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대학입학시험을 보다

 

 

 

행당동에서 2시간 가르치고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 11시가 넘었다. 학원 공부를 복습과 예습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면 코피가 났다. 몸이 약한 상태였고, 제대로 영양보충이 되지 않아 그랬다. 아무 생각도 할 여유가 없이 그렇게 12월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살았는지 모른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매우 초조해졌다. 또 시험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에 원서를 낼 것인가? 만일 1차 시험에 떨어지면 2차는 사립대학이라 갈 형편이 못 되었다. 그래서 2차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시험이란 어떤 경우에도 많은 운이 작용한다. 그래서 100% 완전하게 보장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다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지망하기로 했다. 당시로서는 최고 어려운 과였다. 100명을 뽑는다. 판사와 검사를 하려고 마음먹은 엘리트들이 지망하는 과다. 원서를 내고나서 형에게 부탁해서 행당동 중학생들 과외를 대신 해달라고 했다. 형은 바쁜 학교생활에도 불구하고 내 과외까지 맡아 해주었다.

 

나는 이처럼 과외를 해서 집에서는 돈을 전혀 받지 않아도 혼자 서울 하숙비와 교통비, 용돈을 벌어 쓸 수 있었다. 난생 처음 돈을 벌어 본다는 보람도 느꼈다. 힘이 든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아무 친구도 없었다. 학원에 가도 가깝게 이야기할 상대도 없었다.

 

모두가 남이었고 삭막한 서울생활이었다. 집에는 전화가 없어 연락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했다. 편지도 제대로 못하고 연락두절 상태로 지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었다. 모든 것은 시험 후로 미뤘다.

 

제대로 공부도 못하고 치룬 시험이었다. 시험 볼 때 전년도처럼 감기가 들까 노심초사했다. 다행이 감기는 들지 않았다. 시험 전날 잠도 제대로 잤다. 결과 발표 때까지는 정말 초조했다. 이번에 또 떨어지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인생 행로가 어떻게 전개될 지 모른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 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너무 적은 시간 공부했다. 그래서 불안했다.

 

발표가 날 때까지 대전에 내려가 있었다. 학생들도 고등학교 시험을 보았기 때문에 과외도 자연히 끝나게 되었다. 대학시험은 너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떨어지면 더 이상 대학교에 갈 여건이 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만 했다. 무엇을 할 지 아무 생각도 의식도 없었다. 막막하기만 했다.

 

합격하면 과외를 하면서 대학을 졸업할 자신이 있었다. 이런 엄청난 차이를 가진 두 갈래 길에서 힘들게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에 있어서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시험이 또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나중에 치룰 사법시험 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살다 보면 사람은 이런 중요한 계기를 맞게 된다. 물론 자신의 의지로 도전한 것이지만, 그 성패가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결정적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그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가?

 

발표를 기다리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이라는 말을 수없이 써보았다. 사람이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는 좌우명이었다. 최선을 다하고 운명을 기다려야했다. 아무도 상의할 사람도 없었다. 무척 외로웠다. 내가 시험에 떨어진다고 크게 슬퍼할 사람은 없었다. 주변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오로지 내 문제였고, 내 운명이었다.

10. 중학생 과외지도를 하다

 

 

 

2014년 1월 25일, 도서출판 정일미디어에서 ‘정우회와 영원한 스승 홍철화’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책은 정우회 회원들이 원고를 쓰고 자료를 모아 만들었다.

 

“여기에 실린 글들을 보면 정일학원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정우회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어 왔는지, 정우회가 왜 특별한 모임인지, 홍철화 원장님 및 그 가족과 정우회 회원들 사이의 인연이 왜 각별한 것인지 들을 한 눈에 알아보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자를 발간하는 목적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2014년 1월 정우회 회장 김능환).

 

이 책에 나도 ‘정일학원에 대한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실었다. 내가 쓴 글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 본다.

 

“수많은 대입 재수 학원이 있지만, 학원을 다닌 사람들이 평생 학원을 중심으로 만나서 교류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일학원은 그야말로 특별한 학원이었다. 특히 홍철화 원장님의 개인적인 리더십과 제자들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이루어진 금자탑이 바로 정우회라고 할 수 있다”(김주덕, 정일학원에 대한 추억, 166쪽에서).

 

정일학원에 등록하고 종로학원을 찾아갔다. 대전고등학교에서 근무하시던 주본정 선생님께서 종로학원 교육상담으로 근무하시는 분이 계셔서 친구 류진열과 함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선생님께서는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커피도 주시고 힘을 내라고 격려해주셨다.

 

1학기에는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물으셔서. 집에서 놀고 있었다고 하니 그렇게 해서 어떻게 다시 시험을 볼 수 있겠느냐고 걱정을 하셨다. 서울 학원에서는 재수생들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들 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하시면서, 늦었지만 남은 몇 달 동안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셨다. 나는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이제야 올라왔다고 대답했다. 선생님께서는 집안이 어느 정도 어렵느냐고 물으셨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중학생 과외지도를 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중앙대학교 4학년생이 가르치던 중학교 3학년 3명에 대한 과외지도를 인수받게 되었다. 종로학원 선생님께서 우수한 학생이라고 추천해 주셨기 때문에 중학생 부모님들은 무조건 받아 주었다.

 

월급은 대학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나는 아주 고맙게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가르쳤다. 재미도 있었다. 과외는 행당동에 있는 한 학생 집에서 했다.

 

일주일에 6일간 했다.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2시간 동안 했다. 나중에 다시 행당동에 가서 그 아이들 살던 집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모두 재개발이 되어 다 변하고 찾을 수 없었다.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과는 끝내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번쯤 만나 보고 싶은데 찾을 방법이 없다.

 

나는 아침에 만원버스를 타고 광화문에 있는 정일학원으로 가서 수업을 듣고 하숙집으로 돌아오면 저녁을 먹고 곧 바로 삼선교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탔다. 을지로 5가에서 내려 행당동 가는 65번 버스를 갈아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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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울에서 정일학원을 다니다

 

 

 

재수를 하고 있을 때 형과 함께 보문산으로 놀러 가는데 도중에 두 명의 청년들과 시비가 생겼다. 길을 가는데 그 사람들이 왜 째려보느냐며 시비를 걸었다.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말려서 싸움은 끝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입고 있던 잠바와 내복을 뚫고 사무용 칼 같은 것으로 내 오른쪽 손목 위를 3Cm 그어놓은 것이었다. 너무 흥분해서 피가 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병원도 가지 않고 그냥 약만 바르고 있었기에 지금도 여전히 흉터가 남아 있다.

 

8월이 되면서 일단 서울에 올라가 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오래 된 일이라 지금은 그 당시 우리 집안의 구체적인 경제 사정이 어떻고, 어떻게 해서 부모님께서 학원을 보낼 수 있다고 판단하셨는지 모른다. 나는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였다.

 

책 한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왔다. 고속버스를 타고 삼선동에 있는 형 하숙집으로 갔다. 내 생애 세 번째 서울 방문이었다. 한번은 초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으로 서울에 와서 남산 등을 돌아다닌 기억이 있다. 오래 되서 지금은 어디를 돌아다녔는지 잘 모른다. 두 번째는 1971년 1월, 대학교 입시를 보기 위해 며칠간 서울에 와서 머물렀다.

 

서울은 거대한 도시였다. 대전에서 살다가 서울에 오니 나는 아주 작은 개미 같은 존재였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실업자가 서울에 올라와 길거리를 돌아다니니 어떤 심정을 느꼈겠는가? 일단 삼선교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별도로 방을 얻을 필요가 없었다. 작은 방에서 형과 함께 하숙생활을 했다. 형은 당시 의예과 2학년이었다.

 

형은 고2 여학생을 과외지도하면서 공부를 하느라고 고생하고 있었다. 형과 함께 남산에 올라갔다. 남산에서 바라 본 서울은 정말 대단했다. 그때만 해도 강남은 제대로 개발되지 않아 주로 강북이 중심이었다.

 

삼선교 하숙집은 차에서 내려 한참을 올라가야 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아주 선하게 보였다. 방 2개로 하숙을 치루고 있었다. 예전에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던 것과 같았다. 대전에서는 하숙집 주인 아들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하숙생이 된 것이었다.

 

정일학원에 들어가기로 마음 먹고 시험을 보았다. 학원에 들어갈 때도 시험을 보았다. 그 시험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잘 몰랐다. 시험 결과가 나왔는데 학원에서 성적이 좋다고 학원비 전액 면제 특혜를 주었다. 시험은 국어, 영어, 수학만 보았다. 나는 영어와 수학은 자신 있었다. 몇 달의 공백기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고등학교 때 쌓아놓은 실력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었다.

 

정일학원에서는 매달 시험을 보았다. 그 시험에서 성적이 좋은 5명에게는 다음 달 학원비를 전액 면제해 주었다. 정일학원에 들어간 1971년 9월, 10월, 11월, 12월, 1972년 1월까지 5개월간 학원등록비 전액을 면제 받고 학원을 다녔다. 나는 지금도 정일학원에 대해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지방에서 올라온 형편이 어려운 재수생에게 장학혜택을 주어 인생의 방향을 달라지게 해주었다.

 

1984년 정일학원 출신 30여명을 모아 정우회 모임을 만들었다. 홍철화 원장님께서도 흔쾌히 승낙하시고 많은 도움을 주셨다. 나와 안익순 후배가 주도해서 모임을 결성하고 이름을 정우회로 했다.

 

정우회에는 좋은 멤버들이 많이 있다. 모두 정일학원에서 재수생활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지금은 사회 각계 각층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금도 자주 만나서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내가 초대 회장을 지냈다. 정우회가 만들어진 다음 이 모임을 통해 홍철화 원장님과 많은 회원들이 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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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졸업 후 방황하던 시절

 

 

 

각자 따로 대전으로 갔기 때문에 일단 검찰청 앞에 있는 스타박스 커피숍에서 만났다. 늘 서울에서만 보다가 대전에서 만나니 약간 이상했다. 1시간 동안 서로 전략을 짜고 상의를 했다.

 

재판에는 언제나 긴장이 흐른다. 커다란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에 서로가 적대적이다. 변호사도 상대와 싸워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의뢰인과 한마음, 한편이 된다. 그래서 상대 변호사가 말을 하면 우선 거부반응부터 보이게 된다.

 

이쪽에서 보면 상대방의 주장 자체가 부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정 자체가 굳어진다. 음성이 커지기도 하고, 거칠어지기도 한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다.

 

재판이 끝난 다음 나 혼자 차를 운전하고 대전문창초등학교, 대신초등학교, 대전고등학교 등을 순차로 돌아보았다. 옛날 내가 살던 곳, 다니던 학교를 둘러보고 싶어서였다.

 

까마득하게 오래 된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어려서 고생했던 시절이었다. 부모님과 형제들, 함께 고생하고, 세상 모르고, 힘이 없는 상태에서 눌려 지냈던 시간들이 씁쓸하게 떠올랐다.

 

대신초등학교에 올라가 보니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새로 짓고 있었다. 내가 살던 3층집도 헐고 새로 지었다. 바로 옆에 있는 집들은 몇십년 전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방황이란 아무런 목표 없이 떠도는 것을 말한다. 인생에는 때로 방황의 시절이 있다. 고등학교 졸업한 후 약 7개월이 그랬다. 대신초등학교는 산 중턱에 있다. 학교까지 올라가려면 가파른 경사길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한다. 우리 집은 급경사가 시작되는 바로 입구에 있었다. 집 앞으로 큰 도로가 개설되었다. 그 전에는 사람만 다니는 길이었는데 지금은 차가 다닐 수 있게 넓혀졌다.

 

나는 학교에 자주 올라가 바람을 쐬었다. 거의 매일 올라 다녔다. 학교 뒷산에도 많이 올라갔다. 집에 있으면 답답해서 산에 올라가 이리 저리 돌아다녔다. 목청을 돋우기 위해 소리도 질렀다. 겨울에는 눈이 쌓인 뒷산을 운동화를 신고 혼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미끄러져 나무에 무릎을 다친 적도 있었다. 지금도 그때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미끄러워서 내려올 수 없어 쩔쩔매던 생각이 난다. 망망대해에 표류하고 있는 작은 돛단배처럼, 파도에 흔들거리며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정말 비참한 시절이었다.

 

나름대로 혼자 개똥철학 비슷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도 하였지만, 아무런 체계도 없었다. 누군가 인생의 스승이 있어야 했는데, 그런 스승이 없었다.

 

학교에서 수학이나 영어문제나 풀고 있었던 나는 인생에 도움이 되는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 것도 하는 것 없이 집에서 몇 달을 놀고 있다 보니 무기력해졌다. 나 스스로 어떻게 할 것인지, 대학을 갈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한 아무런 자신도 없었다.

 

그냥 하루하루 답답하게 시간만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대학교에 친구 몇 명을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 빛나는 대학교 뱃지를 달고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우쭐대는 친구들을 만나니 위축되었고 비참한 심정을 느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내가 그 친구들보다 공부를 더 잘했다는 생각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시험이란 냉정한 것이었다. 떨어지면 모든 것이 끝이다. 운이 있어 그랬든, 재수가 좋아 그랬든 붙으면 영웅이 된다. 떨어지면 아무 할 말도 없다. 뭐라고 변명해도 의미가 없다. 왜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떨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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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재수생활을 하다

 

 

 

대학교 입학시험에서 낙방한 나는 대전에서 외롭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아무런 대책없이 망망대해에 혼자 떠있는 느낌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모님, 나이 어린 형제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만날 친구도 없었다. 대부분 바쁜 신입생이었고, 떨어진 친구들은 대입학원에서 재수를 하고 있었다. 나는 학원을 알아 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막연한 상태에서 대학시험에 떨어진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억울하게 느끼고 있었을 뿐, 구체적인 방향이나 계획은 전혀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집안에서 이 문제를 누가 해결해 주거나 방향을 잡아 줄 사람도 없었다. 

 

부모님은 내가 떨어진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할뿐 어떻게 하라는 말씀도 없으셨다. 사실 부모님들은 어느 정도 해야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지도 잘 모르셨다. 모든 걸 내가 알아서 하도록 맡겨 놓고 계셨다. 대학시험에 떨어지고 집에서 놀고 있을 무렵 대사동 대신초등학교 입구에 있던 우리 집에 건물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40평 남짓한 땅에 3층 건물을 짓기로 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 건물을 짓게 되었는지, 건축자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그 자금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1층에 작은 점포 2개, 2층에 주택 2채, 3층에 방 2개를 만들었다. 가운데 계단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집 짓는 일을 거들고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벽돌이나 시멘트를 사러 다녔다. 시내 가서 마차에 싣고 왔다. 큰 길에서 집까지는 경사진 길이어서 마차를 밀어야 올라올 수 있었다. 창문 같은 것을 사러 다니기도 했다. 당시 자전거 한 대가 있었다.

 

하루 종일 집 짓는 현장에서 인부들과 있다가 일이 끝나면 지쳐서 잠이 들었다. 대학교 시험에 떨어진 나로서는 그냥 더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에 가끔 책을 보기는 했지만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고, 생활은 나태해졌다.

 

3월부터 7월까지 정말 한심한 생활을 했다. 나중에는 완전히 포기한 상태에서 대학에 진학할 것인지 여부도 불분명했다. 자신도 없어졌다. 누가 옆에서 공부하도록 채근하는 사람도 없었다. 학생 신분도 아니고 그냥 집에서 노는 신세였다. 가끔 서울에서 내려오는 형이 한심하다는 식으로 걱정을 했다.

 

형은 서울에 가서 혼자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보다 고등학교 1년 선배로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2학년이었다. 어려운 생활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형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휴대용 전축을 하나 사가지고 방학 때 내려왔다.

 

우리는 대신초등학교 운동장에 올라가 돗자리를 펴고 누워 아름다운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레코드판에서 나오는 노래를 즐겨 들었다. 주로 패티김과 남진, 나훈아 노래를 많이 들었다. 이승재의 눈동자도 많이 들었다. 이승재는 1970년 눈동자라는 노래로 데뷔했다. 눈동자는 지웅 작사, 김희갑 작곡이다.

 

<그 날밤 이슬이 맺힌 눈동자 그 눈동자/ 가슴에 내 가슴에 남아 외롭게 외롭게 울려만 주네/ 안개 안개 자욱한 그 날 밤거리/ 다시 돌아올 날 기약없는 이별에 뜨거운 이슬 맺혔나/ 고독이 밀리는 밤이 오면 가슴 속에 떠오르는 눈동자/ 그리운 눈동자 아아~ 그리운 눈동자여>

 

2017년 7월 11일 대전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있어 내려갔다. 서울에서 차를 운전하고 갔다. 두 시간 정도 걸린다.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조정에 참여했다. 원고 본인도 참석했다. 

6. 대전고등학교를 다니다

 

 

 

1학년때만 해도 나는 성적이 중간밖에 안 되었다.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았다. 2학년이 되면서 제대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여름이 되면 마당에 밥상 하나 갖다 놓고 앉아서 수학문제를 열심히 풀었다. 방에서는 더워서 있을 수가 없었다. 마당에 앉아 공부를 하면 그런 대로 견딜 만 했다.

 

2학년 중반부터 성적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3학년이 되면서 갑자기 성적이 최상위권으로 올라갔다. 영어와 수학은 아주 Top이었다. 수학에 가장 자신 있었다. 그래도 이과에 가지 않고 문과를 지망했던 것은 처음부터 이과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3학년이 되자 대학시험 때문에 모두 공부에 총력을 기울이는 분위기였다. 나 역시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교 1등을 여러 번 차지했다. 당시에는 매달 시험을 봐서 성적을 1등부터 100등까지는 방에 써서 붙여놓았다. 1등을 하면 기분이 매우 좋았다. 친구들도 부러워하면서 알아주었다.

 

당시 학교 수업시간에도 수업을 제대로 듣는 것이 아니고 혼자 공부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대부분 아는 것이어서 다른 책을 보거나 문제를 풀고 있었다. 수업을 듣는 척 해야 했기 때문에 반은 그쪽에 신경이 갔고, 나머지 반은 혼자 공부하는 책에 신경이 갔다. 그래도 전교에서 1등을 몇 번 하니 담임선생님께서는 나를 인정해 주셨다.

 

문창동에 사는 친구 집에 가서 몇 달 있었다. 문희 부모님께서는 비교적 잘 사는 형편이었고, 내가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나와 함께 지내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문희 집에 가서 함께 생활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문희는 매우 의젓하고 속이 깊었다. 그 집 마당은 시원하고 넓었다. 문희 누나는 은행에 다니고 있었다. 집 앞에는 대전천이 있었고 그 건너에는 극장이 있었다. 밤이면 그 극장에서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있었다. ‘사랑은 계절따라’라는 노래를 많이 들었다. 몇 달 후 다시 대사동 집으로 돌아와 대학입시 공부를 했다.

 

한동안 선화동에 있는 독서실까지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가서 한 시간 정도 공부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집에서 공부하면 될 것을 새벽에 캄캄한 길을 위험하게 자건거를 타고 독서실을 왜 다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학교 성적이 좋았으므로 서울 법대에 입학원서를 냈다. 그런데 시험 보름 전 겨울 날씨에 공부하다 창문을 열어놓고 낮잠을 잔 것이 잘못되어 감기에 걸렸다. 무서운 독감이었다. 병원에 못가고 집에서 약이나 먹고 있었다.

 

시험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감기가 악화되어 시험 당일에는 아주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머리는 아프고 콧물은 나고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그렇게 치룬 시험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1971년 1월 대전고등학교를 제50회로 졸업하였다. 이종호 교장선생님이었고, 김영덕 교감선생님이었다. 3학년 7반에서 졸업했는데, 담임선생님은 유진형 선생님이었다. 지금 이 시간 고등학교 앨범을 다시 꺼내보니 새까만 안경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 무척 약해 보인다.

 

고등학교 시절 3년을 회상해 보면, 그냥 공부하고 학교에 다니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았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집에 돈이 없어 수학여행에 몇 번 빠질 수밖에 없었다. 돈이 없어 못 가는 입장에서 느끼는 콤플렉스를 느꼈을 텐데 크게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나는 현실에 무척 잘 순응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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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토끼와 닭을 키우다

 

 

 

나중에 커서 나는 두고두고 그날 밤 상황이 떠올려졌다. 부모님께서 그 때 다른 결정을 하셨더라면 내 운명은 그야말로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아찔하기만 한 장면이었다.

 

하숙을 치루는 것이 잘 되지 않자 대흥동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옆에 교회가 있었고, 바로 옆집에는 친구 양태호가 살고 있었다. 집을 옮기고 나서는 더 이상 하숙을 하지 않았다. 아버님은 여전히 집에서 놀고 계셨다. 집에서 닭과 토끼를 키웠다. 토끼풀과 칡잎을 뜯어오는 일은 할머니와 어린 우리들 몫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일이다. 반장이었던 육일섭 군의 모나미 잉크 병 뚜껑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전 학생이 야단 맞고 뚜껑을 찾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잉크 병 자체도 아니고 단지 병뚜껑을 잃어버렸다고 누가 훔쳐간 것으로 생각하고 도둑을 찾는 것처럼 난리를 쳤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는 일이 많았다. 토끼와 닭 숫자가 늘어나서 형과 나는 할머니와 거의 매일 충남대학교 캠퍼스나 대사동 뒷산에 가서 먹이를 마련해 와야 했다. 당시에는 충남대학교 캠퍼스가 문화동에 있었다. 밀가루 푸대를 하나씩 가지고 가서 토끼풀을 가득 담아 꽉꽉 눌러 등에 메고 왔다.

 

토끼풀을 뜯는 것도 힘이 들었지만, 등에 메고 먼 길을 오는 건 정말 힘이 들었다. 그렇게 일을 하고 저녁을 먹고 나면 골아 떨어져 그냥 잠이 들었다. 숙제나 겨우 할 정도였고 다른 공부는 할 시간이 없었다.

 

학교 성적은 중간에서 맴돌았다. 성적도 보통이고 집안은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학교에 가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도 거의 없었다.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평범한 상태에서 중학교 생활을 보내고 다시 대전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보아 합격했다. 과외도 전혀 못하고 어떻게 대전고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토끼풀을 허리에 짊어지고 다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어린 손주들을 데리고 풀을 뜯으러 다니던 심정이 어땠을까? 중학교 3학년 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포천 선산에 가서 장례를 치루던 일이 생생하다. 할머니는 아들이 세 명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큰 아들이었다. 할머니는 말년에 고생을 많이 하셨다.

 

중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아이들과 함께 유천동까지 놀러가서 철교를 건넜다. 철교를 다 건너고 얼마 안 있자 반대편에서 기차가 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철교를 건너던 중 기차가 왔으면 우리는 모두 끝났을 상황이었다.

 

1968년 3월 대전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대전고등학교는 대전광역시 대흥동에 있다. 1917년 4월 1일 관립 경성중학교 대전분실로 설치되었다. 그 후 1918년 4월 1일 관립 대전중학교로 설치되었고, 1921년 4월 1일 도립으로 이관되면서 명칭이 대전공립중학교로 바뀌었다.

 

나는 집안이 어려워 학교만 다니고 있었다. 다른 활동은 할 형편이 못되었다. 교복을 바꾸어 입는 것도 어려웠다. 못된 친구들이 교복에 잉크를 뿌려 놓으면 그것은 지워지지도 않았다. 그대로 입고 다녀야 했다.

 

잉크 자국이 지워지지 않고 있으면 신경이 계속 쓰였다. 돈이 있으면 즉시 교복을 바꾸었을텐데. 그것은 가난하고 힘 없는 설움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친구들은 정말 나쁜 아이들이었다. 남에게 그렇게 고통을 주고 그것을 즐겼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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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전중학교에 입학하다

 

 

아침부터 굶고 점심을 못 먹고 저녁 늦게 학교에서 공부하다 보니 눈이 나빠졌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을까? 특히 어렸을 때 어두운 다락방에서 책을 많이 보았다. 그래서 근시가 되었다.

 

당시에는 중학교 입학시험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6학년때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많이 시켰다. 나도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에서 불을 켜놓고 늦게까지 공부했다.

 

1965년 2월 대전문창초등학교를 9회로 졸업했다. 문창초등학교 교훈은 ‘바르고 굳세며 슬기롭게’다. 1955년 4월 6일 개교한 공립학교다. 대전광역시 중구 문창로 55(부사동)에 위치한다.

 

대전중학교는 대전시와 충청남도에서는 들어가기가 제일 어려웠다. 대전중학교에 합격하게 된 영광을 안았다. 괜찮게 사는 친구들은 과외를 했지만, 나는 형편이 안 되었다. 과외를 하지 않고 대전중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1917년 4월 1일 관립 경성중학교 대전분교가 설치되었고, 1918년 4월 1일 관립 대전중학교가 설립 인가되어 개교하였다. 그후 1951년 학제개편으로 대전고등학교와 분리되었다. 대전중학교는 2015년 2월 6일 제65회 졸업식에서 졸업생 145명을 배출하였다. 2015년 기준 졸업생 연인원은 총 33,341명이다.

 

1965년 3월 검정색 교복을 입고 교모를 쓰게 되었다. 눈이 초롱초롱했던 당시 사진을 보면 착한 학생이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집에서도 부모님 속을 썩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매우 순종적이었다. 형제간에도 별로 싸우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때 일이다. 하루는 부모님과 한 방에서 잠을 자다가 도중에 잠이 깨었다. 부모님께서 조용히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 나는 자는 척하면서 말씀을 들었다.

 

부모님께서는 형과 나를 학교에 더 이상 보내지 않고 공장에 보내는 문제를 상의하고 계셨다. 아버님은 친척이 운영하는 공장에 보내자는 말씀이었고, 어머님은 반대하셨다. 당시 대사동에서 신덕순 아저씨가 양은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버님은 아들 두명을 학교에 보내면 돈이 많이 드니까, 공장에 보내 기술을 배우게 하고 적은 월급이라도 받아오면 살림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어머님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아들들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그 자리에서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그런 대화를 들고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너무 슬펐다. 다른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는데 나는 작업복을 입고 양은솥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하시는 일에 참견할 수도 없었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세상이 완전히 달리 보였다. 나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었다. 학교에 가면서도 발걸음이 무거웠다.

 

책상에 앉아 있어도 선생님 말씀이 들어오지 않았다. 온통 생각은 양은공장에 가 있었다. 그전에 아버님을 따라 몇 번 가본 양은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를 뿐이었다. 친구들에게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곧 학교를 다니지 못한다는 생각에 짓눌려 친구들조차 싫어졌다.

 

나와는 신분이 다른 세계의 아이들처럼 보였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가 최악의 상황이었다. 나중에 커서도 부모님께 그런 이야기를 자세하게 여쭤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하숙일도 안 되고 아이들은 많고 학교에 보내자니 돈은 들고 해서 그런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다행이 그 문제는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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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전문창초등학교를 다니다

 

 

바로 옆집에 장원규가 살았다. 원규 아버님은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다. 한 동네 친구니까 거의 매일 붙어서 지냈다. 원규는 나중에 대전에서 학원 강사로 근무했다.

 

대전에서 근무할 때 원규 부모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어릴 때 코흘리개가 검사가 되어 인사를 드리니 무척 기뻐하셨다. 1992년이었는데 그때까지 원규 가족은 계속해서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어릴 때는 형제가 많아 재미있게 놀았다. 동네 친구들도 많았다. 소꼽장난도 하고, 연탄재를 부숴 서로 던져서 맞히는 위험한 전쟁놀이도 했다. 딱지치기와 구슬치기, 썰매놀이도 많이 했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나돌아 다녔다. 동네 형들과 함께 아이스케키를 팔러 다니기도 했다. 녹기 직전의 아이스케키를 하나 주면 받아먹었다. 아이스케키는 1원씩 했다.

 

4학년 때 학구제 변경에 따라 문창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집 근처에 있는 가까운 학교로 옮기게 된 것이다. 나중에 대전에서 근무를 하면서 문창초등학교를 가보았다. 어릴 때는 그렇게 넓어보였던 학교가 참 작아보였다.

 

아버님은 공설운동장 입구에 있는 제재소를 운영하셨다. 제재소 이름은 한일제재소였다. 제재소 바로 앞에 개천이 있었다. 집에는 제재소에서 사용하는 트럭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제재소를 할 정도면 잘 사는 수준이었다. 여름에 수박을 많이 먹었다. 수박을 사다가 대야에 물을 떠놓고 그 안에 담갔다 먹으면 시원했다.

 

문창동 살 때 건넛집에 매형이 살고 있었다. 고향이 청양인데, 삼촌집에서 대전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큰누님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바로 그런 것인가 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님 사업이 어려워졌다. 시청 뒤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갔다. 문창동 집을 팔고 시청 뒤에 있는 집을 전세로 얻어 그곳에서 하숙을 했다. 학생과 군인 몇 사람이 있었고, 어머니가 밥을 해주었다. 우리는 좁은 방에서 여러 식구가 함께 생활해야 했다.

 

우리 집은 보안부대와 담을 같이 하고 있었다. 우리는 가끔 담에 올라가 구경했다. 집 옆에 공터가 100평 정도 있었다. 그곳에 채소를 심었다. 그래서 상추와 배추, 무를 많이 먹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님을 도와 삽질을 하기도 했다. 어렸을 때는 그곳도 꽤 넓어보였다.

 

대흥동 살 때 부근에서 살았던 장락성 사장님을 나중에 서울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대전에서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나보다 나이가 더 많았기 때문에 어려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다닐 때는 서로 몰랐지만, 그래도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는 말에 너무 반가웠다. 그래서 자주 만나 가깝게 지냈다.

 

장 사장님은 학교 다닐 때 기계체조를 했고, 아주 호탕한 성격이었다. 영동호텔 옆 사무실에 자주 들러 커피를 마셨다. 송탄부대찌개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대전 이야기를 했다. 장 사장님은 70이 넘은 연세에도 뚜껑이 열리는 벤츠를 운전하고 다녔다. 어린 아들과 고생했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18번 노래는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이 손을 잡고’였다.

 

대흥동으로 이사 와서도 계속해서 문창초등학교를 다녔다. 5학년과 6학년을 그렇게 다녔다. 매일 꽤 먼 길을 걸어 다녀야 했다. 지금도 학교를 걸어 다니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어머님께 무엇을 사달라고 해서 사주지 않으면 고집을 부렸다. 아침을 먹지 않고, 도시락도 놓고 가는 일을 많이 했다. 그러면 어머님이 속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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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전으로 옮기다

 

 

 

증조부는 근면성실하여 논과 밭을 만들어 놓으셨다. 그런데 자식이 없어 조카를 양자로 들였다. 그분이 우리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아 증조부 재산을 모두 없앴다. 그래서 아버님은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내 고향은 경주 김씨 상촌공파 후손들이 오래 전부터 집성촌을 이루어 살던 곳이다. 우리 잡안도 아주 오래 전부터 고향에서 살았다. 나는 고향에서 태어나 4살까지 살았다. 고향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거의 없다. 고향 친구도 없다. 내가 태어나 살던 집은 없어져 버렸다. 조상들의 산소만 남아있다.

 

4살 되던 해 대전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님은 제재소를 시작하셨다. 이름이 한일제재소였다. 인동 굴다리 지난 철로변에 집이 있었다. 옆집에 소를 잡는 곳이 있었다.

 

집에서 나가 바로 앞 경사진 곳을 올라가면 철로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기차는 매우 커보였다. 신기하기도 했다. 철로에 귀를 댄다. 기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가까이 오면 얼른 일어나 도망간다. 못을 철로 위에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간 다음 못 머리 부분이 납작하게 펴진 것을 보기도 했다. 기차의 위력을 느끼는 것이다.

 

어린 시절 기차와 철로를 벗 삼아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기차를 타면 옛날 생각이 난다. 옆집에 고등학교 동창 김영석이 살고 있었다.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후에 서로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 둘이서 한 동네에 살았던 것이다. 영석 어머니는 영석에게 나보다는 더 공부도 잘 하고, 잘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같은 자식을 키우면서 라이벌의식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때는 우리 집이 영석네보다 잘 살았다.

 

신흥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학교에 다녔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 함자는 병(秉)자 구(九)자시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할아버지 사진도 없어 얼굴조차 알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마음이 좋아 친구들 술 사주고 놀다가 증조할아버지가 일구어 놓은 재산을 전부 없앴다. 그 산골에서 포천읍까지 다니면서 술을 많이 드셨다.

 

할머니는 청송 심씨다. 할머니 이름은 호적에도 그냥 심씨라고만 되어 있다. 매우 선한 모습인 할머니는 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농사 지을 땅이 없어 하는 수 없이 평양과 만주, 서울 등으로 돌아다니시면서 공사현장 등에서 일을 하였다.

 

신흥초등학교에 들어간 직후 인동 사거리에 있는 한일제재소로 이사를 갔다. 제재소 안에 집이 있었다. 어렸을 때 주로 제재소 마당에서 놀았다. 나무를 쌓아놓은 곳을 올라 다니며 놀이를 했다.

 

톱밥이 많아 떨어져도 다치지 않았다. 집에 다락방이 있었는데 그곳에 먹을 것이 많이 있었다. 사과와 배 같은 것이었다. 학교에 가서도 집안이 넉넉하게 살아서 그런지 선생님의 귀여움을 받았다. 가끔 어머니가 수박을 사들고 학교에 오셨다. 학교 신발장을 집에서 짜서 보내기도 했다.

 

대전신흥초등학교는 1924년 4월 1일 개교했다. 교훈은 ‘슬기롭게 성실하게 건강하게’다. 대전광역시 동구 신흥초등길 21(신흥동 150-3)에 위치한다

 

3학년때 신흥초등학교에서 대흥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문창동에 있는 신흥주택에 살았다. 새로 지은 주택단지였다. 몇 십채가 모여 있는 단지였다. 그 당시에 대전에도 주택건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같다. 하나의 커다란 단지를 조성해서 거의 비슷한 규모와 형태로 주택을 지어 매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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