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이종기 변호사 사건을 변론하다

 

 

 

변호사 개업을 한 1998년 가을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바쁜 시기였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된 형사사건을 많이 맡아 변론을 했다. 특히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 사건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사건 관련인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 미국과 일본, 카자흐스탄 등을 여러 차례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다.

 

공무원 신분으로 있을 때는 외국에 한 번 나가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출장갈 일이 있어야 해외여행이 가능했다. 그때마다 일일이 상부에 보고해야 했다. 변호사가 되니 내 마음대로 외국에 나갈 수 있었다.

 

특히 중국이나 일본은 1박 2일로 다녔다. 미국에도 다녔다. 태국에도 다녀왔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미국 변호사와 회의도 했다. 의뢰인은 출장가는 변호사를 위해 항공권도 비즈니스 클래스로 제공했다.

 

몇 건의 커다란 형사사건 변론을 하다 보니 1998년 가을은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겨울이 왔다. 그러던 중 1998년 12월에 대전에서 이종기 변호사 사건이 터졌다. 그 전에 의정부에서 어떤 변호사사건이 발생한 후 연이어 터진 이 사건의 위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법조비리 전반으로 사건이 확대되었다.

 

모든 법조인이 여론으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이 사건이 진행되면서 변호사는 사회에서 아주 나쁜 이미지로 부각되었다. 마치 판검사와 유착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브로커로 비추어졌다. 나는 변호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웠다. 변호사 뱃지를 달고 다니기도 민망스러웠다.

 

대전지검 부장검사 출신 이종기 변호사의 사무장이 수임내역서 등 비밀장부를 폭로함으로써 수사가 시작되었다. 현직 판ㆍ검사를 포함해 검찰과 법원 직원, 경찰관 등 300여명이 변호사에게 사건을 알선하고 소개비를 받았으며 검사 25명도 금품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검사장급 2명을 포함, 검사 6명이 사표를 내고 7명이 징계를 받았다. 판사 2명도 사표를 냈다.

 

우연히 서울구치소에서 이종기 변호사님을 만나 접견을 하고, 그에 대한 변론을 하기로 했다. 많은 변호사들이 변호인으로 선임계를 제출했지만, 제대로 변론을 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나는 기꺼이 이종기 변호사님에 대한 변론을 자청하고 선임계를 낸 다음 대전에 가서 공판기일마다 변론을 했다.

 

당시 정해원 변호사님과 둘이서 주로 변론을 했다. 6개월에 걸친 변론 끝에 이종기 변호사님에 대해 대전지방법원에서 무죄판결이 선고되었다. 나는 1심판결선고시까지만 변론을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그후 항소심에서 유죄판결로 변경되었고, 대법원에서도 유죄로 확정되었다. 이종기 변호사님은 1952년생으로 사법연수원 6기로 수료했다. 2016년 4월 9일 세상을 떠났다.

 

1999년 3월 5일 김재춘 회장님 서울대공원부지 관련 사건을 맡았다. 형사와 민사사건을 맡아 2013년까지 소송수행을 했다. 이 과정에서 2003년 1월 16일 서울고등검찰청에서 피고소인에 대한 위증사건에 관하여 공소제기명령이 내려졌다.

50. 형사사건을 주로 취급하다

 

 

 

변호사로 일하게 되니 바빠졌다. 모든 걸 내가 다 해야 할 입장이었다. 직원은 사무장 한명과 여직원 한 명, 기사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세 사람 밖에 안 되니 무슨 회의를 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을 옆에서 보조해 주는 정도였다. 모든 건 내가 하기에 달려 있었다.

 

초기에는 주로 형사사건을 취급했다. 전문분야이기도 했다. 구속된 사람들을 석방시키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구속된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운 입장에 놓여 있다. 갑자기 구속되어 육체적으로 고통 당하고,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된 상황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모든 걸 변호사에게 의지하고 있다. 가족들의 기대도 마찬가지다. 변호사가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사건 관계인들을 만나 상의하고, 구치소에 가서 피고인들을 접견하면서 사건을 논의하고, 법정에 나가 변론을 하고 나면 사무실에서는 기록을 볼 시간이 없다. 매일 기록을 가지고 집에 들어와 검토하고 서류를 작성했다. 다른 사람을 시킬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몹시 힘이 들었다. 더욱이 처음 해보는 업무라 일을 배워야했기 때문에 더 힘들게 느껴졌다.

 

1998년 9월부터 본격적인 변호사 업무를 시작하게 된 나의 생활은 많이 달라졌다. 새로 시작하는 업무를 충실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생활을 절제해야 했다. 저녁 시간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가급적 자제했다. 집에 와서 사건 기록을 보고, 서면 작성을 하는데 시간이 많이 들었다. 혼자서 어떻게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골똘히 생각했다.

 

힘은 들었지만 재미있었고 많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사건에는 상대방이 있다. 그 상대방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형사사건에는 검사가 상대방이고, 민사사건에는 반대편 당사자나 그의 변호사다. 여러 가지 전략을 세워야 하고 열심히 싸워야 한다.

 

그래서 이기면 쾌감은 대단하다. 그 맛에 변호사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어려운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보람이 느껴진다. 본의 아니게 억울하게 구속된 사람을 석방해 주면 아주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변호사로서 법정에 들어가거나 구치소에 가는 경우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때마다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끼게 되었다. 그런 감정과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하나씩 기록했다. 구속되어 있는 사람들이 빨리 석방되기 위해서는 변호사와 피고인, 가족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연구했다.

 

변호사 초기부터 써놓은 것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 '이렇게 해야 빨리 석방된다'라는 책이다. 이 책을 출간해서 사건 당사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석방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 책은 전국의 많은 교도소와 구치소에 들어가 수감자들의 애독서가 되었다.

 

검사나 판사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수사나 재판 업무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가를 심각하게 깨달아야 한다. 사법정의의 올바른 실현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을 본 피고인들이 나에게 편지를 많이 보내왔다.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내용이고, 자신의 억울함을 밝혀 달라는 취지였다. 나는 그들의 눈물어린 편지를 보면서, 정말 우리 사회에는 억울하게 구속되고 처벌받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49. 변호사 개업을 하다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대체로 다른 변호사들이 그 동안 해 온 것처럼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중간 규모로 개업식을 하기로 했고, 개업인사장도 아주 제한된 범위에서 돌리기로 했다.

 

문제는 신문광고였다. 일간지에 적은 분량 1회 광고게재하는 것이 천만원이나 드는 것이었다. 오래 동안 봉급생활을 하던 나로서는 큰 돈이었다. 지금도 비싼 광고비가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두 군데에 개업인사광고를 했다.

 

요새는 변호사 개업인사가 예전보다는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개업소연도 생략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개업인사장도 다 돌리는 건 아니다. 변호사 업계 환경이 많이 달라져 가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합리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새로 로펌을 만드는 변호사들과 함께 참여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모든 문제가 쉽지는 않았다. 최종적으로 로펌 대표와 상의해서 단독개업 1년 후에 구성원으로 합류하기로 했다. 그래서 신문광고에도 그 로펌과 제휴해서 변호사 업무를 한다고 게재했다. 나는 일단 서초동에 단독 사무실을 내고 개인 변호사사무실 등록을 했다.

 

사무실을 얻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몇 군데 빈 사무실이 있었으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다 장단점이 있었다. 당시 직원으로 함께 일하기로 한 이원일 과장과 함께 돌아다녔다.

 

조직 속에 있던 사람이 밖에서 개인 신분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초라한 생각이 들었다. 가구를 구입해야 했고, 사무용품도 마련해야 했다. 직원을 구하는 것도 어려웠다.

 

마침내 서울 서초구 서초동 1709-4 영포빌딩 405호실을 계약했다. 조병길 변호사님이 사용하던 사무실인데 그 분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고 해서 얻게 되었다. 인테리어는 아주 간단하게 했다. 집기를 들여놓고 사무실을 꾸며 놓으니 기분이 좋았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 자기 공간이 없다. 인사이동에 따라 수시로 사무실을 옮겨야 한다. 한 군데 머물러 있지 못한다. 그런데 이제는 내 개인사무실이니 안정이 된 것이다. 그 점이 좋았다.

 

1998년 8월 26일 변호사등록을 하고, 변호사 신분증을 받았다. 오랜 세월 공무원 생활하다가 공무원 신분증을 반납하고, 변호사 신분증을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로서 개인사업자등록을 했다. 단독으로 개업을 한 것이다.

 

9월 16일 변호사 개업식을 했다. 이른바 개업소연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축하를 해주었다. 인사말씀을 드렸다. 앞으로 변호사로서 돈욕심 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겠다는 취지였다. 나중에 개업식 장면을 사진첩으로 만들어 받았기 때문에 지금도 가끔 그 앨범을 보면서 개업 긴장했던 모습을 보곤 한다.

 

많은 가까운 분들의 얼굴이 함께 들어있다. 사진은 그래서 좋다. 살아가면서 오래 돼서 잊고 있었던 기억을 다시 되살린다. 함께 마음을 통했던 좋은 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새기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개업을 하자,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범죄를 수사하고 처벌하는 일을 하다가 갑자기 피고인을 변론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얼떨떨했다. 구치소에 찾아가 피고인을 접견하는 일도 어색했다. 법정에 들어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검사를 바라보는 것도 이상했다. 

48.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근무하다

 

 

그후 공판부장검사로 발령이 났다. 사무실은 법원 서관 12층에 있었다. 공판업무를 연구하는 작업을 했다. 공판부에는 부부장검사와 평검사가 모두 14명이 있었다. 현재는 공판1부와 공판2부로 나누어졌으나 내가 근무할 때만 해도 하나의 공판부가 있어 검사 수로는 전국에서 제일 많은 부였다. 내 방에서 공판부검사회의를 하려면 방이 꽉찼다. 백창수 부부장검사가 같이 근무를 했다.

 

나는 공판부장으로서 공판업무에 관한 업무지침서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각 검사들에게 하나씩 연구과제를 부여하고 광범위한 자료수집작업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1998년 8월 10일, ‘공판 및 형집행실무’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인쇄는 도서출판 성민기업에서 맡았다.

 

편집위원을 보면, 김주덕 부장검사, 신배식 및 백창수 부부장검사, 문규상, 고범석, 손영기, 김호정, 허태욱, 최성진, 조상철, 변창훈, 최성남, 임관혁, 백재명, 추원식, 홍연숙 검사다. 서희석 공판사무과장, 고영식 및 김길수 검찰주사, 오형묵, 송락관 검찰서기도 자료정리를 해주었다.

 

변창훈 검사는 이때 초임검사였다. 사법연수원 23기다. 군법무관을 마치고 서울지검 초임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2017년 11월 6일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받고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서초동 어느 변호사 사무실이 있는 건물 4층에서 투신했다. 그리고 병원으로 옮겨져 사망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조사 받을 때에도 서울고등검찰청 현직 검사 신분이었다.

 

사람의 운명은 하루 아침에 바뀌게 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에 따라 진로를 바꾸는 것이 불가피해진다. 그것은 숙명이었을까? 아니면 예정된 수순이었을까? 나는 지금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1998년 7월경 그동안 사업부진으로 고생을 하던 장인 회사가 부도났다. 대표이사인 장인은 형사고소를 당했다. 약속어음을 발행해 주었는데 부도 처리되었고, 어음소지자는 사위인 내가 현직 검사로 있기 때문에 사건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진정서를 제출했다. 당시 IMF 직후라 회사 부도사건이 급증했다. 검찰에서는 어음이나 수표부도 사건에 대해 대부분 불구속처리를 하던 때였다.

 

장인이 부도가 나서 형사고소를 당하자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사표를 낼까 고민했다. 변호사를 잘 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일주일 정도 고민을 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변호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나중 문제고, 일단 사표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런 대책 없이 그냥 사표를 내기로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사람과 상의하지도 않았다. 일단 사표를 내려고 마음먹으니 사무실에 나가도 이상했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하루하루 견디기가 어려웠다.

 

박순용 검사장님께 사표를 제출했다. 검사장님은 왜 사표를 내느냐고 했다. 처가가 부도난 것이 무슨 사유가 되느냐고 했다. 나는 일단 결심했다고 말씀드리고 사표를 수리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사표는 수리되었다.

 

1998년 8월, 16년 간의 검사생활을 마치고 변호사로 새 출발을 했다. 오랜 조직생활에 익숙해 있던 내가 단독사무실을 차려 운영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사실 그 당시는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개업을 했다. 지금처럼 변호사 업무가 어떤 것인지 많이 알았더라면 꽤나 망설였을 것이다.

 

개업식을 할 것인지 고민했다. 조용히 변호사 업무를 하면 되지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 요란을 떠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생각되었다. 변호사 개업 준비를 담당하는 회사가 있었다. 그 회사에서는 개업식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업인사장을 돌리는 것도 꼭 해야 한다고 했다. 

47. 서부지청에서 근무하다

 

 

 

‘가을사랑’ 시집은 김홍욱 사장이 대표로 있는 육서당에서 출간되었다. 초판은 1995년 10월 10일, 2판 인쇄는 1996년 2월 5일 하였다. 김순지 소설가가 ‘시인의 감성, 김주덕 노트의 둘째장’이라는 제목으로 시평을 써주었다. 나중에 이숙영 아나운서가 ‘가을사랑’ 시집을 낭송해서 카셋트 테이프로 만들었다. 테이프를 1,000개 제작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년 간의 대검찰청 환경과장 근무를 마치고, 1996년 8월 서울지방검찰청 서부지청 형사제3부장검사로 발령이 났다. 형사3부는 특별수사와 공안업무를 담당했다. 당시에는 서부지청에 부가 3개밖에 없었다.

 

초임검사 시절에 서울지방검찰청에서 함께 근무했기 때문에 잘 아는 신광옥 지청장님과 최효진 차장검사님을 모시게 되었다. 형사3부에는 4명의 검사가 있었다. 모두 열심히 일을 하는 검사들이었다. 형사 1부장은 김영철 부장검사님, 형사 2부장은 신언용 부장검사님이었다.

 

지청장님은 리더십이 강하고, 사려가 깊은 분이었다. 그분을 지청장으로 모시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분이다. 나중에 그 분은 검찰에서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법무부 차관까지 지냈다.

 

방이동 집에서 마포 공덕동 사무실까지 출퇴근하는 것은 힘들었다. 차를 가지고 다니자니 운전하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출퇴근시간에는 차가 막혔다. 그래서 주로 지하철을 이용했다. 지하철 5호선을 올림픽공원역에서 타고 다녔다.

 

모의총포단속과 불법음반단속 등을 중점적으로 했다. 모의총포단속은 김용호 검사가 했다. 형사3부장 때 본청 검사장인 최환 검사장님이 지청을 방문하여 신광옥 지청장님과 함께 연세대학교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 다음 인사 때 형사1부장검사가 되었다. 재경지청에서 또 다시 같은 지청 부장으로 근무하는 것은 안 좋은 인사였다. 그 다음에 본청 부장으로 못가면 옷을 벗는 경우가 많았다. 신광옥 지청장님도 나와 똑 같이 지청장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고 눌러앉았다.

 

서부지청 근무를 마치고 1997년 인사 때 서울지방검찰청 총무부장검사로 발령이 났다. 총무부장검사는 청 전체의 업무를 총괄하는 부서다. 각 부의 업무를 총괄해서 취합하는 일도 한다. 매우 바쁜 자리였다.

 

당시 인사권자는 김종구 법무부장관님이었다. 대전고등학교 12년 선배이며, 서울동부지청에서 고등검찰관으로 근무할 때 지청장으로 모셨다. 그후 김종구 선배님이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근무할 때 나는 대전고등검찰청 검사였다.

 

총무부장은 검사장실에서 차장검사 세 사람, 사무국장과 함께 하는 회의에 참석한다. 검사장은 사법시험 8회인 안강민 검사장님, 차장검사는 이범관 1차장님, 김진환 2차장님, 정홍원 3차장님이었다. 나는 청 전체의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업무의 방향을 잡는 기능을 해야 했다.

 

전체 부국장회의나 전체직원조회, 부과장회의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했다. 이범관 1차장님은 나중에 여주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정홍원 3차장님은 후에 국무총리를 지냈다. 김진환 2차장님은 서울지검장을 지냈다. 김진환 차장님 때문에 내가 대한공증인협회 부회장으로 일을 하게 되는 인연도 있다.

 

정기국회 국정감사 때는 1달 정도 매일 야근을 하면서 총괄적인 준비작업을 했다. 총무부장을 맡고 있던 중에 테니스를 치다가 다리를 다쳐서 한동안 불편한 상태로 근무를 하기도 했다.

46. 대전지방검찰청 특수부장으로 근무하다

 

 

1992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1993년 3월 대대적인 검찰 인사가 있었다. 고검장으로 모시던 김도언 고검장님이 대검 차장검사로 발령이 났다. 김종구 대전지검장님이 검찰국장이 되었다. 대전고검장에는 이건개 서울지검장님이 오시고, 고검차장에는 심재륜 검사장님이 오셨다. 김대권 선배와 나는 심재륜 고검차장님을 모시고 매일 저녁 식사를 했다.

 

1993년 3월 나는 대전지방검찰청 특별수사부장검사로 발령을 받았다. 매우 중요한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당시 토착비리를 수사한다고 해서 특별기획수사활동을 벌였다. 검사 4명과 수사관 3명을 데리고 기획수사를 했다. 6개월에 걸친 수사활동에서 많은 수사성과를 거두었다. 황상구 검사장님, 제갈융우 차장님, 고영주 형사1부장님, 이병기 형사2부장님과 함께 근무를 했다. 황상구 검사장님은 1939년생이며, 사법시험 2회 출신이다. 초임을 광주지검에서 시작하고, 경주지청 검사를 거쳐, 나중에 대구고등검사장을 끝으로 1995년 개업하셨다. 황성욱 변호사가 아들이다. 2015년 돌아가셨다.

 

그 후 나는 대전지방검찰청 형사제1부장검사로 자리를 바꾸었다. 이때 검사장은 김상수 검사장님이었고, 장재 차장검사님, 정진호 형사2부장님, 최태원 특수부장님이었다. 그 자리에서 1년을 보낸 후 1994년 9월 인사 때 대검찰청 환경과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1994년 9월 대검찰청 환경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인사 직전에는 부산지검 특별수사부장검사로 발령이 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동안 3년 동안 제천과 대전에서 혼자 객지생활을 했던 상황이라 지방근무가 너무 고달펐다. 또 다시 지방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서울 지역 근무를 희망했다.

 

대검 청사는 서소문에 있었다. 검찰총장은 김도언 총장님었고, 차장은 송종의 차장검사님이었다. 형사부장은 공영규 검사장님이었다. 형사과장으로는 임승관 검사님이 있었다. 대검 형사부에는 형사과와 환경과가 있었다.

 

유성수 강력과장님이 함께 근무했다. 강력부에 있는 마약과장에는 문영호 검사님이 있었다. 김도언 총장님은 대전고등검찰청에서 모셨던 분이다. 공영규 검사장님은 그후 상일동 대림빌라로 이사 갔을 때 전부터 그곳에서 살고 계셨다. 나중에 법무법인 광장에서 근무하셨다.

 

환경과장은 환경범죄와 보건범죄를 전담하는 부서다. 평소에 관심이 있던 환경범죄를 전담하게 되어 매우 기뻤다. 환경범죄에 대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체계적인 환경범죄 단속방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환경범죄에 대한 철저한 단속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논의하기 위해 환경부 공무원과 많은 회의를 했다. 당시 많은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보건분야와 관련해서는 의약분업 관련 분쟁이 계속되었다.

 

환경전담검사제를 확립하고, 환경범죄단속방안을 구체화하여 일선 검찰청에 내려 보냈다. 일선에서 단속활동을 하는 환경전담검사와 수시로 연락하면서 단속 상의 문제점을 검토 보완했다. 1년이 지난 다음, 나는 대검 환경과장으로 그대로 유임되었다. 후임 형사부장으로는 김병학 검사장님이 오셨고, 형사과장으로는 전창영 검사님이 왔다. 같은 시기에 대검 강력부에는 박영수 강력과장님, 이병기 마약과장님이 함께 근무했다.

 

1995년 대검찰청 환경과장으로 근무하면서 미국에 2주간 출장을 다녀왔다. 조선일보에서 환경대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명동 안과에서 라식수술을 받았다. 또한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환경법으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45. 대전고등검찰청에서 근무하다

 

 

 

주말이면 서울로 올라왔다. 차를 운전하고 다니면서 좋은 경치 구경도 많이 했다. 청주에서 회의를 할 때면 제천 박달재를 넘어 다녔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교통이 좋아졌지만 그 당시에는 험한 산길을 넘어 다녀야 했다. 지청 안에 직원 숙소를 신축하는 공사를 했다. 공사업자 선정하는 문제로 골치가 아팠다.

 

제천지원에는 김용덕 지원장님이 있었다. 지역에서는 김대성 제천신문사 사장님, 박광동, 한수원 사장님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본청인 청주지검에는 노승행 검사장님 이광수 차장검사님, 김사일 부장검사님, 구본성 부장검사님 등이 근무했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충주지청 사무과장이 자신의 의붓딸과 그 남자친구에 의해 피살된 사건이었다.

 

오후에 노승행 검사장님께서 김사일 형사1부장님과 충주에 온다고 해서 함께 현장을 들러보았다. 처음에는 강도살인사건으로 신고가 되었다. 나중에 경찰 조사결과 의붓딸에 의한 살인사건으로 밝혀졌다.

 

1992년 8월 6일자로 대전고등검찰청 검사로 발령이 났다. 김도언 대전고검장과 차장을 모시고 김대권 선배와 함께 근무를 하게 되었다. 대구고검에는 김종길 검사, 조명원 검사, 광주고검에는 강충식 검사, 고조흥 검사 등이 발령났다.

 

고등검찰청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유능한 검사들을 고검에 배치한다는 방침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매우 실망스러운 인사였다. 좋은 보직을 다른 동기생들이 차지하고, 중간급 정도인 고검에 배치된 것이었다.

 

나는 법무부에서 동기생들보다 6개월 더 근무했다. 서울중앙지검으로 곧 바로 못 들어가고, 동부지청으로 발령받은 것도 불만이었다. 그런데 또 제천지청을 거쳐 대전고검으로 발령을 받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표를 낼까 생각했다.

 

서울지역에서 근무하다 사표를 내면 몰라도 제천지청을 끝으로 사표를 내고 개업하는 것은 어려워보였다. 당시 검찰1과장은 송광수 과장님이었고, 총장은 정구영 총장님이었다. 법무부장관은 김기춘 장관님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근무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 대전에 가니 관사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한 달 가량 모텔에서 생활하였다. 모텔 생활은 매우 불편했다. 식사도 그렇고, 짐을 제대로 가져다 놓을 수도 없었다.

 

개청이 된 후 여러 가지 업무를 맡아 바빴다. 항고사건도 처리해야 하고, 공판에도 관여해야 했다. 김도언 고등검사장님을 모시게 되었다. 차장은 주광일 검사장님이었다. 검사는 나와 김대권 선배 두 사람이었다.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생활하기에는 편했다. 심심하지도 않았다. 정장직 화백과 정상철 교수를 만나 맥주를 마셨다. 이재호 교수도 자주 만났다. 친구인 박경식 원장도 만났다. 처음에 관사는 선화동에 있었다. 아파트였다. 이종기 선배가 대전에서 개업을 하고 있었다.

 

김도언 고검장님을 모시고 퇴근하면 곧 바로 해동검도관으로 가서 검도를 배웠다. 검도는 매우 좋은 운동이다. 운동량도 무척 많다. 열심히 운동한 결과 검도 초단을 땄다. 당시 고검은 지검과 같은 건물을 쓰고 있었다. 선화동에 있었다.

 

이 무렵 제천에 있을 때부터 써오던 시를 모아서 대문사에서 시집을 출간했다. 제목은 ‘선화동 가을풍경’이다. 대문사는 친구 이형원 사장이 운영하는 출판사였다. 나의 첫 번째 시집이었다. 그리고 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틈틈이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44. 제천지청에서 근무하다

 

 

 

1991년 여름이었다. 서울동부지방검찰청에서 같이 근무하는 조동근 수사관 친동생 상가 문상을 가기로 했다. 조 수사관 친동생이 새벽에 집 앞에 있다가 지나가는 차에 치어 세상을 떠났다. 문상을 가는데 주말이라 승용차를 운전하고 가족과 함께 포항으로 향했다. 아는 지인 두 사람도 함께 내려갔다.

 

서울에서 대구를 거쳐 경주 IC로 빠져 나갔다. 경주에서 포항까지 산업도로를 타고 가던 중 갑자기 전방에 나타난 오토바이를 피하려고 급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차가 두 바퀴나 돌면서 도로 중앙에 정지했다. 아무리 핸들을 컨트롤하려고 해도 말을 듣지 않고, 저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 아주 생생하고 무척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차는 다행이 왕복 및 좌우로 다른 차량이 진행하지 않아 그대로 멈추어 섰다. 아무리 시동을 걸려고 해도 걸리지 않는 것이었다. 기어가 드라이브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정차 기어로 해서 시동을 걸어 차를 옆으로 뺐다. 그랬더니 앞서가던 일행 차량이 후진해서 다시 돌아왔다.

 

오토바이는 무단횡단하다가 내 차가 삑 소리를 내면서 돌고 있으니 그냥 가버린 것이었다. 다행이 반대 차선에서 오는 차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피해는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차를 도로변에 빼놓고 보니 오토바이를 끌고 길을 건너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생각을 하면 정말 아찔하다.

 

1991년 8월 제천지청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기관장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기관장은 달랐다. 전 직원들이 모인 가운데 취임식을 하고, 취임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았다. 해야 할 공식적인 일이 많았다. 외부에 참석해야 할 회의도 많았다.

 

지금까지 수사만 하던 때와는 전혀 달랐다. 검사와 일반 직원들의 업무를 지도 감독하고 결재를 해야 했다. 제천지청은 청주지방검찰청 지청으로서 제천시, 제천군, 단양군을 관할한다. 지청장이 되고 보니 매사에 신경을 써야 했다. 지역에서 눈에 띄는 자리에 있는 관계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지청장에게는 단독주택이 관사로 주어졌다. 의림초등학교 옆에 있다. 방이 세 개다. 서울에 가족을 두고 혼자 내려갔다. 간단한 짐을 가지고 관사에서 생활했다.

 

혼자 있으니 식사가 문제되었다. 아침은 토스트를 먹고, 점심 저녁은 주로 밖에서 외식을 했다. 일찍 퇴근해서 관사에 들어오면 썰렁한 기분이 들었다. 객지에 있는 외로움을 무척 탔다. 책을 읽거나 혼자서 사색을 했다.

 

단독주택은 불편하기도 했지만, 방범이 문제였다. 내 바로 앞에 지청장으로 근무했던 고영주 선배님이 있을 때에도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훔쳐갔다. 담에 쇠철망을 설치했지만 또 도둑을 맞았다. 나중에는 거실에 있는 큰 창문에 자바라까지 설치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있을 동안에는 더 이상 도둑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김남태 지원장님 관사에 도둑이 들어와 승용차를 훔쳐간 사건이 발생했다. 제천경찰서장이 총력을 다해 수사한 결과 며칠 만에 그 승용차를 찾고 범인을 검거했다. 그랬더니 그 범인 방에서 고영주 선배님 양복도 압수되었다.

 

제천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지역 사람들과 만나서 제천문화를 발전시키는 운동을 벌였다. 뜻 있는 사람들이 많이 동참했다. 제천시장을 비롯해서 기관장들도 동참했다. 지청장 관사 잔디밭에서 회의도 하고 저녁식사도 했다. 

43. 캐나다 출장을 다녀오다

 

 

 

1990년 6월 동부지원 앞에서 증인을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증인보복살해사건이었다. 조직폭력배 상호 간에 발생했던 이 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매우 컸다. 동부지청에서는 형사2부와 특수부 검사들로 수사본부를 설치했다. 그 수사본부의 실무책임을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나는 그날부터 법원 앞 여관에 방을 하나 얻어 놓고 20여일 동안 그곳에서 생활했다. 사건 해결의 중압감은 매우 컸다. 대검찰청 강력부장 송종의 검사장님이 동부지청 수사본부를 방문했다. 검사들이 열심히 수사를 해서 사건은 결과적으로 잘 해결되었다. 범인들을 모두 검거했다.

 

동부지청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아파트 재건축, 재개발 관련 비리사범에 대한 기획수사를 많이 했다. 가짜 상표단속도 많이 했다. 조동근 계장과 함께 근무를 했다. 워낙 성실하고 열심히 일을 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동부지청에는 테니스코트가 있어 가끔 테니스도 쳤다. 동부지청에서 함께 근무했던 검사들은 김종구 지청장님, 김상수 차장검사님, 김봉환 형사1부장님, 송인준 형사2부장님, 김각영 특별수사부장님이었다. 이광일 검사는 형사2부 소속 고등검찰관이었다.

 

1990년 겨울 같은 청에서 근무하던 이광일 검사가 운전을 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한 밤중에 사고 소식을 듣고 청으로 나가 사고 처리를 했다. 사고가 나던 당일 퇴근 시간에 이 검사 방을 들렀다. 마지막으로 본 그의 선한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평소에는 다소 무뚝뚝해 보였던 이 검사가 그날은 내가 그 방을 들르자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선배님, 오셨습니까?”라고 매우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평소와 너무 다른 모습이라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다.

 

장례식을 치룬 후 몇 달 후 검사들과 함께 이 검사 아파트에 가서 가족들을 위로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힘없이 살아가고 있는 부인 얼굴을 보니 너무 안타까웠다. 부인은 'TV에서 검사들이 나오는 모습을 보면 너무 억울하고 슬프다'고 했다.

 

1990년 11월 캐나다 출장을 다녀왔다. 11월 3일 토요일, 17시 22분 US -115 항공편으로 오타와에 도착했다. 숙소는 Four Seasons Hotel이었다. 저녁 7시 공사 주최로 만찬이 있었다. 11월 4일 일요일에는 오타와 시내 관광을 하였다.

 

11월 5일 월요일 오전 9시 20분 대사관으로 갔다. 10시부터 12시까지 오전 회의를 했다. 장소는 Lasalle Academy Building이었다. 오찬은 Serge April 캐나다 외무부 법규국장 주최로 하였다. 14시 30분부터 16시 30분까지 오후 회의를 한 다음 조창범 참사관 집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했다.

 

11월 6일 화요일에는 오전과 오후 회의를 마치고 저녁 7시 대사관저에서 대사 주최 만찬이 있었다. 11월 7일 저녁 7시 US 169편 항공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 측 대표단은 이봉구 조약심의관, 김진수 주 캐나다 대사관 2등서기관, 민경호 외무부 조약과 사무관, 백진현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와 김주덕 서울지검 동부지청 고등검찰관이었다. 캐나다에서는 Michael R. Leir, 외교부 법률자문국장, Donald Smith, David Allin, Michael Vien, Jacques Lemire 등이 대표단으로 참석했다.

 

지금은 대구 포항간 고속도로가 생겨서 서울에서 포항갈 때 경주를 거치지 않고 북대구를 지나 포항고속도로를 타고 간다. 예전에는 서울에서 포항 가려면 경주까지 가서 경주 포항 간 산업도로를 타야했다. 

42. 서울지검 동부지청에서 근무하다

 

 

 

홍콩을 거쳐 시드니로 갔다가 국내선을 타고 멜버른으로 갔다. 비행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힘든 여정이었다. 미국에서 1년간 유학생활을 한 다음, 공부한 국제형법을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호주는 영미법계 국가로서 이미 많은 나라와 범죄인인도조약을 체결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특히 영연방국가로서 일찍부터 영국의 중범죄인들을 호주로 보내 수용했던 역사적 경험이 있어 범죄인인도제도에 많은 경험이 있었다.

 

호주와 조약체결작업을 추진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나라도 국내법을 빨리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호주출장에서 돌아와 곧 바로 범죄인인도법 제정작업에 착수했다. 외국의 입법례를 참고해서 법 초안을 만들어 관계기관에 의견조회를 했다.

 

나는 범죄인인도법 초안을 만들어 국무회의를 통과하고 국회에서 최종적으로 법률안이 통과될 때까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나름대로 커다란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다. 그래서 1988년 8월 5일 범죄인인도법은 마침내 국회를 통과했다.

 

검찰2과에서는 주한미군범죄사건에 관한 형사정책업무도 담당하고 있었다. 주한 미8군 법무감실과 SOFA 형사재판권규정을 개정하기 위한 협상을 계속했다. 통역 없이 영어로 회의를 했다.

 

이런 저런 경험이 쌓여 국제형법전문가가 되었다. 국제형법 교과서를 저술해서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국제형법이라는 강좌를 만들어 사법연수원에서 강의도 했다.

 

검찰2과에서는 주로 일반 형사사건을 다룬다. 그래서 전국 검찰청에서 올라오는 중요한 사건에 대한 수사상황을 보고 받는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큰 사건,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는 국회에 나가 법무부장관이 답변해야 했다. 실무적으로 사건진행상황을 법무부에서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1990년 3월 인사가 있어 고등검찰관으로 승진하였다. 부장검사 바로 밑에 있는 직급이었다.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형사2부 소속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과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집에서 사무실까지 너무 멀어 출퇴근이 어려웠다. 그래서 차가 막히는 시간을 피해 일찍 집에서 나왔다. 일찍 도착하면 워커힐호텔 사우나에 들렀다.

 

우연히도 형사2부장은 법무부 검찰2과에서 과장으로 모시던 백삼기 부장님이었다. 나보다 먼저 동부지청으로 발령이 난 것인데, 내가 그 다음에 동부지청님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이영학 지청장은 내가 초임검사 때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형사5부장으로 모시던 분이었다.

 

이진강 차장검사님은 고향이 포천 동향이었다. 차장님은 나중에 대한변호사협회 협회장을 지냈다. 당시 나도 수석부협회장으로 러닝메이트로 선거에 나가기로 했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두었다.

 

지청장과 부장검사는 과거에 내가 모셨던 상사들이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호흡도 잘 맞았다. 그래서 나에게 모든 업무를 맡겼다. 형사2부에는 소속 검사가 8명 있었다. 나는 고등검찰관으로서 중간 관리자 역할을 했다.

 

대부분 내 방에서 검사들 모임을 가졌다. 대전고등학교 1년 선배인 백오현 검사님이 있었다. 고등검찰관이 되니 평검사와는 대우가 달랐다. 사무실 안에서 회의할 수 있도록 쇼파도 주어졌다. 조사실은 따로 직원들과 함께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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