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검사로 발령받다

 

 

 

나는 검사지원을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구류처분을 받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임관을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군에 가 있는 동안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어 세상이 바뀌었다.

 

나는 군법무관 생활을 모범적으로 했다. 그래서 그런지 법무부에서 검사로 임명되었다는 통지가 왔다. 8월 31일 김을권 사단장님에게 전역신고를 마친 후 짐을 정리하고 용주골에서 불광동으로 나오는 시외버스를 탔다. 감회가 깊었다. 눈물이 나왔다. 3년 간 정이 들었던 군 생활을 마치고 군복을 벗으니 무척 서운했다. 직업군인도 아닌데, 왜 그렇게 서운했는지 모른다. 직업군인 못지않게 열정을 다 바쳐 군대생활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82년 9월 1일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발령을 받았다. 사법연수원 동기생 중 검사 지망생으로서는 사법연수원 성적이 제일 좋았다. 그래서 성적순으로 발령을 내는 검찰 기준에 따라 서울지방검찰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연수원 동기생인 금병태, 강충식, 주성원 검사도 나와 함께 서울지검으로 초임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금병태 검사는 서울지검에서 근무하다가 도중에 사표를 내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처음 부배치는 형사제5부로 받았다. 담당업무는 교통사고 및 환경사범 전담검사였다. 당시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이 제정된 지 얼마 안 되어 교통사고 처리에 있어 매우 혼란스러웠다. 나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의 적용에 관한 기준과 해설지침 등을 만드느라고 고생했다.

 

형사5부장은 이영학 부장님이었다. 같은 부에 반헌수 선배, 조창구, 김회선, 조배숙 검사 등이 있었다. 부장 이외에 5명의 평검사가 배치되었다. 당시만 해도 형사부는 5개부였다. 그 외에 특별수사부와 공안부, 송무부, 공판부가 있었다. 차장검사도 한 명이었다.

 

검사로 발령 받자 중요한 일을 많이 하게 되었다. 직접 배당 받은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처리해야 했다. 시보 때와는 전혀 달랐다. 각종 행정업무도 매우 많았다. 계장 한 명, 여직원 한 명을 데리고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다.

 

내 사무실은 419호실이었다. 당시 서울지검은 대검찰청과 같은 건물을 쓰고 있었다. 덕수궁 바로 옆에 있었다. 내 방은 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덕수궁 뜰이 보였다.

 

하루 종일 사건 조사와 기록 검토, 회의 등으로 바빴다. 매일 아침 부장실에서 부 검사회의가 있었다. 사건에 관해 협의도 하고 업무에 관해 상의도 했다. 어려운 사건들이 많았다. 특히 구속사건은 매일 한 두건씩 배당되어 구속 만기에 쫓겨 야근을 하는 일이 많았다. 신임검사 교육도 마치고 나는 점점 일에 익숙해졌다.

 

검사로서 일을 하다 보니 사건을 통해 나쁜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악질적인 사기범, 교묘한 절도범, 무자비한 강력범, 강도강간, 뺑소니 교통사고 등등, 그야말로 사회의 부정적인 면만 보였다. 내 심성이 나빠지고 삭막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 사이에 옥석을 가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검찰청이나 법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인상도 모두 만만치 않았다. 빈틈없고 날카롭게 생긴 이지적인 인상, 도도한 자세, 딱딱한 말씨 등은 나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30. 김을권 사단장님을 모시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점심에는 사단장 공관에서 사단장님을 모시고 식사를 함께 하였다. 정식 참모가 되니 사단장님과 직접 대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전방 사단 법무참모로 혼자 관사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겨울은 고독하고 외로웠다. 당시 내 일기장에는 그런 모습이 눈에 띈다. 1981년 12월 31일 내가 써 놓은 일기장이다.

 

'저녁을 때워야겠는데 밖은 쌀쌀하고 몸은 노곤하여 나가기가 귀찮았다. 혼자 관사에서 지내는 생활도 지겹게 느껴진다. 대화 상대방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은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다.

 

오랫동안 누워 있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일어나 법원리로 갔다. 썰렁한 버스 안의 사람들의 모습은 을씨년스럽다. 머리가 짧아 사복을 입고 다녀도 모두 군인 신분임을 알아본다. 행동에 많은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어두운 들판이 외로움을 더해 준다. 한 해를 보내는 순간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손아귀에 잡혀 있는 듯 떠나질 못한다. 법원리에서 내려 잠시 걸어 보았다. 꼭 2년 전의 일이다. 법원리에서 방황하던 그 시절, 모든 것이 꿈 속에서 익었던 것처럼 정겹게 느껴진다.

 

구룡반점 중국음식점에서 간단히 삼선간짜장으로 요기를 때웠다. 다른 식사는 별로 생각이 없었다. TV에서는 가수들의 노래가 연말을 맞아 송년특집으로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무엇엔가 마음을 확 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천천히 좁은 동네를 걸어 보았다. 붉은 유흥가의 불빛이 처량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무엇에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는 듯. 세상은 그렇게 밝고 아름답게만 보여지는 것은 분명 아닌듯 싶다.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시골길은 너무 자연적이었다. 자연의 모습 그대로 보여준다. 항상 불빛과 더불어 살아왔던 우리는 불이 없는 어두움 속에서 두려움마저 느껴야 되는가 보다.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다.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다시 또 관사로 들어와 AFKN News를 듣는다. 카셋트마저 꺼버리면 고요 속에 견디기가 힘들다. 연말을 잊어버린 듯하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1982년 1월 19일 서초구 잠원동 대림아파트 8동 807호로 이사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전세를 살다가 이곳으로 옮겼다. 1월 21일 목요일 오전 부사단장 김진영 준장님의 법무참모실 순시가 있었다. 나는 법무참모로서 업무보고를 했다. 장군은 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검찰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자만하거나 남용하지 말 것이며, 사법권을 엄정하게 행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사단에서 근무할 때 군종참모로 정려성 목사님이 있었다. 호남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소령이었다. 시집도 여러 권 출간했고, 제대 후에는 서울세진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다. 김을권 사단장님도 독실한 크리스찬으로서 예편한 다음 육사동문신우회 명예회장을 지내고 목사가 되었다.

 

그 후 나는 법무참모로서 1사단 예하 부대를 돌아다니면서 군법교육을 실시하고, 군검찰권과 군사법권을 행사했다. 사단장의 참모 역할을 수행했다. 법무참모부를 지휘 감독하고 헌병대장과 업무협조를 했다. 보안대장과도 업무협조를 했다. 사단장님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대학교 3년 후배인 배진수 일병이 법무참모실에 배치되었다. 그는 나중에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변호사가 되었다. 나는 아주 열심히 몸과 마음을 바쳐 군생활을 했다. 그렇게 만 3년이 흘러갔다. 나는 1982년 8월 31일 전역하기로 되어 있었다.

29. 보병 1사단 법무참모가 되다

 

 

 

2군수 지원사령부 예하 부대로 101보충대가 있었다. 매주 신병들이 들어와 신체검사를 받고 전방 부대로 배치되는 과정에 있었다. 나는 정기적으로 101 보충대에 가서 군의관들과 함께 신병 신체검사 결과에 대한 판정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가끔 신병으로 들어와서는 안 될 사병들이 징집된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우리 위원회에서 귀향조치판정을 내렸다.

 

의정부에서 근무할 때 처음에는 서울 잠원동에 있는 대림아파트에서 버스로 출퇴근을 했다. 버스를 많이 타고 다녔더니 나중에는 허리도 아프고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의정부에 있는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가서 살았다. 13평 아파트였는데 비좁았다. 연탄을 때는 아파트였다. 연탄을 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곳에서 시내로 이사를 했다. 2층 집 방 2개를 전세로 얻어 살았다. 계단이 높고 가파라서 어린 아이들에게 매우 위험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시간만 되면 의정부 시내 거리를 걸어 다녔다. 바람을 쐴 방법으로 유일했다. 아이들이 가끔 아파서 서울까지 병원을 다니기도 했다.

 

1981년 12월 1일 2년 간의 중위 생활을 마치고 대위로 진급했다. 사실 군대에서 소위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서 4년의 정규과정을 마쳐야 소위로 임관된다. 나는 법무병과였기 때문에 몇 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바로 중위가 되었다. 중위로 2년간 근무하고 곧 바로 대위로 진급했다. 엄청난 혜택이었다. 12월 11일, 12월분 월급을 받았다. 대위 1호봉으로 246,000원이다.

 

12월 20일 의정부 집에서 용주골 관사로 이사하였다. 참모로서 관사를 이용할 수 있었다. 군인 관사는 20여채가 모여 있었다. 아담하지만 짚차를 주차시킬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법무참모 관사에는 방이 두 개 있었다. 12월 24일 사단장에게 전입신고를 하였다. 정식으로 법무참모가 된 것이다. 사단장은 육사 13기 김을권 소장님이었다. 한 부서를 책임진다는 것은 어깨가 무거운 일이다. 중위 검찰관, 상사인 선임하사, 사병 3명을 데리고 일을 해야 했다.

 

모든 것은 내 책임이었다. 나는 1사단 전체의 법적인 문제와 수사 및 재판 책임을 맡게 되었다. 전에 내가 검찰관으로 근무했던 곳이라 여러 가지가 편했다. 참모실을 독방으로 쓰게되었고, 관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짚차도 14호차가 배정되었다. 운전병도 따로 있었다.

 

사단장님은 군에 몸담고 있는 동안은 오로지 군만을 생각하며 일에 열중하라고 강조하였다. 군의 정의는 최후의 보루인 군법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라고 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의 행동은 타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계엄처장을 지낸 분이라 법무병과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나는 사단장에게 아주 잘 보였다. 법무관으로서 모범을 보였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군생활에 충실하고자 했다. 머리도 짧게 깎고 매사를 군인정신에 투철하게 행동하고 사고했다. 직업 군인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군을 사랑하고 아꼈다.

 

제대하고 검사로 근무하면서 김을권 사단장님을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1985년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에서 검사로 근무할 당시 김을권 장군님은 논산 연무대에 있는 훈련소장으로 근무하셨다. 나는 훈련소를 방문하여 함께 테니스를 치고 식사도 했다 관내 검찰청 검사로 근무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인연이었다.

 

198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전방철색선 순찰을 나갔다. 도라산 OP를 담당하고 있는 중대를 방문하였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도라산, 송악 OP에서 환한 불빛을 발하고 있었다. 최전방에서 고생하는 사병들을 보니 웬만한 고생은 고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 같았다.

28. 의정부 2군수지원사령부에서 근무하다

 

 

군에 들어가서도 느낀 점은 다른 장교나 사병들이 법무관에 대해서는 달리 바라본다는 것이다. 군종장교 못지 않게 법무장교에게는 무언가 높은 도덕성과 수준을 기대하고 있었다. 법을 전공하고 고시를 붙었다는 사실 자체에서 남과 다른 생활을 하고 모범적으로, 법대로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법무장교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매우 조심스러웠다.

 

당시 군대재판은 사단이나 군단 단위로 했다. 1사단 재판을 할 때는 인근 사단 법무관들이 지원을 나왔다. 재판부는 합의부로 구성되었다. 재판장은 일반 장교가 맡고, 재판관 한 사람은 법무관이 담당했다. 검찰관과 국선변호인은 다른 법무관이 맡았다. 한번 재판에 최하 법무관 3명이 필요했다. 같은 군단 소속 다른 사단에서 지원을 나오게 된다.

 

보통 한 달에 한 번씩 재판을 하게 되므로 법무관들은 각 사단을 돌아가면서 모이게 된다. 다른 사단을 방문해서 새로운 분위기도 맛보고, 법무관들이 모여 대화도 나누고 친목을 도모한다. 그때 가깝게 지내던 법무관들은 그 후 제대해서 법조계에서 일하면서 두고두고 친하게 지냈다.

 

1사단에서 근무하면서 갑자기 피아노 배울 생각을 했다. 용주골에 있는 피아노학원에서 바이엘부터 렛슨을 받기로 했다. 퇴근하고 저녁 7시부터 1시간씩 렛슨을 받았다. 한 2개월 렛슨을 받다가 5월말경 다른 부대로 파견 가는 바람에 중단했다. 그때 여건이 허락하여 좀 더 레슨을 받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5월 말 광주 전투교육사령부로 발령 받아, 그해 12월까지 근무를 했다. 광주에서는 시내에 있는 군부대 숙소에서 연수원 동기생인 서태경 중위와 같은 방에서 생활했다. 1980년 12월 3일 범종(汎鍾)이 태어났다. 1981년 4월 25일 출생신고를 했다.

 

후방 부대 가서 몇 달간 혼자 생활하다가 의정부 2군수지원사령부로 발령을 받았다. 조상흠 법무참모님을 모시고 검찰관 근무를 하였다. 그러다가 법무참모가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서 내가 대신 법무참모대리 역할을 했다.

 

검찰관 1명이 보충되었다. 김태현 중위가 검찰관으로 왔다. 나는 중위 계급으로 법무참모대리가 되었다. 군수지원사령부는 보병 사단과 다르다. 참모들의 계급이 대령이다.

 

데리고 있던 중사가 군법회의에서 받아 놓았던 벌금 13만 원을 경리참모부로 입금시키지 않고 사용한 사실이 적발되었다. 나는 즉시 벌금을 전액 변상조치하도록 하고, 중사를 전역시키기로 했다. 문제가 된 중사를 전역시키는 선에서 사고를 매듭짓기로 했다.

 

물론 중사의 행위는 법에 저촉되는 것으로서 나쁘다. 그러나 즉시 변상조치를 했고, 일시적으로 유용한 후 나중에 전액 입금을 시킨 정상이 있어 형사입건이나 징계조치를 하지 않고 전역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법무참모 조치에 대해 다른 참모들도 모두 이해하고 그렇게 넘어갔는데, 내가 떠난 후에 이 문제가 불거져 골치 아픈 상황이 되었다.

 

내가 2군수지원사령부를 떠난 후에 새로 온 김문수 법무참모가 중사에 대한 전역지원서를 철회했다. 그 중사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근무를 잘 하겠다고 사정을 하니 마지못해 철회하는 것을 용인했다. 그런데 중사가 술에 취해 6군단 소속 헌병을 폭행했다. 6군단 헌병대에서는 중사의 과거 문제를 거론했다.

 

중사는 6군단에서 구속되었고, 나와 후임 법무참모는 지휘감독 소홀의 책임을 물어 징계를 당할 위기에 처했다. 나는 그 당시 상황을 3군 법무참모 전창영 대령님에게 설명했다. 그랬더니 내가 취한 조치는 크게 문제가 안 되는 곳으로 불문에 붙이기로 했다. 조직에서의 지휘감독책임이 얼마나 무서운지 크게 깨달았다.

27. 보병 제1사단 검찰관으로 근무하다

 

 

 

훈련을 받고 있을 때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했다. 전국적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1979년 12월 4일 서울 강남구 잠원동 64-4 대림아파트 8동 807호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부모님은 같은 아파트 7동 702호로 이사를 했다. 7동과 8동은 붙어 있었다. 그래서 왕래가 쉬웠다. 처음에는 파주 용주골까지 몇 달 동안 출퇴근을 했다. 버스를 타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은 일이었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서울 나올 때마다 검문을 받아야 했다.

 

1979년 12월 육군 보병 제1사단 법무참모실 소속 검찰관으로 발령이 났다. 법무참모는 군법무관시험 2기인 박성훈 소령이었고, 선임하사는 오기만 상사였다.

 

부대 앞 하숙집에서 생활했다. 하숙집은 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옛날 대학 시절 하숙생활을 해보고 다시 또 오랜만에 하숙집 밥을 먹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여러 가지가 판이하게 달랐다. 자유로웠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좁은 방에서 침대도 없이 그냥 이불만 펴놓고 잠을 자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처리해야 할 사건은 많지 않았다. 주로 군무이탈사건과 폭행사건, 교통사고 등이었다. 전방 사단에서는 사건 사고가 그렇게 많지 않다. 군기가 세기 때문에 사고가 덜 난다. 군에서는 기강이 해이될 때 안전사고 등이 많이 발생한다.

 

군에 갓 들어온 신병들에 대한 군법교육을 하러 돌아다니면서 군생활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사병에 대한 관리는 잘 해야 한다. 아주 인간적인 배려를 하지 않으면, 감수성 강한 어린 나이에 사고를 칠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

 

법무관이 해야 할 일은 사건 처리 뿐만 아니라 장병들에 대한 군법교육이다. 교육은 강사가 직접 부대 단위로 찾아다니면서 한다. 법무참모 짚차를 타고 부대를 돌아다니면서 군법교육을 하면서 보람을 느꼈다.

 

매주 신병교육대에서 신병들을 상대로 군대에서 지켜야 할 군형법 등을 강의했다. 군에 갓 입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신병들에게는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중요했다.

 

군법교육을 다니면서 만나는 일선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심지어 연대장들은 고시 붙고 들어온 법무관인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많은 관심도 보여주었다. 나는 이때 그들이 군에 들어와 얼마나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지, 전방에서 애환을 겪으며 고생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젊은 나이에 운전병을 데리고 중위 계급장을 단 내가 집차를 타고 이곳 저곳을 누비고 다니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군대는 계급사회, 명령복종사회였기 때문에 장교인 나에게 사병인 운전병이나 법무참모실에서 근무하는 사병들도 잘 대해주었다. 법무관인 내가 그들을 특별히 귀찮게 하는 일도 없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커다란 사무실에 검찰관 책상이 하나 따로 있고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다. 선임하사 책상, 사병 3명의 책상이 옆에 나란히 있다. 커다란 난로가 가운데 있다. 그곳에서 함께 생활하며 군대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던 시절이다.


26. 법원 검찰 실무수습을 하다

 

 

 

그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매우 선한 눈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키우던 토끼 눈 같았다. 눈 속에는 내 얼굴이 들어 있었다. 안경을 쓰고 범인을 조사하고 있는 날카로운 검사시보의 눈이 그 안에 있었다.

 

다음 날 출근해서 지도검사님에게 내 의견을 이야기했다. 검사님은 다시 검토하라고 했다. 아무래도 전과가 두 번이나 있어 용서는 어렵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다음 날 또 다시 건의했다. 너무 사정이 딱하다고, 그래서 용서해 주어야겠다고 했다.

 

검사님은 정 그렇다면 부장님에게 말씀드려보라고 했다. 나는 아주 상세하게 석방품신서를 작성했다. 직접 기록을 들고 부장실로 갔다. 부장님은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셨다. 기록을 놓고 가라고 했다. 퇴근시간이 되어 석방해도 좋다는 결재가 났다. 나는 그때 고시 붙은 보람을 진정으로 느꼈다.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했다는 자부심도 생겼다.

 

나 때문에 한 가정이 절망의 늪에서 헤쳐 나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나중에 그 정해창 부장검사님은 법무부장관까지 지내셨다. 내가 법무부 검사로 근무할 때 직접 장관으로 다시 모실 수 있었다.

 

검찰실무가 끝나고 법원실무가 시작되었다. 나는 영등포지원에서 시보 생활을 했다. 지금은 서울남부지방법원으로 승격되었다. 연수원 동기 5명이 한 사무실에서 시보생활을 했다. 판사님들로부터 재판기록을 받아 검토하고 판결문초안을 작성하는 연습을 했다. 법원은 매우 조용한 분위기였다.

 

대학교 4학년 때 신체검사를 받아 방위판정을 받은 상태였지만,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사법연수원을 마치게 되니 현역으로 갈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다. 나는 현역으로 가겠다고 지원했다. 그래서 군법무관으로 입소하게 되었다.

 

1979년 9월 1일 광주 보병학교에 입소했다. 연수원 동기생 44명이 함께 훈련을 받았다. 이병기 선배는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 사위였다. 44명이 한 내무반에서 생활했다. 아침 6시 기상하여 구보를 했다. 각종 훈련을 받았다. 사격훈련도 하고, 유격훈련도 했다.

 

처음 훈련소에 들어가니 구대장이라고 중위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군기를 잡았다. 정신없었다. 이틀 후에는 중대장이라고 대위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때는 대위가 정말 높아 보였다. 군대란 그런 것이었다. 그 다음에 나타난 소령이라는 대대장은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나는 순종하는 편이었다. 철저하게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야간행군 끝에 유격장에서 줄을 타고 내려와 물에 빠지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보니 내가 정말 군인이 된 것 같았다.

 

당시 중대장이었던 이석중 대위는 그 후 남양주시청에서 예비군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함께 식사도 하고 옛날 군대 시절을 서로 회상했다. 사람 인연이란 그렇게 맺어지고 소중한 것이다.

 

광주 보병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9월 19일, 화경(和經)이 태어났다. 1979년 12월 7일 출생신고를 했다. 화경이 태어날 당시에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2동 302호에서 일시적으로 전세를 살고 있었다. 그래서 화경의 출생장소는 호적상 현대아파트로 되어 있다.

 

나는 훈련을 받느라고 병원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때는 일요일에만 가족 면회가 가능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자주 내려오지 못했다. 3개월 넘게 훈련을 받고 성남에 있는 종합행정학교에 들어가 마지막 1주일간 훈련을 마치고 중위로 임관되었다.

25. 사법연수원에 들어가다

 

 

 

1977년 9월 1일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사법시험 제19회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 제9기로 입소했다. 연수원 동기생은 모두 72명이었다. 사법시험 19회에는 80명이 합격하였다. 그중 8명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연수원에 입교하지 않았다.

 

당시 사법연수원은 덕수궁 옆 법원 건물에 있었다. 지금은 법조타운이 서초동으로 옮겨졌고, 사법연수원 건물은 헐리고 새로 건물이 들어서서 서울시청에서 사용하고 있다.

 

연수원 입교식에 부모님과 가족들이 참석했다. 축하꽃다발을 받아 쥐고 사진촬영을 했다. 연수원 건물에서 바라다 본 덕수궁 뜰은 우아했다. 사법연수원에 들어가서도 공부해야 할 것이 많았다. 고시공부할 때와는 달리 민사, 형사, 검찰, 변호사실무를 주로 배웠다.

 

판례도 많이 공부해야 했다. 연수원에서는 공동으로 구입하는 법서가 많았다. 새로 구입하는 책을 집에 나를 때마다 나는 이제야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그런데 비싼 가격에 일괄 구입한 법서, 특히 일본어로 된 일본서적 등은 한 번도 읽어보지도 않고 가지고 있다가 모두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돈이 너무 아깝다.

 

사법연수원에 들어가니 선을 보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형수가 소개해서 선을 보았다. 그래서 1979년 12월 6일 결혼했다. 혼인신고는 1978년 1월 31일 했다.임미희 고향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 고향리 438번지다. 평택 임씨다. 장인 임승욱 어른과 장모 이희범 어른이다.

 

1977년 12월 여의도 시범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생활도 많이 안정이 됐고, 차분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연수원 중간고사에서 2등을 했다. 1978년 여름에는 변호사실무를 오제도 변호사님 사무실에서 2개월 동안 했다. 과거에 날렸던 검사 출신이라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무실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한번은 자가용을 타고 인천에 있는 호텔 나이트클럽까지 가서 술을 마시고 놀기도 했다.

 

검찰시보는 서울지방검찰청 형사제1부에 소속되어 4개월간 했다. 검사직무대리로 조사하고 처리했다. 서울지방검찰청은 그 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바뀌었다. 정해창 부장검사님, 강탁 검사님이 지도검사였다. 강탁 검사님은 1941년생이며, 경북 의성 출신이다.

 

구속 피의자들의 정상관계를 부각시켜 기록에 올려 놓았다. 다른 시보들이 불구속으로 송치된 사건을 열심히 조사해서 직접 구속시킨 것을 무용담으로 자랑하고 있을 때, 나는 불쌍한 피의자 가족들을 만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있었다.

 

내가 겪었던 어려운 시절을 떠올려 그들과 함께 눈물을 나눴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벌금을 부과할 때는 최소한으로 줄여주려고 애썼다. 모든 사건에는 양면이 있다. 나쁘게 보면 한 없이 나쁘다. 그러나 이해하려고 들면 불쌍해 보인다.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 절도사건 피의자가 구속되어 왔다. 주로 빈집을 터는 절도범이었다. 전과가 절도죄로 2번이나 있었다. 일반적인 사건처리기준에 의하면 당연히 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넘길 사건이었다.

 

퇴근시간이 넘은 다음 조용한 상태에서 물었다. 왜 자꾸 절도죄를 저지르고 있느냐고.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못 배워 취직은 안 되고, 동거하고 있는 여자가 애기를 가져 생활비를 조달하기 위해 절도를 했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애엄마 생각해서 도둑질을 안하고 노동을 해서 먹고 살겠다고 했다.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애엄마는 요새 아파서 면회도 못 온다.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시고 형제도 없다고 했다.

24. 사법시험에 합격하다

 

 

 

1977년 5월 중순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전체 합격자수는 80명이었다. 신문을 보고 합격사실을 알았다. 부모님께서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고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대방동 매형과 큰누나가 와서 축하해 주었다.

 

큰 매형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국세청에서 근무했다. 충남 청양이 고향이다. 당시 살고 있던 삼양동 집은 아폴로 극장 바로 앞에 있었다. 계단을 통해 옥상에 올라갈 수 있었다. 마당은 거의 없는 편이어서 주로 옥상에 올라가 아령을 들거나 운동을 했다. 지하로 들어가 연탄을 갈아야 했다.

 

만 23세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게 된 것이었다.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고시였다. 고시에 합격해야 법대에 들어간 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때까지는 모든 것을 미루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은 고시라는 괴물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학문도 운동도 그렇고 사랑도 그랬다. 고시합격은 나에게 하나의 해방선언이었다.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활동할 수 있다는 증서였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은 잠시 뿐, 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그건 말 못할 고민이었다. 1973년 10월 대학교 2학년 때 동대문 경찰서에서 구류 20일을 받은 처분 때문에 3차 시험 면접에서 떨어뜨리지 않나 하는 걱정이었다. 누구에게 물어 볼 성질도 아니었다. 혼자서 고통스러워했다.

 

3차 시험은 면접이었다. 면접관은 구류처분에 대해 물어 보았다. 나는 당시 상황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면접이 끝나고 최종 발표가 났다. 합격이었다. 과거에는 3차에서 가끔 떨어뜨리는 케이스가 있었다. 왜 떨어뜨리는지도 설명해 주지 않고 그냥 끝이었다. 그런데 나는 무사히 통과되었다.

 

2017년 6월 21일 제59회 사법시험 2차 시험이 치러졌다. 사법고시는 1950년 고등고시 사법과가 출발이다. 고등고시 체제로 16번 치렀고 1963년부터는 사법시험으로 바뀌었다.

 

사법시험에는 총 70만8276명이 응시했고, 그 중 2.9%인 2만718명이 합격하였다. 고등고시 사법과 1회 합격자는 16명, 사시 1회는 합격자는 41명이었다. 평균 60점을 넘고 과락이 없어야 합격이 되었다. 합격 인원은 1981년 23회 때 300명을 넘었고, 2001년부터 '1000명 시대가 되었다. 2007년 로스쿨제도가 도입되었다.

 

고시합격기를 써서 월간고시지에 게재했다. 제목은 '고독이라는 창에 비친 자화상'이다. 월간고시에 상법예상문제를 매달 게재했다. 혜명고시원에서 합격자를 위한 축하파티를 열어 주었다. 그 동안 계속 응어리진 마음으로 쳐다보던 하늘이 그렇게 파랗다는 사실을 새삼스렇게 깨달았다.

 

길음동 고갯길에 위치한 혜명고시원 옥상에 올라가면 길음동 동네가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수 없는 날을 그 옥상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한숨도 많이 쉬기도 했다. 기약 없는 공부에 지쳐있는 날도 많았다. 슬럼프에 빠지면 일주일 동안 공부는 못하고 빈둥거렸다.

 

고시합격을 하고 주위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 표시를 했다. 먼저 나를 낳아 길러주신 아버님과 어머님의 헌신적인 노고, 형제들의 우애, 형수의 도움에 깊은 감사를 드렸다. 서울 법대 교수님들, 한양대 김기선 학장님, 정일학원 홍철화 원장님, 혜명고시원 원장 내외분, 나를 도와주신 수많은 분들이 있었다. 합격의 영광은 모두 그 분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23. 길음동 혜명고시원에서 공부하다

 

 

 

다 가는 건 아니고, 마음 약한 사람들만 내려간다. 30분 정도는 걸어가야 한다. 밤이고 어두운 산길이라 캄캄해서 손전등을 들고 가야한다. 많이 다녀서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다. 부락에 내려가면 관광지라 식당도 많고 술집이나 다방도 몇 군데 있다.

 

주로 막걸리를 마시거나 다방에서 차를 마셨다. 우리가 잘 다니던 다방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그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그곳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종업원이 한 명 있어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서울에서 와서 혼자 있어 그런지 몹시 외로워했고, 고시공부를 하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고생이 심한가, 얼마나 외로운지 물었다. 서른이 넘어서 우리를 동생 취급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돈이 없을 거라고 찻값을 내주기도 했다. 나중에 고시 붙으면 서울에서 좋은 식사를 대접해야 한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낮에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노라면 절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원당암에는 주말에 등산을 하다가 절구경을 하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면 공부에 방해가 되었다. 젊은 남자와 여자가 다정하게 놀러 다니는 걸 보면, 연애도 제대로 못하고 절에 틀어박혀 청춘을 억누르고 있는 현실이 서글퍼지기도 했다.

 

더벅머리에 면도도 제대로 안하고 반은 사회인이고 반은 스님처럼 보이는 모습에 두꺼운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절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나는 등산객들 눈에 절에 와 있는 스님 문하생이거나 일꾼으로 보였을 것이다.

 

여름에 방에 있으면 비가 내리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킨다. 계곡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때문이었다. 가끔 노루소리에 놀라기도 했다. 깊은 산 속에 외따로 있는 암자에서는 밤의 고요가 대단했다. 개미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우주 속에 혼자 떠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서울 집에는 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궁금했지만 참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가끔 집에다 편지를 썼다. 절에서는 신문도 볼 수 없고, TV도 없었다. 전화도 없고, 모든 것이 본의 아니게 통제되었다. 관심이 있는 것은 오로지 우주와 자연과 법공부이었다. 사람이 그토록 무소유 상태에서 순수해지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고시에 대한 집착보다는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회귀본능이 강해졌다. 세상 욕심 보다는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강해졌다. 부모님만 아니면 굳이 서울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함께 생활하는 스님의 얼굴을 보면 나도 저렇게 수양을 해서 평안한 마음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절에서는 고기류를 금했다. 생선도 금했다. 절음식만 먹었다.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그렇게 먹고 살았다. 물이 달고 맛있었다. 공기도 맑았다. 산 속에서 새와 잠자리, 개구리와 함께 생활했다.

 

가을에는 서울로 올라와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특강을 들었다. 그리고 혜명고시원에서 공부를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임했다. 1차 시험과 2차 시험을 동시에 붙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1977년 3월 사법시험을 보고 결과를 기다렸다. 1차 시험을 완벽하게 대비해서 그런지 쉽게 합격했다.

 

처음 보는 2차 시험이라 초조했지만, 나름대로 잘 치렀다. 그러나 시험이란 항상 결과가 날 때까지는 불안한 것이다. 2차 시험 결과가 날 때까지 삼양동 집에서 고등학생 과외를 하고 있었다. 매일 옥상에 올라가 아령을 하고 역기를 들었다. 중대한 인생의 갈림길에 서있었다.


22. 해인사 원당암에서 공부하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가? 사법시험 1차에서 수석으로 붙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고, 실제로 시험을 잘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합격자 명단에서 빠져있었다. 너무 실망했다. 도대체 이해가 안 갔다. 지금도 나는 왜 떨어졌는지 이해가 안 간다. 혹시 채점과정에서 객관식이라 잘못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확인을 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다. 그 비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집안 식구들의 실망 역시 대단히 컸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1차 시험에 떨어져 한번도 2차 시험을 치러보지도 못하고 졸업장을 받게 된 것이다.

 

졸업 후에는 한양대학교 산업대학원에 적을 두고 혜명고시원에서 공부를 했다. 시간은 많고 뚜렷한 자극이 없어서 그런지 공부는 잘 되지 않았다. 빈둥빈둥했다는 표현이 맞다.

 

지금처럼 고시학원이 있었으면 중간 중간에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무엇이 부족한지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시만 해도 그런 시스템이 없었다. 그래서 매우 막연한 상태에서 시간만 흐르고 답답하기만 했다.

 

1976년 7월 초 합천 해인사 원당암으로 갔다. 절에는 5명의 고시준비생이 함께 있었다. 작은 방 하나에 한 사람씩 생활했다. 서울에 있으면 어수선해서 공부가 안 되는 상태였는데 조용한 절에 가서 떨어져 있으니 공부하기에 좋았다. 우선 주위에 보이는 것이 없어 신경쓸 일이 없었다.

 

해인사 여름은 정말 시원했다. 계곡으로 목욕을 하러 다니고 가야산에 올라가 호연지기를 키웠다. 매일 저녁 예불을 드렸다. 수양하는 자세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려고 애쓰면서 공부도 열심히 했다. 부모님이 보내준 미숫가루를 마시면서 그 정성에 보은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조용한 산사에서 나의 갈 길을 확고히 하고 어떠한 난관이라도 절망하지 않고 굳게 살아 갈 결의를 공고히 했다. 비록 사법시험에 떨어진다 해도 다른 길이 얼마든지 있다는 자위를 하면서 성실히 노력할 것을 나 자신에게 거듭 약속했다.

 

이때 함께 원당암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은 그 후 대부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 후 원당암은 대단히 많이 변했다. 커다란 증축공사를 해서 예전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공부했던 작은 방들이 있던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2001년 다시 원당암을 방문해서 옛날 내가 공부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 깊은 상념에 빠졌다. 암자에는 혜은 스님의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스님이 말씀하시는 공부란 심오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다.

 

고시공부를 하다가 죽으라는 뜻은 아니다. 혜은스님은 큰스님이었다. 입적한 후에 사리가 많이 나왔다. 원당암은 혜은스님의 사리를 보존하고 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원당암에서 보낸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원당암에서 바라보면 앞산이 높이 솟아있다. 절 앞에 급경사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여름에 해가 길어 오후 6시 저녁 공양을 하고 나면 한동안 훤하다. 이때가 제일 심란하다. 차라리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방에 들어가 불을 켜고 책을 보고 있으면 마음은 단순해진다.

 

그런데 해가 길게 남아 있으면 방에 들어가 틀어박혀 있기가 싫었다.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누구 한 사람이 발동을 걸면 공부는 뒷전이 된다. 부락에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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