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운명 (64)

아무튼 자리가 사람을 빛나게 한다고 지금의 정숙은 왕년에 놀던 정숙이 아니었다. 180도 달라졌다. 엉망으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국회의원 뱃지를 달고 나타나면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 똑 같았다.

지현은 이번에 명훈 엄마를 만나러 갈 때에는 혼자 가지 않고, 친구 명자를 데리고 갔다. 약속 장소는 강남에서 돈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고급 일식당이었다.

“찾느라고 고생하지 않았어요?”
“예. 괜찮았어요.”
“이 친구는 제가 데리고 왔어요. 제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요.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하요. 같이 이야기하면 돼요.”

명훈 엄마는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며, 지금까지 얼마나 노력을 많이 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가정이 얼마나 모범적인지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일본 정종, 사케를 시켜 같이 마시자고 했다. 지현은 아이 때문에 못마신다고 했다. 명자는 평소 술을 좋아하니까 명훈 엄마와 대작을 해주려고 같이 많이 마셨다.

명훈 엄마도 술을 많이 마셨다. 지현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술을 저렇게 마실까? 아마 맨 정신으로는 하기 곤란하니까 술의 힘을 빌어서 말을 하려는 것이겠지.’

“아가씨. 내가 알아봤더니 전에 다른 남자와 동거생활을 했고, 낙태수술도 한 적이 있다면서요?”
“아니예요. 그런 적 없어요. 잘못 아신 거예요. 예전에 남자 친구가 있었지만, 육체관계는 전혀 없었어요. 저는 명훈씨가 처음이었어요.”

“아니 내가 다 알아봤고, 증거도 가지고 있는데 왜 아니라고 해요?”
“무슨 증거가 있는지 보여주실래요? 제 친구는 그런 아이가 아니예요. 지금까지 일만 열심히 하고 남자는 전혀 모르고 살았어요. 제가 잘 알아요. 다른 여자 애들하고 달라요. 믿어주세요.”

“그렇게 잡아떼봤자 소용 없어요. 내가 다 알아봤으니까. 어쨌든 우리 명훈이와는 어울리지 않고, 결혼은 절대 못하는데 아이는 빨리 떼야지, 어떻게 하려고 해요? 도대체 원하는 게 뭔지 말해봐요.”

“어머님. 저는 지금 명훈씨 아이를 가진 상태이고, 오직 명훈씨만 생각하면서 살고 있어요. 지난 과거는 잘못한 것도 없지만, 과거는 따져봤자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아이를 낳고, 명훈씨는 대학 마치고 자리 잡으면 결혼하게 해주세요. 제가 열심히 할 게요. 어머님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거예요.”

“글세. 우리 집에서는 이미 결론이 났어요. 명훈이가 한때 어린 나이에 실수한 거고. 아가씨는 나이 먹고, 그동안 이 남자 저 남자와 마음대로 연애하고 지내다가 순진하고 세상 전혀 모르는 명훈을 붙잡고 늘어지려는 거, 절대 용납 못해요. 다만, 우리 명훈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돈으로 보상할 게요. 천만 원을 줄테니 빨리 수술하도록 해요. 그리고 서로 맞는 좋은 남자 새로 만나도록 해요. 자꾸 말도 되지 않는 상황 만들어놓고 공갈치고, 명훈이를 괴롭히면 우리도 하는 수 없이 법으로 할 거예요.”

옆에서 술만 마시고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듣고 있던 명자가 끼어들었다.
“아니 아주머니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무슨 증거가 있다고 그래요? 증거를 대세요. 흥신소를 시켜서 뒷조사를 한 거면 내가 고발할 거니까. 왜 없는 일을 만들어 가지고 생사람을 잡아요?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인가요? 명훈이가 뭘 어려요? 지금 6개월짼데 어떻게 수술을 해요? 그리고 왜 과거 얘기를 해요. 요새 처녀로 시집 가는 여자 있는 거 봤어요? 명훈씨는 총각으로 지현이 만난 건가요? 돈이 그렇게 많으면 100억 원을 주세요.”

명훈 엄마는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돈으로 해결될 일도 아니고, 은영이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보통 문제가 이닌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른 방법을 써야겠다.’
“알았어요. 내가 명훈이와 상의해서 알려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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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63)

정숙은 얼굴이 예쁘고 남자에게 매우 적극적으로 대쉬를 하는 성격이어서 그 후 많은 남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남자 친구가 많았다. 지현에게도 정숙은 늘 남자 친구가 너무 많아 모두 관리하기가 힘들다면서 자랑 겸 불평을 했다.

어떤 날은 두 남자와 데이트가 겹쳐서 낮에 한 남자 친구와 모텔에 가서 성관계를 하고, 또 밤에 다른 남자 친구와 다른 모텔에 가서 성관계를 하기도 했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때만 해도 지현은 그런 정숙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여자가 하루에 두 남자와 성관계를 할 수 있을까? 아프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성관계가 될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더 나이를 먹어서 들어보니, 성매매하는 여성들은 하루에 7~8명씩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를 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숙이 하루에 두 남자와 성관계를 하는 것은 가능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은 이렇게 요지경 속이다. 남자와 여자가 은밀하게 하는 성행위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것은 사랑과 섹스의 은밀성, 비밀성, 폐쇄성, 비공개성 때문이다. 이런 속성 때문에 늘 사랑에는 진실과 거짓, 위선과 가식이 혼재한다. 동시에 존재한다.

그럼으로써 모순과 갈등을 초래한다. 속이는 자와 속는 자! 이용하는 자와 이용 당하는 자,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지현은 정숙을 만나서 많은 남자 이야기를 들었고, 사랑 이야기를 들었다.

정숙은 완전히 사랑의 달인, 사랑학의 박사가 되어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놀기를 좋아해서 글로 표현할 능력은 없었지만, 말로 설명하거나 전해주는 것은 아마의 경지를 넘어 프로의 세계에 진입해 있었다.

그렇게 다양한 사랑을 경험하고, 즐기고 놀고 지냈던 정숙은 1년 전에 아주 괜찮은 순진한 남자, 능력 있는 남자의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그 남자는 부모의 재산을 많이 물려받은 상속인이었다.

외동 아들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뒤에 또 어머니까지 돌아가셔서 1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 사람의 부모님은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지 돌아가시기 전에 상속세나 증여세를 잘 해결해 놓았다.

그래서 세금도 많이 내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은 정숙이 그 많은 재산관리를 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정숙은 그래서 회계학원에도 다니고, 재산관리하는 것도 공부했다.

지금은 돈 많은 부잣집 와이프가 되어 엄청 몸조심을 하고 있다. 일체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는다. 원래 한참 놀 때 정숙는 자신의 본명을 쓰지 않았다. 멋있게 보이려고 영어 이름을 썼다. 코니라는 애칭을 썼다.

물론 영어는 잘 못했다. 아는 것은 팝송의 가사였다. 가사 공부는 많이 해서 팝송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면 마치 미국 뉴욕에서 10년 살다 온 사람 같이 보였다. 집도 응봉동이라고 거짓말로 속였다. 나이도 속였다. 늘 25살이었다.

결혼한 후에는 비로소 정숙이라는 본명이 자주 등장했다. 그래서 그런지 조실하게 사는 지금, 옛날 만났던 남자들에게서 연락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성형수술도 해서 언뜻 보아서는 잘 못 알아보게 되기도 했다.

늘 자가용을 타고 다니고, 고급 호텔이나 레스토랑에만 다니기 때문에 수준 낮은 옛 남자 친구들은 만날 기회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다 돈의 효용이고 위력이었다. 정숙의 남편은 이 세상에서 여자는 정숙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남편은 정숙이 처녀로 시집온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정숙이 첫날 밤 남편 모르게 작은 병에 준비해두었던 피를 시트에 묻혀 놓았기 때문이었다. 사전에 그 연습을 최소한 20번 이상 했다는 말을 지현은 듣고 놀랐다.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정숙은 달랐다. ‘돈 많은 외동 아들과 결혼하고, 자신이 대접받고 잘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인데, 왜 그런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도 하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는 여자는 남자에게서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게 정숙의 소신이고 철학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지현은 바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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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62)

낙태에 대해서는 명훈 엄마 역시 약사로서 반대하는 강한 개인적인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명훈 엄마도 어렸을 때부터 모태신앙으로 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특히 약학을 공부했고 약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한번도 원치 않는 임신을 하지 않았다. 워낙 피임을 잘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낙태도 하지 않았다.

명훈 엄마도 결혼 전에 현재의 남편 이외의 다른 남자들과 관계를 가진 사실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약대생으로서 누구보다도 피임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기 때문에, 절대로 임신의 위험성 있는 성관계는 하지 않았다. 결혼한 후에도 명훈을 낳고 더 이상 임신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다음에도 아주 철저하게 피임을 했다. 그래서 한번도 실패를 하지 않는 성공률 100%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일을 당하자 갑자기 낙태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고, 낙태죄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도대체 여자가 어리슥한 남자와 몇 번 잠자리를 하고, 아이를 임신해서 평생 팔자를 고치겠다는 나쁜 의도에서 아이를 꼭 낳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지금까지 낙태를 허용하자는 사람들은 인간의 어리석은 임신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구원자의 목소리였다. 반면에 낙태를 허용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현실을 너무 모르고, 자기 일이 아니라고 하는 무책임하고 공허한 메아리였다.

명훈 엄마는 자신의 아들 문제가 되자, 원치 않는 임신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생각하게 되었고, 만일 낙태를 하지 않고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 때문에 겪을 고통과 불행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명훈 아빠가 바람을 피면서 다른 여자들로 하여금 낙태를 하도록 한 경험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명훈 엄마는 모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은 다른 여자의 문제이지, 자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자기 아들의 정자가 못된 여자의 난자와 만나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냥 지저분하고 용납 못할 저급한 인간의 행동이라고 생각하였다. 인간은 이처럼 자신의 일과 남의 일을 엄청나게 다른 잣대로 판단하고 평가한다. 그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모든 인간의 불행은 바로 이런 이중잣대로부터 비롯된다.

며칠 후 명훈 엄마는 다시 지현을 만나기로 했다. 이번에는 고급 일식당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지현은 친구 정숙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명품 옷과 명품 백, 귀걸이 등을 빌렸다. 정숙은 지현의 고등학교 친구로서 부잣집으로 시집가서 잘 살고 있었다. 지현과 정숙은 고등학교 때부터 둘도 없는 친한 사이였다. 서로의 모든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지현이 처음 남자를 알게 된 것도 정숙의 애인에게 당한 것이었다. 정숙은 자신의 남자 친구로부터 지현이 강간 당한 사실을 알고, 자신의 애인인 남자를 지현과 같이 만나서 소주병으로 머리를 쳐서 상해를 입히기도 한 의리파였다.

지현이 정숙의 애인으로부터 강간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숙은 지현을 의심했다. 그것은 정숙의 남자 친구가 지현을 강간해놓고, 정숙에게는 지현이 자신을 유혹해서 하는 수 없이 넘어간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숙이 지현으로부터 상세한 사건 경위를 들어보니, 사실은 그 남자가 지현을 강압적으로 강간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이 만나 정숙으로부터 소주병으로 머리를 세게 맞아 피까지 흘리면서도 그 남자 친구는 지현을 강강한 사실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가 만일 강간을 했으면, 왜 지현에게 상처가 없었느냐? 그리고 여자가 끝까지 반항하면 어떻게 남자가 삽입을 할 수 있느냐? 지현이 동의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 것이다. 나를 믿어달라. 나는 정숙이만 사랑한다.’고 강변했다.

정숙은 그 남자가 아무리 그렇게 말을 해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정숙은 그 남자와 관계를 끊었다. 지현과 정숙은 그러한 일이 있고 나서 더 친해졌다. 두 여자가 한 남자와 비록 따로 따로 있었던 일이고, 서로의 의사연락이나 인식은 없었지만, 동일한 남자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상호관련성을 가지게 하고, 무엇인가 동질성을 공유하는 것처럼 느끼게 했는지 모른다.

지현에 대한 것은, 그것이 강간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 모른다. 아무튼 정숙은 자신이 남자 친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지현의 처녀성을 상실시킨 데 대해 그때는 무척 미안해했다.

언젠가는 정숙은 지현에게 이렇게 묻기도 했다. “그 남자가 여자를 잘 다루고 테크닉도 좋았는데, 너는 어땠어? 좋았어?” “무슨 미친 소리야? 나는 강제로 당했던 거고,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무엇이 무엇이었는지도 전혀 기억 못해. 그 남자는 동물 같은 X이야.”

그 일 이후 물론 정숙은 그 남자 친구와 헤어졌고, 다른 남자 친구를 만날 때는 절대로 지현을 비롯해서 자신의 여자 친구를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 여자가 애인을 만날 때, 친한 여자 친구를 데리고 가는 것은 잘못하면 자신의 애인을 여자 친구에게 빼앗길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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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61)

명훈 아빠는 엄마의 말을 듣고 깊이 생각했다. 여자 아이가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잘못 핸들링 했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 있다. 그러니까 조심해야 한다.

이럴 때는 차라리 명훈이 다시 지현을 만나서 잘 지낼 것처럼 제스처를 보이고 설득시켜 낙태를 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그런데 명훈이 나이가 어려서 그런 일을 제대로 해낼 지 걱정이었다. 명훈 엄마는 반대였다. 그러다가 더 확실하게 굳어지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명훈 부모는 오직 명훈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지현은 아무 상관 없는 남이기 때문이다.

지현은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동네 교회에 다녔다. 그런데 어머니가 교회 청년부 담당 대학생과 자주 만나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무자비하게 때린 다음, 절대로 교회를 가지 못하게 했다.

그 때문에 지현은 교회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교회에서 주는 점심을 얻어먹기 위해 정말 교회에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잘못으로 교회를 더 이상 다니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명자가 지현을 강력하게 설득을 시켰다.

“인생을 살면서 어려운 시련을 당하거나, 고통을 당하면 하는 수 없어.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거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걸 맡겨야 해. 내가 다니는 성당이 있어. 한번 나가보자. 그리고 그곳에서 네 문제도 신부님께 상의해 봐. 어떻게 하라고 좋은 말씀을 해주실 거야.”

그래서 지현은 명자를 따라 성당에 몇 번 나갔다. 어느 날 지현은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했다. “신부님. 제가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를 가졌어요. 저는 아이 아빠를 죽도록 사랑해요. 그런데 남자는 저를 사랑한다고 말을 안 해요. 아직 어려서요. 그리고 그 부모는 결사반대해요. 저보고 낙태를 하라고 해요. 신부님. 어쩌면 좋아요.”

신부님은 고민했다. 이런 경우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이 어린 양은 지금 인생의 중대한 위기에 처해있다. ‘낙태를 하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이를 낳으라고 해야 할까?’

낙태죄에 대해서는 이를 폐지해야 하느냐 하는 논의가 뜨겁다. 생명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고,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인간 존재의 근원이다. 생명에 대한 권리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다. 태아가 비록 그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모(母. mother)에게 의존해야 하지만, 그 자체로 모와 별개의 생명체이다. 따라서 태아에게도 생명권이 인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낙태행위를 금지하고 형사처벌하는 것이다. 형법 제270조 제1항 자기낙태죄의 조항이 임신 초기의 낙태나 사회적 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를 허용하고 있지 아니한 것이 임부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라고 보기 어려우므로 자기낙태죄 조항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

2012년 8월 23일 헌법재판소에서 내린 결정이다. 이에 대해서는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전면적 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처벌하고 있는 자기낙태죄 조항은 침해의 최소성원칙에 위배된다는 반대의견도 있었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아직까지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다. 낙태는 그 자체로 죄악이라고 본다. 우리나라 형법은 여전히 자기낙태죄를 형사처벌하고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처벌하지 않고 있어 사문화된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자매님! 가급적 아이 아빠와 결혼하도록 해요. 아이를 낙태한다는 것은 죄악이예요. 생명을 죽이는 거예요. 아이까지 가졌는데, 왜 결혼을 못해요. 그 남자를 잘 설득시켜서 기다렸다가 결혼하는 것으로 해요.”

하기야 신부님이 달리 할 말씀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지현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로 들렸다. ‘이런 질문을 신부님께 한 내가 바보지. 신부님이 어떻게 알겠어. 내가 내 인생 결정해야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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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60)

명훈 엄마는 자신의 친한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 친구는 명동에서 사채를 오래 해서 사회 경험이 많고, 주변에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친구는 명훈 엄마에게 자신이 아는 흥신소가 있으니, 같이 가서 만나보자고 했다. 흥신소 사람들은 마치 형사같았다. 의뢰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해서 상대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것인지, 프로답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핸드폰 번호밖에 없나요?”
“글쎄요. 우리 아들이 그 여자가 살고 있는 원룸이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곳을 알지 몰라요.”

“그 여자의 무엇을 알고 싶은 건가요?”
“지금 저희가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어요. 그 여자가 애를 가졌다는데, 정말 우리 아들 아이인지도 확인하고 싶고, 다른 남자관계도 알고 싶어요.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여자 아이를 떼도록 중간에서 협조해주는 거예요.”
“예. 알았습니다. 사모님!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전문이니까. 보름 이내에 모든 문제를 해결해 드릴게요.”

명훈 엄마는 이런 일을 처음 해보는 것이니까,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흥신소라고 해도 어떻게 저렇게 큰소리를 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말하는 투로 보아서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같이 간 친구가 전부터 거래를 해본 사이라고 하니까 무조건 믿고 맡길 수밖에 없었다.

명훈 엄마는 그 전에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흥신소라는 곳은 대개 건달이나 깡패 또는 주먹들이 불법으로 다른 사람들의 뒷조사를 해주는 곳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 곳을 찾아가거나, 흥신소에 어떤 일을 맡기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친구와 상의하다 보니, 흥신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곳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니 의뢰한 일을 잘 처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갔다. 흥신소 사장은 명훈 엄마로부터 착수금을 받으면서, 어떠한 경우라도 나중에 문제가 되면, 흥신소에서 자료를 받은 것이라고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세 번이나 했다.

요새는 과거와 달리 경찰에서 흥신소에 대한 단속이 심하고, 만약 흥신소 일을 한 사실이 드러나면 구속되어 실형까지 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의뢰한 사람도 벌금형에 처해진다고 했다.

명훈 엄마가 흥신소에 지현의 뒷조사를 맡기고 나서, 정말 약속한 대로 15일이 지나자 연락이 왔다. 그리고 그동안 지현에 대해 조사한 자료를 가지고 왔다.

지현은 자신보다 열 살이나 더 많은 어떤 유부남과 3개월 동거를 했다는 사실, 그 남자의 아이를 이미 낙태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 정신적으로 공황장애증세가 있어 정신건강과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 현재 살고 있는 원룸은 보증금 천만원에 월세 30만원이라는 사실에 관한 자료를 보내왔다.

자료에 의하면 모든 것은 사실이었다. 지현이 동거생활을 했다는 남자는 도박꾼이어서 현재 기소중지되어 도피중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그 도박꾼의 부인도 지현의 존재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부인이 지현을 만나 폭행까지 가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그건 사모님께서 알아서 하셔야지요. 저희가 낙태까지 해드리기는 너무 위험부담이 클 것 같아요. 세월이 예전 같지 안잖아요? 하지만 정 원하시면 저희가 해볼 수는 있어요. 다만, 그렇게 되면 큰돈이 필요해요.”
“예. 일단 이 정도의 자료를 알아냈으니, 저희가 먼저 해보고, 안 되면 다시 상의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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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9)

지현은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슬펐다. 그리고 몹시 분개했다. 명훈 엄마가 보여준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현재 자신은 명훈 엄마의 손자나 손녀를 잉태한 사람이다.

명훈이 2대 독자인데, 나중에 이 아이가 명훈 집안을 이어받을 것인데, 어떻게 만나자마자 상세하게 전후 스토리를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고, 무조건 ‘네가 잘못했으니, 빨리 없애버려라. 그리고 결혼은 절대로 안 된다.’고 선언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돈봉투를 던져놓고 가버리는 것일까?

이것은 인간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명훈 엄마를 가만두지 않더라도 명훈씨만큼은 사랑하고, 아이의 아빠니까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현의 심정이었다.

지현은 명자를 만났다. 명자는 지현으로부터 명훈 엄마를 만나서 있었던 말을 듣고 몹시 흥분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곧 바로 명훈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당장 나오라고 했다. 그러나 명훈은 부모와 상의한 다음 연락을 주겠다면서 전화를 끊고 더 이상 명자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명자와 지현은 명훈 아버지 회사에 가서 플랭카드를 걸어놓고 시위를 하는 방법, 명훈이 다니는 대학교 총장에게 진정서를 내는 방법, 명훈을 만나서 폭행하는 방법 등을 상의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지현은 어떤 결정도 할 수 없었다. 아이는 자꾸 안에서 자라고 있고, 정말 아이를 낳을 것인지도 시간이 가면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명자는 옆에서 보면서 지현이 너무 불쌍해보였다. 그냥 아이를 지워버리고 다른 남자를 만나지, 저런 나쁜 인간들과 하나의 생명인 태아를 가지고 흥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지현에게 참고 잊으라고 하기에는 지현이 너무 깊이 빠져들어가 있었고, 도저히 명자의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지현을 만나서 지현의 생김생김과 말하는 수준, 아이를 절대로 수술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파악한 명훈 엄마는 비로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자칫 잘못 대처했다가는 아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게 뻔했다.

그렇다고 수준이 안 맞는 천한 지현을 며느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차라리 전쟁이 나서 죽을지언정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해서 서울에서도 내놓을만한 집안을 일구어놓은 입장에서는 집안의 수치라고 생각되었다.

명훈 엄마 생각으로는 빨리 지현을 정리하고 지금 명훈이 만나고 있는 돈많고 인물 좋고, 집안이 좋은 제니를 며느리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지난 번, 제니를 한번 만나 본 다음, 정말 자기 아들이었지만 명훈이 공부만 빼고는 남자로서 모든 것을 갖춘 아이구나 하는 믿음이 갔다.

그래서 몇 년 동안만 여자를 만나지 않고 지내고 있으면, 자신이 명훈에게 정말 좋은, 모든 조건을 갖춘 여자 아이를 구해주려고 했는데, 지금 문제가 생겼으니, 차제에 제니와 붙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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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7)

명훈 엄마가 지현에게 만나자고 약속한 장소는 신라호텔 로비라운지였다. 지현은 전철역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올라가야했다. 밖에서 볼 때는 별거 아니었는데, 호텔 구내로 들어가니 하나 하나가 세련되어 있었다. 고급 호텔에 들어가면 일반인은 놀라게 된다.

명훈 엄마는 늘상 다니는 곳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장소를 정했지만, 지현 입장에서는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려고 굳이 이런 고급스러운 호텔로 잡았는가 하고 생각했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지현은 30분 전에 먼저 가서 앉아 있었다.

명훈 엄마가 올 때까지 커피는 주문하지 않았다. 메뉴판도 고급스러웠다. 커피값도 엄청나게 비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급 옷을 입고, 매우 세련되어 보였다. 약속 시간이 되자, 명훈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오면서 지현을 미리 알아보는 것처럼 가볍게 인사를 했다.

지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뱃속의 아이도 따라서 놀라는 것 같았다. 지현은 속으로 말했다. ‘아가야. 너의 할머니가 오셨어. 인사드려야지.’

명훈 엄마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시키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지현을 살펴보고 있었다.

“명훈이 아이를 가졌다면서요? 그런데 명훈이 아이인 건 확실해요?”
“예. 확실해요. 저는 명훈씨 이외에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어요. 아이를 낳으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지면 어떻게 해요? 명훈이는 아직 어리고, 대학교 졸업도 해야하고, 취직도 해야 하는데, 아이를 어떻게 키우려고 그래요?”
“아이는 제가 혼자 키우면 돼요. 걱정 마세요. 그리고 명훈씨가 졸업하고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릴 게요.”
“그건 어리석은 일이예요. 명훈이는 아가씨와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젊었을 때, 한 때 불장난으로 생각하고 잊어버려요. 그렇지 않으면, 아가씨도 불행해지고, 아이는 아빠 없는 사생아가 되는 거예요.”
“어머님. 그렇지 않아요. 저는 명훈씨를 사랑해요. 그리고 지금 제 뱃속에 몀훈씨 아이가 자라고 있어요. 명훈씨는 저를 사랑했어요. 지금도 사랑하고 있고요. 우리는 결혼해야 해요. 결혼하기로 했기 때문에 임신을 했던 거고요. 제발 결혼시켜 주세요. 제가 잘 할게요. 열심히 살고, 명훈씨 뒷바라지 잘 할게요.”

지현이 당돌하게 어머니라고 하자, 명훈 엄마는 순간 흠칫했다. ‘무척 당돌한 아이야. 무섭기도 하고, 큰일 났네.’

“아니 나이도 5살이나 위라면서요. 우리 명훈이는 아직 학생이고 철부지예요. 요새 남자들 결혼은 서른 살은 넘어야 할 수 있잖아요. 직장도 잡고 철이 들어야 결혼하지 지금 어떻게 결혼을 해요.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어머님 저는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혼자 아이를 낳아서 키울 자신도 있어요. 경제적인 도움도 필요 없어요. 오직 명훈씨만 있으면 돼요.”
“원래 여자는 자신의 몸을 자신이 잘 관리해야 해요. 아가씨는 어떻게 결혼이야기도 전혀 없이 남의 아이를 가지고 남자가 싫다는데 결혼하자고 하고, 아이를 낳겠다고 해요. 너무 심한 거 아니예요. 어떻게 아가씨가 명훈이와 결혼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느냐고요? 빨리 마음 돌려먹고 문제를 해결해요. 더 늦기 전에, 지금 5개월이면 빨리 수술해야 해요. 더 늦으면 위험해요. 보상은 내가 서운하지 않게 해줄게요. 내가 약사로서 잘 아는 병원이 있으니까 날짜를 잡아줘요.”
“어머님. 그런 게 아니예요. 명훈씨는 저와 결혼한다고 맹세했어요. 그 증거도 다 가지고 있어요. 수술은 절대 하지 않아요. 제발 결혼시켜 주세요.”

지현은 울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명훈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10여분쯤 지나도 지현이 계속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고 있자, 명훈 엄마는 조용히 말했다.

“일단 나는 갈테니, 잘 생각해보고 연락줘요. 그리고 여기 병원비를 놓고 갈테니, 돈이 더 필요하면 얘기해요.”
“안 돼요. 어머님. 그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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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6)

명훈 엄마는 명훈이 현재 처해있는 사정을 이야기 듣고 심한 충격에 빠졌다. 누나는 그렇지 않은데, 명훈이는 어려서부터 부모 말을 듣지 않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늘 부모 속을 썩이며 살았다. 아빠도 열심히 살고, 엄마도 열심히 살았는데, 도대체 명훈이는 누구 피를 닮아서인지 성격도 이상하고, 게으르고, 책임감도 없었다.

하지만, 명훈 엄마는 약사로서 개업해서 돈도 잘 벌고 있었고, 사회생활을 많이 해본 경험이 있어 아들 문제를 해결할 자신감을 가졌다.

명훈 엄마 역시 대학교 졸업할 무렵 어떤 남자 친구에게 깊이 빠진 적이 있었다. 그 남자는 공대를 다니고 있었다. 성격이 차분하고, 매사에 진지했다. 처음 3개월 동안 데이트를 하면서도 손 한번 잡지 않았다.

명훈 엄마에게 잘 대해주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은 한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야말로 이심전심이었다. 부처님의 염화시중과 같은 미소로 가슴에서 가슴을 전하는 남자였다.

명훈 엄마는 이 남자를 너무 사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시고, 한적한 공원으로 가서 벤치에 앉았다. 늦은 가을이었다. 은행나무잎이 떨어져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누런 색은 황금을 연상시켰다.

그 남자의 흰 티셔츠가 수은등에 반사되어 파랗게 형광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손에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었다. 휴대용 커피잔은 분홍빛이었다.

명훈 엄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남자의 어깨에 기댔다.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 약간 선선했지만, 가슴은 따뜻했다. 그러면서 그 남자의 아이를 잉태하고 싶다는 모성을 느꼈다.

아주 이상했다. 그 남자와 관계를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아이 생각을 하다니,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본성인 것 같았다. 그 후 명훈 엄마는 꿈속에서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자신을 두 세 번 보았다. 배가 불렀다.

그리고 그 뱃속에 들어있는 존재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강아지 같기도 했다. 태아는 외눈박이 같이 보였다. 꿈에서 깬 명훈 엄마는 무척 놀랐다. 상상임신도 있다는데, 내가 혹시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임신한 것이 아닐까?

그 후 그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명훈 엄마는 더 이상 그 남자를 사랑하지도 않고,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자가 임신하는 것은 사랑 때문이고, 사랑이 깨지면 임신도 망각되고 무의미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지금 명훈이 애를 가졌다는 여자의 철없는 행동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의미가 없는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쉽게 생각했다.

명훈 엄마는 아빠에게 명훈 문제는 자신이 알아서 해결할 테니, 모든 걸 자신에게 맡기라고 이야기했다. 명훈 아빠는 명훈 엄마의 실력을 믿었다. 돈은 얼마든지 써도 좋으니, 빨리 해결하라고 했다.

명훈 엄마도 이런 경우에는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답했다. 역시 돈이 있는 사람들이라, 돈이면 만사가 형통이고, 세상사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고,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것은 돈을 많이 가져보지 못한 낙오자들, 돈의 효험과 위력을 경험해 보지 못한 무능력자들이 내뱉는 푸념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다.

명훈 엄마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지현을 자신이 직접 만나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이 지난 다음, 명훈 엄마는 지현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서 지현을 만났다.

지현은 명훈 엄마가 자신을 만나자고 하는 말에 들떴다. 직접 만나 자신의 배를 보고, 대화를 해보면, 명훈 엄마도 지현을 며느리 삼고 싶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명자에게 이런 사실을 말했다. 그랬더니 명자는 지현이 혼자 나가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자신이 따라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현은 명자는 나와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공연히 일을 그르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명자는 물러섰다. 다만, 언제 어디에서 만나려고 한 것인지에 관한 정보만 알려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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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5)

아빠는 사업가로서 성공했기 때문에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면 머리를 싸매고 눕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더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끝까지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법을 찾아내는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아빠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십여년 전에 한참 부동산 투기를 하고 다닐 때, 카페를 운영하는 어떤 여자를 알게 되었다. 명훈 아빠와 그 여자는 같이 차를 타고 다니면서, 돈을 벌 땅을 보러 다녔다.

그러다가 그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 서울 근교 경치 좋은 강변에 있는 모텔에서 사랑을 나누곤 했다. 몇 달이 지난 다음, 그 여자는 명훈 아빠에게 아이를 가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명훈 아빠 닮은 아이를 꼭 낳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런데 한심한 것은 그 여자는 유부녀였다. 남편은 부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도박이나 하고 돌아다니는 건달이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남편과 이혼하고 명훈 아빠 아이를 낳아서 키우면서 혼자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를 지우지 않는 것이었다. 명훈 아빠는 그 여자의 남편을 본 적고 없고, 그 여자로부터 말만 들었기 때문에 진가민가했다.

그래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명훈 아빠 아닌 다른 젊은 남자 애인과 모텔에서 정을 통하다가 남편에게 들켜서 현장에서 심하게 폭행을 당했다.

남자 애인도 심하게 맞아 전치 8주의 상해를 입었고, 여자 역시 남편으로부터 심하게 맞아 팔이 부러지고, 그 때문에 얼마 안 있어 아이도 유산했다.

명훈 아빠는 그 덕분에 골치 아픈 그 여자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없어졌지만, 당시 그 아이가 명훈 아빠 아이였는지, 젊은 애인 남자의 아이였는지, 아니면 그 여자의 본남편 아이였는지 무척 혼란스러웠다.

나중에 명훈 아빠는 그 여자 때문에 부동산으로 1억원을 벌었기 때문에, 수고비를 두둑히 주고, 기분이 좋아 같이 술을 많이 마신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여자는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있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래서 다시 명훈 아빠와 모텔에 가서 정을 나누면서 옛날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몰라요. 그 당시 이상하게 당신하고 자주 잠자리를 했어요. 그건 당신하고 하는 게 좋아서 그랬던 거예요. 그런데, 그 남자 친구가 1년 만에 다시 나타나서 돈을 천만원 요구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공갈을 친 거지요. 그래서 돈이 아까워서 돈 대신 몇 번 만나 몸으로 때어주려고 했는데, 재수 없게 남편에게 걸렸던 거예요. 그리고 그때 남편이 이상하게 나를 의심하면서 자꾸 잠자리를 요구했어요. 그래서 나도 남편에게 의심을 받지 위하여 평소에는 하지 않던 관계를 자주 응했던 거예요.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애가 생긴 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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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운명 (54)

명훈이 간 다음, 명자는 명훈의 인간 됨됨이를 보고 너무 실망했다. 그리고 지현이 너무 어리석어 보였다. 저런 못된 철부지, 연약한 인간, 사랑도 모르고, 책임도 모르는 남자를 좋다고 매달리는 지현이 너무 한심해 보였다. 그래서 명자는 지현을 설득시켜 명훈과 관계를 정리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지현은 전혀 달랐다.

“아냐. 지금은 저 사람이 어려서 그래.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절대로 돌아와. 아까 그 여자도 봐. 비싼 돈 들여서 얼굴을 고친 것 같지만 인간미라고는 전혀 없잖아? 그 사람은 나 같은 스타일을 좋아해. 그리고 여자는 외모나 환경보다는 내면으로 얼마나 성실하고 남자에게 헌신하는 지가 중요해. 걱정하지 마. 명훈씨와 상의해서 애 낳고 잘 살게.”

지현의 말은 명자에게는 매우 비현실적이고 공허하게 들렸다. 저렇게 세상을 모르고, 남자를 모르고, 사랑을 모르다니! 정말 한심하고 불쌍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정말 나쁜 사람이었다. 정의의 여신이 명자의 주먹에서 왔다 갔다 떨고 있었다. 명자는 모처럼 주먹과 발을 썼더니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명훈이 집에 들어가자 난리가 났다. 아빠와 엄마는 거실에서 명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너 꼴이 뭐냐? 누구한테 이렇게 맞은 거야? 그 여자들이 깡패를 데리고 와서 때린 거야?”
“빨리 병원으로 가자. 응급실로 가자.”
“아니예요. 괜찮아요. 내일 병원에 갈게요.”

명훈은 왼쪽 팔목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맞기도 많이 맞았다. 무척 아팠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그 정도 아픈 것은 명함도 내밀 수 없었다.

“너, 그 여자하고 어떻게 된 건지 말해봐.”
“예. 우연히 만나서 몇 번 잤는데 제 아이를 가졌다고 해요. 수술을 하라고 해도 끝까지 낳겠다고 하네요.”
“아니 네 애기가 맞아?”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정숙한 여자는 아니니까. 저 한테 돈을 뜯어내려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저는 그 여자가 싫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으려고 해요. 나이도 5살 많고, 학교도 고졸에 불과해요. 돈도 없는 집 애고, 얼굴도 못생겼어요. 제가 만나지 않으면 저절로 떨어질 거예요.”

명훈 엄마와 아빠는 명훈을 방으로 들여보낸 다음 걱정을 했다. 대학생이라 알아서 하는 줄 알고 내버려두었더니 큰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여자가 알아서 피임을 하고 설사 임신을 해도 곧 바로 수술을 할텐 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무슨 나쁜 의도가 있는 여자 아이 같았다. 하지만 명훈은 아직 어리고 세상 물정을 모르니까 부모들이 나서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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