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와의 만남 (2)

 

가을사랑

 

성서와의 만남(문학 장르로 본 구약신약)은 마샬 존슨이 쓴 책이며 차준희 교수가 번역하여 프리칭 아카데미에서 출판했다. 여기에서는 그 책의 세 부분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Ⅰ. 예언문학

 

1. 개설

 

성서의 모든 위대한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백성에게 선포해야 할 말씀과 메시지들을 야웨로부터 받았다고 확신했다. 예언자들이 받았던 메시지들은 그들 당대에 벌어지고 있던 상황들에 대한 분석이었다. 예언자들의 말의 양식은 신탁, 서정시, 시각적 기호, 환상, 설교, 산문체 권고, 상징행위 그리고 그 외에 예언자의 독창성에 근거한 기타 형태들로 나타날 수 있다. 메시지의 내용은 당시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면서 대개 백성들에게 팽배해있던 분위기를 반박하는 것이었다. 예언자들은 백성들의 삶에서 벌어지는 죄악들과 민족에게 나타는 죄악들, 특히 약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죄악들을 지적했다.

 

2. 드고아의 아모스

 

자신의 메시지가 자신의 이름으로 된 한 권의 책으로 수집된 최초의 예언자는 아모스였다. 아모스는 심판 예언자의 표준적인 본보기이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타락은 국가의 종말이 불가피한 지점까지 도달해 있었다.

 

3. 예루살렘의 이사야

 

이사야는 신탁의 형식으로 야웨이 말씀을 일인칭 형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유다의 적들을 물리치고 평화와 정의의 보편적인 왕국을 세울 다윗 가문의 왕에 대한 이미지는 다음 세기 유대교 문학에서 발전되었던 바 다윗 가문에서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개념을 예고하고 있다.

 

4. 예레미야와 예루살렘의 멸망

 

예레미야는 서정적인 심판 시의 대가이며, 성서의 역사 가운데 가장 참혹했던 재난을 겪으면서 마음속에 지녔던 고통을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준 예언자이다. 예레미야는 인간 삶의 내적 갱신을 부르짖었다. 예레미야의 사명에는 파괴하는 일뿐만 아니라 건설하고 심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5. 제2이사야와 재건을 위한 희망

 

오늘날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사야 40-55장에 해당하는 제2이사야서의 연대가 대략 주전 538년경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이사야라는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이 본문들은 이미 유다와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었음을 전제하면서 그것들이 다시금 세워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 53장에서 예수의 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병행본문을 발견해왔다. 그러나 비록 제2이사야서의 종과 예수의 삶과 죽음 사이에 일반적인 병행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종의 물리적 조건에 대한 암시들이 예수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6. 예언문학 읽기

 

학자들이 예언서 안의 특정 본문들의 기원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최종 형태로서 이 예언서들이 내용은 기술가능한 문학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예언서에서 독특한 양식의 예언적 표현인 신탁은 예언자의 자기 이해를 즉각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의 거대한 역사적이고 국제적인 사건들을 해석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해석가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다.

'fai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서와의 만남 (4)  (0) 2008.11.17
성서와의 만남 (3)  (0) 2008.11.17
성서와의 만남 (1)  (0) 2008.11.16
로마서 제1장 (4) - 법적 관점에서의 해석  (0) 2008.11.12
로마서 제1장 (3) - 법적 관점에서의 해석  (0) 2008.10.23

성서와의 만남 (1)

 

가을사랑

 

성서와의 만남(문학 장르로 본 구약신약)은 마샬 존슨이 쓴 책이며 차준희 교수가 번역하여 프리칭 아카데미에서 출판했다. 여기에서는 그 책의 세 부분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Ⅰ. 교훈, 풍습, 그리고 덕스러운 생활 : 지혜문학

 

1. 구약성서 지혜문학의 특성과 기원

 

지혜문학(wisdom literature)이라 함은 잠언서, 욥기, 전도서, 그리고 여러 시편들에 나타나는 기본적인 장르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야고보서가 이에 속한다.

(1) 이스라엘의 지혜는 동방 사람의 지혜와 애굽 사람의 지혜와 맞먹었다.

(2) 초기 히브리 지혜문학의 내용은 실제적인 일상의 관심사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 안에는 또한 일반적인 동식물들에 대한 언급들도 담겨 있었다.

(3) 현자들 혹은 서기관들로 구성된 계층이나 전문직종이 있었을 것이다.

(4) 솔로몬은 이스라엘 지혜문학의 위대한 아버지로 지목되고 있다.

 

2. 지혜문학의 주목할 만한 독특성

 

(1) 지혜문학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언급이나 미래의 심판과 회복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2) 지헤문학의 초점은 개인의 삶에 놓여있다.

(3) 단지 몇몇의 경우에 있어서만 지혜문학은 이스라엘의 예배 형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4) 직접적인 계시 대신에 현자는 인간의 경험에 대한 성찰로부터 비롯된 충고들을 제공한다.

(5) 지혜문학은 사회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지닌 계층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6) 지혜문학은 그 형태에 있어서 국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3. 잠언

 

잠언서에는 핵심을 이루는 전형적인 대조를 통해 그 강조점이 나타난다. 삶과 죽음, 의의 길과 불의의 길, 정직함과 사악함, 빛과 어둠 등이다.

 

4. 욥기

 

욥기가 위대한 책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이 책이 고결한 시이기 때문이고, 또한 부분적으로는 이 책이 제기하는 질문이 시공을 초월하는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5. 전도서

 

전도자의 윤리적 가치관은 잠언서 저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인간은 선과 악,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부유함과 가난함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어느 경로를 선택하든지 간에 지나침 없이 절제할 줄 알아야 하며, 자신의 선택이 지니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6. 야고보서

 

야고보서의 관심은 신약성서의 다른 책들의 그것과 상당히 거리가 멀다. 야고보서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실천적인 말들을 제공한다. 헛된 소문의 해악, 부유함의 위험성,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사는 삶에서 오는 축복 등이다.

 

7. 지혜문학 읽기

 

종교의 근원적인 기능을 교훈적이고 윤리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지혜문학은 상당한 호소력을 지닌다. 잠언서는 이해하기 쉽고, 보편적이며,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적용 가능하다. 또한 보다 깊은 통찰을 포함하고 있는 욥기와 전도서는 모든 인간이 고민하는 근본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fai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서와의 만남 (3)  (0) 2008.11.17
성서와의 만남 (2)  (0) 2008.11.17
로마서 제1장 (4) - 법적 관점에서의 해석  (0) 2008.11.12
로마서 제1장 (3) - 법적 관점에서의 해석  (0) 2008.10.23
시편 15편 해설  (0) 2008.10.22

로마서 제1장 (4) - 법적 관점에서의 해석

 

가을사랑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 1:8~10)’

 

바울이 쓴 로마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가 유의하여야 할 것은 이것이 하나의 서신 형식으로 쓰여진 것이며, 서신을 보내는 대상이 로마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편지를 쓸 때에는 상대방을 강하게 인식한다. 그리고 그들이 전제된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신문에 기사나 칼럼을 쓰는 것과도 다르다. 편지라 함은 반드시 발신인과 수신인이 있다.

 

그리고 그 수신인은 특정되어 있다. 물론 불특정 다수인을 상대로 하는 서신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서신이라고 할 수도 없다.

 

바울은 매우 명백하게 로마서라는 편지형식의 글을 쓰면서 수신인을 특정짓고 있다.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롬 1:7)라고 쓰고 있다.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칠 무렵인 서기 57년 고린도에 머물면서 쓴 서신이다.

 

이 무렵 로마는 세계에서 제일의 강대국이었던 로마제국의 수도였다. 로마의 문화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사람들의 이성과 지성, 학문과 예술, 과학기술 등이 가장 발달한 곳이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작은 나라였다. 그곳에서 출발한 예수 그리스도교를 바울은 절대적인 신앙으로 믿고 이를 세계 최대의 도시인 로마에 가서 전파하려고 마음먹고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것이었다.

 

바울이 로마에 직접 들어가기 전 단계에서 로마서를 미리 써서 로마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 신안의 기본적인 교리를 설명하려고 그들에게 서신 형식의 글을 작성하여 보낸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아직까지는 직접 만나보지 않은 대다수의 로마교회 사람들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과연 바울이 무엇을 설명하고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만일 바울이 편지를 쓰지 않고 직접 로마교회 사람들이 모여있는 장소에서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였다면 보다 많은 말을 했을 것이다. 편지와 말은 전혀 다르다. 편지는 짧게 할 수 있지만, 말은 짧게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요점식으로 짧게 말을 하면 상대방은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로마서는 비교적 짧게 바울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

 

첫째,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하고 있다. 감사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무엇을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감사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러한 선행에 대해 감사한다는 것이다.

 

로마교인들이 바울에게 무엇을 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교인들로 인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 1:8)’

 

로마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로마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인들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복음은 예루살렘이라는 작은 영토를 벗어나서 넓은 세상으로 전파되고 있었다.

 

그것은 지구 끝까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도들의 사명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그 때문에 전도를 실천하는 교인들의 노고는 감사의 대상이었다. 바울은 로마교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의 하나님이라고 특정하고 있다.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롬 1:8)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어떤 감사한 일이 생기면 누구에게 감사하고 있을까? 그것은 바울과 같이 내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어야 한다. 이런 일은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다. 평소에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는 훈련을 해야 한다. 감사한 일이 생기면 무의식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이 나와야 하고, 진정으로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일신인 하나님을 의미한다. 전지전능하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야훼 하나님을 뜻한다. 바울은 이를 ‘내 하나님’이라는 소유격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바울 개인의 소유라고 할 수 있을까? 바울만의 하나님이고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닌 것인가?

 

어떤 사람이 ‘내 아버지’라고 하면 그것은 그 아버지의 아들임을 뜻한다. 어떤 아버지에게 아들이 세 사람 있으면 그 아버지는 오직 세 아들에 대해서만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있고, 법적 지위를 가진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아버지는 될 수 없다. 설사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해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자관계가 아니라, 그냥 아버지와 같은 정도의 친밀관계가 있다는 뜻에 불과하다.

 

의붓아버지, 양아버지, 작은 아버지, 대부(godfather) 등의 다양한 용어가 혼재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라는 단어가 주는 권위, 친밀감, 부양 및 보호책임 들을 통틀어 좋은 의미에서 사용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로마서에서 바울이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직접적으로 강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보여진다.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느끼고 하나님을 절대자로 믿고, 하나님을 위해 종노릇을 자청하며 그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서약한 바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매우 담대하게 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죽은 지 1,950여년이 지난 오늘 날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만 바울이 살던 시점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 말했다가는 불경스럽게 여겨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엄격한 율법의 집행자이며 징계자이었다.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부를 수 없었으며 오직 경배의 대상이었다. 하나님을 개인이 내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바울이 이와 같이 내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무척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편지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fai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서와의 만남 (2)  (0) 2008.11.17
성서와의 만남 (1)  (0) 2008.11.16
로마서 제1장 (3) - 법적 관점에서의 해석  (0) 2008.10.23
시편 15편 해설  (0) 2008.10.22
시편 15편 요약  (0) 2008.10.22

로마서 제1장 (3) - 법적 관점에서의 해석

 

가을사랑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이 사랑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5~7)’

 

로마서 1장 1절부터 7절까지의 인사말 부분은 ① 바울 자신에 대한 소개, ② 하나님의 복음의 정의, ③ 예수님의 성격, ④ 사도의 직분, ⑤ 수신자들의 신앙적 위치, ⑥ 로마성도들에 대한 축원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로마서는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장문의 편지이다. 편지에 사적인 내용이 거의 들어있지 않고 기독교에 관한 체계적인 이론과 사상을 담아 적고 있다는 점에 로마서의 특징이 있다.

 

바울은 로마서를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썼던 것일까? 바울은 3차전도 여행을 하고 있던 서기 55년부터 58년 사이에 고린도에 머물면서 로마서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바울은 고린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교를 전도하고 있었다. 그는 더 나아가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크다는 로마에 가서 전도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에 관하여 체계적인 설명을 하기 위해 편지를 썼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 서신을 통해 자신이 로마에 가기를 바란다는 희망사항을 전달하려고 했고, 경제적인 협조를 구하고 있다. 로마서라는 제목은 바울이 직접 붙인 것은 아니다.

 

로마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얼마 되지 않은 시대적 배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직접 보고 들은 상태에서 바울에 의해 씌여졌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쓰는 글들과는 전혀 다르다. 아주 생생한 예수님에 대한 기억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았다는 점에서 성경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회심하여 목숨을 걸고 예수님에 대한 증인이 되려고 했다. 그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온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다. 바울은 로마서뿐 아니라 많은 다른 서신들을 썼다. 바울이 쓴 14편이나 되는 서신들이 성경에 들어가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로마서는 가장 체계적이고 탁월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은혜라 함은 일반적인 도움이나 자선, 혜택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에 관한 은혜이며, 인간의 원죄에 관한 대속의 은혜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일방적인 관계에서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주시고, 속죄시켜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었던 관계로 하나님께 직접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게 해주셨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말한다.

 

사실 예수님이 아니라면 사도라는 직분을 필요없는 것인지 모른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교를 전하기 위한 중간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그 전제로 예수님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았다.

 

예수님이 근본적인 원인이고, 모든 문제해결의 근원이다. 인간이 받는 은혜와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전파하는 행동과 일, 그 사명을 실천하는 사도라는 직분 또한 예수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임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도라는 직분에 대해 인간이 만든 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 없다. 불완전한 인간의 법에서 유래된 권한이라는 것은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러한 존재에 대해 깊은 신뢰를 하지 않는다. 그때그때 정치적 사회적 여건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며, 인간의 자의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의 직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나 사도의 직분을 맡을 수 없다. 설사 맡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도라는 직분으로 수행하는 일의 성과를 제물로 받으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제물은 제물로서 가치가 없다.

 

진정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말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으로 하고, 예수님의 종이 되어서 자기의 목숨을 다 바쳐야 한다. 인간적인 생각은 배제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바울은 모든 이방인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주님께 순종하도록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방인은 항상 방황한다. 이방인은 정통의 혈통이 아니기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고 배척당한다. 자신이 배척당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에 대한 존재에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믿음을 가지고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다윗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철저하게 구별했다.

 

들은 완전한 선민의식에서 이방인을 멀리했고, 그들에게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려고 하지 않았다. 모두 선지자, 또는 선택받은 제사장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자신이나 가족, 민족공동체 내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아니 그러한 태도를 정당한 것으로 보고, 그 이외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통해 해결해 주실 것으로 믿었다.

 

구약성경에서는 믿음의 백성들에 관한 문제만 나오고, 이방인들의 구원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방인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심판과 응징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식되지 못한 시기였다. 철저한 법의 시대였다. 인정 사정 없는 냉정한 법의 심판만이 유일한 정의의 실현수단이라고 잘못 믿었던 때였다. 죄를 지은 사람은 돌로 쳐 죽이고, 믿지 않는 백성들은 전쟁으로 정복해서 소멸시키는 것이 정의라고 믿었던 시기였다.

 

모세의 십계명은 사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엄격한 법만을 강조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무섭고 잘못을 심판하시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애당초 하나님께서 선택하지도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시지도 않는 이방인들은 구원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믿음의 백성들도 이방인들의 구원문제에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았고, 그럴 여유도 없었으며, 그것을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장 커다란 계명을 우리에게 전해주셨다. 그것은 충격적인 계명이었다. 인간이 그전까지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던 계명이었다. 생명의 말씀이었고 삶의 법칙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이방인들의 문제를 모두에서 언급하고 있다. 로마에 있던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방인 중에서 개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 로마에 가서 본격적인 전도를 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의 신앙문제는 바울에게 매우 중요한 당면과제였을 것이다.

'fai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서와의 만남 (1)  (0) 2008.11.16
로마서 제1장 (4) - 법적 관점에서의 해석  (0) 2008.11.12
시편 15편 해설  (0) 2008.10.22
시편 15편 요약  (0) 2008.10.22
로마서 제1장 (2) - 법적 관점에서의 해석  (0) 2008.10.22

시편 15편 해설

 

 

가을사랑

 

 

시편 15편은 성전에 입장할 때 거행되는 의전을 전제로 씌여진 시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문답 형식의 시를 통해 성전입장의 자격 및 조건을 묻고 그에 대해 답변을 하는 것이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성전 예배에 참여할 때 갖추어야 할 도덕적인 조건들을 확인하는 의식에 사용되었던 시라고 할 수 있다.

 

 

시편 15편은 다윗이 쓴 시로서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 시는 ①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관한 질문(15:1), ② 그와 같은 자격에 관한 답변(15:2~5 상), ③ 자격 있는 사람에 대하여 보장된 약속(15:5 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시온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머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관해 가르쳐주고 있다. 그것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만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시에서 사용된 성막과 성산은 성전과는 달리 정해진 일정한 시간 동안만 잠시 왔다가 떠나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과 직접 만나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자신의 내적인 삶 속에 하나님과 항상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관하여 15편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정직, 공의. 진실’이다(15:2). 둘째, ‘참소금지, 행악금지, 이웃훼방금지’이다(15:3). 셋째, ‘망령된 자 멸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 존대, 서원한 사항의 불변’(15:4), 넷째 ‘변리대금금지, 뇌물수령 및 무죄한 자를 해치는 행위금지’(15:5 상) 등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조건은 적극적인 조건과 소극적인 조건으로 구별된다. 첫째 조건은 적극적인 조건으로서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고,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머지 세 가지 조건은 모두 어떠 어떠한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극적인 조건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동거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투명성을 가져야 하고, 이웃에 대해 한 마음으로 정직과 진실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웃과의 약속을 쉽게 파기하거나 고리대금을 취하거나 뇌물을 받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조건을 준수하는 사람들은 의인으로서 영영히 요동치 아니한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15:5 하). 이와 같은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은 요동치 아니하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약속하고 있다. 요동치 아니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영원한 반석 위에 자리를 잡고 흔들리지 않는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시편 15편 요약

 

가을사랑

 

 

시편 15편은 다윗이 쓴 시로서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 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시온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머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관해 가르쳐주고 있다. 그것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만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시편 15편은 ①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관한 질문(15:1), ② 그와 같은 자격에 관한 답변(15:2~5 상), ③ 자격 있는 사람에 대하여 보장된 약속(15:5 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관하여 15편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정직, 공의. 진실’이다(15:2). 둘째, ‘참소금지, 행악금지, 이웃훼방금지’이다(15:3). 셋째, ‘망령된 자 멸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 존대, 서원한 사항의 불변’(15:4), 넷째 ‘변리대금금지, 뇌물수령 및 무죄한 자를 해치는 행위금지’(15:5 상) 등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조건은 적극적인 조건과 소극적인 조건으로 구별된다. 첫째 조건은 적극적인 조건으로서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고,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머지 세 가지 조건은 모두 어떠 어떠한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극적인 조건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조건을 준수하는 사람들은 의인으로서 영영히 요동치 아니한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15:5 하).

 

시편 15편은 성소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조건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성소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먼저 지켜야 하고, 그 다음 성소에 들어가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성소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로 인해 많은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소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전체적으로 모세가 받은 십계명을 그대로 압축해 놓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으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근본적인 규범이고 율법에 해당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은 요동치 아니하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약속하고 있다. 요동치 아니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영원한 반석 위에 자리를 잡고 흔들리지 않는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시편 15편은 성소에 입장할 때 외우는 기도문의 양식에 근거를 둔 지혜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의로운 행동을 함으로써 영원한 하나님의 반석 위에 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서 제1장 (2) - 법적 관점에서의 해석

 

가을사랑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롬 1:3~4)’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함에 있어서 제1장 모두에서 인사말을 적고 있다. 그중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4개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을 뿐이다. 사도행전에서도 스데반의 설교나 바울의 설교에서도 기독교의 교리에 관해 체계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으로 이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신을 가지지 않고 오셨다면 인간은 그를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육신의 형태로 이땅에 오시도록 한 것이다.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나셨다.

 

예수님의 계보에 관해서는 마태복음 제1장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모두 42대에 이른다.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마 1:17)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지만 그 출생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하여 나신 것이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인간인 남자와 여자의 성적 결합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 성령이 들어가 잉태시켰고, 그후 출생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의 본질이 있다. 성령잉태를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인간의 과학이나 의학적 지식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몰라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셨다. 그랬더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그 생령을 다시 찾아가시면 사람은 호흡이 끊어지고 생명을 잃게 된다.

 

이런 하나님이시므로 성령으로 처녀의 몸에 잉태를 시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무결함을 상징하고 있다. 물론 성적 교섭에 의해 태어났다고 해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닐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애당초 남자와 여자의 성적 교섭을 허용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 이후 급속도로 성적인 문란상태에 빠졌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내려주셨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간음의 죄를 끊임없이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셨다는 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의 율법인 간음하지 말라는 규범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성결의 영으로 오셨다. 하나님의 영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다시 부활하엿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고 그때에서야 비로소 예수님이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원래 의심이 많고,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의 지식 범위 안에서 직접 경험한 사실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도마에게 전했을 때 도마는 의심이 많아 위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과연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상태 그대로 부활하신 것이었을까? 다시 말하면 손에 못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고, 옆구리에 창에 찔린 구멍이 그대로 남아있었을까? 그렇다면 온 몸과 얼굴에 채찍으로 맞아 생긴 상처며, 피를 흘려 피가 거의 빠진 상태에서 다시 그대로 부활하신 것일까?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도마는 매우 인간적인 지식과 경험에 기초해서 이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이다. 돌아가실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시면 자신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겠다는 것이었다.

 

도마가 이런 의문을 제기한 후 8일이 지나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이때 도마도 함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예수님은 어떻게 알고 계셨을까?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면서 제기했던 말들을 어떻게 들으셨던 것일까?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시 만났을 때 도마가 의심했다는 사실을 전해 드렸던 것일까? 아니면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므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예수님의 위와 같은 말씀을 듣고 도마는 대답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요 20:20)

 

분명 도마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보았으므로 굳이 손이나 옆구리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육체적인 현상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성경은 이에 말한다.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도마와 같이 의심이 많고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쉽게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래도 도마는 예수님을 직접 모셨던 제자였다. 우리는 직접 제자가 될 기회도 없었다. 하물려 도마도 그런 의심을 했는데 우리인들 어찌 의심이 없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그래서 방황하고 믿음도 가지지 못하고 이땅에서 보이는 것에만 집착한다. 보이는 것을 우상으로 만들어 놓고 그곳에 절을 하고 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우리는 2천여년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존재와 부활하심과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믿는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요 요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도마의 어리석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영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과 은혜와 긍휼을 주시기 때문이다.

'fai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15편 해설  (0) 2008.10.22
시편 15편 요약  (0) 2008.10.22
로마서 제1장 (1) - 법적 관점에서의 해석  (0) 2008.10.22
시편 연구의 최근 경향  (0) 2008.10.15
시편신앙과의 만남  (0) 2008.10.14

로마서 제1장 (1) - 법적 관점에서의 해석

 

가을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1~2)’

 

로마서 제1장은 바울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이 어떤 것이며, 왜 자신이 그러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인지를 선포하고 있다. 첫 번째 단락은 바울의 지위 및 자격에 관한 설명이다. 즉,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로 사명을 받았고,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개념은 바울의 일방적인 관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양자간에 형성되는 것이다. 주인이 노예에 대해 ‘앞으로 너는 내 노예이며, 노예로서 의무를 다 해야 한다’고 선포할 수 있는 것은 힘의 논리에 의해 노예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 동의를 받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노예는 권력관계에 의해 노예로서의 생활이 강요되거나, 돈에 의해 팔려와서 노예로서 일을 하거나 한다. 불평등한 계약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한 계약관계에 의해 신분상의 노예는 존재하고 그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주인도 노예에 의해 주인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계약을 맺지 않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대화도 나누어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은 예수님의 종이고 노예라고 선포하고 있다. 일방적인 관계설정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바울은 예수님을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그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그가 성부 성자 성령의 3위일체로서 사실상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땅에 왔다가 부활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스스로 그의 종이 되기로 결심했다.

 

자발적으로 종이 된 사람은 강요에 의해 종이 된 사람과 다르다. 그는 종이면서도 종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종 노릇을 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해방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종의 역할은 주인이 시키는 것, 주인을 위한 것. 별로 보람이 없는 것에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자발적인 종인 다르다. 그는 주인이 시키지 않는 것, 주인뿐 아니라 종 자신을 위한 것, 보람이 있는 것을 찾아서 스스로 한다. 자발성과 비자발성의 차이다. 바울은 스스로 종이 된 사람이다. 굳이 종이 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데 스스로 좋아서, 가치를 인식한 상태에서 목숨을 걸고 종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 결과 종이 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과연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있는가? 말로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의 종이라는 사실을 애당초 생각하지 않고 있거나 잊어버리고 있는가? 정작 종이라는 관계형성을 자신에게 선포한 사실이 있었는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종과 주인의 관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평생 지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말과 행동 모든 분야에서 일관성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주인이 없는 자리라고 해서 주인에게 불충하거나 배신해서는 안 된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오죽하겠는가?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우리가 잠에 들었을 때에도 우리 곁에 계신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선택되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라 함은 아로스톨로스라는 헬라어에서 유래되었다.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바울은 자신이 누구에 의해 보내어졌다는 뜻이다. 피동적으로 보내어졌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울이 스스로 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보내어졌다. 그러므로 가지 않을 수 없고, 가야만 할 수밖에 없어 사도로 보내어졌고, 현재 사도로서 직분을 가지게 되었으며 사도로 활동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면 사도는 누가 무엇 때문에 보내는 것일까? 왜 사도가 필요한 것이며, 사도는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 누가 사도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는 것이다. 사람이 보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일일이 개인에게 개별적으로 보내실 수도 있지만, 그것 보다는 사도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신다. 그래야 일반 사람들이 더욱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 전하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택하셔야 된다. 자신이 스스로 사도가 된다고 될 일은 아니다. 그의 자격은 아무 것도 필요 없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종이 되며,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의만 가지면 된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었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복음이다. 복음이 없으면 사도도 필요 없다. 전할 복음을 받았기에,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도가 필요한 것이고, 바울은 그러한 사도로서 복음을 위해 선택되어 정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오직 복음만을 위해 자신의 역할이 분명하게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진정한 사도로서의 역할이고, 사도로서 걸어가야 할 길이다. 도리다.

 

바울은 로마서 모두에서 자신의 신분과 역할, 그리고 사명에 대해 간결하게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복음이라는 말은 유앙겔리온이라는 헬라어에서 나온 말이다.

 

복음(福音)이라 함은 그야 말로 Good News 로서 좋은 뉴스라는 뜻이다. 좋은 소식이 있다는 것이다. 좋은 소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하늘 나라에서 내려온 것이다. 하늘 나라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 보내주신 것이다. 그 복음은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까? 라디오에서 나오는 방송처럼 소리로 들리는 것일까? 누가 녹음해서 저장해 둔 것은 없을까?

 

바울은 복음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관해 미리 약속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 성경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록해 놓으셨다.

 

구약성경 전체가 복음은 아니다. 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복음은 오직 예수님에 대한 말씀만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선지자들의 말 중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오실 것이라는 사실에 관한 부분만이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로서 출현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양이 되어 죽을 것이다. 그의 희생에 의해 인간은 모든 죄를 사함을 얻게 된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고 죽은 다음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신다. 그는 부활한 다음 하나님 우편에 앉아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게 된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죄인이 되었다. 태생적인 죄인이 되었기에 개인의 힘으로는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죄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죄는 시간이 갈수록 더 큰 죄악을 낳게 된다. 죄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나중에는 죄에 대한 변별력까지 상실하게 된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서로 헤매고 충돌하고 그럼으로써 서로 원망하고 불평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가지지 않고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불쌍한 존재로 전락한 채 살아가게 된다.

 

구원에 대한 소망은 전혀 없는 상태다. 그런 상황에 인간에 대한 유일한 희망과 빛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출현이었다. 메시아가 곧 출현할 것이라는 뉴스가 복음이었다.

 

바울은 구약성경에 선지자들이 기록한 대로 좋은 소식이 뉴스처럼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좋은 소식, 복음을 전파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바울이 이처럼 담대하게 선포한 것처럼 작은 선포를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종이며 그에 의해 선택되었고, 그의 복음을 위해 사명감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에게 충실한 종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오직 우리 앞에는 하나님밖에는 다른 주인이 없다.

'fai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15편 요약  (0) 2008.10.22
로마서 제1장 (2) - 법적 관점에서의 해석  (0) 2008.10.22
시편 연구의 최근 경향  (0) 2008.10.15
시편신앙과의 만남  (0) 2008.10.14
시편신앙과의 만남[요약 및 감상] (2)  (0) 2008.10.13

시편 연구의 최근 경향

 

가을사랑

 

* David M. Howard Jr.의 “Recent Trends in Psalms Study”를 차준희 교수님이 번역한 글이 ‘시편신앙과의 만남’(차준희, 대한기독교서회2004)에 수록되어 있다. 이 부분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오늘날 시편연구의 주된 관심은 하나의 책으로서의 시편, 다시 말해 구조와 메시지의 짜임새가 있는 문학적이고 정경적인 실체인 시편이 가지고 있는 구조, 편집적 통일성, 전체적 메시지에 관한 것이다.

 

더 넓은 성서연구의 맥락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히브리 시를 문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들이 1980년대 이래로 등장했다. 문학적인 접근법에서는 개별 시편들이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고, 시의 예술적인 차원에 상당한 관심을 돌렸다.

 

시편연구가 문학적 연구로 선회한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수많은 구조적 연구들이 나왔다. 이들은 대개 마소라 텍스트의 표층구조를 공식적으로 다루며 시편을 통일성 있는 전체로서 접근한다.

 

1970년대 이후 시편연구의 대표적인 특징은, 시편 해석의 패러다임의 변화로서 시편을 하나의 통일된 모음집으로서 대하는 경향이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히브리 시 해석의 패러다임의 변화로 시를 구문론의 입장에서 읽는 경향이 더욱 강화되고 있고, 개별 시편과 시편의 유형에 대한 접근법이 급격하게 다양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연구는 거시적 구조, 미시적 구조, 의미론적 분야, 비교 연구 등의 네 가지 영역에서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감상]

 

평소에 성경을 읽을 때 시편 부분을 매우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냥 좋은 시처럼 생각했거나, 아니면 비슷비슷한 내용들이 되풀이되고 있는 기원을 담은 시로서 이해했다. 그러나 차준희 교수님의 책, ‘시편신앙과의 만남’이라는 책을 통독함으로써 시편의 전체적인 체계와 구도, 중요한 뼈대를 어렴풋이나마 머릿속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신학자들이 구약성서 가운데 시편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기울이고 깊이있는 연구를 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와 같은 시편연구는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위 책의 제3장 ‘시편연구의 최근 경향’에서 잘 알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시편을 가리켜 성서 전체의 총체라고 불렀다. 마르틴 루터는 성서 전체가 담고 있는 모든 것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짧게 집약된 일종의 작은 성서가 시편이라고 지적했다. 시편은 구약성서의 총체이며 구약성서의 요약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토라, 역사, 예언, 지혜, 묵시와 더불어 제의오 k축제, 그리고 사랑의 서정시들로 가득차 있다.

 

시편은 하나님의 구원행동과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의 모음서이다. 시편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께 말을 하고 하나님에 관하여 말을 한다. 시편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인간의 응답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행동하시고 말씀을 하시면 시편 기자는 찬양시로 응답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으로 일관하시면 시편 기자의 입에서는 탄원시가 터져 나온다. 존 칼빈이 시편을 하나님 앞에 노출된 인간 영혼의 해부학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시편에는 인간이 삶 속에서 경험하는 인생의 희노애락이 모두 녹아져 있다.

 

차준희 교수님의 책은 ① 시편에 대한 개론적인 내용, ② 시편의 신학적 메시지 분석, ③ 시편연구의 최근 동향 등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시편의 메시지 부분은 시편에서 대표적인 8개의 시편을 선택하여 주석을 달고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구약성서 중 시편이 가지고 있는 신앙세계를 만나 볼 수 있다. 시편의 세계는 무한하다. 그 끝없는 깊이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궁하신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 우리는 지식을 가지는 만큼 이해하게 되고, 아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

시편신앙과의 만남

 

가을사랑

 

* 차준희 교수님의 ‘시편신앙과의 만남(대한기독교서회, 2004년)은 시편에 관한 개론 소개, 시편의 신학적인 메시지 분석, 시편연구의 최근 동향을 정리한 책이다. 여기에서는 이 책을 중요한 내용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1] 시편 입문

 

Ⅰ. 시편의 장구성과 보편성

 

시편은 기독교와 유대교 영성의 역사에서 상당히 독특하다. 2500여년동안 유대교인들에게, 2000여년동안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시편은 장구한 세월 동안 보편적으로 암송되었고 연구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의 영적 생활과 신학적 사고도 시편에 의해 길러졌다. 신약성서의 기록은 시편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다. 고대교회 교부들의 저작물 역시 시편에 대한 인용이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다. 종교개혁 이후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 시편은 강한 생명력과 광범위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2. 시편의 형성

 

최종 형태의 시편은 150개의 찬양들과 기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편모음집은 다섯 권의 책으로 구분되며, 처음 네 권의 끝부분에는 축복과 두 번의 아멘이 등장한다. ① 제1권은 시편 1~41편으로서 다윗의 저작이거나 다윗에게 헌정된 것으로서 야웨(YHWH)라는 신명을 사용하고 있다. ② 제2권은 시편 42~72편으로서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엘로힘(Elohim)으로 표기된다. ③제3권은 시편 73~89편으로서 아삽, 고라 자손과 관련된 것들이다. ④ 제4권인 시편 90~106편과 제5권인 시편 107~150편은 기원이 다양하고 공통점이 전혀 없는 두 개이 시집이다.

 

시편의 최종 완성 연대는 역대기의 형성과 예수 벤 시라의 시대 사이에 위치한다. 시편의 문학적 장르를 보면, ① 탄원시, ② 찬양시, ③ 감사시, ④ 제왕시, ⑤ 시온의 노래, ⑥ 예배의식시, ⑦ 지혜시와 토라시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50개의 시편 중에서 116개의 시편들에서 히브리 본문의 표제들 또는 제목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표제들이 갖는 의미는 ① 지휘자에게 주어지는 연주방법, ② 작곡형태, ③ 개인이나 집단과의 관련성, ④ 시편의 용도에 대한 지시 등이다.

 

시편은 성서신학의 작은 논문이라고 평가된다. 사실상 시편은 신학대전의 서론격에 해당하는 기념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시편은 하나님의 현존과 부재에 관하여 탐구하고 있다. 또한 시편은 야웨의 이름을 송축함으로써 하늘과 땅뿐만이 아니라 원시 바다와 거대한 혼돈까지도 지으신 창조주를 찬양하고 있다.

 

시편의 시인들은 우주의 아름다움을 채색하고 그 안에 내면적인 폭풍이 격렬함을 담아내게 만드는 예술가처럼 우주 앞에서 그들이 지닌 심미적 경외감을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으로 변형시켰다. 또한 많은 수의 개인 탄원시들과 공동체 탄원시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에 대한 비방들이 나타나고 있다. 가난한 자들의 보호자 그리고 병든 자들의 치료자로 하나님께서 나타나고 있다. 지혜의 주인이며 생명의 주를 찬양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기독론은 느린 속도로 서서히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전승들은 여러 방면에서 시편을 그 모델로 삼았다. 신약의 저자들이 헬라어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히브리어 본문보다는 헬라어로 된 70인역의 시편을 인용하게 되었다. 

 

[2] 시편의 신학적 메시지

 

Ⅰ. 오직 한 길(시 1편)

 

시편 1편은 지혜시, 토라시, 또는 교훈시라고 불리운다. 시편 1편은 죽음에 이르는 악인의 길을 피하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의인의 길로 안내하고 교육하며, 또한 의인의 길로 결단을 촉구한다.

복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며, 행복은 하나님이 세워 주신 질서에 순응하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

악인은 단순히 토라를 어긴 사람이고, 죄인은 실정법을 구체적으로 범한 사람이며, 죄인은 급기야 하나님을 조롱하는 오만한 자로 발전하게 된다.

의인은 기쁠 때나 슬플 때 환경의 변화에 구애받지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맞추어 사는 사람을 말한다.

 

2.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시 3편)

 

시편 3편은 그 내용과 형식으로 보아 개인탄원시로 불리운다.

 

3. 사람이 무엇이관대(시 8편)

 

시편 8편은 찬양시에 해당한다. 찬양시는 야웨를 찬양하라는 권고와 찬양의 이유 또는 찬양의 내용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시편 8편은 다윗의 노래로 성가대 지휘자의 인도에 따라 깃딧이라는 멜로디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다.

 

4. 주의 성산에 거할 자(시 15편)

 

시편 15편은 내용과 형식으로 보아 교훈적인 의도를 지닌 예배의식시의 일종이며 성소입장의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성소에 거할 자의 첫번째 조건은 정직하게 행하는 것이다. 두번째 조건은 공의를 일삼는 것이다. 세번째 조건은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5.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시 19편)

 

시인은 시편 19:1~6에서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이 계시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시편 19편은 모든 만물은 자기 자리에서 말없이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토라는 억압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이 구원만이 토라 준수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6. 야웨는 나의 목자시니(시 23편)

 

시편 23편은 좋은 목자이신 야웨를 찬양하고 있다. 그리고 야웨에 대한 신뢰의 이유를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목자로서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자비로운 주인이 되어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현재의 고난 속에서 미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억울한 자와 쫓기는 자들의 도피처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약자를 한 가족과 같이 정성스럽게 돌보아야한다는 것이다.

 

7.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시 30편)

 

시편 30편에서는 죽을 병에서 건짐을 받은 것을 고백하며, 자신을 이렇게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시편 30편은 다윗이 시, 곧 성전 낙성시라는 표제를 가지고 있다. 시편 30편의 본문이 주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생명이란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매순간 연장되는 것이다. 개인의 구원은 곧 공동체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진리를 전하는데 있다.

 

8. 옛날부터 내려오는 수수께끼(시 78:1~16)

 

시편 78편은 72절에 이르는 장문의 시로서 여러 가지 양식의 복합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양식으로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본문이 주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된다. 하나님의 구원경험을 다음 세대에게 계속해서 전하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당연한 의무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억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망각한 채 이루어진 인간의 무장은 무익하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시험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실패한 것이라는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