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한양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다

 

 

 

아니 뒤떨어진다.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다. 중요치 않은 일은 나중에 하면 된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후회되는 일이다.

 

가을에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병역문제로 신체검사를 받게 되었다. 병무청에서 신체검사 통지서가 온 것이다. 고향인 포천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나보다 서너살 어린 사람들과 함께 신체검사를 받으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신체검사를 받으러 갈 때 아버님과 함께 갔다.

 

대학교에서 편하게 공부만 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사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많은 정신적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고시에 붙으면 장교로 가는데, 떨어지면 사병으로 가야 한다.

 

그렇다고 고시가 쉬워보이지는 않았다. 시력이 고도근시라서 신체검사결과는 방위병소집대상자로 판정이 났다. 고시에 떨어지면 방위병으로 근무해야 할 입장이었다.

 

대학원 진학을 생각했다. 고시에 떨어지면 곧 바로 징집되기 때문에 고시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는 대학원에 적을 두고 2년간 입대를 연기해야 했다. 어느 대학원에 갈 것인가 고민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12월 초 한양대학교 대학원 모집 공고를 보았다.

 

시험장에 가보니 서울법대 동기생들이 20명 가깝게 와 있었다. 사법시험 보듯이 시험을 치뤘다. 다들 비슷한 입장이었다. 학비는 전액 면제라고 하니 모두 시험에 붙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불합격할까봐 걱정을 했다. 그러나 다행히 5명을 선발하는 시험에 합격했다.

 

대학교 졸업시험은 12월 중순 끝났다. 나는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가 관악산 현재 위치로 옮겨간 다음 처음으로 다닌 72학번이었다. 4학년 1년간 새 캠퍼스에서 다닐 수 있었다. 서울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다니느라 고생도 했지만, 그래도 새 캠퍼스에서 첫 졸업을 하게 되니 기뻤다.

 

마지막 졸업시험을 치루고 나니 눈이 하얗게 캠퍼스를 덮고 있었다. 대학교 졸업시험이 끝나자, 한양대학원에 합격한 대학 동기 5명은 팀을 짜서 합천 해인사 길상암으로 내려갔다. 절에 가서 본격적인 고시공부를 하기로 한 것이다. 간단한 옷과 책을 싸가지고 길상암으로 갔다. 처음 하는 산사생활은 모든 것이 어렵기만 했다. 12월말이라 휘몰아쳐 오는 산곡의 강풍은 정말 사나웠다.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졸음이 덜 깬 상태에서 하는 식사, 얼음을 깨서 해야 하는 간단한 세수, 화장실이 산 등성이를 돌아서 있어 밤에는 혼자 다녀야하는 불편함 등이 있었다. 달은 차갑게 떠있었다. 가련한 존재들을 불쌍하게 비추고 있었다. 가끔 산짐승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함께 공부하는 모임은 서로를 격려하면서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18회 사법시험 때 나는 1차 시험까지 보아야 했다. 1차 시험은 대구에서 보았다.

 

시험을 마친 후 우리 5명은 퇴계원에 있는 한양대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한양대 법대 학부생들이 있었다. 낯선 분위기에서 이를 악물고 책과 싸웠다. 고등학교 1년 후배인 신영철 군이 함께 있어 서로 위로하며 지냈다.

 

퇴계원 들판에 서서 밤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우주 속에 나 혼자만이 존재하는 듯 한 착각을 일으켰고, 그때 느꼈던 고독감은 정말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처절했다.

 

밤에 기름난로에 끓여 먹던 라면은 그렇게 맛이 있을 수 없었다. 하루 2개씩 먹던 날계란도 고소했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에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시험을 끝내야겠다는 집념은 잠도 들지 못했고, 추운 줄도 모르게 만들었다.

 

 

20. 신림동 캠퍼스에서 4학년을 보내다

 

 

 

요즘처럼 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혼자 강의를 들으면서 책을 사서 독학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비과학적인 방법이었다. 그냥 한 과목에 교과서 한 권과 문제집 한 권 정도를 반복해서 읽고 이해하고 암기하는 것이다. 그 다음 고시계 같은 잡지를 보면서 추가로 자료를 보충했다. 객관식 시험은 따로 문제집을 풀었다.

 

1차 시험에 붙으면 그 다음 시험에 한번 1차를 면제해주었다. 공부하는 방법을 지도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공부하도록 채찍질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내가 다 알아서 하는 것으로 믿고 계셨다.

 

1975년 3월, 4학년이 되었다. 이때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동숭동에서 신림동으로 이전을 했다. 나는 삼양동에서 신림동까지 다니는 25번 버스를 타고 다녔다. 삼양동 종점에서 맨 뒷좌석에 앉는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는다.

 

한참을 자다가 일어나면 겨우 서울역 부근을 통과하고 있다. 다시 한 잠을 더 자면 그때서야 신림동 종점에 내린다. 법대 건물까지는 또 한참을 걸어 올라간다. 강의실에 도착하면 그야말로 진이 다 빠진다. 피곤해서 강의를 제대로 들을 수 없다. 이렇게 대학 4년 생활을 했다.

 

대학교 4학년 때 길음동에 있는 혜명고시원에 다녔다. 1975년 8월초 등록했다. 원래는 아이템플고시원이었는데 나중에 혜명고시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대전고등학교 서춘수 선배님이 새로 지은 건물에 깨끗하게 독서실을 만들었다. 에어콘까지 설치되어 매우 좋은 환경이었다.

 

내가 살던 삼양동 아폴로극장 앞에서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 주로 버스를 타고 다녔다. 혜명고시원에서 채규옥 선배와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설동균 선배를 만났다. 세 사람은 트리오를 구성해서 함께 생활했다. 거의 매일 붙어 있었다.

 

공부를 하다가 힘이 들면 고시원 옥상에 가서 대화를 하며 놀았다. 가끔 부근에 있는 식당에서 삼겹살과 꼼장어를 시켜놓고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모두 털털한 성격에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고시원에 칸막이를 설치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책만 보고 있자니 답답해서 함께 여기 저기 돌아다녔다. 어려운 여건에 돈을 쓸 수는 없었다. 그냥 구경삼아 돌아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고시원에 있다 보면 세상 보는 눈이 좁아져서 항상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사소한 사항도 중요한 정보이며, 재미있는 화제였다.

 

그러다가 나는 또 상황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법대 학회지 FIDES에 게재할 원고를 준비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2개월에 걸쳐 '불법행위체계의 신형상과 소송상 입증책임문제'라는 방대한 논문을 원고지 174매에 정리해서 제출했다.

 

사실 이러한 학술 논문은 사법시험을 보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노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고시란 기본서를 많이 읽고 문제집을 많이 보고, 핵심적인 사항에만 집중해야 성적이 잘 나오는 것이지 교수들이 연구하듯 논문을 작성하는 것은 시험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쓸데없는 논문 작성, 굳이 할 필요도 없었고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하고 싶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지금 생각하면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일을 할 때는 꼭 필요한 곳에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 시간과 에너지를 불필요한 곳에 낭비하면 목표를 달성하는데 방해가 된다.

 

 

19. 신림동에서 생활하다

 

 

 

나는 유치장 감찰을 했던 그 날 밤, 혼자 법대 근처 작은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취했다. 취한 상태에서 대학로 거리를 걸었다. 깊어가는 가을밤에 노란 은행잎들이 길바닥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내가 유치장에서 나오던 그 날 학교 교정을 가득 덮은 진한 은행잎이 오버랩되었다.

 

유치장에서 나온 후 심리적으로 몹시 위축이 되었다. 어려운 고시공부를 해야 하는 부담감 이외에 또 다른 고민을 해야 했다. 당시 대학생이 구류처분을 받으면 예외 없이 사법시험 3차 면접에서 탈락시켰다. 성향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최종 합격을 시키지 않았다.

 

필기시험 성적이 좋아도 면접에서 떨어뜨리는 것이다. 3차 시험에 합격해도 판사 검사에는 임관시키지 않는다.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이었다. 지금과는 달랐다. 1973년은 일 년전에 유신체제가 시작된 직후였다. 매우 살벌한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고시공부를 계속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딛히게 되었다. 고시공부 자체도 매우 어렵다. 그 경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서울법대를 졸업한 선배들이 5년 내지 10년씩 계속해서 공부해도 떨어지는 판이었다. 일년에 50명 내지 60명을 뽑는 시험이었다.

 

경제적 사정도 어려운데 구류처분이라는 핸디캡까지 안고 그 어려운 시험 준비를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머리를 짓누르게 되었다. 참으로 힘든 젊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내가 만든 상황이었다.

 

과외지도는 생활이고 습관이었다. 집안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무리하게 건축을 했던 후유증으로 우리 집은 채권자에 의해 처분되었고, 대전 식구들은 모두 서울로 이사를 했다.

 

신림동에 있는 단독주택을 전세로 얻었다. 8식구가 좁은 공간에서 생활해야 했다. 신림동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당시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공사를 한참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과 함께 한방에서 한 달가량을 보냈다. 그 학생은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학생이 나중에 막내 여동생 영주와 결혼했다. 우리 집에서 함께 2달 정도 생활을 하고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나중에 영주가 대학교 졸업반 때 인숙이와 명동에 나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성주를 만났다.

 

성주와 영주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는데, 인숙이가 혹시 성주오빠 아닌가 하고 다시 쫒아가서 말을 걸었다. 그렇게 다시 만나 영주 졸업식 때 성주가 참석하고, 그게 계기가 되어서 성주와 영주는 결혼하게 되었다.

 

1974년 3월 나는 3학년이 되었다. 신림동에서 공부는 거의 하지 못했다. 음악만 듣고 있었다. 그때 많이 들었던 색스폰 연주곡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가끔 서울대 신축공사를 하는 관악산을 바람을 쐬러 갔다. 황량한 벌판에 대규모 공사를 하고 있었다.

 

가을에 신림동에서 미아리 대지극장 앞으로 이사를 했다. 형수가 들어왔다. 1974년 11월 4일 서울 도봉구 미아동 734의 245번지로 전입신고를 했다. 단독주택으로서 한옥 형태로 되어 있는 집이었다. 그 집을 전세로 얻어 갔다. 신림동 살 때보다는 훨씬 양반이었다.

 

법대생이란 취업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시준비가 전부였다. 학교에서 학점을 따는 것도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중요한 것은 빠른 시간내에 고시를 붙는 것이었다. 모든 시간과 에너지가 고시공부에 집중되어야 했다.

 

18. 대학 생활에 복귀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깊은 절망감에 빠졌고, 자신감을 상실했다. 친구들이 아무 일 없이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부러웠다. 왜 그런 상황에 빠졌을까 하는 후회와 회한이 늘 가슴 속에 사무쳤다. 세상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살아가다가 갑자기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높은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게 되었다.

 

경찰서에서 풀려 나온 뒤 나는 곧 바로 학교로 갔다. 20일 간의 공백은 어떻게 나를 달라지게 했는지 궁금했다. 나는 당연히 징계조치가 된 줄 알았다. 아니면 군대징집영장이 나온 줄 알았다. 그러나 학교 측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다만, 20일간 수업을 듣지 못했던 것에 불과했다.

 

나는 다시 몸을 추스렸다. 학교에 나가 수업을 들었다. 친구들은 내가 학생운동가로 변신하는 것이 아닌가 쑥덕거렸다. 탄압을 받은 반발로 조직적인 학생운동조직에 가담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엉망이 된 몸을 바로 잡고 다시 아르바이트를 구해 과외를 해야 했다. 뒤떨어진 수업을 쫓아가느라 바빴다. 본의 아니게 그만 두게 된 입주과외도 학생과 부모님에게 사과하고 나왔다.

 

10월말의 은행잎은 정말 노랗다. 유치장에서 나와 학교 캠퍼스를 가서 본 은행잎이 그렇게 진한 노란색인 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지금도 해마다 10월이 되어 은행잎을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982년 10월 나는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 감찰을 나갔다. 내가 유치인으로 수감되어 있던 경찰서에 이번에는 검사 자격으로 가게 된 것이다. 사람의 운명은 그처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검사 수가 많지 않았다. 유치장감찰을 가면 초임검사도 경찰서장실에 들러 차를 마셨다. 그런 다음 수사과장 안내를 받아 감찰을 했다. 당시에는 동대문경찰서가 종로에 있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관할이었다. 그후 종로에 있는 동대문경찰서는 혜화경찰서로 명칭이 바뀌었다. 청량리경찰서는 동대문경찰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유치장에 들어가는 순간 악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수감되어 있는 유치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차분하게 살펴보았다. 칠판에 쓰여진 죄명과 이름을 대비해 가면서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었다.

 

어린 시절 절망했던 곳, 한을 묻었던 곳, 질식할 것 같던 곳, 대전에서 올라오신 힘없는 아버님과 만나 고개를 떨구던 곳. 그런 모든 기억들이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했다.

 

나는 유치장 감찰시 억울한 사람들이 구속되었는지 각별히 유념하였다.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 중에 나이 어린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특별면담을 했다. 수감된 이유와 부모님에 대해 물었다. 그것이 내 임무였다. 구속된 사람들이 모두 나쁜 건 아니다. 모두 죄를 지은 건 아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비해 과다하게 처벌되고 있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이런 사실은 내가 학생 시절 유치장에 20일 동안이나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얻은 진리였다. 16년간의 검사생활을 통해서 그 진리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경찰관이 잘 몰라 그렇든, 검사가 성의 없어서 그렇든, 판사가 현실을 몰라 그렇든, 구체적인 사건에서 정의가 왜곡되는 경우는 많다. 법집행기관의 불성실, 무책임한 자세로 한 인간의 운명은 파괴된다. 불행이 초래된다. 수많은 가족들의 운명이 뒤바뀐다. 법집행이라는 이름으로 정의가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그건 내가 유치장에서 수없이 되새긴 진리였고 명제였다.

 

17. 유치장 생활을 통해 배운 것

 

 

 

도대체 말이 되는가? 우리는 법대생이었지만, 구류처분이라든가, 그에 대한 불복방법으로 정식재판을 청구하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서울법대생이 이 정도인데 도대체 법을 모르는 일반인은 어떨까? 그게 당시 우리나라 현실이었다. 판사는 불복절차를 알려주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경찰관이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서 백지에 무인을 받아 놓고 그 위에 ‘정식재판을 포기함’이라고 써넣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는 유치장에서 꼬박 20일을 보내야 했다. 같은 방에 있는 다른 유치인들은 서울법대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잘 대해주었다. 전혀 괴롭히지도 않았고,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었다. 모든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나는 절망했다. 괴로워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우연한 일로 내 인생의 방향이 180도 달라지게 된 것을 실감했다.

 

학교에서는 징계가 있을 것 같았다. 군대에 징집될 것이라는 예감도 들었다. 고시공부는 끝인 것 같았다. 나에게 커다란 기대를 하고 있었던 부모님과 형제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주었다.

 

20일을 견뎌내는 것도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 도수가 높은 근시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유치장 안에서는 안경이나 허리띠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안경을 못 쓰게 하니 답답했다.

 

하루 종일 좁은 감방 안에서 생활하는 것도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유치장에서는 새벽 6시에 모두 잠을 깨웠다. 세수를 하고 식사를 하고 다시 정자세로 앉아있어야 했다. 바닥에 누워 있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규율을 잡기 위해 유치장 간수는 때때로 창살타기를 시켰다. 창살에 매달려 있게 하는 것이다. 생각보다 힘든 벌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은 땅에 떨어진다. 절도와 폭력, 교통사고로 들어온 다른 사람들 역시 절망의 늪에서 헤매고 있었다.

 

나는 유치장에서 앞으로 전개될 일을 상상하면서 몹시 억울해 했다. 한 순간에 이렇게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현실 앞에서 절망했다. 군대 끌려가면 부모님들은 어떻게 될까? 내가 모든 집안일을 책임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당하니 정말 답답했다.

 

1973년 10월 28일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에서 석방되었다. 아버님이 대전에서 올라오시고 형과 둘째 누나가 왔다. 관행에 따라 두부를 먹었다. 두 번 다시 유치장에 들어가지 말라는 뜻이다. 정말 아버님께 죄송스러웠다. 지방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 서울로 보내 공부를 하도록 해주셨던 아버님을, 경찰서에서 만나니 면목이 없었다. 얼마나 실망하셨을까?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아버님은 내가 1971년 1월 대학교 입시에서 떨어졌을 때도 크게 실망하셨을 것이다. 당시 합격자발표는 대전고등학교에 직접 가서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아버님이 혼자 학교에 가서 합격 여부를 확인하고 돌아오셨다.

 

나는 집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님이 오셨는데 표정이 담담하셨다. 궁금해서 여쭤보았다. 아버님은 웃으시면서, “김주덕은 없고, 대신 김주닥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렇게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유치장 안에서 보낸 20일은 나에게 많은 세상 경험을 보태주었고,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도 가지게 해주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하게 만들었다.

 

만일 그와 같은 경험이 없었다면, 그 후 내가 살아가면서 많은 업보를 쌓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악하거나 나쁜 일을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유치장 생활은 나를 낮은 위치로 내려놓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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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구류처분을 받다

 

 

 

내가 1973년 5월과 6월에 집중적으로 쓴 일기장을 보니, '집심견인, 범사가신'이라고 쓰여있다. 또 '네 인생의 참모습은 미래에 있다. 현재의 상태는 과정, 일시적인 과정이다. '인내하라. 노력하라. 결코 슬퍼하지 말아라. 바쁜 벌은 슬퍼할 여유가 없나니.(1973년 5월 17일)'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강행하였다. 그 다음 해부터 본격적으로 데모가 시작되었다.

 

1973년 9월이 되었다. 방학이 끝나고 새로운 기분으로 2학년 2학기를 맞았다. 제대로 고시공부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거의 빠지지 않고 데모에 참가했다.

 

한번은 데모 행렬 선두에 섰다가 경찰 진압을 피해 학교 앞 개천으로 뛰어 내려 도망친 적도 있었다. 당시 법대와 문리대 앞에는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은 모두 복개되어 개천이 보이지 않는다.

 

데모 시위중의 흥분상태는 사람을 매우 격앙시켰다. 어수선한 학교 분위기는 공부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주동자는 아니고 단순가담자 정도였지만, 학교에 나가면 공부할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1973년 10월 8일, 내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그 날도 데모 대열에 끼어 데모를 하다가 저녁 때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동숭동 학교 부근 막걸리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유신체제를 비판하면서 데모할 때 부르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술집주인이 신고하여 경찰이 출동하게 되고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되었다.

 

한 친구가 경찰관에게 "박정희면 다냐!"는 등의 언행을 하면서 대들었다. 평소 데모 행렬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가했던 우리 세 사람은 경찰관에게 나쁘게 보였고, 마침 잘 됐다 싶었던 경찰에 의해 즉결심판에 넘겨졌다. 당시 응암동에 있던 즉결심판소에 호송되어 우리는 구류처분을 받았다. 친구 한 명은 구류 29일을 받았고, 나와 다른 친구는 구류 20일을 받았다.

 

즉결심판을 담당했던 판사는 별 말도 없이 그냥 구류처분을 했다. 우리 세 사람은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모두 서울 법대 72학번 동기생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법집행이라는 것이 이렇게 엉터리로 될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 아무리 유신체제라고 하지만 대학생을 이런 식으로 구류처분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가!

 

한 사람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 형벌권의 행사는 정말 신중해야 한다.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커다란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 많은 업보를 쌓는 것이다. 그 업보의 인과관계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에 구류처분되자 상황은 갑자기 복잡해졌다. 입주과외선생이 아무 연락도 취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유치장에 갇힌 것이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학생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갑자기 선생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짐을 동숭아파트로 옮겼다. 며칠 후 대전에서 아버님이 올라오셨다. 경찰서에서 면회를 했다. 면목이 없었다.

 

서울 가서 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대견해 하던 아버님께 초라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대범하셨다. 그냥 잘 견뎌내라는 말씀만 하셨다. 면회 시간은 아주 짧았다.

 

정식재판을 청구하려고 신도순 아저씨가 알아보았으나, 경찰관은 내 무인을 백지에 받은 다음 그 위에 ‘정식재판을 포기함’이라는 글을 내 대신 써 넣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아저씨는 어머니 친척이다. 신덕순 아저씨의 동생이다. 대전에서 아버님과 사업을 함께 하셨다.

 

15. 대학교 2학년 시절

 

 

 

대학교 2학년 학생이 느꼈던 서울의 낯선 풍경이다. 넓은 재벌 집에서 선생님 대접을 받으며 생활하게 되었다. 과외선생이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선생님이었다. 이미 성북동에서 경험을 했지만, 이곳은 전혀 달랐다.

 

마당에서 야구공을 던지며 놀 정도의 잔디밭이 있다. 산 바로 밑에 있는 집 정원에서 저녁 식사 후 흔들의자에 앉아 있노라면 내가 어떻게 이런 곳에 와 있는지 이상했다. 우연한 기회에 아주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운명이란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달라지게 된다.

 

대학 시절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주로 교련복을 입거나 아주 편한 복장을 하고 다녔다. 머리는 터벅머리였다. 지방에서 올라와 공부만 하고 멋을 부릴 줄 모르고 세상도 잘 모르는 순진한 학생이었다. 그런 지방 학생이 너무 달라진 환경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끔 만들었다.

 

과외지도하는 학생과 형 동생 하면서 편하게 지냈다. 그는 내가 과외지도한 학생들 순번으로 12번째 되는 학생이었다. 공부를 하기 싫어했고, 공부에는 마음이 없는 상태라 지도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꼭 공부를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환경이었다. 나는 그걸 이해할 수 있었다. 공부보다는 함께 생활해 주는 정도로 만족해야 할 입장이었다. 학생도 그걸 원했다.

 

학생이 저녁 시간에 돌아다니다 늦게 돌아오면 그 시간 혼자서 내 공부를 했다. 학생은 무척 외로움을 탔다. 나는 그 외로움을 달래주는 역할을 했다.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했다.

 

배가 고프면 내 집이 아니기 때문에 먹을 것을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냉장고에서 날계란을 두개씩 꺼내 먹었다. 그것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간장이나 소금을 찾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가정부 도우미가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누가 밤마다 날계란을 먹을까? 그걸 물어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도 날계란을 먹을 때 느꼈던 고소한 맛을 잊지 못한다.

 

재벌집 사람들의 생활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집안 행사가 있으면 자가용이 20대나 왔다. 당시에는 자가용이란 거의 보기 어려웠다. 내가 지도하는 학생 형은 대학에 다니면서 승마를 하러 다녔다. 학생은 나와 두살 차이였는데 비교적 순수했다. 내 말을 잘 들었고, 내가 수학문제를 풀면 감탄했다.

 

여름 방학이 되면서 나는 학생과 함께 단양으로 갔다. 그곳에 계열회사 귀빈 숙소가 있었다. 더운 여름 머리도 식힐 겸 그곳에서 공부를 하려고 내려갔다. 회장 아들과 함께 내려가니 공장장부터 직원들이 대접을 잘 해주었다.

 

공부하러 단양에 내려간 지 일주일도 안 되어 학생은 답답해서 못 견디겠다고 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후 나는 단양지역을 관할하는 지청장으로 내려가게 된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이 무렵 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혜화동 로타리에 있는 엘리음악학원에 등록해서 기타를 배우러 다녔다. 클래식 기타에 반해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열심히 연습했다.

 

도중에 그만 두었지만, 만약 그때 더 열심히 기타를 쳤으면 고시는 떨어졌을 것이다. 기타 선생이 치던 알함브라의 궁전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태권도반과 역도반에 들어가 운동도 열심히 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법률공부를 해야 할 사람이 왜 다른 일에 시간을 뺏기느냐는 질책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14. 청운동에서 생활하다

 

 

 

방 한 개를 세준 사람들은 우리가 세입자이지만 좋은 대학에 다니는 것을 부러워했다. 우리는 그들을 집주인이라 부러워했다. 가족처럼 좁은 공간에서 서로가 불평하지 않고 협조적으로 잘 지냈다. 집주인인 노부부와 아들이 한 방에서 살았다.

 

산 중턱에 있는 아파트는 무척 추웠다. 한 겨울에는 전기스토브를 켜놓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야했다. 찬바람이 부는 낙산을 올라 다니면서 진정한 추위를 실감했다. 아파트가 부실하게 지어져서 그런지 창문 사이로도 바람이 들어오고, 웃풍이 심했다. 여름에는 단열이 되지 않아 무척 더웠다. 더워서 저녁을 먹고 나면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있다가 열이 식은 다음 내려와 잤다.

 

2016년 여름은 무척 더웠다. 매스컴에서는 온통 더위 때문에 난리였다. 39도 정도 올라가면 정말 더위를 실감할 수 있었다. 1994년 이후 최대로 심한 더위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더위를 느끼지 않았다. 옛날 동숭아파트에서 보낸 여름을 생각하면 특히 그랬다.

 

동숭아파트는 전망이 아주 좋았다. 서울대 문리대, 의대, 법대, 미대 캠퍼스가 다 보였다. 야경도 아름다웠다. 연탄을 사용하는 아파트라 연탄을 갈고 연탄재를 버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형은 그 아파트 5층에 사는 여고생을 과외지도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경찰서에서 간부로 근무하는 사람 딸이었다. 8평 아파트 2채를 터서 살았다. 피아노가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잘 살기에 아파트 2채를 터서 사는가? 어떻게 피아노까지 있는가? 공무원이 어떻게 저렇게 잘 살 수 있는가?

 

지금 생각하면 16평인데, 당시에는 무척 크게 생각되었던 것을 보면, 우물안 개구리는 보는 시야가 그런 것임을 느껴본다. 그 후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동숭아파트를 유심히 바라다보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르내리던 가파른 언덕길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 후 아파트는 모두 철거되고 공원이 조성되었다. 공원에 올라가 이제는 자취도 없어진 동숭아파트를 회상해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껴본 적이 있다. 가로등이 켜져있는 곳을 걸으면서 열심히 살던 삶의 흔적을 만져보았다.

 

동숭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 겪었던 물질적 환경적 어려움은 불행의 조건은 될 수 없었다. 고생하는 것이 자랑도 아니고, 행복의 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렵고, 좋은 집에서 살지 못하고, 먹고 싶은 것을 못먹는다는 것이 곧 불행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물질보다 정신이 중요하다. 행복은 물질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에 기초한다.

 

1973년 5월 초 정일학원 원장님께서 연락이 왔다. 가정교사로 들어갈 용의가 있느냐고 물으셨다. 가르칠 학생은 정일학원에서 재수를 하고 있었다. 재벌집에서 정일학원 원장님에게 입주과외를 할 성실한 대학생을 구해 달라고 했다. 원래 입주과외는 서울 출신들은 거의 안 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방출신들 역시 입주는 구속을 받기 때문에 불편하다고 생각해서 안 하는 경우가 많았다.

 

1973년 5월 11일 입주과외를 시작했다. 색바랜 일기장을 꺼내 보니 그때 처음 그 집에 들어가 일기를 쓴 부분이 눈에 띈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청운동 어느 곳이다. 사방이 몹시 적막할 정도로 고요하다. 소음이 이곳까지는 지쳐서 오지 못하는 가 보다. 변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황이 바뀌는 것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느끼고, 정신적인 동요를 겪어왔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졌다. 어떻게 보면 커다란 변화일 수도 있는 오늘의 일이 조금도 신경을 자극하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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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동승아파트에서 생활하다

 

 

 

과외를 하기 위해 다니는 교통에 소요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매우 커다란 혜택이었다.

 

열악한 하숙집에서 생활하는 것보다는 조용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선생님 대접을 받으면서 생활하게 된 것이었다. 어렵게 살다가 부유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잘 사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보니 별로 부러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적으로 보람을 느끼고 무언가 추구하고 사는 내가 더 행복하게 생각되었다. 더군다나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고3 학생을 지도하면서 나는 내가 열심히 공부했던 의지와 정신력을 믿었고, 그에 반해서 환경은 부유하지만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의지가 약하고 외모나 노는 일에 치중하고 있는 상대와 비교하면서 더욱 삶에 자신감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 1년은 그렇게 어수선하게 지나갔다. 성북동에서 동숭동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다. 공부는 열심히 하지 못했다. 신입생이라 들떠서 대학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빴다. 야유회에 참석하고,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데모를 했다. 입주과외를 하면서 1973년 1월까지 성북동 집에 있으면서 가르치던 학생이 대학입시를 볼 때까지 과외지도를 해주었다.

 

한 집에서 몇 달을 함께 살다보니 많은 정이 들었다. 그 학생이 시험 보기 며칠 전에 대리시험을 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자기 친구도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면서 사진을 합성해서 잘 찍어서 붙이면 쉽게 적발해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만 해도 법을 잘 몰랐다. 그렇게 해도 큰 문제가 되는 것으로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같이 지내던 학생이 그런 부탁을 하니 거절하기도 곤란했다. 그 학생 이름으로 된 수험표를 가지고 내가 대신 시험을 보러가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시험 당일 아침, 세수를 하다가 끼고 있던 콘택트렌즈 한쪽이 빠져 분실되었다. 그것이 없으면 근시 때문에 도저히 시험을 볼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아주신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가? 그래서 대리시험을 봐주지 않았다. 만일 그때 대리시험을 보았더라면, 큰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구속도 되고,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아도 내 인생은 끝났을 것이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아찔하다. 아무 죄의식도 없이, 법과 세상을 잘 모르고 법을 위반하여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나는 그 때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성북동에서 나온 후 낙산에 있는 동숭아파트 방 1개를 얻어 작은 누나, 형, 여동생과 함께 생활을 하였다. 동숭아파트는 낙산 중턱에 있었다. 가파른 언덕이어서 올라 다니는 것이 힘들었다.

 

어린 나이에는 힘든 줄 몰랐다. 아주 빠른 걸음으로 왔다 갔다 했다. 동숭아파트는 8평이었다. 5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다. 방이 2개, 작은 부엌이 있고, 작은 광이 있는데 집주인은 방 하나를 우리에게 5만원에 전세로 주었다.

 

우리는 방 하나와 작은 광을 부엌으로 개조해서 살았다. 그리고 다락이 하나 있었다. 중앙 복도에 공동화장실이 있었다. 밤에 화장실 가는 일이 귀찮았다. 아침에 세수도 공동화장실에서 했다. 샤워를 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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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다

 

 

 

마침내 합격자 발표가 났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합격했다. 눈물이 났다. 해냈다는 뿌듯한 자부심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부모님도 나를 대견하다는 듯이 쳐다보셨다. 혼자 서울에 올라가 정일학원을 장학생으로 학원비도 전액 면제 받고, 중학생을 과외지도 하면서 대학에 합격했다는 사실 때문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어려운 일을 해냈다. 약한 몸을 가지고 혼자서 낯선 서울에서 견뎌냈다. 당시 몸무게는 50Kg가 겨우 될 정도였다. 삐쩍 마른 몸에 키는 커서 아주 언밸런스한 상태였다. 대학교 입학식에는 대전에서 부모님께서도 올라오셨다.

 

주위에서도 형제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법과대학에 다니는 것을 아주 부러워했다. 대전 대사동에서도 동네 사람들이 칭찬을 해주었다. 입학을 하고 나서 창신동에 방을 하나 얻어 형과 함께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형은 의대 본과 1학년이었다. 매일 해부용 뼈나 두개골을 집에 가지고 왔다. 책은 대부분 영어로 된 원서였다. 작은 누나가 밥을 해주었다.

 

입학식을 하자마자 고등학교 선배 여동생과 그의 친구 과외지도를 시작했다. 이화여고 3학년생이었다. 나는 영어와 수학은 자신 있었기 때문에 과외지도에는 누구보다도 소질이 있었고, 능력이 있었다. 가르치는 일을 아주 좋아했다. 열심히 과외지도를 했다.

 

가르치던 참고서도 대개 동일한 것이고 자주 과외를 하다 보니 그 내용을 거의 다 외우다시피 했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4년 동안 과외를 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그게 생활 습관이 되었다. 아르바이트는 대학이 좋아서 그런지 내가 원하면 언제나 끊어지지 않고 구할 수 있었다. 주위에서도 나를 성실하고 실력 있는 과외선생이라고 추천을 많이 해주었다.

 

대학 신입생 시절 나는 고생하던 고등학교 시절과 재수생 시절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분위기에 휩쓸려 낭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어려운 가정환경도 잊어버리고 싶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많이 돌아다녔다. 막걸리를 마시러 다녔고, 다방에 가서 차를 마시며 놀았다.

 

학교 가까운 곳에 이화예식장이 있었고, 지하에 이화다방이 있었다. 이화다방에서 DJ노릇을 했다. 레코드판을 골라서 틀어주었다. 무보수 자원봉사역할이었지만 재미있었다. 어쩌면 골치 아픈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했는지 모른다.

 

학교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교양과정을 주로 듣고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법학공부를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학점을 따는데 급급했고, 고시공부는 앞으로 해야 한다는 추상적인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때 공부하던 것과 달리 법학개론, 민법총칙과 형법총론 책을 들고 다니면서 장차 위대한 법학자나 법률가가 될 것을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었다.

 

캠퍼스의 봄은 그렇게 아름답게 지나갔고, 어느 정도 안정감을 가지게 되었다. 부모님도 내가 혼자서 잘 해내갈 거라고 믿고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여름방학이 지나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을 과외지도 하기 위해 입주과외를 시작했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큰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홍철화 원장님께서 추천해 주신 것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과 함께 한 방에서 생활하면서 영어와 수학을 지도하였다. 달라진 것은 부잣집에서 생활을 하고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매우 안정된 분위기에서 내 공부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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