일부러 추운 날씨에 방송국까지 가서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계속 웃고 있는 사람들도 이상해 보였다.

 

‘세상이 얼마나 살기 어려운데, 저런 말장난이나 하고들 있을까? 그걸 보러 녹화현장까지 가서 앉아 있을까?’

 

화까지 날 정도였다. 다른 채널을 돌리니 프로 골프 시합을 중계방송하고 있었다. 속이 상했다. 지금 이런 사건만 아니었으면, 경치 좋은 곳에 가서 ‘Nice Shot!'을 날리고, 끝나면 사우나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젊은 파트너들과 술 마시고 노래방까지 갈 수 있을 텐데, 너무 억울했다.

 

명훈 아빠는 남다른 운동신경이 있어서 그런지 레슨을 많이 받지 않았어도 오래 전부터 싱글이었다. 필드에 나가면 눈에 띄는 황태자였다. 돈을 잘 쓰고 인심이 좋고, 팁을 잘 주니까 캐디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명훈 아빠를 맡으려고 애썼다.

 

골프 매너도 좋아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신사였다. 골프채는 매년 바꿨다. 골프채가 좋아야 핸디를 줄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골프고 나발이고, 모든 것이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채널을 돌리니, 격투기를 하고 있었다. 백인 선수가 흑인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흑인은 백인을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탄 채 계속해서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꽂고,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백인은 곧 죽을 것처럼 보였다. 얼굴에서 피가 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코뼈가 부러지지 않고, 이빨이 부러지지 않고, 뇌진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관중들은 열광하고 있었다. 백인이 그 체급의 참피온인데, 도전자에게 신나게 얻어터지니까 모두들 흥분해 있었다. 명훈 아빠도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의 사건은 그렇고, 일단 지금 저렇게 힘이 있는 사람이 무자비하게 때리고 폭행을 가하고, 상해를 가하고 있으니까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창과 칼로 싸우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떠올렸다. 검투사들은 노예 출신이거나 죄수 신분이었다. 그들이 검투사로 지원한 것은 아니었다. 강제명령에 의해 동원된 투사들이었다.

 

거기에는 일정한 게임의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상대를 죽여야 자신이 사는 전투였다.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여야 하는’ 비극이었다. 현대판 격투기도 마찬가지다. ‘내가 살기 위해, 너를 때려눕혀야 하는’ 현실은 로마시대 검투와 똑 같다.

 

상대를 KO시켜야, 챔피언이 된다. 그래야 자신이 산다. 물론 KO를 당한 선수는 사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는다. 형법상 정당행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위법성이 조각된다.

 

TV를 껐다. 시끄러운 소음이 멈추니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진다. 악마가 머릿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성경을 펼쳤다. 그동안 바빠서 교회에 거의 나가지 못했다. 부인은 주일성수하고 독실했기 때문에 집에는 언제나 성경책이 있었다.

 

사업이 잘 되고, 인생의 좋은 시절을 보낼 때는 성경을 보지 않았다. 성경을 봐야 늘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선지자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돌판에 받아왔다는 십계명도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첫 번째부터 네 번째 계명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에게 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며,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십계명에 이런 네 가지 사항이 있는 것을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섯 번째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인데, 어렸을 때 부모에게 불효를 많이 했고, 지금은 두 분 다 돌아가셨으니, 지금은 이 계명도 해당사항이 없었다. 여섯 번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도, 자신의 성격상 싸움을 했어도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행위를 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왜 성경에다 굳이 살인금지명령을 넣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덟 번째는 도둑질하지 말라. 아홉 번째는 위증죄를 범하지 말라. 열 번째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이런 계명도 자신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너무나도 추상적인 것이었다.

 

다만, 일곱번째 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가슴이 뜨끔했다. 지금까지 명훈 아빠가 관계 했던 여자는 부인을 빼고 모두 39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명은 몇천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역사적인 유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성이 개방되고, 프리 섹스가 대세인데, 어떻게 간음하지 않고,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부인 이외의 다른 여자를 ‘눈으로나, 마음으로도’ 간음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성직자도 지키지 않는 계명 같았다. 아무리 따지고 봐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명훈 아빠는 십계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성경을 들춰보니, 이런 구절이 눈에 띄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이 구절은 그야말로 명훈 아빠의 지금 처지에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는 말이었다. 세상 모든 일이 헛되고 헛된 것이다.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힘들게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모든 것이 허망하고 무상한데, 고행으로 가득찬 몇십년을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는 말인가?’

 

 

 

강간을 주장하는 여자 vs. 화간을 주장하는 남자

 

고종은 37살의 총각이었다. 중소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말이면 열심히 등산을 다녔다. 어떤 산악회에 들어가 동호회원이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숙정은 45살의 가정 주부였다. 등산이 끝나면 회원들은 가끔 저녁 식사도 하고 노래방도 다녔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났다. 숙정은 고종을 좋아했는지, 고종이 참석하는 회식이나 술마시는 곳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러면서 꼭 고종 옆에 앉았다.

 

숙정은 어리게 보여서 열 살은 젊어보였다. 나이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30대 중반인 것처럼 말했고, 결혼해서 가정이 있다는 내색도 하지 않았다. 고종을 비롯한 등산회원들은 숙정을 미혼이거나 돌싱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싱글인 고종과 숙정이 가깝게 지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숙정의 남편은 시간이 가면서 의심하기 시작했다. 등산을 갔다 하면 귀가시간이 늦었다. 늘 술에 취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편과의 잠자리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동안은 등산을 가지 못하게 하기도 했으나, 숙정이 고집을 부려 등산금지령만은 풀어놓았다. 하지만 늘 숙정의 동향을 미심쩍은 눈으로 예의 관찰하고 있었다. 아무리 골 키퍼(Goal Keeper)가 눈을 부릅뜨고 골문을 지키고 있어도 눈 깜빡할 사이에 골이 들어가는 것처럼, 숙정은 고종과 관계를 가졌다.

 

첫 번째는 등산 갔다가 회식이 끝나고 두 사람만 따로 노래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술을 마시고 껴안고 부르스를 추다가 자연스럽게 쇼파에서 관계를 했다. 두 번 째는 등산 가서 일행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숲속으로 들어가 야생동물처럼 잠깐 동안 관계를 마치고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태연하게 일행과 합류했다.

 

세 번째는 회식을 마치고 모텔로 들어갔다. 등산을 했기 때문에 몸에 땀이 배여서 샤워를 하고 모처럼 여유를 가지고 편안하게 관계를 했다. 한참 진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진동으로 돌려놓고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반복해서 계속 전화가 왔다. 그래서 숙정은 샤워실로 들어가서 전화를 했다.

 

누가 당신 차를 박아놓고 도망가버렸어. 빨리 와봐.”

숙정은 뽑은 지 한달도 채 안되는 새 차를 누가 받았다고 하니 갑자기 그냥 옷을 주워입고 집으로 달려갔다. 차가 부서진 상태를 보고, 경찰에 신고한 다음 아파트로 올라갔다. 남편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숙정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니 등산 갔다더니 어디서 목욕도 하고 왔네? 아직 머리에 물기도 마르지 않았네!”

남편은 숙정의 옷을 벗겼다. 숙정은 저항했으나 남편은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이라 힘이 보통 사람 보다 두배는 강했다.

 

남편은 공부를 하는 대신, 태권도와 검도를 열심히 했다. 태권도 2단증과 검도 초단증을 벽에다 걸어놓고, 먼지라도 묻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항상 깨끗하게 손질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흥분해서 의심하고 옷을 완전히 벗기고 신체검사를 하니, 단번에 부정행위에 대한 증거가 드러났다. 고종과 관계를 한 다음, 남편의 전화를 받고 놀래서 뛰어오다 보니, 뒷처리를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숙정의 속옷에 고종의 것이 묻혀져 있었다. 남편은 사정없이 때렸다. 숙정으로부터 자백을 받았다.

 

숙정은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통화내역은 모두 삭제했고, 원래 고종의 전화번호는 여자 친구 이름으로 저장해 놓았기 때문에, 고종의 전화번호는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술을 마신 상태에서 강간을 당했다고 둘러댔다. 사건은 이렇게 이상하게 출발한 것이었다.

 

남편이 죽일 듯이 다그치니까 숙정은 모텔에서 고종과 있었던 사실을 시인하고, 속옷에서 나온 것은 고종의 것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간통한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모텔까지 끌려간 것이며, 갑자기 고종이 강제로 했던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남편이 그게 사실이라면 고종을 상대로 강간죄로 고소를 하라고 하니까, 숙정은 위기에서 모면하기 위하여 남편이 시키는 대로 고소장을 경찰서에 제출했다.

 

고종은 경찰조사를 받으면서 정말 황당했다. 같은 등산회 멤버로서 친하게 지낸 것은 맞다. 그 여자가 혼자 사는 줄 알고 세 번 관계를 했다. 그런데 강간을 당했다고 고소해서 징역을 보내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간통죄가 폐지되어 비록 유부녀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사문제지, 형사문제가 될 수 없는데, 어떻게 허위사실을 신고하여 이렇게 크게 문제를 만들 수가 있는가?

 

고종은 모텔에서 관계를 하다가 숙정이 갑자기 어떤 사람과 통화를 한 다음 허겁지겁 놀라서 황급히 모텔에서 나갔기 때문에, 그때 대충 눈치를 챘다.

 

! 유부녀구나. 그런 사실에 대해 전혀 말을 하지 않고 싱글처럼 행세했구나. 이제는 그만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날, 전화를 했으나 숙정은 전화를 차단해 놓았다. 그 후 아무리 전화를 해도 전화가 되지 않았고, 일체 연락이 없었다. 몹시 궁금한 상태로 있는데 일주일 쯤 지나서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경찰선데요. 최고종 씨지요? 강간죄로 고소장이 접수되었으니 출석해주셔야겠습니다.” 그리고 곧 바로 문자메시지가 왔다. 보이스 피싱으로 오해할까 봐 취하는 조치다. 전화를 받는 순간 고종은 뇌출혈로 쓰러질 뻔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경찰서라고 하는 말과 강간죄로 고소를 당했다는 말, 경찰서로 나오라는 말을 듣자, 머릿속은 그야말로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저는 강간하지 않았는데요. 그건 잘못된 고소입니다. 그래도 제가 나가야 합니까?”

. 일단 나와서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출석에 불응하면 체포장을 발부받아 체포합니다. 꼭 나오세요.”

 

숨이 막힐 것같았다. 숙정에게 전화를 했으나 응답하지 않았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변호사는 큰 도움을 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경찰에 출석해서 강간사실을 부인하자. 경찰에서는 숙정을 같이 불러 대질조사를 했다. 숙정은 고종의 시선을 피하면서 고개를 숙인 채 자기 주장만 되풀이했다.

 

아니. 숙정 씨, 우리가 처음에는 노래방에서 했고, 또 한번은 소백산 등산을 갔다가 일행 몰래 숲속에서 숏타임을 했잖아요. 그리고 모텔에서 같이 샤워를 하고, 그걸 하던 도중 어디선가 전화를 받고 그만두고 갔던 거잖아요? 내가 언제 강제로 했어요?”

 

경찰관이 숙정에게 물었다.

이 사람 말이 맞나요?”

 

노래방에 간 적은 있어도 노래만 부르고 술 마시고 그냥 나왔어요. 노래방에서 어떻게 그짓을 해요. 그런 적 절대로 없어요. 등산가서 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예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등산로에서, 그것도 대낮에 어떻게 해요? 더군다가 우리 등산회 일행이 35명이나 같이 있었는데요? 그리고 산에서 등산하다가 그걸 하면 남자는 기운이 빠져 산에 올라갈 수 없는 것 아닌가요?”

 

고종은 기가 막혔다.

세상에 이런 나쁜 여자가 있나? 분명히 노래방에서, 등산로에서 100미터쯤 들어간 숲 속에서 했는데, 이렇게 새빨간 거짓말을 할 수 있나? 불과 두 달도 안 된 일인데...’

하지만 여자가 그렇게 전면 부인하자, 고종은 답답하기만 했다. 경찰관은 따져 물었다.

 

아니 여자분이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피의자는 노래방과 산 속에서 성관계를 했다는 증거가 있나요? 예를 들면, 녹음을 해놓았다든가, 노래방의 CCTV라든가, 아니면 증인이라든가, 있으면 제출하세요.”

 

숲속에서 갑자기 바지만 내리고 잠깐 한건데 그걸 어떻게 녹음을 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노래방 실내에는 CCTV가 없잖아요. 은밀하게 잠깐 하는데 다른 사람이 그걸 볼 수 없잖아요. 이 여자 말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거짓말탐지기 측정을 해주세요. 정말 너무 억울합니다.”

 

그럼 모텔에서 한 것은 어떻게 된 겁니까? 여자가 동의한 것인가요?”

그때 둘이 같이 술을 마시고 오히려 숙정 씨가 먼저 원해서 모텔에 간 겁니다. 모텔에 가서 숙정 씨가 먼저 샤워를 했고, 제가 그 뒤에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오랫동안 참았었는지 숙정 씨가 매우 적극적이었어요.”

 

그럼 숙정 씨 목 부위와 팔뚝 주변에 상처는 무엇이지요?”

저는 상처를 본 적도 없어요. 만일 상처가 있다면, 그날 낮에 등산을 하면서 반팔을 입었기 때문에 숲속을 헤치고 다니다가 긁힌 거겠지요?”

 

숙정은 조사를 받으면서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고종은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울먹이고 있었다.

저는 남편이 무서워서 지금까지 한 번도 외간 남자와 관계를 한 적이 없어요. 이번에도 술에 취해 모텔까지 따라갔다가 갑자기 당한 거예요.”

 

여자가 허위고소를 해서 강간범으로 구속된 남자

 

홍 사장은 구치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을 때에는 미결수(未決囚)였다. 재판이 대법원까지 가서 끝이 나고 확정되자. 기결수가 되었다. 그래서 구치소에서 다른 교도소로 이감이 되었다. 10개월 가까운 기간, 머물면서 익숙해진 곳을 떠난다는 것은 무척 서운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사회에서 이사를 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사를 하게 되면, 사전에 어느 곳으로 갈 곳인지 결정하고, 미리 이사갈 곳을 둘러본 다음 거처를 구하고 이사를 한다. 감방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갈 때에는 그렇지 않다.

 

재소자의 자유의사는 완전히 통제된다. 교도관이 명령하는 대로 동물처럼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인 채 차에 실린다. 화물칸에 실리는 것이 아니라, 좌석이 있는 버스에 실리는 것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유리창도 없는 버스 안에서 차창 밖을 보지도 못하고 어디론가 옮겨간다.

 

아주 낯선 교도소에 들어가 점검을 받은 다음 똑 같은 입감절차를 거쳐서 머물 방실이 결정된다. 새로운 수감번호가 가슴에 적힌다. 지금까지 수십년동안 이어온 번호의 주인공이 된다. 홍 사장이 지금 부여받은 이 번호, <419>을 이 교도소에서 가슴에 차고 있었던 사람들은 출소한 다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모두 남자였을 것이다.

 

그 중에는 힘든 세월을 교도소에서 신음하다가 교도소 문밖으로 나갔다가, 일부는 다시 들어왔을 것이다. 대부분 아픈 기억을 가슴에 품은 채 또 다시 힘든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나 저세상으로 이사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기야 이미 죽었다면, 그는 더 이상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이사를 한 영혼이라고 해야 맞다. ‘사람과 영혼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 ‘호흡의 정지’ ‘심장 박동의 정지라는 경계가 있다. 이러한 표지로 두 존재는 구별된다.

 

홍 사장은 생각했다. 지금은 살아있지만, 죽은 다음 자신의 영혼은 이 번호를 기억할까? 자신의 육체에 붙여지고, 자신의 이름 대신 불리웠던 이 번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그런 생각을 하자 슬퍼졌다. 갑자기 무기력해지고, 허무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시 적응해야 히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웠다. 교도관도 바뀌고, 재소자들도 바뀌었다. 감방의 벽도 촉감이 달랐다. 오직 달라지지 않는 것은 인간의 눈빛, 무감각하고 무표정한 눈빛, 사랑이라고는 눈꼽만치도 남아있지 않는 눈빛만이 사방에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낮이고 밤이건, 홍 사장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며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홍 사장은 주눅이 들었다.

 

새로운 교도소로 옮겨진 후 일주일이 지나자, 홍 사장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노역을 신청했다. 어떤 종류의 일이라도 하겠다고 했다. 일을 해야만 무기력증에서 벗어날 수 있고, 가석방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 비교적 편한 일을 배정받았다. 마당 청소와 정원 관리업무를 맡았다. 처음에는 그 일을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일을 해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고 밖에 나가 하루 종일 있어야 했다. 추운 겨울날은 몇 시간씩 밖에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고역이었다. 더운 여름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죽을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견뎌야했다.

 

교도소에 들어간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공포에 질려 나올 때까지 벌벌 떨면서 지옥에 들어간 것처럼 지내다가 건강도 잃고 나온다. 다른 부류는 어차피 들어온 것,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순응하면서 열심히 일도 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견뎌낸다. 건강도 지키고, 우울증에도 빠지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교도소 바깥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면서 죽을 생각이나 하면서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환경과 운명을 탓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간다.

 

홍 사장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감방에 있는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생활하게 되었다. 홍 사장은 옛날에 고시공부를 한 적이 있어, 다른 사람의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고, 깊은 관심을 가졌다. 홍 사장 보다 한 달 뒤에 이감을 온 최 씨의 스토리도 진한 흥미를 끌었다. 최 씨의 죄명은 성범죄였다.

 

교도소에서 성범죄자로 징역을 받고 들어오면, 다른 재소자들의 눈에는 매우 한심한 사람으로 비춰진다. 바쁜 세상에 먹고 살기 바쁜데, 오죽하면 여자 아랫도리를 건드려서 징역을 사느냐는 식이다.

 

욕정을 참지 못하고 강간한 남자, 술에 취한 여자를 강제추행하고 강간을 시도하다 실패한 남자, 자신의 의붓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남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길을 가는 여자 50명의 가슴이나 엉덩이를 기습적으로 만지고 달아난 오토바이맨, 부하 직원을 위력으로 간음한 직장 상사. 육교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신의 〇〇를 여자에게 보여준 남자에 대해서는 모두 경멸의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홍 사장은 달랐다. 최 씨가 성범죄자라고 해도 사건 내용을 자세하게 알고 싶어했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대부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성범죄자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여자와 둘이 있는 상황에서 남자는 순간적인 욕정에 사로잡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문제는 왜 그런 상황에까지 갔던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홍 사장은 성범죄자라도 폭력사범이나 뇌물사범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믿었다.

 

어느 날 최고종은 재판을 받으러 나갔다가 돌아와 혼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홍 사장이 위로해줘도 소용 없었다. 고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그 다음 날 고종으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저는 절대로 강간하지 않았어요. 서로 좋아서 한 것인데, 남편한테 들켜서 남편이 죽일 듯이 때리면서 난리를 치니까 자기가 살기 위해서 저를 강간범으로 몰았던 거예요. 정말 너무 억울해요. 이대로 징역을 살 수는 없어요. 차라리 자살을 해서라도 결백을 증명하고 싶어요.”

 

죽으면 안 돼요. 죽는다고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는 건 아니잖아요, 살아서 무죄를 받아야 해요. 내가 도와줄 게요.”

 

홍 사장은 미력하나마 고종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종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파악해야 했다. 고종은 변호사를 선임했는데, 고종 말로는 그 변호사가 돈만 받아먹고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구속되기 전에 불구속으로 조사를 받을 때도 변호사는 이런식이었다.

 

별로 걱정하지 말아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진실은 언젠가 태양 아래 드러나는 거예요. 검사가 무혐의 결정을 틀림없이 할 거니까 나만 믿고 있어요.”

 

나를 믿으라라는 말은 신이나 교주들이 하는 말이다. ‘Believe me!'는 초월적 존재가 인간에게 하는 것이다. 변호사는 그래서 의뢰인에게 나를 믿으라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대신 ’Follow me.' 정도로 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변호사는 고종과 사건에 관한 상의는 별로 하지 않았다. 경찰이나 검찰에서 피의자로서 조사를 받을 때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조사 받기 전에 어떻게 답변을 하라고 구체적으로 코치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 달 동안 조사를 받다가 검찰에 의해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영장실질심사 때 변호사는 판사 앞에서 이 사건은 신빙성 없는 여자의 진술밖에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피의자는 도주 우려 없고 증거인멸 우려도 없습니다. 불구속수사를 받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는 식으로 아주 간단한 변론만 했다. 너무 간단해서 1분도 안 걸렸다.

 

고종은 변호사 실력만 믿고, 구속영장이 당연히 기각될 줄 알았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중요한 비지니스 미팅 약속도 잡아놓았다. 변호사 말로 영장은 저녁 6시 전에는 반드시 기각될 것이니, 8시 이후에는 약속을 잡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전 10시에 실질심사를 받았는데, 오후 830분 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곧 바로 구치소로 직행했다. 그 후 구치소로 접견을 온 변호사는 고종뿐 아니라, 다른 피의자들 여러 사람의 사건을 맡아서 고종을 접견하는 시간은 10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고종에게 담당 판사가 이상한 사람이라 영장이 잘못 발부된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구속적부심사나 보석을 통해 곧 석방시키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면서 큰소리로 웃는 것이었다.

 

변호사가 너무 큰 소리로 환하게 웃었기 때문에 접견실에 있던 다른 죄수나 변호사들이 볼 때에는 고종이 곧 석방되어 나가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홍 사장은 그 이야기를 듣고 남의 일이지만 흥분했다.

 

도대체 요새가 어떤 세상인데, 그런 나쁜 변호사가 있다는 말이요. 가만 두어서는 안 되겠네.”

아무래도 변호사를 바꿔야 할 것 같아요. 근데, 변호사를 바꾸면 저에게 불리하게 해꼬지를 하지 않을까요? 걱정 돼요.”

 

그 변호사 이름이 뭐지?” 고종이 변호사 이름을 듣자, “가만 있어보자,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홍 사장은 감방 벽에 그 변호사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고종에게 보여주었다.

이 변호사 이름이 확실한 거요?”

, 맞아요. 여기 그 변호사 이름이 써있네요.”

 

고종은 벽에 쓰여 있는 글씨를 읽었다. 어떤 죄수가 써놓은 것이었다. 내용인즉, ‘조악덕 변호사! 아주 악질임. 절대 선임해서는 안됨!!!’이었다. 감탄사 느낌표가 세 개나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말 악질적인 것 같았다.

 

홍 사장은 구치소와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벽에 이와 같이 변호사를 비난하고 욕하는 글씨를 써놓은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자신이 선임한 변호사가 제대로 하지 않아 결국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취지로 낙서를 해놓은 것이었다.

 

강변에 고급 호텔을 짓겠다는 사기꾼에게 걸려들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지루해질 때가 되면, 통영은 먼저 서둘러 일어나자고 한다.

오늘 미국 대사관 사람들과 약속이 잡혀 있어요. 미안합니다. 먼저 일어날 게요.”

여자는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그렇잖아도 오늘 선약은 취소되었고, 할 일도 없는 터였기 때문이다.

아 그러세요.”

. 제가 다음에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 괜찮아요.”

 

이런 방식으로 서로 전화번호를 주고 받고 헤어진다. 사기꾼들은 신중하다. 통영은 바로 연락을 하지 않는다. 신라호텔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자신에 대해 신뢰를 가지게끔 만든 여자에게 한 보름쯤 있다가 전화를 한다. 그것도 여자의 심리를 잘 연구해서, 여자의 남편이 출근한 월요일 오전 11시경 전화를 한다. 심심하던 차에 여자는 반갑게 응대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호텔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달러값이 떨어지기 전에 돈을 들여와야 해요. 시간이 되면 커피나 한 잔 하면 어떨까요?” 여자는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고 오케이한다. 두 사람은 이렇게 시작된다. 여자는 자신의 차로 통영을 태우고 양수리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스코틀랜드 스타일의 고급 호텔을 지을 자리를 찾는다.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는 일체 비밀이다. 1급 군사비밀이고, 특명작전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업계획을 말하면 큰일 나요. 비밀이 새면 조직폭력배들이 저를 납치해서 살해할지 몰라요. 미국에 있는 아버지가 저에게 주의를 하라고 수시로 연락이 와요. 한국에는 조직폭력배가 많아서, 만일 재미교포가 한국에 큰 돈을 투자하러 다닌다는 소문이 나면 가만 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저를 납치해서 인질로 삼고, 미국 아버지 회사에 연락해서 100억원 정도는 뜯어낸다는 거예요. 사기꾼들이 많아서 저를 이용해서 바가지 씌우려는 복덕방도 조심하라는 거예요. 오직 사모님만 알고 계세요. 그래서 저는 이름도 가명을 쓰고 있어요. 지금은 제임스 박이지만, 수시로 이름을 바꿀 것이니 놀라지 마세요. 제 핸드폰도 한달에 한번씩은 번호를 바꾸고 있어요. 물론 지금 쓰는 것도 렌트한 거예요. 미국에서는 큰 사업을 하려면 비밀유지가 가장 중요하고, 신변보호가 최우선이에요. 아버지는 돈이 들어도 1급 경호업체에 이야기해서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라고 하는데, 한국은 미국과 달라서 경호원도 전과자가 많고 경우에 따라서는 경호원이 다른 경호원을 시켜 보호받는 사람을 살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요. 한국 경호원들은 미국과 달리 권총도 없이 경호한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상대는 사시미 칼을 들고 공격하는데 경호원이 장난감 권총가지고 폼잡아야 경호가 될 수 없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혼자 신분을 숨기고 다니는 게 안전한 것 같아요.”

 

여자는 들을수록 통영이 큰사람으로 보였다. ‘, 사업은 저렇게 하는 거구나! 역시 미국에서 사업하는 사람은 매우 치밀하고 빈틈없이 하고 있구나.’

 

비밀을 지켜야 하고, 주변에서 달라드는 사기꾼이나 조폭들도 따돌려야 한다는 통영의 말에 공감했다. 이렇게 여러 차례 같이 차를 타고 다니면서 양수리 경치 좋은 곳을 다니다 보면, 여자는 통영의 숨은 계획에 말려들어간다. 자연스럽게 양수리나 서종면에 있는 북한강이 보이는 모텔에 들어가 정사를 벌인다. 그러다가 어느 날, 통영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여자에게 애로사항을 털어놓는다.

 

아버지가 일단 1억원을 보냈다는데, 그것을 찾으려면 외국환거래법 문제가 있어 경비가 필요하대요. 지금 나는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잠시 빌려주면 미국에서 송금된 돈을 찾는 대로 갚을게요. 300만원만 빌려주세요. 일주일이면 돼요.”

 

여자는 망설인다. 그러나 지금까지 통영의 사회적 지위나 아버지의 재력, 한국에서의 사업계획 등을 모두 알고 있기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돈을 만들어준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이나 잘 봐요.”

 

여자는 통영이 호텔사업이 잘 되면 객실 하나는 전용으로 평생 공짜로 쓰도록 하겠다는 약속에 대한 기대를 크게 하고 있어 미국에서 돈을 받는데 필요한 경비 정도는 당연히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핑크빛 환상에 젖는다.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은 미국 재벌 아들을 만나, 북한강변에 크게 세워질 스코틀랜드 풍의 고급 관광호텔에서 가장 높은 층의 스위트룸 객실을 평생 무상으로, 그것도 전용으로 쓰게 될 꿈을 꾼다. 그 룸의 인테리어는 여자가 자신의 돈으로 아는 업자를 시켜 최호화판으로 꾸밀 생각도 한다.

 

그런데 돈을 빌려 간 다음에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쁜지 연락이 뜸해졌다. 통영은 또 다른 호텔로 옮겨가서 다른 여자에게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어떤 때는 홍콩이나 일본에 비지니스 때문에 출장을 간다고 했다. 보름씩 연락이 끊어지기도 했다.

 

이런 수법으로 통영은 수십명의 여자를 농락했다. 사기금액은 한 사람으로부터 몇백만원 내지 몇천만원까지였다. 시간이 가면서 점점 사기치는 기술이 늘고, 경험이 풍부해지자, 때로는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서 렌트카를 운전시키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통영을 고소하지 못했다. 유부녀로서 정을 통했으므로 남편이 알게 되면 집에서 쫓겨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독하게 마음을 먹고 사기죄로 고소했다. 그 여자는 이혼했기 때문에 고소하는데 장애요인이 없었다. 그 여자도 500만원을 사기 당한 상태에서 처음에는 고소할 생각이 없었다. 그 여자는 혼자 살면서 통영을 사랑하게 되었다. 통영과의 잠자리에서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양수리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통영과 다니던 모텔에서 통영이 다른 여자와 나오는 것을 보고 통영을 만나 따졌고, 그 후 경찰서에 가서 고소를 했다.

 

이 점에서는 통영도 너무 재수가 없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왜 하필이면 그날 그 시간에 그 모텔에 갔던 것일까? 그렇잖아도 그 모텔은 너무 많이 다녀서 싫증이 났던 것인데, 새로운 파트너가 그 모텔이 전망이 좋다고 우기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들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통영은 경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경찰에서는 고소를 한 사람만 조사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피해자들은 유부녀가 대부분이어서 고소를 하지 못했다.

 

유부녀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그 여자들 신분이 대학 교수 또는 공무원, 대기업 직원인 경우도 있어 그들은 사회적 체면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돈을 손해 보고 말았다. 재수가 없어 사기꾼을 만나, 몇 번 연애를 하고 그 대가로 비싼 수업료를 냈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작은 운명

<폭풍의 언덕>을 소재로 사기를 치다

 

통영은 양수리 가는 길을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이미 그곳에 수십차례 가보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어렵고, 말도 되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낚시꾼이 미끼를 던지는 것과 같다.

 

벤츠와 비엠더블유, 아우디 같은 외제차를 발렛으로 맡기는 여성들이 나타날 때마다 통영은 같은 질문을 한 다음, 계속 로비 주변을 서성인다.

 

사기꾼은 머리가 좋아야 하고, 기억력이 탁월해야 한다. 머리가 나쁘거나, 둔하고, 눈치 없는 사람, 기억력 뇌세포인 해머 부분이 하얗게 변해서 치매 초기인 사람은 절대로 남을 속여서 돈을 벌 수 없다.

 

자신의 몸뚱이도 제대로 콘트롤 못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의 지갑에서 돈을 빼낼 수는 없다. 그것은 병약한 말을 타고 눈이 쌓인 알프스 산맥을 넘으려는 바보처럼 실패하고 감방에 가게 된다.

 

옛날과 달라서 지금은 <늙은 사기꾼>은 별로 없다. 나이 65세 되면 사기꾼도 은퇴해야 할 시대다. 옛날에는 나이 먹고, 늙어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노회한> 사기꾼으로 행세할 수 있었는데, 요새는 그런 사기꾼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기꾼의 범죄연령이 자꾸 낮아진다. <n번방> 사건에서도 보면, 20, 10대가 인터넷범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통영은 눈썰미가 좋아서 호텔에 들어올 때 말을 건 여자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가 그 여자들이 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갈 때, 다시 다가가 아주 정중한 자세로 말을 건넨다.

 

! 사모님, 아까 뵙던 분이네요. 제가 재미교포로서 한국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데, 혹시 차 한잔 대접하면서 좀 여쭤보면 안 될까요?”

열명 가운데 아홉사람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미안합니다. 바빠서 죄송해요.”라고 그냥 간다. 그래도 통영은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이런 일을 수없이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의외로 예상치 못한 행운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게 세상 이치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피나는 노력을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약간 다른 의미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도 있다. 그러나 이 속담은 매우 과장된 표현이다. 큰 아름드리 나무는 도끼로 천번을 찍어도 끄떡하지 않는다. 강력한 전기톱으로 썰어야 벨 수 있다.

 

외제차를 타고 온 여자들을 상대로 계속해서 차 한 잔 하자고 제안하면, 아주 드물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모처럼 친구를 만나서 점심도 하고 커피도 마시면서 수다를 떨려고 마음 먹고 광내고 때 빼고 왔는데, 갑자기 친구가 약속을 취소하는 경우가 있다.

 

호텔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는 맥이 빠진다. 공연히 기분이 나빠지고 짜증이 난다. 갑자기 스케줄이 망가졌고,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날씨는 화창한 봄날씨라 다시 집에 들어가 틀어박혀 있기도 싫다.

 

마침 남편은 지방 출장을 가서 오늘은 밤늦게까지 놀아도 되는 찬스인데 너무 아깝다. 가뜩이나 요새 남편과도 냉전 중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카톡을 주고받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능력 있는 남편은 돈을 팍팍 그 여자에게 쓸 것이 뻔하다.

 

이런 상태에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키가 크고, 잘 생긴 젊은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서툰 말씨를 보니 본인 말대로 재미교포로서 미국에서 오래 살다와 한국 물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이곳은 경비가 철저하게 보장되어 있는 고급 호텔의 대낮이다. 밑져야 본전이므로 같이 차 마시는 것에 동의한다. 게다가 차를 사겠다는데 만사 오케이다. 여자는 차라리 약속을 깬 친구가 고맙게 느껴진다. 그렇게 해서 여자는 통영과 로비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신다.

 

남자는 웨이츠레스에게 커피를 주문할 때도 발음을 딱딱하게 꺼삐라고 하지 않고, 아주 부드럽게, ‘~~’라고 원어민처럼 발음한다. 완전히 미국 사람이다.

 

영어를 읽는 것은 약간 되지만, 회화에는 전혀 자신이 없는 여자는 남자 앞에서 영어발음에 관해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면서, 자신은 한국식으로 아메리카노라고 조용히 말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보통 커피라고 하지, 아메리카노라고 하지 않아요. 원래 아메리카노(Americano)라는 명칭은 에스프레소를 뜨거운 물로 희석하여 마시는 커피 음료의 한 종류를 말해요. 이탈리아어인 'Caffè Americano'를 영역한 것이예요. 한국에서는 모두 아메리카노라고 하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랐어요.”

 

<아메리카노>라고 해야 멋있는 줄 알았던 여자는 약간 겸연쩍어한다. 통영은 커피를 마실 때도 아주 천천히, 조용하게, 커피를 음미하고 있었다.

 

통영은 우선 자신은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고, 아는 사람이 전혀 없어 불안하고 두렵다는 말로 시작한다.

 

저는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 가서 지금까지 살았어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시간 떨어진 교외에서 살고 있는데, 버클리 대학교에서 영국 문학을 전공했지요. 아버지는 미국에서 고생을 많이 하다가 석유 관련 사업을 해서 재벌이 되었어요. 스코틀랜드에 가서 관광호텔사업도 했어요. 스코틀랜드에 거액의 투자를 한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스코틀랜드 백작(伯爵)’ 작위를 수여받았어요. 저도 아버지를 따라 스코틀랜드에 가서 사업을 같이 했기 때문에 저도 스코틀랜드 공작(公爵)이라는 작위를 받았어요.”

 

여기까지 서툰 한국말로 설명하면서 통영은 매우 긴장하는 표정이다. 그러면서 중간 중간 어려운 영어로 공작이나 백작 같은 것은 단어를 발음하는데, 특히 ’RL‘ ’PF‘를 확실하게 구별하여 발음하는 것이었다. 여자는 설명을 듣고 있으니, 마치 자신도 유럽의 어떤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관광호텔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뿐만 아니라 여자는 갑자기 자신의 남편의 단점이 아주 뚜렷이 뇌리속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남편은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결혼하고 나서 집에서 책을 한 권 보는 것을 보지 못했다. TV 채널은 수백 가지가 되고, 외국 방송도 많은데 남편은 오직 순한국방송만을 고집했다. 그것도 뉴스 같은 것은 재미 없다고 보지 않고, 스포츠 중계, 연예가 중계, 개그프로에 집중했다.

 

특히 남편은 그동안 오랫동안 빠지지 않고 봐였던 <개그콘서트>가 더 이상 방영되지 않는다고 하자, 큰 충격에 빠졌다. 자신이 상당히 유머스럽다는 칭찬을 받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KBS 2TV에서 주말마다 하는 개그콘서트 때문이었다. 그러한 개그 프로를 통해 유모감각을 익히고, 말을 재미있게 하는 연습을 했다.

 

남편은 또한 <맛집코너>는 모든 채널을 돌려가면서까지 보았다. 그래서 TV에서 방영되는 유명맛집은 물어서까지 반드시 가서 먹었다. 그 바람에 체중이 무려 120킬로그램이나 나갔다. 복장만 제대로 갖추어 입으면 어느 나라 위원장같은 풍채를 갖추었다.

 

남편은 월드컵이나 평창동계올림픽 기간에는 거의 24시간 TV 앞에서 살았다. 메달을 따는 한국 선수, 외국 선수의 프로필까지 꿰뚫었다. 그 복잡하고 처음 듣는 경기 용어, 경기 규칙 같은 것에 대해서도 거의 스포츠 전문해설가 이상의 높은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잘 모르는 것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찾아보고 확인하는 열성을 보인다. 심지어 노트를 한 권 사서 필요한 것은 메모까지 하고 가끔 들춰보기까지 한다.

 

국내 야구선수와 축구선수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 선수들의 개별전적, 연봉, 스캔들까지 모두 외우고 있었다. 홈런 개수 및 안타 개수, 도루 성공횟수 등을 모두 외웠다. 특히 여자 배구선수들의 신장 및 체중을 모두 확인한 다음, 남편은 자신의 키가 너무 작은데 대해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게 되었다. 한 때 이 문제로 우울증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남편은 술을 좋아해서 중요 경기가 있으면, 반드시 치맥을 시킨다. 프라이드치킨 한 마리에 생맥주를 5천씨씨를 주문한다. 먹다가 생맥주가 부족해지면 집에 있는 캔맥주를 연속해서 딴다.

 

한국팀이 우승하면 남편은 마치 그날 먹은 치맥을 공짜로 먹은 것처럼 생각한다. 경기 내내 부인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경기 흐름을 놓칠 위험 때문이다. 부인을 쳐다보는 유일한 시간은 치킨배달원이 왔을 때, 부인에게 상을 차려달라고 할 때와 중간에 화장실 갈 때뿐이다.

 

부인은 보고 싶은 드라마도 보지 못하고, 정말 답답하고 한심하다. 부인은 이것을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오래 전에 가수 박재란이 부른 이라는 트로트 노래에 나오는 가사가 떠오른다.

 

그러면서 늦은 시간에 배달온 젊은이도 중요한 경기를 봐야 할 텐데, 돈이 없어 경기도 보지 못하고, 편하게 집에서 경기를 보고 있는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구나 하는 인간적인 동정심을 느낀다.

 

통영은 이야기를 이어간다. 나이가 드니까 고국이 생각나서 아버지 승낙을 받아서 일단 미국 돈으로 천만 달러, 그러니까 한국돈으로 100억원 정도를 가지고 한국에서 관광호텔사업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스코틀란드에는 바닷가나 호숫가, 깊은 산속에 환상적인 호텔이 많아요. 저도 한국에서 경치 좋은 곳에 호텔을 멋있고, 예쁘게, 고급스럽게 짓고 싶어요. 그래서 양수리가 좋다는데, 한번 가볼까 하고요. 미국에서 나올 때 한국에는 사기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절대로 사업 이야기는 모르는 남자들과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아버지도 미국으로 이민가기 전에 사기꾼에게 전 재산을 날리고 빈손으로 갔대요. 그래서 이런 호텔 사업은 저 혼자 은밀히 진행하고 있는 거예요. 사모님은 인상이 좋으셔서 믿어도 될 것 같아서 말을 꺼낸 거에요.”

 

여자는 호기심을 가진다. 우연한 기회에 이렇게 괜찮은 남자를 알게 되다니! 오늘은 행운이 닥친 날이다. 이런 날에는 로또를 하나 사도 될 것 같다. 여자는 점점 통영의 말에 빨려들어간다. 통영은 여자에게 물어본다.

 

혹시 폭풍의 언덕읽어보셨어요?”

여자는 소설 제목은 들어봤지만, 그런 소설을 읽을 시간은 없었다. 읽어보라고 권하는 사람도 없었다. 드라마는 수없이 봤지만, 특별히 어떤 소설책을 사서 읽어본 기억은 없다.

 

아직 안 읽었어요.”

. 폭풍의 언덕은 제가 대학교에서 영국 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영어로 된 원서로 수십번 읽었던 영국 소설이예요.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아름다운 소설이예요. 저는 대학생 때 그 소설에 빠져 지금까지 결혼도 못하고 혼자 살고 있어요. 언제 한번 시간 나시면 읽어보세요. 한국에도 번역되어 나왔다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통영은 폭풍의 언덕스토리를 청산유수로 설명한다.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사랑에 관한 명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해준다. 감동적이다. 사기를 치기 위해 한국말로 번역된 폭풍의 언덕을 수십번 읽었다. 영어로 된 소설은 구경도 못했다. 한글 소설책은 하도 많이 읽어서 몇 페이지에 어떤 대사가 나오는지 다 외우고 있다.

 

여자들에게 써먹는 부분은 사실 몇 군데 되지 않는다. 많아야 20군데 정도다. 슬픈 장면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제스처도 보인다. 여자는 감동을 받으면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다.

 

작은 운명

고급 호텔을 무대로 사기를 치는 남자

 

통영의 입장에서도 사기꾼에 대해 경계심을 갖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른 재소자들의 죄명은, 횡령이나 배임죄, 교통사고처리특례법위반, 폭력범죄, 성범죄 등이어서 별로 의심하거나 경계를 하지 않았지만, 홍사기 사장의 죄명이 사기죄인 것을 알고, 처음부터 경계를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홍 사장의 이름이 사기(思基)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통영은 아무리 자신이 사기죄로 구속되어 감방에 들어왔지만, 사기꾼이 자신의 이름을 아예 <詐欺>라고 지어서 돌아다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통영은 생각했다. ‘처음부터 부모가 자기가 낳은 귀한 자식을 사기꾼으로 대성하라고 이름을 <사기>라고 지어서 호적에 올리지는 않았을 거야. 분명히 저 사람이 자꾸 사기를 치고 징역도 살고 하니까 저 사람 살고 있는 시의 시장이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저 사람 이름을 강제로 호적공무원에게 지시해서 개명(改名)하도록 했을 거야. 그렇게 이름을 바꿔주려면 아예 성()까지 바꾸어서 지금 불리우는 홍()씨가 아닌 왕()씨로 바꾸지 그랬을까? 그렇게 하면 <홍사기>가 아닌 <왕사기>가 되어 사람들이 확실하게 사기꾼인 것을 알고 피해를 사전에 막을 수 있을텐데...’라고 깊이 생각했다.

 

통영은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중퇴를 했다. 통영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사기죄로 구속되면서 집안이 엉망이 되었다. 체격이 크다는 이유로 학교에서는 불량서클의 타겟이 되었다. 그러나 통영은 나름대로 성깔이 있었기 때문에, 싸움은 못했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량서클 멤버들에 의해서 집단폭행을 당했다.

 

그때 아버지는 구치소에 있었고, 통영은 어머니가 충격을 받을까 봐 학교에서 당한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통영은 불량서클에 들어갔다. 열심히 서클활동을 하고, 싸움판에도 여러 차례 끌려 다녔다.

 

아버지 옥바라지를 하는 어머니가 너무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정을 알고 있는 통영은 학교 서클의 선배들로부터 돈을 빌려다가 어머니에게 주었고, 나중에 그 돈을 못갚게 되자, 사기꾼으로 몰렸다. 그 때문에 통영은 그토록 다니고 싶었던 학교를 못 다니고 말았다.

 

그 후 이곳저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직장 생활을 하였고, 그러면서 타고난 머리와 기질을 최대한 활용해서 아주 전문적인 프로 사기꾼이 되었다.

 

통영이 구속된 사연은 이랬다. 그는 늘 신라호텔과 하얏트호텔에 가서 살았다. 하루는 신라, 하루는 하얏트로 갔다. 매일 호텔에 가서 시간을 보내니까 큰 돈이 드는 것으로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 드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혼자 살고 있는 달동네에 있는 지하 단칸방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간다. 두 호텔 모두 지하철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두 호텔 모두 경치가 너무 좋다. 매일 호텔로 출근하니까 서울에서 가장 공기 좋고, 경치 좋고, 고급스러운 직장으로 출근해서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통영은 다른 직장인들이 너무 불쌍하게 보였다. 다른 직장인들은 건물도 낡고, 화장실도 더럽고, 코로나사태 때도 제대로 소독이나 방역도 하지 않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고생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버스나 지하철도 출근시간이나 퇴근시간에 짐짝처럼 밀려서 타고 다니는 것이었다. 하지만 통영은 자유로운 개인사업자였기 때문에 출퇴근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매일 고급호텔에 가는 것이므로 환경도 너무 좋았다.

 

드는 비용은 로비라운지에서 마시는 커피 값이다. 식사는 호텔 밖으로 나가서 싸구려 점심을 먹었다. 편의점에서 간단히 김밥을 먹거나 라면을 먹었다.

 

그는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세련된 매너를 보여주었다. 나이에 비해 매우 젊어보였다. 남자가 젊어보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꿈을 꾼다. 하지만 젊어보여서 열심히 사회생활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좋지만, 여자를 꼬시거나 사기를 치려고 젊게 보이는 것은 독이 되어 돌아온다.

 

통영은 기본적인 생활영어를 원어민 발음으로 하고, 일부러 한국말은 서툰 것처럼 더듬더듬했다. 중학교 다닐 때 가장 자신 있었던 과목은 국어였고, 수학이나 영어는 거의 빵점 수준이었지만, 사회에 나와서 사기를 치려고 마음 먹으니 고의로 한국어는 서툴게 해서 재미교포인 것처럼 가장하고, 영어는 아주 간단한 인사말은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ker)처럼 발음할 수 있도록 피나는 노력을 반복했다.

 

‘Good Morning’을 발음할 때 보통 사람은, ‘굳 모닝이라고 짧고 강하게 발음한다. 그런데 통영은 일부러 모닝의 ‘r’발음을 길게 함으로써 표를 낸다. ‘구우우웃 모오오오닝이렇게 명확하게 ‘r’이 들어있음을 강조해서 알린다. ‘morning’‘moning’이 구별되도록 하는 것이다.

 

통영은 호텔 로비에서 밖을 유심히 살펴본다. 외제차를 손수 운전하고 발렛 파킹을 맡기는 여자만 관찰한다. 그런 다음 그 여자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저는 재미교폰데, 잠깐 여쭤봐도 될까요?”

.”

제가 양수리를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면 좋을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미안합니다.”

 

물론 이것은 수작에 불과하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양수리 가는 길을 안내를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군대에서 독도법을 열심히 배워서 향도 역할을 3년간 했던 사병 출신도 불가능하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길을 묻는 사람은 있다.

 

아주 옛날 이야기다. 어떤 나이 지긋한 노인이 종로3가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데, 어떤 젊은 여자가 명품옷을 걸치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쓰는 차양 큰 고급 모자를 쓰고, 해도 나지 않고 구름이 잔뜩 낀 시간에 길을 물어왔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여기 사세요?”

그 노인은 기분이 상했다. 자신은 회장이 아니고 은퇴해서 집에서 놀고 있는 사람이었다. 마누라가 너무 잔소리가 심해서 매일 아침 일어나면 곧 바로 옷을 주워입고 지하철을 타고 종로3가역에서 내려서 파고다공원에서 온종일 장기를 두고 있는데, 옷도 그날 따라 초라하게 한달 동안 세탁을 하지 못한 것을 입고 나온 것을 눈으로 보고 알면서도 자신을 예우한답시고 <회장님>이라고 부르니까 마치 자신을 무시하거나 비하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젊은 여자는 <회장님>이라는 호칭을 상대를 무시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 깎듯이 예우를 해서 사용한 것이었다. 그래야 자신이 묻는 길을 정확하고, 친절하게 알려줄 것으로 기대했다.

 

사실 서울에는 <사장님>이나 <회장님>들이 너무 많다. 명동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보고 뒤에서 큰 소리로 <사장님>하고 부르면, 적어도 100명은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회장님>하고 부르면, 양심이 있어서 그런지 50명만 뒤를 돌아본다.

 

젊은 여자는 미국에서 태어났는지, 한국말도 서툴러 보였다. 매일 주식으로 버터를 먹고 사는지 말에서 상당히 미국 냄새가 났다. 혀가 아주 부드럽게 꼬부라졌다.

 

회장님, 너무 멋있는 분이세요. 저는 멀리서 보고 꼭 한국의 최고 태런트 <최불암> 선생님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저는 지금 미국에 있는 샌프란시스코를 가려고 해요. 여기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아세요?”

 

노인은 이 말에 그 여자에 대한 오해가 다 풀렸다. 자신도 한때는 <최불암>을 우습게 봤다. 젊었을 때 여자들에게 인기가 하늘을 치솟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있는 쎈쁘랑스 가려고 그래요? 쎈쁘랑스는 멀텐데, 어떻게 걸어가려고 그래요? 다리 아파서 오늘 하루에는 못갈텐데요.”

회장님, 여기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 거예요? 저는 빨리 가야 해요.”

글쎄요. 지하철은 거기까지 가지 않을 거고, 아마 버스보다는 택시를 타고 가는 데 좋지 않을까요?”

, 잘 알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자는 아주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노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총총걸음으로 동대문쪽으로 걸어갔다.

 

 

억울하게 징역을 사는 사람들

 

홍억울(48, 가명) 사장 자신의 재판에서는 완전히 졌다. 검사가 구형을 36개월 했는데, 판사는 고작 6개월만 깎아주고, 3년이라는 무거운 실형(實刑)을 선고했다. 홍 사장은 선고를 받으러 가는 날, 아침에 담당 변호사에게 전화로 물어보았다.

 

판결 선고가 어떻게 날 것 같아요? 변호사님!”

글쎄요. 제 경험으로 봐서는 징역 1년 정도 실형이 떨어질 가능성이 20%, 집행유예를 받아 구속되지 않을 가능성이 80%라고 봐요. 너무 걱정 마세요. 판결 선고 잘 받고 오세요.”

변호사님, 저 혼자 가는 거예요?”

물론이지요. 오늘은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판사가 혼자 나와서 피고인에게 판결만 선고하는 거예요. 판결 선고 때에는 검사도 없고, 변호사도 참석하지 않아요. 재판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때만 해도 홍 사장은 고시공부는 했지만 실무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변호사만 무조건 믿고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유명한 역학자가 홍 사장은 사주팔자 관상에 관재수가 1%도 없다는 말을 한 것을 철저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검사가 징역 36개월을 구형했을 때도 장난인 것으로 알았다. 검사는 고소인이나 피해자 편을 들기로 작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형식적으로 그러는 것으로 알았다.

 

막상 판사가, “피고인을 징역 3년에 처한다라고 선고하고, 곧 이어서 교도관에게 구속영장을 주면서, 데리고 가라고 했을 때 기절할 뻔했다. 집행유예가 나오면 저녁에 손님들을 만나려고 약속까지 잡아놓고, 신사복에 명품 시계까지 차고 나왔는데 그 상태에서 법원에서 구치소 호송버스를 타고 구치소로 가게 된 것이었다.

 

초원에서는 무리에서 이탈한 얼룩말을 사자들이 습격을 한다. 얼룩말은 죽기 살기로 도망가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불과 몇 분 안에 무섭고 날카로운 사자의 이빨은 얼룩말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져 질식시킨다. 얼룩말의 고통은 잠시뿐,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더 잔인하다. 갑자기 법정에서 판사의 말 한 마디에 무서운 사자들이 수갑을 채우고, 포승줄로 묶고, 자유를 완전히 박탈한다. 동물우리와 같은 감방에 처넣는다. 외부와는 차단되고, 옷도 군대식으로 통일된 색깔로 바꾸고, 이름 대신 번호가 주어진다.

 

구치소에서 재소자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번호만 알면 되고, 번호로 움직이는 것이 효율적이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에서도 같은 반에서 번호만 가지고 출석을 부르거나 성적표를 나누어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홍억울 사장이 몇 달 지나서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같은 방으로 신입자가 들어왔다. 장사기(45, 가명)는 처음 들어와 가볍게 인사만 하고 며칠 동안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죄명은 사기라는데, 얼굴이나 말하는 태도로 보아서는 도저히 사기꾼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너무 순진해 보이고, 진지해 보였다. 재소자들은 그의 정체에 대해 매우 궁금해했다.

 

그는 돈을 잘 썼다. 영치금을 가지고 재소자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었다. 책은 주로 영어로 된 경제와 정치에 관한 책을 보고 있었다. 일본어로 된 철학책과 소설도 읽고 있었다. 분명 우리나라 사람이 맞는데, 한글로 된 책은 전혀 보지 않았다. 외국책을 읽으면서 혼자 조용히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 분명 학식이 깊고, 책이 재미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영어와 일본어로 된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그냥 표지가 고급스럽게 생겼다는 것만 확인할 뿐이었다. 무슨 책이냐고 묻고, 내용이 어떠냐고 물어도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시간이 가자, 그는 서서히 자신의 정체에 대해 1급 군사기밀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저는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가서 살다가 나이 들어 한국에 돌아왔어요. 아버님은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주유소를 5개 경영하고 있어요. 제가 고국에 돌아가서 사업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우선 100억을 가지고 한국에 가서 작은 사업부터 연습 삼아 해보라고 해서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한국에서 호텔 사업을 하려고 준비하던 중, 같이 투자하겠다고 달라붙은 여자 세명으로부터 억울한 고소를 당해서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예요. 저는 곧 나갈 거예요.”

 

홍 사장은 통영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죄명이 사기이기 때문에 일단은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홍 사장은 구치소에 들어온 이후 수많은 사기꾼을 보았다.

 

물론 개중에는 억울하게 고소인의 무고 내지 허위과장 주장에 의해 혐의 없음을 충분히 입증하지 못하고 구속되어 들어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런 억울한 사람이 무죄를 받고 나가는 것은 거의 보지 못했다.

 

사기죄로 구속된 피고인이 제대로 해명을 못하고, 충분한 반대증거를 대지 못하고, 돈이 없어 변호사를 제대로 사지 못해서 그런 수도 있겠지만, 홍 사장이 보기에는 경찰이나 검찰, 법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인권의식이 부족한 것임은 틀림없었다.

 

어떤 경우에는 고소인을 위해 청부수사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고소인의 주장만 듣고, 피고소인의 주장은 묵살해 버린다. 고소인이 꾸며낸 증거만 가지고, 피고소인이 억울하다고 울부짖는 것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경찰에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편파수사를 해서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청에 송치하면, 검사는 보지도 않고 법원으로 사건을 넘긴다. 법원에서는 고소인을 증인으로 불러 신문한 다음, 증거가 충분하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한다.

 

실형을 선고하는 경우에는 도주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법정 구속을 한다. 곧 바로 교도관에게 인계되어 구치소로 옮겨져 감방에 들어간다. 그때부터는 구속상태로 항소심이나 상고심의 재판을 받아야 한다.

 

홍억울 사장이 볼 때 사기죄로 구속되어 들어오는 사람들은 실제 사기꾼인 경우가 많았다. 사기꾼은 구치소에 들어와서도 거짓말을 하고, 밖에 나가 또 사기를 칠 생각을 한다. 같은 감방에 있던 사기꾼에게 걸려들어 밖에 나가 사기를 당하는 사례도 있다.

 

= 작은 운명 (154)

날이 갈수록 도둑질하기가 어려워졌다

 

홍 사장은 명훈 아빠에게 교소도에 갔다온 인생 선배로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이는 동갑인데 남이 못하는 직접 체험을 많이 해서 선배가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교도소라고 해서 들어가면 꼭 죽는 줄로만 생각했어. 사람이란 참 이상한 존재야. 막상 들어가보니 곧 바로 적응이 되는 거야. 적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생각보다 빨리 익숙해져서 놀랐어.”

자유가 박탈당하니까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럽겠어? 먹는 것고 그렇고, 자는 것도 그럴텐데.”

 

물론 그거야 그렇지. 처음에는 억울하게 구속되고 갇혀있으니까 죽고 싶은 마음에 환경은 이차적인 것이 되어 버려. 고소인들과 싸우고, 경찰과 싸우고, 검사와 싸우다 보면 몇 달은 그냥 지나가. 재판에 넘어가면 판사가 재판을 아주 천천히 하니까 갇혀 있는 사람은 지쳐버려. 나중에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 심정이 되는 거야. 교도관이 무섭고 나라는 존재는 없어져 버려. 스스로 환경의 노예가 되는 거야. 아무 의욕도 없고, 세상이 무섭고, 모든 사람들이 무섭게 느껴져. 가족도 처음에는 면회를 오다가 나중에는 지쳐서 그런지 더 이상 면회도 오지 않아. 편지를 보내도 연락도 없어. 그때는 나가서 죽이고 싶었는데, 그것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까 결국 지쳐서 포기하게 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명훈 아빠는 홍 사장 하는 말이 그다지 실감은 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그랬다. 자신과 홍 사장은 전혀 다른 환경에 있으니까. 자신은 절대로 감방에 갈 이유가 없으니까.

 

점쟁이도 명훈 아빠에게, “당신의 사주와 관상, 그 외 모든 것을 분석해 보면 앞으로 5년 동안은 당신에게 관재수(官災數)는 없어!!!”라고 100% 확신에 찬 말을 해주었다. 그래서 점을 본 값을 기분이 좋아 두배로 준 적이 있었다.

 

교도소에 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돼. 나는 고시공부를 오래 해서 법을 아니까. 재소자들은 나를 존경하게 돼. 많은 것을 물어와. 나는 아는 대로 무료로 상담을 해줘. 그렇게 하다 보니 법에 대한 실력이 대번 늘어. 웬만한 변호사보다 훨씬 아는 게 많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24시간 감방에서 내 문제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의 형사사건만을 생각하고, 보고 듣고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지. 감방에서는 오직 사람들이 구속될 정도의 중한 사건만 취급하게 돼. 경범죄는 취급하지 않아. 그리고 민사재판이나 가사재판은 절대로 취급하지 않아.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나 절실한 환경에서 전문가가 되는 거야. 유대인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최고의 철학자, 과학자가 되듯이 말야.”

 

명훈 아빠는 홍 사장 이야기가 신기하게 들렸다. 그렇게 열심히 한 고시공부를 감방에 직접 들어가 써먹다니, 그야말로 인생의 아이러니였다.

 

감방에 있으면,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서 무슨 죄로 들어왔는지를 듣게 돼.”

 

신입회원은 선배님들에게 공손한 태도로 자신의 범죄사실을 신고한다. 홍 사장은 재판장과 같은 입장에서 곁에 많은 배심원들을 데리고 교도소 초년병인 신입회원의 스토리를 청취한다. 국회 청문회장처럼 가끔 사람들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저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서 배우지도 못하고 부모님도 일찍 여위고 살다보니 절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이 다섯 번째입니다.”

 

사람들은 절도범에 대해 동정을 한다. 그러나 절도범은 자신의 환경이 아니라 범행의 실패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그때 그 집에 들어갈 때 더 많은 준비를 했어야 했어요. CCTV에 얼굴이 찍히지 않도록 했어야 했는데, 실수를 한 거예요.”

 

요새는 옛날과 달라서 도둑질도 주먹구구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과학적인 기법으로 짧은 시간 내에 돈이 많은 부잣집에 들어가 사람을 해치지 않고 패물이나 현금이 있는 곳을 찾아내서 빨리 가지고 현장을 이탈해야 한다. 도로 곳곳에 CCTV가 있기 때문에 나중에 검거되기가 쉽다. 모자를 눌러 쓰고, 미세먼지를 핑계로 마스크를 쓰고 도주해야 한다. 침입할 집을 사전에 수십차례 답사해야 한다.

 

특히 어려운 것은 사람들이 귀중품은 집안에 깊숙이 감추어놓기 때문에 소풍 가서 보물 찾기보다 더 어렵다. 이것이 기술인데, 역시 많은 실전 경험에서 노하우가 터득된다. 어렵게 훔친 물건도 장물처분하기가 예전 같지 않은 게 고민이다.

 

남의 물건을 몰래 훔치는 도둑놈들의 고민도 깊어만 간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도둑은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재산이나 재물에 대한 관리가 소홀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은 대개 단독주택이거나 허름한 판잣집, 슬라브지붕집이었다. 대문이 있어봤자, 담장이 낮아 쉽게 넘을 수 있었다. 대개 집에 시계나 금반지 등 패물을 보관하고 있었고, 현금도 조금씩 가지고 있었다.

 

주택을 지키는 경비원도 없었고, 경찰의 수사력도 형편없었다. 그래서 남의 집에 담을 넘어 들어가거나, 문이 잠겨있지 않은 경우 몰래 들어가서 짧은 시간에 귀중품이나 값나가는 옷을 들고 나오면 90% 이상은 미제사건으로 끝났다.

 

경찰도 사람을 해치지 않은 절도사건은 신고만 받아놓을 뿐 잡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워낙 절도사건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절도범 한 명이 현행범으로 검거되거나, 장물처분과정에서 붙잡히면 가혹행위를 하거나, 집요하게 신문을 해서 과거의 절도범죄를 모두 자백을 받는다.

 

그러면 수십건의 관내 미제사건을 모아서 재판에 넘긴다. 시간이 가면서 절도범의 범죄환경이 어렵게 되었다. 특히 아파트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주거침입절도범죄가 경비 때문에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또한 장물아비가 거의 사라져서 절도한 물건을 처분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CCTV 같은 과학적 장비의 등장은 도둑놈에게 치명적인 장애가 되었다. 더군다나 신용카드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은 집에 현금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큰 애로사항이었다.

 

이 때문에 소액의 현금을 노리는 소매치기들은 사업할 시장을 거의 잃어버렸다. 택시강도도 마찬가지다. 택시 기사들이 교통카드나 신용카드로 돈을 받으니까 강도짓을 해야 기사 잠바나 구두밖에 강제로 빼앗을 물건이 없다.

 

그렇다고 여자 택시 기사를 강간하려다가는 해병대 출신 여자 기사를 만났다가는 두 다리가 부러지는 불상사를 당하기도 한다.

 

감방에 있는 사람들은 도둑으로부터 탁월한 절도 솜씨와 풍부한 경험, 좋은 머리에 감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는 동정하지만, 도둑놈이 또 무슨 도둑질을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감방에 있는 홍 사장을 비롯한 점잖은 재소자들은 신입회원의 죄명이 절도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절도범의 얼굴이 왠지 응큼해 보이고, 어두워 보이고, 도둑놈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는 참 이상한 선입관이었다. 하기야 감방안에서 훔쳐가야 무엇을 훔쳐갈 것이 있겠냐마는,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것처럼, 밖에서는 소를 도둑질 했어도, 감방 안에서는 바늘이라도 훔쳐갈까봐 걱정되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그런데 우리 속담은 모순이다. 비현실적이다. 경험칙상 바늘 도둑은 평생 늙어도 바늘 도둑으로 남는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질 할 의지나 능력은 절대 없다.

 

뇌물을 먹는 공무원도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크게 먹지, 말단 공무원은 언제나 뇌물액수가 근소하다. 떡고물 값인데도 이상하게 말단은 징역가고, 파면된다. 지체 높은 국회의원은 뇌물죄로 구속되었다가, 몇 년 후에는 또 국회에서 부정부패를 추방해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품고 있는 장면이 TV에서 보인다.

 

홍 사장은 군대를 면제받았기 때문에 젊었을 때 단체생활을 해보지 않았다. 군대가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른다. 군대 가서 단체생활을 하게 되면, 남의 눈치도 보게 되고, 공동으로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늘 콤플렉스를 느꼈다.

 

홍 사장은 구치소에 있으면서 형법책을 많이 보았다. 대법원 판결도 읽고, 형사사건에 관한 법률지식을 열심히 익혔다. 그래야 재소자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소문이 났다. 일부는 와전되기도 했다.

 

다른 방에서는 홍 사장이 변호사 자격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고, 미국에 유학 가서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천재라고도 했다. 심지어는 홍 사장의 이혼한 전 부인이 현직 검사라는 엉뚱한 말도 퍼졌다.

 

- 작은 운명 (215) -

고시 공부를 오래 한 남자의 불운한 이야기

 

가요무대가 끝나고 TV 채널을 돌리자 뉴스가 나오는데, 현직 검사가 투신자살했다는 보도를 하고 있었다. 보도하는 아나운서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고속도로에서 연쇄충돌사고로 3사람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뉴스를 보도할 때와 똑 같은 표정과 억양, 감정이었다.

 

검찰 수사를 받고, 구속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는 중압감과 수치심, 억울함 때문에 투신해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는 뉴스였다. 그 검사가 수사받고 있는 내용은 명훈 아빠가 볼 때 크게 무거운 죄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왜 자살을 했을까? 그냥 조사 받고 재판을 받지? 잘못되면 1∼2년 징역을 살고 나오면 안 될까? 나이도 많지 않은 검사가 죽다니? 가족들은 어떻게 하라고?’

 

명훈 아빠는 갑자기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그걸 보니 검찰수사가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지옥에서 올라온 죽음의 사자 같았다. ‘검사는 사람도 아닌 거야. 레미제라블의 자베르 형사처럼 법만 앞세워 남을 죽이는 악마와 같은 존재야. 피도 눈물도 없어.’

 

언젠가 명훈 아빠는 고등학교 친구인 홍 사장으로부터 교도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홍 사장은 고등학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했다.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법대에 다니면서 고시공부를 했는데, 이상하게 꼭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는 것이었다. 같이 공부하는 선배나 후배들이 보면 홍 사장 실력은 법대 교수보다도 좋은데, 시험만 보면 언제나 근소한 차이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운칠기삼이라고 시험은 운이 중요한데, 그 놈의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한 마디로 재수가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 같았다.

 

홍 사장 부모들이 용한 점쟁이한테 점을 쳐보니, ‘홍 사장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를 옮겨야 한다.’고 했다. 조부모가 제대로 밥도 못 얻어먹고 구천을 떠돌고 있으니 손주가 잘 될 까닭이 있겠느냐고 욕을 하면서 꾸짖었다.

 

점쟁이 말이 사실이라면 욕을 먹어도 쌀 노릇이었다. 그때서야 홍 사장도 그동안 왜 그렇게 많이 떨어졌는지 이해가 갔다. '아! 역시 세상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고, 조상님이 중요한 거야! 이제 됐다.'

 

그래서 비싼 돈을 들여 천도제를 지내고, 산소를 명당 자리로 옮겼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산소를 옮긴 다음 홍 사장은 오히려 더 큰 점수 차이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홍 사장이 제일 싫어해서 잘 보지 않은 곳에서만 문제가 출제되었다.

 

그렇게 10년을 고시낭인으로 지내던 홍 사장은 끝내 고시를 포기하고,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처음에는 신림동 고시촌에서 아주 작은 규모로 라면 집을 시작했다. 홍 사장이 고시 공부를 오래 했기 때문에 돈 없고 불쌍한 고시생들의 심정을 헤아리면서 정성껏 라면을 끓여주고 고시에 합격하는 비결을 알려주었더니 장사가 아주 잘되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시작했고 점차 PC방과 호프집, 노래방 등으로 사업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러다가 지리산에서 오래 공부를 했다는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해서 연쇄부도가 났다. 그 사기꾼도 한때는 신림동에서 고시공부를 했다는 머리 좋은 천재였다. 새로운 스타일의 신종사기수법을 1년에 한가지씩 개발해서 돈을 뜯어내고 있다는 소문도 들렸다. 모든 재산을 한 순간에 날리고, 억울하게 사기꾼으로까지 몰린 홍 사장은 자신의 모든 법률지식을 동원해서 백방으로 막았지만, 끝내 징역을 3년 살고 나왔다.

 

그때 홍 사장 사건을 맡았던 젊은 변호사는 인상이 꼭 사기꾼 같았는데, 나중에 이야기 들어보니 그 변호사도 무엇을 잘못해서 그랬는지 구속되어 포토라인에 선 것을 홍 사장이 출소 후에 우연히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 사기꾼에게 내가 돈을 많이 주고 사건을 맡겼으니 내가 징역을 산 게 당연하지!'

 

홍 사장은 다시 한 번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이치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홍 사장이 징역을 살고 나오니, 부인은 어떤 놈팽이와 도망을 갔다. 사람들 말로는, 부인은 나이 어린 정력 좋은 건달과 같이 필리핀인가 베트남인가로 갔다고 했다. 아들 한명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해서 연락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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