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망


가을사랑



성경은 여러 가지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책은 저자가 다릅니다. 그 책들은 각각 쓰여진 시대도 다르고 배경도 다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통해 읽혀지는 하나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는 존재도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직접 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영을 상실했습니다. 영이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타락하여 영을 상실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인간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한 사람씩 상대하셨습니다. 아담이 처음 상대였고, 노아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 등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은 구약 전체에 걸쳐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은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직접 만지기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계속 방황하면서 죄와 악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중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몸소 실천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아 탄생한 제2의 아담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무 흠이 없고 거룩함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 주시고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진리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사건으로 인간은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을 회복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직접 인간에게 나타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영을 되찾았고, 그 영의 기능이 회복되었으므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구원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보여주는 요점입니다. 이런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기독교인이고, 믿지 않으면 비기독교인인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해도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때때로 절망하고 힘들어합니다.


24시간 하나님께 매달려 있어야 하는데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삶의 무게를 느끼면 다시 세속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너무나 절박한 현실 앞에서 믿음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을 때 포기하거나 회의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살다 보면 쉽게 타락하고, 삶에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게 되고, 죽을 때 후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혼자 잘 났다고 큰소리치면서 살아보았자 인생은 길어야 80살입니다. 온갖 고생을 다 하고 힘들게 산 의미가 무엇이었나 하는 회의가 들면 그 인생을 아주 비참하고 불행한 인생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도 하나님을 믿고 삶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올바르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시고, 나를 이끌어주시므로 나는 죄에 빠지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는 노력을 하고, 그럼으로써 건강하고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별로 표가 나지 않아도 믿음이 깊어지고, 세월이 흐르면 그 차이는 엄청난 차이가 됩니다. 믿음이 없이 방탕하고 인간적인 권모와 술수로 이기적인 욕망의 노예가 되어 돈이나 벌고 출세나 하고 정욕이나 충족시키며 살던 사람은 무의미한 욕심꾸러기, 발정기의 동물, 이기적이고 차가운 수전노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아도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오랫동안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질이 하나님께로부터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안에서 우리가 사랑을 받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도 사랑으로 충만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기본 사항입니다. 새해에도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축복을 주실 것을 기대하는 소망과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더 큰 사랑으로 감싸서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날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편 118:24)


**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시 17:8)


**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여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이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 40:2~3)


**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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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과 양심의 가책

 

가을사랑

 

 

많은 사람들이 항상 죄의식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경우 지나치게 심한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같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법과 명령을 다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양심에 반하는 말과 행동을 했다는 죄책감에도 빠져 있다.

 

그뿐 아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은 단순힌 법과 명령의 준수에서 더 나아가 선한 일을 해야 하고, 십일조를 헌금해야 하며, 전도를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제대로 하려면 생업은 포기해야 한다. 실제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도사가 되거나 신학을 공부하거나 목회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평신도의 입장에서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신앙심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커다란 고민이 있다. 이 문제는 기독교가 탄생한 후 지금까지 2천년이 넘도록 신학자들이 연구해왔고, 신자들이 고통스럽게 생각했던 신학적 문제이기도 하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3~14)

 

율법주의와 은혜주의의 대립도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신약과 구약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느냐 하는 차이도 여기에 있다. 목회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너무 따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법이 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은 첫번째 법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법은 모세와 같은 영적 지도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보충되었다. 아주 복잡한 율법으로서의 체계를 갖추었다.

 

이러한 율법을 어기면 하나님에 대한 불복종, 불충성으로 간주되어 가혹한 징벌을 받았다. 종교지도자들은 오직 율법체계를 수호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만 율법을 어겨도 별다른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그냥 처벌하는데 급급했다. 간통을 하면 돌로 쳐죽이고, 안식일을 어겨도 목숨을 빼앗았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 3:4~8)

 

그러나 인간은 애당초 불완전한 존재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율법과 명령을 다 지킬 수는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율법의 준수를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느냐하는 문제가 있다. 아무리 잘 지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죄의식을 갖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부정하면서까지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2)

 

그것이 문제다. 게다가 현대사회에서는 수많은 사회법이 존재한다. 법치국가에서는 끊임없이 법과 제도를 만들어 나간다. 일반 사람들이 알지 모르는 법도 계속해서 양산된다. 법이 넘쳐나는 시대다. 법률가 조차 이런 법이 있었는가 하는 때가 많을 정도다. 법은 대단히 일방적이다.

 

국회에서 일방적으로 제정해 놓고 국민들이 알던 모르던 지키라고 한다. 위반했을 때에는 무조건 처벌한다. 위반에 따르는 제재를 가한다. 법을 몰랐다고 하는 법의 무지는 법적으로 항변사유가 되지 못한다.

 

형법에서도 자신의 법위반행위에 대해 위법하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 그에 대한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 한하여 위법성을 조각할 뿐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리 법을 몰랐다고 주장을 해도 그냥 처벌될 뿐이다.

 

법을 많이 공부하면 법의 내용을 알 수 있게 되므로 자신의 행위가 법에 위반되는지를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게 된다. 법률가와 비법률가의 차이가 그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법률가는 법을 알면서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모든 법을 다 지킬 수는 없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법을 위반하는 것을 모른채 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모든 교통법규, 모든 행정법규를 다 지키면서 사회생활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복잡한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하다못해 과속, 신호위반이라도 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법에서는 중죄와 경죄를 구별하고, 범죄에 있어서도 구성요건해당성, 위법성, 책임을 나누어 판단하여 처벌 여부를 결정한다. 그리고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위법성을 조각시키고, 책임도 인정하기 곤란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책임도 부정한다. 더 나아가 피고인에 대한 정상자료가 있으면 그러한 정상을 참작하여 재판에 반영한다.

 

그러면 성경은 어떠한가? 성경에서는 아무런 사유도 용납하지 않는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면 그 사유를 묻지 않는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쉽게 저지르게 되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에서 더 큰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결국 범죄를 사전에 방지하고, 범죄 후에도 그 범죄의 결과를 수습하려고 노력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뿐만 아니라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교만한 자세에서 낮아지게 된다.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죄책감에 빠져서만 살아갈 때 우리는 매우 경직된 노예가 되고, 비참하게 된다.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우리는 그 율법을 100% 완벽하게 지킬 수 없을 뿐 아니라, 다 지킨다고 해도 더 많은 선행을 요구하는 의인의 법까지 생각하면 질식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사건과 부활사건을 통해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의를 얻게 되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엄격한 율법주의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이것이 사랑의 법칙이다. 생명의 법칙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엄격한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얼굴에 밝은 빛이 생겨난다. 죽음의 법칙에서 생명의 법칙으로 이전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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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있는 삶

 

가을사랑

 

 

꿈(Dream)이란 우리의 잠재의식에 묻혀 있던 생각들이 잠을 잘 때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평소에 많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 꿈 속에서도 좋은 일이 있고, 나쁜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꿈은 때로 우리에게 앞날을 예시해 주기도 합니다. 과거에 겪었던 힘든 일은 두고 두고 악몽으로 나타납니다. 악몽을 꾸다가 가위에 눌리는 일도 있습니다. 자다가 잠꼬대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의식의 세계에서 현실과는 별도로 또 다른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꿈속에서 고민을 하기도 하며 어떤 일을 하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매우 복잡한 영적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꿈은 희망을 의미합니다. 앞으로의 목표를 뜻합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많은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장차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순차로 진학해서 공부를 하고 직업을 가지며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사업을 하고, 돈을 벌고, 출세하며 명예를 얻는 꿈을 가집니다.

 

그 꿈이 이루어지던 안 이루어지던 꿈을 가지고 꿈을 꾸면서 사는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꿈을 꾸면서 꿈을 이루려고 애쓰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꿈을 다 이루고 꿈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꿈을 다 이루고 죽음을 앞둔 재벌보다는 대기업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 재벌이 될 꿈을 가지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더 아름답습니다.

 

바로 꿈 속에 행복이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은 어렵고 고통스럽고,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꿈을 가지고 있는 한 그 사람은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은 오늘 보다 소중합니다. 더군다나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가치입니다.

 

내일이 있기에 우리는 살아갈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아무리 오늘 편안하고 행복하더라도 내일 불행할 것을 예견한다면 오늘의 행복은 아무런 의미들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꿈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활력소가 되고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먹어가면서 스스로 꿈을 포기합니다. 꿈꾸기를 완전히 포기합니다. 인위적인 노력으로 꿈을 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꿈, 행복한 꿈, 성공하는 꿈, 올바르게 사는 꿈을 꾸지 않습니다. 현실에 만족하고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냥 현실에 쉽게 안주하고 내일에 대해서는 특별한 계획을 가지지 않습니다.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잠을 잘 때만 쓸데없는 꿈을 많이 꾸게 됩니다. 소위 악몽에 시달리면서 살아갑니다. 좋은 이상적인 꿈을 꾸지 않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 살아온 현실에서 실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내일에 대해서도 더 이상의 기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동안 노력한 결과를 보고 자신의 실력을 낮게 평가하면서 더 이상 노력해도 아무런 성과가 없을 것으로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꿈을 포기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소멸을 뜻합니다. 꿈이 없으면 사람은 성장을 포기한 고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모든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얼굴 표정도 어둡습니다.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꿈이 있는 사람은 얼굴이 밝습니다. 지금은 고생을 해도 희망이 있기 때문에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잠언 15:13,15)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시기,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의지로 꿈을 가져야 합니다. 꿈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꿈은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꿈을 심어주지는 않습니다. 꿈의 씨앗은 오로지 자신이 혼자 구해서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꿈나무에 물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꿈나무가 무성하게 자랍니다.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꿈을 실현해 나갑니다. 꿈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상상도 못할 수확을 거두게 만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루노니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우리는 항상 꿈나무의 씨앗을 구해야 합니다. 그 씨앗은 어디에서 구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꿈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우리 마음대로 꿈의 씨앗을 심으면 그것은 악이 될 수 있고, 불행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나쁜 짓을 보고 배우면서 거기에서 꿈을 가지면 나중에 조직폭력배가 되고, 정치를 잘못 배우면 독재자, 부패한 공무원이 됩니다. 뇌물이나 받고 징역을 가게 됩니다. 연애의 꿈을 잘못 키우면 바람둥이가 되고 카사노바가 됩니다.

 

꿈의 씨앗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좋은 씨앗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시편 37:4~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저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1)

 

그 꿈을 키우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꿈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밤낮없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꿈만 꾸고 실천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늘 꿈을 꾸면서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그 꿈이 주는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꿈은 짧고 실천은 길어야 합니다. 꿈이 길고 실천이 짧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꿈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살핌이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인간이 노력을 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그 꿈은 깨지고 맙니다. 꿈을 이루려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꿈을 알리고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2)

 

오늘 우리는 꿈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꿈은 평생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눈을 뜨고 있을 때에는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꿈꾸는 능력이 감퇴했으면, 의식적으로 꿈을 종이에 적어보십시오. 그리고 그 꿈을 암기하십시오, 그러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십시오. 그러면 꿈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꿈을 꾸면서 사는 것은 행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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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과 용서(2)

 

가을사랑

 

 

일반적으로 죄의 종류에는 중한 죄와 경한 죄가 있습니다. 둘 다 죄에는 해당되지만, 그 죄를 범한 효과와 형벌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잘못은 매우 중한 것이고, 그에 대한 징벌이 무거울 것입니다.

 

어떤 잘못은 그렇게 중한 것도 아니고, 그에 대한 징벌도 가벼울 것입니다. 이런 구별이 없이 무조건 자신의 잘못을 크고 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만날 면목도 없다고 비관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잘못은 잘못이므로 우리는 가급적 잘못을 하지 않고, 그 반대의 일, 옳은 일을 하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끊임없이 하고 살아가는 만큼,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도 관대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관점과 기준에서 엄격하게 평가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상대적인 관점과 기준에서 완화하여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이며 모순입니다. 그리고 잘못입니다.

 

그러한 잘못은 매우 중대한 죄입니다. 선과 악을 자의로 구별하는 잘못이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서 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고, 선과 악을 제멋대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나누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과 남의 잘못은 똑 같은 인간의 잘못입니다.

 

똑 같은 인간의 잘못은 하나님의 법과 명령, 판단기준에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법이 아닌 인간의 주관적 법으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중대한 잘못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잘못을 동일한 가치판단의 기준인 하나님의 법으로 자신의 잘못과 타인의 잘못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잘못이며 위선적인 행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선거과정에서 정치인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을 보면 그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TV토론을 보면 항상 그렇습니다. 언론에서 사회현상을 비판하는 것을 보면 더욱 두드러집니다. 부부 사이도 그렇습니다. 서로의 잘못만을 보며, 자신이 어떤 잘못을 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사회생활에서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모든 거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소인과 피고소인의 입장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사소송에서도 원고와 피고의 입장에서는 항상 다른 논리로 자기 주장만을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진실은 왜곡되고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한 가혹하고 공격적인 비판과 정죄는 결국 언젠가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될 때 자신에게 똑 같은 정도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도 그 잘못이 자신의 잘못이라면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가급적 용서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특별히 관대한 조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따른 공평한 조치이고 합당한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란 속이 좁고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간의 나쁜 속성에서 자아를 해방시켜, 마음이 넓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잘못을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간절하게 타이르고 계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태복음 5:38~42)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와 같이 말씀하신 이유는 한 없는 인간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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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과 용서(1)


가을사랑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 잘못은 몰라서 저지르는 경우도 있고, 알면서 고의적으로 저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죄성과 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 때에는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들이 나쁜 일을 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타이르고 가르칩니다. 때로는 매를 대기도 하고, 도덕책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런 교육을 받아도 사람은 조금만 방심하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부도덕한 일을 하고, 법을 위반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상당히 훈련된 사람만이 올바르게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면 이런 훈계를 하는 사람도 없어집니다. 자기 멋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혼자서 개똥철학을 세워 가지고 잘 났다고 생각하며 잘못 살아갑니다.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부모님께 폭언을 하거나 손찌검을 하는 패륜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단지 국가에서 정한 실정법만이 아닙니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입니다. 법과 도덕과 양심이 우리로 하여금 지켜야 할 일, 해야 할 일, 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일을 정해 놓고 있지만 이것을 모두 지키고 실천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 연약하고 의지는 약하고 현실적인 여건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법적 의무와 도덕적 책임을 다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하며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위선자이거나 어리석은 경우일 것입니다.

 

종교의 율법은 우리에게 더욱 무거운 의무와 책임을 부과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율법을 다 지키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우리에게 무한의 복종과 무한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4시간 365일 긴장하면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몸소 실천하셨던 고귀하고 높은 도덕적 행동과 종교적 실천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높은 수준의 믿음과 행동은 사실 연약한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리이며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인간은 마치 중대한 죄인인 것처럼 극심한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우울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유한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을 망각한 채, 아니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마치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절대전능한 존재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사항을 다 준수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하고 불완전하고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전제 하에서 모든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이며 항상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고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율법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 궤도에서 이탈하여 자칫 잘못하면 수렁에 빠지거나 악의 구렁텅이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주의하며 살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살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앞으로는 그런 똑 같은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회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주관적인 판단으로 잘못의 정도를 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추상적이며 일반적일 경우가 많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올바른 것인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는 무엇이 잘못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명확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무슨 말씀을 위반했는지 어떻게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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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가을사랑

 


사람에게는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평안이 모든 행복의 출발입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그 무엇을 하더라도 불행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평안하게 되고,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행복을 제대로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시편 5:12)


그러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행복의 조건은 마음을 정리하고, 그 마음을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마음으로 하여금 그 결과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해질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입니다. 행복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내려 주실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충분히 받아들이는 노력을 해야 하며, 그 복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뜯어 고쳐야 합니다. 현재의 상태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않습니다.


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복을 주지,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정하며 욕되게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사와 복과 화를 주관하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절대전능하신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빌게 되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막을 연못으로 만드시며, 마른 땅을 물이 솟는 샘으로 만드시고, 굶주린 사람들로 거기에 살게 하시어, 그들이 거기에다 사람 사는 성읍을 세우게 하시고, 밭에 씨를 뿌리며 포도원을 일구어서,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또 그들에게 복을 주시어, 그들이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가축이 줄어들지 않게 하신다”(시편 107:35~38)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한 전제로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모든 복을 하나님으로부터만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알고 보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 그분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겠는가?”(전도서 2:24~25)


자기 자신이 잘났다고 큰 소리치고, 하나님을 부정하며, 인간의 힘으로 잘 살아보겠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 교만한 마음은 언젠가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게 됩니다. 잘 나가던 오만한 사람이 하루 아침에 몰락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라.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잠언 27:1)


내가 편히 지낼 때에는 이제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겠지하였지만, 아,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 주시던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시자마자 나는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시편 30:6~7)


둘째, 복을 받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초적인 달란트를 살려 최대한 노력을 하시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노려하지 않고 거저 먹으려고 하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가난하지 않으려면 잠을 좋아하지 말고, 먹거리를 풍족히 얻으려면 깨어 있으라(잠언 29:13)” “게으른 사람아, 언제까지 누워있으려느냐? 언제 잠에서 깨어 일어나려느냐? 조금만 더 자야지, 조금만 더 눈을 붙여야지, 조금만 더 팔을 베고 누워 있어야지 하면 네게 가난이 강도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방패로 무장한 용사처럼 달려들 것이다”(잠언 6:9~11)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바랍니다. 그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큰 방향은 하나님께서 잡아 주시지만, 구체적으로 일을 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달란트를 가지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또한 죄악입니다. 그 좋은 달란트를 게으름 때문에 그냥 썩히는 것도 죄악입니다.


좋은 머리, 건강한 육체, 좋은 성격을 주셨는데, 그것을 공부하거나 일을 하거나 재능을 살리는 데 사용하지 않고, 놀고 술 마시고 섹스나 하고 게임이나 하는 일에 소모하는 것은 인간을 만드시고 그에게 건강과 재능을 부여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가장 최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커다란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인간은 조금 성공하면 아주 교만해집니다. 모든 것이 자신이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으로 떠듭니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아도 속 마음으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해도 속으로는 아주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주변에서 도와 준 사람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생활태도가 180도 달라집니다. 고급 저택에 살아야 하고, 고급 외제차를 타야 합니다. 명품 옷을 입어야 하고 다이아몬드 장식을 해야 합니다. 비행기도 1등급을 타야 하고, 최상급 호텔에서 숙박을 해야 합니다. 예쁜 여자를 탐내기도 하고, 사회적 명예를 모두 손에 넣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십니다. 두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판단하십니다. 자신의 모든 성공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자신의 성공을 모두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더 큰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잊지말아라”(시편 103:2)

 

인간에게 행복은 매우 소중한 가치입니다. 우리는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고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불행과 저주는 마귀와 사탄의 짓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사탄의 장난으로 우리가 때로 불행에 빠지는 경우가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대개 우리의 불행은 우리의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방심하고 부주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전에 주의를 충분하게 하지 않아 불의의 사고를 당합니다. 위험한 등산을 갔다가 빙벽에서 미끄러져 사고를 당합니다. 불조심을 제대로 하지 않아 화재가 발생합니다. 방범을 제대로 하지 않아 도둑맞고 강도를 당합니다.


남자를 믿고 으슥한 곳에 따라 갔다가 부녀자는 강간을 당하게 됩니다. 쉽게 돈을 벌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사기를 당해 망하게 됩니다. 공부를 하지 않고 성적을 잘 받으려고 컨닝을 하다가 제적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무원이 뇌물을 받아 먹고 신세를 망칩니다. 경험도 없이 사업을 시작했다가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입니다. 충분한 고려 없이 정치브로커 말만 듣고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다가 돈만 날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결국 우리는 많은 불행한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무 잘못도 없이 순전히 다른 사람의 악행으로 불행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귀와 사탄이 그 사람을 통해 악을 행하는 것이므로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불행을 막고 저주를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을 누리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복을 받을 마음의 자세를 하고, 주시는 축복을 받기 위한 최선의 인간적인 노력을 하고, 그 축복에 대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이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서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이다”(시편 1:1~3)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이 땅이 오곡백과를 냈으니,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니, 땅 끝까지 온 누리는 하나님을 경외하여라”(시편 6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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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위기


가을사랑

 


50살이 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위기상황을 맞게 된다. 위기의 정도는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우선 심리적으로 약해진다.


그동안 왕성하게 사회생활을 했던 에너지가 떨어지고, 사회적인 지위가 불안해진다. 돈을 벌 수 있는 능력도 저하된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것이다.


직장에서 자신의 영향력도 떨어지고, 언제 그만두어야 할지 모른다. 조직에서 밀려나고, 개인 사업을 해도 수익이 떨어진다. 정년은 가까워오고, 정년을 다 채울지도 미지수다. 신체적으로도 정력이 크게 감퇴하며, 각종 질병을 걱정해야 할 나이다. 


아무리 건강에 신경을 써도 나이는 어쩌지 못한다. 자녀들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뼈가 빠졌지만, 그 공로도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자식들은 항상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남들은 다 잘 살고 자식들도 다 잘되는 것 같은데 혼자서만 그렇지 못한 것 같아 비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때 잘못하면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많은 스트레스를 받다 보면 신경이 약해져서 불면증에 걸리게 되고, 몸은 허약해진다. 늘 기분이 우울하고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별로 없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제대로 승리하지 못하고 낙오자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어 울적해진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세상에는 더 열심히 독하게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고, 행운의 여신은 항상 공평한 것이 아니다. 학교 다닐 때 자신보다 공부를 못해 무시했던 사람들이 사회에 나오면 더 똑똑하게 자기 앞가림을 하고 출세하며 성공한다. 더 큰 부를 누리고 더 좋은 곳으로 결혼을 해서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 현실이다. 학교 성적의 서열이 사회에서 뒤바뀌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승복을 못하고 있으면 답답한 우등생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아내조차 내가 살아 숨쉬는 것을 싫어하고, 친형제들도 나를 역겨워한다. 어린 것들까지도 나를 무시하며, 내가 일어나기만 하면 나를 구박한다. 친한 친구도 모두 나를 꺼리며, 내가 사랑하던 이들도 내게서 등을 돌린다. 나는 피골이 상접하여 뼈만 앙상하게 드러나고, 잇몸으로 겨우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욥기 19:17~20)


이렇게 추락하는 상황에서 자꾸 움추리고 나약한 마음을 가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이것저것 해보지만 세상 천지에 나이 들면 특별한 것도 없어 보이고, 웬만한 일은 다 해보았기 때문에 또 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친구를 만나도 그렇고, 술을 마셔도 그렇다. 나이트클럽에 가도 예전처럼 흥이 나지 않는다. 사실 나이 들어 나이트클럽이나 카바레에 가서 흥을 내기도 좀 멋적은 일이다. 이럴 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것이 인생의 위기인 것이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자살할 생각도 하게 될 위험이 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이런 사람들은 죽기를 기다려도 죽음이 찾아와 주지 않는다”(욥기 3:20~21).


성경에서 욥이 자신의 고난을 힘들어 하면서 한 말이다. 세상에는 욥처럼 힘든 일을 당해 고통을 받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자살사이트도 많이 생겼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엄청나다.

 

비유를 들면 이렇다. 인생은 바다에서 출항하는 배와 같다. 인생의 초기에는 새 배에 기름을 가득 싣고 출발한다. 먼 바다를 향해, 많은 꿈을 가지고 호기심에 들떠 낭만적인 출발을 시작한다.


세상을 처음 배워가면서 앞으로 나가는 것은 그 자체로 재미있다. 힘이 들지만 새로운 것을 많이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앞으로 나가 목적지에 2/3 정도 다가갔다고 하자. 상황은 어떻게 변할까?


동일한 인생의 여정을 비슷하게 걸어왔기 때문에 새로운 맛은 없다. 똑 같은 파도를 거슬러 힘들게 왔을 뿐이다. 그런데 배는 이제 50년이나 사용했기 때문에 녹슬고, 엔진도 낡았다.


잦은 고장이 나고 그렇다고 새 엔진으로 대체할 방법도 없다. 한번 부착한 엔진은 끝까지 사용해야 한다. 배에는 기름도 많지 않다. 거의 다 떨어져 간다. 바다에서 멀리 나갔기 때문에 파도는 더욱 거세다. 이미 많은 배들은 더 앞으로 나갔거나 중간에 침몰한 상태다. 갈수록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뒤를 돌아보면 수많은 젊은이들이 싱싱한 몸으로 새 배를 타고 새 엔진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빠른 속도로 뒤쫓아 오고 있다. 낡은 배의 선장은 어떤 느낌일까? 극도의 외로움, 불안, 허망함을 느끼게 된다.


“기운도 없어지고 살 날도 얼마 남지 않고, 무덤이 나를 기다리고 있구나. 조롱하는 무리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으니, 그들이 얼마나 심하게 나를 조롱하는지를 내가 똑똑히 볼 수 있다”(욥기 17:1~2).


그렇다고 앞날이 어떤지 전혀 예측할 수도 없다. 파도가 더욱 높아지기 때문에 배가 갑자기 파손될 수도 있고, 그런 고생 끝에 목적지에 도달하면 그 목적지는 과연 무엇인지 알 수도 없다. 그곳에 천국이 있다고 하지만, 아직 직접 가본 일이 없는 상태에서 말만 들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믿는다고는 하지만 확신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이때 선장은 정신적으로 우울증에 빠진다. 인생의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면 이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잠시 배를 멈추고 돌아온 길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얼마나 방황하며 흔들거리며 앞만 보고 왔던 길인가?


정확한 방향에서 얼마나 벗어나 떨어져 있는가? 다른 배들의 상태는 어떤가? 이렇게 자신의 위치와 현상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는가? 그곳을 향한 나침반은 정확하며 등대의 불빛은 밤에도 잘 보이는가?


눈을 감고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건강을 다시 챙겨야 한다. 지금까지 너무 무리했던 것은 아닌지, 몸은 결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나이 들어 나약해진 몸은 조금만 무리가 가도 탈이 난다. 그리고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렸던 것을 반성해야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것도 이제는 조절해야 한다. 노인은 바다에서 새로운 인생철학을 깨달아야 한다. 자기관리, 감정조절, 욕망의 억제, 건강유지를 위해 다시 한번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필요하다.


인생의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님께 의지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욥처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나 불평을 걷어 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가지 우리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보살핌이 없으면 단 하루라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인생길이 내가 잘 나서 그렇게 살아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셔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우리는 더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려야 한다. 배가 풍랑에 파손되지 않도록, 환한 등대의 불빛을 비춰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좌절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지나온 과거는 모두 잊어버리자.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야 한다. 그곳에서 그동안 쌓았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시작해 보자.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할 일을 찾으면 할 일이 있는 법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 보람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새로운 비전을 가슴에 품고 다시 넓은 바다를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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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옷자락

 

가을사랑

 

 

어떤 여인이 12년 동안이나 중병을 앓아왔다. 병이란 육체를 고통스럽게 하고 정신을 짓누른다. 그것도 중한 병에 걸려 있으면 몸과 마음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며 항상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약은 다 써보았고, 용하다는 의사는 다 만나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 병을 고쳐줄 수는 없었다. 이른바 불치병이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님 몰래 뒤로 다가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오랜 세월 자신을 억눌러왔던 혈루병이 완치되었고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마가복음 제5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예수의 옷에 손을 대니 병이 나았다.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마가복음 5:25~34).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불안하고 위험하다. 혼자 올바른 방향을 찾아 걸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방황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어린 아이가 어떻게 혼자 독립해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어린 아이에게는 부모가 있어야 하고, 그가 독립해서 생존할 수 있을 때까지 그는 보호를 받아야 한다.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고 내팽겨쳐지면 그는 생명을 잃게 된다. 우리는 단순한 육체로 살아갈 수는 없다. 정신과 영혼이 있어야 살 수 있다.

 

그런 영혼과 정신은 우리가 나이를 먹어도 누군가 우리를 인도하고 이끌어주고 보호해 주지 않으면 제대로 유지될 수 없다. 제대로 자라기 어렵다. 혼자의 힘으로, 혼자의 지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자칫 개똥철학을 가지고 그릇된 방향으로 빠지기 쉬운 것이다.

 

독학으로 공부한다는 것이 그래서 어렵고 그릇된 편견을 가지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다. 머리가 좋고 똑똑한 사람들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무런 신앙도 없이 혼자 잘 났다고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자신만만하게 살아간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갖는다.

 

거기에서 승승장구한다. 출세하고 돈도 벌고 결혼도 잘 하고 건강하게 지낸다. 세상의 온갖 행복을 누리고 남부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나중에 시간이 가면 예상치 못한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된다. 그때 그는 좌절하고 낙담하지만 어디에 의지할 곳이 없어 불행하게 된다.

 

그런 시련을 겪지 않아도 죽을 때 돌이켜 보면 너무나 잘못한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너무 잘 나서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고 혼자 잘 먹고 잘 살았다는 후회를 하게 된다.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 죄를 많이 짓고 남에게 사랑을 베푼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알게 모르게 죄를 많이 지은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다. 자칫 그런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되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바쁘게 살아야 했는지 조차를 모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 영혼은 인간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언제나 악에 빠질 수 있고, 교만해지고 사악해지며, 잔인한 성향을 보일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은 그 영혼의 빛이 되고, 등대가 되며, 사표가 될 수 있는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 존재가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들고 살아가는 것이 망망대해에서 표류하지 않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길이다. 그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평생 혼자서 자신만을 믿고 의지하며, 혼자 고군분투하겠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것이다.

 

혼자 도를 터득한다고 하는 것도 비효율적이다. 벌써 2천년이 넘게 수많은 선지자들이 평생을 바쳐 깨우치고 연구해서 갈고 닦아놓은 것이 기독교다. 기독교는 이미 충분히 검증되었다. 통계적으로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악에 빠지지 않고 건전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떨까? 우리는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추상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회의가 들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성령 역시 느낄 수만 있지 직접 성령을 보거나 손에 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셨다. 그래서 우리가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옷자락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지만 다시 부활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때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가 원하면 기도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우리는 24시간 예수님을 부를 수 있다. 주님이라고 부른 다음 기도를 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러면 우리는 연약한 우리를 주님께 의탁하고 모든 것을 맡기면 된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을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현재의 고난을 어떻게 당해야 할지?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 된다.

 

그러면 주님께서 응답해 주신다.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를 격려해 주신다. 우리가 어렸을 때 모든 문제를 부모님께 맡기고 해결해 주시기를 바랬듯이 똑 같은 이치로 부모님들이 계시지 않으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고 우리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신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든든해진다. 배짱이 생긴다. 그 믿음과 배짱으로 세상을 살면 자신감이 넘치고 예수님의 뜻을 확인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면 돌다리도 두드리며 강을 건너는 것처럼 자신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만사에 형통하고 시련에 빠지지 않으며 악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배우는 도덕이나 윤리만으로 세상을 살 수는 없다. 도덕 교사가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 자체가 죄를 짓고 부도덕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완전하지 못한 사람이 위선적으로 가르치는 도덕이나 훈계를 제대로 따르기는 어렵다. 나이가 들면 그것 자체가 불완전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 법이고 도덕이며 상황논리에 따라 정의도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법을 배우고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은 알파요 오메가다. 처음부터 영원까지 이 세상을 주관하시며 참된 진리만을 선포하고 계신다.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리가 있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고난을 당할 때 의지할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에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9~10).

 

주님의 옷자락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된다. 생명을 건지는 유일한 밧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뒤에서 옷자락을 붙잡아야 한다. 건방지게 주님의 발을 밟아서는 안 된다. 주님을 사랑하되 주님을 경건한 마음으로 따라야 한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다. 우리에게 영원한 진리를 깨우쳐 주시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신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로마서 1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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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조심

 

가을사랑

 

 

세상을 살아가면서 조심해야 할 것이 말이다. 말이란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회생활을 말로 이루어진다. 모든 의사표시는 대화로 시작되며, 말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글보다는 말이 일차적으로 행해진다. 싸움을 할 때도 먼저 말로 싸우다가 주먹으로 싸우게 되는 것이다. 국가 간에 전쟁을 할 때에도 먼저 말로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들어간다.

 

이처럼 말은 인간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한다.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여과없이 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게 되고, 말을 한 사람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몇 대 때런 것보다는 말로 상처를 준 것이 상대방에게 더 큰 자극을 주고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것이다.

 

말을 심하게 하면 상대방은 그 말로 인해 두고두고 씻어지지 않는 상처를 받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지만 상대방이 그 잘못을 하나씩 후벼파면서 괴롭히면 그의 말과 그의 매서운 눈빛은 평생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성격이 나쁜 사람은 이와 같이 말로써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이다.

 

말을 하는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내뱉어도 듣는 사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된다. 돌이켜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이 남으로부터 들은 말 가운데 가장 기분 나쁘고 심한 상처를 받았던 말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말들이 자신에게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현재 하고자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상처를 줄 것인지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인격에 어울리지 않는 품위 없는 말은 인격을 낮추게 된다. 저속한 말을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평소 존경하던 사람이 말 한마디를 잘못해서 그 존경심을 모두 무너뜨리기도 한다.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말도 그렇다. 남을 무조건 나쁘게 말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입만 열면 남을 헐뜯고 욕하고 비방한다. 결코 다른 사람에 대해 좋게 말하는 적이 없다. 앉으면 남의 이야기를 꺼내고, 그 사람에 대한 나쁜 점, 부족한 점만을 강조한다.

 

처음에는 그런 말을 재미 있어 듣고 있지만, 나중에는 그처럼 남의 말을 나쁘게 하는 사람을 좋지 않게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또 우리의 말을 다른 사람에게 나쁘게 할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급적 대화 중에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별로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이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의 말이 나오면 가급적 좋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좋다. 말을 할 때 가급적 솔직하게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곧 습관이 된다. 거짓말을 그 자체가 나쁜 일이다.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거짓말은 선의라도 해서는 안 된다.

 

특히 남을 저주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 저주는 곧 자신에게 되돌아올 위험성이 있다. 말은 한번 하면 주어담을 수 없다. 화살이 시위를 떠난 것처럼 그 말은 목적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간다. 그 말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말을 한 사람에게 있다. 오늘부터 우리는 입술을 벌여 하는 말의 위력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야고보서 3:8~12).

 

좋은 말을 하는 습관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마음에 신앙심이 가득 차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에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나쁜 말을 하지 않게 된다. 아무리 화가 나도 참을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의 욕을 하고 저주의 말을 하는 것은 사단의 짓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한일서 3:8~10).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라(잠언 3:29~30)". 공연히 잘 있는 사람을 모함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악한 일을 하지 않는 이상 공연히 말로써 다투지 말아야 한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오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잠언 10:19~21)".  말은 가급적 적게 하는 것이 좋다. 말을 많이 하면 실없어 보인다. 그리고 허점이 드러난다. 말을 자제하는 것이 금이다. 자신의 입술을 가급적 눌러야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도 패역한 혀는 베임을 당할 것이니라.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잠언 10:31~32)". 혀를 잘못 놀리면 커다란 화를 당하게 된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언 11:13)". 남의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언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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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와 오메가


가을사랑

 


인생이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단 1회의 시간입니다. 인생이란 자신에게 유일하며 고유한 생명체로서 자기 마음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사람이 태어난 환경은 어쩔 수 없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나쁜 환경에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화가나 조각가가 작품을 만들 때 그 소재로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종이를 소재로 할 수도 있고, 찰흙을 소재로 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선택된 소재를 가지고 나름대로 최선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소재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그 소재 자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소재는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므로 그것을 탓하거나 불만을 표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불평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소재를 가지고 제한된 시간에 어떻게 하면 최선을 다해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것은 바로 소재를 주신 하나님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책무요 사명인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작품은 단시간 내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 동안 혼자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중간에 작품을 포기하고 소재를 부셔버릴 수도 있습니다. 자포자기하고 자살함으로써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재를 망가뜨리고 던져버리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래서 자살은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죄악입니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범죄입니다. 자살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리 죽고 싶은 충동을 받아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더 이상 견딜 힘이 없어도 자살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주어진 소재 위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개별적으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 달란트는 다 다릅니다. 그 달란트를 유효적절하게 잘 사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달란트를 그대로 방치하면 녹슬고 말게 됩니다.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음악에 소질이 있는 사람도 가만히 있다가 나이가 60살이 넘어 비로소 시작해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가급적 젊은 나이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성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무한정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조금 성공했다고, 남들보다 나은 재능이 있어 인정을 받았다고 해서 교만에 빠지면 안 됩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또한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내려주셨는데 어찌하여 그것을 자신의 공으로 가로챕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악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권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서로서로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베드로전서 5:5~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교만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배은망덕한 행위입니다. 성직자가 평생을 다 바쳐 전도함으로써 커다란 교회를 세웠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더 똑똑하고 더 노력한 많은 성직자들이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고 개척도 되지 않고 사그러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가난하고 불쌍한 성직자에 비하여 커다란 교회를 짓고 수많은 신도들을 모아 훌륭한 사역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담임목사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어 성령을 베풀어주시고 그 성령의 힘으로 때와 장소를 잘 만나 부흥하게 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그 성직자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자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처럼 대접받으려고 하고 예수님처럼 존경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초호화생활을 하고 거기에 익숙해집니다. 말로는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자신은 고급 승용차에 고급주책에서 살면서 서울역 노숙자들에게는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릅니다. 이론과 실천이 구별됩니다. 교회에서의 설교와 밖에서의 생활이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죄악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 모두 회개해야 합니다. 그들을 불쌍한 연민의 정으로 이해하더라도 우리 자신은 그렇게 변질되지 않도록 각성해야 합니다. 물질만능풍조에 휩쓸려 살고 싶으면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 잘 먹고 잘 살면 됩니다.

타이거 우즈가 새로 구입한 저택은 3백억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초호화판입니다. 세계적인 재벌들의 집은 대개 그런 식입니다.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성직자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돈을 많이 벌어도 검소하게 살아야 할 종교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온갖 은혜가 넘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하므로 여러분은 모든 일에 언제나 쓸 것을 넉넉하게 가지게 되어서 온갖 선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뿌려 주셨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한 것과 같습니다”(고린도후서 9:8~9)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좋은 일을 하려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수녀 테레사는 그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명성을 얻어도 호화주택에 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낮은 자리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살다 갔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쫓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디모데전서 6:8~10)”

우리 인생이 세속적인 성공에서 얻는 부와 명성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좋은 음식이 아니어도, 좋은 저택이 아니어도, 우리는 순수한 영혼을 지키면서 살아가면 행복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자세를 평생 지켜야 나중에 최후의 심판의 날에 염소가 아닌 양으로 판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잠시 사는 동안 물질이 무어라고 그렇게 중요합니다. 먹고 자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다. 재산을 많이 가지고, 쌓아놓았다가 자식에게 물려준다고 무슨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까?

나중에 재산상속문제로 분쟁이나 하게 됩니다. 쉽게 받은 재산은 쉽게 날라갑니다. 사기나 당하고 흥청망청 쓰고 맙니다. 우리는 항상 인생을 마쳤을 때 어떤 판단을 받느냐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보아라, 주님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나니, 이것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지른 온갖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슬러서 말한 모든 거친 말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단죄하시려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입으로 허풍을 떨다가도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남에게 아첨을 합니다.”(유다서 1:14~16).

우리는 오늘부터라도 다시 살아가는 방법을 되새겨보고 정리해야 합니다. 인생을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짧습니다. 짧은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결국 세속적인 도덕이나 철학, 사회현상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시키고, 왜곡해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다”(베드로전서 1:24~25).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절제가없으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을 부인할 것입니다”(디모데후서 3:1~5)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시작이며 끝이다. 생명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차지하려고, 그리고 성문으로 해서 도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겉옷을 깨끗이 빠는 사람은 복이 있다”(요한계시록 22:12~14).

우리는 마지막에 잘 되어야 합니다. 인생의 끝에 훌륭한 사람으로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평생 고생을 하고 노력을 했다고 해도 나이 들어 말년에 잘못 생각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교만에 빠지면 망하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모두 회개하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신실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 예수님의 발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교만해져서 예수님의 발등을 밟으면 안 됩니다. 옷자락이 아닌 예수님의 목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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