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으로 가슴 벅찬 예배

 

가을사랑

 

찬양으로 가슴 벅찬 예배는 뉴욕에 있는 시온 펠로우십 교회의 담임목사인 밥 소르기(Bob Sorge)가 지은 책이다. 저자는 탁월한 피아노 연주가이며 세미나 강사로 사역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제1부 살아있는 예배의 핵심, 제2부 찬양 예배를 인도하는 방법으로 나누어져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예비를 드리는 과정에 하는 찬양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 찬송가를 부르고, 찬양팀의 찬양을 들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고, 그러한 찬송과 찬양이 당연히 예배의 일부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왜 찬양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경배와 찬양의 관계는 어떠한가? 경배와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은 어떠한 자세를 가여야 하는가? 등에 관하여 체계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했다. 이 책은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음악 전문가로서 사역하고 있는 저자가 음악적인 소양을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경배를 드리며, 찬양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과 경험을 소개하고 있다.

 

제일 먼저 저자는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날카로운 분석과 지적을 하고 있다. 우리는 찬양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무척 새로운 시각이다. 어떻게 보면 매우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찬양드릴 때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께 가깝게 다가가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예배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사로잡히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데 있어서 고정적인 방법은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많은 것을 얻겠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는 자를 사랑하시며, 이들은 하나님께 드릴 목적으로 회중 앞에 나아오는 자를 말한다. 예배를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필요한 책임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죄에서 벗어나는 일을 해야 한다. 죄를 그대로 가지고, 죄를 계속해서 지으면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경배를 드리면 그러한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죄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영적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다. 구약 시대의 제사는 죽음을 요구했다. 신약 시대의 찬양의 역사도 역시 죽음을 요구한다. 우리의 안이함, 자기 연민, 아집, 욕망에 대한 죽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찬양과 경배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참여는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열쇠가 된다.

 

찬양이라 함은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는 것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명령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 가운데 거하신다. 또한 찬양 속에는 힘이 들어 있다. 찬양이란 우리 말을 우리의 넘쳐 흐르는 마음을 육신적인 표현으로 나타내야 한다. 이 책의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찬양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찬양해야 하는가? 어떻게 어디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찬양을 해야 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 없이 영적 전쟁에 나가면 부정적인 일이 일어난다고 강조하고 있다. 매우 맞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영적 전투에 임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우리는 적과 동지를 구별할 수 있다. 천사와 사탄을 구별할 수 있다. 어떤 제안이 왔을 때 그것이 사탄의 유혹인지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

 

저자는 또한 항상 영적 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라고 당부한다. 맞는 말이다. 사탄은 언제 우리에게 닥칠지 모른다. 편안하게 생활을 즐기고 있을 때에 갑자기 기습적으로 사탄은 우리를 공격한다. 우리는 기습을 당해 어쩔 줄 모르고 그러한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그러므로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전쟁을 할 때 가장 안전한 장소는 하나님 장막의 은밀한 곳이다. 전쟁은 하나님의 장막 안에 들어가 몸을 안전하게 하고 적과 싸워야 이길 수 있다. 저자는 찬양을 전쟁을 치뤄야 하며,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에도 찬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어느 때나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저자는 경배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경배란 하나님과 인간과의 대화를 의미한다. 경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한다. 결국 경배란 창조주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교제를 통하여 얻게 되는 결과이며, 우리의 영, 혼, 육 모두를 가지고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경배인도팀의 역할과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경배팀은 일반적으로 경배 인도자, 오케스트라(연주자들), 노래하는 자(성가대의 일부 또는 전체)의 세 가지 부류로 구성되어 있다. 목사는 교회의 여러 가지 일에 대해 하나님께로부터 결재를 받을 책임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경배팀은 목사의 감독 아래 있어야 한다. 목사는 그 그룹에 비전과 동기를 부여해 주는 사람이다. 목사는 음악팀들에게 비전과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할 뿐 아니라 이 사역에 관계된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해 주고 용기를 주어야 한다.

 

경배인도자는 시간을 잘 지켜야 하고 일반 신도들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경배를 인도해야 한다. 또한 예배가 끝날 때까지 일관된 주제를 유지해야 한다. 너무 많은 찬양을 해서 효과를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상황에 맞는 찬송가나 복음 성가로 어느 때든지 즉각 찬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경배인도는 지배하지 말고 인도하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 인도자는 격려하고 고무시킴으로써 사람들을 찬양으로 인도하여야 한다. 비록 원하는 목표가 고귀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경배인도자의 임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배할 수 있도록 가능한 최고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지만 예배를 준비하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을 사용한다. 그러나 예배를 준비하는 계획은 매우 중요하다. 예배를 위한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예배가 목적이나 방향 없이 표류하게 된다. 또한 예배가 지리멸렬해지고 너무 형식이 없어지게 된다. 계획되지 않은 예배는 대부분 성령의 지시를 따르는 예배가 아니라 종잡을 수 없는 산만한 예배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적인 계획을 세움으로써 회중을 각성시키고 그들의 경배를 새롭게 하는 예배의 다양성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교회는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그 마음이 불붙듯 하여 음악적으로 탁월한 사람들이 있어야 제대로 찬양도 할 수 있고, 회중들을 올바른 경배로 인도할 수도 있다. 교회는 하나님께 민감한 참된 경배자들을 인도하여야 한다. 찬양과 경배를 통해 영혼들을 자유함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경배와 찬양을 드림에 있어서 우리는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해왔던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찬양이 무엇이고, 경배는 무엇인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경배자는 무엇이며, 진정한 경배자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회중 경배의 목적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찬양과 경배의 예언자적 사역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찬양과 에배를 인도하는 방법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경배인도자의 기본적인 자세와 경배를 인도하는 기술적인 방법도 배울 수 있었다. 예배란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설교준비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예배를 드리는 순서와 방법에 대해 과학적인 연구를 해야 성공적인 교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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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극복하는 방법

 

가을사랑

 

 

[본문]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들어가올지라 주신 이도 야훼시요 취하신 이도 야훼시오니 야훼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기 1:21~22)

 

 

Ⅰ. 욥이 겪은 시련과 극복

 

1. 행복하게 살던 욥

 

옛날에 욥이라는 사람이 우스 땅에 살고 있었다. 욥은 아주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다. 욥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아들과 딸도 열명이나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고 살고 있었습니다. 자식들도 많고, 재산도 많이 소유하고 있었고, 일을 도와 줄 종들도 많았습니다. 욥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좋았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받들고, 모든 악을 물리치고 선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욥을 부러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자,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이다. 만일 욥에게서 욥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빼앗으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욕을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사탄아!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그의 모든 재산을 맡길테니 욥을 시험해 보아라. 다만 욥의 몸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욥이 하나님을 받들고 많은 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자, 사탄이 이를 모함하였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욥으로부터 복을 빼앗으면 욥은 당연히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을 향해 원수가 될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을 시험해 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2. 욥에게 닥친 시련

 

그리하여 사탄은 욥을 시험하기로 했다. 사탄의 시험을 인해 사람들이 욥의 소유인 소와 나귀를 빼앗고 종들을 죽였다. 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양떼들을 모조리 태웠다. 강도들이 나타나 낙타들을 다 빼앗아갔다. 태풍이 불어와 자녀들을 모두 죽게 만들었다.

 

이처럼 욥은 순식간에 모든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들어가올지라 주신 이도 야훼시요 취하신 이도 야훼시오니 야훼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기 1:21~22)

 

 

[이와 같은 욥의 자세는 높이 평가하여야 합니다. 욥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알몸으로 태어났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몸으로 태어난 자신이 자녀도 낳고 양과 소와 나귀를 수 없이 가지게 되었고, 종들도 많이 있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복을 주신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거두어 가신다고 해도 절대로 불평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욥의 모습을 보고 사탄에게 욥의 믿음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탄은 "욥의 믿음이 좋은 것은 아직까지 그가 건강하기 때문이다. 만일 욥이 병들면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사탄에게 욥의 생명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다.

 

사탄의 시험으로 욥은 온몸에 부스럼이 나서 가려웟고, 진물이 생기며,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번졌다. 온몸에는 벌레들이 득실거렸고, 살에는 고름이 가득찼다. 욥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었다. 그때마다 온몸에는 피고름이 흘러내렸다.

 

이런 상황이 되자 욥의 아내 조차도 욥에게 그런 꼴을 당하고도 하나님을 믿고 있느냐?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아무 병도 없이 건강하던 욥이 갑자기 견디기 어려운 병에 걸렸습니다. 원인도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몸이 조금만 아파도 고통스러운데, 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상처가 났습니다. 마땅한 치료방법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재산도 다 날아가고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없이 혼자서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어 피고름을 흘리고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비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릴 수 있습니다.]

 

3. 시련을 당하는 욥의 자세

 

그러나 욥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내리시면 재앙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또한 욥은 친한 친구들(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문병을 받고 그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유혹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사탄의 시험을 끝까지 물리치고 극복한 욥은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갑절의 복을 받게 된다. 욥은 잃었던 양과 낙타, 소, 암나귀를 두 배로 다시 얻었고, 수많은 종들을 다시 얻었다. 그리고 잃었던 자녀들도 다시 얻었다. 그래서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축복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끝내 지키며 살았다.

 

Ⅱ. 시련의 의미와 극복하는 방법

 

1. 왜 시련을 당하게 되는가?

 

이 세상에는 천사와 사탄이 함께 존재한다. 사탄은 우리에게 다가와 끊임없이 유혹하며 시련에 빠뜨린다. 사탄은 각종 세상적인 유혹을 가지고 우리를 죄에 빠뜨리려고 한다. 물질적인 유혹을 먼저 한다. 쉽게 돈을 벌 수 있고, 남보다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물질에 대한 욕심을 부리게 만든다. 그 다음 사회적인 명예욕을 자극한다. 남보다 더 놓은 위치에 올라가고,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는 욕망을 자극한다. 또한 성적인 욕망을 자극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하고 죄를 짓게 만들며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만들려는 것이 사탄의 목적이다. 이럴 때 우리는 시험에 들게 되고, 각종 시련을 당하게 된다.

 

2. 어떻게 시련을 극복하여야 하는가?

 

욥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잘 살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다가 갑자기 예상치 못한 날벼락을 맞아 비참하게 될 때 욥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했다.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모든 것을 순종했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고, 가져가시는 이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태어날 때 맨몸으로 나왔으니 그 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기에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누린 것일 뿐, 다시 가져가신다면 맨몸만 남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믿었다.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선한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믿고 현실적인 고통을 견디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3. 시련을 극복하면 더 큰 축복이 온다

 

욥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시련에 굴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극복하면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련은 결코 시련으로 끝나지 않는다. 단순히 고통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닥친 시련을 잘 극복하면 우리는 빛나는 진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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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도는 응답된다

 

가을사랑

 

[본문]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의 하나님 야훼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 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대하 31:20~21).

 

Ⅰ. 왕이 된 히스기야

 

히스기야는 아바지 아하스 왕의 뒤를 이어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 728년부터 687년까지 왕으로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유다의 왕 중에서 가장 훌륭한 왕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인 아하스 왕은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바알신을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이처럼 우상을 섬기니까 유다 나라는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유다 왕국이 약해지자,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끊임없이 유다 나라를 침략해 왔습니다. 시리아라는 나라, 에돔이라는 나라, 블레셋이라는 나라가 사방에서 유다를 침략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한 나라도 아니고 동쪽과 서쪽, 북쪽에서 다른 나라가 계속해서 침략해 오고 전쟁을 걸어오니 사람들은 대단히 불안하고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하스 왕이 죽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스물다섯살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군사적으로 약해진 나라, 바알신을 섬기고 우상에 빠진 상태의 유다를 다스려야 하는 왕이 되다니무척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Ⅱ. 히스기야의 개혁정치

 

비록 어린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히스기야는 왕이 되자 우선 잘못된 종교를 개혁했습니다. 아버지 왕이 세웠던 바알신의 우상을 모두 파괴해 버렸습니다. 개혁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당하게 타협해서는 아무런 개혁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과감하게 모든 것을 버려야 개혁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은 모든 우상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우리도 히스기야 왕을 본받아야 합니다. 미신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가슴 속에 오직 예수님만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벌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로 직접 받은 십계명에도 분명히 나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3~5)

 

히스기야는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하고 다른 우상들을 모두 파괴해 버렸습니다. 우리도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다른 우상들을 집에서 사무실에서 모두 버려야 합니다.

 

Ⅲ. 앗수르 제국을 무찌르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당시 유다 왕국은 강대국인 앗수르 제국에 대해 조공을 바치고 앗수르가 섬기는 우상을 함께 섬겨야 하는 약한 나라였습니다. 조공이란 힘이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물건을 가져다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용기있게 앗수르 제국에 대한 조공 바치는 일을 중단시키고, 앗수르 제국의 우상들도 모두 파괴시켰습니다.

 

이러한 과감한 조치에 대해 앗수르 왕은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유대를 치러 왔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라는 선지자와 함께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간구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이 나라를 구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옵소서.”

 

이런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천사로 하여금 산혜립 왕의 장군들을 죽였습니다. 앗수르 군대는 하루 동안에 18만 5천명이나 죽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군대의 수도 적고 무기도 시원치 않은 유대 사람들이 앗수르 군대를 크게 이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이루신 기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바다를 가르는 기적을 모세에게 베푸셨습니다. 앗수르 군대는 놀라서 후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히스기야 왕의 정직하고 충성된 마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Ⅳ. 병고침을 받은 히스기야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앗수르 군대를 물리쳤지만, 나중에 건방지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히스기야 왕의 개혁정치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높이 칭송하자, 우쭐한 마음을 가지고 건방진 자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교만해진 히스기야 왕은 점차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게을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벌을 내려 히스기야 왕으로 하여금 고칠 수 없는 병에 들게 하여 곧 죽음을 맞이하게 만들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다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15년 동안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간절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병에서 고침을 받았고 15년을 더 살 수 있었습니다.

 

Ⅴ. 결론

 

우리는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 이외의 다른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상 미신이나 우상을 섬긴 사람들이나 백성, 나라는 모두 망했습니다. 그들이 망한 이유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우상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를 짓고, 타락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는 사실 조차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둘째,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리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거의 망해가는 나라의 왕이 되어 하나님께 믿고 매달림으로써 나라는 바로 세웠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를 도우려고 천사를 보내 막강한 앗수르 제국의 군대를 쳐부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되어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 건방진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우상을 깨뜨리고 정치를 개혁하고 전쟁에서 승리를 해도 교만해지면 안 됩니다. 히스기야도 나중에 건방지게 되어 하나님께 덜 기도하고 덜 의지하자, 하나님께서는 고칠 수 없는 병으로 히스기야를 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건방져서는 안 됩니다.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끝까지 섬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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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함으로 역경을 이겨내자

 

가을사랑

 

 

[본문]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20~21)

 

1. 야곱의 열두 아들

 

성경을 보면 창세기에 요셉이라는 사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셉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전체 50장 중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차지하는 부분이 무려 37장에서부터 50장에 이르는 14장이나 차지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조상인 야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열한번 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아들 중에서 요셉을 가장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채색옷이란 금실로 수를 놓은 예쁜 옷입니다. 옷이 날개라고 좋은 옷을 입혀놓았으니 요셉은 다른 형제들보다 더 품위 있고 돋보였을 것입니다. 요셉은 부모에게도 순종을 했었을 것입니다.

 

2. 요셉의 꿈

 

요셉은 자라면서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밭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는데, 요셉의 단이 일어서니까 다른 형제들의 단이 요셉의 단을 둘러싸고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요셉은 또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열한개의 별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다른 형제들보다 더 크고 위대하게 되며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꿈을 통해 앞날을 계시하시기도 합니다.

 

3. 애굽으로 팔려 간 요셉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요셉만을 특별히 사랑하고 잘 해주었기 때문에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여서 구덩이에 던지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기로 음모를 꾸몄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나쁜 생각을 하고 그를 해칠 생각을 하는 것이에요. 얼마나 나쁜 일입니까?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형제들이 나쁜 마음을 먹고 동생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형인 르우벤이 요셉을 죽이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요셉을 죽이지 않고 그냥 빈 구덩이에 던져버리기만 했어요. 그리고 이들은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20냥을 받고 요셉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을 팔아먹은 형들은 요셉의 채색옷에 염소피를 묻혀가지고 아버지인 야곱에게 보여주면서 요셉이 사나운 짐승에 의해 잡혀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무척 슬퍼했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요셉이 죽은 것으로 알았으니까요.

 

아버지의 귀여움을 받아 가면서 편하게 살던 요셉은 형제들의 간악한 행동으로 낯선 애굽 땅에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을까요? 당시 종이란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힘든 일을 하고 밥만 얻어먹는 입장인 것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고 꿈도 없는 것입니다. 그냥 종으로 살다가 종으로 죽고 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4. 시위대장 보디발의 종노릇을 하는 요셉

 

요셉은 애굽땅에 와서 왕의 시종대장인 보디발의 집에서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은 요셉을 정직하고 열심히 일을 하는 소년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자기 집의 총무일을 하도록 맡겼습니다. 이렇게 1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17살 때 애굽에 팔려온 요셉은 이제 27세의 청년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셉을 본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했어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이런 모습은 주변 사람들이 자연히 알게 됩니다.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이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야훼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야훼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2~3). 그래서 요셉은 비록 종의 신분이었지만 주인인 보디발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주인의 집과 소유물을 주관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고 총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5.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미모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요셉을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 여자는 요셉의 옷을 붙잡고 유혹하면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요셉은 그 여자를 뿌리치기 위해서 자신의 옷을 벗어놓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그 여자는 요셉을 모함했습니다. 요셉이 자신을 강제로 껴안으려고 했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 일로 보디발은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6. 감옥에서도 모범적인 생활을 한 요셉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지만, 불평을 하지 않고 열심히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감옥의 책임자는 요셉을 죄수들을 돌보는 사무를 맡겼습니다. 왕의 높은 신하 두 사람이 죄를 지어 갇혀 있는 중에 꿈을 꾼 것을 요셉이 해석을 했습니다. 요셉의 해석대로 현실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애굽의 왕 바로가 꾼 꿈을 요셉이 해석을 해서 맞추었습니다. 이 일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나중에 요셉의 형제들을 모두 애굽땅으로 불러 들여 잘 살게 해 주었습니다. 요셉은 백십세까지 살았습니다.

 

7. 요셉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우리는 요셉의 일생에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첫째,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어렸을 때부터 커다란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스스로 꾼 꿈을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하고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면서 열심히 생활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였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죽을 위기를 맞았을 때에도,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셋째, 어떠한 환경에서도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요셉은 얼마나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습니까?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다가 형들의 모함에 의해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얼마나 형들을 원망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애굽에 가서도 보디발의 아내에 의해 모함을 당하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억울하다고 울부짖으며 인생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감옥생활에 충실했습니다. 그런 믿음과 정직한 생활 끝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요셉처럼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절대로 불평하지 말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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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십자가만 바라보라

 

[성경구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1~2)

 

Ⅰ. 십자가를 보지 못하는 사람의 불행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짧은 삶을 오직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살다가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주신 신앙의 나침반입니다. 우리는 현재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없고, 그 분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열심히 기도하면 예수님을 직접 만나볼 수도 있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곧 예수님이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신 믿음과 소망, 사랑을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우리들 신앙의 별이며 탑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형상을 닮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은 십자가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형상처럼 생긴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사함을 받게 해주셨고,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인간이 박탈당했던 영생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원죄와 부활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문제를 내포하고 해결하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는 사람의 모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예수님을 기억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과 다시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심판하시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모르거나 볼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신체가 튼튼해서 힘이 많아도, 아무리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어도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으로 황폐한 상태이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교만하고 제멋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찰나와 같은 짦은 세상에서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누려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십자가를 꼭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Ⅱ. 인간이 고통 받고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병들고 늙고 고생을 하면서 살다가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이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죽습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도 죽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었던 재벌들도 다 죽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초라한 모습니다.

 

인간은 왜 반드시 죽게 되어 있을까요? 그것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했더라면 인간은 죄를 짓지도 않았고,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따뜻한 보호를 받으며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말씀을 어긴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이유로 인간은 영생의 축복을 상실하고 평생 땅에서 일을 하는 수고를 하도록 추락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삶은 고생스럽고 힘이 들게 되었습니다.

 

Ⅲ. 인간의 죄를 사하고 구원하는 십자가의 능력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죄를 깨끗이 씻어줄 사람은 누구일까요?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가장 비천한 존재로 태어나셨습니다. 말이 사용하는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왕의 왕이 어떻게 그토록 더럽고 고통스러운 장소에서 태어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런 모습으로 인간에게 타나나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를 사하여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고 몸을 찢겼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아무런 죄도 없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가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 곁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Ⅳ. 십자가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를 위해 피흘리시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두어야 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왜 십자가일까요? 십자가는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고 예수님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믿음과 소망, 사랑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복을 받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서는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 단순한 십자로 된 나무를 볼 것이 아닙니다. 십자로 된 나무에 매달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숭고한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님만을 믿고 따르고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십자가는 소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땅에서 우리가 가지지 못했던 천국에 대한 소망, 죄사함에 대한 소망, 예수님의 보살핌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받는 고통과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셋째, 십자가는 사랑을 뜻합니다. 십자가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정신을 실천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어느 것보다도 사랑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더욱 뜨겁게 해야 합니다.

 

Ⅴ. 보혈의 십자가, 능력의 십자가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이고 희망입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만으로 죄사함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현실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파도처럼 닥쳐오는 고난과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패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십자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을 때 우리는 평안함을 얻게 되고, 이땅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캄캄한 죽음의 계곡을 통과할 때 우리를 지켜주는 지팡이며 방패입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여기 있지요? 보이지요? 그래요.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께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어깨에 매고 골고다언덕을 올라가시던 그 십자가, 그 위에서 피흘리고 몸을 찟기시던 십자가를 똑바로 바라보십시오. 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믿음, 소망, 사랑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 보이십니까?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지, 언제 어느 때나 십자가에서 눈을 떼면 안 됩니다.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가슴 속에 십자가가 언제나 살아서 뛰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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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의 만남 (4)

 

가을사랑

 

성서와의 만남(문학 장르로 본 구약신약)은 마샬 존슨이 쓴 책이며 차준희 교수가 번역하여 프리칭 아카데미에서 출판했다. 여기에서는 그 책의 세 부분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1. 느낀 점

 

문학장르로 본 구약신약, 성서와의 만남이라는 책은 성경을 문학적인 장르로 분류하여 구체적으로 분석해놓은 책이다. 매우 깊이가 있고, 날카로운 분석기법을 사용하고 있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성경에 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얻게 되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여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씌여진 시대적 배경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성경이 기록된 시대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3천여년의 역사적 간격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간격 때문에 역사적으로 성경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져왔다. 끊임없는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 책은 성서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문학 장르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성서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성격을 이해하면서 성경을 읽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책은 구약과 신약성서의 8가지 주요 문학 장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혜문학, 예전적 자료들, 준역사 자료, 예언문학, 법 모음집, 묵시문학, 편지들, 복음서 등이 바로 이러한 문학 장르들이다.

 

특히 지혜문학은 종교의 근원적인 기능을 교훈적이고 윤리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지닌다.

 

예언문학의 경우 예언자들이 하나님 야웨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언서들의 내용을 기술가능한 문학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시대의 거대한 역사적이고 국제적인 사건들을 해석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해석가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묵시문학은 고전적 예언서들과 달리 회개를 설교하지 않았다. 그들은 현 질서의 급작스러운 파괴 및 신앙인들을 위한 평화롭고 정의로운 왕국의 영광스러운 도래를 고대했다. 현세의 악한 세력들이 그에 합당한 심판을 받게 될 것도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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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의 만남 (3)

 

가을사랑

 

성서와의 만남(문학 장르로 본 구약신약)은 마샬 존슨이 쓴 책이며 차준희 교수가 번역하여 프리칭 아카데미에서 출판했다. 여기에서는 그 책의 세 부분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Ⅰ. 묵시문학

 

1. 미래를 향한 호소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이라 함은 비록 부분적으로 예언 전승과 지혜 전승의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 등장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묵시를 통해 계시된 것은 천상의 세계 또는 역사의 종말, 또는 그 둘 모두에 관한 비밀들이다. 모든 묵시문학 작품들은 역사의 시대와 다가올 시대를 구분하는 강력한 이원록을 전제하고 있다. 인간이 살고 있는 타락한 우주와 하나님의 처소를 구분하는 이원론은 이러한 직선적 대칭점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2. 다니엘서

 

다니엘서는 민담이야기 형태의 여섯 가지 이야기들과 전형적인 묵시 형태의 네 가지 꿈으로 구성되어 있다.

 

3. 요한계시록

 

신약성서의 묵시인 요한계시록은 서론,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에 보내는 편지, 그리고 속히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견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가르침가는 완전히 상반된 입장에 서 있다 .또한 복수를 위한 탄원을 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분위기는 산상수훈에서의 예수의 가르침과도 상당히 다르다.

 

4. 묵시문학 읽기

 

다니엘서는 마카비 혁명전쟁이라는 상황을 통해서라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고, 요한계시록은 주후 1세기 말 소아시아 지역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 상황을 통해서라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묵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기이한 이미지들, 역사의 상징적인 시대 구분, 긴박한 종말에 대한 경고, 신적 계시에 대한 주장, 세계사적 환난이라는 일관된 주제, 곧 도래할 영광스럽고 초자연적인 왕국에 대한 묘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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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의 만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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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의 만남(문학 장르로 본 구약신약)은 마샬 존슨이 쓴 책이며 차준희 교수가 번역하여 프리칭 아카데미에서 출판했다. 여기에서는 그 책의 세 부분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Ⅰ. 예언문학

 

1. 개설

 

성서의 모든 위대한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백성에게 선포해야 할 말씀과 메시지들을 야웨로부터 받았다고 확신했다. 예언자들이 받았던 메시지들은 그들 당대에 벌어지고 있던 상황들에 대한 분석이었다. 예언자들의 말의 양식은 신탁, 서정시, 시각적 기호, 환상, 설교, 산문체 권고, 상징행위 그리고 그 외에 예언자의 독창성에 근거한 기타 형태들로 나타날 수 있다. 메시지의 내용은 당시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면서 대개 백성들에게 팽배해있던 분위기를 반박하는 것이었다. 예언자들은 백성들의 삶에서 벌어지는 죄악들과 민족에게 나타는 죄악들, 특히 약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죄악들을 지적했다.

 

2. 드고아의 아모스

 

자신의 메시지가 자신의 이름으로 된 한 권의 책으로 수집된 최초의 예언자는 아모스였다. 아모스는 심판 예언자의 표준적인 본보기이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타락은 국가의 종말이 불가피한 지점까지 도달해 있었다.

 

3. 예루살렘의 이사야

 

이사야는 신탁의 형식으로 야웨이 말씀을 일인칭 형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유다의 적들을 물리치고 평화와 정의의 보편적인 왕국을 세울 다윗 가문의 왕에 대한 이미지는 다음 세기 유대교 문학에서 발전되었던 바 다윗 가문에서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개념을 예고하고 있다.

 

4. 예레미야와 예루살렘의 멸망

 

예레미야는 서정적인 심판 시의 대가이며, 성서의 역사 가운데 가장 참혹했던 재난을 겪으면서 마음속에 지녔던 고통을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준 예언자이다. 예레미야는 인간 삶의 내적 갱신을 부르짖었다. 예레미야의 사명에는 파괴하는 일뿐만 아니라 건설하고 심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5. 제2이사야와 재건을 위한 희망

 

오늘날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사야 40-55장에 해당하는 제2이사야서의 연대가 대략 주전 538년경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이사야라는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이 본문들은 이미 유다와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었음을 전제하면서 그것들이 다시금 세워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 53장에서 예수의 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병행본문을 발견해왔다. 그러나 비록 제2이사야서의 종과 예수의 삶과 죽음 사이에 일반적인 병행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종의 물리적 조건에 대한 암시들이 예수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6. 예언문학 읽기

 

학자들이 예언서 안의 특정 본문들의 기원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최종 형태로서 이 예언서들이 내용은 기술가능한 문학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예언서에서 독특한 양식의 예언적 표현인 신탁은 예언자의 자기 이해를 즉각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의 거대한 역사적이고 국제적인 사건들을 해석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해석가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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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의 만남 (1)

 

가을사랑

 

성서와의 만남(문학 장르로 본 구약신약)은 마샬 존슨이 쓴 책이며 차준희 교수가 번역하여 프리칭 아카데미에서 출판했다. 여기에서는 그 책의 세 부분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Ⅰ. 교훈, 풍습, 그리고 덕스러운 생활 : 지혜문학

 

1. 구약성서 지혜문학의 특성과 기원

 

지혜문학(wisdom literature)이라 함은 잠언서, 욥기, 전도서, 그리고 여러 시편들에 나타나는 기본적인 장르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야고보서가 이에 속한다.

(1) 이스라엘의 지혜는 동방 사람의 지혜와 애굽 사람의 지혜와 맞먹었다.

(2) 초기 히브리 지혜문학의 내용은 실제적인 일상의 관심사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 안에는 또한 일반적인 동식물들에 대한 언급들도 담겨 있었다.

(3) 현자들 혹은 서기관들로 구성된 계층이나 전문직종이 있었을 것이다.

(4) 솔로몬은 이스라엘 지혜문학의 위대한 아버지로 지목되고 있다.

 

2. 지혜문학의 주목할 만한 독특성

 

(1) 지혜문학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언급이나 미래의 심판과 회복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2) 지헤문학의 초점은 개인의 삶에 놓여있다.

(3) 단지 몇몇의 경우에 있어서만 지혜문학은 이스라엘의 예배 형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4) 직접적인 계시 대신에 현자는 인간의 경험에 대한 성찰로부터 비롯된 충고들을 제공한다.

(5) 지혜문학은 사회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지닌 계층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6) 지혜문학은 그 형태에 있어서 국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3. 잠언

 

잠언서에는 핵심을 이루는 전형적인 대조를 통해 그 강조점이 나타난다. 삶과 죽음, 의의 길과 불의의 길, 정직함과 사악함, 빛과 어둠 등이다.

 

4. 욥기

 

욥기가 위대한 책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이 책이 고결한 시이기 때문이고, 또한 부분적으로는 이 책이 제기하는 질문이 시공을 초월하는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5. 전도서

 

전도자의 윤리적 가치관은 잠언서 저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인간은 선과 악,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부유함과 가난함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어느 경로를 선택하든지 간에 지나침 없이 절제할 줄 알아야 하며, 자신의 선택이 지니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6. 야고보서

 

야고보서의 관심은 신약성서의 다른 책들의 그것과 상당히 거리가 멀다. 야고보서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실천적인 말들을 제공한다. 헛된 소문의 해악, 부유함의 위험성,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사는 삶에서 오는 축복 등이다.

 

7. 지혜문학 읽기

 

종교의 근원적인 기능을 교훈적이고 윤리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지혜문학은 상당한 호소력을 지닌다. 잠언서는 이해하기 쉽고, 보편적이며,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적용 가능하다. 또한 보다 깊은 통찰을 포함하고 있는 욥기와 전도서는 모든 인간이 고민하는 근본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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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제1장 (4) - 법적 관점에서의 해석

 

가을사랑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 1:8~10)’

 

바울이 쓴 로마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가 유의하여야 할 것은 이것이 하나의 서신 형식으로 쓰여진 것이며, 서신을 보내는 대상이 로마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편지를 쓸 때에는 상대방을 강하게 인식한다. 그리고 그들이 전제된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신문에 기사나 칼럼을 쓰는 것과도 다르다. 편지라 함은 반드시 발신인과 수신인이 있다.

 

그리고 그 수신인은 특정되어 있다. 물론 불특정 다수인을 상대로 하는 서신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서신이라고 할 수도 없다.

 

바울은 매우 명백하게 로마서라는 편지형식의 글을 쓰면서 수신인을 특정짓고 있다.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롬 1:7)라고 쓰고 있다. 로마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칠 무렵인 서기 57년 고린도에 머물면서 쓴 서신이다.

 

이 무렵 로마는 세계에서 제일의 강대국이었던 로마제국의 수도였다. 로마의 문화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사람들의 이성과 지성, 학문과 예술, 과학기술 등이 가장 발달한 곳이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작은 나라였다. 그곳에서 출발한 예수 그리스도교를 바울은 절대적인 신앙으로 믿고 이를 세계 최대의 도시인 로마에 가서 전파하려고 마음먹고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것이었다.

 

바울이 로마에 직접 들어가기 전 단계에서 로마서를 미리 써서 로마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 신안의 기본적인 교리를 설명하려고 그들에게 서신 형식의 글을 작성하여 보낸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아직까지는 직접 만나보지 않은 대다수의 로마교회 사람들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과연 바울이 무엇을 설명하고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만일 바울이 편지를 쓰지 않고 직접 로마교회 사람들이 모여있는 장소에서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였다면 보다 많은 말을 했을 것이다. 편지와 말은 전혀 다르다. 편지는 짧게 할 수 있지만, 말은 짧게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요점식으로 짧게 말을 하면 상대방은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로마서는 비교적 짧게 바울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

 

첫째,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하고 있다. 감사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무엇을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감사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러한 선행에 대해 감사한다는 것이다.

 

로마교인들이 바울에게 무엇을 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교인들로 인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 1:8)’

 

로마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로마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인들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복음은 예루살렘이라는 작은 영토를 벗어나서 넓은 세상으로 전파되고 있었다.

 

그것은 지구 끝까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도들의 사명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그 때문에 전도를 실천하는 교인들의 노고는 감사의 대상이었다. 바울은 로마교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의 하나님이라고 특정하고 있다.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롬 1:8)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어떤 감사한 일이 생기면 누구에게 감사하고 있을까? 그것은 바울과 같이 내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어야 한다. 이런 일은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다. 평소에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는 훈련을 해야 한다. 감사한 일이 생기면 무의식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이 나와야 하고, 진정으로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일신인 하나님을 의미한다. 전지전능하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야훼 하나님을 뜻한다. 바울은 이를 ‘내 하나님’이라는 소유격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바울 개인의 소유라고 할 수 있을까? 바울만의 하나님이고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닌 것인가?

 

어떤 사람이 ‘내 아버지’라고 하면 그것은 그 아버지의 아들임을 뜻한다. 어떤 아버지에게 아들이 세 사람 있으면 그 아버지는 오직 세 아들에 대해서만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있고, 법적 지위를 가진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아버지는 될 수 없다. 설사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해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자관계가 아니라, 그냥 아버지와 같은 정도의 친밀관계가 있다는 뜻에 불과하다.

 

의붓아버지, 양아버지, 작은 아버지, 대부(godfather) 등의 다양한 용어가 혼재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라는 단어가 주는 권위, 친밀감, 부양 및 보호책임 들을 통틀어 좋은 의미에서 사용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로마서에서 바울이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직접적으로 강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보여진다.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느끼고 하나님을 절대자로 믿고, 하나님을 위해 종노릇을 자청하며 그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서약한 바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매우 담대하게 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죽은 지 1,950여년이 지난 오늘 날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만 바울이 살던 시점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 말했다가는 불경스럽게 여겨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엄격한 율법의 집행자이며 징계자이었다.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부를 수 없었으며 오직 경배의 대상이었다. 하나님을 개인이 내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바울이 이와 같이 내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무척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편지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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