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은혜

 

가을사랑

 

 

[본문]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시 104:24)

 

Ⅰ. 자연은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먼저 흙으로 사람을 지은 다음에 에덴의 동산을 창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를 나게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새를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제일 먼저 만들고, 그 다음 식물을 만들었으며, 맨 나중에 동물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동물과 식물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순서는 어떻게 되어 있다고요? 사람 - 식물 - 동물 순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람부터 창조하신 다음에 만드신 식물과 동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에게 마음대로 이름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이 만든 이름 그대로 동물과 식물의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같은 피조물인 동물과 식물, 즉 자연 전체를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동물을 마구 다루고 죽이기도 합니다. 식물도 마구 뽑아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재앙을 가져옵니다. 홍수가 나기도 하고 지구온난화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을 함부로 다루는 데 대한 대가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자연을 합부로 다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지구 환경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보호함으로써 결국 자연의 보호와 혜택을 받게 되고 그렇게 해야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Ⅱ. 자연은 위대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주위에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을 보세요. 얼마나 파랗고 아름다운가요? 꽃들을 자세히 보세요. 얼마나 예쁘고 멋이 있나요? 아무리 비싼 옷이라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을 거예요. 아무리 비싼 보석도 이처럼 예쁜 색깔을 내지는 못할 거예요. 아무리 잘 만든 장난감이라도 공중을 나는 새와 같이 예쁘고 자유자재로 날아다니지는 못할 거예요.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위대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급적 많은 시간 자연과 함께 생활하고, 자연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꾸 자연 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살다보면 하늘나라에 있는 천국과도 친근하게 도고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의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Ⅲ.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면서 더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자연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연을 주시고, 더 나아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고 계십니다.

 

자연이 없으면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물이 없으면 목이 말라 죽습니다. 나무와 풀이 없으면 먹고 살 수 없습니다. 사막에서는 우리가 살아남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 아름다운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과 땅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저 하늘의 구름과 바람, 나무와 풀, 꽃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의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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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라

 

가을사랑

 

 

[본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3)

 

#1 믿음의 필요성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원죄로 인해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어야 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아무런 소망도 없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에게 보내 우리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시려고 에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되심으로 인간은 죄에서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범죄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처지에 놓여 있던 인간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복종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원래 죄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혼자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을 아무리 지켜도 소용없습니다.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율법에 매여 더 큰 죄를 짓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히 10:1)

율법은 참형상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이 참형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야 율법을 벗어난 진실한 자유, 참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가깝게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2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지도록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성경은 우리에게 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온전한 믿음을 가졌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고,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에 경고하심을 받았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히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심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절박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야곱은 의의 모범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던 사람은 아니지만,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야곱은 역경에 처할 때마다 즉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오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 28:20~22)”

믿음으로 한나는 사무엘을 낳았고 한 민족이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회복되었습니다.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기도가 믿음으로 드리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하늘의 은혜를 사모하는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때 강력한 기도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3 믿음을 가진 자가 해야 할 일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 완전히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지은 죄를 철저하게 뉘우쳐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겉사람은 후패해도 속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합니다. 과거의 죄를 모두 무덤에 묻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다시 부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상하지 못한 고난을 당하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평소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살다가도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짖으면 응당해주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할 때 우리의 소망과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선지자 나단이 다윗의 죄를 지적하자, 다윗은 즉시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실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기도할 때 회개하였습니다. 다윗은 정직하고 뜨거운 회개의 기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모든 죄인에게 긍휼로써 응답하십니다.

 

둘째,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현실적인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면 쉽게 좌절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고통은 우리가 앞으로 누려야 할 영원한 삶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천국에 가서 얻을 영생을 생각하면서 현재의 고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축복을 믿어야 합니다. 엘리야가 기도할 때 처음에는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의 형태로 기도응답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기 전부는 엘리야는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크고 은혜롭다는 사실을 믿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신다는 소망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바울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항상 마음과 생각 속에 두고 그들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강조한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도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하여 교회에 풍성한 복을 주기를 원하셨는데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구 끝까지 전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지상 최대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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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가을사랑

 

 

[본문]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태복음 26:6)

 

Ⅰ. 하나님의 외아들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여러분!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말씀을 전하겠어요.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2천년 전에 하늘나라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어요. 예수님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던 외아들이었어요.

 

아들이 하나밖에 없다면 그 아들은 하나님께 아주 아주 소중한 아들이었겠지요. 안 그래요. 그런 외아들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셨어요. 님의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었지만 이 땅에 오실 때에는 아주 낮은 자세로, 아주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어요. 아주 지저분하고 더러운 곳에서 태어나신 거예요.

 

그런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어요. 우리는 그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자세로 살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지켜야 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으니까,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책에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적혀 있어요. 그러니까 성경책을 잘 읽고, 그곳에 쓰여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야 되는 거예요.

 

Ⅱ.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어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예수님을 붙잡아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아요? 아무 죄 없는 하나님의 외아들을 붙잡아 놓고, 억울한 누명을뒤집어 씌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어요. 자신이 죄가 없다는 말씀도 하지 않았어요. 다만, 죄를 깨닫지 못하고 나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셨어요.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로마군인들에 의해 붙잡히셨고, 머리에는 따가운 가시로 만든 관을 씌우고, 무거운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피를 흘리며 가시밭길을 걸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고 욕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건지지도 못하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걸머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Ⅲ.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과 사람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절망에 빠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삼일 째 되던 날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 살로메, 또 다른 여자 세 명이 함께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세 명의 여자가 예수님의 무덤 앞에 이르자 이들에게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무덤 앞에 있던 돌들이 옆으로 치워져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세 명의 여자들이 무던 안으로 들어갔을 때, 예수님의 시체는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시체를 쌓았던 세마포 헝겊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멍하니 있는 이 세 명의 여자에게 갑자기 환한 빛이 무덤 안을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이 나타나서 세 명의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누구를 찾고 있나요?”

“예. 저희는 돌아가신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향유를 발라 드리려고요.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지고 보이지 않아요.”

 

그 사람은 세 명의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당신들이 말하는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어요.”

 

이런 말을 하고 그 사람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으신지 삼일 째 되던 날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였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 천사를 이들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살로메와 또 한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빨리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 놀랍고 기쁜 소식을 전해 주세요.”

 

살로메와 다른 여자는 예루살렘으로 달려갔고,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으로 나와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달려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내 몸에 손을 대지 마라. 아직 내가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했다. 가서 제자들에게 말라라. 내가 곧 아버지께로 올라갈 것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씀하시고 사라지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런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실 수 있나? 그것은 마리아가 잘못 본 것일꺼야? 꿈을 꾼 것이겠지.”

 

그런 일이 있은 다음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먼저 두 명의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낼 것이다. 너희는 온 세상에 다니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먼저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면 이 모든 일이 가능하리라.”

 

예수님이 혹시 유령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져다 드린 생선을 맛있게 드셨습니다. 그리고 사라지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이 떠나신 후 도마가 들어왔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로 하여금 예수님의 손바닥과 옆구리에 못자국, 창자국을 만지게 해주셨습니다.

 

Ⅳ. 예수님 부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죄를 많이 지은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인간은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은 인간은 이제 다시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로 거듭 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인간도 이제는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생을 해도, 못 살아도,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천국에서 영원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주님이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부활하셔서 하늘나라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부활절을 맞아 우리는 더욱 뜨겁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영생을 얻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크고 힘이 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 받아 작은 십자가를 메고 주님을 따라 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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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의 고난

 

가을사랑

 

예수님은 공생애 전 시기에는 나사렛을 떠난 적이 없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던 날 6일 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행적은 어떠했을까?

 

1. 일요일

 

- 개선의 날, 예루살렘에 들어가다.

 

일요일 예수님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오면서 자신이 당해야 할 고난을 알고 계셨다. 십자가에 목 박혀 죽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2. 월요일

 

- 성전 청결의 날, 성전을 청결하게 하다.

 

예수님은 20여년만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온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들른 곳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인 성전이었다. 성전이 장사하는 곳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였다.

 

3. 화요일

 

- 변론의 날,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을 하였다.

 

4. 수요일

 

- 침묵의 날, 가롯 유다가 반역하다.

 

5. 목요일

 

- 번민의 날(세족일),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다. 붙잡히시다.

 

제자들과 만찬을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 그리고 붙잡히셨다.

 

6. 금요일

 

- 수난의 날, 고난과 십자가에 못 박히다.

 

7. 토요일

 

- 비애의 날,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다.

 

8. 일요일

 

- 부활의 날, 무덤에서 부활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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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

 

가을사랑

 

 

[본문]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태복음 26:6)

 

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였다는 이유로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가서 사형에 처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에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6시간 동안이나 피를 흘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이 불쌍한 인간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려고 애쓰시다가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무덤에 장사지내고 굴 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갈 까 걱정했던 것입니다.

 

Ⅱ.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과 사람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절망에 빠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삼일 째 되던 날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 살로메, 또 다른 여자 세 명이 함께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습니다.

 

세 명의 여자가 예수님의 무덤 앞에 이르자 이들에게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무덤 앞에 있던 돌들이 옆으로 치워져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세 명의 여자들이 무던 안으로 들어갔을 때, 예수님의 시체는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시체를 쌓았던 세마포 헝겊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멍하니 있는 이 세 명의 여자에게 갑자기 환한 빛이 무덤 안을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이 나타나서 세 명의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누구를 찾고 있나요?”

“예. 저희는 돌아가신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향유를 발라 드리려고요.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지고 보이지 않아요.”

 

그 사람은 세 명의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습니까? 당신들이 말하는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어요.”

 

이런 말을 하고 그 사람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으신지 삼일 째 되던 날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였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 천사를 이들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살로메와 또 한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빨리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서 이 놀랍고 기쁜 소식을 전해 주세요.”

 

살로메와 다른 여자는 예루살렘으로 달려갔고,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으로 나와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달려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내 몸에 손을 대지 마라. 아직 내가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했다. 가서 제자들에게 말라라. 내가 곧 아버지께로 올라갈 것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씀하시고 사라지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런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실 수 있나? 그것은 마리아가 잘못 본 것일꺼야? 꿈을 꾼 것이겠지.”

 

그런 일이 있은 다음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먼저 두 명의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낼 것이다. 너희는 온 세상에 다니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먼저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면 이 모든 일이 가능하리라.”

 

예수님이 혹시 유령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져다 드린 생선을 맛있게 드셨습니다. 그리고 사라지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이 떠나신 후 도마가 들어왔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로 하여금 예수님의 손바닥과 옆구리에 못자국, 창자국을 만지게 해주셨습니다.

 

Ⅲ. 예수님 부활의 의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40일이 지난 후 모든 제자들을 감람산에 모이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나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 올라갈 때가 되었다. 너희들은 절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려야 한다. 이제 얼마 안 있어 너희는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그리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 계시면서 우리들이 영원히 살게 될 하늘나라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로 하여금 살아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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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이론과 실제

 

가을사랑

 

 

‘죽음을 멈추게 한 전도’라는 책은 박종국 목사님이 지은 책이다. 2005년 쿰란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전도의 본질과 목적, 전도를 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실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저자인 박종국 목사님은 풍부한 현장 경험과 아울러 각종 강습회에서 전도방법론의 강사로 활동하면서 전도 칼럼을 써왔다.

 

이 책에서는 먼저 전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전도란 무엇인가? 전도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은 예수님 자신으로서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 부활, 승천, 예수님의 재림을 말한다.

 

전도는 성도에게 분부하신 의무요 사명인 줄 알고 순종할 때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스도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가슴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없고 지옥 가는 영혼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전도를 하여야 하는가?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전도를 하여야 할까?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의 힘과 지혜의 한계를 느끼고 자기를 포기하며 기도할 때 주님이 사용하신다. 내가 예수 믿기 전에는 죄로 죽었던 자였으나 이제 예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웃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어느 때라도 내가 만난 예수, 내 삶을 변화시킨 예수, 구원의 소망을 주신 예수를 전하는 것이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유일하고 가장 우선적인 일이며, 먼저 믿은 우리의 기본 자세이다.

 

전도자의 자격은 무엇일까? 전도자가 되기 위하여는 먼저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지옥 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을 생각나게 하고 회개시킨다.

 

구체적인 전도의 방법으로 인간관계전도가 있다. 인간관계전도는 예수를 믿지 않는 가족, 친척, 친구, 이웃들과 관계를 맺고 전도하는 아주 쉬운 전도방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와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지키신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특별히 전도자를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하시며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영혼 구원에 관심이 있으시기에 누구보다 전도자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신다. 전도는 구원받은 성도의 의무요 습관화 생활화가 되어야 한다. 전도는 하나님의 소원이요 예수님의 지상 최대의 명령이다. 교회를 세우신 목적도 영혼 구원 곧 전도이다.

 

교회가 전도하지 않으면 교회로서 존재가치가 없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교육하고 친교가 이루어지는 곳인데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을 살리는 구원의 방주라는 것이다. 전도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주님이 하시도록 맡기지 않고 내가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내가 하려고 하니까 어렵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니 부담스럽고 어려운 것이다. 전도는 생명의 빵을 공급하는 일이다. 주어야 할 빵만 있으면 나누어 주는 방법이야 좀 미숙해도 이미 반 이상 성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에 성공하는 비결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다.

 

성도의 삶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입으로만 예수를 전하지 말고 우리의 삶 속에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면 복음의 열매가 날마다 주렁주렁 맺게 될 것이다. 중보 기도는 빚진 성도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다.

 

목회자는 성도를 위하여, 성도는 목회를 위하여, 또 믿지 않은 영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의무이다. 중보 기도는 영혼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는데 중보 기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전도는 죄인을 구원하는 일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하다. 보이는 사람보다 보이지 않지만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인내하고 그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힘든 사람, 아니 그 이상으로 어려운 사람을 만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참고 인내하면 성령께서 담대함을 주실 것이며, 그 강퍅한 영혼을 움직여 복음 앞에 고개를 숙이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 얻는 축복을 주실 것을 확신한다. 조금만 인내하면 반드시 성령이 역사하신다. 우리가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택한 영혼, 준비된 영혼을 만나게 하신다.

 

전도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우리에게 명령하신 마지막 유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전도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육신에 병든 자, 영혼에 병든 자, 가난한 자, 슬픔을 당한 자, 치료받아야 하고 위로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많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많다. 이들을 찾아가 친구가 되어주고 주님의 사랑은 전해야 한다.

 

오늘도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라. 우리 죄로 말미암하 고생하며 살다가 지옥에 가야 마땅했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섬기시며, 모범을 보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어주시어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은 한 영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우리가 잃은 영혼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유일한 방법이다 성도의 우선 순위, 교회의 우선 순위는 전도이다. 주님고 함께 사는 생활이 없는 신앙 고백은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기 생활 속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주님과 함께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인격과 삶에 진정한 변화가 없고, 변화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자랑하지 못하고 불신자들에게 책망당하고 예수를 욕되게 하며 교회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아 변화 받고 날마다 예수를 자랑하는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민족 복음화는 나 한 사람부터 시작된다. 나의 삶의 변화는 가정을 살리고, 교회의 부흥을 가져다 주고, 지역과 민족의 복음화를 앞당길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뜻이고, 내가 사는 길이고, 교회가 부흥되는 길이고, 민족복음화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주님의 관심사가 영혼 구원이기에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는다.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어야 한다. 준비된 영혼이 보일 것이며, 준비된 영혼을 만나게 하실 것이며, 구원의 열매가 날마다 풍성하게 될 것이다.

 

신앙 생활도 신나게 해야 영육이 윤택해진다. 내가 좋아서 사모하고 기쁨으로 기다리고 찾으려고 애쓸 때 영혼은 만족을 얻고 삶에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 성경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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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기독론

 

가을사랑 

 

1.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의 형상으로 오셔서 인간의 삶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교리이다. 그러면 바울은 성육신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하고 있었는가?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인해 인간은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외아들을 모든 사람의 형상인 육신의 모양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께서 화목하게 지내시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신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고,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중요한 행동이라고 보았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이미 영원 이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어 있던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 육신으로 동일한 인간처럼 보이게 한 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예정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로 보았으며, 성육신을 창세전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하늘 나라에서 가지고 있던 고귀한 것들을 포기하고 내려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으면서 가장 고귀한 지위에 있었으나, 그러한 모든 지위와 권한을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셔서 종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권세와 능력과 만물을 다스릴 왕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왕이 아니라 종으로 세상에 왔다. 예수님은 이 땅에 명령을 하고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순종하려고 오셨다. 예수님의 죽움은 일반 사람들의 죽음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헌신적인 죽음이었다.  

 

바울은 인간의 죄에 대해 설명하기를,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담의 죄 때문에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모두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인간의 죽음은 아담이 지은 인간의 죄의 결과 때문이라고 했다. 만일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인간은 죽지 않았을 것이고, 영원한 영생을 누릴 수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절대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금지사항을 아담과 하와가 위반함으로써 범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인간은 죽어야 할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울은 아담이 지은 죄 안에서 모든 사람들도 죄를 범한 것이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율법을 어기는 것이 죄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 이전에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다고 했다.

그러면 모세 이전의 시대에는 율법도 없었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는데 사람이 죽어야 했느냐 하는 것이 의문이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인간들이 아담 안에서 범죄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담의 죄에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하나님께 온전한 의와 온전한 순종을 드렸기 때문에 인간은 비로소 죄와 죽음의 결박에서 해방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죄로 인한 사망과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인이 의인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2.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바울에 있어서 십자가는 가장 중요한 신앙이 요소였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구속의 사상은 사도 바울의 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자체에 능력이 있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던 장벽을 무너뜨리고,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화목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십자가에 친히 못박혀 죽으심으로 인간이 그동안 잃고 있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켰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희생으로 보았다. 예수님의 희생은 인간이 마땅히 치루어야 할 영혼의 죽음에서 살려내는 대단한 희생이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역사를 보았다. 하나님의 역사란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인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일을 가능케 하신 것이었다.

 

3. 부활하신 그리스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러한 부활의 능력을 믿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은 그리스도인들은 새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며,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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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신학의 특색

 

가을사랑

 

Ⅰ. 서 론

 

사도 바울은 서기 5년 내지 10년 경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태어났다. 바울은 갈릴리아의 수도인 다소의 시민이었으며 출생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취득했다. 바울은 장막을 치는 일에 종사하였으며, 헬라어에 능통했고, 회심하기 전에는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이었다. 바울은 초기에는 그리스도인을 탄압하는 일에 열심이었으나 그 후 개심하여 열렬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바울은 복음의 교리와 복음의 윤리적인 내용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바울신학은 바울의 신앙과 그의 주장을 신학적으로 정립하여 표현한 신학체계를 의미한다.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바울신학의 중요한 특징을 살펴보고, 바울의 기독론에 대해 설명하기로 한다.

 

Ⅱ. 바울신학의 특색

 

1.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바울신학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전파하려고 하는 복음이 그리스도의 중심원리라고 믿고 있었다(롬 1:3~4, 4:24~25). 바울은 예수의 빛을 보았고, 직접 예수님을 만났으며,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을 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평생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질 수 없었다. 바울은 어떠한 고통이나 고난을 당하더라도 예수님은 주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었다.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는 예수를 그리스도가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 생각하였다.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하였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메시야로 나타나기를 기다렸던 형상으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바울은 나중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고 평생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활하였다.

 

2. 중생 중심 신학

 

바울은 영광의 빛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나서 눈이 어둡게 되었다. 그러면서 바울은 심령의 눈이 떠지면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와 같은 중생을 직접 체험한 바울은 중생 중심의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바울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성령을 알 수도 없는 것이므로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성령을 받아 새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였다.

 

3. 선교 중심 신학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신도들에게 교리를 지키고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강조한다. 바울은 일생을 그리스도를 전도하기 위해 몸을 바친 사람이었다.

 

바울은 자기가 받은 체험과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였는데, 그 내용은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새 교회를 세웠다.

 

그의 전도 대상은 유대인과 이방인이었다. 바울은 앉은뱅이를 고쳤고, 무녀에게도 옥졸에게도 철학자들에게도 선객들에게도 로마의 옥중에서도 전도했다.

 

바울의 선교 중심 신학은 교회 중심 신학과 연결된다. 그는 선교하면서 교회를 세웠고, 교회를 위하여 서신을 썼다.  

 

4. 체험 중심의 신학

 

바울은 하나님을 체험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했다. 이러한 바울의 체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살아계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었다. 바울의 신학은 철저하게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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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의 특색과 바울의 기독론에 대하여

 

가을사랑

 

Ⅰ. 서 론

 

사도 바울은 서기 5년 내지 10년 경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태어났다. 바울은 갈릴리아의 수도인 다소의 시민이었으며 출생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취득했다. 바울은 장막을 치는 일에 종사하였으며, 헬라어에 능통했고, 회심하기 전에는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이었다. 바울은 초기에는 그리스도인을 탄압하는 일에 열심이었으나 그 후 개심하여 열렬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바울은 복음의 교리와 복음의 윤리적인 내용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바울신학은 바울의 신앙과 그의 주장을 신학적으로 정립하여 표현한 신학체계를 의미한다.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바울신학의 중요한 특징을 살펴보고, 바울의 기독론에 대해 설명하기로 한다.

 

Ⅱ. 바울신학의 특색

 

1.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바울신학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전파하려고 하는 복음이 그리스도의 중심원리라고 믿고 있었다(롬 1:3~4, 4:24~25). 바울은 예수의 빛을 보았고, 직접 예수님을 만났으며,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을 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평생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질 수 없었다. 바울은 어떠한 고통이나 고난을 당하더라도 예수님은 주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었다.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는 예수를 그리스도가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 생각하였다.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하였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메시야로 나타나기를 기다렸던 형상으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바울은 나중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고 평생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활하였다.

 

2. 중생 중심 신학

 

바울은 영광의 빛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나서 눈이 어둡게 되었다. 그러면서 바울은 심령의 눈이 떠지면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와 같은 중생을 직접 체험한 바울은 중생 중심의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바울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성령을 알 수도 없는 것이므로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성령을 받아 새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였다.

 

3. 선교 중심 신학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신도들에게 교리를 지키고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강조한다. 바울은 일생을 그리스도를 전도하기 위해 몸을 바친 사람이었다.

 

바울은 자기가 받은 체험과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였는데, 그 내용은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새 교회를 세웠다.

 

그의 전도 대상은 유대인과 이방인이었다. 바울은 앉은뱅이를 고쳤고, 무녀에게도 옥졸에게도 철학자들에게도 선객들에게도 로마의 옥중에서도 전도했다.

 

바울의 선교 중심 신학은 교회 중심 신학과 연결된다. 그는 선교하면서 교회를 세웠고, 교회를 위하여 서신을 썼다.  

 

4. 체험 중심의 신학

 

바울은 하나님을 체험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했다. 이러한 바울의 체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살아계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었다. 바울의 신학은 철저하게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다.  

 

Ⅲ. 바울의 기독론

 

1.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의 형상으로 오셔서 인간의 삶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교리이다. 그러면 바울은 성육신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하고 있었는가?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인해 인간은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외아들을 모든 사람의 형상인 육신의 모양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께서 화목하게 지내시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신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고,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중요한 행동이라고 보았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이미 영원 이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어 있던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래 전부터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 육신으로 동일한 인간처럼 보이게 한 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예정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로 보았으며, 성육신을 창세전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하늘 나라에서 가지고 있던 고귀한 것들을 포기하고 내려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으면서 가장 고귀한 지위에 있었으나, 그러한 모든 지위와 권한을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셔서 종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권세와 능력과 만물을 다스릴 왕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왕이 아니라 종으로 세상에 왔다. 예수님은 이 땅에 명령을 하고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순종하려고 오셨다. 예수님의 죽움은 일반 사람들의 죽음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헌신적인 죽음이었다.  

 

바울은 인간의 죄에 대해 설명하기를,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담의 죄 때문에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모두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인간의 죽음은 아담이 지은 인간의 죄의 결과 때문이라고 했다. 만일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인간은 죽지 않았을 것이고, 영원한 영생을 누릴 수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절대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금지사항을 아담과 하와가 위반함으로써 범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인간은 죽어야 할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울은 아담이 지은 죄 안에서 모든 사람들도 죄를 범한 것이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율법을 어기는 것이 죄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 이전에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다고 했다.

그러면 모세 이전의 시대에는 율법도 없었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는데 사람이 죽어야 했느냐 하는 것이 의문이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인간들이 아담 안에서 범죄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담의 죄에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하나님께 온전한 의와 온전한 순종을 드렸기 때문에 인간은 비로소 죄와 죽음의 결박에서 해방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죄로 인한 사망과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인이 의인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2.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바울에 있어서 십자가는 가장 중요한 신앙이 요소였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구속의 사상은 사도 바울의 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자체에 능력이 있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던 장벽을 무너뜨리고,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화목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십자가에 친히 못박혀 죽으심으로 인간이 그동안 잃고 있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켰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희생으로 보았다. 예수님의 희생은 인간이 마땅히 치루어야 할 영혼의 죽음에서 살려내는 대단한 희생이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역사를 보았다. 하나님의 역사란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인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일을 가능케 하신 것이었다.

 

3. 부활하신 그리스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러한 부활의 능력을 믿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은 그리스도인들은 새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며,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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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밭에 씨를 뿌려라

 

가을사랑

 

 

[본문]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으니라(마태복음 13:3~8)

 

 

Ⅰ. 밭에 씨를 뿌리는 농부 이야기

 

농사를 짓는 농부는 밭에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 씨가 자라 몇 십배의 수확을 가져옵니다. 농부는 무와 배추, 감자와 고구마 씨를 밭에 뿌립니다. 아주 작은 씨를 뿌리고 흙으로 덮어 놓으면 그 씨는 점점 자라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커다란 채소가 되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씨를 뿌리는 농부의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해주셨습니다. 어떤 이야기일까요? 들어보세요.

 

그 농부는 씨를 네 가지 다른 종류의 밭에 뿌렸습니다. ① 길 가, ② 돌밭, ③ 가시떨기, ④ 좋은 땅 이렇게 네 밭에 뿌렸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① 길 가에 떨어진 씨들은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새들이 먹어버렸으니 씨들은 뿌리를 내리지도 못하고 사명이 끝나버렸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요?

 

② 돌밭에 떨어진 씨들은 딱딱한 돌 때문에 그 뿌리가 더 이상 땅속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③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들은 뿌리를 땅에 내리고 열심히 자라려고 했지만 가시덤불의 뿌리가 땅에 있는 모든 영양분을 빨아먹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랄 수 없었습니다.

 

④ 좋은 땅에 뿌려진 씨들은 물도 많고 영양분도 많은 곳에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씨들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키웠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수확을 가져왔습니다. 대단한 결과인 것입니다.

 

Ⅱ.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농부 이야기는 어떤 의미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타락해서 오직 죽음만을 앞두고 있는 불쌍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드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려고 애썼습니다. 인간이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에덴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께 결정적인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을 흙으로 만들어 생명을 불어넣어주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애써 만들어 놓았더니 뱀의 유혹에 넘어가 창조주의 명령을 거역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는 얻었으나 영원히 살 수 있는 축복을 빼앗겼습니다. 평생 땀을 흘리고 흙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도록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 외아들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천국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짧은 생애동안 많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많은 경우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라 함은 어떠한 관념이나 사물을 끌어대어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비유란 말하는 사람이 강조하려는 요지를 일상생활의 낯익은 상황을 예를 들어 설명함으로써 이해시키는 이야기 방법을 의미합니다. 비유란 하늘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땅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비유로 농부의 이야기를 하신 것일까요? ① 길 가에 뿌려진 씨는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악한 사람이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을 의미합니다.

 

② 돌밭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곳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사람을 말합니다.

 

③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이 유혹에 말씀이 막혀 곧 넘어지는 사람을 말합니다.

 

④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니 결실하여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수확을 얻는 사람을 말합니다.

 

Ⅲ. 우리는 어떤 곳에 심어져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씨는 좋은 땅에 뿌려져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좋은 땅, 좋은 환경에 놓여져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며 살아가도록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씨는 농부가 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씨앗은 우리 자신이 뿌리는 것입니다. 마음의 씨앗을 예수님의 밭에 뿌리십시오. 그렇지 않고 사탄과 마귀가 역사하는 곳에 뿌리면 안 됩니다. 사탄과 마귀가 장악하고 있는 땅은 물도 없고 영양분도 없습니다. 딱딱한 돌이 꽉 들이차 있습니다. 씨를 주워먹는 새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우리 마음이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신앙의 가지를 뻗을 수도 없습니다. 성령의 말씀인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처음부터 죽어버리고, 메말라 버리고, 뿌리를 내리지 못하며 말라 비틀어져 죽게 됩니다. 모두 사탄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좋은 땅, 축복받은 땅, 그것은 예수님의 품안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천국은 바로 예수님의 품안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매달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씨앗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비옥한 예수님의 밭에 뿌려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마음의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말씀의 밭에 뿌려져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그 믿음이 말씀으로 자라 흠이 없이 온전하고 공의로운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항상 주님만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의 이름을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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