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스는 최순철 사장과 조용한 찻집으로 갔다. 엘리스는 심한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최 사장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사장님! 너무 실망했어요. 제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저는 처음에 사장님이 이끄는대로 따라갔던 것이고, 그동안 사장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어요. 제가 언제 사장님이 싫다고 하는데, 사장님을 귀찮게 하고, 생활비를 달라고 했어요? 그 여자분이 제 동영상과 사진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건 언제 찍은 거예요?”
최 사장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미안해. 엘리스! 모든 건 내 잘못이야. 엘리스가 잘못한 건 아무 것도 없어. 엘리스는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다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아니, 사장님! 지금 그 여자가 제게 내용증명을 보냈고, 일주일 이내에 전세금과 커피숍을 다 내놓지 않으면, 동영상을 저희 부모님댁으로 보내고, 인터넷에 올린다고 하는데 어떻게 걱정하지 않아요?”
최 사장은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과거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지금 엘리스에게 난리를 치고 있는 문정옥이라는 여자는 지금부터 3년 전에 만나서 친하게 지냈어. 이혼하고 혼자 사는 여자야. 그러니까 내가 54살일 때 만났는데, 당시 그 여자는 48살이었어. 내가 와이프와 별거하면서 혼자 살고 있으니까,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가끔 우리 집에 와서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면서 가깝게 지냈어. 처음부터 우리는 선을 긋고 행동했어. 같이 만나서 잠자리도 했지만, 서로는 어디까지 친구로서 지내고,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기로 했어. 서로의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고, 서로 싫어지면 아무 때고 그만 만나고, 서로에게 어떤 부담도 주지 않기로 하면서 만났어.”
“그랬는데, 왜 저에게 와서 부인이라고 행세를 하지요?”
“나는 엘리스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그 여자와는 더 이상 잠자리를 하지 않았어. 그러면서도 가끔 만나서 식사나 하고 술이나 마셨어. 그래서 나는 그 여자도 나에게 잠자리할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걸로 짐작하고 용인하는 거로 생각했어. 그런데 6개월 전에 갑자기 엘리스의 뒷조사를 해서 나에게 난리를 치는 거야. 나는 깜짝 놀랐어. 도대체 이 여자가 왜 이러나 싶었지?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그냥 울면서 나에게 배신을 당해서 죽겠다는 거야. 평소에 우울증세가 있어 나는 걱정이 됐어. 그래서 당분간 엘리스를 만나지 않겠다고 했어. 그랬더니 그 여자가 엘리스 문제를 자신이 완전히 끊어놓겠다고 나선 거야. 나는 그 여자가 너무 흥분한 상태였고, 잘못하면 회사에 와서 망신을 주고, 엘리스에게도 해가 갈까 봐, 그 여자가 하는 대로 우선 내버려뒀다가 나중에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던 거야.”
“그럼 저는 어떻게 하면 돼요? 지금 저도 변호사를 선임해 놓았어요. 돈을 5백만원이나 줬어요. 그 여자가 곧 인터넷에 동영상을 유포한다는 거예요.”
“그 동영상은 엘리스 것이 아냐. 엘리스 얼굴도 나오지 않아. 그건 내 친구가 자기 애인 것을 찍어놓을 것을 나에게 보내주어 심심해서 가끔 보면서 삭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을 그 여자가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옮겨놓고, 그걸 엘리스 거라고 믿고 있는 거야. 그 여자가 과도 깎는 칼을 들고 내 스마트폰을 뒤져 보고 그 동영상이 엘리스 거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겠다는 거야.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던 거야. 그 동영상에는 남자 얼굴도 안 나오고 여자 얼굴도 나오지 않아. 그냥 섹스하는 동영상과 여자 하체만 찍혀 있는 사진이야. 나중에 문제가 되어도 과학적 분석을 하면 엘리스 게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밝혀질 거야.”
“과학적으로 밝혀지는 건 나중 문제고, 제 이름과 같이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면 저는 끝장나고 매장되는 거잖아요?”
<남녀 사이의 장사장면을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찍어 가지고 있으면 매우 위험하다. 그것이 외부에 유출될 때 걷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로 연애를 할 때 나체사진을 찍도록 해서는 안 된다. 모텔에서 성관계를 하고 잘 때 몰래 찍을 수 있으니, 절대로 잠을 자서는 안 된다.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24시간 경계태세를 유지하라.>
사랑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렸지만 만족할 만한 것은 없다. 사랑이란 정신적인 작용이며, 그 실체를 볼 수 없고 정확하게 인식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사랑은 단순히 정신적인 작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육체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아주 특이한 현상이고 기능이다. 사랑은 두 사람이 만드는 가상의 공간에서 형성된다.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은 그들만의 독점적인 영역을 창조한다. 두 사람만의 탑을 쌓는 일이기도 하다. 때로는 동굴을 파놓고 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과 같다. 사랑은 두 사람에게 부여된 제한된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
그들에게만 허용되는 시간과 공간이며, 그들만이 마실 수 있는 물과 공기가 있다. 그들만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색깔이 있고 소리가 있다. 그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촉이 있다. 그들만이 얻을 수 있는 환희와 고통이 있다.
이런 사랑의 전제조건은 진실성과 합일성, 영원성에 있다. 사랑에 빠져 사랑을 시작하는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탑을 쌓는다. 그 탑에 자신들의 추상적인 사랑을 각인하고 그 탑을 보면서 항상 사랑을 확인한다.
그 탑 위에 올라가 앉거나 탑 속에 들어가 안주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탑과 비교도 하지만, 그 탑에 들어가는 순간 다른 탑들은 시야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비교할 능력도 없어진다. 탑속에서는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의식주는 중요치 않다. 사랑의 정신으로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탑에서는 정신이 중요하다. 서로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탑에서는 서로의 주파수를 맞춰놓고 항상 교감한다. 주파수가 맞지 않거나 다른 주파수와 혼선이 생기면 엄청난 문제가 생긴다.
24시간 계속되는 이 사랑의 교감작용은 사랑의 본질에 연결되어 있다. 사랑을 다른 인간행동과 구별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교감이 끊어지거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사랑은 병들거나 소멸하게 된다.
두 사람이 사랑의 탑을 공고하게 쌓아가면서 더 높아지면 그 사랑은 천상에까지 이르게 된다. 지상에서 영원까지 이어지는 사랑의 금자탑이다. 모든 사람들의 우상이 된다.
그러나 그 탑은 인간의 교만함 때문에 바벨탑처럼 중간에 모두 무너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 탑을 쌓으면서 항상 신에 도전한다. 신과 같은 완벽을 추구하는 인간의 무모함은 결국 탑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사랑의 탑(tower of love)을 쌓는 일은 강도 높은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노고를 필요로 한다. 가만히 편하게 앉아서 탑을 쌓을 수는 없다. 피와 땀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그다지 중요한 가치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탑을 잘 쌓아보았자 다른 사람들과 그 효용을 나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이기적인 활동이다. 사랑의 탑은 두 사람만이 노고를 들여 쌓을 수밖에 없는 특수성을 가진다.
중간에 포기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그 탑은 중단된다. 중단된 채 이상한 모양으로 변형된다. 녹이 슬고 비를 맞고 풍상에 초라해진다. 그 탑은 사랑의 탑이 아니라 증오의 탑이 되고 그 탑을 쌓던 사람들은 동과 서로 나뉘어 갈라서게 된다.
두 사람은 한때 자신들이 공동으로 탑을 쌓았다는 기억만 가지고 있을 뿐 그 형체 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나쁜 추억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이처럼 쌓다가 만 사랑의 탑들이 수 없이 있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어설픈 흔적만을 남기고 있는 이런 탑들은 인간들의 교만함과 불성실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애당초 모든 것을 순종하기로 마음 먹은 동물들은 이런 어설픈 사랑의 탑을 쌓지도 않고 쌓다가 내팽개치지도 않았다. 그들은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할 뿐이어서 사랑의 탑 대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작은 공간을 빌리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교미를 하고 종족을 보존한다. 그들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사랑에 대해 추상적인 논의를 하지 않는다.
사랑의 탑은 쌓기도 어렵지만 관리하기가 더 어렵다. 항상 두 사람이 함께 관리하지 않으면 관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탑의 형상이 나타나면 그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다른 사람들이 그 탑의 주변에 모여든다.
탑의 작업에 허락 없이 끼어들거나 작업중인 한 사람을 내쫓고 대신 작업하려는 꾼들도 있다. 복잡한 애정관계가 발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면 사랑의 탑은 고요한 산사에서 복잡한 시장이 된다.
탑은 더 이상 올바른 방향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변질된다. 주저앉기도 한다. 그들은 헤어져 각자 다른 탑을 새로 쌓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사랑의 탑을 평생 저주하며 외면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랑의 실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누구와 어떤 사랑의 탑을 쌓아왔는가? 그리고 얼마나 높이 쌓았는가?
탑의 이름은 무엇이며 얼마나 아름답고 그 안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랑을 나누었는가?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그 사랑의 탑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우리는 너무 사랑에 대해 무관심했거나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랑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생을 마감할 때 가장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사랑 없이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후회를 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사랑에 대해 쏟는 시간은 결코 아깝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모른다. 무엇이 사랑이고, 왜 사랑이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사랑을 알지 못하면서, 사랑에 도전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그 사랑 때문에 상처 입고, 아픔과 슬픔에 빠진다.>
영희는 지금까지 살면서 폭행을 당한 일이 없었다.친정부모들로부터도 욕설은 들었지만,손찌검까지는 당하지 않았다.맞을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다.그리고 부모는 아이들을 때려서 키우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영희는 그 동안 여러 남자들과 연애를 하고 성관계를 맺었다.그러면서 모두 헤어졌다.하지만 그 남자들 역시 연애를 하는 과정에서 말싸움도 많이 하고,다투기도 했으나,이번에 남편이 했듯이 직접 때리는 일은 없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못된 여자아이들은 친구나 후배를 폭행하는 일도 있었지만,다행이 영희는 그러한 또래집단의 폭행에 직접 피해자가 된 경험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TV나 드라마에서 남자가 여자를 폭행하는 경우를 봐도 이번처럼 무지막지하게 때리지는 않았다.
아무튼 영희는 남편의 폭행사건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더군다나 이번 사건은 단순 폭행이 아니라 엄연히 상해죄에 해당하고 무거운 가정폭력사건이었다.
정부에서는 가정폭력에 대해 근원적으로 이를 뿌리 뽑고,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해서 시행하고 있다.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가정폭력방지법)은2001년1월29일부터 시행되고 있다.이 법은 여성가족부 소관이다.가정폭력을 예방하고 가정폭력의 피해자를 보호ㆍ지원함을 목적으로 한다.
가정폭력 피해자는 피해 상황에서 신속하게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이 법이 선언하고 있는 법의 이념과 가치다.
영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당했다.그리고 신체의 안전을 침해 당했다.
그렇다고 영희가 곧 바로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고소장을 제출하는 것도 어렵다.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나 여자로부터 폭행이나 상해를 당했으면,당연히 즉시 신고를 했을 것이다.그것은 피해자의 정당한 권리이며,무조건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오직 성경에만‘무조건 용서’를 강조하고 있다.오른 뺨을 맞거든,왼 뺨도 내주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하지만 인간세계에서 그렇게 당하고 또 당했다가는 즉시 거지가 되고,하루도 살 수 없게 된다.
성경과 달리 법에는 상대방의 가해행위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방어권의 행사를 허용하고 있다.형법에서 인정하고 있는 정당방위,과잉방위,오상방위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남편이 때리면,아내도 즉시 방어를 해야 한다.그래서 일단 맞지 말아야 한다.남편의 위법한 공격행위에 대해 정당한 방어를 함으로써 목숨을 지켜야 하고,신체의 안전과 온전성을 보존해야 한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와 같이 싸우는 것은 옆에 심판이 없는 이상 게임이 되지 않는다.아무래도 완력에 있어서는 남자의 근육이 강하고,파워가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군대도 갔다왔고,태권도나 유도,검도 등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부싸움에 대비해서 여자가 평소에 태권도 같은 무술을 배우기도 곤란하다.너무 싸움을 잘 하는 여자와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 남자도 있기 때문이다.
영희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결국 이혼이 두렵기 때문이다.아이가 걱정되기 때문이다.그리고 이혼 후 혼자 살아가는 것이 걱정이기 때문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남의 일이기 때문에 쉽게 결론을 내린다. ‘그런 남자와 살아야 소용 없다.즉시 이혼하라.’ ‘한번 폭행을 한 남자는 언제고 다시 근성이 나타난다.그러니 위험하다.왜 매맞고 사느냐?’등등이다.
또 다른 입장에서는‘그래도 아이가 있으니 참고 살아라.’ ‘남자가 욱하고 그런 것이니 반성했으면 용서해주는 것이 좋겠다.’등등...
그러나 인생사에 있어서 당사자 이외의 사람은 어디까지나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다.그래서 매우 쉽게 어드바이스를 한다.막상 자기 자신의 일이거나,자기 가족의 일 같으면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이런 경우에 영희는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과 상의하는 것도 쉽지 않다.자기 자신이 남편에게 맞고,더군다가 그 맞은 원인이나 동기 제공이 자신이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했고 그러한 외도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욱하고 때린 것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속말을 하고 털어놓고 상의를 할 수 있겠는가?
오스트리아의 인지학자 발도르프는 1900년대 초반 획기적인 교육방식을 개발하여 시행함으로써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발도르프 교육은 주로 어린 아이들에 대한 교육방식이지만, 오늘날 나이 든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방식으로 삶의 지혜를 가르킬 필요가 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물질만능주의, 극도의 개인주의 및 이기주의, 프리섹스풍조, 무한경쟁사회, AI인공지능시대에서 감성을 중요시하고, 예술교육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미적 감각을 통해 들여다보고 내적 자유를 추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학습이 필요하다.
그래야 인생을 아름답고, 보람있고,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결혼생활 잘 하고,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발도르프 교육의 요점>
발도르프 교육(Waldorfpädagogik)은 20세기초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가 제창한 교육 사상 및 실천으로 독일에서 시작된 대안교육을 말한다.
발도르프 교육은 남녀공학, 에포크수업, 전인교육, 성적이 없는 성적표, 교과서 없는 수업, 외국어 수업의 발달, 자치 행정 등이 있다.
슈타이너는 학습지도의 경제성, 치유적인 수업, 신체와 정신 발달의 관련성을 연구하였다.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신체-정신-영혼의 조화로운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신체(손과 발)을 이용하여 정신과의 협력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노작교육'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개별 학생을 고려한 전인 교육>에 초점을 두고, 인지적 영역에 치우친 교육에 반대하고, 신체와 정신적 성장에 맞춘 의지, 감각, 사고의 조화로운 발달을 교육의 목표로 삼는다.
학생들이 예술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적 자유를 획득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특히 예술교육의 비중을 높이고 있다.
<인생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나침반과 시계를 보고 있어야 한다.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정말 올바른 길인가? 혹시 앞에 사나운 짐승이나 낭떠러지가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랑 대신 증오와 불신만 가득 차 있는 늪은 없는지? 그리고 나라는 존재에 주어진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지?>
사랑에 있어서 질투와 의심은 치명적인 병이다. 이 병은 사랑을 완전히 파괴한다. 사랑을 철저하게 마비시킨다. 그러므로 공연히 의심하지 마라. 질투하지 마라.
처음 몇 번은 괜찮다. 사랑하니까 이해한다. 이해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질투와 의심이 반복되면 상대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다. 인내의 한계에 이르는 것이다.
상대는 그것은 곧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왜 나를 믿지 못할까?’ ‘내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는데 왜 그럴까?’ ‘혹시 상대방이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 아닐까?’
대부분 반복되는 질투와 의심은 결국 사랑을 깨뜨리고 만다. 예를 들어 가까운 사람이 자신을 도둑으로 의심한다고 가정해 보자. 두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는 끝나고 말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 믿고 존중해야 사랑이 가능할 것인데,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고, 무조건 바람 피는 것으로 오해하고, 여러 사람과 연애를 하는 것으로 의심하는 경우, 상대방은 더 이상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어떻게 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잡은 손 이제 그만 놓을 게
수척해진 얼굴 안쓰러워 못보겠어
미안해하는 표정을 보면
알 것 같아 이젠 나를 떠난 너인 걸>
- 브라운 아이드 소울, 비켜줄게, 가사 중에서 -
<사랑하면 질투심도 생기고, 의심병도 생긴다. 하지만, 이러한 질투와 의심은 정도가 심해지면, 그 사랑을 파괴시킨다.>
사랑은 언제나 처음과 똑같은 상태로 오래 가기 어렵다. 사랑은 말로 쉽게 설명할 수 없다. 사랑은 보이는 것도 아니고,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다. 그때그때 분위기와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아무리 두 사람이 값비싼 다이아몬드반지를 놓고 신부님 앞에서 혼인서약을 해도 소용없다.
사랑은 두 사람의 이성과 감성을 혼합한 채로 두 사람이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두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두 사람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사랑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주인이 아니고, 노예의 신분이다. 노예는 어떤 것도 자발적으로 결정하지 못하는 피동체다.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지시하는 대로, 사랑이 의도하는 대로 따라서 움직여야 하는 가련한 처지에 있는 것이 바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사랑의 지시를 이행할 수도 없다. 엇박자가 나는 까닭이다. 사랑의 지시는 매우 엄격하다. 그래서 곧 사람을 질식하게 만든다.
사랑은 결코 단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충분한 시간과 세월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조급하다. 곧 작은 노력으로 사랑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얻으려고 한다. 더 이상 노력하지 않고 영원히 사랑의 열매를 따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림없는 이야기다.
사랑은 주인이지 결코 노력의 성과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번 손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방심해서는 곧 빠져나간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먼저 사랑의 실체,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단순한 감정의 이끌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사랑을 생각했다가는 큰 코를 다치게 된다.
사랑의 부작용이 얼마나 큰지는 대번 알게 된다. 함부로 사랑한 사람들은 패가망신한다.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된다. 현실적으로 결별, 파혼, 이혼,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 불륜, 꽃뱀, 제비족 등으로 나타난다.
사랑하기 전에 왜 사랑해야 하는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은 무엇인가? 사랑의 생리학과 병리학을 연구해야 한다. 임상에 들어가기 전에 상대방을 잘 분석하고 선택하여야 한다.
선뜻 대상을 선택하면 나중에 감당할 수 없는 배신과 복수를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체나 동물의 해부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체적인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함부로 사랑하지 마라! 사랑을 잘못하면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사랑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고 달려들어라. 사랑은 자신의 영혼을 담을 깨끗한 도자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잘 관리해야 상대방을 사랑에 빠뜨릴 수 있다. 이때 이미지는 정신적 이미지도 있지만, 대개는 육체적 이미지를 의미한다. 스포츠 선수들이 일반적으로 강한 이미지를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운드에 서서 최선을 다하는 투수의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 때문에 팬들이 생기고, 이성으로 사랑의 감정까지 느끼게 된다.
정신적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진지한 자세로 무언가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은 순수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그런 이미지 때문에 상대방은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가난한 시인을 사랑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베르테르가 로테를 발견했을 때, 로테는 빵을 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라디바의 주인공 하놀드가 사랑한 사람은 걸어가고 있는 여인, 그것도 저부조의 틀 속에 포착된 모습이었다.
이렇듯 나를 매혹하고 황홀케 하는 것은 어떤 상황 속에 있는 육체의 이미지이다. 내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작업하는 모습이 나를 흥분케 한다. 늑대 인간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젊은 하녀 그루샤도 무릎을 꿇고 마루를 닦고 있었다.
작업 중의 자세란, 어떻게 보면 이미지의 순진성을 보장하는 것이기에, 그 사람이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모습, 혹은 그의 무관심의(내 부재에 대해) 기호를 보내면 보낼수록 나는 더 확실히 그를 놀라게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마치 사랑하기 위해서는 기습과도 같은 고대의 유괴 양식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과도 같다.>
-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사랑의 단상, 278쪽에서 -
사랑에 빠지는 현상을 분석해보면 거기에는 분명 순간적인 이미지의 연상작용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수하고 청순한 이미지는 바로 본인이 의도하지 않고 있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주관적인 인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에게서도 강렬한 순수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에게서도 사랑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능력이 숨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잘 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모든 것을 가감없이 모두 드러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연인 앞에서는 시도 읽고, 로맨틱하게 보이기도 해야 한다. 비가 오는 날에 센치하게 밖에 나가 우산속에서 커피도 마셔야 한다.
결혼해서도 마찬가지다. 가끔은 철학책도 읽고, 집에서는 가급적 내복 차림으로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좋다. 품위를 지키는 것은 결국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다.
사랑에는 언제나 대상이 존재한다. 그 대상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하지만 누구나 사랑할 때 상대방의 정확한 내면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상대방이 의도적으로 많은 것을 감추거나 분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 이미 상대방에 대해 좋은 선입관을 가지고 그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정확한 인식과 판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모순이며, 사랑이 일반적인 거래와 다른 점이다. 상대방에 대한 파악이 불충분한 것은 나중에 많은 불행이 초래된다. 롤랑 바르트도 이런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나는 이런 모순에 사로잡힌다. 나는 그 사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또 그에게 그 사실을 의기양양하게 시위한다(“난 당신을 잘 알아요. 나만큼 당신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요!”). 그러면서도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도, 찾아낼 수도, 다룰 수도 없다. 나는 명백한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나는 그 사람을 열어젖혀 그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수수께끼를 풀어헤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어디서 온 사람일까? 그는 누구일까? 나는 기진맥진해진다. 나는 그것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195쪽에서 -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쉽게 착각을 한다. 상대방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구체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별로 아는 것이 없다. 그의 진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그것이 사랑의 모순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에 그냥 만족하면 된다. 그것을 다시 왜곡하지 마라. 상대방의 진실한 모습을, 완벽한 존재의 모습을 찾아내려고 하지 마라. 자신의 눈에 비친 그의 현재의 모습이 그의 존재의 그림자라고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