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대학 강의 준비를 하다

 

 

 

비행기는 끝없이 먼 길을 날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명확하게 방향 지으려고 애썼다. 머리 속은 혼란스러웠지만, 시간을 아껴 에너지를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천에 가까이 오면서 창밖을 보니 구름이 너무 아름다웠다. 구름 바다였다. 구름 눈산이었다. 구름을 뭉치면 커다란 눈사람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오후 5시 마침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또 많은 사람들 속에 뒤섞여 걸어가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 틈에 서 있어야 했고, 입국심사와 세관심사 등 계속되는 심사를 받아야 했다.

 

밖으로 나오니 늦가을의 공기가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10월을 떠나보낸 마음이 허전하기도 했다. 606번 버스를 탔다. 조용하게 가을 풍경을 감상하고 오는데, 뒷좌석에 앉은 두 남자가 커다란 소리로 떠든다. 무슨 대화를 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큰 소리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한 남자는 연신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면서 버스 안이 다 울리도록 큰 소리로 말한다. 아무도 그 남자의 무례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번 출장 때는 유난히 시차 때문에 고생을 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2006년은 병술년으로서 개띠 해다. 1월 1일 새해는 또 하나의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고 출발했다. 2006년 1월 초에는 감기 때문에 고생했다. 1월 1일부터 시작된 감기는 거의 보름 정도 계속되었다. 연초부터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병원 신세도 지고 약도 많이 먹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원리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1월에는 미국에서 범종이 와서 있었다. 12월에 와서 1월 24일 돌아갔다. 겨울 방학동안 서울에 와서 지내고 간 것이다. 외국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다가 서울 오면 그래도 리프렛쉬해서 돌아간다.

 

1월에는 강의 준비에 바빴다. 헌법재판론을 강의하기로 했다. 헌법재판론은 나에게 새로운 분야이기도 하다. 새로운 도전이었다. 새로운 시각에서 강의를 준비했다. 시간이 나는 대로 헌법재판에 관한 책을 읽고 헌법재판소 판례를 공부했다. 오래 전에 공부했던 헌법을 새로 공부하니 재미가 있었다. 시험을 준비하면서 보았던 책과, 강의를 준비하면서 보는 책은 전혀 의미가 달랐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게 헌법과 연관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신문을 봐도 헌법관련기사가 눈에 띈다. 어떻게 하면 쉽게 지식과 경험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인지 연구했다. 강의를 시작한다는 마음에 들떠있었다. 대학의 봄은 나에게 새로운 장을 열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학기 단위로 체계적으로 하는 강의를 맡고 보니 많은 부담이 된다.

 

1월은 계속해서 윤상림사건 때문에 사회가 어수선했다. 정치계, 법조계, 군 경찰 등 안 걸리는 곳이 없을 정도로 복잡한 사건이었다. 2월 10일, 11일 이틀에 걸쳐 광릉에 있는 제3캠퍼스에서 워크숍이 있었다. 2월 10일 오전 9시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했다. 광릉 부근에 있는 회의장으로 갔다. ‘평화는 개선보다 강하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탑을 보았다. 공기가 맑은 곳이었다. 머리가 아주 맑아진다.

 

정말 필요한 회의였다. 강의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매우 유익했다. 잘 모르던 분야에 관한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강의를 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 8시에 아침 식사를 했다. 다시 회의를 하고, 점심 식사를 한 후 서울로 돌아왔다. 그냥 헤어지기가 서운하다고 해서 예술의 전당 앞에 있는 신정식당에 가서 술을 마셨다.

60. 뉴욕의 핼로윈데이

 

 

 

범인은 아직까지 못잡고, 여학생의 얼굴은 심하게 망가졌다.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미국의 밤거리는 조심해야 한다. 강도범은 엄벌해야 한다.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억울한가? 돈을 빼앗기 위해 멀쩡한 사람을 때리고 죽이고, 망가뜨린다.

 

10월 31일 월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노스이스턴 대학교에 갔다. 그 캠퍼스에 가면 나는 항상 작은 연못을 유심히 쳐다본다. 그곳에 있는 작은 오리새끼들을 또 찾아보았다. 오리는 여전히 연못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오리의 발을 쳐다보았다. 무척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야 물위에서 방향을 잡는다.

 

캠퍼스 옆에 있는 세븐일레븐에 들어가 빵과 오렌지쥬스를 사서 먹었다. 아침 운동 뒤에 먹는 간식은 매우 맛있다. 산책을 하고 돌아와 범종과 함께 식사를 하고 Back Bay Station으로 갔다. 돌아올 때는 Amtrak First Class를 탔다. 편도로 160불이다. 이국 만리 먼 곳에서 범종과 헤어지니 서운했다. 혼자 남겨 두고 오는 마음이 허전했다. 비지니스 클래스는 110불 정도다.

 

Amtrak 아닌 액셀레이터라는 다른 종류의 열차가 있다. 그 열차로 뉴욕과 보스턴 구간은 2시간 반 정도 걸린다. 내가 오전 10시 20분 탄 Amtrak은 돌아올 때는 보스턴에서 뉴욕까지 3시간 반 정도 걸렸다. First Class 칸에서는 간단한 식사도 내주었다.

 

뉴욕역에서 내려 걸어서 힐튼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서 혼자 쉬다가 밤 늦게 11시경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핼로윈데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재미있는 복장과 가면을 쓰고 장난을 하고 있었다. 1986년 시애틀에서 유학을 할 때는 핼로윈데이의 실상을 몰랐다.

 

가장 번화하다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보는 핼로윈데이는 미국인들의 커다란 축제였다. 시커먼 곰이 되어 다니는 사람, 무서운 가면을 쓴 사람, 이쁜 공주 옷을 입은 여자, 그중에는 한국 유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가끔 눈에 띄었다.

 

11월 1일 화요일 아침에 일어나 한인타운으로 갔다. P사장은 나 때문에 새벽부터 고생을 한다. 미안했다.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교포가 운전하는 차량을 타고 존 에프 케네디 공항으로 갔다. 공항 가는 길에는 가을이 내려 있었다. 단풍으로 물들은 가로수가 눈에 들어왔다. 은은하게 깊어 간 가을이 뉴욕을 덮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출발 시간이 2시간이나 남았다. 까다로운 검색절차를 통과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The Age of Anxiety 라는 책을 샀다. 저자는 퓨리처 상을 수상한 저널리스트인 헤인즈 죤슨(Haynes Johnson)이다. 1950년대 미국 맥카시선풍에 이어 2000년대 9.11테러까지 불안한 사회현상을 분석한 책이다.

 

면세점을 둘러보았으나 사고 싶은 물건은 하나도 없다. 예전에는 술에 관심이 많았으나 요새는 별로다. 대한항공 라운지에 들어갔다. First Class는 Lounge도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Business Class와도 구별되어 있다. 조용하고 사람도 거의 없다. 나는 그곳에서 방금 전에 산 책을 읽었다.

 

커피를 마시며 밖을 내다보았다. 뉴욕 공항이 눈에 들어왔다. 비행기는 계속해서 뜨고 내리고 있었다. 어디론가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 어디선가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 그 사람들 때문에 공항은 존재하고 있다.

 

예정보다 하루 앞 당겨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행기에 타고 나서 와인을 세잔 정도 마셨다. 기내식 후 누웠더니 피곤해서 그런지 잠이 들었다. 7시간 정도를 그냥 잤다. 불편했지만 그런대로 잘 잤다. 

59. Boston에서 범종을 만나다

 

 

 

이날 오전 2시가 되면 미국 전역에서 시계바늘을 오전 1시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과는 14시간 차이가 나게 된다. 그걸 모르고 있다가 한 시간 빨리 기차역으로 나온 것이다.

 

기차는 10시에 출발하게 되어 있었다. Amtrak을 타기 위해 2시간 반이나 기다려야 했다. 시간이 많이 남아 한인타운으로 가, 강서회관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김치찌개를 시켜 먹었다. 8불 95센트다. 아침이라 계란 후라이도 하나 서비스로 준다. 코리아타운은 40-2 west 32nd st, Broadway에 있다.

 

오전 10시 정각에 암트랙 비지니스 클래스를 탔는데도 보스턴까지 4시간 반이나 걸렸다. Stamford, Bridgeport, New Haven역 등을 순차로 지났다. 기차역을 지날 때마다 낙서가 많이 눈에 띄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써놓은 낙서는 예술적으로 보였다. 가을 햇살은 끊임없이 낙서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었다.

 

기차는 중간에 대부분의 역에서 정차를 한다. 뉴욕에서 보스턴까지 가는 기차에서 밖을 내다보니 가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은은하게 단풍이 들어 있는 주변 나무들이 운치를 더해 준다.

 

가을 풍경에 푹 빠져 기차여행을 즐겼다. 기차를 타고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것은 또 다른 맛이 있다. 버스나 비행기, 배와는 다르다. 기차가 지나가는 길이 대부분 산 밑이거나 바다 옆, 또는 기차길 양쪽으로 나무나 숲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기차는 가끔 바다 옆을 지나갔다. 미국 동부해안을 따라 가는 것이다. 바다는 가을색을 받아 은은해 보였다. 기차는 바다를 껴안고 달리고 있었다. 숲이 바다 사이에 있어 더욱 운치가 있었다. 그 숲에는 고요가 숨어있었다.

 

기차는 가끔 기적소리를 냈다. 그런 신호를 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내가 어렸을 때 기차길 옆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향수를 느끼는 것인지 모른다. 기차 안에서는 책을 보기는 어려웠다. 철로 때문에 계속 흔들렸다.

 

보스턴 사우스 스테이션에 내려 범종을 만났다. 나를 기다리느라고 2시간 넘게 고생했다. 범종과 함께 보스턴 브루크라인에 있는 일식당을 갔다. 브루크라인은 보스턴에서 가장 부유한 층이 사는 동네다. 그 일식당은 전에도 두 차례 가본 곳인데, 손님들이 여전히 많다. 식사를 한 후 컴퓨터매장에 들렀다. 범종이 컴퓨터를 샀다.

 

쉐라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재즈쇼를 보러 갔는데 이미 끝나서, 호텔 1층에서 스테이크로 저녁 식사를 했다. 다시 돌아와 푸르덴셜 빌딩 꼭대기에 있는 스카이라운지에서 맥주를 마셨다.

 

보스턴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YMCA 빌딩 네온사인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YMCA 부근에는 범종이 처음 살던 아파트도 있고, 현재 살고 있는 스튜디오도 있다. 노스이스턴 대학교 캠퍼스도 있다. 그곳이 주로 우리가 왔다 갔다 하던 곳이다.

 

범종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한국에서 온 여학생이 밤 늦게 숙소로 가다가 흑인 강도를 만났다. 강도가 갑자기 뒤에서 뒤를 돌아보지 말고, 핸드백만 달라는 말에 뒤를 돌아보았더니, 흑인은 벽돌로 여학생의 얼굴을 세게 때리고 핸드백을 빼앗아 도망갔다. 한국 유학생들이 모금을 해서 주었고, 현상금을 1만불이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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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맨해튼에서 체류하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실존의 고독을 느껴보기도 한다. 삶이란 그래서 외로운 것이다. 가까운 사람과 동행하면 고독이나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마음 줄 사람 없이 혼자서 여행한다는 건 그래서 특이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꼼짝 못하고 좌석에 앉아 14시간을 보낸 다음, 마침내 New York, John F. Kennedy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몇 차례 다닌 경험이 있어 낯익은 곳이다. 공항에서는 테러 때문에 지문을 찍고 얼굴 사진을 찍는다. 공항에는 P사장과 L부장이 나와 있었다.

 

함께 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교통체증이 만만치 않다. 거의 한 시간 걸려 맨해탄 힐튼호텔에 도착했다. 10월은 각종 국제회의가 많은 달이라서 뉴욕의 호텔은 무척 붐빈다. 좀처럼 빈방을 잡기 어렵다.

 

힐튼호텔에도 사람들이 참 많았다. 44층이나 되는 고층의 거대한 호텔이다. 방값도 하루 348달러다. 34층에 위치한 내 방은 높아서 전망이 좋다. 옆에는 쉐라톤 호텔이 있고, UBS 빌딩이 있다. 거대한 빌딩 숲 한 가운데 있다.

 

사람들을 만나 일을 보고 식사를 하러 갔다. 이태리식당인데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이태리 음식에 와인을 곁들여 식사를 했다. 고급 레스토랑인데도 맛은 잘 모르겠다.

 

내가 이태리 음식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른다. 술을 마신 다음 호텔로 돌아왔다. 시차가 바뀌어서 그런지 잠도 안 온다. TV를 켜니 객지의 외로움이 밀려든다.

 

아침에 일어나 사람들과 함께 부근에 있는 Breakfast Restaurant에 갔다.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식당이다. Diner라는 이름의 체인점이다. 푸짐한 양의 아침 식사를 준다. 저녁에는 코리아타운으로 갔다. 신라식당에서 갈비를 시키고 소주를 마셨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대부분 유학생으로 보였다.

 

한인타운은 별로 넓지 않다. 금강산 식당이 있고, 그 옆에 Stanford Hotel과 신라 식당이 있다. 몇 군데 헤어숍이 있고, 대부분은 식당들이다. 여행사도 있다. 맨해튼 브로드웨이 7번가 저녁 시간은 항상 인파로 북적인다. 150 이상의 인종이 모여 있다는 맨해튼은 인종 전시장으로 불린다. 늘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다.

 

브로드웨이에는 대형 규모의 극장들이 많다. 브로드웨이 7번가와 42번가가 교차하는 지점에 타임스스퀘어가 있다. 2004년 3월에는 한국의 '난타'가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졌다. 대단한 일이다.

 

맨해탄 한 복판을 구경하면서 호텔까지 걸어왔다. 타임스퀘어 부근의 건물에 삼성전자 옥외광고판이 빛나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브로드웨이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핼로윈데이 이틀 전이라 사람들은 몹시 들떠있는 분위기였다. 길거리에는 노숙자들이 담요를 덥고 누워 있었다. 차가운 세멘바닥에 아주 불편한 자세로 누워서 잠을 자고 있다.

 

10월 30일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방에 있는 시계와 내 손목시계가 한 시간 차이가 있었다. 이상했다. 휴대전화를 보니 역시 손목시계와 한 시간 차이가 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보스턴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호텔 후론트 데스크에 와서 물으니 정확한 시간은 휴대전화에 있는 시간이 맞는다고 했다.

 

뉴욕시내에 있는 기차역에 도착하니 7시반이었다. 오늘부터 서머타임(Day light savings time)이 해제되어 한 시간 빨라진 것이었다.

57. 미국 출장을 다녀오다

 

 

 

사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일기는 보관하기도 간단치 않다. 블로그에 저장해 놓으니 아주 편하고, 수시로 수정 보완도 가능하다. 블로그에 시와 수필을 써보았다. 내가 블로그를 활용하지 않았더라면, 시를 쓰는 일을 완전히 중단했을지도 모른다.

 

2005년 4월부터는 등산을 열심히 했다. 산악회에 가입하고, 시간이 나면 서울 근교 청계산, 북한산, 검단산 등을 찾았다. 미사리 뚝방길도 자주 갔다. 그래서 걷는 일에 자신이 생겼다. 예전에는 조금이라도 걸으려면 귀찮고 힘이 들었는데, 등산에 본격적인 취미를 갖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2005년 9월 25일 경주로 가서 보문관광단지를 한바퀴 돌고나서 불국사로 갔다. 토함산불국사라고 씌어 있다. 토함산이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 같다. 절을 둘러보았다. 관광객들이 많다. 불국사 주변에는 나무들이 아주 좋다. 입구에는 벚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불국사는 신라 23대 법흥왕 15년에 창건되었다. 현 석조물은 경덕왕 때 김대성에 의해 조성되었다. 다보탑은 국보 20호이고, 삼층석탑은 국보 21호, 연화칠보교는 국보 22호, 청운백운교는 국보 23호, 비로자나불은 국보 26호, 아미타불은 국보 27호다. 불국사 입장권 뒷면을 보니, 법구경 글귀가 쓰여져 있다. '악한 일을 하지 말고 선한 일을 두루 행하여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 법구경 183번)‘

 

석굴암에 갔다. 차가 매우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그런지 주차장에서 석굴암까지는 15분 정도밖에 안걸린다. 주차장에서 석굴암에 가는 길이 경치가 참 좋았다.

 

2005년 10월 28일 금요일 오전 9시 반경 인천공항으로 갔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말과 달리 평일은 비교적 덜 붐빈다. 공항 서점에서 공지영 작가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소설을 샀다.

 

대한항공 Lounge로 갔다. 비행기는 11시 30분경 이륙했다. 뉴욕까지는 14시간 걸린다. 예전에는 알래스카 공항을 경유하거나 로스앤젤레스에서 환승을 했는데 이번에는 직항노선이다.

 

비행기 안에서 소설을 다 읽었다. 아주 재미있다. 자살을 몇 차례 시도했던 여자 주인공이 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를 만나러 다니면서 느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소설에서 사형수는 끝내 사형집행을 당한다. 뉴욕까지 가면서 완전히 소설에 몰입했다. 작가와 함께 생각하고 느끼면서 14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지루함을 달랬다. 작가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옆 좌석에는 뉴욕에 사는 재미교포가 앉았다. 중국 출장을 3주간 다녀오는 길이라고 한다. 이런 저런 대화를 했다. 낯선 사람과 옆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피곤하다.

 

비행기 안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14시간을 혼자 앉아 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번 출장은 First Class로 가는 것이었는데, 약간 좌석이 편하다고 해서 비행시간이 고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56. 금강산 만물상에 오르다

 

 

 

2004년 10월 법무법인 태일은 종래 있던 영포빌딩에서 부근에 있는 태흥빌딩으로 이전했다. 태흥빌딩은 서초역 부근에 있는 신축건물로서 역에서 가깝고, 새 건물이라 훨씬 좋은 여건이었다. 3개층을 얻어 사무실로 인테리어 작업을 하고 이사를 했다.

 

2004년 12월에는 '억울한 뇌물혐의 이렇게 벗어라' 라는 책을 출판했다. 출판은 청조사에서 맡아 주었다. 2004년 말경부터 검경수사권조정협의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매주 월요일 오후 회의를 했다.

 

2004년 12월 18일 나는 금강산 만물상 정상에 올랐다. 금강산은 정말 아름다웠다. 107구비나 된다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처음부터 매우 가파른 길이었다. 조금 올라가니 기암절벽이 나타났다. 일만이천봉이 눈앞에 펼쳐졌다.

 

황홀한 느낌이었다. 내 생애에 금강산 경치를 구경하다니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감쌌다. 맑은 공기를 쐬니 오장육부가 다 시원하다. 산꼭대기에 서서 맞는 시원한 바람! 가슴 속에 남아있는 찌꺼기가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세상의 모든 거짓이 짓밟혀 사라지는 곳이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거짓을 벗어던지고 진실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 것 같았다. 만물상은 나이 들어서는 올라가기가 힘든 코스였다. 가파른 철계단을 수직으로 올라가는 것이 위험해 보였다. 힘들게 등산한 만큼 보람도 컸다. 입구에 내려와 들이킨 북한 막걸리 맛도 별미였다.

 

2005년이 되었다. 새로운 한 해를 맞는다는 건 무척 설레는 일이다.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 속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무슨 일을 더 해야 할 것인가? 사실 모든 일을 하고 안 하고는 자신이 혼자 결정할 일이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 누가 꼭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없다. 강요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인간의 의지, 자유의사가 중요성을 갖는 이유가 있다.

 

2005년 1월 중순경 기사가 그만 두었다. 1998년 8월부터 기사를 두었는데, 오래 해 보니 기사가 별로 필요 없었다. 마침 근무하던 기사가 개인 사정으로 그만 둔다고 하기에 더 이상 기사를 두지 않기로 했다.

 

기사 없이 혼자 운전하고 다니면서 자유롭게 지내고 싶었다. 그랬더니 편한 점도 많았다. 불편한 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참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7년 동안 기사도 많이 바뀐 것 같다.

 

2005년 3월 우연히 인산재(TOSH)라는 블로그를 방문하였다. 그 블로그에 내가 쓴 시 '보이지 않는 정'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다. 보라색 바탕에 시를 올려놓았는데, 글들이 한 줄씩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감격했다. 내가 쓴 보잘 것 없는 시를 다른 사람이 블로그에 올려놓은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고마웠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도 주위 사람들에게 방법을 물어 내 개인 블로그 '가을사랑'을 만들었다. 그런 계기가 없었으면, 지금까지 블로그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일이란 다 그런 우연 속에서 필연이 이루어지고, 인과관계가 맺어진다. 블로그는 내게 많은 의미를 갖게 해주었다. 그후 가을사랑이라는 블로그에 공을 많이 들였다. 수많은 글을 써서 올렸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일을 대부분 기록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55. TV생활법정 재판장을 담당하다

 

 

 

어머니 등에 엎혀 다니던 일도 기억난다. 할머니가 많이 업어주셨던 기억도 난다. 누님들이 업어주던 기억도 있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생활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옆에 계셨다.

 

집이 작았기 때문에 좁은 공간 속에서 밀착된 삶을 지냈다. 대학교 들어가 잠시 떨어져 있다가, 나중에 결혼해서 분가할 때까지는 늘 어머님께서 해주시는 밥을 먹고 살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연탄불을 갈아야 했고 밥을 해야 했다. 옷을 빨아 입혀야 했다. 그 평생에 걸친 노고를 어떻게 따지랴. 눈물이 날 정도다. 함께 어려운 시절 고생을 해서 더욱 그렇다.

 

어머님은 글을 모르셨다. 단순하셨고, 가식이 없었다. 배운 사람과 달리 꾸밈이 없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것이었다. 비교적 웃음이 많으셨다. 아주 열심히 사셨다. 자식들을 위한 헌신적인 삶이었다.

 

어렸을 때 포천 산골로 시집오셔서 농사를 지으면서 사셨다. 나중에 대전으로 내려가 제재소를 하실 때에는 그래도 사장 부인이었다. 사업이 기울어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이런 저런 고생을 많이 하셨다. 인생의 부침이 심했다. 일을 많이 하셔서 손이 늘 거칠게 터있는 상태였다.

 

2002년 음력 7월 13일 돌아가셨다. 어머님께 입은 은혜를 다시 기려본다. 생전에 못다한 효도를 마음 속으로 안타깝게 느낀다.

 

화경은 2003년 12월 25일 리츠칼튼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황승용이다. 호적은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고상리 476번지다. 2004년 2월 14일 혼인신고를 했다.

 

화경 생일은 9월 19일이다. 주은이는 분당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그때 병원에 가서 주은이를 안고 상일동으로 왔다. 차가 흔들릴까봐 노심초사했다. 그야말로 갓 태어난 어린 아이였다. 방바닥에 이불을 깔아놓고 뉘어놓았다. 아이는 가만히 자고 있었다. 생명이 어떤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그후 3년이 지나 둘째가 태어났다. 주혜는 11월 12일이 생일이다.

 

2005년 1월 중순, 황주은이 백일을 맞았다. 첫 손녀 백일이다. 세월이 빠르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워커힐 중식당에서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했다. 추운 날씨에 백일이 된 주은이는 사람들에게 안겨 다니면서 바깥 구경을 했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하고 대견하다.

 

2004년 가을, KBS 2TV에서 진행하는 ‘생활법정’ 프로그램에서 재판장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최초 위 프로그램을 만들었을 때는 황산성 전 환경부장관님이 단독판사 형태로 혼자 진행하였다.

 

내가 맡았을 때부터는 3인의 합의부를 구성하였다. 내가 재판장을 맡았고, 최태형, 이길년 변호사가 배석판사를 맡았다. 변호사는 최창호 교수, 유인경 기자가 맡았다. 최윤경 아나운서가 진행을 담당했다.

 

매주 목요일 오후 방송국에서 모여 사건의 내용과 중요 쟁점 등을 정리하고, 토요일 12경 다시 모여 녹화를 했다. 녹화 시간은 최소한 2시간 내지 3시간이 걸렸다. 매주 방송이 되는 프로였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소요되었다. 전국적으로 방송되는 생활법정 프로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다.

54. 사법시험 출제위원이 되다

 

 

 

서초동 영포빌딩에서도 기존에 나 혼자 사용하던 403호실과 405호실을 합쳐서 넓혔다. 영포빌딩은 내가 맨 처음 개업할 때부터 있던 건물이다. 처음 나는 405호실을 얻어 사용하다가 그 후 403호실로 옮겼다.

 

그러다가 두 개의 호실을 얻어 넓혔다. 그 후 우리 법인은 마포에 서부사무소를 개설했고, 경기도 광주시청 앞에 광주분사무소를 개설했다. 서초동 본사무소에서도 영포빌딩의 401호, 505호, 301호, 302호를 얻어 계속 넓혀 나갔다.

 

2001년 12월 19일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 홍만표 검사는 신광옥 전 법무부차관을 소환해 조사했다. 나는 신광옥 전 법무차관의 변호인으로서 활동했다. A당 당료 출신인 B로부터 C에 대한 금감원 감사 및 사직동팀 내사와 관련한 부탁을 받고 돈을 받았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고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당시 나는 변호인으로서, "S 전 차관은 일관되게 돈 받은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B씨가 S 전 차관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변론했다.

 

2002년 제43회 사법시험 1차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나는 형법출제위원으로 위촉되어 문제를 출제했다. 물론 문제은행식이었다. 2002년 7월 10일 수요일 오후 2시에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성전환자의 호적변경’에 관한 공청회가 개최되었다. 한나라당의 김홍신의원과 새천년민주당의 송영길 의원이 주최한 공청회였다. 나는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문유석 판사, 이경주 교수, 박영률 총무, 정은기 법제이사, 이석태 변호사 등도 공동토론자로 참석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특별하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항상 잘 되라고 마음속으로 빌어주시던 어머니다. 태어나서 아주 어렸을 때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가장 멀리 태어난 시점부터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두세살 때까지의 일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나중에 말로 들었을 뿐이다. 3-4살 정도부터 기억이 나기 시작한다. 

53. 법무법인 태일을 설립하다

 

 

 

드디어 대망의 2000년이 밝았다. 일천년대를 살다가 사람들은 이천년대를 생애에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2000년이 되면서 사람들은 모두 감격에 들떴다. 새로운 천년대를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였다.

 

나 역시 그랬다. 새로운 포부와 새 삶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개인사무실을 운영하다가 법무법인을 설립하기로 했다. 법무법인은 당시 최소한 구성원이 5명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뜻이 맞고 이해관계가 맞는 변호사 5명을 모으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소 잘 알고 있는 선배인 나종태 변호사님을 만났다. 법인을 설립하겠다는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얻었다. 그래서 다른 변호사 3명을 추가로 섭외하여 법무법인 태일을 설립했다.

 

법무법인 태일의 법인등록번호는 110246-0005065, 개업년원일은 2000년 7월 1일, 등록번호는 214-86-62026, 업태 서비스, 종목은 변호사이다. 처음에는 서초동 주사무소와 여의도 분사무소를 만들어 나는 여의도 분사무소에서 주된 일을 했다.

 

여의도 분사무소는 기업금융업무, M&A, 기업회생지원업무, ABS발행지원업무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서훈 회장이 운영하는 대일재무자문그룹과 제휴하여 일을 했다. 그 재무자문그룹은 회계법인, 법무사법인, 감정평가법인 등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재무자문일을 하고 있었다.

52. 남녀차별개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

 

 

 

1999년 가을부터 중국 대련시에 다니기 시작했다. 대련시에서 건축한 쌍흥코리아패션타운상가에 대한 관리회사 고문변호사로 위촉받아 법적 문제를 검토하고 사업지원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대규모 건물이 지어졌고, 의류패션사업을 하는 상인들이 분양을 받도록 법적 자문을 해주었다.

 

그러나 중국사업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련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쌍흥빌딩은 주변 환경조성이 늦어져 분양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해외에서 비지니스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했다.

 

나는 주말이면 대련으로 갔다. 비행시간이 1시간밖에 되지 않아 마치 제주도를 다니는 기분이었다. 대련시의 바닷가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대련을 다닐 무렵, 나는 미국에 있는 교포와 함께 블루클럽 차이나와 블루클럽 아메리카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 역시 이런 저런 이유로 재미를 보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정부는 여성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구성되는 남녀차별개선위원회(위원장 한명숙 여성부 장관) 비상임위원 8명을 임명했다. 남녀차별개선위원회는 위원장과 상임위원인 이상덕 여성부 차별개선국장 외에 비상임위원 8인으로 구성되었다. 비상임위원으로는 김영란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김윤성 서울지검 총무부장, 차명희 전 여성특위 사무처장, 정강자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 조옥라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여상규, 김주덕, 황덕남 변호사가 임명됐다.

 

1999년 사단법인 한국산업재산권보호협회 활동에 참여했다. 동대문시장에서 원단장사를 하는 최정수 사장의 의장권사건을 맡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의장권자의 법적 보호가 매우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장권을 포함한 산업재산권보호협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런 제안에 따라 뜻을 같이 하는 회원들을 모아 1999년 12월 6일 사단법인 한국산업재산권보호협회를 특허청장으로부터 허가번호 제99-3호로 설립허가를 받았다.

 

사단법인의 목적은 산업재산권 침해소송 당사자에게 무료변리 및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소송지원과 구체방안을 강구하고, 권리침해와 권리구제 사례자료를 수집 및 조사 분석하여 산업재산권의 보호에 장애가 되는 각종 제도와 자료를 정부에 제공하는 등 산업재산권침해 구제제도 발전에 기여함과 동시에 정의로운 산업재산권 제도를 실현시키는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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