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가을사랑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서기 53년경에 쓴 서신이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를 전도 여행하고 있을 당시 갈라디아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율법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율법주의자들이 참된 복음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5~16)"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고 죄의식에만 얽매이게 할 뿐이다.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인해 의롭게 된다. 율법에 의해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인간은 성령을 쫓아 바르게 살아가지 않으면, 육체의 욕망에 빠져 그 노예가 되고 만다. 성령의 뜻에 따라 자신의 육신을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죄악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갈 5:19~26)"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은 너무나 많은 죄를 짓게 된다. 음행과 더러운 것, 분쟁과 술취함, 방탕함 등이다. 이런 일을 하게 되면 의롭게 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게 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래서 육체와 함께 그 욕정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갈 6:7~10)"

 

사람은 자신이 노력하는 결과를 얻게 되어 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얻게 된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을 행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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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가을사랑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요한계시록 22:7)

 

요한계시록은 모두 2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된 상태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환상 중에 계시를 본 것을 쓴 것이다. 서기 95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의 핵심적인 주제는 이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며, 그때는 대환란이 있을 것이고, 사탄의 세력은 철저하게 궤멸되고, 그리스도가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새 세상에 들어가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쓴 시기는 로마의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박해가 최고에 달했던 때였다. 당시 도미티안 황제는 기독교에 대한 전면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로마는 기독교인들이 로마황제를 숭배하기를 거부한다는 것 때문에 기독교를 탄압했다. 이때문에 많은 기독교 사도들이 순교를 당했고, 계속되는 박해로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열성이 점차 쇠퇴함으로써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일곱 교회에 자신이 본 환상을 편지 형식으로 보내고 있다. 요한은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에 관한 예언을 하고 있다. 즉 사탄세력의 완전한 패망 - 그리스도의 최종 승리 - 성도와 교회의 영광스러운 구원 - 신천지의 도래로 이어지는 종말론적 예언을 하고 있다.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19~20)"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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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자


가을사랑



봄꽃이 만발할 때가 되었다. 오페라극장에 가서 막이 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다. 어떤 장면이 우리 앞에 그 웅대한 모습을 드러낼 지 궁금하다. 봄꽃은 인생이 결코 쓸쓸하지만은 않음을 증명한다. 시선을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전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긴 겨울의 여정 끝에 서서 우리는 봄꽃을 보고, 만지고, 그 향기를 가슴에 담으며, 삶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할 시간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하루 하루는 정해진 일상의 틀에서 굴러가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출근을 한다. 사무실에서 소정의 일을 하고, 퇴근하고 쉬다가 잠을 잔다.


무엇을 목표로 정해놓고 일을 하고 있지만, 당장 그 목표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그 사랑을 항상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면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지나간다. 자꾸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무기력해지고, 인생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하고, 활동이 위축된다. 늙는 것에 대한 걱정, 건강에 대한 근심, 생활능력의 저하에 따른 불안감이 지속적으로 늘어간다.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상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권태를 느끼기도 한다.


신앙심을 가지지만, 그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때가 많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이런 저런 일로 번민의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삶을 방황하거나 허송세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던, 지금부터는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억울하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지금까지는 정신을 차리지 않고 그냥 대충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고 살다보면, 많은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 정신을 차리지 않고 있다가 남에게 이용이나 당하고, 사기를 당해 패가망신하기도 한다. 선하게 살아가는 것과 어리석게 이용을 당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구별하지 않은 채 나쁜 사람들과 어울려 세속적인 일에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갖은 죄악만 짓고 만다. 매일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다니면서 건강도 나빠지고, 사람들과 남의 욕이나 하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상실한 채 방황하다 보면 나이만 많이 먹게 된다. 


혼자 극단의 이기적인 사고와 행동으로 폐쇄적인 삶의 반경 속에 빠져 있다가 외로움을 느끼고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욕정의 노예가 되어 섹스에 탐닉하고 바람이나 피다가 추한 인생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요행만 바라고 있다가 낙오자가 되어 비참한 환경에 처한다.


지금 이 시간 그래서 조용히 눈을 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던 사도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베드로전서 4:7)"


어떻게 해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가?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을 정확하게 돌아보고,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나태하지 않고, 열심히 살되 올바르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혼자 머릿속으로 생각해서는 올바른 해답을 찾기 어렵다. 기도를 통해 그때그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한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쫓으라(베드로전서 3:10~11)"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귀한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사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상태에서 귀한 목숨을 얻었다. 건강한 신체를 타고 났고, 좋은 두뇌를 선물로 받았다. 그야말로 공짜로 몸과 정신, 영혼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공짜로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받은 선물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불평을 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저 감사하게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그 선물을 잘 유지하고 관리하며 그것을 토대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느냐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을 잘 다스려야 한다.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세속적인 유혹에 빠지고, 인간의 육체의 정욕에 이끌려 노예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制馭)하라(베드로전서 2:1)"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가 먹는 것에 욕심을 내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체중이 불었을 때, 다시 체중을 줄이는 것은 말이 쉽지 결코 간단치 않다. 대개는 그런 상태로 평생을 보내고 만다. 아주 독하게 마음먹고 결심을 하고 노력을 하지 않으면 육체의 정욕을 억누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베드로전서 2"19)" 살다 보면 우리는 예상치 못한 시련과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낙담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슬픔을 견딜 수 없고,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은 개인의 불행과 슬픔을 위로해주는 것같이 보여도 잠시뿐이고, 곧 자신의 일로 돌아간다. 진정한 위로를 해주는 사람은 없다. 위로를 해준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남의 불행을 속으로 고소해하기도 한다. 사람은 그래서 믿을 존재가 되지 못하고, 사람을 믿고 살면 항상 실망하고 서운함 감정을 느끼기를 반복하게 된다.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뜻한 바가 이루어지지 않고 낙담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깊은 뜻을 상고하며 슬픔을 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최선이며 다른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4:2)"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우리는 강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남은 인생을 강하고, 굳건한 터로 인도하실 것임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베드로전서 5:10)“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태복음 6:28~29)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한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태복음 7:34)" 아무런 걱정과 근심을 하지 말고, 봄꽃을 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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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불안

 

가을사랑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생을 매우 어려운 과정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인생을 자신만이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처럼 고민하고, 고통스럽게 생각하면서 혼자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헤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인생을 혼자만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평범하게 살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그에 맞추어 살아가려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첫번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정말 힘이 들게 됩니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개똥철학을 만들어 거기에 빠져들고, 살아가기 위한 노력은 열심히 하지 않고, 혼자서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비난하며 세상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봄이 와도 좋지 않고, 아무리 많은 것을 손에 쥐어도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앙심을 가져도 이단에 빠지거나, 지나치게 종교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극도의 죄의식에 빠지고, 불안과 고통을 스스로 극대화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특별한 해결방법을 찾는 것도 아닙니다. 혼자만 옳다고 생각하는 독선에 빠져 결과적으로 개인적인 오만함과 교만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인간이기에 말과 행동을 일치시킬 수는 없어 결국 위선자로 전락할 위험성도 많습니다.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생사병로의 고통을 이야기하며 살아갑니다. 죄와 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도 못합니다. 창조적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말과 공상으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첫째로 겸손해야 합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나봤자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유한성을 스스로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없고, 누구나 개인적으로 많은 약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혼자서 건강하고, 부와 명예를 걸머지고 몇백년을 살것처럼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둘째,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책임과 의무를 다 해야 합니다. 가장이 되면 가장으로서 할 일이 많습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가족들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해야 합니다. 사회에서 직장이나 조직에서 책임을 맡으면 그 책임 역시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을 다 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고 맙니다. 지나치게 이론적으로 공상적인 환상에 빠져 세상을 바라보고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으면 곤란합니다.

 

셋째,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세상을 살아가면 곧 권태에 빠지고 낙담하고 실망하게 됩니다. 나름대로 크든 작든 목표를 세워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넷째, 마음의 평안을 가져야 합니다. 외로움을 극복하고 삶에 있어서 불안감과 두려움을 떨쳐내야 합니다. 불확실성이 많고 위험한 세상에서 불안한 마음을 없애고 평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불안감, 외로움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기고 당신에게 의지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창세기 28:15)" 하나님께서 피곤하고 지친 야곱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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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방법


가을사랑



우리의 삶은 유한하다. 인간은 누구나 100세를 넘기기 어렵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서 수명이 연장되었다고 하지만, 보통 80살까지 살면 많이 살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 이상을 사는 경우는 드물며, 산다고 해도 활동을 제대로 하기는 어렵다. 그렇지 않은 예외적인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80살 정도면 충분히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주 늙기 전까지는 절대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늙고 병이 들기 전에는 죽음을 잊어버리고 산다. 애써 무관심하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의 죽음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무시하고 지낸다.


우리는 누구나 유한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더군다나 확정적인 여명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전혀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언젠가는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인생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면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건강도 나빠지고, 자신을 지키지도 못하고, 가정도 흔들거리게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기게 되고, 스스로 왜 살았는지 회의가 들게 된다.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서 냉철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남아 있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며, 왜 살아가는 것인가? 어디에 가치를 두어야 하는가?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사상도 있고, 철학도 있다. 법도 있고 윤리도 있다. 그러나 자칫 잘못 생각하면 헤어날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아무도 명확하게 해답을 내릴 수도 없고, 과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운명에 대한 해법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에는 동의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동물과 마찬가지로 그냥 태어났다가 죽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너무 비참하다.


우리의 삶에는 보이지 않는 창조자가 있고, 우리를 보호해주고 인도해주는 그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보살핌이라고 믿는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베드로후서 1:2~4)’


우리는 그것을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체험으로 입증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단지 믿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우리는 그 보살핌 안에서 우리가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9:8)’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단지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매우 이기적이고, 매우 동물적이고, 매우 신경말초적인 향락주의자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또한 어떤 일도 나중에는 권태로움을 느끼게 되며, 세상 일이란 하늘 아래 다 그렇고 그런 것이어서 특별히 새로운 것이나 더 이상 우리에게 효용을 느끼게 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바로 그런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최대한 사용해서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다. 현재 처해진 환경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각자의 입장에서 모두 다르다. 중요한 것은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놓고 많은 시간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충 생각나는 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자신의 세속적인 욕심을 억누르고 무엇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영적으로 깨끗하게 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謹愼)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 1:13~16)’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이때 영적인 지도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의 운명은 매우 불확실하다.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른다. 자신의 앞날에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의 불확실성을 놓고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궁금하다고 해서 점을 치는 것도 온당치 못하다. 그냥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8~9)’


우리에게 앞으로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을 계산해 보고, 하루하루를 보다 알차게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세기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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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flavor of life) 


가을사랑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하면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소망을 품고,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며, 아름다운 삶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다.


그런 삶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삶에 있어서 명확한 지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삶의 방향과 지표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혼자만의 철학이나 도덕적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일 뿐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고, 주관적인 아집과 독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절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모든 것을 맡긴 채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십계명과 6백여개에 가까운 율법을 부여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우리에게는 좋은 미래가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무한한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가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람,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13).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에베소서 5:2)‘


문제는 우리가 실천하는 것이다. 말로만 이야기하고 있어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현실적으로 우리에게는 제한된 시간과 에너지가 있을 뿐이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어도 실천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에베소서 5:8~9)‘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 믿음에 기초한 현실적인 행동과 실천이 중요한 것이다.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데살로니가전서 4:1)‘


의롭게 산다고 하면서 실제로 의로운 행동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열심히 산다고 하면서 게으름을 피는 경우가 많다.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고 굳게 마음을 먹지만 계속해서 나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건강을 지키겠다고 말로는 계속하지만,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고 몸에 나쁜 음식을 많이 먹고 있다. 술 담배를 끊지 않고 계속하면서 건강을 걱정하고 있다.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고 하면서 조직에서 승진하지 못하면 속상해하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간음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을 읽으면서도 마음으로 간음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들의 말은 그래서 믿을 것이 못된다. 말은 그저 입술을 벌려 목젖을 떨어서 내는 음에 불과하다. 가만히 앉아서 수 없이 많은 말을 할 수 있다. 그 말은 아무런 실천력을 갖지 못한다. 허풍이나 과장, 거짓말, 근거 없는 말일 수 있다. 말로 기도를 해도 마찬가지다.


그냥 말로 기도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고 있으면 안 된다. 기도를 하되 그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로새서 3:23~24)‘


그것이 인간의 의무다. 하나님께 바라기만 하고, 자신의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안 된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언 6:9~10)‘


우리는 스스로 각성을 할 필요가 있다. 지나간 과거는 다 잊어버리고, 현재 지금 이 시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꿈은 무엇인가? 꿈이 있는가, 없는가? 어떤 꿈을 꾸어야 하는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다.


현실적인 환경이 어려워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실존이 내뿜을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 있는 한 소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살아 있는 한 꿈과 소망을 가져야 한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야 한다. 아니 연구를 해야 한다.


꿈을 이루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래야 꿈이 이루어진다. 설사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 과정이 중요하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7)‘


그리고 인생은 아름다워야 한다. 아름다운 꽃과 같은 모습과 향기를 가져야 한다. 자신에게만 고유한 아름다움과 향내가 필요하다. 그 꽃이 작던 크던, 좋은 정원에 있던, 아프리카의 초원에 있던, 우리는 그 꽃의 개별적인 주인이다. 인생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성공 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


아무리 성공하고 출세를 하고 부를 많이 쌓은 사람이라도 인생이 추한 경우가 많다. 추악한 마음으로 남에게 못할 일이나 평생하고 수전노로 많은 돈을 남겨도 그 돈은 의미 없이 사라지고 만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 부패한 관리가 되던가, 부도덕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마는 경우가 많다.

 

인생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성경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운 향기를 찾아 자신의 영혼에 부어야 한다. 그래야 그 영혼은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법이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린도후서 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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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망


가을사랑



성경은 여러 가지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책은 저자가 다릅니다. 그 책들은 각각 쓰여진 시대도 다르고 배경도 다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통해 읽혀지는 하나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는 존재도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직접 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영을 상실했습니다. 영이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타락하여 영을 상실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인간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한 사람씩 상대하셨습니다. 아담이 처음 상대였고, 노아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 등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은 구약 전체에 걸쳐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은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직접 만지기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계속 방황하면서 죄와 악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중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몸소 실천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아 탄생한 제2의 아담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무 흠이 없고 거룩함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 주시고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진리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사건으로 인간은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을 회복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직접 인간에게 나타나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영을 되찾았고, 그 영의 기능이 회복되었으므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구원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보여주는 요점입니다. 이런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기독교인이고, 믿지 않으면 비기독교인인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해도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때때로 절망하고 힘들어합니다.


24시간 하나님께 매달려 있어야 하는데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삶의 무게를 느끼면 다시 세속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너무나 절박한 현실 앞에서 믿음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을 때 포기하거나 회의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살다 보면 쉽게 타락하고, 삶에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게 되고, 죽을 때 후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혼자 잘 났다고 큰소리치면서 살아보았자 인생은 길어야 80살입니다. 온갖 고생을 다 하고 힘들게 산 의미가 무엇이었나 하는 회의가 들면 그 인생을 아주 비참하고 불행한 인생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도 하나님을 믿고 삶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올바르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항상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시고, 나를 이끌어주시므로 나는 죄에 빠지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는 노력을 하고, 그럼으로써 건강하고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별로 표가 나지 않아도 믿음이 깊어지고, 세월이 흐르면 그 차이는 엄청난 차이가 됩니다. 믿음이 없이 방탕하고 인간적인 권모와 술수로 이기적인 욕망의 노예가 되어 돈이나 벌고 출세나 하고 정욕이나 충족시키며 살던 사람은 무의미한 욕심꾸러기, 발정기의 동물, 이기적이고 차가운 수전노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아도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오랫동안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질이 하나님께로부터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안에서 우리가 사랑을 받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도 사랑으로 충만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기본 사항입니다. 새해에도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축복을 주실 것을 기대하는 소망과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더 큰 사랑으로 감싸서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날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편 118:24)


**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시 17:8)


**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여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이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 40:2~3)


**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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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과 양심의 가책

 

가을사랑

 

 

많은 사람들이 항상 죄의식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경우 지나치게 심한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같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법과 명령을 다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양심에 반하는 말과 행동을 했다는 죄책감에도 빠져 있다.

 

그뿐 아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은 단순힌 법과 명령의 준수에서 더 나아가 선한 일을 해야 하고, 십일조를 헌금해야 하며, 전도를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제대로 하려면 생업은 포기해야 한다. 실제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도사가 되거나 신학을 공부하거나 목회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평신도의 입장에서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신앙심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커다란 고민이 있다. 이 문제는 기독교가 탄생한 후 지금까지 2천년이 넘도록 신학자들이 연구해왔고, 신자들이 고통스럽게 생각했던 신학적 문제이기도 하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3~14)

 

율법주의와 은혜주의의 대립도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신약과 구약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느냐 하는 차이도 여기에 있다. 목회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너무 따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법이 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은 첫번째 법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법은 모세와 같은 영적 지도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보충되었다. 아주 복잡한 율법으로서의 체계를 갖추었다.

 

이러한 율법을 어기면 하나님에 대한 불복종, 불충성으로 간주되어 가혹한 징벌을 받았다. 종교지도자들은 오직 율법체계를 수호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만 율법을 어겨도 별다른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그냥 처벌하는데 급급했다. 간통을 하면 돌로 쳐죽이고, 안식일을 어겨도 목숨을 빼앗았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 3:4~8)

 

그러나 인간은 애당초 불완전한 존재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율법과 명령을 다 지킬 수는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율법의 준수를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느냐하는 문제가 있다. 아무리 잘 지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죄의식을 갖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부정하면서까지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2)

 

그것이 문제다. 게다가 현대사회에서는 수많은 사회법이 존재한다. 법치국가에서는 끊임없이 법과 제도를 만들어 나간다. 일반 사람들이 알지 모르는 법도 계속해서 양산된다. 법이 넘쳐나는 시대다. 법률가 조차 이런 법이 있었는가 하는 때가 많을 정도다. 법은 대단히 일방적이다.

 

국회에서 일방적으로 제정해 놓고 국민들이 알던 모르던 지키라고 한다. 위반했을 때에는 무조건 처벌한다. 위반에 따르는 제재를 가한다. 법을 몰랐다고 하는 법의 무지는 법적으로 항변사유가 되지 못한다.

 

형법에서도 자신의 법위반행위에 대해 위법하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 그에 대한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 한하여 위법성을 조각할 뿐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리 법을 몰랐다고 주장을 해도 그냥 처벌될 뿐이다.

 

법을 많이 공부하면 법의 내용을 알 수 있게 되므로 자신의 행위가 법에 위반되는지를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게 된다. 법률가와 비법률가의 차이가 그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법률가는 법을 알면서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모든 법을 다 지킬 수는 없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법을 위반하는 것을 모른채 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모든 교통법규, 모든 행정법규를 다 지키면서 사회생활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복잡한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하다못해 과속, 신호위반이라도 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법에서는 중죄와 경죄를 구별하고, 범죄에 있어서도 구성요건해당성, 위법성, 책임을 나누어 판단하여 처벌 여부를 결정한다. 그리고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위법성을 조각시키고, 책임도 인정하기 곤란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책임도 부정한다. 더 나아가 피고인에 대한 정상자료가 있으면 그러한 정상을 참작하여 재판에 반영한다.

 

그러면 성경은 어떠한가? 성경에서는 아무런 사유도 용납하지 않는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면 그 사유를 묻지 않는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쉽게 저지르게 되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에서 더 큰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결국 범죄를 사전에 방지하고, 범죄 후에도 그 범죄의 결과를 수습하려고 노력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뿐만 아니라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교만한 자세에서 낮아지게 된다.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죄책감에 빠져서만 살아갈 때 우리는 매우 경직된 노예가 되고, 비참하게 된다.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우리는 그 율법을 100% 완벽하게 지킬 수 없을 뿐 아니라, 다 지킨다고 해도 더 많은 선행을 요구하는 의인의 법까지 생각하면 질식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사건과 부활사건을 통해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의를 얻게 되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엄격한 율법주의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이것이 사랑의 법칙이다. 생명의 법칙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엄격한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얼굴에 밝은 빛이 생겨난다. 죽음의 법칙에서 생명의 법칙으로 이전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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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있는 삶

 

가을사랑

 

 

꿈(Dream)이란 우리의 잠재의식에 묻혀 있던 생각들이 잠을 잘 때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평소에 많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 꿈 속에서도 좋은 일이 있고, 나쁜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꿈은 때로 우리에게 앞날을 예시해 주기도 합니다. 과거에 겪었던 힘든 일은 두고 두고 악몽으로 나타납니다. 악몽을 꾸다가 가위에 눌리는 일도 있습니다. 자다가 잠꼬대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의식의 세계에서 현실과는 별도로 또 다른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꿈속에서 고민을 하기도 하며 어떤 일을 하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매우 복잡한 영적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꿈은 희망을 의미합니다. 앞으로의 목표를 뜻합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많은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장차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순차로 진학해서 공부를 하고 직업을 가지며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사업을 하고, 돈을 벌고, 출세하며 명예를 얻는 꿈을 가집니다.

 

그 꿈이 이루어지던 안 이루어지던 꿈을 가지고 꿈을 꾸면서 사는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꿈을 꾸면서 꿈을 이루려고 애쓰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꿈을 다 이루고 꿈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꿈을 다 이루고 죽음을 앞둔 재벌보다는 대기업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 재벌이 될 꿈을 가지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더 아름답습니다.

 

바로 꿈 속에 행복이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은 어렵고 고통스럽고,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꿈을 가지고 있는 한 그 사람은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은 오늘 보다 소중합니다. 더군다나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가치입니다.

 

내일이 있기에 우리는 살아갈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아무리 오늘 편안하고 행복하더라도 내일 불행할 것을 예견한다면 오늘의 행복은 아무런 의미들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꿈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활력소가 되고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먹어가면서 스스로 꿈을 포기합니다. 꿈꾸기를 완전히 포기합니다. 인위적인 노력으로 꿈을 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꿈, 행복한 꿈, 성공하는 꿈, 올바르게 사는 꿈을 꾸지 않습니다. 현실에 만족하고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냥 현실에 쉽게 안주하고 내일에 대해서는 특별한 계획을 가지지 않습니다.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잠을 잘 때만 쓸데없는 꿈을 많이 꾸게 됩니다. 소위 악몽에 시달리면서 살아갑니다. 좋은 이상적인 꿈을 꾸지 않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 살아온 현실에서 실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내일에 대해서도 더 이상의 기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동안 노력한 결과를 보고 자신의 실력을 낮게 평가하면서 더 이상 노력해도 아무런 성과가 없을 것으로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꿈을 포기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소멸을 뜻합니다. 꿈이 없으면 사람은 성장을 포기한 고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모든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얼굴 표정도 어둡습니다.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꿈이 있는 사람은 얼굴이 밝습니다. 지금은 고생을 해도 희망이 있기 때문에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잠언 15:13,15)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시기,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의지로 꿈을 가져야 합니다. 꿈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꿈은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꿈을 심어주지는 않습니다. 꿈의 씨앗은 오로지 자신이 혼자 구해서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꿈나무에 물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꿈나무가 무성하게 자랍니다.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꿈을 실현해 나갑니다. 꿈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상상도 못할 수확을 거두게 만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루노니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우리는 항상 꿈나무의 씨앗을 구해야 합니다. 그 씨앗은 어디에서 구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꿈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우리 마음대로 꿈의 씨앗을 심으면 그것은 악이 될 수 있고, 불행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나쁜 짓을 보고 배우면서 거기에서 꿈을 가지면 나중에 조직폭력배가 되고, 정치를 잘못 배우면 독재자, 부패한 공무원이 됩니다. 뇌물이나 받고 징역을 가게 됩니다. 연애의 꿈을 잘못 키우면 바람둥이가 되고 카사노바가 됩니다.

 

꿈의 씨앗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좋은 씨앗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시편 37:4~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저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1)

 

그 꿈을 키우기 위한 인간적인 노력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꿈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밤낮없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꿈만 꾸고 실천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늘 꿈을 꾸면서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그 꿈이 주는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꿈은 짧고 실천은 길어야 합니다. 꿈이 길고 실천이 짧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꿈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살핌이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인간이 노력을 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그 꿈은 깨지고 맙니다. 꿈을 이루려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꿈을 알리고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2)

 

오늘 우리는 꿈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꿈은 평생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눈을 뜨고 있을 때에는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꿈꾸는 능력이 감퇴했으면, 의식적으로 꿈을 종이에 적어보십시오. 그리고 그 꿈을 암기하십시오, 그러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십시오. 그러면 꿈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꿈을 꾸면서 사는 것은 행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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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과 용서(2)

 

가을사랑

 

 

일반적으로 죄의 종류에는 중한 죄와 경한 죄가 있습니다. 둘 다 죄에는 해당되지만, 그 죄를 범한 효과와 형벌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잘못은 매우 중한 것이고, 그에 대한 징벌이 무거울 것입니다.

 

어떤 잘못은 그렇게 중한 것도 아니고, 그에 대한 징벌도 가벼울 것입니다. 이런 구별이 없이 무조건 자신의 잘못을 크고 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만날 면목도 없다고 비관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잘못은 잘못이므로 우리는 가급적 잘못을 하지 않고, 그 반대의 일, 옳은 일을 하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끊임없이 하고 살아가는 만큼,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도 관대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관점과 기준에서 엄격하게 평가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상대적인 관점과 기준에서 완화하여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이며 모순입니다. 그리고 잘못입니다.

 

그러한 잘못은 매우 중대한 죄입니다. 선과 악을 자의로 구별하는 잘못이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서 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고, 선과 악을 제멋대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나누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과 남의 잘못은 똑 같은 인간의 잘못입니다.

 

똑 같은 인간의 잘못은 하나님의 법과 명령, 판단기준에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법이 아닌 인간의 주관적 법으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중대한 잘못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잘못을 동일한 가치판단의 기준인 하나님의 법으로 자신의 잘못과 타인의 잘못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잘못이며 위선적인 행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선거과정에서 정치인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을 보면 그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TV토론을 보면 항상 그렇습니다. 언론에서 사회현상을 비판하는 것을 보면 더욱 두드러집니다. 부부 사이도 그렇습니다. 서로의 잘못만을 보며, 자신이 어떤 잘못을 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사회생활에서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모든 거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소인과 피고소인의 입장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사소송에서도 원고와 피고의 입장에서는 항상 다른 논리로 자기 주장만을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진실은 왜곡되고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한 가혹하고 공격적인 비판과 정죄는 결국 언젠가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될 때 자신에게 똑 같은 정도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도 그 잘못이 자신의 잘못이라면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가급적 용서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특별히 관대한 조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따른 공평한 조치이고 합당한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란 속이 좁고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간의 나쁜 속성에서 자아를 해방시켜, 마음이 넓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잘못을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간절하게 타이르고 계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태복음 5:38~42)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와 같이 말씀하신 이유는 한 없는 인간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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