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과 용서(1)


가을사랑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 잘못은 몰라서 저지르는 경우도 있고, 알면서 고의적으로 저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죄성과 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 때에는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들이 나쁜 일을 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타이르고 가르칩니다. 때로는 매를 대기도 하고, 도덕책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런 교육을 받아도 사람은 조금만 방심하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부도덕한 일을 하고, 법을 위반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상당히 훈련된 사람만이 올바르게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면 이런 훈계를 하는 사람도 없어집니다. 자기 멋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혼자서 개똥철학을 세워 가지고 잘 났다고 생각하며 잘못 살아갑니다.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부모님께 폭언을 하거나 손찌검을 하는 패륜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단지 국가에서 정한 실정법만이 아닙니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입니다. 법과 도덕과 양심이 우리로 하여금 지켜야 할 일, 해야 할 일, 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일을 정해 놓고 있지만 이것을 모두 지키고 실천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 연약하고 의지는 약하고 현실적인 여건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법적 의무와 도덕적 책임을 다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하며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위선자이거나 어리석은 경우일 것입니다.

 

종교의 율법은 우리에게 더욱 무거운 의무와 책임을 부과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율법을 다 지키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우리에게 무한의 복종과 무한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4시간 365일 긴장하면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몸소 실천하셨던 고귀하고 높은 도덕적 행동과 종교적 실천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높은 수준의 믿음과 행동은 사실 연약한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리이며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인간은 마치 중대한 죄인인 것처럼 극심한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우울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유한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을 망각한 채, 아니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마치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절대전능한 존재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사항을 다 준수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하고 불완전하고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전제 하에서 모든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이며 항상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고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율법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 궤도에서 이탈하여 자칫 잘못하면 수렁에 빠지거나 악의 구렁텅이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주의하며 살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살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앞으로는 그런 똑 같은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회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주관적인 판단으로 잘못의 정도를 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추상적이며 일반적일 경우가 많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올바른 것인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는 무엇이 잘못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명확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무슨 말씀을 위반했는지 어떻게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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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가을사랑

 


사람에게는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평안이 모든 행복의 출발입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그 무엇을 하더라도 불행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평안하게 되고,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행복을 제대로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시편 5:12)


그러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행복의 조건은 마음을 정리하고, 그 마음을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마음으로 하여금 그 결과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해질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입니다. 행복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내려 주실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충분히 받아들이는 노력을 해야 하며, 그 복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뜯어 고쳐야 합니다. 현재의 상태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않습니다.


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복을 주지,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정하며 욕되게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사와 복과 화를 주관하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절대전능하신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빌게 되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막을 연못으로 만드시며, 마른 땅을 물이 솟는 샘으로 만드시고, 굶주린 사람들로 거기에 살게 하시어, 그들이 거기에다 사람 사는 성읍을 세우게 하시고, 밭에 씨를 뿌리며 포도원을 일구어서,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또 그들에게 복을 주시어, 그들이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가축이 줄어들지 않게 하신다”(시편 107:35~38)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한 전제로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모든 복을 하나님으로부터만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알고 보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 그분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겠는가?”(전도서 2:24~25)


자기 자신이 잘났다고 큰 소리치고, 하나님을 부정하며, 인간의 힘으로 잘 살아보겠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 교만한 마음은 언젠가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게 됩니다. 잘 나가던 오만한 사람이 하루 아침에 몰락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라.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잠언 27:1)


내가 편히 지낼 때에는 이제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겠지하였지만, 아,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 주시던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시자마자 나는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시편 30:6~7)


둘째, 복을 받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초적인 달란트를 살려 최대한 노력을 하시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노려하지 않고 거저 먹으려고 하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가난하지 않으려면 잠을 좋아하지 말고, 먹거리를 풍족히 얻으려면 깨어 있으라(잠언 29:13)” “게으른 사람아, 언제까지 누워있으려느냐? 언제 잠에서 깨어 일어나려느냐? 조금만 더 자야지, 조금만 더 눈을 붙여야지, 조금만 더 팔을 베고 누워 있어야지 하면 네게 가난이 강도처럼 들이닥치고, 빈곤이 방패로 무장한 용사처럼 달려들 것이다”(잠언 6:9~11)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바랍니다. 그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큰 방향은 하나님께서 잡아 주시지만, 구체적으로 일을 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달란트를 가지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또한 죄악입니다. 그 좋은 달란트를 게으름 때문에 그냥 썩히는 것도 죄악입니다.


좋은 머리, 건강한 육체, 좋은 성격을 주셨는데, 그것을 공부하거나 일을 하거나 재능을 살리는 데 사용하지 않고, 놀고 술 마시고 섹스나 하고 게임이나 하는 일에 소모하는 것은 인간을 만드시고 그에게 건강과 재능을 부여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가장 최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커다란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인간은 조금 성공하면 아주 교만해집니다. 모든 것이 자신이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으로 떠듭니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아도 속 마음으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해도 속으로는 아주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주변에서 도와 준 사람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생활태도가 180도 달라집니다. 고급 저택에 살아야 하고, 고급 외제차를 타야 합니다. 명품 옷을 입어야 하고 다이아몬드 장식을 해야 합니다. 비행기도 1등급을 타야 하고, 최상급 호텔에서 숙박을 해야 합니다. 예쁜 여자를 탐내기도 하고, 사회적 명예를 모두 손에 넣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십니다. 두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판단하십니다. 자신의 모든 성공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자신의 성공을 모두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더 큰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잊지말아라”(시편 103:2)

 

인간에게 행복은 매우 소중한 가치입니다. 우리는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고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불행과 저주는 마귀와 사탄의 짓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사탄의 장난으로 우리가 때로 불행에 빠지는 경우가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대개 우리의 불행은 우리의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방심하고 부주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전에 주의를 충분하게 하지 않아 불의의 사고를 당합니다. 위험한 등산을 갔다가 빙벽에서 미끄러져 사고를 당합니다. 불조심을 제대로 하지 않아 화재가 발생합니다. 방범을 제대로 하지 않아 도둑맞고 강도를 당합니다.


남자를 믿고 으슥한 곳에 따라 갔다가 부녀자는 강간을 당하게 됩니다. 쉽게 돈을 벌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사기를 당해 망하게 됩니다. 공부를 하지 않고 성적을 잘 받으려고 컨닝을 하다가 제적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무원이 뇌물을 받아 먹고 신세를 망칩니다. 경험도 없이 사업을 시작했다가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입니다. 충분한 고려 없이 정치브로커 말만 듣고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다가 돈만 날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결국 우리는 많은 불행한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무 잘못도 없이 순전히 다른 사람의 악행으로 불행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귀와 사탄이 그 사람을 통해 악을 행하는 것이므로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불행을 막고 저주를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을 누리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복을 받을 마음의 자세를 하고, 주시는 축복을 받기 위한 최선의 인간적인 노력을 하고, 그 축복에 대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이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서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이다”(시편 1:1~3)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이 땅이 오곡백과를 냈으니,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니, 땅 끝까지 온 누리는 하나님을 경외하여라”(시편 6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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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위기


가을사랑

 


50살이 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위기상황을 맞게 된다. 위기의 정도는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우선 심리적으로 약해진다.


그동안 왕성하게 사회생활을 했던 에너지가 떨어지고, 사회적인 지위가 불안해진다. 돈을 벌 수 있는 능력도 저하된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것이다.


직장에서 자신의 영향력도 떨어지고, 언제 그만두어야 할지 모른다. 조직에서 밀려나고, 개인 사업을 해도 수익이 떨어진다. 정년은 가까워오고, 정년을 다 채울지도 미지수다. 신체적으로도 정력이 크게 감퇴하며, 각종 질병을 걱정해야 할 나이다. 


아무리 건강에 신경을 써도 나이는 어쩌지 못한다. 자녀들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뼈가 빠졌지만, 그 공로도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자식들은 항상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남들은 다 잘 살고 자식들도 다 잘되는 것 같은데 혼자서만 그렇지 못한 것 같아 비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때 잘못하면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많은 스트레스를 받다 보면 신경이 약해져서 불면증에 걸리게 되고, 몸은 허약해진다. 늘 기분이 우울하고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별로 없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제대로 승리하지 못하고 낙오자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어 울적해진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세상에는 더 열심히 독하게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고, 행운의 여신은 항상 공평한 것이 아니다. 학교 다닐 때 자신보다 공부를 못해 무시했던 사람들이 사회에 나오면 더 똑똑하게 자기 앞가림을 하고 출세하며 성공한다. 더 큰 부를 누리고 더 좋은 곳으로 결혼을 해서 떵떵거리고 사는 것이 현실이다. 학교 성적의 서열이 사회에서 뒤바뀌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승복을 못하고 있으면 답답한 우등생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아내조차 내가 살아 숨쉬는 것을 싫어하고, 친형제들도 나를 역겨워한다. 어린 것들까지도 나를 무시하며, 내가 일어나기만 하면 나를 구박한다. 친한 친구도 모두 나를 꺼리며, 내가 사랑하던 이들도 내게서 등을 돌린다. 나는 피골이 상접하여 뼈만 앙상하게 드러나고, 잇몸으로 겨우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욥기 19:17~20)


이렇게 추락하는 상황에서 자꾸 움추리고 나약한 마음을 가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이것저것 해보지만 세상 천지에 나이 들면 특별한 것도 없어 보이고, 웬만한 일은 다 해보았기 때문에 또 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친구를 만나도 그렇고, 술을 마셔도 그렇다. 나이트클럽에 가도 예전처럼 흥이 나지 않는다. 사실 나이 들어 나이트클럽이나 카바레에 가서 흥을 내기도 좀 멋적은 일이다. 이럴 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것이 인생의 위기인 것이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자살할 생각도 하게 될 위험이 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이런 사람들은 죽기를 기다려도 죽음이 찾아와 주지 않는다”(욥기 3:20~21).


성경에서 욥이 자신의 고난을 힘들어 하면서 한 말이다. 세상에는 욥처럼 힘든 일을 당해 고통을 받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자살사이트도 많이 생겼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엄청나다.

 

비유를 들면 이렇다. 인생은 바다에서 출항하는 배와 같다. 인생의 초기에는 새 배에 기름을 가득 싣고 출발한다. 먼 바다를 향해, 많은 꿈을 가지고 호기심에 들떠 낭만적인 출발을 시작한다.


세상을 처음 배워가면서 앞으로 나가는 것은 그 자체로 재미있다. 힘이 들지만 새로운 것을 많이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앞으로 나가 목적지에 2/3 정도 다가갔다고 하자. 상황은 어떻게 변할까?


동일한 인생의 여정을 비슷하게 걸어왔기 때문에 새로운 맛은 없다. 똑 같은 파도를 거슬러 힘들게 왔을 뿐이다. 그런데 배는 이제 50년이나 사용했기 때문에 녹슬고, 엔진도 낡았다.


잦은 고장이 나고 그렇다고 새 엔진으로 대체할 방법도 없다. 한번 부착한 엔진은 끝까지 사용해야 한다. 배에는 기름도 많지 않다. 거의 다 떨어져 간다. 바다에서 멀리 나갔기 때문에 파도는 더욱 거세다. 이미 많은 배들은 더 앞으로 나갔거나 중간에 침몰한 상태다. 갈수록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뒤를 돌아보면 수많은 젊은이들이 싱싱한 몸으로 새 배를 타고 새 엔진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빠른 속도로 뒤쫓아 오고 있다. 낡은 배의 선장은 어떤 느낌일까? 극도의 외로움, 불안, 허망함을 느끼게 된다.


“기운도 없어지고 살 날도 얼마 남지 않고, 무덤이 나를 기다리고 있구나. 조롱하는 무리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으니, 그들이 얼마나 심하게 나를 조롱하는지를 내가 똑똑히 볼 수 있다”(욥기 17:1~2).


그렇다고 앞날이 어떤지 전혀 예측할 수도 없다. 파도가 더욱 높아지기 때문에 배가 갑자기 파손될 수도 있고, 그런 고생 끝에 목적지에 도달하면 그 목적지는 과연 무엇인지 알 수도 없다. 그곳에 천국이 있다고 하지만, 아직 직접 가본 일이 없는 상태에서 말만 들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믿는다고는 하지만 확신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이때 선장은 정신적으로 우울증에 빠진다. 인생의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면 이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잠시 배를 멈추고 돌아온 길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얼마나 방황하며 흔들거리며 앞만 보고 왔던 길인가?


정확한 방향에서 얼마나 벗어나 떨어져 있는가? 다른 배들의 상태는 어떤가? 이렇게 자신의 위치와 현상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는가? 그곳을 향한 나침반은 정확하며 등대의 불빛은 밤에도 잘 보이는가?


눈을 감고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건강을 다시 챙겨야 한다. 지금까지 너무 무리했던 것은 아닌지, 몸은 결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나이 들어 나약해진 몸은 조금만 무리가 가도 탈이 난다. 그리고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렸던 것을 반성해야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것도 이제는 조절해야 한다. 노인은 바다에서 새로운 인생철학을 깨달아야 한다. 자기관리, 감정조절, 욕망의 억제, 건강유지를 위해 다시 한번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필요하다.


인생의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님께 의지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욥처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나 불평을 걷어 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가지 우리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보살핌이 없으면 단 하루라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인생길이 내가 잘 나서 그렇게 살아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셔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우리는 더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려야 한다. 배가 풍랑에 파손되지 않도록, 환한 등대의 불빛을 비춰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좌절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지나온 과거는 모두 잊어버리자.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야 한다. 그곳에서 그동안 쌓았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시작해 보자.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할 일을 찾으면 할 일이 있는 법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 보람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새로운 비전을 가슴에 품고 다시 넓은 바다를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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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옷자락

 

가을사랑

 

 

어떤 여인이 12년 동안이나 중병을 앓아왔다. 병이란 육체를 고통스럽게 하고 정신을 짓누른다. 그것도 중한 병에 걸려 있으면 몸과 마음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며 항상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약은 다 써보았고, 용하다는 의사는 다 만나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 병을 고쳐줄 수는 없었다. 이른바 불치병이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님 몰래 뒤로 다가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오랜 세월 자신을 억눌러왔던 혈루병이 완치되었고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마가복음 제5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예수의 옷에 손을 대니 병이 나았다.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마가복음 5:25~34).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불안하고 위험하다. 혼자 올바른 방향을 찾아 걸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방황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어린 아이가 어떻게 혼자 독립해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어린 아이에게는 부모가 있어야 하고, 그가 독립해서 생존할 수 있을 때까지 그는 보호를 받아야 한다.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고 내팽겨쳐지면 그는 생명을 잃게 된다. 우리는 단순한 육체로 살아갈 수는 없다. 정신과 영혼이 있어야 살 수 있다.

 

그런 영혼과 정신은 우리가 나이를 먹어도 누군가 우리를 인도하고 이끌어주고 보호해 주지 않으면 제대로 유지될 수 없다. 제대로 자라기 어렵다. 혼자의 힘으로, 혼자의 지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자칫 개똥철학을 가지고 그릇된 방향으로 빠지기 쉬운 것이다.

 

독학으로 공부한다는 것이 그래서 어렵고 그릇된 편견을 가지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다. 머리가 좋고 똑똑한 사람들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무런 신앙도 없이 혼자 잘 났다고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자신만만하게 살아간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갖는다.

 

거기에서 승승장구한다. 출세하고 돈도 벌고 결혼도 잘 하고 건강하게 지낸다. 세상의 온갖 행복을 누리고 남부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나중에 시간이 가면 예상치 못한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된다. 그때 그는 좌절하고 낙담하지만 어디에 의지할 곳이 없어 불행하게 된다.

 

그런 시련을 겪지 않아도 죽을 때 돌이켜 보면 너무나 잘못한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너무 잘 나서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고 혼자 잘 먹고 잘 살았다는 후회를 하게 된다.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 죄를 많이 짓고 남에게 사랑을 베푼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알게 모르게 죄를 많이 지은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다. 자칫 그런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되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바쁘게 살아야 했는지 조차를 모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 영혼은 인간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언제나 악에 빠질 수 있고, 교만해지고 사악해지며, 잔인한 성향을 보일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은 그 영혼의 빛이 되고, 등대가 되며, 사표가 될 수 있는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 존재가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들고 살아가는 것이 망망대해에서 표류하지 않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길이다. 그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평생 혼자서 자신만을 믿고 의지하며, 혼자 고군분투하겠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것이다.

 

혼자 도를 터득한다고 하는 것도 비효율적이다. 벌써 2천년이 넘게 수많은 선지자들이 평생을 바쳐 깨우치고 연구해서 갈고 닦아놓은 것이 기독교다. 기독교는 이미 충분히 검증되었다. 통계적으로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악에 빠지지 않고 건전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떨까? 우리는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추상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회의가 들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성령 역시 느낄 수만 있지 직접 성령을 보거나 손에 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셨다. 그래서 우리가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옷자락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지만 다시 부활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때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가 원하면 기도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우리는 24시간 예수님을 부를 수 있다. 주님이라고 부른 다음 기도를 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러면 우리는 연약한 우리를 주님께 의탁하고 모든 것을 맡기면 된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무엇을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현재의 고난을 어떻게 당해야 할지?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 된다.

 

그러면 주님께서 응답해 주신다.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를 격려해 주신다. 우리가 어렸을 때 모든 문제를 부모님께 맡기고 해결해 주시기를 바랬듯이 똑 같은 이치로 부모님들이 계시지 않으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고 우리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신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든든해진다. 배짱이 생긴다. 그 믿음과 배짱으로 세상을 살면 자신감이 넘치고 예수님의 뜻을 확인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면 돌다리도 두드리며 강을 건너는 것처럼 자신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만사에 형통하고 시련에 빠지지 않으며 악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배우는 도덕이나 윤리만으로 세상을 살 수는 없다. 도덕 교사가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 자체가 죄를 짓고 부도덕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완전하지 못한 사람이 위선적으로 가르치는 도덕이나 훈계를 제대로 따르기는 어렵다. 나이가 들면 그것 자체가 불완전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 법이고 도덕이며 상황논리에 따라 정의도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법을 배우고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은 알파요 오메가다. 처음부터 영원까지 이 세상을 주관하시며 참된 진리만을 선포하고 계신다.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리가 있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고난을 당할 때 의지할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에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9~10).

 

주님의 옷자락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된다. 생명을 건지는 유일한 밧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뒤에서 옷자락을 붙잡아야 한다. 건방지게 주님의 발을 밟아서는 안 된다. 주님을 사랑하되 주님을 경건한 마음으로 따라야 한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다. 우리에게 영원한 진리를 깨우쳐 주시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신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로마서 1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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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조심

 

가을사랑

 

 

세상을 살아가면서 조심해야 할 것이 말이다. 말이란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회생활을 말로 이루어진다. 모든 의사표시는 대화로 시작되며, 말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글보다는 말이 일차적으로 행해진다. 싸움을 할 때도 먼저 말로 싸우다가 주먹으로 싸우게 되는 것이다. 국가 간에 전쟁을 할 때에도 먼저 말로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들어간다.

 

이처럼 말은 인간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한다.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여과없이 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게 되고, 말을 한 사람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몇 대 때런 것보다는 말로 상처를 준 것이 상대방에게 더 큰 자극을 주고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것이다.

 

말을 심하게 하면 상대방은 그 말로 인해 두고두고 씻어지지 않는 상처를 받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지만 상대방이 그 잘못을 하나씩 후벼파면서 괴롭히면 그의 말과 그의 매서운 눈빛은 평생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성격이 나쁜 사람은 이와 같이 말로써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이다.

 

말을 하는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내뱉어도 듣는 사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된다. 돌이켜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이 남으로부터 들은 말 가운데 가장 기분 나쁘고 심한 상처를 받았던 말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말들이 자신에게 아픈 상처로 남아 있는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현재 하고자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상처를 줄 것인지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인격에 어울리지 않는 품위 없는 말은 인격을 낮추게 된다. 저속한 말을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평소 존경하던 사람이 말 한마디를 잘못해서 그 존경심을 모두 무너뜨리기도 한다.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말도 그렇다. 남을 무조건 나쁘게 말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입만 열면 남을 헐뜯고 욕하고 비방한다. 결코 다른 사람에 대해 좋게 말하는 적이 없다. 앉으면 남의 이야기를 꺼내고, 그 사람에 대한 나쁜 점, 부족한 점만을 강조한다.

 

처음에는 그런 말을 재미 있어 듣고 있지만, 나중에는 그처럼 남의 말을 나쁘게 하는 사람을 좋지 않게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또 우리의 말을 다른 사람에게 나쁘게 할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급적 대화 중에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별로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이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의 말이 나오면 가급적 좋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좋다. 말을 할 때 가급적 솔직하게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곧 습관이 된다. 거짓말을 그 자체가 나쁜 일이다.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거짓말은 선의라도 해서는 안 된다.

 

특히 남을 저주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 저주는 곧 자신에게 되돌아올 위험성이 있다. 말은 한번 하면 주어담을 수 없다. 화살이 시위를 떠난 것처럼 그 말은 목적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간다. 그 말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말을 한 사람에게 있다. 오늘부터 우리는 입술을 벌여 하는 말의 위력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야고보서 3:8~12).

 

좋은 말을 하는 습관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마음에 신앙심이 가득 차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에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나쁜 말을 하지 않게 된다. 아무리 화가 나도 참을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의 욕을 하고 저주의 말을 하는 것은 사단의 짓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한일서 3:8~10).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라(잠언 3:29~30)". 공연히 잘 있는 사람을 모함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악한 일을 하지 않는 이상 공연히 말로써 다투지 말아야 한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오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잠언 10:19~21)".  말은 가급적 적게 하는 것이 좋다. 말을 많이 하면 실없어 보인다. 그리고 허점이 드러난다. 말을 자제하는 것이 금이다. 자신의 입술을 가급적 눌러야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도 패역한 혀는 베임을 당할 것이니라.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잠언 10:31~32)". 혀를 잘못 놀리면 커다란 화를 당하게 된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언 11:13)". 남의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언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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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와 오메가


가을사랑

 


인생이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단 1회의 시간입니다. 인생이란 자신에게 유일하며 고유한 생명체로서 자기 마음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사람이 태어난 환경은 어쩔 수 없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나쁜 환경에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화가나 조각가가 작품을 만들 때 그 소재로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종이를 소재로 할 수도 있고, 찰흙을 소재로 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선택된 소재를 가지고 나름대로 최선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소재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그 소재 자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소재는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므로 그것을 탓하거나 불만을 표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불평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소재를 가지고 제한된 시간에 어떻게 하면 최선을 다해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것은 바로 소재를 주신 하나님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책무요 사명인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작품은 단시간 내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 동안 혼자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중간에 작품을 포기하고 소재를 부셔버릴 수도 있습니다. 자포자기하고 자살함으로써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재를 망가뜨리고 던져버리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래서 자살은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죄악입니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범죄입니다. 자살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리 죽고 싶은 충동을 받아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더 이상 견딜 힘이 없어도 자살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주어진 소재 위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개별적으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 달란트는 다 다릅니다. 그 달란트를 유효적절하게 잘 사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달란트를 그대로 방치하면 녹슬고 말게 됩니다.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음악에 소질이 있는 사람도 가만히 있다가 나이가 60살이 넘어 비로소 시작해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가급적 젊은 나이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성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무한정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조금 성공했다고, 남들보다 나은 재능이 있어 인정을 받았다고 해서 교만에 빠지면 안 됩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또한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내려주셨는데 어찌하여 그것을 자신의 공으로 가로챕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악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권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서로서로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베드로전서 5:5~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교만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배은망덕한 행위입니다. 성직자가 평생을 다 바쳐 전도함으로써 커다란 교회를 세웠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더 똑똑하고 더 노력한 많은 성직자들이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고 개척도 되지 않고 사그러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가난하고 불쌍한 성직자에 비하여 커다란 교회를 짓고 수많은 신도들을 모아 훌륭한 사역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담임목사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어 성령을 베풀어주시고 그 성령의 힘으로 때와 장소를 잘 만나 부흥하게 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그 성직자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자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처럼 대접받으려고 하고 예수님처럼 존경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초호화생활을 하고 거기에 익숙해집니다. 말로는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자신은 고급 승용차에 고급주책에서 살면서 서울역 노숙자들에게는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릅니다. 이론과 실천이 구별됩니다. 교회에서의 설교와 밖에서의 생활이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죄악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 모두 회개해야 합니다. 그들을 불쌍한 연민의 정으로 이해하더라도 우리 자신은 그렇게 변질되지 않도록 각성해야 합니다. 물질만능풍조에 휩쓸려 살고 싶으면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 잘 먹고 잘 살면 됩니다.

타이거 우즈가 새로 구입한 저택은 3백억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초호화판입니다. 세계적인 재벌들의 집은 대개 그런 식입니다.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성직자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돈을 많이 벌어도 검소하게 살아야 할 종교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온갖 은혜가 넘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하므로 여러분은 모든 일에 언제나 쓸 것을 넉넉하게 가지게 되어서 온갖 선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뿌려 주셨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한 것과 같습니다”(고린도후서 9:8~9)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좋은 일을 하려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수녀 테레사는 그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명성을 얻어도 호화주택에 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낮은 자리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살다 갔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쫓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디모데전서 6:8~10)”

우리 인생이 세속적인 성공에서 얻는 부와 명성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좋은 음식이 아니어도, 좋은 저택이 아니어도, 우리는 순수한 영혼을 지키면서 살아가면 행복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자세를 평생 지켜야 나중에 최후의 심판의 날에 염소가 아닌 양으로 판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잠시 사는 동안 물질이 무어라고 그렇게 중요합니다. 먹고 자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다. 재산을 많이 가지고, 쌓아놓았다가 자식에게 물려준다고 무슨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까?

나중에 재산상속문제로 분쟁이나 하게 됩니다. 쉽게 받은 재산은 쉽게 날라갑니다. 사기나 당하고 흥청망청 쓰고 맙니다. 우리는 항상 인생을 마쳤을 때 어떤 판단을 받느냐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보아라, 주님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나니, 이것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지른 온갖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슬러서 말한 모든 거친 말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단죄하시려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입으로 허풍을 떨다가도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남에게 아첨을 합니다.”(유다서 1:14~16).

우리는 오늘부터라도 다시 살아가는 방법을 되새겨보고 정리해야 합니다. 인생을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짧습니다. 짧은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결국 세속적인 도덕이나 철학, 사회현상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시키고, 왜곡해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다”(베드로전서 1:24~25).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절제가없으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을 부인할 것입니다”(디모데후서 3:1~5)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시작이며 끝이다. 생명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차지하려고, 그리고 성문으로 해서 도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겉옷을 깨끗이 빠는 사람은 복이 있다”(요한계시록 22:12~14).

우리는 마지막에 잘 되어야 합니다. 인생의 끝에 훌륭한 사람으로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평생 고생을 하고 노력을 했다고 해도 나이 들어 말년에 잘못 생각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교만에 빠지면 망하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모두 회개하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신실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 예수님의 발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교만해져서 예수님의 발등을 밟으면 안 됩니다. 옷자락이 아닌 예수님의 목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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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사랑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빛과 어두움으로 나누셨습니다.  처음에는 빛을 창조하신 다음, 빛에서 어두움을 떼어내셨습니다. 빛은 낮이라고 하고, 어두움은 밤이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빛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움이 항상 뒤따라 있게 됩니다. 아침이 지나면 저녁이 오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계속해서 존재합니다. 어두움은 현실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요?


어두움은 마귀와 사탄, 시기와 질투, 좌절과 절망으로 나타납니다. 각종 범죄와 거짓말, 속임수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어두움과 어둠의 세력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둠의 세력에 몸과 마음을 빼앗겨 생명과 신체가 위험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생명을 잃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은 겉으로 보면 평탄하고 안전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동물과 마찬가지로 조금만 위험한 길로 들어서면 목숨을 잃게 됩니다. 겨울에 눈이 쌓인 등산을 갔다가 자칫 잘못하면 눈 속에 빠져 생명을 잃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공장에서 화재가 나 많은 사람이 사망하기도 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고의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길에서 택시로 부녀자를 납치하여 강간하고 물건을 빼앗은 다음 살해하여 강에 던져버립니다. 보험금을 타기 위하여 거액의 보험에 가입한 다음 부모를 살해합니다. 애인이 변심했다고 공기총으로 쏴 죽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현실입니까? 그뿐 아닙니다. 평생 모은 돈을 가까운 친척에게 맡겼다가 사기를 당해 거지가 됩니다. 진실한 사랑인 줄 알고 몸을 섞었는데 알고 보니 꽃뱀과 제비족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온갖 헌신을 다했는데 배우자는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면서 배신을 합니다.


집을 팔아 아들을 대학을 보냈더니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한 다음 부모를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뼈가 빠지라 고생을 해서 회사를 키워놓았더니 사장이 갑자기 필요 없다고 해고를 시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사회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사람들은 애써 이런 불행한 일, 나쁜 일, 억울한 일에 대해 외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별로 해당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들은 정말 재수 없는 사람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태평하게 살아갑니다. 그냥 신문이나 TV에서 보고 가십거리로 생각합니다. 오늘의 날씨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갑자기 암에 걸릴 수 있듯이 이런 사회적 암현상은 우리에게 언제나 닥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가 암을 사전에 예방하려고 노력하듯이 세상의 악한 일, 잘못된 일에 대해 사전에 그 실상을 알고 대비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예상치 못한 불행한 일을 당해 고통 받고 신음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근본적으로 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평생 나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욕심만 채우고, 동물적인 자세로 살아갑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며 남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전혀 없습니다. 세상을 비뚤게 보며 살아갑니다.


의리도 없고 신의로 없습니다. 남을 이용하고 그때그때 배신을 하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습니다.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시편 11:2)"


하나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어 놓은 것처럼 자연발생적으로 악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며, 그들은 환경에 따라 더욱 번창하고 활동의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도 안중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도 부정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충고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가도 여전히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하지 않습니다. 사형제도가 폐지되거나 사형집행을 하지 않는 법현실은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여건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신한 이후 인간은 타락했습니다. 가인은 마침내 아벨을 살인하기까지 합니다. 그 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각종 음란을 마음껏 하고, 도둑질, 거짓말, 불효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시편 12:2)"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좋을지 모르는 혼돈 속에 빠져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좋은 지능을 가졌다는 이유로 동물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인식하에 하나님께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바벨탑을 쌓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버리고 교만한 마음으로 가득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같은 인간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학대했습니다.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못하거나 약하면 짓밟기 시작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편 14:1)"


이러한 인간의 현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실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그때그때 징계를 내리기도 하고, 인간을 벌하기도 했습니다. 아담과 이브를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하고, 바벨탑을 무너뜨려 의사소통이 되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세상 마귀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범죄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데살로니가후서 3:1~3)" 


우리는 세상의 악에서 우리 스스로 벗어나야 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악에서 우리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악을 판별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잘 보아야 합니다. 사람을 잘못 본 죄는 무섭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합니다.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오직 한 사람을 잘못 본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잘못된 일이고,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사람을 정확하게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판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래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던 선악과의 비밀이었습니다. 선악과는 그래서 에덴의 동산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실과는 인간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만은 절대로 인간이 먹어서는 안 되는 실과였습니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이 가질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선과 악은 하나님께서 직접 구별하시기로 했던 것이며. 인간은 오직 하나님이 정해 놓은 대로 선만을 행하고 악은 알 필요도 없고 악을 행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고 제멋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의 구별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선과 악의 구별이 명백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그때그때 인간의 필요와 이해관계에 의해 정해질 수 있다는 불합리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과 도덕의 실종, 윤리의식의 마비를 초래하게 됩니다. 오늘날 인간은 그래서 나쁜 일, 악한 일을 하면서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자의적인 기준으로 자신이 하는 것은 이런 저런 이유로 합리화될 수 있고 스스로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범죄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고 변명을 하려고 애씁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자신은 그것을 필요한 악이라고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이 한 약속을 상황이 달라지면 거침없이 바꾸어 버립니다. 선거공약은 무용지물이 되고,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은퇴선언은 아무 의미도 없어집니다. 고위 공직자들이 검찰에 출석할 때에는 결백을 주장하다가 48시간 조사를 받고 나오면 뇌물 받은 사실을 인정하고 고개를 떨굽니다. 부부간에도 애정의 신뢰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기사건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고 남이야 죽든 말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입니다. 재벌들은 한 푼이라도 더 자식들에게 상속을 해서 영원히 이 땅에서 잘 먹고 편하게 살도록 해주기 위해 편법증여를 하고, 기업체의 CEO들은 분식회계를 하고 회사 자금을 개인적으로 빼돌려 놓음으로써 회사는 망해도 자신의 가족들은 평생 잘 살게 만듭니다. 그 대신 공적자금은 맥없이 날라 가고 평생 고생한 직원이나 근로자들은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땅투기 주식투기나 일삼으면서 더 큰 복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렇게 쉽게 번 돈은 결국 그 땅을 팔아 손해를 보거나 주식시장에서 깡통을 찬 사람들의 돈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사악하고 나쁜 사람들을 만나면 불행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사람들을 피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부터는 정말 누가 나쁜 사람인지 눈을 똑바로 뜨고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야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죽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을 피할 수 있도록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건져 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시편 7:1~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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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마음

 

가을사랑

 

 

사람의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육체와는 전혀 다릅니다.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은 현재 어떤 상태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몸은 건강한지, 튼튼한지, 힘이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 병원에 가면 청진기를 대고, 혈액검사도 하고, 심장검사도 합니다.

 

X-Ray를 찍어보기도 하고, MRI 촬영도 해봅니다. 조직검사도 해봅니다. 그러면 대개 결과가 나오고 육체의 질병도 확인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처방도 나옵니다. 수술을 하거나 암세포를 제거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 상태를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정신의학적으로 정신상태를 진단한다고 해도 정확한 진단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육체는 정신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는 정신의 노예입니다. 육체는 정신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육체를 끌고 다닙니다. 산으로 가고 싶으면 산으로 끌고가고, 바다로 가고 싶으면 바다로 끌고갑니다.

 

술집으로 끌고 가고, 도서관으로 끌고갑니다. 정치판으로 끌고가기도 하고, 노름판으로 끌고가기도 합니다. 창녀와 몸을 섞게도 만들고, 교회로 데리고 나가기도 합니다. 정신이 잘못하면 육체는 아주 추하게 되고 고생을 하게 됩니다. 정신이 육체를 잘못 콘트롤하면 육체는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해야 하고, 법을 위반하여 감옥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을 보면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그래서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말이 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든 일은 마음 씀씀이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크게 먹어야 합니다. 마음을 크게 먹고 담대하게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좁은 마음으로는 편협한 사고와 행동을 가져오게 되며 대인관계도 원만치 못하게 되고, 세상을 비뚤게 보게 됩니다. 매사에 불평이나 하고, 불만을 표출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조직에서 사회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성간에 연애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주관만 강해서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 됩니다. 항상 얼굴은 찌푸리고 있고, 인상을 쓰면서 다른 사람의 기분만 나쁘게 합니다.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하면 듣는 사람은 두번 다시 그 사람을 상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음의 크기는 본인이 결정합니다. 얼마나 스케일이 큰 사람인지는 육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체구는 작아도 마음이 큰 사람이 있고, 체격은 큰데 마음은 밴댕이 속처럼 좁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급적 마음의 크기를 넓히시기 바랍니다.

 

아파트 평수는 몇십평이 되도록 해놓고 마음 평수는 한평도 못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동차는 배기량이 큰데 가슴의 배기량은 100CC도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이아반지는 몇 캐롯이나 되는데 가슴 속에는 동반지 하나가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좁으면 불쌍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넓게 하고 가슴을 활짝 열고 살아가는 것이 어떨까요?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린도전서 6:11~13)."

 

바울의 권면처럼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마음을 넓힌다는 것은, 우선 가슴 속에 이해심을 가득 채운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마음이 넓어집니다. 주변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기심에 가득 차있고,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욕망과 정욕은 넘쳐나는데, 그것을 붙잡고 이루고 해소시킬 실력이 없는 것입니다. 설사 능력이 있어 그것을 모두 다 채운다고 해도 남는 것은 허망함과 추악함, 야비함, 저속함 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젊었을 때 잘 나가고 돈을 많이 벌고, 잘 놀았다고 해도 얼굴에는 기름때만 흐르고 지극히 이기적으로 살다가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몇십억원의 유산을 남겨주면 자식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부터 상속재산을 가지고 싸움을 하게 되고 서로 원수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이 못마땅해서 죽기 전에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시키면 그 재산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다 횡령을 하고 없애 버립니다.

 

좋은 곳에 쓰라고 한 유언의 취지는 얼마 안가서 몰각되어 버리고 맙니다. 죽은 다음 묘비명을 그럴듯하게 써놓아봤자 시간이 가면 비석도 풍상에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불쌍하게 여기고 넓은 마음으로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적은 돈이라도 남에게 베풀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그때그때 블로그에 적어 놓으면 그 양은 엄청날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남의 잘못을 신랄하게 따지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아주 날카롭게 비판하는 비평가들을 보면 대체로 자신의 내면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생 남의 잘못만 찾고, 그에 대한 비판을 하는 기술이 탁월하게 향상되어 있는 사람은 옳은 사람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우리는 남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 하노라(고린도전서 2:7)"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선 2:10~11).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모르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야만 한다면, 그러한 삶은 동물과 다를 바 없고, 사단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하고 잘 났고 가진 것이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을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4~7)"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가슴 속에 품은 채 살아가십시요.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물질만능의 풍조 아래서 극심한 생존경쟁을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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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

 

가을사랑

 

 

사람으로 태어나 한 평생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냥 태어난 대로 살면 되지 또 무엇이 필요하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단순한 질문보다는 보다 합리적인 측면에서 올바른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그 무엇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육체를 받아가지고 태어난다. 한 평생 건강한 육체, 질병없는 육체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육체는 우리의 삶의 기본적인 도구이며 수단이다. 어쩌면 삶 자체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일 수도 있다.

 

육체가 병들거나 약해지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삶의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다.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건강이며 육체인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몸만 건강하고 힘이 넘친다고 해서 밀림 속의 타잔처럼 살아갈 수만은 없다.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육체만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불행하다. 육체는 그 효용에 있어 한계가 있고, 나이가 들면 어차피 병약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신적인 존재다. 정신이 중요하다. 정신이 병들면 육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정신병은 그래서 무섭다. 정신이 잘못되면 스스로 불속에도 뛰어 들어가게 된다. 육체의 병은 수술을 통해 고칠 수 있지만, 정신의 병은 현대의학에서도 아직은 불치의 병에 속한다.

 

동물은 정신병이 거의 없다. 광견병이 있지만, 매우 예외적인 경우이다. 대개의 동물들은 정신병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드물다. 사람만이 고등동물이며 만물이 영장이기 때문에 고도의 정신체계를 가지고 있고, 나름대로 정신을 집중하고 긴장하며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정신쳬계가 고장이 나거나 이상하게 될 소지가 많은 것이다. 건전한 정신, 건강한 정신은 삶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다.

 

여기에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본받은 영을 가지고 있다. 그 영은 인간의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영이 고장나면 영의 세계에서 추방되기 때문이다. 악에 빠지지 않고 사탄과 마귀가 지배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투쟁하면서 움직이고 있다. 영이 작동을 하지 않으면 그 인간은 죽은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은 절대로 소멸하지 않는다. 비록 육신이 죽어도 영은 살아서 움직인다. 그 영은 하나님의 통제를 받는다. 영의 세계는 인간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4차원적인 영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우매함을 드러낼 뿐이다.

 

어린 아이의 눈에는 단순한 일차원적인 세계밖에 보이지 않지만, 나이가 들면 적어도 3차원의 세계까지는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적으로 눈이 떠지면, 영안이 생기면 그 사람은 3차원을 넘어서 4차원의 세계까지 들어가 볼 수 있고, 예견할 수 있으며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종교란 이러한 4차원의 세계를 논하고 있는 곳이다. 육체적인 죽음을 넘어서 또 다른 무엇이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믿음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일반인들과 다른 선지자들이 이미 체험했고, 그 체험을 전해주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이다.

 

이와 같이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은 우리 삶의 근본을 형성하고 있는 3대 요소다. 문제는 이와 같은 fundermental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중요하다. 인간의 3대 구성요소로 형성된 구체적인 사람은 천차만별이다.

 

개별적으로 주어진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 영혼이 어떻게 움직이고 살아가며 무엇을 할 것인지는 전혀 그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 사람의 의지와 노력, 믿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달라진다. 영혼은 믿음과 소망, 사랑을 가지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그 영혼은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 영혼이 타락하지 않고, 영혼답게 사는 것이다. 그 결과는 나중에 절대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 기독교의 원리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공명정대하게 엄격한 심판을 하신다. 그 심판의 기준은 하나님의 법이다. 그 법이 유일하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상의 법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영적 세계에서 적용되는 법만이 유일한 기준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에 이르기 전까지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충분한 배려를 하신다. 그래서 영혼이 지켜야 할 법을 주셨다.

 

그것이 율법이다. 모세를 통해 인간이 지켜야 할,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고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십계명을 주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십계명을 시내산에서 돌판에 새겨진 명령으로 받았다. 그것을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이라면서 전해 주었다. 십계명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다. 우리는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 

 

그런 율법이 주어졌다고 해서 인간이 그 율법을 다 지킬 수는 없었다. 인간은 원죄를 타고 났을 뿐 아니라 어리석고 사악하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계속해서 죄를 짓고 타락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 예수를 이땅에 보내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주셨다. 예수님은 이땅에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태어났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셨다. 인간들은 그때 비로소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 수 있는지, 죄와 악의 근원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죄에서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 없이 인간의 죄를 대신 사함받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에 대한 대속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의 죄가 사망하는 시점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인해 인간은 더 이상 율법에 억매여 죄만 짓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생명의 법을 얻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고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 새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이런 믿음과 소망,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또 다른 요소들이 필요하다. 그것은 지혜와 열정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지혜가 없으면 안 된다. 지혜롭게 하나님의 소명을 다하는 열정이 없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혜를 가지고 개인에게 부여된 소명을 열심히 다하기를 바라고 계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지혜가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 지혜가 없으면 시간과 에너지만 낭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한다. 자신의 몸도 보호하지 못하고 가정도 유지하지 못한다. 지혜가 없으면 남자는 여자에게 이용당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이용당한다. 지혜가 없으면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친구 따라 강남이나 다닌다. 술이나 마시고, 게임이나 하고, 도박이나 한다. 하루 종일 인터넷에 매달려 아주 좁은 우물안 개구리가 된다. 섹스에 탐닉하고 운동은 하지 않아 병약해진다.

 

지혜가 없으면 어리석어 사기나 당한다. 힘들게 벌어서 한방에 날려 버린다. 주식에 날리고 다른 사람에게 돈을 꾸어주어 사기를 당한다. 부동산사기에 휘말려들고, 다단계사기에 재산을 날린다. 사이비종교단체에 전 재산을 헌금하고 가족들은 생고생을 시킨다. 지혜가 없는 사람들은 주로 구치소에 가 있거나 병원에 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으면 술에 취해 술집에 있거나 대낮에 모텔에 들어가 음란한 짓이나 한다.

 

사도 바울은 경고하고 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린도전서 15:32~34)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를 가져야 한다. 그 지혜는 그런데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머리를 굴린다고 해서 지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쁜 지혜는 없는 것만도 못하다. 지혜는 올바는 지혜, 선한 지혜여야 한다. 그러한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으로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지혜는 대개 일을 그르치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에게 화를 가져온다. 자신은 약다고 행동하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사기를 치는 것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탈세를 하는 것이고 부정부패에 해당한다. 간통에 해당하고 사기에 해당한다.

 

먼저 하나님께 그 나라와 의를 구한 다음 지혜를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린도전서 14:20)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야고보는 지혜에 대해 설명한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야고보서 3:13~18).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지혜에는 위로부터 나오는 지혜가 있고 아래로부터 나오는 지혜가 있다. 아래로부터 나오는 지혜는 세상적이며 정욕적이고 마귀적이다. 그런 지혜는 인간의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지혜, 잔머리쓰는 것을 말한다. 시기라 함은, '타인의 우위, 성공, 재산 등과 관련된 불만이나 탐심의 감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런 얕은 지혜는 더욱 악한 일만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부터 나오는 지혜, 즉 하나님께로부터 얻는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경건한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우리는 하나님께 보다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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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양면

 

가을사랑

 

 

요셉은 형들의 악한 생각으로 어린 나이에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요셉으로서는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닥친 기막힌 시련을 요셉은 참고 견뎌냈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에게 그런 시련이 없었거나, 그런 시련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요셉은 다른 형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시골 양치기로 살았을 것입니다. 

 

우스 땅에 살던 욥도 많은 재산을 가지고 가족들과 평안하게 살다가 갑자기 엄청난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가족을 잃고 재산은 날라가고 몸은 중한 병에 걸려 신음하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저주를 견디지 못하고 그 시련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러한 시련을 잘 참고 견디어 나중에는 더 커다란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개인적인 시련을 극복한 성공사례는 역사상 많이 나타납니다. 신앙적인 관점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어려운 역경을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해서 성공하고 위대한 인물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인생에 닥쳐오는 시련과 고통!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해 나가야 할까요?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가시를 안고 살며 숱한 가시에 찔려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됩니다. 스스로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는 연습을 할 필요도 있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방에서만 생활하고 있으면 점차 나약해져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리는 연약한 존재가 됩니다.

 

그런 사람은 육체도 병약해지고, 정신도 나약해져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젊없을 때 고생은 일부러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고생을 한 사람은 평생동안 그때 쌓은 저력을 가지고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잣집에서 고생을 하지 않고 자란 사람은 나중에 약간만 고통스러워도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인생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고, 불행이 있습니다. 평안함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양면에 대해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은 위험합니다.

 

먼저 우리는 밝은 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야 합니다. 맑은 날씨에는 그 날씨에 할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데 구름이 끼고 폭우가 쏟아질 것을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은 보기에 따라 좋은 점, 밝은 점, 행복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나쁜 점, 어두운 점, 불행한 점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망원경이나 현미경처럼 크게 보느냐, 작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필요 이상으로 너무 어두운 측면만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하루도 밝게 살지 못합니다. 사회에 적응도 하지 못합니다. 지나치게 엄격한 법과 제도에 얽매여 웃음도 잃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을 모두 부족한 사람, 죄를 짓고 사는 죄인으로 바라보고, 무시합니다. 더럽다고 상대하지 않고 혼자서 고결한 척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본질을 무시하고,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은 혼자서 살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계처럼 일만 하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적절한 긴장의 이완과 휴식도 필요하고, 지나친 경쟁속에서 장기간 생활하다 보면 인간성을 상실하고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권태에 빠지거나 삶에 회의를 느끼면 불행해집니다. 우리는 주어진 삶의 환경 가운데 인간적인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긍정적인 인생관을 지녀야 합니다. 현재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이런 일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습니다.

 

이론은 간단하지만, 행동은 복잡합니다. 작심삼일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말과 행동이 달라 위선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정직하게 살기도 힘이 듭니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한다는 것도 말이 쉽지 그런 노력을 꾸준히 하기도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비슷합니다.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각자가 장점이 있는 면이 있고, 약점이 있는 면이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인간미가 부족하고 건강이 좋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성격이 독선적이고 비뚤어졌을 경우도 많습니다.

 

지적 능력은 약간 부족하지만 정적인 면이 강하고 성실하고 밝은 성격을 가진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현재 상황을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고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발전을 생각해야 합니다.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멘토로 삼아야 합니다. 어려운 역경을 헤쳐나간 위인들을 바라보면서 자신도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닥쳐오는 시련은 살아있기 때문에 맞게 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게 합니다.

 

시련은 우리를 진주로 만드는 모래입니다. 거친 모래는 값진 진주를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저주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징계하시더라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만 주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자신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13)'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시련은 우리에게 닥치지 않는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과 자녀에 대한 징계는 사랑의 매이기 때문에 결코 자녀를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징계를 잘 받고 넘어가면 더욱 칭찬을 받고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련을 당하지 않도록 처음부터 더 잘해야 하고, 만일 시련을 당하면 그때는 또 시련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시련을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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