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너의 얼굴
강은 길을 모른다
강은 길을 모른다
봄날
우리가 잃었던 기억은 무엇이며
빗소리에 사라졌던
삶의 흔적들은 무엇인가
꼭 껴안고 있었던
낙엽들은 사라지고
서툰 언어로 채워지는
그 공간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햇살 때문에 뜨거워진
가슴 사이로
부딪치는 상념들은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구름에 가려
더 높이 날지 못하는
새들의 눈물은
빗물과 함께 대지를 적신다
길은
언젠가 다시 만날
빗물을 탓하지 않는다
길은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헤어짐을 탓하지 않는다
실타래처럼 얼켰던 인연은
꿈으로 그치지 않는다
흩어진 시간의 조각들이
다시 뭉쳐지면서
선명한 색깔을 내고 있다
풀잎은 다시 시간 앞에서
내일을 말하고 있다
강은 길을 모른다
길도 강을 모른다
우리가 흐르고 있는 까닭은
강이기 때문이다
길이기 때문이다
가을 때문에
가을 때문에
창문을 열고 가을을 받아들인다
달빛이 은은하게 가슴을 파고 든다
피아노로 월광소나타를 듣는다
조용히 눈물이 맺힌다
무엇 때문일까
아무 일도 없는데
이렇게 진한 고독이 밀려오는 건
삶이 먼지처럼 허망해지는 건
가을 때문일 거야
가을에 떠난 너 때문일 거야
가을인데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네가 가을이 아니기 때문일 거야
망각의 강
망각의 강
해질 무렵 강변에 서서
너의 음성을 듣는다
강 건너에 네가 있다
보이지 않는 미소를 띄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기 전에는
낙엽이 벤치를 덮기 전에는
그리움은 멈추지 않는다
남겨진 언어가 비에 젖은 채
신음소리를 낸다
품속에서 꺼낸 빛 바랜 사진
둘이 하나로 겹쳐
침묵의 바다에 잠긴다
너에게 다가간 건 아픔이었고
내게 다가온 건 슬픔이었다
그래서 시간은 정지하고
밤이 깊어가면서 모두 잊혀지고
어둠에 덮여 사라졌다
그곳에 시간이 있었다
그곳에 시간이 있었다
그곳에 시간이 있었다
낯선 사랑을 만나
혼란스러웠던 가을이 강에 잠겼다
그림만큼이나 정을 쏟았던 너때문에
강물은 정지했다
강변에서 흘렸던 눈물이
사랑때문은 아니었다
파리의 무게에 눌려
사랑조차 거부했던 존재의 초라함
다시 붓을 손에 쥔다
캔버스에 강물이 튄다
너를 그리는 지금
비가 내린다
너의 모습은 네가 아니다
진실은 수채화에서도 왜곡된다
흐미해지는 그리움이
사랑의 무게를 덜어낸다
사랑은 저 혼자 떠나도
세느강은 흐른다
잊는다는 건
잊는다는 건
너는 어느 날
바람처럼 나타났다
내 마음을 빼앗아 흔들고
이곳저곳 끌고 다녔다
왜 그랬을까
아무 것도 모른 채
비틀거리며
너를 쫓아 다니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오직 네 손만 붙잡고
밤거리를 방황했다
시간이 가면서
너는 서서히 변했다
식은 마음으로
측은하게 바라보고
차가운 손으로
마지못해 잡아주었다
시간이 필요한 거야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
힘든 걸 참기 위해서
더 많은 밤을 새워야 해
잊는다는 건
너를 부정하는 거야
네 존재를 거부하는 거야
그럼으로써
너 때문에 물들었던
가을색을 지우는 거야
너 때문에 찢어졌던
가슴속을 낙엽으로 덮는 거야
들국화
들국화
노란 국화꽃 앞에서
갑자기 심장이 멎었다
너를 향한 그리움이
새벽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네가 좋아서
너에게 매달리면서
먼 길을 쫓아갔던 시간
그 가을에 날리던 눈꽃
무엇을 응시하고 있었던가
어디까지 가야 멈출 수 있었던가
사랑이 흩어지던 밤
손안에 웅켜쥐고 있었던 건
반쪽 난 마음의 상처뿐
너는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잊으려 애쓰고
지우려고 안간힘을 썼건만
너의 얼굴에서
연하게 피어나는 미소
다시 붙잡혀 어쩌지 못하는
나는
이 순간 꽃잎에 심장을 바친다
겨울의 강가에서
겨울의 강가에서
겨울 바람을 맞으며
차가운 밤하늘을 본다
지금 누가 곁에 있는가
가슴 속에 숨어 있을까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눈시울만 붉어진다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우주
먼지와 같은 존재
우리는 이곳에서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을까
어떤 이름을 새길 수 있을까
눈이 내리는 밤이다
눈이 내리는 소리는
도시의 소음이 덮혀버린다
너와 나의 숨소리만 들린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이 작은 공간,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
그곳에서
가냘픈 사랑이 촛불을 태우고 있다
편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완전한 사랑이
미완의 상태로 남듯이
기다림은 끝날 때까지
기다림으로 남는다
그리움의 색깔
그리움의 색깔
그리움에는 색깔이 있다
빨간 단풍잎 같은
너를 향한 그리움에
가을이 울고 있다
저 혼자 깊어가는 가을 앞에서
사랑의 밀어들이
낙엽처럼 뒹굴고 있다
바람 때문이었을까
우리들이 쌓았던
사랑의 탑이 멈추었던 까닭은
강 건너 작은 집에
등불이 켜지면
혼자 강변에 서서
오랜 인연이 남긴 정을
부둥켜안은 채
남모르는 눈물을 흘린다
너를 사랑했던 만큼
진한 그리움이 꿈틀거리고
오늘 밤 꿈속에서
너의 색깔을 만지리라
가을 색처럼 연한 미소를 찾아
긴 여행을 하리라
<애증의 강>
<애증의 강>
애증의 강을 건너고 있다
너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더 이상 사랑하지 말자고
그리고 침묵을 던졌다
사랑은 결코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표피적인 사랑, 말초의 감각만
외부로 증발된다
진한 사랑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사랑은 언제나 말이 없다
네가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은 저 혼자 깊어간다
우리가 오랫동안 공유했던
사랑의 밀어들이
빙하의 계절에
눈 산에 뿌려졌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네가 버린 사랑이
다시 소생해서 우리를 위로할 것인지
겨울 바람을 따라 왔다가
구름처럼 흩어진
사랑의 연정의 불꽃을 소유할 것인지
아무 것도 모른 채
천치 같은 무표정으로
꺼져가는 사랑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