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법무부 검찰국으로 발령이 나다

 

 

 

당시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법무부로서는 국제테러대책 마련이 시급했고, 국제범죄에 대한 대처가 필요했는데, 내가 미국에서 국제테러리즘을 비롯한 국제형법을 연구했기 때문에 필요했을 수도 있다.

 

법무부는 경기도 과천에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과천에 주공아파트를 전세로 얻어 놓으셨다. 내가 한국에 돌아오자 곧 바로 과천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과천에 있는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공무원 생활을 하다 보니 의정부, 파주, 서울, 강경, 대구, 시애틀, 과천 등지를 이사 다니면서 생활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린 아이들은 친구들과 사귈 수 없고, 자주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법무부 검찰국 검찰제2과에 소속되었다. 검찰제2과는 검찰 업무에 관한 형사정책수립과 일반적인 형사사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국제형사에 관한 업무도 담당했다. 법무부 내에서 제일 바쁜 곳이 검찰국이었다. 형사정책수립, 기획업무가 주였다.

 

정기국회기간이나 임시국회기간에는 밤 12시 퇴근하는 것이 일쑤였다. 장관을 직접 보좌하여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업무의 중요성이 높았고, 그로 인해 정신적 부담감이 컸다. 그런 과정에서 선배들로부터 많이 배울 수 있었고, 나름대로 식견도 높아졌다. 처음에는 정해창 장관님을 모시고 일을 했다.

 

과천 청사는 공기가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청사 뒤에는 산책을 할 수 있는 숲도 있었다. 과천 아파트에서 조금 나가면 청계산 등산로가 아주 좋았다. 몇몇 동료들과 아침마다 청계산 등산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아침 등산 때도 주로 업무에 관한 토의를 했다. 법무부에 근무하다 보면 자연히 학구적이고 연구하는 태도를 가지게 된다. 정진섭 검사님, 이준보 검사님, 박한철 검사님과 함께 새벽에 청계산을 가볍게 다니는 시간을 가졌다. 아침에 등산을 하고 출근하면 몸이 무척 가벼웠다.

 

2015년 8월 29일 꿈을 꾸었다. 꿈에 내가 검찰2과에서 다시 근무를 하게 된 것이었다. 격에 맞지 않는 인사였지만, 내가 검찰2과에서 꼭 필요하다고 해서 특별히 발령이 난 것이었다. 그러면서 꿈 속에서 많은 검사들을 만났다. 대부분 아는 검사들이었다. 28년이나 지난 세월에 또 다시 긴 시간의 꿈을 꾸는 것은 역시 당시 내가 가장 열심히 근무했던 시간이었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기간이 아니었나 싶다.

 

1987년 8월부터 근무를 시작한 법무부 검찰2과에는 부장검사인 과장 밑에 검사 2명이 있었다. 검찰사무관 한명, 계장 8명, 여직원 한명이 있었다. 이런 인원 가지고 담당하는 업무는 정말 많았다. 업무가 과부하된 상태였다. 그래서 일반 직원들은 검찰2과에 발령받는 것을 싫어했다.

 

처음에는 김유휴 검찰국장님, 백삼기 과장님, 이기배 검사님과 함께 근무했다. 점심 식사 때는 차석검사인 내가 운전을 하고 청사 밖으로 나가 식사를 했다. 그 후에는 윤동민 과장님, 정진섭 검사님과 함께 근무했다.

 

나중에는 송광수 과장님, 천성관 검사님과 함께 근무했다. 송광수 과장님은 나중에 검찰총장을 지냈고, 천성관 검사님도 후에 검찰총장 후보로 내정되기도 했다. 김유후 국장님 후임으로 박종철 국장님이 왔다.

 

나는 미국에서 1년 동안 공부한 국제형법 연구성과를 업무에 반영하려고 애썼다. 1988년 개최될 서울올림픽을 대비해서 법무부에서는 외국과 범죄인인도조약 체결을 추진하고 있었다. 첫번째로 호주와 조약체결을 시도했다. 외무부 담당자들과 함께 조약안을 협의했다.

 

1987년 12월 나는 법무부 실무책임자로 외무부 담당자들과 함께 호주 출장을 떠났다. 외무부에서는 조약담당심의관님과 신연성 서기관님이 함께 갔다. 호주 멜버른에서 양국의 조약안을 가지고 회의를 했다. 

40.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다

 

 

 

1987년 8월 유학생활 1년을 마쳤다. 미국 생활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것이었다.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는 어떻게 1년을 보내나 싶었는데, 떠나면서 되돌아보니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언제 다시 이곳에 와 볼 수 있을까 싶었다.

 

당시 공무원 신분으로 외국에 나가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공무출장이 아니면 해외여행은 불가능했다. 검사로 근무하면서 업무 성격상 해외로 출장 가는 기회도 거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특혜를 받은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해외로 유학 가는 검사 수는 1년에 5명에 불과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여러 가지를 배웠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 지도 깨닫게 되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의 제목처럼 정말 세상은 넓고 넓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고시에 붙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잘난 척하고 살아온 나로서는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일들이 미국에서는 어렵게 느껴졌다. 모든 것을 직접 해야 했다. 한국에서는 아는 사람에게 부탁할 수 있는 일도 미국에서는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이발소 가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한국과 다른 스타일로 깎아주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발도 잘 안하게 되고, 집에서 가위로 깎기도 했다. 집에서 이발을 하니 모양이 엉성했다.

 

일반적인 가위는 머리카락을 자르는 용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잘 들지 않았다. 떨어지는 머리카락도 장난이 아니었다. 보자기를 깔고 해도, 머리카락은 카펫이 깔려있는 거실 사방 군데 퍼졌다. 그동안 한국에서 얼마나 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아파트에 전화를 설치하는 것도 그렇고, 중고자동차를 사는 일,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는 일, 아이들을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는 일, 쇼핑을 하는 일 모두 내가 직접 해야 했다.

 

자동차여행을 하는 것도 지도를 사서, 많은 연구를 한 다음 다녀야 했다. 대부분 초행길이었으므로 길을 찾는 것도 힘이 들었다. 지금처럼 네비게이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국 도서관에 가서 그 많은 장서를 보면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더 많은 시간 책을 보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각오도 새롭게 했다. 미국 도서관에서 로스쿨 교수들이 써놓은 수많은 논문 깊이에 감탄하기도 했다.

 

시애틀에서 미국 대학원생 한 명을 알게 되어 영어 공부를 했다. 일본에서 온 친구와 함께 레슨을 받았다. 시애틀에 유학 온 몇 명의 한국인들과 자주 만났다. 김찬진 변호사님이 몇 달 동안 시애틀에 와 있는 동안 함께 식사도 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인사 발령이 났다. 대구지방검찰청에서 2개월간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원래 인사 기준에 의하면 이런 경우 다시 대구지검으로 돌아가 2년 정도 더 근무하는 것이 원칙이다.

 

한 청에 발령을 받으면 보통 2년 정도 근무하는 것이다. 그런데 1년 만에 법무부로 발령이 났다. 더군다나 대구지검에서 실제 근무한 것은 2개월밖에 안 되는 상태에서 법무부로 발령이 나니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왜 이런 발령이 났는지 모른다. 추측컨대 미국 법원에서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10억 원 손해배상청구사건에서 국가소송수행자로 열심히 일을 해서 한국 정부가 승소했는데 그 과정에서 법무부에서 내 능력을 알아주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검사 인사에 대해서는 결과만 알지 그 과정을 알 수는 없다. 물어볼 곳도 없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39. 미국에서의 생활

 

 

 

국제테러리즘에 관한 연구를 했다. 각종 서적을 읽고 자료를 수집하고 강의를 들었다. 한국에 돌아온 다음 체계적인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나는 시애틀에 있을 때 어느 한국 고위직 공무원이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당시 일으켰던 교통사고와 관련한 민사소송에 관여했다. 공무원의 미성년자인 자녀가 승용차를 운전하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미국인을 치었는데 그로 인해 피해자가 식물인간이 되었다.

 

사고 소식을 들은 한국 공무원은 현장에 도착해서, 미국 경찰에게 딸 대신 자신이 운전했다고 진술했다. 어린 딸을 대신해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나중에 이것이 문제를 크게 만들었다.

 

그 후 형사문제는 해결이 되고, 공무원과 딸은 한국으로 귀국했다. 미국 피해자는 변호사를 선임해서 한국 공무원 개인과 한국 정부를 상대로 10억 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미국 법원에 했다. 한국 정부에서는 이에 피고로서 대응해야 했다.

 

시애틀에 유학을 가게 되자 법무부에서는 나를 국가소송대리인으로 지정해서 소송을 수행하도록 했다. 현직 검사로서 미국에 유학 가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런 법률적 자격이 있었다.

 

나는 미국 보험회사 변호사를 만나 소송전략을 상의한 후 한국 법무부 담당자에게 수시로 대응방안을 보고했다. 미국 법정에도 미국 변호사와 함께 나갔다. 모든 것이 영어로 서류작성을 해야 했고, 법원에서 송달되는 서류도 영어로 된 것을 분석해야했다.

 

법무부에서는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소송에서 이길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가 지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이 소송은 대한민국 정부가 이겼다. 국가의 주권면제이론을 적용해서 미국 피해자는 패소했다. 법무부에서는 아주 좋아했다. 상급자들이 전화로 많은 격려를 해주었다. 사건 당사자였던 고위 공무원으로부터도 고맙다는 전화를 받았다. 고생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을 위해 작은 기여를 한 것이라는 자부심도 가졌다.

 

1986년 8월 30일 캐나다로 갔다. Interstate 5번 하이웨이를 타고 밴쿠버까지 갔다. 캐나다 1번 인터스테이트 프리웨이를 타고 Hope까지 갔다. 그 다음 Kamploofs까지 달렸다.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 속에 피어오르는 산봉우리의 안개, 도로 양쪽에 전개되는 웅장한 산야, 캐나다 특유의 나무, 평원, 우리는 환상적인 세계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는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누런색의 고원에 드문드문 서있는 푸른 나무들, 서부 영화 장면에 나오는 전쟁터 같다. 호수도 커서 자동차로 20분 이상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재스퍼에서 밴프까지 드라이브를 하고 2박 3일간의 자동차 여행을 마쳤다.

 

시애틀에서 생활할 때, 자동차보험을 들러 갔다가 재미교포 조한천씨를 만나 도움을 받았다. 미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데, 자동차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교포로부터 도움을 받아 보험에 가입하고 나니 귀인을 만난 것 같았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조한천씨가 다니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 교회 사람들과 1년 동안 가깝게 지냈다.

 

시애틀에서는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듣고, 도서관에서 책이나 자료를 찾아보는 것이 주된 일과였다. 아파트에서 학교까지는 멀었기 때문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다녔다. 점심은 주로 집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바나나와 같이 싸가지고 다녔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와 유치원을 다녔다.

38.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연구하다

 

 

 

당시만 해도 공무원이 가족과 함께 해외연수를 가는 경우에는 1년 체류비용으로 2만 달러만 가지고 갈 수 있었다. 그 이상 가지고 나갈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네 식구가 2만 달러만 가지고, 집을 세 얻고, 자동차를 사고, 모든 것을 먹고 입고해야 했다.

 

시애틀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고생을 했다. Washington D.C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출발을 늦게 하는 바람에 마중을 나오기로 했던 신광수 사장님이 공항에서 기다리다가 그냥 돌아갔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공항에 밤늦게 도착해서 부근에 있는 호텔에 가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다음 날 신광수 사장님을 만나 짐을 가지고 아파트로 가서 입주절차를 밟았다. 신사장님은 신건수 검사님의 친형님으로서 시애틀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재미교포다. 당시 시애틀로 유학 온 판사 검사들을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아파트는 시애틀 북서쪽에 있는 레이크사이드 아파트였다. 그래도 Washigton D.C.에서 대학교 기숙사생활을 할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마음 놓고 음식을 해먹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2 Bed Room을 얻었으나 나중에 1 Bed Room으로 옮겼다. 한 달에 집세가 100 달러씩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 새가슴으로 살았는지 모른다. 한국 돈으로 따지면 한 달에 10만 원 정도 차이가 나는데, 그 당시에는 무척 큰돈으로 생각이 들었다.

 

원래 아이가 둘이면 1 Bed Room을 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적당히 이야기하고 아파트를 옮겼다. 이사할 때에도 다른 사람 도움 없이 우리 힘으로 옮겼다.

 

8월 14일에는 미국 교포 김진원씨로부터 1981년형 Citation 차를 샀다. 3천 달러를 주었다. 차는 3만5천 마일을 달린 상태였다. 은빛 색깔이었는데 괜찮은 차였다. 미국 생활은 차가 없으면 힘이 들기 때문에 우선 차부터 샀다. 한국에서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 가지고 갔기 때문에 미국 운전면허증을 따기 전까지는 그대로 운전할 수 있었다.

 

미국 운전면허증을 따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학과시험은 단번에 합격했는데 주행시험에서 세 번이나 떨어졌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미국인 시험관이 의도적으로 그랬던 것 같다. 운전을 아주 조심스럽게 하지 않는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서 그런 것 같았다. 아무튼 몇 번 시험을 보러 다니면서 기분은 좋지 않았다.

 

나는 군대에서 법무관 생활할 때 자동차운전면허를 취득했다. 군대에서 집차를 타고 다니면서 운전병으로부터 운전을 배웠다. 그리고 2종이 아닌 1종 면허를 취득했다. 1982년에 파주에서 면허를 딴 것이다. 한국에서 이미 몇년간 운전을 잘 하고 다녔는데 자꾸 떨어뜨리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University of Washington, Law School에서 Visiting Scholar로 1년간 국제형법을 연구하기로 했다. 한국 법무부에서 현직 검사 자격으로 미국 대학교와 협조가 되었기 때문에 대학교에서는 아주 협조적이었다.

 

법학대학원 건물 지하 1층에 연구실을 얻어 4명이 함께 사용했다. 듣고 싶은 강의도 듣고, 도서관에서 자료도 찾아보고, 수시로 교수들과 토론할 기회도 얻었다.

 

국제형법 중 국제테러리즘에 관한 국제형사사법공조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Henderson교수가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당시 법무부에서는 나에게 미국 유학과제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대비한 국제테러방지대책에 관한 연구를 하도록 했다.


37. Georgetown 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다

 

 

 

7시간 비행을 하고 나니 앨라스카 앵커리지 공항에 착륙하였다. 창공에서 내려다보는 하늘은 매우 아름다웠다. 빙산처럼 보이는 곳, 구름 모양도 장관이었다. 세상은 역시 넓다는 것을 실감했다. 해외에 처음 나가는 입장이라 더욱 그랬다.

 

컵라면 두 그릇을 먹고 나니 9불90센트다. 비싼 물가에 놀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닌 데 당시만 해도 너무 비싸 혀를 내둘렀다.

 

저녁 9시 반 New York, John. F. Kennedy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고등학교 친구 김성주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코오롱 뉴욕지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김갑중 사장이 연락을 해서 나온 것이었는데, 만나보니 친구가 나왔던 것이다. 반갑고 고마웠다. 뉴욕 중심가에서 약간 떨어진 Midway Hotel 방을 얻었다. 부모님께 무사히 도착했다는 전화를 드렸다.

 

다음 날 국내선을 타고 Washington D.C로 갔다. 도착하니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무역협회 근무하는 김희진 씨와 박상옥 차장 두 분이 나와 있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산다. 그때 그때 고마운 분들을 만나 신세를 진다.

 

Georgetown 대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 25일간 생활해야 할 공간이다.

 

Lauinger Library에 가서 그 차분한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나는 '1986 Orientation in the U.S Leal System Course‘를 들었다. Tuition Fee 가 1,400달러, Housing Fee가 1인당 290달러 합계 1,160달러다. 매우 비싸다.

 

Georgetown에서 보낸 25일은 꽤나 길고 힘이 들었다. 기숙사에서 임시로 생활하는 것이어서 불편했다. 기숙사에서 밥을 해서 먹어야 했고, 빨래도 해야 했다. 더군다나 할 일이 없는 가족 세 명이 있으니 몹시 답답하고 지루한 나날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기숙사로 와서 가족들과 학교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자동차가 없으니 멀리 다닐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어린 아이들과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자유롭게 다닐 수도 없었다. 특히 워싱톤 D.C의 밤거리는 외국인에게는 위험했다. 어두워지면 기숙사 안에서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TV도 없었다.

 

1986년 8월 9일 시애틀로 갔다. 당시 내가 썼던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드디어 우리가 1년간 생활할 시애틀로 왔다. 미국 북서부 끝 부분에 있는 시애틀은 신흥도시로서 매우 깨끗한 인상을 준다. 넓은 지역 공간 때문에 도시는 커다란 여유를 보여주고 있다.

 

시애틀에서 이틀 밤을 보냈다. 우리는 지금부터 시애틀에서 어떤 생활을 할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이며 우리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

 

한 폭의 커다란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처럼 우리의 시애틀에서의 시간과 공간을 마음껏 활용하여 멋있는 생활, 그리고 추억, 나아가 인생과 장래를 창조해 나가자. 어두웠던 추억과 기억 속의 고통은 모두 망각해 버리고 시간을 아껴서 생활하자>(1986년 8월 11일 월요일 흐림)

 

1986년 8월 9일 이민가방 6개를 가지고 시애틀에 도착했다. 시애틀 공항에 내려 보니 우리 짐이 도착하지 않았다. 너무 불안했다. 모든 짐이 분실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교포 신광수 사장님의 도움으로 그 다음 날 공항에 가서 짐을 찾아가지고 왔다.

 

처음에는 몹시 막막했다. 미국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영어가 능숙한 것도 아니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36. 대구지방검찰청에서 근무하다

 

 

 

가족이 이사를 해야 했는데 그 일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우선 대구에 아파트를 얻었다. 2년 정도 살 것으로 예상하고 아파트 전세를 얻었다. 1986년 5월 5일 강경에서 이삿짐을 싸서 대구로 출발했다.

 

어린이날 이사를 했다. 아이들이 있어서 그런지 이삿짐이 8톤 트럭으로 하나 가득되었다.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 113번지 경남아파트 9동 403호다. 처음에는 정말 낯이 설었다. 큰 아이는 그곳에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 시켰다.

 

김동철 검사장님을 모시게 되었다. 나는 특별수사부 수석검사로 배치되었다. 제갈융유 부장검사님은 나중에 대전지검 특별수사부장을 할 때 차장검사님으로 모셨다. 경북고와 서울법대를 나온 분이다.

 

특별수사부는 특별수사와 공안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다. 지금은 업무가 나누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대구지검은 특수부에서 두 업무를 모두 담당했다. 내 밑에 세 명의 평검사가 있었다. 두 사람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정로찬 검사와 이상호 검사였다.

 

당시 대구고등검찰청에는 김기춘 고등검사장님이 계셨다. 직전에 대구지검장으로 근무하다가 고검장으로 승진했다. 그래서 나는 같은 건물에서 고등검사장으로 모시고 두 달간 근무했다. 대구고검에는 김각영 검사님이 충무지청장으로 있다 옮겨 근무하고 있었다.

 

김기춘 고검장은 2017년 7월 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구형 받았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하고 리스트에 오른 개인 단체에 정부보조금을 부당하게 끊은 혐의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조윤선 전 문화체육부장관에게는 징역 6년이 구형되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최후진술에서, “문체부 공무원에게 사직을 강요한 적도, 블랙리스트 명단을 만들라고 지시한 적도 없다”라고 혐의를 부인했다.

 

나는 공안업무를 담당했다. 무척 바빴다. 매일 아침 남보다 일찍 출근해서 각 경찰서에서 올라온 공안정보를 챙겨 아침 9시 검사장님이 출근하면, 곧 바로 정보보고를 해야 했다. 주말에도 거의 청사를 떠나지 못했다. 토요일에는 청 내에 있는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면서 대기했다. 청에서는 코트에 유선전화기를 설치해주었다.

 

1986년 5월 10일 서울에 올라가 토플시험을 치렀다. 5월 22일 법무부 검찰1과장으로부터 미국 유학검사로 선발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당시 법무부에서는 토플성적 등을 기준으로 해서 해외 유학을 보내는 검사를 선발했다. 미국에 가서 1년간 특정 분야를 연구해서 나중에 돌아와 실무에 필요한 지식을 활용하도록 하는 제도다.

 

대구지검에 발령 받아 근무를 하던 중 2개월 만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대구지검에서 1986년 5월 6일부터 7월 8일까지 근무했다. 불과 2개월 동안이었지만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국 유학이 확정되자 급하게 전세 아파트를 빼야 했다. 서둘러 서울로 이사했다. 짐을 부모님 아파트로 옮겨놓고, 가족들은 서울로 보냈다. 나 혼자 20여일을 대구에서 모텔 생활을 했다.

 

1986년 7월 12일 토요일 오후 7시 10분 KAL 028편 비행기에 올랐다. 부모님과 형제들,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이 김포공항까지 나와 환송해주었다. 출국절차를 마치고 작별인사를 하니 무척 서운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떠나 1년이나 미국에 있을 생각을 하니 죄송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김갑중 사장, 박노환 선배, 김영택 선배, 박노은 사장, 김용철 사장 등이 공항까지 나왔다. 고마웠다. 멀리 논산에서 일부러 올라왔다.


35. 논산에서의 생활

 

 

 

강경읍보다는 논산읍이 컸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논산읍으로 나갔다. 강경에서 논산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도로는 아주 시원했다. 양쪽에 가로수가 죽 이어져 있어 운치도 있었다.

 

1985년 7월 부여군 세도면에서 토마토를 재배하는 농민들의 집단 시위가 있었다. 일본산 서광 토마토 씨앗을 심었던 농민들이 씨앗불량으로 농사를 망치게 되었다.

 

농민들은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기독교농민회 배종열 회장이 서울에서 내려와 앞장서다가 10일 구류처분을 받고 구금되었다. 농민들은 배 회장 석방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면서 시위를 계속했다. 

 

나는 일본에서 씨앗을 수입해서 판매했던 종자수입판매업자를 구속해서 기소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나중에 대법원까지 가면서 무죄로 확정되었다. 종묘관리법 규정이 애매모호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시 농민 입장을 이해했고, 수사과정에서 씨앗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했다. 그래서 정부에서 종묘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농민들에게 피해가 없게 된다는 취지의 칼럼을 써서 대전일보에 게재했다. 

 

이것을 안기부 대전지부에서 문제 삼았다. 씨앗 때문에 농민들이 집단행동을 하고 있는데 현직 검사가 불난 데 부채질 하는 식으로 정부에서 씨앗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신문에 글을 쓰면 되느냐는 비난이었다.

 

나는 지금도 당시 내가 했던 일련의 조치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급자에게 질책도 받았지만 내 소신껏 농민들을 위해 필요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대전지방검찰청에는 박희태 검사장님이 계셨다. 후에 국회의장까지 지내신 분이다.

 

연무대에 고등학교 친구인 서동석 사장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정약사가 있었다. 서사장과 정약사를 자주 만났다. 연무대 고깃집에 가서 자주 식사를 했는데, 고기 맛이 좋고 푸짐했다. 그리고 논산읍에서 도축장을 하던 이광수 선배님이 있었다. 그 선배 덕분에 한우고기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었다.

 

나는 프레스토 6111번 차를 타고 다녔다. 논산에서 주유소를 하고 있던 김영택 선배 가족과 친하게 지냈다. 김 선배는 태성관광주식회사를 설립해서 관광사업도 하고 있었다. 성냥공장을 하는 박노환 선배, 종묘상을 하는 박노은 후배도 자주 만났다.

 

강경에서 근무할 때 이태섭 씨가 논산을 방문한 적이 있다. 광석 시골집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점심 식사를 하였다. 장인께서 주최한 자리였다.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에서 1년 2개월 동안 근무를 했다. 1986년 5월 대구지방검찰청으로 발령이 났다. 강경은 충청남도로서 그렇게 낯선 곳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동문들도 있었다. 대구는 그야말로 완전히 낯선 타향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었다.

 

나는 강경지청에서 법무부 가기를 희망했다. 전임자인 이상률 검사님이 강경지청 근무를 마치고, 곧 바로 법무부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었다. 나도 똑 같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인사발표가 나고 보니 대구지검이었다. 무척 실망했다.

 

공무원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사발령장 하나로 전국을 돌아다녀야 한다. 인사권은 무서운 칼자루다. 당시만 해도 검사가 인사발령이 나면, 지역 유지들과 공무원들이 찾아와서 송별인사를 나누었다. 많은 회식 자리가 마련된다. 그런데도 몹시 서운했다. 1년 2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논산과 부여, 연무대를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이었다.


34.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에서 근무하다

 

 

 

이런 경험은 그 후 검사생활을 하면서 국제범죄 전문가로서 일하게 된 기초가 되었다. 서울지검을 떠날 무렵 나는 한미행정협정사건에 대한 연구 논문을 검찰지에 발표하였다.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제시한 논문이었다. 후에 다시 법무부 검찰국 검찰2과 검사로서 SOFA 업무를 담당했을 때에도 서울중앙지검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85년 3월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검사로 임관된 후 첫 번째 인사이동이었다. 서울에서 일정 기간 근무하면 원칙적으로 지방으로 순환근무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2년 6개월 근무했기 때문에 인사 대상이 된 것이다.

 

발령이 나서 처음에는 논산군 광석면에 있는 시골집에서 생활했다. 옛날에 처가에서 지어놓은 집인데 한옥으로 아주 좋았다. 그곳에서 혼자 지내면서 강경으로 차를 타고 출퇴근했다. 그러다가 강경에서 살 집을 구했다.

 

전임자가 사용하던 단독주택을 그대로 인수했다. 전세로 들어갔다. 전임자는 연수원 8기인 이상률 검사님이었다. 연수원 1년 선배이고, 대학은 2년 선배다.

 

강경경찰서 유치장에 바로 붙어 있었다. 2층으로 되어 있었고, 작은 마당도 있었다. 겉에서 보기에는 그럴듯했지만, 안은 너무 엉성했다.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부엌과 마루는 나와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겨울에는 너무 추웠다.

 

밤에 내가 늦게 들어가면 가족들이 무섭다고 해서 1층에 있는 방 2개 중 한 개를 혼자 사는 직장 여성에게 세를 주었다. 그 때문에 방 1개를 가지고 네 식구가 생활해야 했다. 비좁아서 고생했다. 그렇다고 중간에 세입자를 나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동차를 집 앞에 주차시킬 수 없는 것도 불편했다. 차를 집 앞에 세워 놓으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다가 이것저것 망쳐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충청은행 주차장에 세워 놓았는데, 그것도 철문을 열고 닫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목욕탕에는 온수기를 설치했다. 도시가스가 아니고 한통씩 사서 설치하는 부엌가스통에 함께 호수로 연결해서 아침마다 틀어야 하는데 가스 냄새도 나고 위험해 보였다. 화경은 강경황산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황산초교는 1945년 12월 10일 개교했고, 강경읍 대흥로 34번길 5에 위치한다.

 

당시 강경에 살 때 범종은 김범용이 부른 ‘바람 바람 바람’이라는 노래를 잘 불렀다. 가사도 정확하게 외우고, 음정 박자가 잘 맞았다.

 

강경지청에는 지청장과 검사 1명이 근무했다. 지청장은 김영채 부장검사님이었다. 고향이 포천이었다. 지원장은 윤전 부장판사님이었다. 연수원 동기인 이수형 판사가 있었다. 그 후 윤병구 판사가 후임자로 왔다. 나는 관내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모두 혼자 처리해야했다. 관할은 논산군과 부여군 두 곳이었다. 관할 경찰서도 강경경찰서와 부여경찰서 두 곳이었다.

 

두 개의 군 관할구역에서 발생하는 모든 형사사건에 대한 수사지휘와 인지사건 수사, 공소유지, 형집행 등의 업무처리를 했다. 그래서 무척 바빴다. 직원들에 대한 감독책임도 있었다. 주말에도 구속영장처리나 급한 업무 때문에 항상 긴장하고 당직실에 연락처를 알려 놓고 있어야 했다.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불편했다.

 

검찰청에서 집까지 걸어서 5분 정도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생활하기는 아주 편했다. 퇴근하면 특별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시골 생활은 공기도 좋고 조용해서 좋았다.


33. 형사4부에서 SOFA 사건을 담당하다

 

 

검사실에서 수사하던 사건이 법정에서 변호인과 공방을 벌이다 보면 수사하는 요령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피의자의 인권보장을 하면서 수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무죄가능성이 있는 사건에 대한 집중적인 검토와 증거보완 등을 하다 보면 일주일은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갔다.

 

공판부에서 근무하면서 이근우 검사님이 타고 다니던 포니차를 인수하게 되었다. 중고차였는데 마침 그 선배가 새차를 산다고 해서 내가 인수하겠다고 하니 그럼 싸게 팔겠다고 했다. 100만 원에 인수했다. 군법무관 시절 운전면허증을 받아 놓았다. 포니는 그런대로 타고 다니기 좋았다. 당시에는 공무원 자가운전제도가 확대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차를 한대 마련했던 것이다.

 

공판부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새벽에 시청 부근에 있는 영어학원에 다녔다. 회화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의도에서였다. 아침 7시부터 8시 반까지 90분 간 외국인 강사로부터 회화를 배웠다. 새벽에 일찍 나와 영어공부를 하고 사무실에 가면 힘이 들었다.

 

퇴근하면서도 차에서 이어폰을 꽂고 영어테이프를 들었다. 집에 가서 잠을 잘 때도 테이프를 틀어놓고 잠이 들었다. 자면서도 무의식 속에 회화가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거의 1년 정도 회화에 몰두해 있었다. 장차 국제화시대에 영어회화는 반드시 필요할 거라고 믿었다.

 

공판부에서 4개월간 근무를 마치고 형사4부로 배치되었다. 조세범죄, 관세범죄, 경제범죄, 한미행정협정사건 등을 전담하는 부서였다. 김수연 부장님과 김학재 검사님, 이재술 검사님 등과 함께 나는 평검사로서 세번째 서열이 되었다. 군법무관 3년 경력 때문에 중간 서열이 된 것이다.

 

당시 함께 근무했던 김학재 검사님은 나중에 법무부 차관, 청와대 민정수석, 대검찰청 차장검사를 역임하고 퇴직하셨다. 대검찰청에서 퇴임하면서 곧 바로 내가 설립한 법무법인 태일로 들어오셨다.

 

2017년 9월 2일 토요일 오후 5시 시청 앞 프라자호텔 별관에서 김학재 변호사님 아들 혼사가 있어 윤주선 세무사님과 함께 참석했다. 변호사님은 해남 출신으로 1945년생이다.

 

나는 미군범죄전담검사가 되었다. 원래 미군범죄사건은 초임검사에게는 맡기지 않았다. 초임검사로서 미군범죄를 담당한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사명감을 느꼈다. 미군범죄를 제대로 수사하기 위한 제도 개선도 했다.

 

용산경찰서 외사담당과 서울세관 외사담당, 미8군 범죄수사대, 법무감실 등과 긴밀한 수사지휘체제 및 협조체제를 갖추고 철저한 범죄단속 및 신속한 처리를 하도록 노력했다. 이 시기에는 이사화물을 가장한 호화가구 밀수사건이 중점 단속 대상이었다. 외국 차량의 한국인에 대한 불법양도사건도 중요한 이슈였다. 양국간의 법감정이 달라서 폭행사건, 교통사고도 중요한 사안이었다.

 

특히 재판권 행사 및 포기 결정이 아주 민감하고 어려웠다. SOFA사건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다. 미8군 차량출입증을 받아 업무협조차 자주 미8군에 다녔다. 그럼으로써 당시에는 모처럼 SOFA 담당검사로서 아주 적극적인 수사와 업무협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바람에 나는 서울지검을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SOFA 전담검사를 했다. 1985년 3월까지 1년 3개월 정도 SOFA 업무를 담당했다.

 

이 시기에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은, 미군 CID요원들, 용산경찰서 외사과 직원 등과 합동으로 미군 내 식당 부조리 사건을 조사할 때 현장에 나가 지휘를 했던 일이다.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기 위해 일요일에는 용산에 있는 미군 부대 채플에 참석하기도 했다.

32. 송무부와 공판부에서 근무하다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고향 사람들과 잣나무 징발에 대한 국가배상을 청구하러 돌아다녔다. 국방부 배상담당부서나 법원, 변호사 사무실 등을 다녔다. 고향 사람들이 경비를 공동으로 거둬 소송을 했다. 나도 법대 1학년생이었기 때문에 고향 사람들과 함께 다녔다.

 

고향 사람들은 내가 서울 법대에 다닌다고 하니까 법을 많이 아는 것으로 알고 여러 가지를 주문했다. 사건경위서와 탄원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나름대로는 끙끙대고 썼지만 지금 다시 보니 얼마나 유치하고 수준이 낮은 것이었는지 웃음이 난다.

 

당시 내가 느낀 것은 법원이고 변호사 사무실이고 그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주는 거부감이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의 비인간적인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흘러가니 내가 그런 사람들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중에 나를 보게 되면 그런 분위기에 물들은 똑 같은 사람으로 보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시간이 가면서 점점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1982년 12월이 되었다. 연말이 되면 검사실은 더 바빠진다. 연말에 미제 사건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말에는 이런 저런 모임에 참석하다 보면 자연히 술도 마시게 되고 시간을 많이 뺏긴다. 몸은 상당히 피곤해 진다. 거의 매일 사건 기록을 집에 가지고 와서 밤늦게까지 검토하고 결정문을 작성해야 했다.

 

1983년이 되었다. 검사 생활 4개월이 지나니 업무에 대해서는 처음 보다 많이 익숙해졌다. 사건 처리도 빨라지고 점점 중요한 사건을 배당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 달에 200건 정도 배당되었다. 정말 격무였다. 거의 매일 야근을 하고 기록을 집에 싸들고 다녔다.

 

마음은 즐거웠고 직접 내 이름으로 사건처리를 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실수하여 억울한 사람을 재판에 회부하거나, 진짜 법을 위반한 악질적인 범인을 처벌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까 걱정했다.

 

사건처리에는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구속되어 오는 사람들 중에 특히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있으면 가급적 그 사람들의 딱한 사정을 들어주느라고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러다 보니 다른 검사보다 사건 처리는 늦어졌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사건을 빨리 처리하는 것보다는 철저하게 조사하고 당사자의 변명이나 주장을 충분하게 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8개월 쯤 지나 송무부로 부배치가 바뀌었다. 유순석 부장님, 김각영 검사님, 최연희 검사님과 함께 일했다. 부장 아래 검사는 세명이었다.

 

송무부에서는 국가소송수행을 하고 소송수행자를 지휘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서울지검에는 중요한 국가소송사건이 많이 있었다. 생소한 업무를 처음 맡아 자료를 찾아 업무를 익히느라고 고생을 했다.

 

국가소송수행자 교육 계획을 세우고 교육 자료를 만들기 위해 한 달 가까이 야근을 했다. 선배 검사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많았다. 김각영 검사님은 대전고등학교 9년 선배인데, 나중에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까지 지냈다. 최연희 검사님은 국회로 진출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4개월간의 송무부 근무가 끝난 후 공판부로 배치되었다. 공판실에서는 실장과 검사 6명이 커다란 방 하나에서 같이 근무하였다. 대부분 법정에 공판관여를 하러 들어갔다. 다른 검사들이 수사하여 재판에 회부한 사건에 대한 공소유지를 전담하는 업무였다. 법정에 들어가 재판을 하면서 또 다른 경험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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