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등산대장은 천왕봉을 넘으면 내려가는 길인데 4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그리고 지도를 나누어주었다.
천왕봉을 지나서 내려가는 길도 무척 험했다. 어렵게 내려갔는데 또
중봉, 써리봉이라는 높은 봉우리들이 나왔다. 다시 올라가야 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치발목 대피소까지 무척 힘이 들게 갔다. 더군다나
장터목 대피소에서 물이 거의 떨어졌는데, 물을 구하지 못했다. 생수를 팔지 않는 것이었다.
목이 말라 빨라 치발목 산장에 도착해야 하는데, 너무 길이
멀었다. 그곳을 지나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모두 대답이 달랐다. 곧 나온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물을 기대하고 어렵게 도착해
보니 물은 팔지 않았다. 포카리스 비슷한 이온음료수만 팔아 몇 캔을 샀다.
치발목 대피소를 지나니 완전히 지쳤다. 빨리 버스가 있는 곳으로
와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두 사람만 남아 길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외로운 산행을 했다. 치발목 대피소에 이르기 전에 핸드폰 밧데리가 다
떨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통화가 되지 않는 산 속 같은 곳에서는 주파수가 맞지 않아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아도 곧 바로 밧데리가 나간다는
설명이었다. 정말 그랬다. 별로 사용도 하지 않고, 어제 밤 새로 갈아끼어놓았는데 모두 나갔다.
등산대장에게 우리의 상황을 설명해 주고 먼저 버스가 출발하도록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답답했다. 그래서 중간에 어떤 사람의 핸드폰을 빌려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이 안됐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나중에 시간이
되면 등산대장에게 우리의 사정을 설명해주고, 우리가 대원사쪽으로 잘못 방향을 들어 가고 있으니 버스가 먼저 출발하도록 전해 달라고 했다.
그 남자 세사람은 우리와 이야기한 후 아주 빠른 속도록 우리
앞에서 사라졌다. 대원사 가는 길은 매우 험해보였다. 기나긴 산속 계곡을 따라 몇 시간을 가야할 것처럼 보였다. 아주 절망했다. 힘은 다
빠지고, 등에는 무거운 배낭이 있고, 갈 길은 제대로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험했다. 견디기 어려웠다.
돌길을 많이 걸어 발바닥이 아팠고, 발톱이 아파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자연히 속도는 떨어지고, 다리는 휘청거렸다. 언제 마을로 내려갈지 알 수가 없었다. 물도 없고, 답답했다. 깊은 산속에서는 물 한방울
구경할 수가 없었다.
지쳐서 앉아 있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전쟁중에 병사들이
이래서 죽는가 보다 싶었다. 몇달씩 전쟁터에서 피곤은 쌓이고, 잠을 제대로 못자고, 음식을 제대로 못머고 고통에 시달리다 보면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라는 것이 이해가 갔다.
무제치기 폭포를 지나니 이정표가 나왔다. 대원사 및 유평리 가는
이정표와 새재산장을 가는 이정표였다. 나는 어떤 등산객의 설명을 듣고 당연히 유평리로 알고 선택했다. 그런데 한참 험한 길을 가다 보니 유평리
사인판은 없고 대원사만 4.9킬로미터라고 씌여져 있었다. 아래 계곡을 보니 몇 키로를 가야할 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라고 믿었다. 몹시 당황했다. 두렵기도 했다. 길을 잃고 헤매면 어쩌나 싶었다. 일행도 불안해하고 몹시 지쳐 있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새재산장이라는 이정표도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냥 대원사 쪽으로 가지로 했다. 한참 가다 보니 유평리 마을 사인판이 보였다. 유평리 아을 쪽으로 가는데
산속은 어두워지는 기미가 보였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이었다.
절망! 그 자체였다.
그런데 갑자기 등산대장이 나타났다. 다른 등산객이
끝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주어서 내가 그곳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중을 나온 것이었다. 대장은 나를 보자마자
배낭을 받아 맸다. 정말 고마웠다.
유평리 마을에서 회원들 몇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평마을
어떤 막걸리집인데, 그 동네에는 감이 엄청 많이 열려 있었다. 잎은 다 떨어지고 감만 몇백개씩 달려 있는데 정말 아름다웠다. 감을 두개
먹었다. 그리고 그집 주인이 운전하는 봉고차를 타고 대원사 앞을 지나 관광버스 있는 곳으로 왔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새벽 3시부터 산행을 시작해 오후 4시 45분까지
무려 14시간 동안이나 산행을 계속했던 것이다. 지치고 지쳤다.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 몸을 가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