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라는 창에 비친 자화상 [4]

 

 

 

 

6. 정리와 종결

 

졸업 후에는 오히려 공부가 안되었다. 시간은 많고 뚜렷한 자극이 없어 빈둥빈둥하다가 7월초 다시 해인사 원당암으로 내려갔다.

 

해인사의 여름은 정말 시원하였다. 시원한 계곡으로 목욕하러 다니고 가야산을 올라가 보고 매일 저녁 예불을 드렸다.

 

수양하는 자세로 몸과 마음을 끼끗이 하려고 애쓰면서 책도 열심히 보았다. 부모님들이 보내주신 미숫가루를 마시면서 그 정성에 보은할 것을 굳게 맹세하였다.

 

조용한 산중에서 나의 갈 길을 확고히 하고 어떠한 난관이라도 절망하지 않고 굳게 살아갈 결의를 공고히 하였다. 비록 시험에 떨이진다 해도 다른 길이 얼마든지 있다는 자위를 하면서 다만 성실히 노력할 것을 자신에게 거듭 약속하였다.

 

침착하게 가라앉은 마음에서 산사생활을 마치고 한대교내의 기숙사로 들어갔다. 기숙사에서의 생활은 대체로 성실했던 편이었다. 많은 논문을 참조해 가며서 동료들과 토의하였고, 차례차례 전 과목을 정리해 나갔다. 이때에 대학원에서 특별히 마련한 특강은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양적으로 질적으로 풍부하고 견실하게 실력을 다져 나갔다.

 

12월 중순 다시 혜명도서실로 돌아와 집과 도서실을 잇는 직선코스를 시게추처럼 왕래하는 단조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도서실의 많은 사람들의 격려는 큰 힘이 되었고, 집안 식구들의 최대한의 정성에 별 불편을 느끼지 않고서도 책을 볼 수 있었다.

 

설동균 씨로부터 받은 수험잡지 약 120여권을 모두 뜯어 정리하는 여유를 보이면서 하루 하루 충실하려고 애썼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부였다고 생각할 정도의 열성을 보였던 시기였다.

 

시험은 국사를 제외하고 대체로 무난히 치루었으나, 2차부담도 있었고 해서 발표일까지는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발표 당일의 격했던 감정은 극적이었다.

 

7. 하고 싶은 말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커다란 고비를 넘기게 된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실로 고독하고 힘든 자신과의 투쟁이었다. 아무런 보장도 없는 시험을 의식하며 같은 책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읽어야 했음은 서글픈 일이었고 쉽게 권태를 느끼는 일이었다.

 

무한한 인내를 요구하는 이 시험을 마치고 약간의 여유를 갖게 된 지금 다시 한번 그때의 상태로 돌아가서 몇가지 생각나는 것을 적어보기로 한다.

 

(1) 흔히들 고시에 필요한 요소로서 건강, 두뇌, 경제를 든다. 하지만 내가 볼때에는 대체로 이러한 요소는 대동소이한 것 같다. 문제는 의지의 강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2) 1차를 경시하지 말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나 같은 경우에는 영어점수가 매번 최고 점수에 가깝게 나와 그 때문에 행정고시 1차에 3번이나 합격할 수 있었음에도 다른 과목을 너무나 소홀히 하여 사시 1차에서 3번이나 불합격하였다. 특히 어학이 부족한 노장들은 만전의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며, 적어도 1개월의 기간은 투입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3) 기본서는 한 권을 철저히 이해할 것이며, 논문은 되도록 광범위하게 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문제집보다는(물론 예외적을 매우 잘된 문제집은 그 자체로 교과서보다 효과가 크다고 본다) 교과서를 여러 번 보고 문제집은 보충적으로 참조하며 논문은 이를 교과서와 문제집 사이에 삽입하거나 타이틀만 적어 넣은 방법을 권하고 싶다.

 

8. 글은 맺으며

 

체계없이 생각나는 단편들은 적어 보았다. 그 동안의 수럼기간을 돌이켜 보면 주위에서 애쓰고 격려해 주신 분들이 너무나 많았다. 6순이 넘으신 부모님들의 헌신적이었던 뒷바라지, 형님 내외분, 누님 및 동생들의 정성과 격려는 계속해서 힘이 되어 주었다.

 

또한 모교인 서울법대의 교수님들과 한양대법대학장이신 김기선 교수님 및 동대학 여러 교수님께 감사드리며, 기타 주위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합격의 영광을 미희에게 돌리고 수험생 제위의 행운을 기원하면서 이만 졸필을 놓기로 한다.

 

[1977년 12월 28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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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이라는 창에 비친 자화상 [3]

 

 

 

5. 고난과 성숙 

 

졸업반이 되자 마음은 조급해졌고 군대문제 대학원문제가 화급한 과제로 던져졌다. 삼양동에서 신림동까지 통학을 하느라 애를 먹었고, 또 다시 어수선했던 집안 분위기는 도대체 책을 붙잡고 있게 하질 않았따.

 

공부할 장소도 적당하지 않고 해서 빈둥 빈둥하고 있노라니 답답하기 그지 없었고 무기력감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느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천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 때 느끼던 착잡한 심정은 지금도 또렷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문제가 덩어리진 채로 던져진 것이었다.

 

그러던 중 8춸초 집 근처에 있는 혜명고시원(구 아이템플고시원 - 미아리 삼거리 소재)에 등록을 했다. 에어콘까지 설치되어 있는 깨끗한 신축건물이라 공부하기에 최적한 곳이었다. 

 

이 곳에서 만난 고교선배인 채규옥 씨와 서울대 출신의 설동균 씨와 함께 trio를 구성하여 공부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공부다운 공부를 한 것이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도 잊은 채 자료를 정리하고 서로 문제를 출제하여 실전에 대비한 훈련도 하였다. 그러면서 또 다시 총 174매에 달하는 방대한 논문 '불법행위법체계의 신형상과 소송상 입증책임문제'에 착수 약 2개월에 걸쳐 이를 완성 'FIDES'에 게재 발표하기도 했다.

 

같이 졸없축제에 참석하기로 약속했던 모 여학생이 돌연 계약해지를 통고하여 쓸쓸히 도서관의 trio로써 외곽만 걷돌았고, 남들의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 같은 것들이 공부에 시달리는나에게 매우 자극적인 것이었떤 당시였지만 18회 사시에의 도전은 끈질긴 것이었다고 회상되어진다.

 

12월초 한양대학교 대학원 입시가 있었다. 많은 대학동기들이 상호경쟁한 기이한 시험이었으며, 불합격할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예상외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눈이 하얗게 온 천지를 덫은 날 마지막 졸업시험을 치루고 관악캠퍼스를 내려 오면서 나의 진로, 인생을 깊이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우선은 시험을 끝내야겠다는 사념이 몸 전체를 감싸도는 것이었다.

 

한양대학원에 들어간 대학 동기 몇 명이 그룹을 형성 합천 해인사 길상암에 도착한 것은 12월 20일 경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산사생활은 모든 것이 어렵기만 했고, 휘몰아쳐 오는 산곡의 강풍, 캄캄한 새벽에 하는 식사, 얼음장을 깨서 하는 세면 등 많은 고시생들이 으례히 하는 일이건만, 이러한 생활에 훈련이 되어 있지 않던 나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역경이었다.

 

18회 1차시험의 부담은 제대로 2차 시험을 보려는 나에게 몹시 신경을 쓰게했으나 그런대로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 때문에 어느 정도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단체생활의 특수성을 어느 정도 터득하고 산사생활에 익숙해지려고 할 때에 우리는 또 다시 장소를 옮겨야 하는 불운을 겪었다. 주지스님과의 마찰로 인해 우리는 대구에서 1차시험을 치른 뒤 서울 근교의 퇴계원에 있는 한대 기숙사에 들어가야먄 했다.

 

낯선 분위기 속에서 이를 악물고 책과 싸웠다. 영철군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열심히 책을 보는 동안 어느 정도 시험에 대한 자신을 가질 수 있었다.

 

퇴계원의 들판에 서서 밤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우주 속에 나 혼자만이 존재하는 듯한 묘한 착각을 일으켰고 그 때 느꼈던 고독감은 정말 표현이 어려울 정도로 처절한 것이었다.

 

밤에 기름난로에 끓여먹던 라면은 그렇게 맛이 있을 수 없었고, 하루 2개씩 먹던 날계란은 매우 고소하였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마음만은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시험을 끝내야겠다는 집념은 잠이 들지도 못하게 하였고 추운 줄도 모르게 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1차 수석을 기대하고 있었던 내가 1차 합격자의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그 비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집안 식구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때 식구들이 격려는 정말 눈물겨운 것이었다.

 

한번도 2차시험을 치뤄 보지도 못한 채 졸업장을 받아 들고 나는 실업자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하 연재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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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침묵과 자각

 

3학년이 되자 좀더 착실한 생활을 하여야겠다고 마음 먹고 학교 도서관의 고정좌석을 맡아 지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여전히 무질서한 생활의 타성은 쉽게 고칠 수 없는 것이어서 장난삼아 소개받은 S대학교의 K와 자주 만나게 되었고, date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게 되었다. 많은 것을 가르쳐주던 K와 결별을 선언하게 된 것은 1학기가 끝나던 무렵 너무나 각박했던 나의 현실에 대한 절실한 자각 때문이었다.

 

방학을 맞아 7월과 8월 두 달은 시험공부와는 관계없는 논문준비에 전념하였다. '이중매매의 체계적 고찰'이라는 제하의 약 120매 정도의 논물을 완성 서울법대의 'FIDES'에 게재 발표하였다.

 

이어 가을이 다가오고 캠퍼스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 무렵 학원은 소요에 휩싸였고 또 다시 조기방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45ㅐ월의 준비계획을 구상하여 17회 사시를 향하여 전력투구하기로 하고 공부방을 정리한 것은 12월초의 일이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책만 보기로 하고 일체의 외출을 삼가하였다. 가끔 아령과 역기로 몸을 풀면서 방안에서만 칩거하였다.

 

그러나 공부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간단없이 엄습해 오는 고독감, 그리고 시험에 대한 지속적인 회의와 불안감, 현실적인 경제적 곤란 때문에 겪는 정신적 고통, 이러한 모든 것들이 책을 보고 있는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점차로 몸은 약해지고 머리는 피곤해졌다. 동네 제재소 앞 포장마차 속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바이트 불과 소주병들은 일생 최고로 마음을 아프게 했고, 자리를 박차고 배회하던 삼양동 골목길의 외등에서 발하던 희미한 불빛은 젊은 가슴에서 용출하는 대상없는 분노와 울분을 흡수할 수가 없었다.

 

지루하기만 했던 준비기간도 다 지나가고 17회 시험이 다가왔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커다란 실책을 범하고 만 것이었다. 즉 16회 때 거의 공부를 하지 않고 치른 1차시험에서 비록 불합격하기는 하였으나 과히 나쁘지 않은 성적이어서 방심한 나머지 약 13 -4일 정도 밖에 1차에 할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고시가 어떠한 것인지 잘 모르던 그 당시에는 황급한 심경에서 2차에 급급했던 것으로 주관식문제집 8권만을 가지고 거의 전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1차 발표가 있던 날 중앙청에서 1 문제 차이로 불합격된 사실을 알고 눈이 내리는 광화문 거리를 걸으면서 모든 것이 장난 같이 허무함을 느꼈고, 어쩐지 불운하여 아무리 해도 시험은 영영 안 될 것 같은 에감이 들었다. 아뭏튼 이때의 1차 불합격은 나 자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일대사건이었다.

 

 

[이하 연재 계속됩니다]

 

 

                                       고독이라는 창에 비친 자화상 [1]

 

 

 

*** 이 글은 가을사랑이 1977년 사법시험 제19회에 합격하고, 1978년 2월 월간고시[사법시험준비 수험잡지/ 법지사 발간]에 게재했던 사법시험 합격기입니다.

 

 

 

1. 글의 첫머리에

 

돌이켜 고시합격의 노정을 생각해 보면 무수히 많은 선배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무엇인가 조금씩 사고하고 배워가며 방황하다 보니 우연히 합격의 고개에 이르게 된 것 같다.

때묻은 고시복을 툭툭 털어 버리면서 한 해를 정리하려 하니 그 동안 시험을 전후한 많은 사연들과 함께 아쉬움과 미련히 불현듯 몸 전체를 휘감아 돈다.

 

지극히 평범한 과정이었고 자신이 처해 있었던 환경이 예외가 아니었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역시 고시라는 거울에 비추어질 때에는 인내로써 극복된 고통이 걸어 온 발자취마다 점점이 새겨져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여기에 한 번쯤 반추해 보고 싶었던 지난 몇년 동안의 생활을 사고와 행동, 그리고 환경과의 관련 속에서 간단히 적어 보기로 한다.

 

2. 낭만과 방황

 

마른 체격과 허약한 체질에 대학입시 준비 때문에 수척해진 상태에서 서울법대에 입학한 것은 1972년 봄이었다.

 

동숭동 교정에서 시작된 대학생활은 꿈과 낭만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 꿈틀거리며 용솟음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대부분의 신입생이 겪는 경험이겠지만 술 담배 미팅 등으로 인한 생활의 방만은 나로 하여금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했고, 하고 싶은 많은 유익한 일들이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 때문에 불가능한 상황은 자신에 대한 회의를 파도처럼 몰고 왔다.

 

민법총칙과 형법총론을 소지하고 마치 대단한 법학이나 연구하는 것으로 착각했고, 미구에 위대한 법학자가 될 것은 필지의 사실로 오인하고 있었다.

 

법서를 한 두권 들고 거리를 육신이, 삭막한 황야를 정신이 방황하며 낭만을 찾아 급급하고 있었던 이 무렵 고시란 실로 막연한 추상적인 개념이었을 뿐, 어떤 실감 있는 형상은 아니었다. 대학 초기부터 불가피하게 강요 되었던 과외지도는 많은 시간과 정력을 빼앗아 갔고 무거운 심리적 압박감을 가하고 있었다. 

 

결국 책을 차분히 보기에 부적합한 주위상황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막연히 무언인가 되겠지 하는 심리 속에서 보낸 대학 1학년 생활은 낭만적인 방황이었던 것으로 규정지어진다.

 

3. 회의와 성장

 

2학년이 되어도 생활은 여전하였다. 학교강의와 아르바이트, 그리고 때때로 있는 미팅과 술좌석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남는 시간은 피로를 풀기 위한 수면에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공부와 시험의 관점에서 보면 그야말로 한심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이 시간에 나는 조용한 전진을 하고 있었다. 허약한 몸을 단련시키기 위해 태권도반과 유도반에 가입하였고, 매일 아령과 Bench Press를 하였다. 몸이 눈에 띌만큼 나아졌고 이 때의 운동 덕분에 그 후 시험공부할 때에도 건강에는 과히 신경쓰지 않아도 좋았던 것이다.

 

2학년 가을 학원은 소요로 수업이 중단되었고, 10월 한달은 완전한 공백 속에서 많은 사고를 하면 보냈으며 그 가운데 겨울을 맞았다.

 

열정적으로 학구적이었던 신영철군(사법연수원 8기)과 16회 1차를 목표로 동숭동 거소에서 포진을 짰다. 둘이서 밤늦도록 책을 보고 상호문답의 형식으로 약 2개월간의 계획을 밀고 나갔다.

 

그러나 갑자기 사정변화가 생겨 신림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자, 1차 준비는 전면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고 3학생을 지도하면서 매일 집 뒤의 동산에 올라 움직이지 않는 자연을 관조하고, 관악 캠퍼스 신축현장을 거닐면서 모든 문제에 대해서 회의하고, 그러면서 현실의 작은 문제들은 덮어 두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복잡한 가정내의 문제로 며칠씩 고심하며 거의 절정에 다달았던 집안의 경제문제로 마음 아파하며, 목전의 시험은 단지 나를 괴롭히는 괴물에 불과하였을 뿐 이를 요리할 하등의 능력도 없었다.

 

부모님들의 절실한 기대에 할 수 없이 시험장에 가기로 하였지만 전날 포도주 한 병을 놓고 구성진 섹스폰 연주의 적과 흑의 블루스, Gloomy Sunday를 들으며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소복히 쌓인 눈을 발이 젖을새라 쓸어주는 식구들의 눈물겨운 정성 속에 치른 시럼이었나 역시 예상대로 낙방하고 말았다.    

 

[이하 다음에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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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 바위를 흔들면서

 

 

 

 

토요일 오전 8시경 구기동에 도착해서 등산을 시작했다. 출발 전에 택시에서 내려보니 등산용구를 길에서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등산화가 2만원이다. 전에 동대문시장에서 샀던 등산화를 한 번 신었더니 조금 커서 그런지 내려올 때 발이 불편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등산화를 신지 않고 운동화를 신고 갔는데 그냥 올라갈까 하다가 등산화를 보고 하나 샀다. 어떻게 동대문시장 보다 더 싸게 파는지 이해가 안 갔다. 아저씨 하는 말, "나는 한 번에 싸게 많이 사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싸게 판다." 

 

호텔 커피를 두 사람이 마시는 비용으로 몇 년을 신을 등산화를 갖추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백화점에 가지 않고 편하게 등산로 입구에서 사서 즉석에서 운동화와 바꿔 신고 즉시 산행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신던 운동화는 아저씨에게 맡겨놓고 돌아갈 때 찾겠다고 했다. 쾌히 승낙을 받았다. 그렇게 장비를 갖추고 산오름을 시작했다.

 

최근에 등산을 좋아하게 되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등산은 참으로 좋은 레저고 스포츠다. 뿐만 아니라 조용한 명상의 시간을 갖게 해 준다. 건강에도 이처럼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잘은 못하지만 좋아하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여간 감사한 게 아니다. 평지를 아무리 많이 걸어도 땀은 별로 나지 않는다. 미사리 경정장 뒤 뚝방길을 자주 걸어봐서 안다. 그런데 등산은 30분만 해도 땀이 흠뻑 난다. 그렇게 좋은 것 같다.  

 

등산을 하러 다니다 보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 속에 젖어 아기자기한 이야기거리가 생긴다. 생수가 500원이고 등산때 먹고 마실 것을 사다 보면 세상 물정도 알게 된다. 그렇지 않고 그 전에는 호텔에서 손님을 만나 커피 한잔에 만원 가까이 하고 식사비도 1인당 10만원씩 해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더욱이 카드로 결제를 하고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돈 걱정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더욱 무감각해지는 것이었다.

 

특히 기사를 데리고 다니면 더욱 그렇다. 물건을 살 일도 거의 없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등산을 자주 다니다 보니 직접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래서 얻는 것이 많아졌다.

   

토요일에 다소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인파가 많지 않아 좋았다. 그런데 벌써 산에 갔다가 내려오는 부지런한 사람들도 보였다. 구름이 많아 비가 내릴 것도 같은 느낌이었다. 6월의 날씨라 그런지 땀을 많이 흘렸다. 깔딱고개에 올라가는 코스도 만만치 않았다. 별로 쉬지 않고 계속해서 올라가니 힘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참고 올라갔다. 다들 그렇게 하는 것 아닌가?

 

문수사를 들렀다. 주지 스님은 출타하고 안계시다고 했다. 내가 잘 아는 혜정스님인데 계시면 차나 한잔 할까 했는데 안계시다고 하니 그냥 등산을 계속했다. 절에서 바라다보이는 앞 경치가 너무 좋았다. 대남문으로 해서 비봉까지 갔다가 승가사 쪽으로 내려왔다. 중간 중간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자연이란 참으로 신비하다. 어떻게 그렇게 커다란 바위가 산 꼭대기 위에 불안정하게 올라가 있을 수 있는지?

 

나는 바위를 흔들어보았다.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바위에 비하면 나는 아주 연약한 존재다. 그러나 나는 바위를 흔들어 본다. 그건 내 의지다. 내 희망이다. 바위가 흔들릴 가능성은 이차적인 문제다.

 

바위는 참으로 묵직한 느낌을 준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단순하다. 아무런 꾸밈도 없다. 그저 바위일 뿐이다. 아무도 상대하지 않겠다는 단호함도 엿보인다. 홀로 고고함을 유지하고 싶어하는지 모른다. 바위는 그래서 본받을 점이 있다.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곧곧하다.

 

대남문에서 비봉까지 가는 코스도 단조로지 않고 아주 좋았다. 오래 전에 한번 그 코스를 가본 기억이 있는데 다시 가보니 더 좋은 것 같았다. 승가사 밑에 약수터가 있었다. 물은 떨어졌고 날씨는 덥고 갈 길은 먼 상태에서 약수터를 만나니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역시 산행에는 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산 밑에 내려오니 음식점에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룹으로 술을 마시면서 '위하여'를 외치기도 했다. 조용한 산에서 명상을 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5시간 가까이 있다가 속세로 내려오니 여전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세속을 떠나 있으면 있을수록 나중에는 도저히 세상에 적응을 하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상의 일조차 마음에 들지 않게 되니 말이다. 거대한 바위를 흔들어보는 마음과 뭍사람들의 떠듦에 기분이 상하는 마음은 너무 차이가 있어 보였다. 지나친 무거움과 지나친 가벼움의 대칭이었다.

 

산행을 하면서 울창한 숲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나뭇잎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바다를 생각하고 있었다. 바다에서도 어떤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은 모래알들을 보면서 산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는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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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녀차별개선위원회

 

 

 

 

6월도 절반 가까이 지나갔다. 낮에는 길에 다니는 것이 덥게 느껴진다. 택시를 타면 창문을 열어놓고 매연이 많은 시내를 달리는 것이 곤혹스럽다. 기사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에어콘을 트는 것이 싫은 모양이다. 그것도 이해가 간다. 아니면 창문을 닫고 조용하게 해주면 손님이 계속해서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는 소음을 참고 들어야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제는 12시에 광화문 청사 뒤에 있는 금강산 식당에서 장하진 여성부장관과 식사를 했다. 오리고기집인데 비교적 깨끗하고 괜찮았다. 남녀차별개선위원회 오찬이었다. 질은 하늘색 옷을 입고 나온 장관은 산뜻해 보였다. 여성가족부 출범을 앞두고 매우 바쁜 모양이다.

 

 

내가 남녀차별개선위원으로 일한지도 벌써 4년이 넘었다. 그동안 여성부장관도 한명숙 장관, 지은희 장관, 장하진 장관 세 사람이나 바뀌었다.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오후 2시부터 전원회의가 개최되었다. 세건의 사안을 심의하고 처리했다.

 

 

사회 각 분야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차별사건, 남자가 여자에 대해 한 성희롱사건 등이다. 회의가 끝나고 위원 5명과 함께 부근에 있는 스타박스에 가서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위원인 여자 부장검사가 차를 샀다. 공무원에게 차를 얻어 마시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6월 14일 / 가을사랑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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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폭포 속에 있었다

 

 

 

 

갑자기 경상북도 울진군에 다녀 올 일이 생겼다. 서울에서 살다보면 경상북도는 참 먼 곳이다. 자주 갈 일이 별로 없다. 아주 먼 곳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옛날 나는 해인사 원당암과 길상암에서 고시공부를 했다. 그후 1986년도에 대구에서 잠시 근무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지금 가면 경상도 지방은 꽤나 낯선 동네에 속한다.

 

주말을 이용해서 머리도 식힐 겸 여행을 떠났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나는 주말여행이었다. 그런 여행도 나름대로 묘한 맛이 있다. 잘 모르는 곳을 가본다는 데에 대한 호기심도 생기고, 꽉 짜여진 스케줄 없이 자유스럽게 돌아다일 수 있어 특별한 낭만도 얻게 된다.

 

서울에서 볼 일을 보고 나니 금요일 저녁이 되었다. 토요일 출발하는 것 보다 금요일 늦게라도 떠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저녁 8시경 출발했다. 당초 예정은 경주까지 가려고 했으나, 중간에 대전을 지나니 비가 계속해서 오고 캄캄한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이 위험해 보였다. 

 

대전을 지난 경부고속도로는 확장보수공사로 인해 시속 80킬로미터로 제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굴곡이 심해 빗길야간운전은 힘이 들었다. 경부고속도로는 대전 대구 구간이 아주 노후되고 어수선하다. 일단 쉬기로 하고 아무 곳이나 들어가기로 했다. 톨게이트로 빠져 나간 곳은 황간이었다. 황간 톨게이트를 나가자 바로 작은 모텔이 있었다. 외따로 떨어져 있는 모텔은 아주 조용했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더니 모텔에서 나온 젊은 여자 한 사람이 주차장에서 늦은 시간에 담배를 피고 있었다. 커피잔 셋트를 들고 있는 모습이 다방에서 모텔방으로 커피를 배달왔다가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조금 있으니 작은 승용차 한대가 와서 그 종업원을 태우고 갔다. 아직도 시골에는 티켓다방이 있는 모양이다. 세상은 아무리 요란해서 실제 변화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밖에는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작은 모텔방에서 밖을 내다보니 캄캄하기는 하지만 시골의 밤 풍경이 묘한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대도시와 다른 적막감이 깃들어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만 들렸다. 모텔이 기차길 바로 옆에 있었다.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니 옛날 대전에서 어렸을 때 기차길 옆 작은 집에서 살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고향인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서너살때까지 살다가 대전으로 이사를 갔다. 대전에 가서 5-6살 때 나는 기차길 바로 옆 동네에서 살았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기찻길에서 많이 놀았다.

 

기차가 오기 전에 못을 철로 위에 놓으면 기차가 지나감으로써 못 머리가 납작해진다. 그것이 아주 신기했다. 기차 소리가 들리면 옆으로 피하는 스릴도 많이 느꼈다. 선로에 귀를 대고 기차가 오고 있는지 그 소리를 듣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늦게 잠이 들었다. '호텔 캘리포니아' 노래가 생각났다. 어쨌든 기분전환을 위하거나 새로운 정취를 느끼기 위해서는 고급 호텔이 아닌 아주 작은 시골 모텔에서 하루 밤을 머물어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침 6시에 모텔에서 나와 차를 탔다. 이른 시간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도 특이했다. 차들이 별로 없었다. 날씨는 구름이 많이 꼈는데 비는 올 것 같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해가 나고 맑아졌다. 대구까지 갔더니 포항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새로 생겨 있었다. 처음 지나가는 고속도로였다.

 

포항에 들어갔다. 어렵게 전화로 안내를 받아 양학동에 있는 어느 아파트로 갔다. 포철에 근무하는 지인의 집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 8시에 물회와 장어를 준비해서 정성껏 식사를 차려주었다. 고마웠다. 아이들 셋을 다 키우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 부부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큰 아들이 24살인데 군대 갔다와서 직장에 다니면서 야간대학을 다닌다고 한다. 밝은 모습으로 시간을 아껴 무언가 배우려고 하는 젊은이를 보니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잘못 비뚤어진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아파트는 25층 고층아파트인데 주변에 숲이 많아 좋았다. 작은 아파트이지만 깨끗하게 청소해 놓고 가족사진하며 아기자기하게 구며놓고 재미있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게 행복이리라.

 

아침 식사 후에 포항시 외곽에 있는 청하 보경사로 갔다. 포항에서 울진 방면으로 약 30분간 가면 월포해수욕장을 조금 지나 보경사가 있다. 보경사는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에 위치한 고찰이다.

 

602년 신라 진평왕 시절에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덕 지명법사가 창건한 신라고찰이다. 지명법사는 왕에게 동해안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진나라에서 유학할 때 어떤 도인으로부터 받은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외국의 침입을 막고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하리라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지명법사와 함께 동해안 북쪽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내연산 아래 있는 큰 못 속에 팔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을 건립한 뒤 보경사라 명명하였다.

 

내연산 입구에 있는 보경사 절을 지나, 연산폭포로 갔다. 연산폭포는 보경사에서 편도로 2.7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정말 경치가 좋았다. 깨끗한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등산을 했다. 하얀 돌들이 늘어서 있었다. 계곡의 물이 얼마나 맑은지 작은 고기들이 많이 보였다. 나는 목이 말라 물을 떠 마셨다. 시원했다.

 

연산폭포에 이르면 그 떨어지는 물줄기와 주변 기암괴석 바위들로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었다. 내연산은 710미터 고지다. 향로봉은 930미터고. 연산폭포에는 구름다리가 있다. 구름다리를 건너는 재미 역시 대단했다.

 

폭포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폭포 속에 우리들의 사랑이 감추어져 있다고 믿었다. 떨어지는 물줄기에 가려 물 속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아름다운 색깔만 보여주고 있었다. 그 은은함과 영원성은 우리 사랑의 상징이었다. 나는 폭포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파란 색의 나뭇잎들을 배경으로 진한 그리움이 배어 나왔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 통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내 그리움은 종이 위를 물들이고 있었다. 햇살이 맑게 비추고 있었다.

 

연산폭포를 지나 한 시간 정도 더 올라가다가 내려왔다. 4시간 정도 산행을 했다. 산 속에는 이름 모를 새가 울고 있었다. 마치 사람이 휘파람을 부는 소리처럼 착각이 들었다. 저 새는 내 진한 그리움을 담아 노래하고 있었다. 목이 터져라 울고 있었다. 산들바람에 그리움이 실려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보경사 입구에 나오니 연산온천파크라는 깨끗한 온천이 있었다. 목욕을 하고 나왔다. 목욕 후에 느끼는 상쾌함은 산 속의 바람에서 더욱 절정에 이르렀다. 시골 아주머니들이 산딸기를 팔고 있었다. 진짜 산 속에서 따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산에서 따 먹은 딸기 맛과는 조금 달랐다. 진짜 산딸기는 그 빨간 색깔이 너무 예뻤다. 등산을 하다가 산딸기를 찾아보라. 그 색깔이 얼마나 예쁜지 감탄하게 된다.  

 

경북 울진군 후포면 금음리 바닷가에 가서 건축중인 건물을 보았다. 복잡한 분쟁이 생겨 해결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충분한 설명을 듣고 돌아오다가 영덕대게집에 갔다. 한 마리에 5만원씩 한다. 그런데 다리 한 개씩이 떨어져 나간 게가 많았다. 저녁에는 포항에서 불꽃축제를 했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 밤 12시가 되어 포항을 출발했다. 포항 - 대구 -김천 - 충주 - 여주 - 동서울 코스로 올라왔다. 새벽 5시가 다 되었다. 힘든 여정이었다. 그래도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아주 의미 있는 주말 여행이었다.

 

 

*** 6월 12일 / 가을사랑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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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판 욥기

 

 

 

정말 짙은 초록빛이다. 밝은 햋빛에 눈이 부셨다. 시간에 쫓겨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서울구치소에 도착하니 아름다운 장미꽃이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저 장미를 보았을 것이다. 신세를 한탄하며 인생을 후회하면서 곁을 지났을 것이다. 세월은 얼마나 무심한가? 숱한 삶의 고뇌와 비통함을 잊어버린듯 흘러가고 있으니.

 

어느 기업의 사장을 만났다. 한 사람을 잘못 만나 기업체를 모두 빼앗기고 징역까지 살고 있는 입장이었다. 나는 그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당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특별한 죄도 없이. 단순한 기업운영상의 관행 가지고 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철저히 배신 당하고 실망하고 손해를 보았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신에게 접근해서 이용하고 사기치고 공갈까지 쳤던 사람들, 도와 준다고 달라들었다가 끝내는 제대로 도와주지도 않고 떠났던 사람들, 악랄하게 자신을 몰아부쳤던 수사관계자들, 불성실했던 변호사들, 사건해결사들 등등... 자신의 가족 빼고는 모두 나쁜 사람들로 기억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믿는 곳은 오직 한 곳, 하나님이었다. 밤낮 없이 매달리고 있었다. 2개월간 금식기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하루 한끼 식사만 하고 기도를 하니 체중이 9킬로그램이나 빠졌다. 어지러움증을 느낀다고 한다. 정말 현대판 욥이었다. 욥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하나님의 가혹한 시련을 받게 된다. 정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처절한 상황에까지 이르러 그는 부르짖는다. '내 가죽은 검어져서 떨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 하여 탔구나'(욥기 30:30)

 

백화점 매장에서 티셔츠 몇장을 들고 나오다 구속된 연로한 사람을 만났다. 동일한 전과 때문에 구속되어 쉽게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는 말했다. 구치소 안에 있다 보면 실제로 처벌받을 만한 죄를 짓고 들어와 있는 사람은 20%도 안 되는 것 같아요. 굳이 징역을 살지 않아도 될 사건을 가지고 경찰이나 검사들이 죄를 만들고 무겁게 해서 실적이나 올리려고 하는 것 같아요.

 

살인사건의 피고인을 접견하고 밖으로 나왔다. 세상은 내가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다만 해가 조금 서쪽으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몇 사람의 사건에 관해 심각한 대화를 하고 나온 나의 머리와 가슴 속에는 무서운 폭풍이 지나간 것 같은 엄청난 변화가 느껴졌다.

 

 

*** 가을사랑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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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공항에서

 

 

 

 

3박 4일의 여정을 마치고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긴 꿈을 꾼 것 같다. 그렇잖아도 서울을 떠나 있는 동안 꿈을 많이 꾸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 대학교에서 무슨 시험을 보는데 중간에 답안지 써놓은 것을 잃어버려 교수님에게 사정을 하던 악몽도 꾸었다.

 

내가 갔던 외국의 어느 작은 해안가 마을의 아침은 참 고요했다. 새벽 5시반에 일어나 바닷가로 나갔다. 한참을 걸어가니 등대가 하나 있었다. 등대가 있는 작은 섬 주변에는 온통 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갈매기들인지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다. 수 없이 많은 새들이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너무 시끄러웠다. 왜 그렇게 울고 있는지? 나는 넋을 놓고 새들의 울음소리에 빠져 있었다.

 

새벽 바다를 바라보는 마음은 참으로 차분히 가라앉았다. 저 넓은 바다를 향해 한 마리 새와 같은 존재인 내가 앉아 있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왜 살고 있는가?' 갑자기 갈매기떼가 내게 해답을 주는 듯했다. 나는 그들과 하나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사물을 단순하게 보고 단순하게 사고하라. 감성을 잃지 말아라.

 

더 걸으니 부둣가에서 십여명 되는 사람들이 새벽부터 바다낚시를 하고 있었다. 새벽이라 그런지 고기들이 많이 낚이고 있었다. 한 20센치미터는 넘어보이는 고기들을 낚아 세멘트 바닥에 던져 놓았다. 고기는 한동안 퍼득거리다가 지쳐서인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몹시 잔인해 보였다. 살아있는 생명을 미끼로 유인해서 낚은 다음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가끔 죽은 고기들을 다시 바다로 던져놓고 있었다. 왜 그런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떠다니는 죽은 고기들을 갈매기들이 달려들어 입에 물고 날다가 다시 떨어뜨리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보다 큰 물고기를 입에 물고 멀리 날아가는 갈매기도 신기해 보였다. 바다는 시퍼런 색깔에 한층 사나워 보였다. 그 도도함에 나는 무릎을 꿇었다. 

 

어디를 다녀도 내 마음 속에 떠나지 않는 그리움이 붙여 다녔다. 궁금하기도 하다. 내 마음이 이처럼 집착하는 그 대상은 무엇일까? 먼 길을 떠났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주인이 없던 블로그가 몹시 쓸쓸해 보인다. 내 마음과 정을 듬뿍 주었던 곳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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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출장을 떠나며

 

 

 

 

갑자기 3박 4일로 해외 출장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일주일 동안은 정말 정신 없이 바빴다. 사무실을 며칠간 비우게 되어 걱정이다. 다행이 연휴가 끼어 있기 때문에 조금은 나은 편이지만.

 

그런데 해외 출장을 가려고 하니 사무실 일도 걱정이지만, 이 블르그를 통해 교감하던 블로거 분들과 잠시 통신이 두절되는 것이 더 걱정이다.

 

이상한 일이다. 블로그를 통해 어디엔가 끈이 이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계속해서 가지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이유인지도 모른다.

 

서로 뜻이 통하고 감성이 비슷하다는 느낌은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느꼈다. 아주 이상한 일이지만. 그래서 이 곳에 나의 부재를 알려 놓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는 나그네 같은 심정인 것은 어인 일일까? 일상의 일에서 잠시 해방되어 새로운 구상을 하고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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