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의 위험성

 

가을사랑

 

 

[본문]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런즉 우리가 댜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롬 14:10~13).

 

[QT]

 

세상을 살다 보면 눈에 거슬리는 것이 많다. 짜증나는 일도 많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도 많고, 부족한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경우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얌체같은 사람들도 많이 있다. 세상에는 일정한 기준이 있기 마련이다.

 

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아이들 중에 약간 부족해서 단체생활에 잘 못따라가는 학생에 대해서는 다른 친구들이 비웃고 무시하게 된다. 머리가 나쁘다고 무시하기도 하고 센스가 없다고 비웃는다. 그럴 때 그 아이는 매우 고통스럽게 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그 반의 일정한 기준에 맞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아니면 경제적인 환경이 어려워서, 성격이 비뚤어져서, 나쁜 습관에 빠지는 등 이런 저런 이유로 사회에서 요구하는 일정한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보통사람들은 무시하고 경멸하고 비난한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전혀 고려치 않는다. 잘 사는 사람은 못사는 사람을 무시한다. 배운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을 무시한다. 얼굴이 잘난 사람은 못난 사람을 거들떠 보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면 새로 권력을 잡은 사람들만을 따라다니고, 권력에서 물러나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인기 있는 연예인에게만 스포트라이트는 비춰지는 법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 속에는 아주 교만한 자존심이 있고,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못한 사람은 철저하게 무시하거나 경멸한다.

 

이런 세상 분위기 때문에 사실 없는 사람들이 살기 힘든 세상이다. 너무 잘난 사람들이 많아 기가 죽게 되는 세상이다. 너무 배우고 똑똑한 박사들, 해외유학파들이 많아 피곤한 세상이다. 정치, 경제, 교육, 스포츠, 연예분야이건 모두 마찬가지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제14장에서 이와 같은 세상 사람들의 부족한 태도를 경고하고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판단을 받아야 할 입장에 잇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같이 죄를 지어서 구치소에 구속된 상태에서 함께 재판을 받는 똑 같은 피고인이 다른 피고인을 판단하거나 정죄할 권한은 없다. 그들은 똑 같은 처지에 있고, 똑 같이 불쌍한 입장이다. 남을 판단할 권한도 없고 여유도 없는 것이다. 똑 같이 불쌍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인간은 모두 원죄를 타고 난 죄인이고 부족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보시에게는 모두 다 똑 같다. 아주 근소한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거의 비슷하다. 항상 말썽을 일으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불완전하고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 같은 형제들이 서로 싸우면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둘 다 잘못이고, 둘 다 똑 같은 것이다. 누가 특별히 잘 했고, 누가 특별히 못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간은 다 비슷한 처지에 있고, 서로 싸우는 것을 보면 서로 똑 같이 잘못을 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상대방의 잘못만 크게 확대경으로 보면서 비난하고 헐뜯는다. 자신의 주관적 기준에 맞지 않으면 시원치 않고 잘못이라고 비난하다.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상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바울의 지적이다.

 

우리 모두는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할 죄인들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 그 비판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은혜와 사랑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은 인간의 법과 정죄, 복수를 뛰어넘는 위대한 힘이다. 세상 살면서 인간 사이의 갈들은 법으로만 해결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법은 또 법으로 되갚음을 해오게 만든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라는 탈리오의 법칙이 적용된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원망은 원망을 가져온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그 은혜의 법, 사랑의 법, 긍휼의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법이다. 사망과 음부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의 길이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전에 이땅에 오셔서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보여 주셨다. 그리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 피값으로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죽으나 모두 주의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서 14:8)'

 

우리는 믿음과 소망, 사랑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삶에 있어서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고 열심히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예수님의 성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가슴 속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 바울은 말하고 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로마서 13:8)'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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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율법의 완성


가을사랑


[본문말씀]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롬 13: 8).


[QT]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우선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계셔야 하고, 그 분들의 노고로 열 달간 태안에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생명이 탄생하게 되고, 또 자라는 동안 옆에서 보살핌을 받아야 겨우 살아갈 수 있다.


그 다음에도 부모님들의 도움으로 학교에 다녀야 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들로부터 교육을 받아야 한다. 나이를 먹어서도 그때그때 주변 사람들의 직접적, 간접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서로 돕고 사는 시스템이라고 해도 일단 상대방으로부터 나에게로 도움이 흘러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은혜를 입고 그들에게 빚을 지면서 실상 그 빚을 제대로 갚는 경우란 많지 않다. 동시이행의 관계에 있지 않으면 자신의 채무와 빚은 잊어버리거나 제대로 갚지 않고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불효자식은 그래서 생겨나게 되고, 경우 없는 사람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된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일, 은혜를 거꾸로 악으로 갚는 일 등은 역사상 많은 경우를 볼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빚을 진 사람을 채무자라고 한다. 채무자는 자신의 빚을 갚을 의무가 있다. 그런데 그 빚을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제대로 갚지 못하면 채무자는 책임을 추궁 당하게 된다. 소송을 당하게 되고 강제집행을 당하게 된다.


그렇게 해도 변제할 채무가 남으면 파산선고를 받게 된다. 경제적으로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제적인 채무불이행이나 파산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본인도 잘 인식하고 주변 사람들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빚, 정신적인 채무와 같은 영혼의 빚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그가 영혼의 빚을 지고 있는지, 그 빚을 갚지 않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지고 있는 영혼의 빚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그 빚을 갚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도 못하기도 한다.


때로는 영혼의 빚을 모두 갚은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상당한 위선일 수도 있다. 영혼의 빚은 한이 없다. 부모님의 은혜는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기 때문에 끝이 없다. 그 은혜를 우리가 어떻게 다 갚을 것인가? 출세해서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불효자식들이 얼마나 많은가?


부모님들의 속을 썩이면서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있는 청소년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는 부모님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학대하고 구박한다. 나이 들어 의지할 곳 없는 독거노인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남편 뒷바라지를 열심히 해서 성공하게 만들었더니 젊고 예쁜 여자들과 살림을 차리고 조강지처를 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남편은 병이 들면서까지 돈을 벌어다 주었더니 부인은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경우도 많다.


사업자금을 대준 동업자를 배신하고 혼자 이익을 독차지하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을 믿은 순진한 사람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도 너무 많은 현실이다. 이 모든 것이 은혜를 갚지 않고, 영혼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살면서 영혼의 빚을 져서는 안 된다. 물론 다 갚을 수는 없겠지만, 그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갚으려는 노력을 평생 하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남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항상 가슴 속에 새겨 두어야 한다. 바위에 새겨야 한다.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 빚을 갚아 나가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과 행동의 밑바닥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 사랑이 있어야 이런 생각과 행동이 가능하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그는 율법을 다 이루는 것이 된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롬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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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사랑


[본문말씀]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 12:1~2).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롬 12:9).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롬 12: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롬 12:19).


[QT]


로마서 제12장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활해야 좋을지 잘 모르고 있다.


목사님 설교를 듣지만, 매우 추상적인 경우가 많다. 선하게 살라고 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에 닥치면 어떻게 사는 것이 선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 어렵다.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라고 하지만 막상 어려운 일을 당하면 마음은 순식간에 흐트러지고 불안과 초조감에 쌓이게 된다. 그것이 인간이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도 어렵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도 어렵다.


웬만한 신앙심을 가지고서는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닥치는 많은 고난과 위기,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아무리 감당하려고 해도 너무 무거운 짐을 지기에는 육신이 견디지 못하고 마음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원죄를 타고 났기 때문에 거짓말도 잘 하고, 욕망에 무너지고, 쉽게 좌절하고 절망하게 된다. 작심삼일인 것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어린 시절에 선생님과 부모님들은 수많은 가르침과 지도, 훈계를 한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공부하고, 착하고 바르게 살고, 건강을 위해 이것은 먹어서 안 된다, 게임도 적당히 하고, 친구관계도 제대로 해라, 등등.


그러나 막상 그것이 옳은 것인 줄을 알지만, 그리고 그런 말씀을 따르려고 하지만 인간의 의지에는 한계가 있고, 쉽게 욕망에 무너지고, 마음 먹었던 계획은 삼일이 못가서 지켜지지 않고 주저앉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어린 아이 때의 말씀은 나이가 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뀌게 된다. 이제는 부모님도 안 계시고, 선생님도 안 계신다. 오직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한다.


그것은 대부분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을 통해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의 은사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으로 전해진다.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음성으로 듣고 그대로 따르려고 한다. 그러나 어린 아이 때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이 인간이고 현실이다.


건강을 위해서는 술도 마시지 말아야 하고, 과식도 하지 말아야 하고, 콜레스트롤이 높은 음식을 피해야 한다. 건강도 꾸준히 해야 한다. 결혼한 이후에는 연애도 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으로라도 간음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한다.


그러나 어렸을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주시는 그 많은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듯이 나이가 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더 많은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연약한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높은 이상적인 기준을 부여받고 제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자괴감에 빠지며 때로는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기본적으로 성경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우리는 꾸준히 노력할 뿐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끊임없이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마치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된 것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오해다. 십일조를 제대로 내고,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했다고 해서 제대로 생활하고 있다는 생각도 착각일 수 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더 없이 낮아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수준은 한도 끝도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그 시간과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우리는 그런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또 그런 믿음을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거짓이 없어야 하고,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라. 환난을 당할 때에도 참고 기도를 꾸준하게 하라. 원수는 직접 갚지 말고, 하나님께 원수 갚는 일을 맡겨라. 로마서는 이와 같이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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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진정한 의미

 

가을사랑

 

 

[본문말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롬 11:1~10)

 

[QT]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살펴볼 기회를 갖는 것이다. 성경을 읽지 않고 그냥 혼자 생각하는대로 살아가다 보면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된다.

 

단순히 타고난 착한 심성대로 살아가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학교 다닐 때 아주 제한된 시간 배웠던 도덕책의 지식으로 살아가는 것도 불충분하다. 사실 학교에서는 제대로 도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 필요한 시험과목 위주로 외우고 문제를 풀고 하는 기능성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을 뿐이다.

 

가정에서도 진정한 도덕과 윤리를 가르킬 분위기가 아니다. 먹고 살고, 체면치례하는데 온 가족이 너나 할 것 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주로 많이 접하는 TV를 보면 그 안에서는 대개 부정적인 현상이나 보게 되고, 빈부의 격차를 느끼게 만들고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모습을 보게 만들어 심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그래서 많은 청소년들이 삐뚤어지고, 성인들 역시 정신적으로 우울증에 걸리게 되며 영혼이 방황하게 된다.

 

세상을 살면서 자기 혼자만의 생각으로, 혼자만의 철학으로 살아가게 되면, 그는 오류에 빠지게 되고, 교만하게 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그저 절망하고 자신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면 주변사람들을 포함한 자신의 환경에 대해 원망과 저주만 하게 된다.

 

세상에 대해 시기심만 늘고, 점차 도덕적으로 타락하며 극도의 이기심에 빠져 아주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그렇게 살다가 죽게 된다. 젊은 시절 오직 현재의 환경만을 바라보며 죽기 살기로 출세하고 돈을 버는데 급급한다.

 

그리고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과 정욕을 채우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 말초적인 자극에 빠지게 되고, 삶의 방향과 좌표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다. 그러나 그런 삶은 나중에 잘 돼도 허망하고, 못 돼면 아주 비참해진다.

 

명확한 삶의 방향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자신이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출세하고 돈을 벌고 재미있게 살았다고 해도 나중에 늙고 병들고 힘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되고, 삶에 있어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며, 세속적으로 살았던 것에 대해 후회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시간 자신의 삶을 냉철하게 되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2천년 동안 믿어왔던 성경을 겸허한 자세로 읽어보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고 있다. 

 

그토록 오랜 역사를 가지고 수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바쳐 읽고 연구하고 그에 대한 주석서를 만들어놓기도 했다. 성경을 통해 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얻고, 그로부터 영혼의 구원을 받았으며, 삶에 있어서 성공했고, 기적을 체험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마음의 평온을 얻었고, 삶에 있어서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게 되었고, 자신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공연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삐딱하게 성경을 볼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더 머리 좋고 더 성공적으로 세상을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그대로 믿고 따르면서 살아갔다는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루를 살면서 꼭 한번이라도 시간을 내서 성경을 펴놓고 읽고 그 의미를 숙고하고 그 성경 말씀을 믿고 그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유익하다. 달리 좋은 방법이 없는 현실이 아닐까? 성경을 읽지 않고, 막연하게 세상을 살다가 어느 때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과 고통을 당하게 되면 후회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도 제대로 잘 읽어야 한다. 종교란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방향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성경말씀을 제대로 해석하지 않고 잘못 이해하면 사이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매우 조심해야 한다. 종교란 매우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영 자체를 이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경을 통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그때 그 시련과 고통을 견뎌낼 힘이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무서운 병에 대한 예방접종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방주사를 맞고 면역성을 기르는 약을 미리 먹어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을 소멸시키는 불치의 병(?)에 걸려 영혼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영혼을 잃지 않아도 영혼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치명상을 받게 될 우려가 있다. 

 

바울은 로마서 제11장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기 백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진정으로 값진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행위가 없으면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하면 그 은혜는 진정한 은혜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기준을 넘지 못한 상태에서도 은혜를 주신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뉘우치지 못한 채 잘못 살고 있는 때에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노력하시고 계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벌써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심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신다. 원죄를 가지고 타고난 약한 처지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먼저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믿음을 전제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가면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은혜다. 은혜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믿고 그 뜻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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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구원

 

가을사랑

 

 

[본문말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QT]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주 중요한 사항을 전하고 있다. 사람들이 갈구하는 구원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른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단언하고 있다(롬 10:13).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에 오셨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고, 죽은 후 다시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믿어야 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중심사상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에 못박혀 주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고 명백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믿음을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속량을 모르고 엄격한 죄의 법인 율법에 매여 벗어나지 못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이다(롬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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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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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의를 추구하지 않은 이방 사람들이 의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려고 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보아라, 내가 시온에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둔다.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롬 9:30~33)


[QT]


성경은 의로운 사람을 매우 중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소돔성을 멸망시킬 때에도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소돔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창세기 18:32). 그러나 끝내 의인 열 사람을 찾지 못해 소돔성은 멸망되고 말았다.

 

구약시대에서는 의로운 사람이 되는 방법을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하면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해도 사람들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따라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제9장에서 믿음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믿음이 아닌 율법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의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했다. 그것은 행위에 근거해서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만군의 주 그분만을 거룩하다고 하여라. 그분만이 너희가 두려워할 분이시고, 그분만이 너희가 무서워할 분이시다. 그는 성소도 되시지만, 이스라엘의 두 집안에게는 거치는 돌도 되시고 걸리는 바위도 되시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가미도 되신다. 많은 사람이 거기에 걸려서 넘어지고 다치며, 덫에 걸리듯이 걸리고 사로잡힐 것이다.”(이사야서 8:13~15)


“그러므로 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시온에 주춧돌을 놓는다. 얼마나 견고한지 시험하여 본 돌이다. 이 귀한 돌을 모퉁이에 놓아서, 기초를 튼튼히 세울 것이니, 이것을 의지하는 사람은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서 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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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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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1~4)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0~11)


[QT : Quiet Time, 묵상의 시간]


성경이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죄를 짓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성경은 필요하지 않다.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에는 죄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다. 원래 하나님은 죄가 없는 완전무결한 분이므로 그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 역시 아무런 죄가 없는 존재였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인정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람직하다고 보여지면 그것은 죄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가 행정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많은 사항은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서 죄가 아닌 경우가 많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땅치 않고 올바르지 않은 행위가 죄인 것이다. 


에덴이라고 불리우는 동산에서 살고 있던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였다.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살아가기로 선택했다. 분명 그것은 중대한 선택이었다. 아담과 이브가 뱀의 권유를 받아들여 선악과를 먹었던 것은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법을 고의적으로 범하기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한 선택의 결과는 어떠한가?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단절이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인간에게는 영적인 사망을 뜻한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 영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살 수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영을 가지고 있고, 그 영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된다. 하나님과 인간은 영적으로 통해 있다. 육체적으로 통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영적인 관계에서 하나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다. 


에덴의 동산에서도 하나님은 오직 말씀으로만 아담과 이브에게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명확하게 말씀으로 전해졌다. 인간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다른 행동을 하고 다른 선택을 한 대가는 즉시 나타났다.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되었을 뿐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초래했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과 혼연일체의 상태에 있을 수 없었다. 하나님과 분리되었다. 영적으로 분리된 인간은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되었고, 그 죄는 더욱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대가는 영적인 죽음에 이어 육적인 죽음을 초래했다. 그래서 끝내 아담은 육체적으로도 사망하고 소멸해 버렸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다. 생명이 그 근원이며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성을 확보하는 순간, 그 인간은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불완전해졌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 기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한 현상은 곧 인간의 죄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인간은 분명히 죄를 짓고 있는 것이 되었다. 그와 같은 상태에서 죄에 빠져 있는 아담이 낳은 후손들은 모두 아담의 본성인 죄성을 물려받게 되었다.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창세기 5:3).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기 1:27).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죄 없는 아담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곧 죄를 짓게 되었고, 그 후 영적인 죽음을 맞이한 상태에서 자기의 형상대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아들을 낳은 것이지 창조한 것은 아니다), 곧 그 아들은 아담과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죄를 짓는 죄의 본성을 유전적으로 물려받고 태어나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에게 종교적 규범인 율법만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계속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식만을 느끼게 하고, 괴롭히는 결과가 된다. 연약한 육신과 연약한 정신을 가지고 인간이 어떻게 그 어려운 율법적인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율법은 인간을 얽어매는 구속적 기능만 수행하고, 인간을 평생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셨다. 그래서 영원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죄에서 구원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죄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인간은 타고난 죄성과 그 죄를 옭아매는 율법에 구속되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영적으로 부활하였으며, 그 상태에서 더 이상 하나님께 배반하지 않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과거 억눌려 있었던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생명과 성령의 법의 영역 안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인간이 원래 있다가 추방되었던 에덴의 동산으로 다시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에덴의 동산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직접 체험하고 하나님의 옷자락을 직접 붙잡고 매달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들어간 인간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이 아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지 않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인간도 자신의 육신의 법은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야 한다. 


그 법은 곧 사망의 법이요 죄의 법이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법만 따라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몸이 죽으면 우리의 영은 의를 인하여 살게 되고, 죽은 자를 살리신 이는 곧 우리의 육신이 죽어도 다시 영으로써 몸을 살리게 되는 부활의 기적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육신대로만 살면 우리는 반드시 죽게 된다. 그러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인간을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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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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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1~25)

 

[QT]

 

로마서 제7장에서 바울은 결혼의 비유를 들면서 율법과 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마음의 법과 육신의 법이 다르다른 사실도 언급하고 있다.

 

결혼한 여자가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해방된다. 남편이 죽은 다음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음부라고 할 수 없다. 남편의 법은 오직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적용되고 아내를 구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종래에는 율법에 구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되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남편과 같은 존재인 율법은 사망하였고, 우리는 율법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떠나 새 남편에게 시집을 갈 수 있듯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떠나 예수에게로 옮겨 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도 과거 율법이 죽었으므로 아무런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한다.

 

바울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고 한다. 그러나 육신은 죄의 법을 섬기고 죄를 지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죄를 지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죄를 지으려는 마음을 버리면 그것은 죄를 정죄하는 율법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죄를 지으려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의 의지로는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가능하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피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죄의 법,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법, 생명과 은혜의 법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생활하도록 해야 한다. 문밖에 나가면 숱한 세상적인 유혹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물질의 유혹, 명예의 유혹, 욕정의 유혹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것은 세상을 너무 많이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 욕심많은 세속적인 모습으로 그냥 이기적인 행동을 하기를 바라실까? 그렇지 않다. 착하고 바르게 살기를 원하신다. 혼자 많은 것을 챙겨 자신과 가족들만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지는 않으실 것이다. 남을 배려하고, 공짜를 바라지 말고, 술과 오락에 빠지지 말고,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면서 하루를 보내기를 바라실 것이다.

 

그것이 사망의 법인 죄에서 벗어나고, 마음의 평강을 주님의 은혜로 받을 수 있는 길이다. 좁을 길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생명의 길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살면 처음부터 죄의 법에서 해방될 수 있다. 과거처럼 죄를 짓고, 그 죄를 정죄하는 율법에 억매여 노예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품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오늘 바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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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서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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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19~23)

 

 

[QT]

 

영생이란 영원한 삶,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간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될 때에는 영생을 보장받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함으로써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되었고, 죄와 악에 빠져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궁휼히 여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그의 죽음으로 인간의 죄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것이 예수의 대속이다.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인간은 죄에서 벗어나 구원받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죽을 때 그는 친히 인간의 죄를 모두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때 인간의 죄도 함께 죽었기 때문에 인간은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고 구원을 받게 되었으며 영생을 얻게 되었다. 비을은 사람들에게 그동안 사람들의 육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르게 된 것같이. 이제는 사람들의 육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을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사람들이 죄의 노예가 되어 죄를 지을 때는 그 결과가 사망이 되지만,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으면 영생을 구할 수 있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QT] QT라는 말은 영어 Quiet Time의 첫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그대로 번역하면 조용한 시간이지만, 일반적으로는 묵상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대체로 성서묵상의 시간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는 영국 캠브리지대학교의 후퍼와 서튼 등이 1882년 시작한 기도와 성경을 읽는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경건의 시간을 기억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하루 중에 일정한 시간을 성경읽기와 기도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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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와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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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18~21)

 

 

[해설]

 

성경에는 죄라는 개념이 많이 나온다. 만일 인간이 죄를 짓지 않는 완벽한 존재라면 어쩌면 종교가 필요없을지 모른다. 신처럼 완벽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몰라도 괜찮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매우 연약한 존재이며, 항상 죄를 짓고 살아간다.

 

어떤 환경에 있던지 간에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살 수가 없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간다면 일시적으로는 잘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허망함을 겪게 되고, 고난에 처했을 때 살아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똑 같은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모든 생명 있는 것을 다스리게 하려고 하셨다.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인간에게 복을 주시고 번성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서 먹음으로써 하나님께 죄를 짓고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살았더라면 아무런 고통도 없었을 것이고, 에덴의 동산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셨던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먼저 하나님께 배신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을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위반하였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그 후 끊임없이 죄를 짓게 되었고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아담 한 사람이 저지른 죄로 인해 아담의 후손들은 정죄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아무 죄 없이 피흘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로운 행동으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 통로를 얻게 되었다. 인간이 죄를 계속해서 짓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려고 이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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