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사랑’을 피하라

 

남자는 나이 들면 젊잖아져야 한다.

 

60살이 되었을 때, 남자가 가정 다 버리고 여자 10명과 자유분방한 연애를 했다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어떤 남자는 좋은 대학을 나왔는데도, 직장에서도 낙오자가 되었다. 그 이유는 일 열심히 하지 않고 남들 일할 때 10명과 순차로 연애와 성관계를 열심히 했던 까닭이다.

 

자녀들도 공부 못해 취직도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있다. 모두 아빠가 열심히 바람을 피고 가정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하나의 사랑’의 가치이면 소중함이다.

 

어떤 가장은 능력이 있어 사회적으로 출세를 하고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외도를 했다. 그 외도가 성범죄로 판정을 받고 감방에 갔다. ‘하나의 사랑’에 반대하고, ‘두 개의 사랑’ 이론에 심취했던 까닭이다.

 

어떤 전문직종에 있는 잘 나가는 사람은 업자로부터 성접대를 받았다. 아무런 애정 없이,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공짜와 다른 여자와 성관계를 한 것이다. 마지 못해 응해주는 여자와 성관계를 해서 그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 순간의 쾌락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사람도 ‘두 개의 사랑’의 폐해와 부작용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어떤 똑똑한 사람은 술집에서 만난 여자와 정을 통하다가 혼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평생 시달리다가 죽었다. 아까운 재산을 그 혼외자에게 물려주어야 했다. 그 술집 여자는 거액을 상속 받아 혼외자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갔다.

 

그곳에서 건달 미국인을 만나 재산을 모두 날렸다. 이런 케이스 역시 ‘두 개의 사랑’이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람은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해 준 순정녀를 배신하고 출세한 다음 부잣집 사위가 되었다. 순정녀는 정신병자가 되고 폐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호화아파트에서 외제차를 타고 해외여행을 부인과 즐겼다. 그러다가 교통사고로 부부는 동시에 사망했다. ‘하나의 사랑’과 ‘두 개의 사랑’이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두 개의 사랑’을 피하라

 

남자는 나이 들면 젊잖아져야 한다.

 

60살이 되었을 때, 남자가 가정 다 버리고 여자 10명과 자유분방한 연애를 했다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어떤 남자는 좋은 대학을 나왔는데도, 직장에서도 낙오자가 되었다. 그 이유는 일 열심히 하지 않고 남들 일할 때 10명과 순차로 연애와 성관계를 열심히 했던 까닭이다.

 

자녀들도 공부 못해 취직도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있다. 모두 아빠가 열심히 바람을 피고 가정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하나의 사랑’의 가치이면 소중함이다.

 

어떤 가장은 능력이 있어 사회적으로 출세를 하고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외도를 했다. 그 외도가 성범죄로 판정을 받고 감방에 갔다. ‘하나의 사랑’에 반대하고, ‘두 개의 사랑’ 이론에 심취했던 까닭이다.

 

어떤 전문직종에 있는 잘 나가는 사람은 업자로부터 성접대를 받았다. 아무런 애정 없이,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공짜와 다른 여자와 성관계를 한 것이다. 마지 못해 응해주는 여자와 성관계를 해서 그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 순간의 쾌락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사람도 ‘두 개의 사랑’의 폐해와 부작용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어떤 똑똑한 사람은 술집에서 만난 여자와 정을 통하다가 혼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평생 시달리다가 죽었다. 아까운 재산을 그 혼외자에게 물려주어야 했다. 그 술집 여자는 거액을 상속 받아 혼외자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갔다.

 

그곳에서 건달 미국인을 만나 재산을 모두 날렸다. 이런 케이스 역시 ‘두 개의 사랑’이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람은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해 준 순정녀를 배신하고 출세한 다음 부잣집 사위가 되었다. 순정녀는 정신병자가 되고 폐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호화아파트에서 외제차를 타고 해외여행을 부인과 즐겼다. 그러다가 교통사고로 부부는 동시에 사망했다. ‘하나의 사랑’과 ‘두 개의 사랑’이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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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할 때는 똑 같이 나눠줘야 한다>

 

이혼에 있어서 재산분할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부가 혼인 중에 가지고 있었던 실질상의 공동재산을 청산하여 분배함과 동시에 이혼 후에 상대방의 생활유지에 이바지하는 데 있다.

 

부부는 100% 경제공동체로 보아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생활에 기여를 하였든, 일단 결혼해서 적어도 5년 이상 살았다면, 경제에 관해서는 똑 같은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 옳다.

 

현행법처럼 결혼할 때 가지고 온 고유재산은 가져온 사람의 개인 재산이고, 공동재산이 아니라고 보는 법적 의제는 현실을 너무 무시한 탁상이론이다.

 

그런 마인드로 결혼하고, 셜혼생활하는 부부는 거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두 사람이 치킨집을 공동으로 5년간 경영하다가 동업관계를 청산할 때, 많이 벌었든, 적게 벌었든, 똑 같이 나누어 갖는 것이 공평하지, 치킨집 차렸다고 그 사람이 치킨집을 그대로 혼자 가져가고, 증식된 이익만 나누자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더군다나 그 동업을 20년 또는 40년 한 경우에도 똑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면 이는 형평에 맞지 않고, 동업의 개념에 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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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랑 vs. 두 개의 사랑>

 

얼마 전 내가 페북에 ‘하나의 사랑’ 이야기를 썼다.

사랑을 분산시키지 말라는 취지였다.

 

‘두 개의 사랑’은 불행을 초래한다고 썼다.

 

사랑이 하나이어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사람의 심장은 오직 하나뿐이다. 뇌도 한 개다. 심지어 성기도 하나다.

때문에 사랑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심장, 하나의 뇌, 하나의 성기를 가지고 두 개의 사랑을 동시에 하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라, 육체의 희락으로 전락한다.

 

두 개의 사랑은, 각각의 사랑 자체의 농도를 떨어뜨리며, 순수성을 상실시킨다. 두 개의 사랑은 대등한 관계에서 상호 간에 비방을 하게 되며, 저주를 하게 된다. 다른 사랑에 대한 저주와 원망이 바로 그 사랑을 파괴한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이고 수단이다. 그런 사랑에 평화와 축복이 아니라, 전쟁과 저주가 개입하게 되면, 그건 애당초 처음부터 부존재했어야 할 사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하나의 사랑을 끝까지 유지하거나, 두 개의 사랑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이유는 ‘하나의 사랑’에 대한 사고와 인식을 그 누구도 교육시키거나, 본인 스스로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나중에 나이 들어 깨닫는다. ‘하나의 사랑’이 진정한 사라이며, 인간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과, ‘두 개의 사랑’은 언뜻 보기에는 좋아보이지만, 결국 그런 사랑을 하는 본인도 행복 보다는 불행이,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작용보다는 부작용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중에 왜 그랬던가 후회도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본인과 두 명의 상대로 하여금 복잡한 애정관계에 휩쓸리게 함으로써 헝클어진 ‘애정의 그물’ 안에서 얼키고 설켜 삼자간에 진흙탕 싸움을 하다가 지쳐서 쓰러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두 개의 사랑 또는 복수의 사랑을 하는 사람, 꿈꾸는 사람, 경험했던 사람을 절대 부러워하지 마라. 그들은 사랑 때문에 불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사람들이고, 본인 스스로 사랑 때문에 불행했다고 자책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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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남과 재혼녀 (1)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Where do I begin this tragic story?) 이 비극적인 삶의 이야기를! 나는 이 사건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인간의 불쌍한 모습,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을 마주하면서 연약한 실존이 겪는 고통과 고난을 생각했다.

 

인간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예상치 못하는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럴 때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자칫 잘못하면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수렁에 빠져 신음할 수 있다는 사실, 그렇게 죽어가면서 혼자 모든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 잘못되면 그 누구도 도움이 못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비정한 현실을 생각하면서 인간지옥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현실, 고통의 본질, 그리고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할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에 합당한 하나님의 뜻은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어떤 고난을 당해도 그 안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시편 119:67~72)'

 

재혼남과 재혼녀 (2)

 

철수(43, 가명)는 구속되어 있었다. 순간의 잘못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고 그 대가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상해치사죄(傷害致死罪)사건에 있어서 피고인의 신분이다. 그 전까지는 회사의 임원이었는데 갑자기 일어난 사건 때문에 피고인이라는 형사소송법상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법률가들은 그를 피고인(被告人)이라고 부른다.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그의 이름은 중요치 않다. 피고인이라는 공식적인 명칭으로 불리워진다. 구치소에서는 수감자가 된다. 그리고 수감번호가 붙여진다. 호적상의 이름은 아주 드물게 확인될 뿐이다.

 

피고인 겸 수감자인 철수는 법에 의해 자유가 통제되었고, 사슬에 묶인 개처럼 끌려다니고 있다. 아주 제한된 길이의 끈에 묶여있는 개를 볼 때가 있다. 그 개는 자유롭게 초원을 돌아다니는 들개와 똑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

 

똑 같이 뛸 수 있고, 똑 같은 것을 먹고, 똑 같은 방식으로 잠을 자고, 수컷과 암컷이 종족번식을 위해 교미를 한다. 그러나 묶여 있는 개와 초원의 개는 전혀 다른 존재다. 하나는 살고 싶지 않은 상태고, 하나는 살고 싶은 상태에 있다.

 

구치소 안에서는 기상시간과 취침시간이 통제되고, 운동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생활리듬에 따라 자고 일어나야 하는데, 그것이 강제된다면 어떨까?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옆으로 누워 칼잠을 자야하는 수감자들은 이런 저런 근심과 불안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갑자기 달라진 잠자리에 적응하기도 어렵고, 옆사람이 언제 잠꼬대를 하면서 코를 쳐서 부러뜨릴지도 모른다. 동성 간에 살이 닿는 촉감도 좋을 수는 없다. 더운 여름에는 사람의 살이 닿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한다. 술과 담배에 찌들은 사람들과 한방에서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코도 아예 닫아놓고 지내야 한다.

 

평소 즐겨하던 컴퓨터 인터넷도 할 수 없다. 인터넷에 중독된 사람은 그게 가장 힘이 들 것이다. 속이 상할 때 술을 마실 수도 없다. 가슴이 답답할 때 담배도 피울 수 없다. 가을을 맞아 그 은은한 단풍을 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철수는 TV에서 사람들의 단풍놀이 장면만 보아도 숨이 막혔다.

 

재혼남과 재혼녀 (3)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자체로 축복이고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서야 행복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렇다. 인간에게는 평안 그 자체가 지극히 커다란 행복이다.

 

마음 속에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이 없는 상태, 그런 평안이 당연한 것처럼 살고 있지만, 막상 평안을 상실한 고통을 겪게 되면 평안이 얼마나 중요한 삶의 기본요소인지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기본적인 내적 심리적 평안을 전제로 더 나아가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평안은 행복을 추구하기 이전에 인간 실존이 갖추어야 할 삶의 기본적인 전제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돈과 명예를 가지고 있어도 하늘은 까맣게 보이는 것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하늘색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람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 영적인 존재인 사람은 하늘과 떨어져 존재하지 못한다. 그게 동물과의 차이다. 무의식 상태에서도 사람은 하늘을 생각한다. 영혼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생을 마감하면 다시 돌아가야 할 영원한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어두우면 하늘색이 달리 보인다. 파란 하늘도 까맣게 보이고, 노랗게 보인다. 갑작스러운 불행을 당하거나 충격을 받으면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 하늘색깔이 달라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머릿속은 하얗게 백지상태가 되며 하늘은 까맣게 변한다.

 

재혼남과 재혼녀 (4)

 

철수는 딱딱한 나무 바닥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욥기 7:4)' 구치소의 밤은 길다.

 

그 긴 밤을 혼자 많은 생각을 하면서 지내야 한다. 실존의 외로움과 고통, 질병을 동시에 겪어야 하는 수감자들은 오늘도 밤에 옛날 욥이 그랬듯이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왜 이런 불행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을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들이 많다.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이 갑자기 당하는 불행한 일들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 결과는 어떠한 것이며, 그에 대한 해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결론과 답을 제시한 사람들은 없다.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소망이 있고 불의가 스스로 입을 막느니라(욥기 5:6~9,16)'

 

평범하게 살아온 회사의 중견 간부가 갑자기 구속되어 직업적인 범죄꾼들과 한 방에서 살아가고 있다. 서로가 다른 환경, 사고,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좁은 방에서 몇달씩 지내야 한다.

 

그들은 서로를 경멸하고 있었고, 똑 같이 세상을 증오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불신하고, 남에 대한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갇힌 공간에서는 누구나 비슷한 행동을 보인다. 원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구속되면 어쩔 수 없다. 일부 사람들은 폐쇄공포증을 가지고 있어 구속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죄를 짓고 추락한 자기 자신도 싫어지는 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곁에 있는 사람들조차 싫어지는 상황이 되면 구속돤 사람들은 견뎌내지 못한다. 자신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교도관은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다.

 

재혼남과 재혼녀 (5)

 

열악한 구치소 환경에다가 이런 사람들의 조건, 자기 자신의 내적 여건을 감안하면 구치소는 가장 무서운 인간지옥임에 틀림없다. 여기에서 살아나오는 것은 무서운 지옥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교도관들은 무서운 존재였고, 차디찬 감방에서 삭막한 사막을 걸어가야만 했다. 불안과 공포는 모두 느끼는 공통과목이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구치소에서 교도소에서, 그리고 경찰서 유치장에서 신음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모두 상실한 채 동물처럼 묶이고 갇혀 생활하고 있다. 그들에게 보장되는 인권과 인격은 그야말로 형식적인 가치일 뿐이다. 사회가 존속하는 한, 인간이 원죄(原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법이 존재하는 범위에서 이런 지옥현상은 영원히 되풀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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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사랑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랑을 하고 후회한다. 그리고 인생을 망친다. 부질 없는 사랑 때문이다. 왜 그럴까?

 

① 다른 사람의 사랑에 끼어드는 것이다. 남의 가정을 깨는 것이 제일 나쁘다. 그것은 극도의 이기심 때문이다. 이미 깨어졌다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 사랑이 완전히 깨어진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반칙이다.

 

② 결혼 전이라도 남의 애인을 빼앗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오래 된 애인을 배신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는 사람은 인간성이 나쁘기 때문에 벌을 받게 되어 있다.

 

③ 쉽게 몸과 마음을 주는 사랑은 어리석다. 순결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가 진실하지 않고, 그냥 육체를 탐하거나, 엔조이하려는 것을 모르고 상대에 이끌려 가는 것을 등신이라고 한다. 등신은 아프리카 말이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되어 있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④ 결혼 상대를 저보다 못한 사람을 인간적으로 미안해서 결정짓는 사람은 바보라고 한다. 그런 바보는 부모와 사이가 나빠지고, 나중에 바보 자녀를 낳고, 평생 고생하다 좋은 시절 다 보낸다.

 

⑤ 사랑을 농락하지 마라. 여행지에서 며칠 동안 잠자리를 하는 것 같은 사랑을 탐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든, 농락 당하는 상대는 이를 갈고, 복수를 하려고 할 것이다.

 

⑥ 한번 실패한 사랑은 가급적 더 이상 사랑에 도전하지 마라. 그건 자신이 사랑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냥 조용히 혼자 열심히 일이나 하면서 살도록 하라.

 

⑦ 육체적인 사랑에서 정신적인 사랑으로 전환하라. 가급적 빨리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랑은 곧 소멸한다.

 

⑧ 경제적 능력을 무시하지 마라. 사랑만 가지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는 50년 전에 사라져버렸다.

 

⑨ 너무 추상적인 사랑에 빠지지 마라. 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이상적인 사랑, 비현실적인 사람을 추구하는 사람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잘 모르겠다. 소설은 대개 거짓말이고, 허위 과장이다. 영화도 현실에 가까우면 흥행에 실패하고 제작자는 부도난다.

 

⑩ 사랑을 돈으로 사려고 하지 마라. 그게 성매매다. 성매매는 단속에 걸리고, 에이즈에 감염될 우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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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학습과 경험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도 사랑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 스무살이 되어도 자신이 사랑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을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끝까지 전혀 사랑을 모르고 마흔살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 중에 일부는 본인은 사랑에 대한 개념이나 관심이 없는데, 다른 이성이 적극적으로 구애를 함으로써 그에 이끌려 사랑의 감정을 느끼거나 성관계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대체로 자신보다 조건이나 환경이 좋지 않은 상대에 의해 사랑의 관계가 진행되기 때문에, 부모는 더 이상의 진행에 반대하고, 결혼에 동의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 교육이나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감성에 지배되어 버린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상대가 괜찮은 줄 알고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제를 계속하며 심지어는 동거 내지 결혼까지 나아간다.

 

그러다가 2~3년이 지나면 육체관계의 한계효용이 떨어지고, 현실을 깨닫게 된다. 상대 역시 자신의 역할로 적극적인 사랑을 얻었지만, 너무 쉽게 얻어진 사랑에 대한 호기심도 사라지고, 넓은 세상에서 또 다른 이성에 이끌리는 자연스러운(?) 모순에 빠진다.

 

두 사람은 점차 권태를 느끼고, 경솔했던 사랑에의 이끌림을 후회한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사회의 시선과 윤리, 타인의 비판을 종합해 보면, 그들은 분명 사랑의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실패, 시행착오는 생각보다 그 결과가 치명적이다. 성에 관한 인식이 크게 바뀔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때문에 사랑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먼저 사랑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를 해야 한다. 충분히 공부를 한 다음, 사랑에 접근하거나, 사랑의 공격행위를 해오는 상대에 대한 대응 및 반응을 보여야 한다.

 

사랑에 대한 학습효과와 경험은 우리의 아름다운 삶, 인생을 지켜주는 좋은 예방주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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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병리학 고찰

 

 

사랑의 의미는 무엇일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사랑은 다른 사람을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다른 사람을 아끼고 위하며 소중히 여기는 마음, 어떤 대상을 매우 좋아해서 아끼고 즐기는 마음을 말한다.

 

사랑하다라는 동사의 의미는, 낭만적이거나 성적인 매력에 끌려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다, 매우 좋아해서 아끼고 즐기다, 낭만적이거나 성적인 매력에 끌려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다는 뜻을 가진다.

 

사랑은 인간에게 매우 소중한 가치를 가진다.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삶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다. 사랑은 인생을 감성적으로 풍성하게 한다. 삭막한 현실에서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한다. 사랑은 더 나아가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끈끈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초를 제공한다.

 

하지만 사랑의 이러한 긍정적인 작용 및 기능 못지않게 사랑에는 치명적인 병리현상이 존재한다. 사랑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하고, 비대칭적이며, 가변성을 내포한다. 인간의 사랑은 신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의 변화를 보면, 인간의 생로병사와 비슷한 사이클을 거친다. 사랑이 형성되고 시작되는 과정 자체도 매우 고통스럽다. 심한 출산의 진통을 겪는다. 진정한 사랑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시간이 가면 자연히 쇠퇴한다. 인간이 늙어서 힘이 없어지고 무기력해는 것과 같다. 사랑도 세월에 따라 딱딱한 껍질에 쌓여 물기 는 나무 껍질처럼 변한다. 그것은 이미 사랑의 형태만 갖추었을 뿐 사랑의 엑기스는 모두 빠져 있는 상태다.

 

사랑도 병에 걸린다. 사랑을 파괴시키는 병원균은 다양하다. 상대가 변하거나 내가 변하는 것이 첫 번째 질환이다. 3자가 개입하여 복잡하게 만드는 경우도 치명적인 질병이다. 애정이 식어서 권태롭게 되는 것도 심각한 병이다.

 

끝으로 사랑도 소멸하는 시기가 있다. 육체적인 소멸도 있지만 정신적인 소멸도 있다. 이것은 사랑의 실종을 의미한다. 사랑이 아예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2.

사랑의 병리현상은 이와 같은 사랑의 생성 - 변화 - 변질 - 소멸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비정상적이며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현상을 총체적으로 의미한다.

 

사랑의 병리현상을 분석하고 이를 치유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상처받는 것을 예방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맹목적으로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받아들였다가 인생을 망치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모르면서 현실적인 조건만 보고 결혼했다가 얼마 있지 않아서 갈라서는 커플들에게도 조언이 필요하다.

 

한 사람에게서 만족을 하지 못하고, 끝없이 새로운 사랑을 찾아나서는 사랑의 사냥꾼도 알아두어야 할 사랑의 법칙을 제시할 사회적 수요도 적지 않다.

 

사랑에 대해 진지함을 결여한 채 성적 농락을 일삼다가 패가망신하고 있는 me too 운동의 대상자들이 사전에 알아두었으면 하는 교훈도 사랑의 병리학에서 찾아야 한다.

 

사랑이 육체와 영혼의 균분점에서 찾아야 한다는 고전적 명제를 무시하고 단순히 동물적인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을 찾다가 성매매사범으로 입건되고, 꽃뱀이나 제비족에게 걸려서 망신을 당하는 사람들도 사랑의 병리현상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벌 아들이나 손자와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가 몇 년 되지 않아 지옥에서 맨몸으로 탈출하거나 거액의 위자료를 받아가지고 나오는 미모의 여성도 사랑의 실패자임에는 틀림 없다.

 

이런 저런 이유로 처음부터 정상적인 사랑에 환멸을 느끼고 외로운 독신을 고집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사랑의 긍정적인 면을 보지 못하고 부정적인 면만 보는 편견에 사로잡힌 것 같아 안타깝다.

 

3.

예전과 달리 현대사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최대한 보장되고 있다. 혼인빙자간음죄나 간통죄는 이제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져버렸다.

 

성개방의 물결 속에서 혼전 순결의 개념은 애당초 논의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 문제는 결혼제도에 있어 법과 현실의 커다란 괴리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결혼하기 전에 다른 이성과 동거하거나 임신과 낙태를 경험하고 결혼한 다음, 일부일처제의 엄격한 법적 테두리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쉽게 일탈을 시도한다.

 

법은 아직도 결혼한 남자와 여자에 대해 아주 엄격한 법적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정조의무와 순결의무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배우자 있는 사람은 배우자 이외의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육체적인 성관계는 없어도, 정신적으로 서로 좋아하고 연애를 하는 것도 금지된다. 매일 서로 전화를 하고 자주 만나고, 연애를 하는 것이 밝혀지면, 그러한 행위는 배우자에 대한 불법행위가 된다.

 

간통죄라는 범죄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족법상 배우자에 대한 부정행위헤 해당되어 불법행위자가 된다. 그 때문에 배우자에 대해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 이른바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생긴다. 뿐만 아니라 배우자가 원하면 그러한 부정행위는 이혼을 당한 유책사유에 해당한다.

 

사랑이 없는 섹스도 금지된다. 이른바 성매매가 여기에 해당한다. 돈을 주고 사랑은 사고 팔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섹스를 돈과 연결시키면 그것은 곧 바로 범죄행위가 된다.

 

4.

간통죄가 없어졌기 때문에 남녀간의 사랑에 제3자가 불법적으로 침범하는 경우는 더 많아졌다. 종전에는 간통죄라는 무기가 있었다. 애정관계에 제3자가 침입하는 경우 간통죄로 감방에 보낼 수단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간통죄가 없어졌다.

 

남녀가 만나는 기회도 예전과는 다른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많은 경우 인터넷으로 짝을 찾는다. 결혼의 경우에는 직업적인 결혼정보회사를 이용하기도 한다. 옛날처럼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여자를 뒤따라 가서 구애를 했다가는 성추행범으로 신고될 위험성이 높다.

 

정상적인 사랑을 하기 어려운 일부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상당수는 정신적 질환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 길에서 자위행위를 하다가 체포되는 남자도 있고, 갑자기 여자를 보고 바바리코트를 벗어제끼고 남성의 알몸을 보여주고 도망가는 바바리맨도 있다.

 

혼잡한 지하철에서 여자의 신체에 밀착하여 성적 쾌감을 느끼는 지저분한 사람도 있다. 애인과 성관계 동영상을 촬영했다가 애인이 변심하면 인터넷에 올려 매장시키는 악질도 있다.

 

길을 가는 여자의 다리만 몰래 찍은 남자는 법원에서 카메라이용촬영죄로 기소되었다가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다리만 찍은 경우에는 성적 수치심이 느껴지는 신체의 부위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인데, 그 판결은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만일 그 판결이 대법원에서도 확정되면 정부에서는 빨리 경범죄처벌법에라도 처벌조항을 넣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길에서 다른 여자들의 다리를 몰래 매일 찍고 다니는 남자를 처벌하지 못하는 것은 법의 잘못된 공백이 아닐까 싶다.

 

5.

최근 우리 사회는 남녀간의 성관계가 합의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강요에 의한 것인가?’가 크게 문제되고 있다. 성인 여자의 경우에도 진정한 자유의사에 의한 동의를 받지 않은 경우라면, 성폭력범죄에 해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직장의 상급자가 자신의 부하여직원을 간음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업무상위력에 의한 간음죄가 바로 이 경우이다.

 

따라서 남자들은 애매한 성관계를 할 때에는 여자의 동의 여부에 관해 비밀녹음을 하든가 하는 식으로 증거를 남겨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직에서도 추방되고 구속되거나 패가망신할 소지가 있다.

 

요새는 혼인한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인정된다. 성관계도 뇌물죄에 있어서 뇌물에 해당한다. 성에 대한 모든 인식과 개념이 예전과 달리 크게 변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사랑의 병리현상에 대해 본질적이고 체계적인 분석을 하려고 한다.

 

 

사랑의 상실은 우울증을 초래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진한 슬픔에 빠진다. 그것은 자신과 상대가 오랫동안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었고, 둘이 연관되어 있었던 시간과 공간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몇 년 동안 살던 방에서 먼곳으로 이사를 가면, 그 방에 대한 기억과 주변 동네 풍경에 대한 기억은 오래 남는다. 시간이 가면 때로 강하게 그리워질 때가 있다.

 

사랑했던 사람과 같이 지내던 시간과 공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살을 맞대고 체온을 나누고, 사랑의 밀어를 공유했던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사라지면 개인은 깊은 슬픔에 빠진다. 이때의 슬픈 감정은 상실된 대상과 자아가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사랑의 상실은 잘못하면 우울증으로 연결된다. 우울증이라 함은, 프로이트에 따르면, 리비도의 재투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하고, 그 때문에 그 대상으로 인해서 대상화된 자아를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됨으로써 나타나는 심리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 착안해서 프로이트는, “우울증이란 자아가 빈곤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정의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 있어서 리비도는 그 사람이 상실한 대상에 고착되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만들었던 <작은 세상> 내지 <작은 우주공간>을 상실한 사람은 더 이상 그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재창출할 자신감을 가지지 못한다.

 

그 때문에 그는 우울해지며, 무기력해지고, 자기비하에 빠진다. 마침내 그는, “나는 살 수 없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자포자기, 자기정체성의 상실의 상태가 된다. 심지어 그는, <죽음충동 / Todestrieb)까지 느끼는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자신을 몰고 갈 수 있다 .

 

프로이트에 의하면, 개인이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을 상실하게 되면, 그 개인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나르시시즘적으로 동일시하게 되고, 이러한 <대상의 상실><자아의 상실>로 바뀌게 된다.

 

 

 

사랑의 현실 ... 그 냉정함을 잊지 마라

 

함부로 사랑하지 마라세상의 지혜와 경험이 항상 우리에게 하는 경고의 말이다. 이런 경고를 무시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사랑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현실을 가볍게 생각한 상태에서 서툰 사랑의 길을 들어섰다가는 인생을 망칠 위험성이 있다.

 

냉정한 현실 앞에서 무조건 사랑타령을 해서는 안 된다. 현실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정립한 다음, 사랑을 찾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사랑의 개념 조차 없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내가 없는 상태에서의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나와 너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기 위해서는 너 보다는 내가 더 강하게 서야 한다. 나를 강하게 세운 다음 너를 나의 끈에 잇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기본원리가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일시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긴 안목에서 보아야 한다. 몇 년 후에 그 사랑이 어떻게 될 것인지 한번쯤 생각해 보고 사랑하는 게 좋다.

 

허망한 사랑의 종말 ... 책임지지 못하는 남자

 

어떤 여자가 절망에 빠졌다. 공황상태가 되었다.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평범하게 살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43살인 그녀는 남편과 아이 한 명을 둔 가정주부였다. 남편은 직장에서 안정된 상태였고, 아이는 8살이었다. 그런데 삶에 권태가 찾아왔다. 그러던 중 동네 수영장에서 알게 된 유부남을 자주 만났다.

 

주로 그 남자의 차 안에서 데이트를 했다. 유부남과 연애를 했지만, 나름대로 가정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그 유부남도 바람을 피웠지만, 가정에도 별 불만이 없었다.

 

1년 가까운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그 유부남의 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차안에 설치된 블랙박스를 통해 자신의 남편과 연애한 사실을 확인하고, 남편으로부터 자백을 받았다는 것이다.

 

곧 위자료소송을 할테니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여자는 놀라서 유부남에게 전화를 했다. 유부남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여자는 자신의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또 며칠 지나서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편은 여자를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어린 아이를 놓고 여자는 집에서 쫓겨났다. 일단 친정으로 갔다. 남편은 돈 한푼 못주겠다고 하면서 이혼하자고 했다.

 

이혼하고 아이는 남편이 키우겠다고 하면서 여자보고 양육비를 매달 70만원씩 보내라고 했다.

 

한 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져버렸다. 여자는 무엇 때문에 의미 없는 연애를 했을까? 새로운 사랑을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다. 삶의 권태 때문만도 아니었다. 세상을 잘 모르고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이었다.

 

여자에 대해 법으로 보호를 해주어야 하는데,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다.

 

이 여자가 잘못한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 여자와 같이 연애를 한 남자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 남자의 부인은 도대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또한 이 여자의 남편은 여자를 무조건 내쫓을 권리가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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